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4. '철혈' 편 시작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4-2. 관련자료:없음 [52770]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4-11 00:44 조회:10453
눈물을 마시는 새.
4. 철혈(鐵血) - 2
자보로 씨족이 자신의 이름을 따서 자보로를 건설했는지, 아니면 자보
로의 이름을 따서 자보로 씨족의 이름을 정한 건지는 자보로 씨족 사람
들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자보로는 실로 고도(古都)지만 자보로 씨족
도 대단히 오래된 씨족이다. 그리고 같은 이름을 공유하는 도시와 씨족
은 역사 또한 공유한다. 유구한 역사 동안, 자보로를 다스리는 마립간은
항상 자보로 씨족에서 배출되었다. 그것은 너무 오래되어 아무도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게 되어버린 전통이다. 실제로 자보로
를 다스리는 사람은 자보로 씨족에서 나와야 한다는 규칙 같은 것은 어
디에도 없으며 그것을 인정했던 마립간 또한 없다. 그러나 마립간이 사
망하면, 장례식에 참석한 자보로 사람들은 마립간의 추억을 기리면서도
그 현실적 관심은 자연스럽게 자보로 씨족 회의 쪽으로 쏠렸다. 심지어
씨족 회의가 지연되면 사람들은 불안해 하며 자보로 씨족을 다그쳤다.
그리고 마침내 자보로 씨족이 그들의 수장을 선출하면 사람들은 당연하
다는 듯이 그를 자보로의 차기 마립간으로 옹위했다. 물론 이 유구한 전
통이 도전을 받았던 적이 한번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통에 반기
를 든 저항자는 자보로 씨족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씨족 안에서 반대를
발견하고는 그 저항 의지를 상실했다. 자보로 사람들은 그것이 너무 '점
잖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왕이 돌아온다면 모를까, 잘 해나가고 있는
사람들을 왜 귀찮게 하나?" 자보로 사람들의 이런 반응은 잠재적 저항자
로 하여금 야망을 포기하도록 만들었고 실재적 저항자로 하여금 수모와
분노 속에 자보로를 떠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세도 자보로가 사망하고 지그림 자보로가 자보로 씨족
의 새로운 수장으로 선출되었을 때 전통이 단절없이 이어지게 한 자보로
씨족에게 갈채를 보내었다. 그러나 지그림 자보로는 그를 수장으로 뽑아
준 씨족의 우두머리들과 그를 지그림 마립간이라 부를 준비를 갖추고 있
던 자보로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당황하게 만들었다. 지그림 자보로가 자
신을 위엄왕이라 칭하자 자보로 사람들은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을 느
꼈다.
씨족의 최연장자들과 자보로의 존경받는 유지들이 직접 방문하여 지그
림 자보로를 설득했지만 지그림 자보로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 시점에서 지그림 자보로와 자보로 사람들 사이에 정면 충돌이 일어나
지 않은 것은 자보로 사람들이 전통에 대해 가지고 있던 믿음 때문이었
다. 씨족의 원로들과 도시의 유지들은 결국엔 지그림 자보로가 수백년
동안 지켜져온 전통의 의미를 깨닫고 자신의 실수를 반성할 거라 확신했
다. 사람들의 그런 태도는 지그림 자보로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갈
기를 달고 몸을 검게 물들여도 고양이는 흑사자가 될 수 없단 말이냐!"
자보로 사람들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들은 침묵한 채, 마치 철부지 아들
이 세상 무서운 줄을 깨닫게 되길 기다리는 어버이처럼 지그림의 비위를
맞추며 잠자코 기다렸다.
따라서, 성벽 위에서 지그림 자보로의 큰아버지이자 대장군 - 위엄왕
이외에 다른 사람이 이렇게 부르면 미친 듯이 화를 내곤 했지만 - 인 키
타타 자보로가 빙긋 웃으며 말했을 때 그가 심술궂은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음은 모든 사람들의 눈에 분명했다.
"위엄왕 폐하. 폐하의 왕권에 대한 첫 번째 도전이군요. 저 가소로운
도전자를 손수 처리하시겠습니까?"
위엄왕은 어리석지는 않았다. 하지만 체면을 상하지 않으면서도 적절한
대답이 될 수 있는 말을 떠올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위엄왕은 아무 대
답도 하지 않은 채 성벽 아래를 오락가락하는 대호를 쏘아보았다. 키타
타 자보로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위엄왕의 반응보다는 대호에게 더 호
기심을 느꼈기에 역시 성벽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별비와 무라 마립간의 이야기를 듣고 자라난 그들에게 그들의 성벽 아
래에 도사리고 있는 대호의 모습은 각별했다. 그것은 철이 들면서 잊어
버린 어린 시절의 환상이 갑자기 현실이 되어 돌아온 광경이었다. 그 모
습만으로도 큰 충격을 받은 그들에게 검은 모피 망토로 몸을 감싼 채 대
호의 등에 올라타 있는 기수의 모습은 불가해하게까지 느껴졌다. 위엄왕
은 그 사람의 존재에서 겨우 적절한 대응을 떠올릴 수 있었다.
"대호만이라면 상관없지만 사람이 있으니, 일단 말부터 걸어봐야겠군."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잠시 야유와 조소를 유보했다. 위엄왕
은 목소리를 가다듬어 외쳤다.
"그대는 누구인가! 이 땅에 호의를 가지고 왔는가, 아니면 증오를 가지
고 왔는가? 그리고 어떤 자이기에 그 위험한 생물을 타고 있는 것이냐?"
검은 색 망토로 온 몸과 머리까지 감춘 기수가 고개를 조금 들었다.
