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3-3. 관련자료:없음 [52504]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4-05 00:44 조회:12256
눈물을 마시는 새.
3. 왕 잡아먹는 괴물 - 3
케이건과 비형, 티나한, 그리고 나늬가 떠난 후 몇 시간 쯤 지났을 때
또다른 방랑자가 남쪽에서부터 높새바람탑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방랑자는 익숙하지 않은 황야의 냄새에 불안한 듯 코를 벌렁거렸다. 내
딛는 발마다 피어오르는 황야의 살비듬 같은 먼지들도 방랑자를 불안하
게 하는 요소였다. 하지만 가벼우면서도 굳건한 발디딤 어디에도 그 불
안은 나타나지 않았다. 감정의 가장 깊은 부분에서부터 방랑자는 불안을
표현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방랑자는 자신이 위대하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에 대해 타인의 찬성을 요구해본 적은 없었다. 저등한 자들의 동
의는 필요없을 뿐만 아니라 모욕에 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토록
위대했기에 방랑자는 자신의 불안을 인정하지 않았다. 절구통보다 더 큰
머리에서부터 웬만한 인간의 허벅지보다 더 굵은 꼬리에 이르기까지 보
이는 것이라곤 제왕다운 위엄뿐이었다.
그렇게 대호는 늠름하게 황야를 가로질렀다.
대호에겐 이름이 없었다. 오래 전, 키탈저 사냥꾼들은 가장 무서운 대
호들에게 존경을 담아 이름을 붙여주었다. 무라 마립간의 애마를 입에
문 채 성벽을 뛰어넘었다는 저 위대한 별비 같은 대호가 그러했다. 밤하
늘을 뛰면 별이 다 사라진다 하여 그 거대한 대호에게 '별을 쓸어내는
빗자루'라는 의미의 이름을 붙여준 키탈저 사냥꾼들은, 만약 지금까지
남아있었다면 이 위풍당당한 대호에게도 그들 특유의 작명 감각을 발휘
하고 싶어할 듯하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지상에 없었다. 그리고 대
호는 자신의 이름을 짓지는 않았다. 문득 대호는 이름을 가지면 어떨까
생각하며 자신의 등에 실린 나가를 흘끔 돌아보았다.
나가는 대호의 등에 엎드린 채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대호는 자신
이 이름을 가진다면 그 나가에게서 받고 싶다고 생각했다.
무너진 탑이 가까워졌다. 높새바람탑을 바라보던 대호는 그 주위를 감
도는 온갖 냄새에 놀랐다. 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대호는 귀
를 뒤로 젖힌 채 철사 같은 수염을 곤두세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곧
대호는 그들이 이곳을 떠났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냄새가 배인 곳
에는 다시 사람들이 돌아올지도 모른다. 대호는 탑을 피하고 싶었다. 냄
새들 중에는 곤란하게도 레콘의 것도 있었다.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대호였지만, 레콘만큼은 꺼림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대호는 등 뒤에 실려있는 나가가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결국 대호는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탑 안쪽에 들어섰다.
천장이 없어 하늘이 보였지만, 탑은 동풍을 막아주었다. 탑 가운데 선
대호는 뒷다리를 구부려 앉았다. 그러자 등 뒤에 실려있던 나가는 스르
륵 미끄러져 땅에 쳐박혔다. 대호는 불안한 듯 끙끙거리며 나가의 목을
가볍게 물려 했다. 새끼를 운반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나가의 목 주위
피부는 대호 새끼의 그것처럼 유연하지 못했다. 대호는 조금 고민하다가
앞발을 서툴게 놀려 나가를 뒤집어 놓았다. 나가는 팔다리를 맥없이 던
지며 똑바로 누웠다. 시체 같은 모습이었다.
대호는 나가 옆에 몸을 바싹 붙인 채 옆으로 누웠다. 그리고 큼직한 왼
쪽 앞다리를 조심스럽게 나가의 몸 위에 얹었다. 앞다리 하나 뿐이었지
만 그것만으로도 나가의 몸 대부분을 덮을 수 있었다.
반 시간 가까이, 대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바람을 막아주는 탑 안에서 반 시간 동안 대호의 체온을 전달받자 나가
는 마침내 눈을 떴다. 의식은 아직 불분명했지만 나가는 무시무시한 추
위에 본능적으로 대호의 품을 파고들었다. 대호는 나가가 그러도록 내버
려두었다. 그리고 다시 얼마 후, 마침내 나가는 완전한 의식을 회복했
다. 잠깐 동안 나가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깨닫지 못해 어리둥절해 했
다. 심지어 나가는 자신이 누군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가는 추
위에 너무 오랫동안 노출되어 있었던 때문일 거라 생각하며 조바심내지
않은 채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마침내 나가는 자신이 사모 페이임을, 그리고 자신이 길이가 몇 뼘씩
되는 대호의 털 속에 몸을 깊이 파묻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모는 미소지
으며 일어나 앉았다. 두 다리를 대호의 배 밑으로 밀어넣으며 사모는 대
호의 허리에 머리를 얹었다. 그 자세에서 고개를 돌린 사모는 대호의 얼
굴을 바라보았다.
[고마워, 대호.]
니름을 듣지 못하는 대호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사모는 똑같은
말을 육성으로 말했고, 그러자 옆으로 누워 있던 대호는 고개를 조금 들
어 사모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땅바닥에 머리를 뉘였다. 사모는 빙긋 웃
고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이 무너진 탑 안쪽에 앉아있
음을 깨달은 사모는 밖으로 나가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
뿐, 그녀는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지금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간
그대로 기절해버릴 것이다. 오늘 하루 종일 그랬던 것처럼. 대호의 털
속으로 머리와 두 팔을 파묻으며 사모는 잠깐 동안이라도 몸을 뜨겁게
할 방도가 없을까 고민했다.
[나도 너처럼 긴 털을 가지고 있으면 좋을 텐데.]
대호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사모는 지난 며칠 동안
계속해온 고민을 다시 떠올렸다.
사모는 자신이 정말 대호를 정신억압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키보렌의 끝자락, 넓은 초원에서 느닷없이 대호와 마주쳤을 때 사모는
그 모습에 압도되고 말았다. 대호는 코끼리 떼와 대치하고 있었다. 사모
는 대호가 코끼리를 사냥할 작정임을 깨달았지만 보통의 육식동물에게선
볼 수 없는 괴상한 모습에 놀랐다. 그 큰 체격 때문에 수풀 속에 몸을
숨긴다거나 하는 것이 불가능하긴 하겠지만, 그렇더라도 정면에 앉아서
그렇듯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일반적인 포식동물의 모습에 비
추어 너무도 이질적이었다. 더군다나 달아나지 않은 채 마주보고 있는
코끼리 떼의 모습은 더욱 이상했다.
