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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4-1. 관련자료:없음 [52741]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4-10 01:10 조회:11214
눈물을 마시는 새.
4. 철혈(鐵血) - 1
한 때 공포와 존경의 대상이었던 위대한 흑사자기는 더 이상 전
장에서 나부끼지 못했다. 왕궁의 벽에 걸린 찬란한 흑사자기는 왕
에게 위엄을 부여하는 대신 물려받은 권위와 풍요를 낭비한 불민
한 후손을 꾸짖는 듯했다. 건전한 반성은 찾아오지 않았고 무익한
공포와 처절한 절망감만이 왕좌와 왕국를 지배했다. 이토록 암울
했던 시절, 왕에게 도움이 되고자 찾아온 손길이 있었으니 저 용
맹한 키탈저 사냥꾼들의 만민회의 참석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지성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저 권능왕은 감히 이 용맹
한 자들을 모욕하고 조롱했으니, 키탈저 사냥꾼들은 그 모욕에 대
꾸하는 것조차 아깝다는 듯이 만민회의장을 퇴장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의 아름다운 고향 키탈저로 돌아가기 전, 한 사냥꾼이
왕도(王都)의 하늘을 향해 저 유명한 저주를 외쳤다.
"이제 왕은 없다. 그리고 왕이 이 모욕에 사과하지 않는 한, 앞
으로도 왕이 없으리라!"
그리고 북부에는 더 이상 왕이 존재하지 않았다. 무려 90여년 동
안 고독하게 싸웠던 키탈저 사냥꾼들 또한 사라진 지금에 와서는
오래된 모욕을 청산하는 일조차 불가능해졌다. - 라수의 <왕국의
몰락>
비아스 마케로우는 분노했다.
심장이 없는 나가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이었다. 그녀가 이
미 한 번 시도했던 방법 - 저 심장탑의 사서 유벡스를 죽였을 때처럼 온
몸을 토막내는 방법만이 가장 확실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카린돌처럼
자기 집에 있는 여자에겐 해당 사항이 없는 방법이었다. 그 외에는 뼈까
지 태우거나 물에 빠트리는 방법 등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황당해지는 방
법들 뿐이었다. 그러나 비아스는 자신에게 포기를 선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거대한 불가능성에 대한 분노마저도 카린돌에게 돌렸다. 간단
히 말해서, 쉽게 죽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죽이고 싶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카린돌은 그런 비아스에 대한 조롱의 강도를 매일 높여갔다.
'고명한 약술사이시니 남자의 그것도 한 번 조제해보시면 어떠할까. 불
가능에 도전하는 수고 없이 아기를 얻을 수 있을 텐데'와 같은 조롱에
이르러서는 최연장자 소메로마저도 카린돌을 꾸짖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두지 못하겠어? 연장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라는 니름이 아니야.
너희들이 집안 분위기를 그렇게 만드니 남자들이 방문하지 않잖아. 그리
고 있던 남자들도 떠나고 있고. 남자들은 너희들이 벌이는 언쟁의 가부
같은 것에는 관심없어. 오로지 편한 것만 찾는단 말이야.]
실제로 마케로우 가문의 방문자 수는 격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린돌
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럼 밖으로 나가서 데려와. 나처럼.]
[그런 수치스러운 짓을 하는 건 너 하나로도 이미 너무 많아. 이걸 마
지막 경고로 생각하고 내 니름 잘 들어. 비아스와 더 이상 언쟁을 벌이
지 마. 집안 분위기를 흐리는 짓도 하지 말고.]
[경고에는 보통 협박 문구가 붙는 걸로 아는데? 그런 거 준비했어?]
[물론 준비했어. 내 니름을 따르지 않으면 너를 정찰대에 보내겠어. 그
렇게 밖으로 돌아다니길 좋아하는 너에게 어울리는 처벌이 될 거야.]
카린돌은 분한 표정으로 소메로를 바라보았다. 원칙적으로 소메로에게
는 그런 권한이 없다. 가문의 일원을 정찰대에 보내는 것은 가주의 권한
이다. 하지만 비아스와 카린돌이 싸우는 동안 소메로는 원래 얻고 있던
신뢰를 더욱 강고히 해 둔 상태였다. 따라서 소메로가 '그것이 가장 적
절한 대처'라고 니른다면 가주 두세나는 그렇게 할 것이다.
카린돌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소동을 멈춘 소메
로에게 두세나의 칭찬이 있었음은, 그리고 최연장자에 대한 가주의 신임
이 더욱 두터워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비아스는 분노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그녀의 눈
에 카린돌은 남자를 다 약탈해감으로써 그녀의 아기를 가질 기회를 박탈
한 것으로 모자라 그녀의 적수를 이롭게 해주는 원수였다. 야심이나 술
수 등과는 거리가 먼, 덕 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고 평가되는 소메로에
대한 가주의 신뢰가 그토록 두터워진 상황의 배후에는 카린돌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카린돌이 획책한 일이었다.
[그래. 나는 소메로가 나서주길 바랬어. 좀 늦게 나서줬지만 어쨌든 나
서줬지.]
카린돌은 쥐를 집어들며 닐렀다. 마케로우 가문에 얼마 남아있지 않은
방문자 중 한 명인 스바치는 감탄하며 닐렀다.
[여자의 세계는 참 복잡하군요. 그럼 당신은 소메로 마케로우 님을 가
주로 추대할 생각인가요?]
[비아스가 가주가 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지만, 어쨌든 그래.]
스바치는 상자 안을 미친 듯이 뛰어 다니는 쥐들을 보며 닐렀다.
[당신 자신이 가주가 되는 방법도 있잖습니까?]
[내가 가진 장점은 가주의 친자라는 것 외엔 아무 것도 없어. 최연소자
인데다 아직 아이도 없지.]
[자녀가 없다는 것은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잖습니까?]
[그래. 그래서 네게 요구할 생각이야.]
[요구요?]
카린돌의 손이 갑자기 확 뻗어왔다. 스바치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
다. 하지만 카린돌의 손은 상자 속의 쥐를 나꿔챘다. 카린돌은 나꿔챈
쥐를 스바치에게 건네며 닐렀다.
[조만간 소메로의 가임기가 찾아올 거야. 그 때 그녀를 모셔. 스바치.]
스바치는 쥐를 받아들 생각도 못한 채 카린돌을 바라보았다. 당황 속에
서 그는 약간의 배신감 같은 것도 느꼈다.
[저를 그 분께 주는 겁니까?]
[그래. 그녀에게 아이를 줘. 소메로에 대한 가주님의 신뢰가 더욱 굳어
질 거야.]
[제가 그래야 할 이유가 어디 있죠? 저도 다른 남자들처럼 마케로우 가
문을 떠나면 그만입니다. 왜 당신의 명령을 받아야 하죠?]
카린돌은 스바치가 받아들지 않은 쥐를 자신의 입으로 가져오며 닐렀
다.
[네가 바라는 것을 내가 줄 테니까.]
[바라는 것?]