"나는 사모 페이라고 한다. 이곳엔 호의도 증오도 없이 왔다. 내 요청
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에 따라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이 대호와 나의 관계는 내 요청과 별 상관이 없다."
사람들은 또다시 충격을 받았다. 위엄왕은 턱이 빠질 듯한 얼굴로 말했
다.
"놀라운 목소리군! 여자인가? 아니, 여자라도 저런 목소리는 못 낼 것
같은데?"
키타타 자보로 또한 조카의 말에 동감했다. 키타타는 왕에게 어떤 신령
한 존재일지도 모르니 말을 조심하라고 조언했다. 위엄왕은 그 말을 받
아들였다.
"마음을 열고 듣겠노니, 사모 페이. 어떤 요청인지 말해보라."
"너희들의 담장 너머에 나가가 한 명 있다. 그를 내게 보내기를 바란
다."
위엄왕은 당황하여 그의 대장군을 돌아보았다. 키타타는 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성문을 지키던 병사를 소환했다. 잠시 후 다거트 슈
라이트를 포함하여 많은 수의 병사들이 왕 앞에 달려와 부복했다. 키타
타가 빠르게 질문했다.
"너희들이 오늘 성문을 지키고 있었느냐? 나가가 이 땅에 들어왔다는
데, 사실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만일 그런 일이 있었다면 벌써 보고를 드렸을
겁니다. 각하."
"젠장. 너희들은 나가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잖아."
"예? 아, 하지만 어떤 사람이 나가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오
늘 성문을 통과한 사람은 모두 인간이나 도깨비, 레콘이었습니다. 나가
는 없었습니다."
위엄왕은 당황한 표정으로 키타타를 바라보았다. 키타타 또한 의아한
듯 바깥의 사모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키타타를 포함하여 그곳에 있던
사람들 모두는 그토록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한 자가 뭔가를 잘못 알고
그러는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병사들을 돌아보던 키타타는
그들 중 하나가 약간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키타타는 그
병사에게 성큼 다가서며 느닷없이 말했다.
"왕에게 허튼 소리를 고했다간 목숨을 간수하기 어렵다! 확실히 나가가
없었느냐?"
지적을 당한 병사는 다거트 슈라이트였다. 다거트는 기겁하며 말했다.
"저, 저, 사사, 사실은 정체가 확실치 않은 방문자가 한 명 있긴 했습
니다. 저 대호가 들이닥치기 직전에 남문으로 들어선 자들인데, 네 명이
었습니다. 인간과 레콘, 도깨비가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은 사막 사람들
이 입는 펑퍼짐한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체구는 보통 인간과 비
슷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키타타는 어이가 없었다.
"확인하지 않았다는 거냐?"
다거트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횡설수설 늘어놓았다. 키
타타는 그를 탓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키타타는 눈앞에 있는 젊은이들
이 콧물을 마시던 어린애였을 때부터 그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도
저히 절도있고 엄격한 병사라 부를 수 없는 청년들이었다. 지그림 자보
로가 왕이라는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것 만큼이나.
하지만 위엄왕은 부하 병사의 그런 방만한 태도에 격분했다. 위엄왕의
무시무시한 욕설에 다거트는 쩔쩔매며 말했다.
"하지만 나가일 리가 없잖습니까? 나가 잡는 건 도깨비라고 들었습니
다. 그런데 그 무리에는 도깨비가 있었어요. 게다가 나가는 우리 땅에서
는 얼어죽는다고 하잖아요? 하지만 그 자는 옷은 펑퍼짐한 것을 입었지
만 떨지는 않던데요?"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그럼 넌 도깨비를 잡으려고 이야깃꾼 세 명을
데려갈 테냐! 이 인두로 눈알을 지져버릴 놈 같으니!"
다거트는 대경실색하여 자신의 눈을 꽉 누른 채 엉덩방아를 찧었다.
"죄송해요, 지그림 아저씨!"
다거트의 결정적인 실언이었다. 도무지 위대한 왕과 그의 강대한 병사
간의 대화라고 보기 힘든 장면을 보며 얼굴을 씰룩거리던 사람들은 그
말에 그만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위엄왕은 미쳐 날뛰며 검을 뽑아 다
거트를 베어죽이려 들었다. 키타타 자보로가 황급히 왕을 만류했다.
"고정하십시오. 폐하. 아직 자신의 임무에 익숙치 않은 병사들입니다.
왕의 관용을 보이시는 것이 훨씬 위엄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왕의 위엄이라는 말에 위엄왕은 폭풍 같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검을 휘
두르진 않았다.
"무슨 말인가. 대장군?"
"한낱 미물에 불과할지라도 왕의 땅에 들어왔다면 왕의 보호를 받을 권
리가 있습니다."
위엄왕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백부를 바라보았다.
"나가를 보호하라고?"
"그게 아니라," 키타타는 '이 얼간아! 네가 왕이라고?'라는 말을 가까
스로 삼켰다. "보호하든 처벌하든 그건 왕의 권한이라는 말입니다. 저
자에게 왕의 땅에 들어온 자를 내놓으라 요청할 권한이 있는지 물어보십
시오."
흥분을 가라앉힌 위엄왕은 겨우 키타타의 말을 이해했다. 다거트를 한
번 사나운 눈길로 흘겨보고나서, 위엄왕은 다시 성벽 아래를 향해 말했
다.
"왕의 땅에 들어온 자에 대한 책임은 모두 짐에게 있다. 나가가 있는지
없는지는 아직 모르겠다만, 네가 어찌해서 그 나가를 내놓으라 하는가?"
사모는 조금 후에야 대답했다.
"또?"