바위 뒤에 몸을 숨긴 사모가 바라보는 가운데 코끼리 가운데서 늙고 거
대한 암코끼리 한 마리가 걸어나왔다. 사모는 그 암코끼리가 무리의 지
도자임을 깨달았다. 지도자가 앞으로 나오자 대호는 바로 그것을 기다렸
다는 듯이 벌떡 일어섰다. 암코끼리가 먼저 도전의 포효를 내뿜었다. 길
다란 코를 울리며 내뿜은 소리는 천지를 울릴 듯했다. 대호는 아무 소리
도 내지 않은 채 다만 발톱을 곤두세웠다.
두 거수(巨獸)의 투쟁은 격렬하고 비극적이었다. 하지만 사모는 그 놀
라운 싸움보다 다른 코끼리들의 반응에 더욱 놀랐다. 한 자리에 모여 있
던 코끼리들은 싸움이 시작되자 흩어져서는 먹이를 먹기 시작했다. 암코
끼리의 등에 뛰어오른 대호가 그 목을 물고 발톱을 잔뜩 세운 앞발로 코
끼리의 눈을 할퀴어 마침내 암코끼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을 때
도, 코끼리 무리는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대호 또한 그
런 코끼리들을 무시한 채 그 자리에서 암코끼리의 숨통을 끊고 그 살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마치 각자 좋아하는 음식을 앞에 두고 사이좋게 식
사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사모는 사태를 깨달았다. 암코끼리는 자
신을 희생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대호는 암코끼리에게 결심을 끝낼 기회
를 준 채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힘을 합쳐 싸우면 쫓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왜 그러지 않
지?]
사모는 코끼리들의 정신을 파고들었다. 코끼리들의 지혜로운 정신 속에
는 꽤 쓸만한 개념들이 많았고 덕분에 사모는 어렴풋이 사정을 깨닫게
되었다.
대호의 배를 채우는 데는 한 마리의 코끼리면 충분하다. 하지만 대호와
싸우게 되면, 분노한 대호는 먹지도 않을 코끼리들을 모조리 때려눕힐
것이다. 그런 식이 되면 코끼리들은 모두 죽게 되고 대호 또한 굶어죽게
된다. 그 무서운 포식자와 지혜로운 피식자들은 이미 오래전에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해 있었다.
그 때 코끼리의 갈비뼈 사이에 머리를 박고 있던 대호가 머리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사모가 숨어있는 바위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겁에
질린 사모는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도망칠 방도를 궁리해보았지만 그
런 방법은 없었다. 주위는 개방된 초원이었고 사모는 대호보다 빨리 뛸
수 없었다. 사모는 바위 뒤로 몸을 더욱 움츠렸다.
나가인 사모가 아니었더라도 발소리는 듣지 못했을 것이다. 대호는 그
토록 조용히 다가와서는 느닷없이 바위 뒤로 머리를 내밀었다. 피에 젖
은 대호의 거대한 얼굴과 정면으로 마주쳤을 때 사모는 엉겁결에 정신억
압을 시도했다.
대호는 그녀를 잡아먹지 않았다.
대호는 공격하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앉았다. 엉덩이를 땅에 붙인
채 앉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호는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모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대호는 그녀의 뜻대로 움직여주었다. 그녀가 개념과 의지을 보내면 대
호는 그대로 행동했다. 하지만 그런 정확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사모는
대호가 정신억압된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대호는 분명 어리석은 생
물이 아니었다. 그녀가 추위 때문에 기절하여 아무런 지시를 내릴 수 없
는 상황에서도 대호는 적절한 행동을 취하여 그녀를 다시 깨어나게 했
다. 그런 영리한 생물을 억압하는 것은 대단히 높은 수준의 정신억압자
들에게도 벅찬 일이다. 그리고 사모의 정신억압 능력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못되었다. 사모가 쥐를 손질하는 데 정신억압 능력을 사용하곤 했
던 것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부엌칼로 대호를 잡은 꼴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나가들의 표현대로 몸빠진살로 용을 잡은 것이거
나. 사모는 육성으로 질문했다.
"대호. 내가 정말 너를 정신억압한 거니?"
대호는 여전히 머리를 옆으로 누인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목을 길게
빼서 대호의 얼굴을 바라본 사모는 대호가 이미 잠들어 있음을 알게 되
었다. 사모는 웃으며 다시 대호의 털 속으로 몸을 파묻었다. 그리고 내
일의 일에 대해 걱정했다.
각오하고 있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한계선 북부의 추위는 사모를 놀라
게 만들었다. 대호의 등에 탄 채 이동한 몇 시간은 사모를 그대로 기절
시켰다. 내일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 것임은 분명했고, 사모는 무슨 수를
내어야 했다. 하지만 아무런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것은 사모에겐
날씨를 바꾸려 시도하는 것만큼이나 황당한 일로 여겨졌다. 사모는 절망
감 속에서 잠들었다.
무적왕의 또다른 이름은 토디 시노크였다. 그가 54년 동안 자신의 이름
으로 여겼던 것은 사실 후자였다. 그러나 페치렌의 피혁상 토디 시노크
가 영웅왕의 49대손 무적왕으로 바뀌는 데는 채 1년도 걸리지 않았다.
무적왕은 이제 토디 시노크라는 이름을 거의 잊어버렸다.
무적왕은 자신의 천막을 바라보았다.
무적왕의 부대가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천막은 무적왕 자신의 천막 하
나뿐이었다. 피혁을 거래하며 쌓은 재산 모두를 처분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적왕은 하나 이상의 천막을 장만할 수 없었다. 그나마도 원래 피혁상
이었기에 가지고 있던 가죽을 이용하여 딸과 함께 만든 것이다. 무적왕
은 '그 날'이 오면, 그러니까 왕국을 재건하고 수도를 정하고 궁궐을 건
설하게 되면 그 천막을 왕가의 보물로 간직할 소망을 품고 있었다. 그는
왕손들에게 '이것이 내 첫 번째 궁전이었단다'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
러나 선지자는 그 소망에 언짢은 기색을 보였다. 선지자는 그것이 왕의
체통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신의 목소리를 듣는 이 성스러운
인간을 설득하는 것은 무적왕에겐 언제나 벅찬 일이었고, 그래서 무적왕
은 그 소망을 내비치는 것을 되도록 삼가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는 이
고집센 노인이 못 이기는 척 승락해주는 날이 올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
했다.
그리고 지금, 무적왕은 왕손들에게 들려줄 이야기에 살을 덧붙이고 있
었다. '바로 이 천막에서 너희 어머님은 못된 마귀가 씌워놓은 나가의
껍질을 벗으시고 인간이 되셨단다.'