[내숭 떨지 말아. 스바치. 분명히 원하는 것이 있을 거야. '다른 남자
들처럼 우리 집을 떠나지' 않은 너에겐 분명히. 짐작할 수 있으면 좋았
겠지만 나는 남자들이 바라는 것을 모르겠어. 그러니 직접 묻는 거야.
내게 바라는 것이 뭐지?]
스바치는 잠시 정신을 닫았다. 물어볼 수 있을까? 스바치는 위험이 너
무 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친다면 다른 기회 같은 것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스바치는 조심스럽게 니름을 가다듬었다.
[바라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제가 당신의 요구를 따라야 되는 이유를
말해주세요.]
[내가 요구했으니까.]
[아니오. 당신은 비아스 마케로우 님이 가주가 되기를 바라지 않기 때
문에 소메로 마케로우 님께 저를 보내신다고 했어요. 그렇다면, 비아스
마케로우 님이 가주가 되어선 안되는 이유를 말해주세요.]
[나를 죽이려드니까.]
[당신이 그렇게 만들었어요. 그녀를 분노하게 하고, 마침내 그녀가 당
신을 죽이려 시도하다가 큰 실수를 저지르게끔 유도하신 거죠. 왜 그렇
게 유도하신 거죠? 당신 자신이 가주가 되길 원하시는 거라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잖아요. 당신은 왜 비아스 마케로우 님을
파멸시키려 하는 거죠? 납득할 만한 이유를 닐러주신다면 당신의 요구대
로 소메로 마케로우 님을 모시겠습니다.]
카린돌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침착하게 닐렀다.
[화를 돋운다는 이유로 동생을 죽이는 여자라면 제거할 이유로 충분하
지 않을까?]
스바치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비아스의 동생은 카린돌과 화
리트 두 명이다. 그리고 카린돌은 '죽이는'이라고 표현했다. '죽이려드
는'이라면 그 동생은 카린돌일 테고 '죽인'이라면 화리트가 되겠지만,
'죽이는'이라면? 스바치는 필사적으로 적절한 니름을 찾았다.
[글쎄요. 서로를 향해 그런 생각 한 번 쯤 품어보지 않은 자매들이 있
을까요? 자매들이란 결국 가주 계승의 경쟁자잖아요.]
스바치는 '비아스는 생각에 그치지 않고 이미 한 번 피붙이를 죽였다'
는 니름을 기다렸다. 하지만 카린돌은 그가 원하는 니름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네가 이미 확인했듯이 나는 가주 계승을 원하지 않아. 그리고
지난 28 년 동안 나를 보아온 비아스는 나에 대해 너보다 훨씬 더 잘 알
지. 그녀는 내가 가주 계승의 경쟁자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아. 경쟁자
도 아닌 동생을 죽이려드는 건 위험한 자라는 증거가 될 텐데.]
'젠장!' 스바치는 긴장 때문에 비늘이 곤두서는 것을 억누르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이 그 분을 조롱한 것 때문에 오해한 것일 수도 있죠. 비아스 마
케로우 님은 당신이 마침내 가주가 되려는 결심을 한 거라고 오해하신
것 아닐까요? 아니, 이건 계속해서 꼬리를 무는 니름이 되는군요. 당신
의 니름을 정리해볼까요? 당신은 화를 돋운다는 이유로 동생을 죽이는
여자는 위험하기 때문에 화를 돋우었다고 닐렀어요. 니름이 안되지 않아
요?]
카린돌은 가늘게 미소지었다.
[그래. 네 니름이 맞군.]
스바치는 태연한 척하며 쥐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삼키며 닐렀
다.
[비아스 마케로우 님에 대한 당신의 혐오가 그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거라면, 저는 당신의 요구를 따를 수 없습니다.]
스바치는 쥐를 삼키느라 얼굴 표정을 감출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지금 그의 얼굴은 기대감과 불안감으로 가득할 것이다. 어쩌면 카린돌은
그대로 정신을 닫아버릴지도 모른다. 이 가문 저 가문을 떠돌아 다니는
남자에게 위험한 비밀을 가르쳐줄 리가 없다.
"스바치."
스바치의 입에서 쥐가 도로 튀어나올 뻔했다. 스바치는 놀란 표정으로
카린돌을 바라보았다. 카린돌은 고개를 끄덕이며 귀를 가리켜보였다.
"그래. 육성으로 말하고 있어. 청력에 집중해. 그리고 너도 육성으로
대답하도록."
스바치는 쥐를 겨우 삼킨 다음 말했다.
"무, 무슨 일로?"
"누가 엿듣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야."
스바치는 힘겹게 호흡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목소리로 말해진 제 이름은 대단히 아름답게 들리는군요. 평생
동안 형편없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카린돌은 빙긋 웃었다.
"스바치.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가장 솔직한 진
심을 말하고 있어. 비아스 마케로우가 가주가 되면 나는 죽을 거야. 나
는 그녀가 반드시 숨겨야 되는 비밀을 알고 있어."
스바치는 비늘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그 비밀이라는 것이 남동생을
베어죽이는 취미가 있다는 것인지 물어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그렇게 위험한 비밀인가요?"
"그럴 리는 없지만, 만약 그녀가 나를 죽이는 데 성공한다면 그건 그녀
의 첫 번째이자 세 번째 살인일 거야."
스바치는 속으로 환호를 올렸다.
수호자 세리스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첫 번째이자 세 번째라니 그게 무슨 뜻이지?]
[간단합니다. 여자를 죽이는 걸로는 첫 번째고, 남자까지 포함한다면
세 번째라는 의미입니다. 바로 화리트와 수호자 유벡스지요.]
세리스마는 정신적으로 실소했다.
[그걸 그렇게 구분한단 말인가. 참 대단한 여자군. 그렇다면 비아스 마
케로우가 살해자란 말이군?]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륜 페이는 화리트 마케로우의 대행자가 될 수
있습니다. 신명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한 가지 문제는 지금 그가 암살자
에게 쫓기고 있다는 점입니다. 카루가 그것을 방해해야겠지만, 카루는
륜이 살해자인지 아닌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스바치의 아쉬워하는 니름에 세리스마는 빙긋 웃으며 닐렀다.
[카루를 믿어야겠지. 비아스가 살해자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은 카루 자
신이 제기한 것 아닌가? 어쩌면 카루는 벌써 오래 전에 비아스가 살해자
라는 증거를 포착했을지도 모르지.]
스바치는 그렇게만 되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냐는 표정으로 수호자 세
리스마를 바라보다가 문득 세리스마의 웃음이 조금 묘하다는 느낌을 받
았다. 세리스마는 환하게 웃으며 닐렀다.
[그리곤 이미 하텐그라쥬로 돌아와 어느 침대에서 피곤한 몸을 달래고
있을지도 모르지.]
스바치는 수호자의 침실로 통하는 문으로 달려가 그것을 확 열었다. 그
리고는 침대에 누워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는 카루를 발견했다.