"또라니? 뭐가 또라는 거냐?"
"또 왕이야? 이 땅엔 참새보다 왕이 더 많은 것 같군."
화를 낸 사람은 이번에도 위엄왕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웃음을 참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해야 했다. 위엄왕이 격분하여 고함을 지르기 직
전, 사모는 조금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
"그래도 너는 좀 그럴 듯하게 보이는군. 이렇게 커다란 담장을 가진 왕
은 아직 못봤어. 네 이름은 아마 담장왕이겠군."
"위엄왕이다!"
"위엄왕? 알겠어. 네가 조금 전 왕의 책임에 관한 말을 한 것 같은데,
솔직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군. 하지만 그 나가를 내놓으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는 보여줄 수 있어."
망토 속에서 사모의 두 팔이 나왔다. 어둠 속에 사람들은 비늘 덮인 그
팔을 보며 사모가 무슨 갑옷을 입고 있는 것인가 생각했다. 그러나 사모
가 두건을 들어올리자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 두건 뒤에서 비늘에 덮
인 얼굴이 드러났다. 한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그들은 그 얼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보시다시피 나 또한 나가다. 이건 나가끼리의 일이야. 불신자들은 상
관할 필요가 없다. 설명이 되었나."
사모의 이 점잖은 말은, 그러나 온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위엄왕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이 괴물!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온 거냐! 한계선을 넘다니, 죽으려고
작정했구나. 저 괴물과 대호를 쏴라!"
병사들 서넛이 쭈뼛거리며 활을 꺼냈다. 키타타가 당황하며 말했다.
"나가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저건 나가가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더 끔찍한 괴물이겠지! 당장 쏴라!"
사모는 어이없다는 듯이 성벽 위를 바라볼 뿐 아무런 대처도 취하지 않
았다. 위엄왕의 명령을 받은 병사들이 화살을 날렸다.
화살이 땅을 때리고 퉁겨 올렸지만 대호와 사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위엄왕은 병사들의 조악한 활솜씨에 분노하며 직접 활을 들어 화살을 먹
였다. 위엄왕이 쏜 화살은 사모를 향해 똑바로 날아들었다. 그러나 사모
의 망토 속에서 솟아오른 쉬크톨이 화살을 퉁겨 내었다. 위엄왕은 사나
운 욕설을 퍼부었지만 사모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볼 뿐 아무 대답도 하
지 않았다. 그녀는 다만 왼손을 내밀어 대호의 커다란 머리를 가볍게 짚
었다.
대호가 뒤로 돌아 어둠 속으로 달려갔다. 위엄왕은 다시 외쳤다.
"도망치게 내버려둘 수 없다! 성문을 열고 추격하라!"
"도망치는 것이 아닙니다. 폐하."
키타타의 말에 위엄왕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을 끔뻑거렸다. 그 때
위엄왕은 보았다. 어둠 속에서 시퍼런 불꽃 두 개가 성벽 위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 소름끼치는 광경에 질린 위엄왕은 잠시 후에야 대호가 다시
돌아섰음을 깨달았다.
대호는 달렸다.
위엄왕이나 키타타가 어떤 지시를 내리기도 전에 번개처럼 달려온 대호
는 성벽을 20 미터쯤 남겨둔 지점에서 땅을 박차며 도약했다. 상식이 통
하지 않는 그 가공할 도약은 사람들에게 거의 비행처럼 보였다. 레콘의
도약에 익숙한 병사들은 머리를 감싸쥐며 엎드렸으나 다른 사람들은 기
가 막혀서 움직이지도 못했다. 키타타만이 위엄왕의 어깨를 잡아채 뒤로
밀치며 다른 손으론 검을 뽑아들었다.
성벽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지점에서 대호는 성벽을 넘기 어렵다는 것
을 깨달았다. 대호는 허공에서 몸을 뒤집어 뒷발로 성벽을 박찼다. 굉음
과 함께 성벽이 진동했다. 다시 땅 위에 내려선 대호는 갈기와 어깨털을
잔뜩 곤두세운 채 성벽 위를 노려보았다. 성벽 위의 사람들은 거의 몸이
아파 올 정도의 공포를 느꼈다. 대호가 너무 낮아서 잘 들리지도 않는
소리로 으르릉거렸기 때문이다.
위엄왕은 키타타가 집어던진 자세 그대로 머리를 묻은 채 부들부들 떨
고 있었다. 키타타는 조카의 엉덩이를 걷어차 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
며 흉벽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검을 내밀며 외쳤다.
"어리석은 짓 하지마라! 대호는 두 번 다시 자보로 성벽을 넘을 수 없
다!"
사모는 키타타를 바라보다가 다시 대호의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대호는
성벽을 향해 사납게 으르릉거릴 뿐 사모가 보내는 개념을 무시했다. 사
모는 참을성 있게 계속 개념을 보내었다. 마침내 대호가 훌쩍 몸을 날려
뒤로 뛰었다.
멀찌감치 물러난 대호는 또다시 성벽을 향해 돌진했다. 키타타는 무의
미한 짓이라 생각하며 혀를 찼다. 조금 전보다 더 낮은 궤도로 도약하는
대호를 보며 키타타는 흉벽을 짚으며 고함을 질렀다.
"결코 넘을 수 없어!"
그러나 사모는 성벽을 넘을 생각이 없었다.
