소설리스트

눈새-15화 (15/62)

좋은 밤 되세요.

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4-3.                         관련자료:없음  [52818]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4-12 00:46  조회:10968

눈물을 마시는 새.

4. 철혈(鐵血) - 3

고통과 피로감에 고개를 떨구고 있던 사모  페이는 성문이 열리는 소리

를 듣지 못했다. 하지만 대호는 그 소리를 들었다. 대호는 극히 낮은 소

리로 울었고 그 아가리에 끼여있던 위엄왕은 팔다리를 경련했다. 대호의

몸이 진동하는 것을 느낀 사모는 고개를 들었다.

자보로의 성문이 열렸다. 사모는  억지로 눈의 초점을  맞추려 애썼다.

하지만 희끄무레한 인간 같은 것이 보일  뿐이었다. 사모는 륜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조금 전 서로 대화했을  때도 사모는 사실 륜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륜의 니름만을 들을 수 있었을 뿐이다.

사모는 륜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았다.

그 때 성문이 다시 닫혔다. 그리고 기이하게  생긴 인간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사모는 그 인간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눈앞이  흐렸고, 사모는

고통 때문에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구토를 간신히 억누른 사모는 힘겹

게 눈을 떴다.

그리고 사모는 그것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것은 륜이었다.

'어째서 뜨거운 거지?'

륜의 몸은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뜨거웠다. 어리둥절해하던 사모는

곧 도깨비를 떠올렸다. 사모는 감탄했다.

'륜의 몸에 도깨비불을 붙여주었군. 그래서 조금 전엔 보지 못했어.'

사모는 륜이 움직이는 것을 보며 그 불이 지나치게 뜨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륜이 추위 속에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하

며 사모는 성루 위쪽을 바라보았다. 케이건과 티나한이 그녀를 내려다보

고 있었다. 그리고 비형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키타타를 흘끔흘끔 돌아보

았다. 키타타는 여전히 하크렌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었다. 사모는 그

광경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천천히 걸어온 륜은 20 미터 쯤 되는 거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내려왔습니다. 사모.]

[그래.]

사모는 대호의 등에서 내려오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사모는 대호의 등에서 미끄러져 땅에 곤두박질쳤다.  륜은 깜짝 놀라 걸

어오려 했지만 대호가 귀를 뒤로 눕히며  륜을 경계했다. 그러자 대호의

입에 물려있던 위엄왕이 볼썽사납게 버둥거렸다.  륜은 제자리에 멈춰서

서 닐렀다.

[사모! 괜찮으세요?]

사모는 한 손으로는 쉬크톨을 땅에 짚고 다른 손으론 대호의 털을 움켜

쥐며 힘겹게 일어났다. 대호의 옆구리에 기대어  선 사모는 쉬크톨을 들

어 옆으로 몇 번 뿌렸다. 팔이 제대로  움직이는지 확인하는 것 같은 몸

짓이었다. 그렇게 쉬크톨을 몇 번 휘두른 사모는 심호흡을 한 다음 똑바

로 섰다.

[사이커를 뽑아, 륜.]

[사모. 저는 화리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누님도 제 결백을 아신다고

하셨잖아요.]

[증거가 없어.]

[증거 따위 무슨 필요가 있어요! 지금 여기 있는 건 누님과 접니다. 다

른 사람을 만족시킬 증거 따위는 필요없어요.  그 자들은, 그 자들은 사

랑하는 사람의 가슴에 칼을 겨누지 않아요.  지금 그러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라고요! 우리가 왜 아무 상관 없는  그 자들을 만족시켜야줘야 하지

요?]

사모는 다시 비틀거렸다. 아무래도 왼쪽 다리뼈가 부러진 것 같다고 생

각하며 사모는 오른발에 체중을  실었다. 그 때문에 앞으로  뛸 수 없었

다. 사모는 쉬크톨을 들어 륜의 허리를 가리켰다.

[륜. 사이커를 뽑아.]

[사모!]

사모는 노여워하며 닐렀다.

[도대체 여기서 뭘 하겠다는 거냐! 이 끔찍한  땅, 뼈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와 왕이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정신나간 인간들만이 가득한 이

비늘 서는 땅에서!]

[저는 화리트의 유지를 따라야 합니다. 이곳에서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도대체 뭔데!]

[저도 모릅니다. 화리트는 나가의 적이  심장탑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

리고 인간들과 힘을 합쳐 나가의 적을 물리쳐야 된다고 했습니다.]

사모는 통증 때문에 날카로와진 정신으로 사납게 닐렀다.

[나가의 적? 심장탑에는 나가들의 심장과 수호자들밖에 없어!]

[그렇다면 수호자들이 나가의 적인가 보지요.]

사모는 이제 기가 막혔다.

[뭐야? 수호자가? 여신의 신랑들이  말이냐? 그걸 니름이라고  하는 거

냐?]

[니르신 대로 심장탑에는 심장들과 수호자들  밖에 없으니까요. 화리트

는 분명히 나가의 적이  심장탑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수호자들이

바로 나가의 적이겠지요.]

[너 지금 모든 나가들을 위해 봉사하시는 그 선량한 분들을…]

[여자들 세상에 태어나 아무 것도 될 수 없는 남자라서 탑에 들어간 자

들입니다! 나가들의 사회를 가장 증오하는 사람을 찾아보라면 나가 도시

어느 곳에 있어도 곧장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가장 높은 건물, 어디에

있더라도 눈에 들어오는 건물로 걸어가면 되니까!]

사모는 중심을 잃고 대호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륜은 이제 열변을 토하

고 있었다.

[물론 그 분들 중엔 정말로 여신의 신랑이 되고 싶어서, 모든 나가들을

위해 봉사하고 싶어서 수호자가 되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나가

들을 증오하고 불만과 증오로  자신을 괴롭히는 자들  또한 분명히 그들

속에 있을 겁니다! 화리트를  벌레처럼 죽인 비아스  마케로우를 생각해

보세요! 벌레나 동물만도 못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여자들의 눈길에 지쳐

증오밖에 남지 않은 자들이  거기 있을 겁니다! 그  자들이 나가의 적일

겁니다. 우리의 적이라고요!]

[륜. 도무지 니름이 안 되는…]

[그 적들이 아버지를 죽였어요!]

사모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륜을  바라보았다. 당황이 순식간에 사라

졌다. 사모는 동생이 미신에 사로잡혀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요스비를 말하는 거야? 요스비는 병으로 죽었어.]

[심장을 적출한 나가가 병으로 죽는다고요?  가만히 앉아있다가 갑자기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죽는 병이라고요? 니름도 안돼요!]

[이상한… 그래. 이상한 전염병이었어. 그래서 그 자의 물건을 모두 태

웠잖아.]

[누님도 그 니름은 믿지 않았잖아요!]