무적왕은 넋을 잃은 채 자신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왕손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유일한 가족이었던 딸이 못된 뱀의 아
이를 낳다가 죽은 이후로 무적왕은 자손에 대한 생각을 잊을 날이 없었
다. 딸을 떠올린 무적왕은 잠시 침울해졌다. 그러나 무적왕은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지자는 늘상 왕은 나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고 강조
했다. 무적왕은 그 말을 따르려 애써왔다. 지금도 무적왕은 희망찬 생각
을 떠올렸다.
'이제 곧 왕비가 생길 것이다. 나늬 같은 미녀일 거야. 그리고 왕자와
공주가 태어나겠지. 다시 가정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거야.'
무적왕의 열성적인 노력은 성공했다. 실제로 무적왕의 입가엔 미소가
떠올랐다. 천막에서 나오던 선지자는 그 미소를 발견하고는 덩달아 웃었
다.
"페하. 소인입니다. 즐거운 생각을 하셨습니까."
"아, 선지자인가. 천막을 보고 있자니 즐거움이 짐의 마음을 가득 채우
더군. 그녀는 괜찮은가?"
"예. 지금 편히 누워 계십니다."
"그 모습은 정말 흉하더군. 나가들은 모두 그렇게 생겼나?"
선지자는 잠시 웃었다.
"폐하. 이 북부에 사는 사람들치고 나가를 본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사실 그 마귀가 나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저
도 그것을 마귀의 일종으로 여기지 나가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럭저럭 괜찮게 생긴 생물이더군요. 어쨌든 나가
또한 선민 종족이잖습니까? 만약 나가들이 우리를 보면 우리가 물고기처
럼 괴상하게 생겼다고 질색할 겁니다."
"그런가? 하지만 짐은 그런 모습을 사랑할 수야 없을 것 같아. 언제쯤
이면 그녀가 나가의 껍질을 완전히 벗고 짐에게 나늬처럼 고운 모습을
보여줄까?"
"저는 마귀들의 마법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 사특한 지식
들은 너무 가까이 하면 필경 마귀의 꼬임에 넘어가게 마련이지요. 그래
서 저는 그것을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마귀가 도망쳤고, 이렇
듯 왕의 곁에 모셨으니 이제 곧 인간이 되실 거라 생각합니다. 조금 전
제가 살펴보았을 땐 이미 몸 전체에서 피부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음. 그런데 말이야. 짐이 만지니까 피부가 일어났었지. 그럼 계속 만
져야 되는 것 아닐까? 저렇게 홀로 놔둘 것이 아니라?"
"아닙니다. 폐하께서 그 성스러운 손으로 그 분을 일깨우신 것으로 충
분합니다. 이제부터는 그 분 혼자서 자신의 노력으로 스스로를 찾아야
합니다. 저 사악한 발 달린 뱀이 폐하의 시험이었던 것처럼, 이것은 그
분의 시험인 것입니다. 시련이 없으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무적왕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그 마귀는 선지자 그대의 시험이었던가?"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말이야. 그 마귀, 괜찮을까? 어, 아버지가 생전에-"
"정의왕 폐하 말씀이십니까?"
아버지에 대해 묻는 선지자의 질문에 무적왕은 '절대로 남의 돈을 떼먹
지 않는 분이셨다'고 대답했고, 그러자 선지자는 즉석에서 그런 멋진 이
름을 지어보였다. 무적왕은 자신의 기억력을 탓하며 말을 정정했다.
"그래. 정의왕께서 생전에 피혁을 사러 온 레콘 한 명과 크게 언쟁을
벌인 일이 있었어. 옆에서 보고 있던 짐은 젊은 혈기에 분노를 참지 못
해 물동이를 가져와 그 레콘에게 퍼부으려고 했지. 그런데 정의왕은 재
빨리 나를 만류하셨지. 그리고 그 레콘을 돌려보낸 다음 짐을 꾸짖으셨
네. '레콘이 물을 제일 두려워 한다고 해서 레콘에게 물을 뿌리는 것은
천하에 둘도 없는 바보짓이다. 아무 해도 끼치지 못하면서 세상에서 제
일 끔찍한 복수자만 만들 뿐이니까'라는 것이 정의왕의 설명이셨어. 그
말씀을 생각하다 보니 짐은 자네가 걱정스러워."
"정의왕 폐하께선 매우 현명하신 분이셨군요. 그 말씀이 옳습니다. 하
지만 아까 그것은 레콘이 아니라 마귀입니다. 진짜 레콘이라면 모를까,
그런 마귀 따위는 몇 번을 되돌아온다 해도 모두 물리칠 수 있습니다."
"정말 대단하네! 짐이 자네를 만난 것은 영웅왕의 가호일세."
선지자는 위엄 있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운명입니다. 폐하의 운명이 저를 폐하께 이끈 것입니다."
무적왕은 거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 때 선지자가 다시 말했다.
"그리고 이 검 또한 폐하의 운명이십니다."
선지자는 등 뒤에서 륜의 사이커를 꺼내어 공손히 내밀었다. 무적왕은
그것을 받아들고는 감탄했다.
"이거, 사이커잖은가?"
"아니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하늘이 폐하께 그 따님을 보내며
주신 결혼 예물입니다. 당연히 제왕에게 어울리는 검일 터, 이 검은 분
명 쉬크톨일 것입니다."
"쉬크톨!"
무적왕은 놀라며 사이커를 뽑아들었다. 만곡한 그 칼날은 밤 속에서 눈
부시게 빛났다. 전(前) 피혁상은, 54년 동안 만져본 칼이라곤 천 자르는
투박한 손칼뿐임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자신 속에 숨어있던 검사(劍士)의
본능이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선지자는 머리를 조아렸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한계선 북부로는 단 한 자루도 넘어오지 않았다는
명검 쉬크톨입니다."
무적왕은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전 받아든 칼을 두 손으로
쥔 무적왕은 그것으로 밤하늘을 겨냥해 보이며 외쳤다.
"하늘이여! 잊혀졌던 왕손에게 내려주신 귀한 뜻에 감사드리나이다. 그
날이 오면, 맹세하겠나이다. 나 무적왕은 바로 이 검으로 일천 마리의
소를 잡아 하늘 앞에 제를 올리겠나이다!"
선지자는 그 앞에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무적왕 폐하 만세!"
무적왕과 선지자가 감동적인 언사를 나누고 있는 동안 천막 안에서는
륜이 고통과 수치심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지독한 고통 자체는 매년 한두 번씩 겪던 것이라 익숙했
지만 이 살을 에는 혹한의 땅에서 이런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허물을 벗
고 있다는 것은 륜을 더없이 비참한 기분 속으로 몰아갔다. 도깨비불을
놓도록 배려했던 케이건과 달리 무적왕 일행은 천막 안에 불을 피우지도
않았다. 인간의 기준으로는 선선한 밤이었기 때문이다. 그 추위만으로도
륜을 죽일 정도였지만, 조금 전까지 그의 곁에 앉아 부끄럽게도 몸 곳곳
을 눌러대며 "곧 벗겨지겠군요. 기운내십시오." 어쩌고 하는 소리를 지
껄이던 노인은 륜에게 더할 나위 없이 처참한 기분을 선사했다.