카루는 잠시 후 일어났다. 한계선에서부터 쉬지 않고 달려온 터라 피로
가 완전히 가시진 않은 모습이었지만 카루는 스바치에게 자신이 겪었던
일을 대충 정리해서 닐러주었다. 스바치는 사모의 추리에 감탄하고 사모
의 행동에 놀랐다.
[그렇다면 사모 페이는 동생이 살인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동생
에게 편안한 죽음을 주기 위해 암살자 지명을 받아들인 거란 말인가?]
[그녀 자신이 그렇게 니른 건 아니지만, 나는 그럴 거라고 생각해.]
[대단히 곤란하군. 륜은 어떻게 되었지? 한계선을 넘어갔나?]
[그랬을 것 같아. 내가 페이와 헤어졌을 땐 한계선이 얼마 남지 않은
지점이었어. 페이가 그 전에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륜을 해치긴 어려울 거야. 레콘도 있고 도깨비도 있으니까. 게다가 전설
속에나 나오는 줄 알았던 나가살육자도 있고.]
[자네 이야기 중에선 그 두억시니 괴물하고 나가살육자 이야기가 가장
받아들이기 어렵군. 정말 믿기 힘든 이야기야.]
[직접 보고 온 나도 아직까지 내가 본 것을 믿지 못하겠어. 어쨌든, 나
는 그 길잡이들이 사모의 방해를 물리치고 한계선을 넘어갈 가능성이 높
다고 판단했어. 그래서 사모를 계속 따라다니며 그녀를 방해하는 대신
빨리 이곳으로 돌아오기로 결정했어.]
[그리고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모자란 잠부터 보충해야겠다고 결정했
고?]
스바치의 니름에 카루는 억울하다는 듯이 웃었다.
[내가 달려야했던 거리를 생각해 봐. 하지만 자네의 비난에도 일리는
있군. 빨리 할 일을 해야겠어.]
니름을 끝낸 카루는 수호자 세리스마를 바라보았다. 세리스마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닐렀다.
[자네 두 사람이 한 일에 대해서 뭐라 고마워해야 할지 모르겠군. 하지
만 지금 당장 나는 자네 두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밖에 없
군. 륜 페이. 우리의 계획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우리 일을 대신 해주
고 있는 그 청년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오는군. 자기 혈육에게 목숨의
위협까지 당하면서 말이야.]
카루는 고개를 끄덕이며 닐렀다.
[사태가 끝난 후, 그를 다시 한계선 이남으로 데려올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그는 지상의 모든 존재들에게 감사를 받아야 마땅한 일을 하
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을까요?]
[거의 없겠지만… 희망을 가지고 생각해 보세. 일단 급한 일부터 하고.
할 일을 해야지.]
카루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일어났다. 그리고 조금 후 뱀단지를 들고
돌아왔다. 그 동안 스바치는 바닥을 치워 넓은 공간을 확보했다.
카루는 바닥에 뱀을 쏟고는 그들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스바치
와 함께 물러났다. 수호자 세리스마는 바닥을 미끄러지는 뱀들에게 정신
억압을 시작했다.
방바닥을 미끄러지는 뱀들을 보던 오레놀 대덕이 환호을 올렸다.
"계획이 부활했군요!"
쥬타기 대선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계선을 넘어오기로 했던
신명을 가진 수련자가 하텐그라쥬를 떠나지도 못한 채 죽고 말았다는 소
식을 전해들었을 때 대선사는 더할 수 없는 절망감을 느꼈다. 하지만 뜻
밖에도 그들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물이 화리트의 유지를 받아들여 계
획을 부활시킨 것이다. 오레놀은 거의 날뛸 듯이 즐거워하며 말했다.
"정말 놀랍군요. 완전한 자격을 가진 또다른 자가 화리트의 친구였고
또 침묵의 도시를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게다가 케이건 님과 이
미 만났다고 하는군요! 실로 어디에도 없는 신의 보살핌이십니다."
"우리도 정신 억압이라는 걸 할 줄 안다면 물어볼 것이 많을 텐데. 아
쉽구나. 난 이 륜 페이라는 청년이 몹시 궁금하구나. 하지만 저쪽에서
완전한 자격이 있다고 말했으니 그걸로 만족해야… 옳거니! 보름 쯤 전
에 한계선을 넘었을 거라고? 됐다!"
터무니 없이 멀리 떨어져 있는 대화 상대자가 아무런 의사표시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고려하여, 수호자 세리스마는 시시콜콜할 정도로 자세하게
이야기를 한 다음 사어의 전달을 끝냈다. 덕분에 뱀들은 기진맥진했고
오레놀은 그것을 직접 주워담아야 했다. 그 동안 쥬타기 대선사는 생각
에 잠겼다. 문득 오레놀을 바라본 대선사는 대덕이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느냐, 오레놀?"
"대선사님. 물론 꺼져가던 계획의 불씨가 다시 되살아난 것은, 게다가
예상할 수 없는 바람을 타고 세차게 타오르고 있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
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슬픔이 너무 많습니다. 그 비아스 마케로우라는
여자는 도대체 어떤 여자일까요? 미친 자일까요? 게다가 사모 페이라는
여자도 이해하기 어렵군요. 나가들은 그녀가 훌륭한 여자라는 식으로 말
했습니다만, 자기 남동생을 죽이는 것이 나가들에겐 그렇게 훌륭한 일입
니까? 비아스 마케로우와 마찬가지잖습니까?"
"상황이 다르지 않느냐. 비아스는 무가치한 남동생이 화를 돋운다는 이
유로 죽인 것이고, 사모는 사랑하는 동생이 죽음보다 못한 고통을 겪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죽이려는 것이다. 두 사람이 남동생을 보는 관점
은 완전히 정반대다."
"하지만 두 여자 모두 상대방의 의사는 배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비아
스가 화리트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를 죽인 것처럼 사모 또한 륜의 의사
를 물어보지도 않은 채 그를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정작 륜 페이는 고
통 속에서라도 살길 바랄지도 모르잖습니까."
"그래. 그리고 네가 지적한 그것은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문제
다. 이번 계획만 놓고 보더라도 마찬가지니라. 만일 이 계획이 탄로난다
면, 속인들은 자기들에게 그토록 중요한 일에 대해 자기네들 의사도 묻
지 않은 채 머리 깎은 몇몇 중놈들이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
할지도 모르잖느냐?"
오레놀은 자신있게 대답했다.
"제왕병 환자가 아닌 바에야 누가 그러겠습니까. 오히려 박수를 보낼
것입니다."
하지만 그 대답은 대선사로 하여금 이마를 짚게 만들었다.
"네녀석이 내 수제자라니, 이 땡초가 이고 갈 죄가 정말 무겁다."
"네?"
대선사는 고함을 빽 질렀다.
"이 놈아, 그렇다면 륜 페이도 사모 페이에게 박수, 아니, 나가니까 물
방울을 던질지도 모르잖느냐!"
오레놀은 입을 쩍 벌렸다. 곧 대덕은 코막힌 소리로 변명을 시작했다.
"하, 하지만 경우가 다르잖습니까. 사모는 동생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
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생명들을 살리려 하고 있고요."