[뭐?]

[누님도 전염병이라는 니름을 믿지 않으신 거잖아요! 그래서 이 사이커

를 남겨둔 것 아닙니까!]

륜은 사이커를 뽑아들어 그 칼뿌리를 가리켰다. 그 순간 사모는 결연하

게 대화를 중단시켰다. 대호의 허리를 밀어붙이며 앞으로 뛴 것이다.

비틀거리며 달려오는 사모와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쉬크톨을  본 륜은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그렇잖아도 흔들리던  사모의 첫 번째 일격

은 땅을 때리고 말았다. 륜은 사이커를 앞으로 내밀며 닐렀다.

[사모! 멈춰요!]

하지만 사모는 다시 몸을 던지며 쉬크톨을 내찔렀다. 륜은 또다시 피했

고 사모는 가슴부터 땅에 떨어졌다.

"쳐!"

티나한의 외침에 륜은 성루를 돌아보았다.  티나한은 칼싸움 중에 멍청

하게 뒤를 돌아본다고 고래고래 욕설을 내뱉었다.  륜은 다시 고개를 돌

렸다. 사모는 왼쪽 팔꿈치로 땅을 괸  채 륜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일어

날 수 없는 듯했다.

륜은 손을 내밀었다.

티나한이 다시 무지스러운 욕을  퍼부었다. "미친 자식, 뭐  하는 짓이

야!" 티나한은 그대로 철창을 쥐고 성벽  아래로 뛰어내릴 기세였다. 케

이건은 재빨리 티나한의 팔을 잡으며 키타타 자보로를 가리켰다. 티나한

은 키타타와 비형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폭풍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는 륜의 손을 바라보았지만 그것을  잡지는 않았다. 고통스러운 신

음을 토하면서도 사모는 기어코 자신의 발로  일어섰다. 몇 번 휘청거렸

지만 간신히 똑바로 선 사모는 쉬크톨을 다시 내밀었다. 그 칼끝은 폭풍

속의 갈대만큼이나 심하게 흔들렸다. 사이커를  마주 들었지만, 륜은 제

자리에 선 채 닐렀다.

[누님. 누님은 쉬셔야 해요.  몸이 나을 수 있도록  안정하셔야 된다고

요.]

[걱정마. 곧 쉴 수 있게 될 거야.]

[그런 몸으로는 안 됩니다.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저는  누님의 상대가

안 되겠지만. 제발, 누님. 만용을 부리지 마세요.]

애타게 니르던 륜은 사모의 얼굴에 번지는  희미한 미소에 의아함을 느

꼈다. 하지만 그 미소는  곧 사라졌다. 사모는  쉬크톨의 떨림을 줄이기

위해 두 손으로 칼을 움켜쥐었다.

[이건 쇼자인-테-쉬크톨이야. 멈출 수도,  잠시 쉴 수도,  돌아갈 수도

없어.]

륜은 니름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모는 신성한 사명을 수행하기는커

녕 걷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사모는 당장  누워서 쉬어야 할

환자였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것은 륜만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위엄왕 지그림 자보로는  끝없이 흘러내리는 뜨거운 침

과 지독한 노린내, 그리고 강철 같은 이빨들로 구성된 매우 협소한 세계

속에 감금되어 있었다. 공포는 시간 감각을  왜곡시켰을 뿐만 아니라 위

엄왕의 육체적 감각도 왜곡시켰다. 위엄왕은 자신의 목 아랫부분의 존재

가 어떤 몹쓸 거짓말처럼 여겨졌다. 위엄왕은  자신에게 정말 몸통이 있

는 건지, 그리고 팔이나 다리라고 하는 것이 있었던 건지 의심스러웠다.

그런 그에게 가공할 고발의 순간이 다가왔다.

위엄왕은 갑자기 익숙하지도 않은 사지를 가진  인물이 되어 지금껏 갇

혀 있던 세계로부터 추방되었다. 손을 들어  얼굴을 닦는 것이 자연스러

운 반응일 테지만, 위엄왕은 자신의 손이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위엄왕은 그 자리에  누운 채 멀어져가는  대호의 턱을 바라보았

다. 끔찍하게 큰 턱이었다.

위엄왕을 내뱉은 대호는 륜을 향해 포효했다.

대호의 포효에 륜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성루 위에서도 일대 소

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티나한은 벼슬을  빳빳하게 곤두세웠다. 륜이 위

험하다고 생각한 티나한은 주저없이 계명성을 내질렀다.

"닥쳐라, 이 고-양-아!"

대호는 대단히 비위가 상했다는  듯이 어깨를 낮추며  성루를 노려보았

다. 말을 알아들었을 리는 없지만 드높은  계명성은 대호를 노하게 하기

충분했다. 격분한 대호가 아직 위엄왕 위에 있는 것을 본 키타타는 티나

한에게 당장 하크렌의 경동맥을 끊겠노라고 악을 썼다. 하지만 티나한은

부리를 딱 부딪혔다.

"젠장, 저 과다발육한 고양이 새끼가 륜을 건드리기만 했단 봐라. 자보

로가 날아가든 말든 나는 뛰어내린다! 비형을 놔둔 채 케이건과 륜을 끼

고 도망치면 그만이야!"

키타타의 얼굴은 해쓱해졌다.  그리고 자칫하면 피를  뒤집어쓰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비형 또한 얼어붙었다.  티나한의 제안이 매력적이라는

듯이 턱을 만지작거리는 케이건의 모습은 그 두 사람을 - 그리고 하크렌

을 - 더욱 끔찍한 기분으로 몰아갔다.

다행히 대호는 륜을 향해 달려들지 않았다. 대호는  성큼 뛰어 사모 곁

에 내려섰다. 사모는 큼직한  대호의 머리가 다가오자  짜증스러워 하며

닐렀다.

[왜 이래, 대호? 저 인간을 물고 있으라고 했잖아.]

대호는 물러나지 않았다. 대신  머리를 옆으로 기울여 사모를  물려 했

다. 사모는 놀라서 옆으로 물러났고 륜  또한 정신적 비명을 질렀다. 대

호가 또다시 사모의 허리를 물려 했을 때 두 남매는 비로소 대호의 동작

이 사납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모는  다가오는 대호의 입을 밀어내

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대호, 나를  데려가려는 거야?  그러지 마.  이건 쇼자인-테-쉬크톨이

야."

대호는 물끄러미 사모를  내려다보았다. 니름이 아닌  육성이기에 듣긴

했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사모는 대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모는 대호의 갈기를 움켜쥐며 닐렀다.

[나는 괜찮아. 대호. 정말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누님을 데리고 가!"

대호는 고개를 휙 돌렸다. 륜은 대호를 향해 또다시 외쳤다.

"대호! 누님을 데리고 가!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누님을 쉬게 해줘. 제

발 부탁이야!"