허공에 떠오른 순간 사모는 쉬크톨을 거꾸로 쥐었다. 그리고 창을 던지
듯 칼을 어깨 높이까지 들어올렸다. 대호가 성벽에 부딪히기 직전, 사모
는 대호의 등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그리고 쉬크톨을 성벽 틈새에 깊숙
이 꽂아넣었다. 돌과 금속이 부딪히는 마찰음. 대호는 다시 성벽을 박차
고 뛰어내렸다. 그러나 사람들은 땅에 내려선 대호가 맨몸임을 깨닫고는
경악했다. 키타타와 몇몇 담대한 사람들은 황급히 흉벽 너머로 머리를
내밀었다.
사모 페이는 성벽 중간 쯤에 쉬크톨을 꽂아넣고는 거기에 매달려 있었
다. 실로 묘기라 할 수 있는 재주에 키타타는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성벽 중간에 매달려 뭘 어쩌겠다는 것일까? 그 때 몇몇 사람들이 당황하
여 비명을 질렀다. 키타타는 다시 대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키타타는 피가 식는 공포를 느꼈다.
대호는 세 번째로 도움닫기를 하고 있었다. 기수가 없어 한결 몸이 가
벼워진 대호는 무서운 속도로 뛰어올랐다. 키타타는 사모 페이를 내려다
보았고 사모가 두 발로 성벽을 딛은 채 등을 내미는 모습을 보곤 아연실
색했다.
대호는 사모의 등을 박차며 다시 뛰어올랐다.
대호는 최대한 발톱을 오므린 채 사모의 등을 짓밟았지만 그럼에도 불
구하고 그것은 척추가 부러질 정도의 충격이었다. 쉬크톨이 사정없이 뽑
혀나오며 사모는 저 멀리 튕겨졌다. 수십 미터나 날아간 사모는 다시 땅
위를 한참 동안 굴러갔다. 그러나 키타타는 그 비장한 모습을 끝까지 바
라보지 못했다.
수백년 만에 처음으로 자보로 성벽을 넘어온 대호가 그를 향해 포효했
기 때문이다.
티나한은 깜짝 놀라며 일어났다. 철창을 움켜쥐려 한 티나한은 그것이
방 밖에 있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다. 사원의 조그마한 방에는 7 미터
나 되는 티나한의 철창이 들어올 공간이 없었다. 그 때 문이 열리는 소
리가 들렸다. 티나한은 깃털을 곤두세우며 문 쪽을 돌아보았다.
티나한은 안도했다. 열린 문을 통해 케이건이 밖으로 뛰쳐나가고 있었
다. 티나한은 그 뒤를 따랐다. 마당으로 뛰쳐나온 케이건은 먼 곳을 응
시했다. 문 밖에 기대어둔 철창을 집어든 티나한이 그의 곁으로 다가가
며 말했다.
"괴상한 소리였지?"
"대호였소."
"대호?"
"그렇소. 잘못 들었을 리는 없소. 하지만 기묘하군. 별비의 공격 이후
로 자보로는 한 번도 호환을 당한 적이 없는데. 저기 성루 쪽을 보시오.
불이 많이 밝혀져 있군. 당신 눈엔 뭐가 보이시오?"
티나한은 성문 위쪽의 성루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인간들이 움직이고 있군. 무기를 든 녀석들도 있고. 꽤 당황한 눈치
야. 하지만 싸우고 있는 건 아냐. 그냥 어쩔 줄 몰라하며 이리 뛰고 저
리 뛰는 것 같은데. 얼레? 부축받는 녀석도 있네?"
케이건은 이맛살을 찡그렸다.
"부축이라고 했소?"
"부축이 아니면 저런 이상한 모습으로 걷진 않겠지. 하지만 멀어서 확
신할 순 없어. 밖에 대호가 있는 걸 보고 놀라 기절한 인간 아닐까?"
케이건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느낌이 좋지 않군. 옷을 다시 챙겨입으시오. 다른 사람들도 깨우고.
한 시간 쯤 기다렸다가 아무 일이 없으면 다시 자도록 합시다."
한 시간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반 시간 쯤 지났을 때 일단의 병사
들이 산문의 문을 거칠게 통과했다. 발소리와 호령 소리에 놀란 승려들
이 달려나왔지만 병사들을 이끌고 있던 키타타 자보로는 승려들을 무시
한 채 곧장 객실 쪽으로 달렸다. 승려들은 병사들의 흉흉한 기세에 질려
물러났다. 단숨에 객실까지 달려온 키타타는 뜻밖의 장면에 주춤했다.
객실의 툇마루에는 한 남자가 걸터앉아 있었다. 남자는 두 무릎 사이에
괴상하게 생긴 쌍신검을 세워놓고는 그 고동에 두 손을 얹은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남자의 옆쪽에는 덩치 큰 레콘이 솟대가 아닌가 의
심스러운 철창을 세워든 채 오만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병사들은 물론
이거니와 키타타 자신도 레콘의 모습에 질려버리고 말았다. 키타타는 병
사들을 늘어서게 한 다음 침착한 목소리를 내려 애쓰며 말했다.
"나는 자보로의 대장군 키타타 자보로요. 그대들의 정체를 말하시오."
남자가 대답했다.
"케이건 드라카. 이 쪽은 티나한. 여행자들이오. 무슨 일이시오?"
"조금 전, 대호 한 마리가 성벽 위로 올라왔소."
케이건은 고개를 갸웃했다.
"대호는 자보로 성벽을 넘을 수 없소. 별비 이후로 어떤 대호도 그런
일은 해낸 적이 없소. 그리고 별비 자신이라 하더라도 무라 마립간이 증
축한 성벽은 오르지 못할 거요."