"네가 모든 생명들에게 물어봤느냐? 살고 싶은지 물어봤느냐 말이다!"
이번에야 말로 오레놀은 완전히 말문이 막혔다. 젊은 대덕은 그저 입만
뻐끔거리며 대선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대덕이 그런 표정을 지을 때면
언제나 그랬듯 대선사는 마음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대선사는 염주를
헤아렸다.
"오레놀. 네 마음 속에서 가장 확실한 것을 의심하고 가장 분명한 것을
포기하거라. 사모 페이는 동생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동생을 죽이려 하
고 있다. 우리는 모든 생명을 살리기 위해 계획을 진행 중이고. 그 차이
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크지는 않을 거다."
"크지 않다고요?"
"크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같은 말이다. 죽음을 강요하든 삶을 강요하
든."
암자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이 뎅그렁 울렸다. 대선사는 염주를 내려놓
으며 말했다.
"죽음과 삶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렇습니까."
"그래서 우리 화상들은 죄를 이고 간다 하느니라."
오레놀은 깊은 이해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대선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우리 땡초들이 아니면 누가 죄를 이고 가겠느냐. 계획이 부활
했으니 다시 채비를 갖추도록 해라. 늦어도 한 달 안에는 도착하겠지 싶
구나. 조타 중대사에게 가서 철혈암(鐵血庵)을 비워주십사 부탁해라."
"철혈암이면 되겠습니까?"
"그곳이 적당하겠다. 다른 사람들을 숙식시키기도 좋고 사원의 다른 곳
들과도 충분히 머니. 잠시만 기다리거라."
쥬타기 대선사는 몸을 돌려 죽편 하나를 꺼내었다. 오레놀은 조심스럽
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 안에는 준비해야 할 것들이 적혀 있다. 네가 책임지고 준비를 하도
록 해라. 너 혼자서는 힘들 테니 기개가 높은 행자 몇 명과 함께 준비하
도록 해라. 그 행자들에겐 반드시 모든 사실을 다 알려줘야 한다. 정성
스러운 마음이 아니고선 차라리 데리고 가지 않느니만 못하다. 내 가끔
찾아가보겠지만, 책임은 네게 있다. 중한 책임임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겠지."
오레놀은 책임감이 어깨를 짓누르는 것을 느끼며 죽편을 조심스럽게 펼
쳤다. 경건하게 죽편을 읽던 오레놀은 그만 눈살을 찌푸렸다.
"…피도 뿌려야 합니까?"
"너 도깨비냐? 피 좀 뿌리면 어때서. 산 뒤편의 밀렵꾼들 몇 명 잡아다
족치면 피를 뿌릴 만한 동물을 잡아다 줄 거다."
오레놀은 승려의 몸으로 피를 뿌리는 자신의 모습이 잘 상상되지 않았
다. 또 무도한 밀렵꾼들을 만나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자 등뒤에 식은
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거의 전설이 되다시피한 파름산 승려들과 밀렵꾼
들 사이의 오랜 반목을 현재에 계승하고 있는 사람을 찾아보라면 오레놀
이 그에 해당한다. 철없고 기고만장했던 행자 시절, 동료 행자들을 이끌
고 파름산을 누비며 밀렵꾼들을 두드려잡는 일로 나날을 보내곤 했던 오
레놀의 무용담은 아직까지도 행자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다.
그리하여 밀렵꾼들이 크게 개심하여 마침내 승려가 되었다면 이야기가
참으로 아름다웠겠지만, 밀렵꾼들은 대개 대사원에서 다친 몸을 치료한
다음 오레놀에 대한 흉측한 평판만 가지고 돌아갔고, 그래서 밀렵꾼들은
대사원의 주지 이름은 몰라도 '미친 땡중' 오레놀의 이름은 알고 있다.
그 밀렵꾼들에게 동물을 부탁한다면 밀렵꾼들이 오레놀을 얼마나 비웃겠
는가. 오레놀은 마지못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승려가 아니면 누가 죄를 이고 가겠습니까. 살신(殺神)을 막으려면 더
한 일이라도 해야겠지요."
사방으로 나부끼던 깃털이 서서히 내려떨어지는 가운데, 티나한은 두
손을 툭툭 털었다.
"잔치는 모두 끝났다. 집으로 돌아가라!"
"아무래도 병이 되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비형이 륜을 돌아보며 질문했다. 륜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르륵 떨어지는 티나한의 깃털 아래 인간들은 후줄근하게 두드려맞아
쓰러져 있었다. 원망의 눈빛과 신음이 티나한에게 집중되었지만 티나한
은 부리를 딱 부딪히며 땅에 꽂아둔 철창을 쑥 뽑아들었다. 거만한 걸음
걸이로 걸어온 티나한은, 그러나 부풀어올랐던 깃털을 가라앉히기 시작
했다. 그의 앞쪽엔 케이건이 앉아 있었다.
비형과 륜은 이제 흥미롭다는 표정을 케이건에게 돌렸다. 비형이 병이
라 진단한 활동에 티나한이 매진하는 동안 케이건은 다른 두 사람과 달
리 아무런 흥미도 관심도 없는 표정으로 조용히 풀만 뜯고 있었다. 티나
한은 겸연쩍어하며 말했다.
"어, 내가 5분도 걸리지 않을 거라고 했지? 음. 5분 안 됐지?"
케이건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끝났으면 출발해도 되겠소?"
"끝났어. 해도 돼."
쓰러져 신음하고 있던 '철권왕' - 그는 맨주먹으로 차돌을 깨는, 실로
왕에게나 어울리는 용력을 가지고 있어 왕으로 추대되었다고 한다. 설명
을 들은 티나한은 자신의 부리를 때려보라고 내밀었다. 무릎에 두 손을
짚은 채 부리를 내민 레콘에게 철권왕은 무모하게도 주먹을 휘둘렀다.
차후 그가 다시 왕이 되려 한다면 그는 자신을 편수왕(片手王)이라 칭해
야 할지도 모른다. - 은 고통 속에서도 의아한 표정으로 티나한을 바라
보았다. 철권왕은 조금 전 자신과 자신의 군대를 박살낸 두억시니 같은
레콘이 조그만 인간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비형은
화는 조금도 안 내고 친절함은 무한대로 발휘하는 케이건의 성격이 어떻
게 레콘을 쩔쩔매게 만드는가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주고 싶었지만 케이
건이 걸음을 이미 옮긴 후라 그럴 여유가 없었다.
싸움은 끝났지만 티나한의 흥분은 아직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앞장
서서 걸어가고 있는 케이건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티나한은 기세 오른 목
소리로 비형과 륜에게 수다를 떨었다.
"난 말이야. 제왕병 걸린 잡놈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별 신
경을 쓰지 않았지. 사실, 약간이지만 동질감도 느꼈어. 하늘치에 올라가
는 일이나 왕이 되는 일이나 도전인 것은 마찬가지잖아? 그래. 도전이라
구. 하지만 이제부턴 가만두지 않겠어. 내 눈앞에 그런 잡놈들이 얼씬거
리는 것은 절대로 봐넘기지 않을 거라구. 이제 확실해. 그런 놈들은 두
들겨 패서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오히려 도와주는 거야."