끊임없이 은루를 흘리던 륜은 문득 비늘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다음 허물벗기는 어디서 하게 될까?'
방문할 가문 같은 것은 없다. 한계선을 넘어왔기 때문에. 돌아갈 수도
없다. 심장을 적출하지 않은 비에나가이기 때문에. 륜은 다음 허물벗기
또한 이곳 혹한의 땅 북부에서 해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며 몸을 떨었다.
아니, 다음 허물벗기뿐만이 아니다.
살아있는 나날 동안 계속 그렇게 해야 한다.
모든 것을 그의 입장에서 고려하여 세심하게 보호해주던 케이건과 무참
하게 결별 당한 상태에서, 륜은 비로소 한계선 북부의 공포를 뼈저리게
절감했다.
요스비는 닐렀다. [작별이군. 내 아들아.] 그 니름만 남겨놓고 죽은 요
스비처럼 되고 싶지 않았기에 륜은 심장 적출을 거부한 채 키보렌을 떠
났다.
화리트는 닐렀다. [가! 디듀스류노!] 그래서 륜은 이곳, 나가들이 꿈에
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혹한의 땅까지 왔다.
그러나 냉혹한 죽음을 피해, 우정의 완성을 위해 찾아온 이 땅에서 륜
이 발견한 것은 죽음과도 같은 추위와 광신이라는 미쳐버린 우정뿐이었
다. 륜은 정신적 웃음을 터뜨렸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희극이었다.
은루로 볼을 적신 채 륜은 크게 웃었다.
무엇보다도 웃기는 것은, 륜은 자살할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심장을
적출하지 않았기에 언제라도 원하면 이 희극을 벗어날 수 있었지만, 륜
은 그럴 수 없었다. 화리트는 그에게 자신의 사명을 '부탁했다.' 륜의
정신을 완전히 지배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그 부탁은 륜에겐 본능보다 더
중요했다.
화리트가 그의 죄책감을 완전히 매듭지었기에 륜은 마음껏 화리트를 저
주했다.
[이 용 같은 자식, 이 도깨비 같은 자식아!]
륜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나가처럼 욕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
깨비는 그의 동료였고 용은 그의 배낭 속에 있었다. 고개를 돌릴 힘조차
없었기에 륜은 힘겹게 눈만 움직여 배낭을 곁눈질했다. 그의 배낭은 옷
가지와 함께 천막 한쪽에 놓여있었다. 자칭 선지자라는 노인은 륜의 사
이커에만 관심이 있어 다른 짐은 뒤지지 않았다. 요스비의 유품을 뺏겼
다는 사실에 다시 슬퍼하며 륜은 배낭을 향해 닐렀다.
[아스화리탈. 그래도 네가 발견되지 않아서 다행이야. 하지만 곧 그들
이 내 짐을 뒤지겠지. 그러니, 제발 눈을 떠라. 눈을 떠서 도망가. 자신
도 보호하지 못한 채 부끄러운 알몸을 드러내고 있는 나는 너를 더 이상
보호해줄 수 없어.]
배낭이 꿈틀거렸다. 륜은 놀라서 배낭을 주시했다. 하지만 곧 륜은 그
것이 자신의 눈에 어린 은빛 눈물 때문에 일으킨 착각이었음을 깨달았
다. 배낭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움직였잖아! 그 때 분명히 움직였어. 제발 눈을 떠! 부탁이야!]
륜의 시야 속에서 무엇인가가 급하게 움직였다. 륜은 황급히 눈꺼풀을
깜빡여 은루를 짜내었다. 움직인 것은, 그러나 이번에도 배낭이 아니었
다.
천막 자락이 급하게 쳐들려진 곳에는 선지자가 그림자가 잔뜩 드리워진
얼굴을 한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그토록 어두운 까닭은
빛을 등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가가 볼 수 있는 그 빛은 분명 열이었
다. 수치심 속에서도 륜은 이 밤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뜨거운가 의아해
했다.
륜이 본 열의 반 정도가 비형의 작품이라면 나머지 반 정도는 티나한에
게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티나한이 휘두르는 철창은 공기와
마찰하며 달아올랐고 땅을 스칠 때마다 대지에서 불꽃을 무더기로 퍼올
렸다. 어설프게 선지자의 흉내를 내어보려는 병사들이 물통을 들고 달려
왔지만 어디선가 나타난 케이건이 바라기를 휘둘러 물통을 박살내었다.
무장하고 있는 마흔 명의 병사들이 있었지만 티나한과 케이건에게 작은
상처 하나도 입히지 못했다. 나늬에 탄 비형이 그들의 머리 위를 날아다
니며 병사들의 두 눈에 뜨겁지는 않지만 대단히 밝은 도깨비불을 붙였기
때문이다. 병사들은 두 눈을 가리는 환한 어둠 속으로 아무렇게나 무기
를 휘둘렀지만 동료의 다리를 베거나 자기 턱을 때리는 것이 고작이었
다. 비형은 케이건이 가르쳐준 그 기술에 완전히 푹 빠져버렸고, 그런
매혹은 꽤 인상적인 방법으로 표현되었다. 즉 비형은 병사들의 두 눈을
가리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들의 머리에 토끼 귀를 달아주고 등에
딱정벌레 날개를 달고 엉덩이에 다람쥐 꼬리를 붙여주었다.(가끔 물고기
꼬리도 있었다.) 도무지 비정한 전장의 광경이 될 수 없는 그 모습에 분
노의 화신처럼 습격에 뛰어들었던 티나한마저도 더 이상 분노를 불태울
수 없었다. 티나한은 하늘을 향해 제발 이 웃기는 짓 좀 멈추라고 외쳤
지만 딱정벌레 날개 소리 때문에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던 비형은 웃
으며 대답했다. "뭐 별 것 아닙니다! 특별히 보고 싶은 것 있으세요?"
결국 티나한은 두 손 든 채 철창을 거둬들였다. 그리고는 앞이 보이지
않아 허둥거리는 병사들의 뒤로 걸어가 그들의 뒤통수를 툭툭 치기 시작
했다. 물론 병사들은 픽픽 쓰러졌다. 습격이 시작된지 채 몇 분도 지나
지 않아 무적왕의 야영지에는 더 이상 서있는 병사가 없었다. 오직 무적
왕만이 경악한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케이건은 무적왕을 완전히 무시한 채 쓰러진 병사들을 한 자리로 모았
다. 케이건의 모습을 본 티나한은 한 번에 두세 명씩의 병사들을 주워
날랐다. 졸도한 병사들이 한 자리에 모이자 케이건은 비형을 향해 손짓
했다. 비형은 나늬를 착륙시켰다. 다가오는 비형을 향해 케이건은 간단
한 주문을 했다.