그 뜻은 갸륵했지만 륜은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었다. 사모를 가리키며

륜이 내민 것은 사이커였다. 번득이는 칼날을 본 대호는 귀를 눕히며 낮

게 으르릉거렸다. 인간들도 듣기 힘든 그 낮은 으르릉거림을, 륜은 당연

히 듣지 못했다.

"저 얼간이 자식!"

티나한은 머리를 홰홰 내두르며 탄식했다. 케이건이 재빨리 말했다.

"티나한! 뛰어내리시오. 가서 륜을 구해요!"

티나한은 당황하여 케이건을 쳐다보았다. 그가 뛰어내리면 키타타는 하

크렌을 죽일 테고 끊어진 경동맥에서 솟구치는 피는 비형을 실성하게 만

들 것이다. 조금 전 홧김에 외치긴  했지만, 티나한은 실성한 비형이 자

보로를 불바다로 만들기 전에 도망칠 자신이  없었다. 그런 사정을 케이

건에게 설명하려던 티나한은 곧 숨이 멎을 것 같은 광경을 보게 되었다.

미끄러지듯 움직인 케이건이 비형의 등  뒤로 돌아갔다. 케이건은 비형

의 오금을 냅다 걷어찼고 비형은 깜짝 놀라며 무릎을 꿇었다. 그렇게 비

형의 머리 높이를 낮아지게 만든 케이건은 비형의 머리를 움켜쥐고는 그

목에 바라기를 가져갔다. 비형은  자신의 목을 누르는  쌍신검에 황당해

하며 말했다. "어, 케이건?" 하지만 케이건은 준절한 어조로 선언했다.

"대장군. 당신 부하를 죽이면, 나도 이 도깨비를 죽이겠소!"

성루 위로 또다시 괴괴한 고요가 흘렀다.

사람들은 이 상식을 벗어나는  광경에 이해력의 부족을  느끼며 헐떡였

다. 상황을 손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가

까스로 그 광경에 일말의 합리성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때 폭발적으

로 터져나온 비형의 웃음소리는 사람들의  현실감각을 다시 나락으로 떨

어뜨렸다.

"우하하하! 멋져요, 케이건! 들으셨죠, 대장군님? 저를 죽이겠대요! 난

처해지신 것 같네요?"

키타타는 난처해 하지는 않았다. 다만 쩍 벌린  입으로 침을 흘리며 세

계를 부정하는 표정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케이건은 다른 자들과 마찬가

지로 당황하고 있는 티나한에게 다시 외쳤다.

"티나한! 어서!"

티나한은 퍼뜩 정신을  차리곤 바닥에 꽂아두었던  철창을 뽑아들었다.

그러나 흉벽을 뛰어넘기 전 티나한은 절망감을  느꼈다. 대호는 이미 륜

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륜은 대호가 지척으로 다가올 때까지도 대호가  왜 그런 움직임을 보이

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모가 화급히 외칠 때에야  륜은 겨우 대호가

사이커에 노했음을 깨달았다.

"그만둬! 멈춰, 대호!"

대호는 사모의 외침을 무시한 채 달려들었다. 륜은 비명을 지르며 사이

커를 내뻗었지만 대호의 강력한 앞발이 그것을 옆으로 튕겨버렸다. 바위

라도 깨버릴 듯한 일격에 륜은 사이커를 놓쳤을 뿐만 아니라 제자리에서

빙글 돌기까지 했다. 저 멀리 날아간 사이커가  땅에 꽂혔을 때 륜도 땅

바닥에 주저앉았다. 륜은 온몸의  비늘을 곤두세운 채  밤하늘을 가리고

있는 대호를 올려다보았다. 대호는  동굴 같은 입을  열어보이며 포효했

다. 그리고 대호는 그대로 륜을 삼키려 했다. 륜은 두 팔로 얼굴을 가리

며 닐렀다.

[안돼!]

륜의 배낭이 폭발했다.

티나한은 흉벽에 한쪽 발을 얹은 모습 그대로 굳어버렸다. 비형과 케이

건은 티나한이 왜 뛰어내리지 않는 것인지 의아해했다.

"왜 그러는 거요, 티나한?"

티나한은 등을 보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케이건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키타타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비형은 도깨비였

고, 궁금한 것은 참지  않는다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있었다. 비형은

무릎 걸음으로 티나한에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케이건은 어쩔  수 없이

비형에게 끌려가듯 움직였다. 키타타와 하크렌은  꼼짝도 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비형과 케이건을 따라 함께 흉벽으로 움직였다.

티나한의 곁에 도달한 비형은 흉벽  사이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

곤 그대로 벌떡 일어섰다. 비형의 머리를 움켜쥐고 있던 케이건은 그 때

문에 뒤로 나가떨어질 뻔했다. 곤란하기  짝이 없는 인질이었다. 비형이

바라기에 상처를 입을까봐 황급히 검을  들어올린 케이건은 비형의 등을

향해 말했다.

"무슨 일이오?"

비형은 케이건의 바라기를 덥썩 움켜쥐었다.  그리곤 그것으로 자기 목

을 겨냥했다.

"제가 들고 있을 테니 나와서 보세요. 알아서  죽을게요. 저게 정말 제

가 생각하는 그걸까요?"

케이건은 길다란 한숨을  내쉬곤 키타타를 흘끔  바라보았다. 키타타는

이제 더 이상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개입하고 싶지도 않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케이건은 비형에게 바라기를 건네준  다음 그의 등 뒤에서

돌아나와 비형의 옆에 섰다.  그리고는 도대체 뭐냐는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다음 순간 케이건은 흉벽을 움켜쥐며 신음을 흘렸다.

"드라카!"

대호는 어깨를 잔뜩 낮춘  채 으르릉거렸다. 대호의 바로  앞에는 륜이

주저앉아 있었지만 대호가 경계하고  있는 것은 륜이  아니었다. 대호는

륜의 배낭을 찢으며 공중으로  뛰쳐나온 신화적 존재를  향해 털을 잔뜩

곤두세웠다.

그것은 륜의 머리 위 몇 미터 쯤 되는 곳에  뜬 채 대호를 바라보고 있

었다. 좌우로 펼친 두 날개는 날개  줄기에서부터 촘촘히 갈라져 함수초

를 연상시키는 모습이었고 미풍에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부릅뜬 두

눈에선 불꽃 같은 광채가 어렸고 그  아래에는 턱처럼 돌출한 부분이 있

긴 했지만 입은 없었다. 대신 턱 양쪽을 따라  긴 홈이 패어 있었다. 가

슴에 있는 두 앞발은  사납게 발톱을 곤두세우고  있었고 강인해 보이는

두 뒷다리 아래로는 넝쿨 같은 꼬리가  꿈틀거렸다. 꼬리 끝부분에는 섬

모 같은 털들이 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

어떤 날짐승과도 닮지 않은  날개와 어떤 길짐승과도 닮지  않은 머리,

그리고 어떤 물고기와도 닮지 않은 꼬리. 그것은 용이었다. 몸길이의 반

을 넘는 꼬리까지 치더라도 2 미터 남짓한 작은 모습이었지만 용은 압도

적인 위압감으로 그곳에 떠있었다.