륜은 이제야 조금씩 이해하게 된 사실을 확인해보았다.
"그러니까 그 제왕병이라는 것은 진짜 병을 말하는 것이 아니죠? 왕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을 비꼬아 말하는 거죠?"
"그래, 맞아."
"북부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은가 보죠? 하긴, 조금 전의 그것이 벌써
네 번째였으니.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기 생업도 포기하고 헛된 꿈
을 쫓아 방랑하는지 모르겠군요. 게다가 따라 다니는 사람들은 뭐죠? 그
사람들은 왕의 신하가 되고 싶은 사람인가요?"
비형은 반색하며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입을 열기 전, 비형은 케이건
이 들려줬던 설명을 자신이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비
형은 다시 입을 다물었고 누군가의 부하가 된다는 개념이 거의 없는 티
나한은 어깨를 으쓱였기에 륜의 질문은 대답을 얻지 못했다.
길잡이 케이건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다시피 한 채 여행하고 있었기에
티나한과 륜, 비형은 그들이 지금 어디쯤에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 케
이건은 사막이나 황야, 계곡, 고산 등 일행에게 부담이 갈 만한 지형을
피하는 여정을 수립했기에 여행은 수월하기도 했다. 그러나 케이건에겐
걱정이 있었다. 쉬운 여정은 필연코 사람들의 도시를 만나게 된다.
케이건은 며칠 동안 그 사실에 대해 고민하다가 나머지 일행에게 의견
을 구했다. 다른 일행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케이건의 설명을 들었지만
머리속으론 '찬성!'이라고 말할 시간만 기다렸다.
"내일이나 늦어도 모레까지는 자보로에 들어가게 될 거요. 자보로를 다
스리는 세도 마립간에 대한 세평은 다양하지만 그가 누대에 걸쳐 자신들
의 땅을 지켜온 강인하고 수완 좋은 씨족의 후손임에는 많은 이들이 찬
성해줄 것이오. 안정된 땅이라는 거지. 좀 별나다는 평가도 있긴 하지
만."
비형이 반색하며 말했다.
"아, 세도 마립간에 대해서는 저도 압니다. 옛날에 만나기도 했지요.
옛날에 저희 성주님이 도깨비 감투를 상품으로 내걸고 씨름판을 벌인 적
이 있어요. 그 때 즈믄누리를 찾아오셨지요. 그렇게 연세 지긋하신 킴이
왜 그런 장난감을 탐내셨을까요?"
티나한은 피식 웃었다. 도깨비에겐 도깨비 감투가 장난감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다른 자들에겐 그렇지 않다.
"꽤 비참한 꼴 보고 돌아갔겠군. 그렇지?"
"예. 체격 괜찮은 킴들도 몇 명 데려오셨지만 모두 호되게 나가떨어졌
죠." 그리고 비형은 해묵은 의문을 다시 제기했다. "그러고보니 케이건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판막음을 했죠?"
"더 이상 덤비는 씨름꾼이 없어서." 케이건은 판막음의 상식적인 정의
로 대답해버리곤 계속 말했다. "어쨌든 비형 당신이 바우 성주의 몸종이
니 세도 마립간이 우리를 박대하지는 않을 거요. 비록 조금 전에 당신이
거론한 유쾌하지 못한 추억이 있다 하더라도. 하지만 륜에 대해 설명하
거나 하는 일은 번거로울지도 모르오. 쓸데없는 의심을 받을지도 모르
고. 그러니, 여러분들이 야외에서 먹고 자는 일에 진력이 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 땅을 피할 수도 있소. 하지만 자보로에는 사원이 있
소. 마립간에겐 들리지 않더라도 사원에 들러 혹 우리에게 온 지시 사항
이 있는지 들어보는 것은 괜찮은 일일 듯하오."
세 사람은 기다리던 일을 해치웠다. "찬성!" 케이건은 별말 없이 다시
일행을 선도했다.
케이건이 예측한대로 그들은 다음 날 오후 무렵 지평선에 걸려있는 성
벽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케이건은 배낭에서 방풍복을 꺼낸 다음
륜에게 입도록 했다. 그리고 사막을 여행할 때 쓰던 천으로 륜의 얼굴과
머리를 다 가렸다. 티나한은 륜이 이제 인간과 비슷하게 보인다고 평했
고 비형은 가짜 수염과 가짜 눈썹, 의족, 안대, 가발, 나무손 등의 '조
그만' 손질을 더하여 완벽을 기하는 편이 낫지 않겠냐고 열성적으로 제
안했다. 케이건은 비형의 의견을 진지하게 경청한 다음 품위있게 무시했
다. "두억시니로 보여질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되오."
그날 저녁, 일행은 자보로에 접근했다.
시구리아트 산맥의 남단부가 푼텐 사막에서 불어오는 열풍을 막고 있는
지점에 위치한 자보로는 성에 둘러싸인 거대한 도시였다. 륜은 그 모습
에 대단히 놀랐다. 륜은 왜 사람들이 도시에 드나들기 어렵게 저런 큰
담을 쌓아두었냐고 질문했다. 비형과 티나한이 각자 설명했지만 케이건
의 설명만큼 깔끔하진 못했다.
"키보렌 밀림과 마찬가지지. 우정 없이는 들어오지 말라는 거야."
케이건의 설명은 정확했지만 덕분에 일행의 분위기가 조금 묘해졌다.
그런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 비형은 짐짓 놀랐다는 듯이 성벽의 일부를
가리켜보였다.
"봐요, 륜! 저게 뭔지 알겠어요?"
륜은 비형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성벽의 위쪽 가까이, 정연하게
늘어서 있는 돌들 사이로 좀 기묘한 돌이 끼여 있었다. 형태는 성벽을
이루고 있는 다른 돌과 마찬가지였지만 그 빛깔이나 재질은 다른 돌과
달라서 눈에 잘 들어왔다. 비형은 감탄하며 말했다.
"저건 일부러 표시하기 위해 다른 색깔의 돌을 끼워둔 겁니다. 대호 별
비가 무라 마립간의 말을 물고 바로 저기로 넘었다고 하더군요. 말로만
들었는데 진짜 저렇게 해두었군요. 원래 있던 돌에는 별비의 발톱 자국
이 났고 그건 마립간궁에 보관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그렇죠, 케이건?"
케이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륜은 성벽을 올려다보며 질문했다.
"그런데 왜 중간 쯤에 끼여져 있죠? 그 대호가 성벽을 뚫은 건 아닐 텐
데."
"별비가 저 성벽을 뛰어넘은 다음 무라 마립간은 화가 나서 성벽을 더
높였어요. 그래서 저 돌은 저렇게 성벽 중간 쯤에 끼여있는 거죠. 그런
데 저 높이를 넘었다면, 와! 도대체 얼마나 높이 뛴 거죠?"
티나한이 자신있게 말했다.