"나도 그렇게 믿고 있었소. 하지만 한 여자 나가가 보고도 믿을 수 없
는 재주로 대호를 성벽 위까지 올라오게끔 했소. 대호는 그 나가에게 조
종당하는 것 같았소. 병사들을 물리친 대호는 위엄왕 폐하를 물고 다시
성벽을 내려갔소. 대호를 조종하던 그 여자는 우리에게 폐하를 되찾고
싶으면 자신이 쫓는 나가를 내놓으라고 말했소. 젠장. 믿기 어렵겠지만
나가도 말을 할 줄 알더군."
"알고 있소. 나가는 원래 말을 할 줄 아오. 별로 하지는 않지만."
"알고 있다고? 그렇다면 정말 그대들의 일행 중에…"
나가가 있냐고 물으려 했던 키타타는 말을 삼켰다. 케이건의 뒤쪽 문이
열리며 비늘에 뒤덮인 나가 한 명이 걸어나왔다. 놀란 키타타와 병사들
의 시선을 무시한 채 나가는 경직된 얼굴로 성문 쪽을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케이건과 티나한이 앞으로 뛰어나왔다.
마당 가운데 나란히 선 케이건과 티나한은 각자의 무기를 앞으로 내밀
며 병사들을 막아섰다. 그 보기드문 흉흉한 병기인 쌍신검과 철창에 겨
냥당하자 키타타와 병사들은 놀라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키타타는 손에
든 검을 꽉 움켜쥐며 말했다.
"무슨 짓이냐!"
바라기를 이리저리 돌리며 병사들을 겨냥하던 케이건은 바라기를 키타
타에게 돌렸다. 두 개의 칼끝에 겨냥당하자 키타타는 숨이 턱 막히는 기
분을 느꼈다. 바라기의 뒤편에서 그 두 개의 칼끝을 닮은 케이건의 두
눈이 키타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저 나가는 내어줄 수 없소."
키타타는 이를 악물며 손을 들었다. 병사들은 그 손짓에 따라 자신의
무기를 앞으로 내밀었다. 수십 명 대 두 사람의 대치였지만, 키타타는
자신들의 이점을 하나도 떠올릴 수 없었다. 괴상한 검을 들고 있는 케이
건은 제쳐놓고서라도 기둥 같은 철창을 든 채 웃고 있는 레콘은 악몽 같
았다. 키타타는 끔찍한 결심을 했다.
"물을 가져오너라."
티나한이 당장 세 배로 부풀어올랐다. 곤두선 벼슬은 도낏날 같았다.
병사들은 질겁하며 다시 몇 발자국 물러났고 케이건은 고개를 가로저었
다.
"어리석은 짓 관두시오, 대장군. 가장 끔찍하게 죽게 될 거요."
어느새 달려온 승려들도 공포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승려
들 사이에서 달려나온 고다인 대덕은 아예 키타타에게 달려들었다.
"키타타, 관두게! 그 아이에겐 그럴 만한 가치가 없어!"
키타타는 여전히 티나한을 바라보며 대덕에게 말했다.
"그 아이?"
"지그림 말이야!"
"지그림에게 왕의 가치가 없다는 뜻으로 한 말이로군. 고다인. 하지만
자네가 말하는 그 아이는 우리 씨족의 수장이야. 그리고 자보로의 마립
간이지. 가치가 있어."
고다인 대덕은 할말을 잃었다. 케이건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두 분이 친우이신 듯한데, 친구분의 말씀을 듣도록 하시오, 대장군.
당신이 죽을 각오를 한다 해서 달라질 것은 없소. 당신은 티나한을 쫓아
버리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지만, 미안하게도 그렇
게 되진 않을 거요."
"당신 혼자서 이 병사들을 대적하겠다는 건가?"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소. 비형!"
키타타는 나가의 뒤편에서 걸어나오는 덩치 큰 도깨비를 보며 긴장했
다. 하지만 키타타는 도깨비가 위험한 존재라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케이건은 비형에게 피를 볼 필요가 없는 훌륭한 전투기술을 가
르친 상태였다. 비형은 케이건의 신호에 따라 도깨비불을 불러내어 몇몇
병사들의 눈을 가렸다. 병사들이 내지르는 비명을 들으며 키타타는 눈앞
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비형은 다시 도깨비불을 치워주었다.
"불가능을 인정할 줄 아는 자는 현명하오. 대장군. 포기하시오."
케이건의 말에 키타타는 무릎이 꺾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 때
였다. 륜이 입을 열어 말했다.
"가 보고 싶어요."
티나한은 허탈한 표정으로 륜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비형은 얼굴에 동
정심을 담아 보였다. 하지만 케이건은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륜을 바라
보았다.
"어디에 가 보고 싶다는 말이냐."
"누님을 보고 싶어요. 케이건."
키타타는 희망에 찬 표정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잠깐 생각에 잠겼
던 케이건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가 륜의 요구를 승낙한 것에
는 감상적인 이유는 없었다.
"나도 궁금하군. 여기까지 올 수 있다면 더 따라올 수도 있겠지. 어떤
재주인지 알아둬야겠다."
성루 위에 뛰어오른 비형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묻지 않은 채 곧장
도깨비불 두 개를 만들어 밤하늘로 집어던졌다. 그 때문에 비형은 티나
한에게 꽤나 싫은 소리를 듣게 되었다. 하지만 티나한도 비형의 도깨비
불 아래에 드러난 광경에서 눈을 떼진 못했다.
성문에 별로 떨어지지도 않은 곳이었다. 집채 만한 대호는 땅에 배를
댄 채 엎드려 있었다. 마치 편안히 잠이라도 자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대호의 입에서는 위엄왕의 몸이 튀어나와 있었다. 반듯이 누워있는 위엄
왕의 목 아래는 모두 보였지만, 그 머리는 대호의 입 속에 들어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시체를 깨물고 있다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감상이었다.