"크르르르…"

대호는 목을 울리며  으르릉거렸다. 대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용은

천천히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 용의  몸 아랫부분에서는 꼬리가 기

묘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꼬리 끝의 섬모는 서로 비비적거리며 경련했

다. 대호는 어깨 털을 더 곤두세웠다. 튀어나온 대호의 발톱이 돌멩이들

과 부딪혀 불꽃을 튕겼다.

갑자기 용은 머리를 앞으로  내뻗었다.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었지만

륜과 사모, 그리고 케이건은 용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케이

건은 지식 덕분에, 그리고 륜과 사모는  눈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용은 그 얼굴 양쪽의 길다란 홈으로부터  차가운 기체를 내뿜었다. 대호

는 황급히 뒤로 뛰었고 다음 순간  진동하던 용의 꼬리가 불꽃을 튕기며

용의 얼굴 앞으로 솟아올랐다.

기체가 맹렬하게 발화했다.

륜은 얼굴을 감싸쥐며 몸을 옆으로 던졌다. 용의 불꽃은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뜨거웠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사모도 그 불을  똑바로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대호가  제때에 피한 덕에 용의  불꽃은 땅을 때렸

다. 하지만 그 불꽃은 끊어지지 않았다.  용은 허공을 미끄러지며 두 줄

기 불꽃으로 대호를 추적했다.

용의 불꽃이 땅을 훑어감에 따라 지면 위로 화염이 거칠게 범람했다.

대호는 노호하며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어지간한 나무라도 뛰어넘을

듯한 높이로 도약한 대호는 용을 향해  사납게 앞발을 휘둘렀다. 하지만

용은 날개 가닥들을 기묘하게  움직이며 대호의 공격을  피했다. 함수초

잎사귀 같은 용의 날개 가닥들은 모였다가  펼쳐지는 것, 그리고 뒤집히

는 것이 자유자재였고, 양쪽이 완전히  독립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계

속해서 날개의 형태가 변하는 것 같은  그런 효과 때문에 용은 새들조차

흉내내기 어려울 복잡무쌍한 비행을  하고 있었다. 바라보고  있던 성루

위의 사람들은 용의 비행을 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일어날 지경이었

다. 대호는 몇 번이나 거세게 도약했지만 그것은 바람을 잡으려 하는 것

만큼이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마침내 대호는 공격을 포기했다. 허공에  뛰어올랐다가 용의 불꽃에 갈

기를 꽤 태워먹은 다음에 내린 결단이었다.  날렵하게 이리저리 뛰며 용

의 불꽃을 피하던 대호는 넌더리를 내듯  크게 도약했다. 대호가 착지한

곳에는 사모가 서있었다. 대호는 사모를  냉큼 물어올렸다. 사모는 부정

의 니름들을 쏟아내었지만 대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모를 문 대호는

다시 도약했고, 다시 땅에  내려설 때 쯤에는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용은 더 이상 대호를 추적하지 않았다.

용이 토해내던 화염은 사라졌지만 땅에는 아직 불티들이 굴러다니고 있

었고 곳곳에서 잡초들이 불타고 있었다. 그 불타는 땅 위로 날개 가닥들

을 흔들며 용은 륜을 향해 날아왔다.

륜은 엉겁결에 오른팔을 내밀었고  그러자 용은 그 팔  위에 내려섰다.

뒷발이 팔을 붙잡자 넝쿨 같은 꼬리는 륜의 팔에 친밀감 있게 휘감겼다.

용은 날개를 접은 다음 고개를 갸웃하며 륜을 바라보았다. 륜은 벅찬 마

음으로 용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용에게서 부활한 사랑하는 친구의 이름

을.

"아스화리탈."

자보로 사람들이 위엄왕을 찾아내었을 때 위엄왕은  더 이상 그들이 알

고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  대호의 입 속에 갇혀  있으면서 겪어야 했던

공포 때문에 위엄왕은 완전히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제대로 걷지도 못

하고 묻는 말에 대답도 할 수 없는 조카를  보며 키타타는 목을 놓아 울

었다.

자보로 사람들이 그런 소동을  일으키는 동안 케이건은  일행을 데리고

조용히 그 자리를 빠져나와  사원으로 돌아왔다. 사원으로  돌아오는 동

안, 티나한은 궁금함을 참지 못해서 케이건에게 질문했다.

"정말 비형을 죽일 작정이었냐?"

륜은 놀란 표정으로 티나한을 돌아보았고 티나한은  조금 전 있었던 일

을 짧게 설명해주었다. 케이건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자보로 사람들이 다 죽는 것보다는 비형이 어르신이 되는 편이 낫소."

티나한과 륜은 그 말에  비형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케이건의 말이

실로 옳다는 듯이 연신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비형을 보고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사원의 객실로 돌아온 비형은 호기심에 계속 아스화리탈을 집적거렸다.

아스화리탈은 성가신 듯 비형의 손을 벗어나려 했지만 용의 무기인 불은

도깨비에겐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었다.  입이 있었다면 깨물기라도 했

겠지만 그럴 수 없었던 아스화리탈은 거칠게  날개를 펴 비형의 손을 뿌

리치곤 방 안을 정신 사납게 날아다녔다.  케이건이 비형에게 장난을 좀

중단하라고 말한 다음에야 아스화리탈은 륜의 어깨에 내려앉았고 객실에

는 다시 평화가 돌아왔다. 케이건은 륜의 어깨를 바라보며 말했다.

"언제부터 데리고 있었냐."

"당신들을 만나기 며칠 전에 용화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용근을 파내

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럭저럭 눈 뜰 때가 되긴 했군. 왜 파내었지?"

"놔두면 제 동족들의 손에 죽었을 테니까요."

"계속 네 배낭 속에 있었던 모양인데 어떻게 영양을 공급받았지?"

"소드락을 가루로 만들어서 뿌려두었습니다."

"그래서 너를 따르는 것이군. 용은  지혜롭지. 자기를 좋아하고 보살피

는 사람을 알지."

"그렇지요. 주위에 적대적인 것이 있으면 발아하지도 않지요."

"왜 누나를 죽이지 않았지?"

티나한은 끔찍한 소음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잠시 후에야 티

나한은 평화롭던 대화가 소름끼치는 방식으로 중단된 것 때문에 그런 느

낌을 받았던 것임을 깨달았다.  아스화리탈에게 장난을 치기  위해 륜의

등 뒤로 슬금슬금 다가가던 비형도 당혹하여  그 자리에 멈춰선 채 케이

건을 바라보았다. 륜은 눈을 불태우며 케이건을  쏘아볼 뿐 대답하지 않

았다.