"비형. 불로 저 자들 주위에 울타리를 만드시오. 나오지 못하도록."
비형은 씩 웃고는 손을 휘둘렀다. 졸도한 병사들 주위로 불의 원이 화
르르 피어올랐다. 병사들이 감금되자 케이건은 바라기를 다시 등 뒤에
건 다음 무적왕을 향해 걸어갔다. 티나한과 비형, 그리고 나늬가 그 뒤
를 따랐다.
무적왕은, 제위 이후 최고의 용기를 보여주었다.
무적왕은 허리에 찬 사이커를 뽑아들어 케이건의 가슴을 겨냥했다. 티
나한은 폭소를 터뜨렸지만 케이건은 나직이 말했다.
"이렇게 소란스럽게 찾아온 점 사과하겠소. 하지만 당신들이 내 동료를
억압하고 있으니 예의를 갖출 여유가 없었소."
"도도도동료?"
케이건은 무적왕이 조금도 더듬지 않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렇소. 뭔가 오해를 하셨던 듯한데, 당신들이 데려간 자는 내 동료인
나가요. 우리는 그를 돌려받고 싶소. 그리고 지금 당신이 들고 있는 그
칼 또한 내 동료의 물건이니 돌려받아야겠소."
조금 전 목격한 무시무시한 위력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케이건의 차분
한 말투는 무적왕을 꽤 혼란시켰다. 그러나 무적왕은 차츰 자신들이 뭔
가 말도 되지 않는 실수를 저지른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그
런 느낌은 마침내 무적왕 자신의 지난 1 년 동안의 여정에도 적용되었
다.
전(前) 페치렌의 피혁상 토디 시노크는 쓰러진 병사들을 둘러보며 생각
했다. '내가 도대체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그 질문 자체는
어떤 인생을 사는 누구에게라도 몇 번씩은 찾아오는 것이지만 토디 시노
크에게 그 질문은 각별했다. 토디의 손에 들려있던 사이커가 천천히 아
래로 내려갔다.
"발칙한 것들! 감히 왕에게 명령을 하느냐!"
광포한 외침과 함께 천막의 휘장이 거칠게 젖혀졌다. 그 뒤에서 나타난
것은 선지자였다. 순간 티나한이 야수의 신음을 흘리며 앞으로 돌격했
다.
"너!"
케이건이 재빨리 티나한의 왼팔을 움켜잡았다. 달리는 말을 붙잡으려
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잠깐 동안이지만 케이건은 두 발을 완전히 땅
에서 뗀 채로 끌려갔다. 케이건의 존재를 깨달은 티나한이 걸음을 멈췄
고 반대쪽에서 비형이 오른팔에 매달린 덕분에 케이건은 가까스로 두 발
을 도로 땅에 붙이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비형이 곤욕을 치르게 되었
다. 티나한이 비형을 깨닫지 못한 채 철창을 쥔 오른팔을 마구 움직였기
때문이다.
"너 이 새끼, 그걸 뿌렸겠다! 내게 감히 그걸! 너 오늘 뼈 개수 두 배
로 늘어나는 줄 알아라!"
호통을 치던 티나한은 문득 무적왕이 입을 쩍 벌린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티나한은 케이건을 돌아보았고 케이건은 손을 들어 티
나한의 오른팔을 가리켰다. 자신의 오른팔을 본 티나한은 그 팔뚝에 거
의 기절한 도깨비가 데롱데롱 매달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티나한이 비틀거리는 비형을 똑바로 세워놓는 동안 선지자가 가래 끓는
목소리로 외쳤다.
"네 이놈들! 왕에게 감히 명령을 한 것으로도 모자라 감히 왕을 위협하
는구나! 그 무엄한 언동에 꿈쩍이라도 하실 폐하가 아니시다!"
티나한은 다시 벼슬을 곤두세웠지만 케이건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
다. 케이건은 선지자를 향해 말했다.
"노인장. 그 나가를 돌려주시오."
"허튼 소리하지마라. 이 분은 우리의 국모님이시다! 왕손을 배출하실
거룩한 태의 주인이시다! 보아라!"
선지자는 옆으로 몸을 틀어 무엇인가를 들어올렸다. 잠시 후 그가 밖으
로 나왔을 때 비형과 티나한은 신음을 흘렸다.
선지자는 륜을 두 팔로 안아든 채 걸어나왔다. 륜의 모습은 끔찍했다.
거의 모든 살갗이 윤기를 잃은 채 희게 말라있었고 그것들이 찢어지고
갈라지며 썩은 나무 껍질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륜은 마치 찢
어진 천조각을 대충 기워 만든 것처럼 보였다. 선지자는 승리감에 찬 목
소리로 외쳤다.
"봐! 보아라! 이제 이 분은 너희들이 씌워놓은 추악한 껍질을 벗고 계
신다. 너희들은 너무 늦었다!"
케이건은 선지자의 말에는 귀기울이지 않았다. 대신 케이건은 륜의 눈
을 바라보았다. 눈 주위의 허물은 이미 많이 떨어져나간 상태였고 꼼짝
할 수 없는 몸 대신 그 눈이 륜의 감정을 보내어오고 있었다.
니름을 들을 수 없어도, 케이건은 륜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나가는 그런 짓을 좋아하지 않소. 노인장."
"나가가 아냐! 우리 왕비님이시다!"
"그렇게도 왕을 원하오?"
"뭐라고?"
케이건은 무적왕을 흘깃 돌아보고는 말을 이었다.
"왕이 무엇이오?"
"뭐라고?"
"키탈저 사냥꾼들이 부당한 모욕을 받고 만민회의장을 떠난 이후 800
여년 동안 이 북부에는 더 이상 왕이 없었소. 저 아둔한 자칭 권능왕과
어리석기로는 마찬가지인 그 아들을 거론하는 것은 웃음거리도 되지 못
할 것이오. 이 땅이 800 여년 동안 잊고 있었던 그 자, 그리고 이 땅이
800 여년 동안 찾아내려 애쓰는 그 자, 왕은 뭐요. 말해보시오."
"가장 위대한 자다. 만물의 하나뿐인 주인이시고 법칙의 절대적 수호자
이시다! 홀로 위대하신 그 분에게 이 땅의 모든 영광이 모여들고 우리는
그 분을 통해서만 영광에 이를 수 있다! 저 간특한 키탈저의 야만인들이
내렸던 저주 따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침내 우리에게 돌아오신 분이
다!"
"틀렸소."
"틀렸다니, 무슨 소리냐!"
"다른 모든 자들처럼 당신도 왕을 알지 못하오. 그래서 저런 자를 고르
는 실수를 하고 말았지. 아마도 알면서 저지르는 종류의 실수일 거라 짐
작하오."