하지만 그의 떨리는 손과 발을 본 티나한은 위엄왕이 살아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살아있군. 목만 끼여 있는 거야."
비형은 이 무시무시한 단두대에 끼여있는 위엄왕을 동정했다. 지금 대
호의 입 속에 들어가 있는 위엄왕은 아무 것도 볼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목을 누르는 이빨의 감촉과 얼굴을 적셔오는 대호의 뜨거운 침이 위엄왕
을 끝없는 공포로 몰아가고 있을 것이다. 비형은 입을 가린 채 신음했
다.
티나한은 암살자를 찾아보려 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처음 얼마 동안 륜
도 사모가 어디 있는지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얼마 후 륜은 대호의
몸 일부분이 약간 더 뜨겁다는 것을 깨달았다. 륜은 그곳을 뚫어지게 바
라보았다. 륜이 어떤 흐릿한 윤곽을 그려보고 있을 때 케이건이 말했다.
"케이건이군."
륜과 비형, 티나한은 놀란 표정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팔
짱을 꼈다.
"케이건, 흑사자 말이오. 흑사자 모피로군. 저기, 대호의 어깨 사이에
누워있소. 줄무늬와 구분하기 어렵겠지만 자세히 보면 알 수 있을 거요.
저것 덕분에 이곳까지 왔군."
티나한도 곧 사모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케이건은 륜의 모습에
넋이 나간 성루 위의 사람들에게 사모가 어떻게 위엄왕을 잡아갔는지 질
문했다. 사람들의 설명을 들은 일행은 크게 놀랐다. 케이건은 사모를 바
라보며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익히 알고 있었던 거지만, 네 누나는 정말 만만치 않은 인물이군. 대
호를 받칠 생각을 하다니. 몸이 끊어지지 않은 것이 행운일 텐데. 흑사
자 모피는 또 어디서 구한 거지?"
륜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닐렀다.
[사모!]
대호의 검은 줄무늬 일부가 꿈틀했다. 그것은 스르르 일어나 대호의 몸
에서 돌출되더니 검은 혹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 검은 혹이 좌우로
갈라지며 그 안쪽에서 사모 페이의 얼굴이 나왔다. 사모는 륜을 향해 닐
렀다.
[륜.]
륜은 반가움에 비늘을 곤두세웠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나가의
니름이었다. 륜은 그제야 자신이 대화에 굶주려 있음을 깨달았다. 말을
나눌 상대는 많았지만, 좀 더 잘 듣기 위해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나눠야 하는 말은 륜에게 자연스럽지 않았다. 물론 편안하지도 않았고.
똑바로 앉은 사모는 대호의 머리 너머로 위엄왕을 보곤 빙긋 웃었다.
[이 불신자는 자신을 위엄왕이라고 부르더군. 자기를 뭐라 부르던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겠지만, 난 이 자를 본 이후로 이 자의 위엄이라는 것
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난감한 입장에 처해있어. 그래서 그 호칭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점을 이 자가 이해해줬으면 좋겠는데.]
륜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었다.
[그는 인간입니다. 매일매일 죽을까봐 두려워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
에게 나가다운 위엄을 바라긴 어렵겠지요.]
사모는 잠시 정신을 닫았다가 다시 닐렀다.
[너도 그랬니?]
[네?]
[너도 매일매일 죽을까봐 무서웠니? 나 때문에?]
륜은 뭐라 대답할 수 없었다. 사모는 차분하게 닐렀다.
[불쌍한 내 동생.]
[저는 괜찮습니다. 사모. 동료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고 정성을 다해
저를 지켜줬습니다. 저는 누님을 걱정했습니다. 그 피라미드 속에 누님
을 남겨두고 떠났을 때는 너무도 무서웠습니다.]
사모는 다시 미소지었다.
키타타 자보로는 조바심을 참을 수 없었다. 성루 위로 올라온 네 명은
조금 전부터 입을 다문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키타타는 그들의
침묵에 끼여들었다.
"이보오,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요? 저 나가와 눈싸움이라도 하는 거
요?"
비형이 대답했다.
"아, 지금 여기 있는 륜과 저 나가는 서로 니름을 나누고 있습니다. 우
리는 그걸 들을 수 없지요. 지루하시겠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겠습니
까?"
"왕께서 위험하신데 내가 그걸 왜 기다려…"
"저 여자는 륜의 누나입니다. 그리고 오로지 륜을 죽이기 위한 목적으
로 한계선 너머 이곳까지 따라왔죠. 이 정도면 이유가 될까요?"
키타타는 입을 벌린 채 비형을 바라보았다.
[그 대호는 어떻게 정신억압하셨습니까? 누님이 그 정도로 높은 수준의
정신억압을 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너도 알겠지만 내 정신억압은 쥐나 꼼짝 못하게 할 정도야. 나도 이
대호를 어떻게 정신억압했는지 모르겠어. 사실, 억압하고 있는지조차 확
신할 수 없군. 내가 보내는 개념들에 대해 적절하게 반응하고 있긴 하지
만, 나는 가끔 이 대호가 그렇게 해주고 싶어서 그렇게 한다는 느낌을
받아.]
륜은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때 사모가 쉬크톨을 뽑아들었
다.
륜은 쉬크톨에 놀랐지만 동시에 그 뽑아드는 동작이 기운차지 못하다는
것에 걱정을 느꼈다. 대호에게 걷어차여 수십 미터를 날아갔던 몸이다.
괜찮을 리가 없다. 하지만 사모는 차분하게 닐렀다.
[내려와, 륜.]
[사모.]