용을 바라보던 케이건은 눈을 돌려 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럴 기회가 있었다. 륜."

"누님을 죽일 순 없어요."

"적출을 했더라도 죽일 수는 있어. 유벡스라는  사서가 죽었던 것을 생

각해봐."

"그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나는 누님을 죽이고 싶지 않아요!"

"그러면 누나가 너를 죽일 텐데."

"아직 그러진 못했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지 못할 테고."

"행운이 계속 따라줄 거라 믿는 건가."

"아니오. 제 의지를 믿는 겁니다. 누님을 죽이지도, 누님에게 죽임당하

지도 않겠다는 제 의지요!"

케이건은 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인샤 대사원까지는 너를 보호해주겠다."

"네?"

"그러기로 약속한 거니 그곳까지는  보호하겠다. 하지만 그  후엔 네게

의지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륜은 상처 입은 얼굴로 케이건을 바라보다가 사납게 외쳤다.

"그러시죠! 그 다음엔 누님 손에 죽든 말든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알겠다. 그럼 이만 잘까. 쓸데없는 소동으로 밤을 많이 소비했으니."

륜은 비늘을 부딪혀 불쾌한 소리를 내며 말했다.

"좋아요.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만 묻겠어요.  케이건 당신 혈관엔 도

대체 뭐가 흐르죠?"

"내 혈관?"

"네! 다시 없을 기회이니 피붙이를 죽이라고 말하는, 그리고 왜 죽이지

않았냐고 그렇게 담담하게 따질 수 있는  당신은 뭐죠? 자보로 사람들이

다 죽게 놔두는 것보다는 자기 손으로  동료를 죽이겠다고 말할 수 있는

당신은 도대체 뭐죠?"

비형이 당황하며 말했다.

"륜. 그건 케이건의 처신이 옳았어요. 게다가 전 육이 죽어도 어르신이

될 뿐이잖아요?"

"저는 옳고 그런 걸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제기랄, 언제나 맞는 말만

하고 옳은 행동만 하니까 그건 말할 필요도 없어요. 전 케이건의 혈관에

뭐가 흐르는지 알고 싶다는 거에요. 케이건. 당신은 철혈(鐵血)인가요?"

그리고 륜은 손을 뻗어 케이건을 가리키며 외쳤다.

"정말로 당신 같은 자를 위해 아버님께서 팔을 잘랐나요?"

케이건의 눈에서 짧게 불똥이 튀었다. 그리고 그것을 본 자는 아스화리

탈 뿐이었다. 륜의 어깨에 앉아있던 아스화리탈이 갑자기 날아오르자 다

른 세 사람은 당황하여 용의 모습을 뒤쫓았다. 용은 방 안을 한 바퀴 빙

글 돌고는 선반에 걸터앉았다.

"륜."

아스화리탈을 바라보던 륜은 움찔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케이건은

고개를 약간 기울인 채 그를 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과 그 비틀어진

각도가 서로 어울려 케이건의 얼굴을 무생물적인 것으로 바꿔놓았다. 륜

은 침을 삼켰다.

"너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나로선, 내 혈관에 뭐가 흐르는지 말해

줄 수 없다."

"무슨 말이죠?"

"그것을 말해주면 추악한 공포가 네 정신을 갈갈이 찢어놓을 테니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륜은 더 물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케이건

의 말이 완전한 진실임을 직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텐그라쥬의 야경을 바라보던 비아스 마케로우는 고개를 내려 손을 바

라보았다.

그녀의 손에는 얇은 나무판이 들려  있었다. 서판이라는 퍽이나 소박한

이름으로 불리는 이 나무판은, 그러나 나가에겐 최상급의 기록용 물건이

다. 굳이 나무판 뒤에 있는 제조자의 낙인을 보지 않더라도 이것이 가장

성대한 나무 장례식을 치른  다음 최고의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비아스는 서판을 생전  처음 받아 보았다.

그리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  사실은 분명 그녀를  긴장시키고 있었다.

어느 가문에서 보낸 건지 알 수 없는 그  서신을 받았을 때 비아스는 그

내용보다는 그것이 서판에 쓰여져 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결국 비아스는 여섯 번째로 서판을 들여다보았다.

'라디올 센의 이번 작품은 다행히도 비평가들의 악담을 면할 듯합니다.

가장 끈질긴 비평가라도 수마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는 풍문이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된다면 오늘 밤 센 저택을 방문하여 그녀의 작품을 감상

해주길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면 당신은 라디올 센의 감사를 받을 수 있

을 겁니다. 덧붙여 제 작은 호의도.'

서명은 없었다. 그 해괴한 내용에 덧붙여 서명까지 없다는 사실은 비아

스를 꽤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처음 얼마 동안 비아스는 그것이 카린돌의  또다른 장난일 거라 추측했

다. 하지만 세 번째 보았을 때 비아스는 그것이 카린돌의 필적이 아니라

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여섯 번째로 서판을 본 지금 비아스는 그것

이 절대로 카린돌의 소행이 아니라는 확신을  느꼈다. 카린돌은 보다 직

접적인 방식을 선호한다. 그리고 비아스는 자신을  희대의 극작가 겸 연

출가 겸 명배우라고 믿는  얼간이의 작품 발표회에  참석하는 것이 무슨

해가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만약  카린돌이 비아스를 반드시 센 저택

에 보내고 싶었다면 라디올 센의 이름  대신 최연장자인 수이신 센의 이

름을 거론했을 것이다.

결국 비아스는 부딪혀 보기로 결심했다.  심호흡을 한 비아스는 호위하

고 있던 남자들 중 하나에게 지시를 보냈다.  남자는 센 저택 안으로 들

어갔다.

잠시 후 라디올 센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정문으로 뛰쳐나왔다. 비아스

는 속으로 고소를 머금었다.  대가문의 일원으로서는 너무  체통이 없는

짓이었다.

[비아스! 맙소사, 비아스 마케로우! 제  작품을 보러 오셨다고요? 정말

기뻐요! 초청장도 보내드리지 못했는데. 아, 오셔서 기분 나쁘다는 니름

이 아니예요. 감히 당신처럼 저명하신 분께  보내드릴 엄두를 내지 못한

거예요!]