케이건은 여전히 선지자를 보며 손으로는 토디를 가리켰다. 토디는 그
손이 무기라도 되는 양 뒤로 물러나다가 기어코 주저앉고 말았다. 케이
건은 선지자를 향해 말했다.
"당신도 저 자가 왕이 아니라는 것을 알잖소?"
"닥쳐라! 거룩한 왕좌에 네 오물을 던지지 마!"
"이제 그만하시오. 당신은 과거 운수(雲水)였다고 들었소. 그렇다면 나
가의 허물벗기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을 거라 믿소. 저 자가 왕이 아니라
는 것을 아는 것처럼, 당신은 그 자가 나가라는 것도 처음부터 알고 있
었을 거요."
티나한과 비형은 놀란 눈으로 케이건을 돌아보았다. 케이건은 조용히
덧붙였다.
"그렇잖소?"
선지자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갑자기 그의 늙은 팔에
륜이 너무 무겁게 느껴지는 듯했다. 선지자는 몇 번 더 비틀거리다가 기
어코 륜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비형은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도깨비의 발은 곧
멈췄다. 선지자가 쓰러진 륜의 위로 몸을 숙였기 때문이다.
"가까이 오지마!"
선지자는 마치 사냥감을 밟고 선 야수처럼 두 손으로 륜의 가슴을 짚은
채 사나운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티나한이 철창을 움켜쥐며 잔득
케이건을 슬쩍 훔쳐보았다. 케이건은 티나한의 눈빛을 거의 정확하게 읽
었다. '할까?' 케이건은 고개를 조금 가로저었다. 선지자는 몹시 갈라지
는 목소리로 외쳤다.
"나가라고? 나가라고? 똑똑히 봐라, 이 놈들아!"
선지자는 륜의 피부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비형은 뒤로 돌아서 구역질을 시작했다. 그리고 주저앉아 있던 토디도
고개를 돌렸다. 이미 분리되어 있던 허물은 쉽게 떨어졌지만 아직 채 분
리되지 않은 허물은 핏방울을 튀기며 뜯겨졌다. 그렇게 생살이 뜯겨나올
때마다 륜의 몸도 들썩거렸다. 마치 산 채로 사람을 찢는 형국이었다.
티나한은 다시 애타는 눈으로 케이건을 돌아보았다. '할까? 하게 해
줘!' 하지만 케이건은 절대로 고개를 세로젓지 않았다. 케이건은 팔짱을
낀 채 륜의 허물을 잡아뜯는 선지자를 냉정히 바라보기만 했다.
마침내 대부분의 허물을 찢어낸 선지자는 두 손에 허물 조각을 꽉 움켜
쥔 채 두 팔을 높이 들어올렸다.
"눈이 있다면 봐라, 이게 나가냐!"
토디는 질린 눈으로 선지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무릎 앞에 있는 것은
군데군데 살점이 뜯겨져 나가고 붉은 피에 젖어있었지만 분명 인간이 아
니었다. 그것은 나가였다. 토디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서, 서서선지자!"
선지자는 고개를 홱 돌려 토디를 바라보았다. 잔뜩 치켜뜬 그 눈에는
기괴한 빛이 일렁거렸다.
"보소서, 폐하! 왕비 마마이십니다!"
토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아냐… 그건 나가야. 인간이 아니라고. 인간이 아냐!"
선지자는 울컥하는 표정으로 토디를 보다가 다시 땅에 누워있는 륜을
보았다. 선지자는 곧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못 알아보시겠습니까? 왕비 마마시잖습니까?"
"당신, 당신 미쳤군! 완전히 돌았어!"
선지자는 무릎을 꿇은 채 토디에게 기어갔다.
"제발 정신차리십시오. 폐하! 도대체 무엇이 그 눈을 흐리고 있는 겁니
까?"
선지자가 토디에게 기어가자 케이건은 재빨리 륜에게 다가갔다. 신음도
내지 못하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륜을 향해 케이건은 짧게 시선을 준
다음 천막의 휘장을 움켜쥐었다. 휘장이 북 찢어졌고, 케이건은 그것으
로 륜의 몸을 덮었다. 그 동안에도 선지자는 계속 토디에게 기어갔다.
"폐하, 폐하! 어찌해서 하늘이 내려주신 폐하의 짝을 왜 못 알아보신단
말입니까!"
"가까이 오지마!"
"폐하, 제발…!"
선지자는 갑자기 기어가는 것을 멈추고는 허리를 세웠다. 그는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그 손에는 조금 전 뜯어낸 륜의 허물이 아직까지
쥐어져 있었다. 오른손에 쥐어진 얼굴 부분의 허물은 섬뜩하게도 일그러
진 웃음으로 선지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지자는 노성을 내질렀다.
"고얀! 이것 때문이군!"
"이봐, 뭐하는 거냐!"
휘장으로 감싼 륜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리던 케이건은 갑작스러운 티나
한의 외침에 고개를 돌렸다. 선지자는 병사들을 감금하고 있던 불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걸 태워야 해! 이 저주받을 마법이 폐하의 눈을 가리고 있는 거야!"
선지자는 불길에 허물을 집어넣었다.
"사특한 마법아, 물러가라!"
허물이 화르르 불타며 불티가 튀어올랐다. 동풍은 그 불 붙은 허물을
나꿔채어서는 선지자에게 뒤집어씌웠다. 눈에 불티가 들어가자 선지자는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륜을 안고 있어서 움직일 수 없었던 케이건은 황급히 비형을 불렀다.
"비형! 불! 불을 없애시오!"
하지만 고개를 돌린 비형은 케이건의 품에 안긴 륜의 피투성이 몸을 보
고는 다시 구역질을 시작했다. 케이건은 티나한을 부르려 했다. 그러나
얼굴을 움켜쥔 채 비틀거리던 선지자는 이미 불 속에 뛰어들고 말았다.
케이건에게 안겨있던 륜마저 움찔할 정도의 소름끼치는 비명이 터져나왔
다.
토디는 보았다.
선지자의 펑퍼짐한 옷자락을 타고 흐르는 불꽃 외에 다른 불꽃을.
입 안에서, 귀에서, 동공 안에서, 온몸의 땀구멍에서 새어나오는 불.
'몸 안에서부터 타고 있어.'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기에 토디는 자신의 눈을 비볐다. 다시 눈을 떠
바라보았지만 토디는 이제 더 이상 선지자를 볼 수 없었다. 이제 그곳에
있는 것은 사람의 형상을 한 불덩이 뿐이었다.
바람처럼 달려간 티나한이 욕설을 내뱉으며 선지자의 몸을 털었다. 깃
털에 불이 옮겨 붙어 그 자신마저 위태로운 처지에 빠졌지만 티나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지자의 몸을 덮은 불이 사라졌을 때 선지
자는 이미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티나한은 그을린 깃털과 재로 뒤
덮인 채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두 눈을 가린 채 고개
를 떨구었다.