[전에 닐러줬지? 이건 쇼자인-테-쉬크톨이야.]
[저는 화리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화리트를 죽인 건-]
[비아스 마케로우지.]
륜은 충격을 받았다. 사모는 쉬크톨을 들고 있기조차 힘들다는 듯이 그
팔을 대호의 등에 얹었다. 쉬크톨의 감촉이 대호를 긴장시켰고 그 긴장
은 턱으로 쏠렸다. 위엄왕의 팔다리가 경련하며 튀어올랐다. 하지만 대
호는 곧 턱의 힘을 풀어 위엄왕을 안심시켰다.
[알고 있어. 륜. 비아스가 화리트를 죽였겠지. 그리고 넌 화리트의 마
지막 부탁을 받은 것이겠지. 그 때문에 이 불신자들의 땅까지 온 것이겠
지.]
[어떻게? 어떻게 아시죠?]
[그건 니르기가 번거롭군. 간단히 닐러주지. 화리트의 동료 하나와 만
나게 되었다. 그가 닐러준 몇 가지 사실을 고려해본 결과 알게 되었어.]
[그렇다면 쇼자인-테-쉬크톨이 성립될 수 없다는 것도 아시겠군요!]
[륜. 이미 시작되었어.]
[네?]
사모는 모피를 목으로 끌어당기며 닐렀다.
[쇼자인-테-쉬크톨은 이미 시작되었어. 시작된 이상 절대로 중단될 수
없어.]
[결백한 저를… 제가 결백하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죽이시겠다는 겁니
까?]
[륜. 이 땅에 있는 한 너는 살 수 없어.]
륜은 흉벽 위에 손을 짚었다. 곤두선 그의 비늘이 돌과 부딪히며 불쾌
한 소리를 내었다. 륜은 무적왕과 수치스러웠던 허물벗기의 기억 속에
신음했다. 사모는 계속 닐렀다.
[나가는 키보렌에서 살아야 해. 그건 절대적인 법칙이야.]
그리고 사모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성벽 위의 인간들에게 말한다."
느닷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키타타는 거의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키타
타와 병사들은 황급히 성벽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케이건은 아래를
보는 대신 티나한에게 눈짓을 보내었다. 티나한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
다.
사모는 쉬크톨을 다시 들어올려 륜을 가리켰다.
"그 나가를 아래로 내려보내라. 그렇지 않으면 대호가 왕의 목을 끊을
것이다."
케이건은 륜의 팔을 확 잡아당겼다. 갑자기 당한 일에 륜은 뒤로 쓰러
지지 않기 위해 뒷걸음질을 쳤고 기다리고 있던 티나한은 재빨리 륜을
붙잡았다. 케이건은 륜을 던졌던 손을 그대로 등 뒤로 돌려 바라기를 뽑
아들었다. 몸을 돌린 키타타가 본 것은 이미 안전해진 륜과 바라기를 든
채 날카롭게 쏘아보고 있는 케이건이었다. 키타타는 절망감 속에서도 검
을 뽑아들었다. 케이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마시오."
흰 수염을 부르르 떨며 케이건을 쏘아보던 키타타는 갑자기 왼손을 옆
으로 뻗었다. 그리곤 옆에 서있던 병사 하나를 나꿔챘다. 병사는 당황하
며 끌려갔고 키타타는 그를 등 뒤에서 껴안은 채 병사의 목에 검을 가져
갔다.
"아무도 움직이지마!"
잠시 동안 꽤 곤혹스러운 침묵이 성루 위를 가득 채웠다. 티나한은 어
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키타타를 바라보았다.
"이봐. 지금 그거 인질이라고 잡은 거야? 네 병사를?"
다른 병사들은 물론이거니와 키타타에게 붙잡힌 병사조차도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대장군을 곁눈질했다. "대장군님?" 하지만 키타타는 눈에 핏발
을 세운 채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입술을 깨물었다. 강대한 씨족의 지혜를 계승하고 그 자신의
경험으로 그것을 연마해온 키타타 자보로는 결코 녹록한 인물이 아니었
다. 보통 사람은 상상하기도 힘든 모험을 감행할 만큼. 대장군은 병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미리 용서를 구해두겠다. 하크렌. 나를 용서해라."
"대장군님? 도대체 뭘 하시려는…"
"도깨비! 동료들의 눈에 불을 붙여라! 그러지 않으면 피를 뒤집어쓸 줄
알아라! 이곳을 끊으면 피가 당장 네게까지 튈 거다!"
티나한은 아뿔싸 하는 얼굴로 비형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창백한 도깨
비의 얼굴에서 공포를 느끼며 벼슬을 곤두세웠다.
케이건은 눈에서 불똥을 튕기며 키타타를 노려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
에 서있던 고다인 대덕은 발악하듯 외쳤다.
"그만둬! 그만두라고, 키타타!"
"움직이지마! 고다인!"
앞으로 달려나가려던 고다인 대덕은 그 말에 발을 멈췄다. 대덕은 제자
리에서 발을 구르며 외쳤다.
"자네 돌았나! 도깨비를 자극하면 안돼! 아킨스로우 협곡이나 페시론
섬 같은 꼴이 된단 말이야. 잘못하면 모두 다 죽어! 자보로가 지상에서
사라질 거라고!"
"더없이 멋진 모험이지. 그렇잖은가?"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병사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갔다. 키타
타에게 붙잡혀 있던 하크렌은 거의 기절할 지경이었다. 티나한은 철창을
옆으로 조금 치우며 황급히 말했다.