라디올이 니르기 시작한지 5분도 되지 않아서 비아스는 은편 두 닢짜리

서판에 굴복하고 만 것을 후회했다. 라디올은 비아스의 팔짱을 낀 채 센

저택 안을 종횡무진 걸어다녔고 그런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친근한 태도

에 비아스는 비늘이 설 지경이었다. 그들은  서로 분야가 다른 사람이었

다. 게다가 비아스가 자신의 분야에서 인정을  받는 전문가인데 반해 라

디올은 다른 예술가들도 동류로 생각하기  싫어하는 엉터리였다. 예술에

별 관심이 없는 비아스조차도 라디올 센이 센 가문의 일원이기에 지나치

게 적대적인 평가를 모면하는 수준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정작

본인인 라디올 센은 자신의 대한 세평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약술과 연극의 공통점(어처구니 없는  주제였다!)이라든가 예술가의 고

뇌(비아스는 라디올이 그런 것을 느낀다고 니르면  도깨비도 화를 낼 거

라 생각했다.) 따위에 대해 닐러대던 라디올은 30분 후에야 비아스를 놓

아주었다. 발표회 준비를 하러 가야한다는 라디올의 니름에 비아스는 속

으로 환호를 올렸다. 그리고 라디올이 떠난  다음에야 비아스는 겨우 자

신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 살펴볼 여유를 되찾았다.

비아스는 센 저택의 홀에 있었다. 거대한 기둥들이 늘어서 있었고 라디

올 센의 연극을 보러왔으리라 짐작되는 사람들은 몇 명씩 소모임을 이룬

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무심히 그 광경을 보던 비아스는 문득 사람들

이 반드시 기둥 주위에 모여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나무 아래에

모여있는 버섯 같은 모습이었다. 물론 오가는 사람들을 방해하지 않으려

면 그런 식으로 서는  것이 이상적이긴 했지만  비아스는 흥미를 느끼며

인간이나 레콘, 도깨비도 그런 식으로 모여설까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

았다.

그러나 비아스는 곧 기둥  근처가 아닌 곳에 서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그 남자의 경우 그것이 당연했다. 그는 양손에  춤채를 든 채 춤을 추고

있었다. 구경꾼들이 없다는 사실을 의아하게 여긴 비아스는 홀을 가로질

러 남자 가까운 곳의 '기둥 옆에' 멈춰섰다. 그리고 남자를 관찰했다.

곧 비아스는 왜 구경꾼이 없는지 알 수 있었다. 남자의 춤은, 끔찍하다

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일부러 멈춰서서 구경한 다음 예의상 물방울

을 던져주는 수고를 감수할 정도도 아니었다.  남자 또한 구경꾼을 바라

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남자는 자주 춤을  멈추고는 동작을 조금씩

바꿔보거나 같은 동작을 반복하곤 했다. 춤을 춘다기보다는 춤을 연습하

고 있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렇듯 많은 손님들이 있는 곳에서

춤 연습이라는 건 어울리지도 않는 노릇이다. 비아스는 불쾌감을 느꼈지

만 대화 상대를 발견하거나 한 것도  아니었기에 그냥 기둥 옆에 서있었

다.

남자의 춤채가 식었다. 남자는 한쪽에  놓여있던 화로에 그것을 꽂아두

고는 몸을 돌렸다. 그 때 비아스와  남자의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웃으

며 비아스에게 걸어왔다. 남자답지 못한 태도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비아

스에게 남자는 부드러운 니름을 보내었다.

[비아스 마케로우 님이시지요?]

[어떻게 나를 알지?]

[몇 번 먼발치에서 뵌 일이 있습니다. 심장탑에 오시곤 하셨을 때.]

[심장탑?]

[예. 저는 갈로텍이라고 합니다. 심장탑의 수호자입니다.]

비아스는 웃으려 했다. 하지만 곧 비아스는 의심에 찬 눈으로 갈로텍을

바라보았다. 갈로텍은 그런 비아스의 표정이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지었

다. 비아스는 자신없는 투로 닐렀다.

[정말 수호자이십니까?]

[거짓니름을 할 이유가 없지요. 그렇잖습니까?]

[수호자께서 왜 이런 곳에… 게다가 그 모습으로 춤이라니오?]

갈로텍은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수호자의 옷은 활동적인 일에는 어울리지 않지요. 춤을 춘다거나 하는

일처럼. 물론 도움이 될 때도 있죠. 예를 들어,]

[아니오. 제 니름은 그게 아니라…]

"누군가를 죽일 때 같은 경우가 그렇죠."

비아스의 비늘이 맹렬하게 부딪혔다.

갈로텍은 얼굴 가득한 미소를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차분하게 비아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동안 비아스는 육성을  듣지 못한 척할까 생각했

다. 하지만 그러기엔 충격을 너무 많이 드러내었다. 비아스는 딱딱한 니

름을 보내었다.

[재미있는 농담이군요. 수호자의 옷에 그런  장점이 있다니. 어떤 점에

서 그런지 닐러주시겠습니까?]

갈로텍은 니르지 않았다. 대신 말했다.

"보통 나가들은 수호자의 옷을 입은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을 수호자라고

생각하지요. 상대방이 사이커로 자기 등을 벨 때까지는 말입니다."

비아스는 정신적 비명을 지를  뻔했다. 갈로텍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 날 나를 본 걸까?' 비아스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수호자들은

모두 적출식 준비로 바빴다. 이를 악문  채 갈로텍을 바라보던 비아스는

마침내 입을 열어 말했다.

"있음직한 이야기군요. 마치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경우를 아시는 것 같

습니다만?"

"알고 있습니다."

"…수호자의 옷이 범죄 도구로 사용된 것에 애석해 하시겠군요?"

"아니오. 솔직히 말씀드려서 만족감과 고취감을 느꼈습니다."

비아스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필사적으로 언어를 고르며 비아

스는 혹 이 홀 안에 소리에 신경을 쓰는  괴벽을 가진 나가가 없는지 살

폈다. 갈로텍은 그런 비아스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자들은 지금 모욕이 되지 않으면서도 라디올 센의 불타는 예술혼을

단번에 꺼트릴 수 있는  적절한 니름을 궁리해내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물론 그 중 또 어떤 자들은 그 니름을  써먹을 다른 사람은 없을까 고민

하고 있겠지요. 어쨌든, 소리에 신경쓰는 자는 없습니다."

"누가 서판을 보냈는지 알만하군요. 만족감과  고취감을 느끼셨다는 말

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비아스는 갈로텍의 미소가 갑자기 차가워졌다고 생각했다. 갈로텍은 턱

을 만지작거리며 뭐라 말하려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갈로텍은 다시 입

을 닫았다. 그리고는 눈으로 홀 한쪽을 가리켰다. 비아스는 뒤를 돌아보

고는 이를 갈았다. 갈로텍이 닐렀다.

[라디올 센의 연극이 시작되는 모양이군요. 가보실까요? 그녀가 비평가

들을 몇 분만에 재울 수  있을지 정말 궁금하군요. 아,  못 다한 니름을

마저 나눌 기회가 있으면 좋겠군요. 내일  시간을 내어 심장탑을 방문해

주시겠습니까, 마케로우?]