"흥. 저까짓 것. 한쪽 발로도 뛰어넘을 수 있어. 해볼까?"
비형이 진짜로 한쪽 발로 뛰어넘어보라는 곤란한 제안을 꺼내기 전에
케이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관두시오. 티나한. 자보로 사람들을 불쾌하게 할 필요는 없소. 그 사
람들도 마음 속으론 저 성벽이 딱정벌레에 탄 도깨비나 당신들 레콘에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있소. 하지만 입밖으로 내어 인정하진 않
지. 당신에게 적의가 없다 하더라도, 고생해가며 저런 성벽을 쌓은 자들
의 눈 앞에서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보여주는 건 분명 무례한
일일 거요. 정문으로 갑시다."
케이건의 만류가 바람직한 것이었음은 정문을 지키던 병사들의 태도에
서 드러났다. 병사들은 도깨비가 포함된 일행에게 특별히 적의를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고 게다가 티나한이 성벽을 뛰어넘지 않은 것에 매
우 감명을 받은 눈치였다.
"자보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상식있는 분들이신 듯해서 기쁘군
요."
티나한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병사들의 우두머리는 곧 설명을 덧붙였다.
"이곳을 찾으시는 다른 레콘들은 저 성벽을 그냥 훌쩍훌쩍 뛰어넘곤 해
서 골치지요. 물론 우리 같은 인간들이 나무뿌리나 돌멩이 같은 것을 뛰
어넘는 것처럼 별 생각 없이 그러시는 거라는 걸 이해합니다만, 저 성벽
의 건설자인 우리들에겐 좀 불쾌한 일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성벽 바로
뒤에는 성벽에 기대어 사는 빈민들이 있습니다. 그 자들은 갑자기 움막
의 지붕을 뚫고 떨어지는 레콘에 질색을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런 식
으로 넘으면…"
케이건은 병사의 수다가 끝없이 이어지는 것을 중단시켰다.
"그럼 수고하시오."
그리고 케이건이 지나치려 할 때였다. 병사가 갑자기 손을 내밀어 케이
건을 정지시켰다. 케이건은 의아한 얼굴로 병사를 바라보았고 그러자 병
사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은편 여섯 닢입니다."
"무슨 말이오?"
"아, 조금 전에 하려던 말을 끝까지 못했는데, 그런 식으로 넘으면 통
과세를 받을 수 없다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쫓아다니며 받아야 하지요.
귀찮은 일입니다."
비형은 어이 없는 얼굴로 티나한을 바라보았다. 티나한은 이미 화를 내
고 있었고 그것은 부풀어오른 벼슬에서 잘 드러나고 있었다. 케이건은
담담하게 말했다.
"내 기억에 자보로가 산적이나 유료도로처럼 통과세를 받았다는 기억은
없소만."
"흠. 얼마 전부터 받게 되었지요. 한 사람 당 은편 여섯 닢."
"글쎄. 온당한 처신이 아닌 것 같소. 그런 식이라면 어떤 여행자도 자
보로를 찾지 않을 텐데, 그럼 곤란을 겪게 되는 것은 자보로가 아니겠
소?"
"나야 뭐 알겠습니까. 명령을 받았으니 그렇게 하는 거지요. 그리고 내
가 위엄왕에게 받은 것 중에는 통과세를 내지 않고 무단으로 들어서려는
자를 처벌할 권한도 있습니다."
다른 병사들이 무기를 꼬나들었다. 하지만 레콘을 앞에 둔 상태에서 그
것은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해달라는 애처로운 몸짓으로밖에 보이지 않았
다. 불행히도 티나한의 모습은 그들에게 위안이 되지 않았다. 티나한은
위엄왕이라는 이름에 어깨를 잔뜩 부풀렸다. 케이건은 그런 티나한에게
가볍게 손을 내밀어 제지시킨 다음 병사들의 우두머리에게 질문했다.
"미안하오만 그 위엄왕이라는 이름은 익숙하지가 않소. 자보로를 다스
리는 것은 세도 마립간 아니셨소?"
"세도 마립간께선 몇 년 전에 타계하셨습니다. 그 후 씨족의 추대를 받
아 지그림 자보로께서 마립간에 올랐지요. 하지만 지그림 자보로께서는
마립간이라는 이름을 버리시고 왕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왕명으로 자보
로에 들어서는 이들에게 통과세를 받도록 하셨지요."
티나한은 노기충천한 얼굴로 자보로를 지나쳐가자고 주장했다. 비형 또
한 씁쓸한 얼굴로 티나한에게 동조했다. 하지만 케이건은 품 속에서 돈
을 꺼내어 통과세를 지불했다. 티나한과 비형은 그런 케이건을 몹시 이
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순순히 통과세를 받은 것에 즐거워진 병사는
케이건이 묻는대로 사원의 위치를 소상히 알려주었다. 케이건은 병사에
게 목례한 다음 일행을 성벽 안쪽으로 이끌었다.
자보로의 성벽 너머의 풍경은 륜을 숨막히게 했다. 륜은 이런 형태의
도시를 상상할 수 없었다. 다닥다닥 붙은 집들과 지저분한 도로, 제멋대
로 지어진 건물들. 도시 어디에서도 륜은 일관성이나 균형감각 같은 아
름다운 요소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륜을 놀랍고 슬프
게 한 것은 그 건물들이 대개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주변
에 사람들이 별로 없는 틈을 타 륜은 비형에게 저 많은 나무들이 모두
온당한 장례식을 받았냐고 질문했다. 그의 예상대로 비형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냥 잘라서 써요. 하지만 그렇게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
는 것 같군요." 비형은 륜의 표정에 많이 익숙해져 있었다. "산것만 먹
는 당신들의 식습관이 다른 세 종족에겐 소름끼치는 걸로 보일 수 있다
는 점을 고려해 보겠어요?"
륜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때문에 많이 불쾌하십니까?"
"아뇨. 난 괜찮아요. 물론 아직도 똑바로 볼 자신은 없지만. 그런데 케
이건, 왜 그렇게 돈을 낭비한 거죠?"
비형의 말에 티나한이 다시 분통을 터뜨렸다.
"그래! 비형의 말이 맞아. 여기가 유료도로야, 뭐야? 얼마든지 그냥 지
나갈 수 있어. 그런데 왜 헛돈을 쓴 거야? 젠장, 은편 스물네 닢이라니.
너 부자야?"
앞장서 걷고 있던 케이건은 길을 살피며 말했다.
"나는 그렇게 부유한 사람은 아니오. 하지만 필요할 때 쓸 만큼은 지니
고 있소. 물론 그냥 지나칠 수도 있지만, 사원에 들러 몇 가지 알아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그렇게 한 거요."
"뭘 알아두려고?"
케이건은 잠시 침묵했다. 티나한이 조바심을 느낄 무렵 케이건은 갑자
기 말을 쏟아내었다.
"물론 지그림 자보로가 다른 제왕병 환자들과 달리 왕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왕의 해악은 끼칠 수 있을지도 모르오. 자보
로 씨족이 누대에 걸쳐 쌓은 재산과 힘이 있으니."