"이봐! 썩을, 지그림 자보로는 왕이 아니라구. 그리고 자보로에는 자보
로 씨족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너에겐 너희 씨족의 한 사람에 불과한
녀석을 위해 자보로 사람들 전체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칠 권한은 없을
텐데?"
키타타 자보로는 자꾸만 쓰러지려는 하크렌을 억지로 끌어당기며 말했
다.
"당신 말이 옳소. 내 조카를 위해 모든 자보로 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릴
수는 없는 거지. 왕도 아닌, 다시 선출하면 그만인 마립간일 뿐이니까.
다 옳은 말이오. 하지만 나는 묻고 싶소. 그 차가운 계산을 왜 내 조카
에게만 강요하는 거요? 그 남쪽에서 온 비늘 덮인 괴물을 위해 내 조카
이자 자보로의 마립간인 자를 위험에 빠트리는 건 옳은 계산이오? 피붙
이가 피붙이를 죽이는 저 괴물을 위해? 당신이 권한에 대해 말한다면 나
도 말해두고 싶은 것이 있소. 우리 씨족도 아니고 자보로 사람도 아닌
당신들은 우리에게 지그림 자보로를 포기하라 요청할 권한이 없소!"
티나한은 말문이 막혔다. "내 동료를 함부로 괴물이라고 부르지 마."
겨우 한 마디 투덜거린 티나한은 난처한 얼굴로 케이건을 돌아보았다.
케이건은 바라기의 두 끝으로 키타타를 똑바로 겨냥한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키타타는 다시 외쳤다.
"도깨비! 어서 내 말대로 해!"
"그럴 필요는 없소."
케이건은 바라기를 등 뒤로 돌리며 말했다. 바라기는 다시 고리에 걸렸
고 케이건은 팔짱을 꼈다. 그리고 케이건은 티나한에게도 철창을 치우도
록 말했다. 티나한은 침울한 표정으로 철창을 거꾸로 들어올렸다가 힘껏
내려찍었다. 철창은 성루의 돌바닥을 꿰뚫으며 깊숙이 박혔다. 무기를
남에게 주지도, 바닥에 던지지도 않기 위해 취한 행동이었지만 그 모습
은 키타타와 병사들을 몹시 놀라게 했다. 철창을 꽂아놓은 티나한은 케
이건처럼 팔짱을 꼈다. 비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눈을 부라리며
쏘아보는 티나한의 모습에 찔끔했다. 케이건은 조용히 말했다.
"무장은 치웠소. 륜을 아래로 내려보내길 바라는 거요?"
"그, 그렇다!"
"잠시 이야기 좀 하겠소."
그리고 케이건은 륜에게 다가갔다. 귓속말을 하려 했던 케이건은 곧 생
각을 바꿨다. 륜이 들을 수 있을 정도라면 다른 사람도 들을 수 있을 것
이다. 케이건은 륜을 흉벽 쪽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한 손을 륜의 어
깨에 두른 다음 다른 손의 집게손가락으로 흉벽 위에 빠르게 글을 썼다.
케이건의 따스한 손가락이 닿은 곳에는 온기가 전달되었다. 륜은 차가
운 돌 위로 떠오르는 글자를 볼 수 있었다.
'내려가.'
륜은 당황하여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의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
다.
'내려가서, 누나를 죽여라.'
곤두선 륜의 비늘이 케이건의 손바닥을 찔렀다. 케이건은 그것을 무시
하며 글을 썼다.
'네 누나는 지금 운신도 힘들다. 내려가서 쇼자인-테-쉬크톨에 응해라.
그리고 죽여.'
"그런 니름도 안 되는… 읍!"
케이건은 손바닥으로 륜의 입을 틀어막았다. 륜은 케이건의 손을 뿌리
치고는 살기 어린 눈으로 케이건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케이건은 무표정
한 얼굴로 륜을 바라보다가 다시 손을 움직였다.
'한계선을 넘었으니 안전하다고 생각한 것은 실수였다. 나늬가 너를 태
웠다면 좋았을 텐데. 흑사자 모피를 가졌으니 이제 네 누나는 언제까지
라도 쫓아올 것이다. 네 누나가 저렇게 약해진 지금이 기회다. 이런 기
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내려가서 죽여.'
"나는 그렇게 못해요!"
'글로 써. 대호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네 누나가 죽으면
대호는 정신억압에서 풀려나겠지만, 아마 그대로 달아날 거다. 여긴 대
호에게 어울리는 땅도 아니고 위험하면 티나한이 계명성을 질러서…'
륜은 케이건의 손을 옆으로 밀쳐내고 화난 동작으로 글을 썼다. 열을
볼 수는 없었지만 륜의 손가락을 보며 케이건은 그 글을 읽었다.
'대호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에요! 나는 누나를 죽일 수 없어요!'
'그럼 네가 죽겠느냐?'
륜은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케이건의 손이 냉혹하게 움직였다.
'네 누나는 언제까지고 쫓아올 것이다. 네가 죽겠느냐?'
'내가 죽겠어요! 빌어먹을, 내가 죽겠어!'
'비형과 즈믄누리는 대금을 못 받겠군.'
륜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무표정
한 얼굴로 계속 손을 움직였다.
'티나한은 지원을 받지 못하겠군. 대사원은 실망할 테고.'
"당신, 당신 어떻게 그런…"
'화리트 마케로우의 죽음은 무가치한 소동이 되겠군.'
륜은 눈 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케이건은 륜의 겨드
랑이를 붙잡아 힘껏 끌어올렸다. 륜은 허우적거리다가 케이건의 두 팔을
붙잡았다. 케이건의 팔에 매달린 채 륜은 인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비늘로 덮인 나가의 얼굴보다 더 차가운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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