예술에 큰 관심이 없는  비아스 마케로우는 다른  비평가들만큼 라디올

센을 혐오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  하텐그라쥬에서 비아스 마케로우

만큼이나 라디올 센을 증오하는 자를 찾기도  어려울 것이다. 자꾸만 곤

두서려는 비늘을 힘겹게 내리누르며 비아스는 갈로텍에게 닐렀다.

[꼭 찾아뵙겠습니다.]

륜은 페이 저택의 정원에 있었다.

륜은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륜은 자신의  주위에 다섯 사람이 있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화리트 마케로우는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손에 쥔 건 붓이었지만

글자가 쓰여지고 있는 것은 양피지가 아니었다.  비늘이 돋은 딱딱한 것

이었고, 그래서 화리트는 글을 쓰며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륜은 화리트

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려 사모 페이에게 질문했다. 저것이 뭐

냐고. 사모는 웃으며 닐렀다.

[물론 요스비의 가죽이지.]

륜은 정원 한쪽을 바라보았다. 요스비는 나무 기둥에 기대어 서있었다.

등의 가죽을 벗겨 화리트에게 주었기 때문에 요스비는 등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 난처한 자신의 처지를 알아달라는 듯 요스비는 장

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 순간 요스비의  왼팔이 아래로 뚝 떨어졌

다. 케이건이 그 팔을 잘라먹었기 때문에 요스비는 가짜 팔을 붙이고 있

었다. 팔이 떨어지자 요스비는 몹시 당황해 했고 륜은 그만 폭소를 터뜨

리고 말았다. 그러자 화리트가 화를 벌컥 내었다.

[제발 조용히 해! 쓰는 데 방해되잖아!]

륜은 화리트가 왜 웃음소리 같은 것에 신경쓰는 건지 알 수 있었다. 비

아스가 그를 죽인 이후로 화리트는 소리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다. 하

지만 어느새 화리트의 등  뒤로 다가간 비아스가  또다시 화리트를 베어

죽였다. 화리트는 언짢아하며 닐렀다.

[제기랄, 또야? 좀 쓸 수 있게 내버려줘!]

륜은 화리트가 도대체 뭘 쓰고 있는 건지  궁금해졌다. 륜은 그것을 누

구에게 물어봐야 할지 알고 있었다. 다섯 번째 나가에게 물어보면 된다.

하지만 다섯 번째는 신을 잃고 두억시니가  되어있었기에 물어볼 수 없

었다. 륜은 화리트를 쳐다보았고 화리트는 넌더리를 내며 용 아스화리탈

로 변신했다. 그리고 아스화리탈은 용의 불꽃으로  다섯 번째 나가의 두

억시니 껍질을 태웠다. 그러자 다섯 번째 나가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나가는…

"그 나가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륜은 눈을 떴다. 목소리에 눈을 떴다는 것이 그에겐 꽤 신기한 일로 여

겨졌다. 또한 깨어나지 않았다는  말에 깨어나는 경험  또한 인상적이었

다. 그러나 그 경험을 반추해볼 시간은  없었다. 륜은 자신이 꽤 괴상한

상황에 처해있음을 깨달았다.

륜은 굵은 쇠사슬에 의해 결박되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놀란 륜은 비늘을 부딪히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는 밝고 화려했다.

륜에겐 대가문의 홀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또다시 놀란

륜은 조금 후에야 비형과 티나한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

에 또다시 경악했다.

티나한과 비형은 등을 맞댄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들의 몸 또한

쇠사슬로 묶여 있었다. 등에  묶인 비형 때문에 똑바로  누울 수 없었던

티나한은 옆으로 누운 채 소름끼치는 악담을  퍼붓고 있었는데, 륜은 그

레콘이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결박을 풀고 행동으로 자신의 심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것이 훨씬 티나한다운 일이었다. 하지만 곧 또다른

목소리가 륜의 의문을 해소해주었다.

"조심하시오. 레콘. 당신은 물론 그 쇠사슬을  끊을 수 있겠지. 솔직히

레콘을 제압하려면 쇠사슬을 새로 만들어야 할  거요. 우리는 그럴 시간

이 없었소. 그래서, 우리는 당신이 힘을 잘못 사용했다가는 도깨비의 팔

을 찢게 되도록 묶어놓는 걸로 만족하기로  했소. 그리고 도깨비 당신도

마찬가지요. 함부로 불을 일으켜  쇠사슬을 녹이려들면 벼슬  달린 당신

동료를 태워먹고 말 거요."

티나한의 등 뒤에 묶여 있던 비형은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밧줄이 아니라 쇠사슬을 선택한 것이군요?"

"그렇소. 그걸 녹이려면 꽤 뜨거운 불을 만들어야겠지?"

티나한이 격노하여 외쳤다.

"팔 따위 타도 좋다! 비형! 이거 녹여, 당장! 가만두지 않겠어!"

"…팔이 타는 게 아니라 아예 녹을 텐데요?"

"뭐? 팔을 못 써? 그럼 밟아 죽이겠어!"

"…다리도 묶여 있는데요?"

"쪼아 죽인다!"

비형은 티나한의 투지에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움을 느꼈다. 팔다리

가 손상되는 것 쯤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저 투지 넘치는 전사 티나한이

라면 비형의 팔을 찢고서라도 결박에서  풀려나겠다는 식의 발상을 해낼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과연 티나한은 씩씩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의

견이 필요해, 비형. 명예가 중요할까, 팔이 중요할까? 아무래도 전자 쪽

이겠지?" 비형이 진땀을 흘리며  대답할 말을 생각하고  있을 때 또다른

목소리가 대화에 끼여들었다.

"다리는 괜찮으시오?"

륜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았다.  그들처럼 쇠사슬에 묶인 케이건이

기둥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리고 륜은  그 모습에 놀랐다. 묶여 있긴

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모습이던 다른  사람들에 비해 케이건의 모습은

흉측하기 짝이 없었다. 얼굴  곳곳이 부어있는데다 옷도  갈가리 찢어져

있었다. 륜은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사람이 저런 꼴로  바뀔 수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륜 일어났나. 그런데 다리는 괜찮으시오. 대장군?"

륜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천장이 높은 홀 같은 곳에 누워 있었

고 약간 떨어진 곳에는 한단 높은 층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 가운데 큼

직한 돌이 있었다. 돌의 모습은 특이했다. 그 뒤로 세공이 잘 된 등받이

같은 것이 만들어져 있었고 좌우에는 화려한  팔걸이도 있었다. 돌로 만

들어진 의자 같은 모습이었지만, 아름다운 등받이와 팔걸이에 비해 정작

돌 자체는 거칠고 투박했다.

돌 앞쪽, 단 아래에는 몇 명의 병사를  거느린 키타타 자보로가 서있었

다. 키타타는 케이건의 질문에 얼굴을 찡그렸다.