두 눈을 뜨고 호흡까지 제대로 하고 있었지만, 토디는 거의 의식을 잃
은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머리 속은 차가웠다. 토디는
그 순간 딸을 생각했다. 뒤이어 토디는 딸이 사랑하던 피혁 가공장의 일
꾼도 떠올렸다.
그리고 토디는, 지극히 차가운 정신으로, 왜 딸이 일꾼과 눈이 맞았다
는 추측보다 바라보기만 하는 것으로 여자를 임신시키는 뱀의 이야기가
훨씬 사실적으로 느껴졌던 것인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잠시 후 누군가 그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토디는 고개를 돌렸
다.
케이건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케이건의 두 팔에는 피투성이가 된
륜이 천에 싸여 안겨 있었다. 케이건의 무표정한 얼굴 가운데 두 눈은
묘하게 슬퍼보였다. 토디는 그런 눈을 처음 본다고 생각했다.
케이건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잔치는 모두 끝났소. 이제 집으로 돌아가시오."
병사들에게 지급했던 무기와 옷가지 전부를 그대로 넘겨주고 거기에 자
신의 남은 돈까지 모두 나눠준 토디가 마지막으로 처리한 것은 발 달린
뱀이 담긴 목함이었다. 토디는 병사가 가져온 목함을 받아들고는 잠시
그 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곤 그것을 뒤짚었다.
뱀 사체는 힘없이 떨어졌다. 토디는 그것을 발로 밟아 뭉개버렸다. 그
동안 그의 눈에선 계속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뱀의 사체를 형체도 없이
뭉개놓은 다음, 토디는 눈물을 닦아내고는 목함을 가져온 병사에게 목함
을 건넸다.
"비단으로 감을 댄 것이고 함 자체도 좋은 것이다. 비싸게 팔 수 있을
거야."
병사는 감사의 말을 하며 목함을 받아들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토디가
뭉개어놓은 뱀에 향해 있었다. 약삭빠른 그 병사는 귀한 구경거리가 될
수 있고 어쩌면 비싸게 팔 수도 있는 그 기형 뱀이 더 탐났다는 기색이
었다. 토디는 그런 병사의 속내를 뻔히 짐작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
다.
그리고 토디는 고초를 겪은 륜에게 자신의 말을 선물하려 했다. 하지만
케이건은 그것을 사양했다. 아픈 몸으로 승마를 새로 배우는 것은 어렵
고 게다가 가산을 다 정리한 토디가 새출발을 하려면 말이라도 한 마리
있어야 할 거라는 것이 케이건의 설명이었다. 토디는 말없이 고개를 끄
덕인 다음 말에 올라 떠났다.
병사들은 제각기 죽이 맞는 자들끼리 무리를 지어 각자의 방향으로 떠
났다. 그리고 그 중 일부는 케이건에게 같이 다녀도 되겠느냐며 다가왔
다.
"당신들 꽤 세더군요. 뭔가 큰일을 하는 것 같은데, 우리도 한 다리 끼
고 싶소."
"우리는 지금 대사원에 고용되어 일하고 있소. 당신들을 받아줄 수 없
소."
"장차라도 뭔가 큰 일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나도 칼 한 자
루는 제대로 쓸 줄 알아요. 어, 혹시 당신들 중 누가 왕이 될 생각은 없
소? 내가 보기엔 당신들은 가능할 것 같은데. 당신들은 오가다 만나는
그런 잡놈들하고는 뭔가 근본부터가 다른 사람들 같다구."
"아무래도 어렵겠소."
"어이, 씨. 되게 깐깐하게 구네. 한 다리 끼자니까. 사나이들끼리 배포
가 맞으면 함께 다닐 수도 있고 뭐 그런 거 아니오."
케이건은 끝까지 조용한 어투로 달래어 그들을 돌려보냈다. 하지만 비
형이 보기에 그들이 물러나기로 결심한 데에는 옆에서 눈을 부라리기 시
작한 티나한의 영향이 더 큰 것 같았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미적거리던
자들까지 모두 떠나자 비형은 턱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아무도 도와주겠다고 하지 않는군요. 결국 우리 일인가요?"
"우리가 합시다. 당신의 딱정벌레도 도움이 될 거요."
비형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나늬에게 땅을 파도록 명령했다. 케이건은
바라기를 뽑아들더니 별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그것으로 땅을 팠다. 그
러나 티나한은 자신의 철창으로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자존심 상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맨손으로 땅을 팠다. 륜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세 사
람은 큼직한 구덩이를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때 쯤 해도 떠올랐다.
비형이 물러나 등을 돌리고 있는 동안 케이건이 조심스럽게 선지자의
사체를 구덩이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케이건과 티나한은 구덩이를 덮었
다. 그리고 세 사람은 잠시 무덤 옆에 섰다. 일출이 만들어내는 길다란
그림자들이 무덤 위를 덮었다. 티나한이 쭈뼛거리며 말했다.
"망할 자식. 내가 복수해주기도 전에 죽고 말았어. 어쨌든, 무슨 말 한
마디 해야 하는 거 아냐? 케이건 네가 해봐."
"별로 하고픈 말이 없소. 관두도록 합시다."
그리고 케이건은 몸을 돌렸다. 비형과 티나한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무
덤을 향해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무덤을 떠났다.
토디 시노크와 다른 병사들이 떠난 지 한참 지난 시간이었지만 워낙 넓
은 평야인지라 아직까지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케이건은 토디가
떠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형은 그 뒤로 슬쩍 다가갔다. 그리고
한 동안 케이건과 함께 토디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말을 탄 토디는 가
장 멀리까지 가 있었다. 이젠 조그마한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비형은 흙 묻은 바지를 툭툭 털며 말했다.
"케이건. 어제 당신이 했던 질문 제가 해도 될까요?"
케이건은 고개만 조금 돌려 비형을 보았다가 다시 토디를 바라보았다.
비형은 그것이 승낙일 거라 생각하고는 말했다.
"왕이 도대체 뭐죠?"
케이건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비형은 옆으로 다가온 나늬의 뿔을 쓰다
듬으며 계속 말했다.
"성주, 영주, 마립간, 추장, 족장. 세상에는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이끄는 사람들이 있죠. 하지만 왕은 없어요. 왕이 되겠다고 돌아 다니는
사람들만 있을 뿐. 뭐, 꽤 큰 도시를 차지하는데 성공한 사람들도 있다
고 들었어요. 물론 오래 못갔지만. 저는 그 자들이 다른 사람들을 지배
하고 싶은 야망이 남보다 큰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야심이라고
하던가요? 아니, 지배욕인가?"
케이건은 묵묵히 비형의 말을 듣고 있었다. 비형은 고개를 죽 돌려 사
방으로 멀어지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뭐, 어쨌든 그게 제 단순한 생각이었죠. 왕이 되려는 자들은 다른 사
람들을 지배하고 싶은 자들이다. 라는 거죠. 하지만 그렇지가 않더군요.