"왕의 해악?"
"지그림 자보로가 통과세를 받고 있다는 것은, 그것도 여행자를 화나게
할 정도의 고액을 받고 있다는 것은 그가 전쟁 자금을 모으고 있다는 의
미로 해석할 수 있소. 전쟁을 걸려면 상대가 있어야겠지. 이 근방에서
그가 정복할 만한 곳은 페치렌, 슈라도스, 메헴 정도일 거요. 그런데 모
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행로에 속해 있소. 그가 만일 영토확장 전쟁
을 벌일 생각이라면 우리는 그곳을 피해야 하오. 물론 륜을 데려다준 다
음 돌아올 때도 유용한 정보가 될 테고."
"이런, 맙소사! 미친 놈이잖아! 전쟁이라고?"
케이건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티나한 당신이 괴롭혀주던 자들은 사실 큰 해악을 끼칠 수도 없는 온
건한 장난꾼들이오. 활용할 수 있는 무력과 재산을 가진 제왕병 환자가
훨씬 위험하지."
티나한은 그 말에 한탄했다. 그 때 륜이 도무지 모르겠다는 투로 말했
다.
"북쪽에도 나가가 있나요?"
비형과 티나한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륜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이 되물었
다.
"지금 한계선 이북에 있는 나가는 너뿐일걸. 왜 그런 질문을 하지?"
"전쟁이라고 하셨잖습니까. 그 왕이라는 인간이 전쟁을 하려면 나가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티나한과 비형은 왜 전쟁을 하려면 나가가 있어야 하는 거냐고 되물었
고 그 질문은 륜을 혼란스럽게 했다. 하지만 케이건은 륜의 질문을 이해
했다. 륜이 알고 있는 가장 최근의 전쟁은 아마도 대확장 전쟁일 것이
다. 그리고 나가들끼리는 전쟁을 벌이지 않는다. 케이건은 핵심을 짚어
말했다.
"인간은 인간끼리 전쟁해."
륜은 더욱 혼란스럽다는 표정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왜요?"
"곡물을 먹기 때문이야. 곡물을 심으려면 땅이 필요하지. 더 많은 땅을
가지면 더 많은 곡물을 가질 수 있지.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을 뺏으려고 전쟁해."
"그런 어처구니 없는…"
"너희들도 그랬어."
"네?"
"너희들에겐 살아있는 것들이 많이 사는 밀림이 필요했지. 그래서 대확
장 전쟁을 벌여서 한계선 이남의 모든 땅을 점령하고 거기에 밀림을 만
들었지."
륜은 당황하여 말했다.
"하지만 그건 서로 사는 방식이 달라서 어쩔 수 없이 벌였던 일입니다!
우리 나가들은 다른 사람의 밀림을 뺏어서 거기 사는 동물까지 얻으려고
하지 않아요."
"나가들은 자식을 적게 낳지. 그리고 세계의 반을 차지하고 있고. 동물
이 부족하진 않아. 하지만 인간은 자식을 많이 낳고 곡물을 심을 땅은
부족해. 그러니 전쟁을 벌이지. 더군다나 왕이 생기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만큼 전쟁이 발생하지."
"왜 그렇죠?"
티나한은 케이건이 왕의 정복욕이나 통치욕에 대한 이야기를 할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케이건의 대답은 완전히 엉뚱한 것이었다.
"왕이 사람들의 눈물을 다 마셔버리기 때문에 사람들은 눈물 없는 비정
한 자들이 될 수 있거든. 그게 왕의 해악이지."
비형은 어렴풋이 케이건의 말을 이해했지만 다른 두 사람은 도통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다시 설명을 요구하려 했으나 어느새 사원에 도달
해 있었다. 그래서 케이건의 설명을 다시 듣지는 못했다.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의 우두머리는 다거트 슈라이트라 했다. 그리고
다거트 슈라이트는 매우 행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위엄왕이 성문 통과
자들에게 부과한 통과세는 은편 다섯 닢이었던 것이다. 그 얼빠진 여행
자들은 한 사람당 여섯 닢의 돈을 지불했고 따라서 다거트에겐 네 닢의
은편이 남게 되었다. 물론 공모자들인 다른 병사들과 나눠야겠지만 그렇
더라도 다거트를 행복하게 하기엔 충분했다. 다른 병사들 또한 즐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어이, 빨리 문 닫지? 해도 다 졌는데."
그들의 말은 물론 조속히 성문을 닫고 조금 전 그들에게 발생한 불로소
득을 이용하여 음성적 여흥에 매진하자는 의미였다. 다거트는 기분좋게
웃으며 성문을 닫을 준비를 갖췄다. 그 때 병사 하나가 손짓을 하며 말
했다.
"잠깐. 뭐가 하나 더 온다."
병사가 가리키는 곳을 본 다른 이들은 어둑어둑한 땅 위로 뭔가가 움직
이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것은 자보로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 분명
했다. 다거트 슈라이트와 병사들은 성문을 닫는 손길을 늦추었다. 그들
이 늦으막히 도시의 품으로 찾아드는 여행객을 배려한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은편 네 닢보다는 은편 다섯 닢이 제공할 여흥에 더 관심이 있었
던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어쨌든 그들은 느긋하게 성문을 닫았다. 그 때
다거트가 눈살을 약간 찡그리며 말했다.
"저거 레콘인가? 대단히 빠른데."
그 말에 병사들도 덩달아 이맛살을 찌푸렸다. 만약 레콘이 성문을 무시
한 채 성벽을 뛰어넘는다면 그들은 그 레콘을 찾아 성벽 주위를 뛰어다
녀야 한다. 그리고 결코 유쾌해하지는 않을 그 레콘에게 통과세를 받아
야 한다. 오늘의 행운이 혹 불쾌한 불운으로 끝나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
하며 병사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들에게 다가오는 것은 불쾌한 불운이 아니었다. 그것은, 끔찍
한 재난이었다.
병사들은 자신들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점차 커지는 그 모습은 분명
네 발로 달리는 동물의 것이었다. 병사들은 다시 서로를 쳐다보았고 상
대방의 얼굴에서 공포를 발견했다.
틀림없었다. 집채 만한 덩치, 선명한 얼룩 무늬, 흙먼지를 피워올리며
땅을 박차는 강인한 네 다리. 다거트가 목이 찢어질 듯이 외쳤다.
"대, 대대대, 대호다!"
"닫아! 성문 닫아!"
병사들은 성문에 몸을 부딪혔다. 거대한 성문이 심한 쇳소리를 내며 움
직이는 동안 병사들은 몇 번이나 성문을 팽개치고 달아나고 싶은 갈등을
느꼈다. 대호는 잔인할 정도의 속도로 커지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병
사들은 성문을 닫았다. 다거트가 빗장을 거는 순간 성문에서 무서운 충
돌음이 들려왔다. 병사들은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고 그 중 한 명은 엉
덩방아를 찧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성문을 할퀴는 소리를 들으며 그들은
성벽을 증축한 무라 마립간에게 지극히 감사하는 마음을 느꼈다.