"사실 서있기도 힘드오. 당신  인간 맞소? 어떻게 물어뜯을  생각을 한

거요?"

비형은 헛바람을 삼키며 마침내 케이건이  식용대상 범위를 확대시켰나

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케이건의 대답은 그런 공포를 불식시켰다.

"다섯 사람이 내 팔다리를 움켜쥐고 있었소.  그리고 당신은 나를 걷어

차려 했고. 선택의 폭이 좁았다고 생각하오만."

비형은 안도했지만 륜은 더 참지 못하고 외쳤다.

"케케케케…!"

륜은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그제야 륜은 몸이 싸

늘하게 식어있음을 깨달았다. 비형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짓고는 륜의 몸

에 도깨비불을 씌웠다. 체온이 좀 올라가고 나서야 륜은 제대로 된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케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우리가  왜 이렇게 되어  있는 겁니

까?"

케이건은 날씨 이야기라도 하는 듯한 평온한 태도로 대답했다.

"잠든 사이에 저 자들이 사원에 침입해서 우리를 붙잡아왔다."

"그런데 당신은 왜 그 지경이 되어 있는 거죠?"

"그런 납치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온몸으로 보여준 결과지."

"어, 저, 당신이 그렇게 싸웠는데 왜 저는 이렇게 잡혀있는 거죠? 소리

는 듣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렇게 묶일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는

없는데요?"

비형과 티나한도 그 질문에 케이건을 보려 했고, 그 때문에 륜은 그 두

사람도 자신처럼 아무 것도 모른 채 잡혀온 것임을 깨달았다. 물론 비형

과 티나한은 서로 등을 맞대고 묶여 있는지라 서로 케이건 쪽을 보기 위

해 잠시 소동을 일으켰다. 케이건은 담담하게 설명했다.

"새벽녘에 저 자들이 객실에  불을 뺐다. 륜 너는  얼어붙었지. 그래서

깨닫지 못했어. 이곳에 햇빛이 잘 들어와서 이제야 정신을 차린 거지."

륜은 왜 몸이 얼어붙었는지 알게 되었다. 케이건은 계속 말했다.

"나는 왜 방이 차가운지 알아보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가 당했고, 티나

한 당신은 자다가 쇠망치로 머리를 맞았소."

"어? 그랬냐? 아까부터 뒤통수가 좀 뻐근하더라니.  난 이런 괴상한 자

세로 잠을 자서 그런 줄 알았어."

키타타와 병사들은 티나한의 말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비형이 조

바심을 내며 질문했다.

"저는요? 저는 왜 잠에서 깨지 못했죠? 마비약을 썼나요? 아니면 독침?

그렇잖으면 어딘가의 신비한 약초?"

"…당신은 그냥 자다가 묶인 거요."

"자다가요?"

"코끼리가 밟고 지나가도 모를  정도로 곤히 자더군.  아마 도깨비불을

끄고 자서 그럴 테지."

비형은 크게 기뻐했고 그런 비형의 태도는 키타타 대장군과 병사들에게

다시 곤혹스러운 불가사의를 선사했다. 케이건은 잠을  잘 자는 것이 훌

륭한 품성의 증거로 통하는 도깨비의 풍습에 대해 설명하는 대신 대장군

에게 질문했다.

"원하는 것이 뭔지 말해 보시오. 죽이지  않고 이렇게 공들여 붙잡았으

니 원하는 것이 있겠지. 대장군."

"처음부터 죽일 생각은 없었소. 우리는 그렇게 무도한 자는 아니오. 게

다가 도깨비도 있잖소. 저 도깨비는 죽여도  그 영이 즈믄누리로 돌아가

자신의 살해를 고발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 쯤은 알고 있소."

"쓸데없는 걱정을 하셨소. 대장군."

"뭐요?"

"쓸데없는 걱정이라 했소. 복수가 걱정되었던 거라면 그냥 죽였어도 상

관없소. 도깨비 군단에 의한  복수 따위는 없었을  테니까. 죽은 비형이

즈믄누리로 돌아가면 도깨비들은 그를 환영한 다음 어르신으로 대접해줄

거요. 비형도 복수 따위에 매달리는 대신  어르신이 되면 하려고 계획했

던 일에 착수했겠지."

"예. 저는 해몽서를 집필할 계획을  가지고 있어요. 어르신에게 어울리

는 일이잖아요?"

비형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티나한은 기막힌 듯이 비

명을 질렀다.

"야! 케이건! 그런 걸 가르쳐주면 어떻게 해!"

키타타 자보로도 어이없는 표정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케이

건은 침착하게 말했다.

"괜찮소. 티나한. 그렇더라도 우리를 죽이지는  못하니까. 대장군이 우

리에게 원하는 것이 뭔지  짐작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소. 아마 용일

테지."

륜은 비늘을 부딪히며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스화리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케이건은 계속 말했다.

"용의 분노를 사지 않으려면 우릴 쉽게 죽일 수는 없겠지."

대장군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뭐라 말하려  했을 때였다.

비형이 비명을 질렀다.

"나늬는 어쨌어요?"

"나늬? 미녀 나늬가 뭐 어쨌다는…"

"제 딱정벌레요! 제 딱정벌레 이름이 나늬에요. 나늬는 어쨌어요?"

키타타 대장군과 병사들은 언젠가 티나한과  케이건이 비형의 작명감각

에 대해 느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티나한은 낄낄거렸고 키타

타는 이마를 감싸쥐었다.

"인상적인 작명감각이군. 당신의 그 미녀라면  마굿간에 잘 있소. 병사

들이 나무와 꽃도 잔뜩 가져다줬고. 이제 내 이야기 좀…"

"잠깐, 내 철창! 이 자식들, 내 철창은 어떻게 했느냐!"

키타타는 기어코 분노의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불가항력이었을 것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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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질문이 있군요.

Q : 바라기의 길이는 120 센티미터. 인간에겐 크지만, 신장이 3 미터나

되는 레콘에겐 자기 신장의 1/3 크기의 검. 인간으로 치면 5, 60 센티미

터 정도의 짧은 검이 아닐까? 티나한의 7미터짜리 철창에 비해보면 아담

하다는 느낌이 든다.

A : 음. 자세히 보시면 아시겠지만, 길이가 아니라 칼날 길이만 120 센

티미터입니다. 그리고 칼자루는 30 센티미터입니다. 그러니 바라기의 길

이는 150 센티미터입니다.  레콘에겐 특별히 긴 칼이라 하긴 어렵습니다

만 짧은 칼도 아니죠. 그리고 영웅왕은 원래 칼 두 자루를 썼습니다. 칼

두 자루 쓰려면 너무 길어선 곤란하겠지요. 저 정도가 적당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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