그러나 다거트는 좀 다른 것을 생각했다. 빗장을 걸기 직전, 다거트는
좁은 문틈으로 본 대호의 무시무시한 모습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그리
고 다거트는 대호의 등 위에서 본 것이 황혼녘의 햇살이 만들어낸 환상
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본능은 그것이 검은 모피 망토로 몸을
감싼 사람이라고 계속 주장하고 있었다.
비형은 벼슬 끝까지 화난 레콘이 어떤 것인지 절감했다. 자보로 사원의
주지인 고다인 대덕이 성문 통과세가 은편 다섯 닢이라는 것을 말하자마
자 티나한은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을 한 창에 꿰어버리겠다고 날뛰었다.
비형과 륜은 좀 말리라는 듯이 케이건을 바라보았지만 케이건은 찻잔을
내려다보며 담담히 말했다.
"순진한 사람들이군요."
고다인 대덕은 피로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왕? 왕은 무슨. 그 꼴에서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아직 이
성 안의 사람들은 왕이 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진짜 왕이
라면 아랫것들의 그런 장난질을 결코 용서하지 않겠지요. 그리고 아랫사
람들 역시 그런 웃기지도 않은 속임수를 쓸 생각은 못할 테고. 지금 위
엄왕의 병사라는 것들의 기강은 산적들이나 황야를 떠돌아 다니는 제왕
병 환자들의 그것보다 낫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케이건은 고개를 끄덕이곤 그제야 티나한을 돌아보았다.
"티나한. 앉으시오. 나는 그 돈을 지그림 자보로의 병사들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본 대가로 생각하고 있소. 성문을 지키라고 보낸 병사들
수준이 그 정도이니 다른 자들은 볼 것도 없소. 그런데 고다인 대덕께서
도 순진하시군요."
티나한은 투덜거리며 자리에 앉았고 고다인 대덕은 어리둥절한 표정으
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웃지도 않으며 말했다.
"대덕의 속마음을 알아보기 위해 파견된 왕의 첩자가 꼭 자신을 첩자라
고 소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허헛. 이 땡초가 왕에게 무슨 위협이 될 거라고 지그림이 첩자씩이나
파견하겠습니까."
"위협이 아니라 도움입니다. 지그림 자보로가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다
면 대덕과 손을 잡는 것이 유용하다는 것을 생각해낼 겁니다. 저는 얼마
전 파계승 한 명이 달라붙은 제왕병 환자를 보았습니다. 그 파계승은 우
수한 지식으로 그 친구에게 많은 권위와 논리를 만들어주더군요. 조만간
대덕께도 비슷한 제안이 들어올지도 모릅니다. 왕을 위해 지혜를 바치라
는."
대수롭잖다는 표정으로 듣고 있던 대덕은 곧 걱정스러운 안색이 되었
다.
"그러면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부디 고견을 들려주십시오."
"저는 하룻밤 귀 사찰에 재워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그 점을 지
적해드린 것일 뿐, 나머지는 대덕께서 알아서 하실 일입니다."
"제발 이 미욱한 중에게 한 말씀만 해주셨으면 합니다. 지그림 자보로
는 자신을 위엄왕이라 참칭하게 된 이후 눈에 뵈는 게 없다는 듯이 굴고
있습니다. 안하무인도 그런 안하무인이 없지요. 그런 자가 제게 제안을
해온다면 전 두려워서 어떻게 대답도 못할 겁니다."
케이건은 눈썹을 약간 찡그렸다. 비형이 보기에 그것은 괜한 소리를 했
다는 후회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시 케이건이 입을 열었을 때는 언제나
처럼 단조롭고 친절한 말이 흘러나왔다.
"먼저 제 질문에 대답해주십시오. 지그림 자보로는 전쟁 준비 중입니
까? 돈을 모으고 있는 것을 보곤 그런 의심을 했습니다만."
고다인 대덕은 놀랐다는 듯이 말했다.
"예. 병사를 모으고 무서운 병기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물론 당신
이나 티나한 님의 저 병기보다 더 무서운 것은 못봤습니다만."
"언제쯤 전쟁을 일으킨답니까?"
"여러 가지 소문이 있습니다만 가을철이라는 이야기가 좀 그럴 듯하게
들리더군요. 추수한 곡식들이 쌓여있을 테니까."
"그건 별 도움이 안 되는군요. 지그림 자보로는 그보다 일찍, 혹은 더
늦게 전쟁을 일으키는 편이 좋습니다. 추수한 곡식을 지키려는 자들에게
서 그것을 빼앗기보다는 땅을 뺏은 다음 곡식을 추수하는 편이 좋으니
까. 어디를 친다는 말은 없습니까?"
"아, 그건 상대적으로 좀 뚜렷한 편입니다. 메헴과 자보로 사이의 오랜
원한이 있으니까요. 과거 마립간들이 있을 때도 메헴과 자보로는 몇 번
이나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위엄왕은 이번에야말로 메헴을 정벌해서 왕
으로서의 자신의 입지를 높일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 때문에 메헴 쪽에
서도 전쟁 대비를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알겠습니다. 메헴이군요. 그렇다면 조언을 드리겠습니다. 봉문(封門)
하십시오."
고다인 대덕은 놀랐다. "봉문이오?"
"예. 봉문하시고 안거하십시오. 고대의 진짜 왕들도 사원의 봉문은 존
중했습니다. 그래서 고대에 도망친 죄인을 보호하기 위해 사원이 봉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봉문을 하게 되면 저희들은 대사원으로부
터도 고립됩니다."
"지그림 자보로가 왕놀음을 오랫동안 하지는 못할 겁니다. 사람들이 말
하는 것처럼 사과를 받아야 할 키탈저 사냥꾼들이 없으니까 그럴지도 모
르지만, 제 생각으로는 현명한 자보로 씨족이 곧 지그림에게 제동을 걸
거라 여겨집니다. 그러니 그 때까지만 참으시면 될 겁니다. 물론 이것은
제 제안일 뿐입니다. 제 생각엔 가장 안전한 방법입니다만, 결정은 대덕
께서 하실 일입니다."
고다인 대덕은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를 나누기 전, 케이
건은 다시 티나한을 놀라게 할 만한 돈을 시주하며 객실에 군불을 때워
달라는 요청을 했다. 이런 계절에 어울리는 일이 아닌지라 대덕은 꽤 놀
랐다.
사원의 행자들도 어처구니 없는 요청에 의아해했지만 어쨌든 객실에 불
을 땠다. 행자들이 모두 돌아간 다음 방풍복과 천을 벗은 륜은 방바닥이
뜨거운 것에 꽤 놀랐고 비형은 그에게 온돌의 원리에 대해 설명해주었
다. 륜은 대단히 당혹했다.
"나무를 태워서 가열한다고요?"
비형은 당황하며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담담하게 말했다.
"비형도 좀 쉬어야 해. 계속 네 몸에 도깨비불을 붙여두면 제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