아주 당연한 건데, 그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어요. 왕이 되려는 자들은
그에게 지배당하고 싶은 자들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그 지배당하고 싶은
사람들이 중요한 거죠. 그에 비하면 왕이 되려는 사람들 자체는 별로 중
요하지 않아요. 당신도 그래서 토디 씨를 건너뛰어 선지자를 상대한 거
죠?"
케이건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비형은 계속 말했다.
"예.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마음이 아무리 커도 아무도 그를 왕으
로 여기지 않으면 그렇게 세상을 떠돌아다닐 수는 없는 거죠. 누군가가
있어야 해요. 그를 왕으로 떠받드는 사람들이. 그래야만 그는 모든 걸
버리고 그렇게 떠돌아다닐 수 있죠. 그렇다면, 왕은 도대체 뭐죠? 저는
정말 모르겠어요. 왕은 왕이 되고 싶어하는 저 제왕병 환자들의 목표인
가요, 아니면 그 제왕병 환자를 왕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자들의 목표인
가요?"
"눈물을 마시는 새요."
"네?"
토디의 모습이 지평선을 넘어가고 있었다. 케이건은 그 지평선을 바라
보며 말했다.
"왕은 눈물을 마시는 새요. 가장 화려하고 가장 아름답지만, 가장 빨리
죽소."
"왕이 다른 사람의 눈물을 마시는 사람인가요?"
"저 토디 시노크는 이제 선지자가 흘리던 눈물을 받아먹지 않아도 되니
살아남을 수 있을 거요."
비형은 알 듯 모를 듯하다는 표정으로 케이건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때 토디의 모습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케이건은 몸을 돌려 륜에
게 걸어갔다.
륜은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어젯밤 케이건이 천막의 천을 찢어 그의
몸에 난 상처들을 싸매어주고 옷을 입혀주는 동안 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륜은 입도 벙긋하지 않은 채 땅바닥만 바라
보고 있었다. 케이건은 그런 륜을 보다가 그대로 그의 곁을 지나쳐 걸어
갔다. 그리고는 자신의 짐과 함께 놓아둔 여우를 집어들었다.
주둥이와 네 다리가 모두 묶인 채 긴 시간 동안 내버려두었기에 여우는
케이건의 손이 닿아도 요동치지 않았다. 케이건은 그것을 어깨에 맨 채
다시 륜에게 다가왔다. 그리곤 그것을 륜의 앞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륜
은 여우를 쳐다보는 대신 계속 땅만 바라보았다.
"허물을 다 벗었으니 뭘 좀 먹어야 하겠지. 그걸 먹거라. 지금 먹지 않
으면 곧 죽어버릴 거다."
륜은 대답하지 않았다. 케이건은 여우를 쳐다보며 말했다.
"강제로 먹이고 싶진 않다."
륜이 갑작스럽게 말했다.
"어젯밤, 제 니름을 들으셨나요?"
케이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인간이야. 니르는 걸 듣는 재주는 없다."
"저 인간이 제 허물을 쥐어뜯을 때, 제가 니르는 니름을 못 들으셨나
요?"
"듣지 못했다. 뭐라고 닐렀는데?"
"죽게 내버려두라고 닐렀어요."
"그랬나."
"들으신 줄 알았어요. 그 인간이 저를 쥐어뜯을 때도 가만히 내버려두
시기에."
"그런 건 아냐. 허물은 거의 다 벗겨지고 있었다. 물론 몇 군데는 아직
벗겨지지 않아서 상처가 생겼지만, 너희들은 어차피 흉터에 신경쓰지 않
잖나."
"흉터?"
"네 피부에 남은 상처 자국을 말하는 거다."
륜의 비늘들이 듣기 거북한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나가에 대한 케이건
의 지식에 비춰볼 때 그것은 부끄러워하는 동작이었다. 케이건은 아랑곳
하지 않고 말했다.
"너처럼 적출하지 않은 나가도 다음 허물을 벗을 때 그 흉터들이 모두
사라지겠지. 그래서, 상처 쯤 생겨도 상관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섣불리
너를 구하려다가 그 선지자를 자극하게 되는 것이 더 위험했었다."
륜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
"다음에 허물을 벗을 때도 저는 이곳에 있겠죠?"
"이곳?"
"북부요. 저는 이제 다시는 남쪽으로 갈 수 없는 것이죠?"
"심장을 적출하지 않았으니 내려가면 죽겠지."
"나가가 이 땅에서 살 수 있나요?"
"몹시 힘들지."
"저는 그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요."
"너는 그걸 감수하고 온 것일 텐데."
륜은 다시 침묵했다. 여우가 죽어가는 것을 의식한 케이건이 다시 그를
다그쳤을 때 륜은 내뱉듯 말했다.
"저는 친구 대신 온 겁니다."
케이건의 눈이 커졌다. 그들의 곁에 다가와 있던 티나한과 비형도 깜짝
놀란 표정으로 륜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륜을 응시
하며 말했다.
"설명해봐."
륜은 지금껏 다른 종족에게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라 여겼기에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를 모두 꺼내놓았다. 륜은 고개를 숙인 채 친구 화
리트와 그의 죽음, 그리고 자신이 그 일을 대신 맡게 된 사정을 모두 설
명했다. 비아스 마케로우라는 나가가 자신의 남동생을 죽였다는 이야기
를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어서 몇 번이나 되물었던 비형은 결국 나가 여
인들은 모두 남동생 죽이기를 보람차고 유익한 취미 생활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비형은 친누나에게 쫓
기는 륜에게 그걸 물어보지 않을 정도의 분별력은 가지고 있었다. 하지
만 륜의 이야기가 모두 끝나자 케이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네 누나가 왜 너를 쫓는 건지 짐작되는군."
"네. 심장을 적출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아냐."
"네?"
륜은 놀란 표정으로 케이건을 올려다보았다. 케이건은 그 얼굴을 향해
말했다.
"이제 바라보는군. 어쨌든 네 추측은 틀렸다. 너희 나가 남자들은 정말
너희 사회에 대해 잘 모르는군. 하긴 참여할 일이 없으니. 쇼자인-테-쉬
크톨은 가문에 부과되는 핏값이다. 심장을 적출하지 않은 남자를 처리하
는 데 그런 방법을 쓰진 않아. 너는 화리트 마케로우의 살해 혐의를 덮
어쓴 거야."
륜은 경악했다.
"어, 어떻게 제가? 제가 왜 친구를 죽인단 말입니까? 그럴 수는 없어
요!"
"하지만 너는 현장에서 도망친 유일한 사람이지. 의심받는 것이 당연
해."
"어떻게 그런… 그래서?"
"그래. 페이 가문의 일원인 네가 마케로우 가문의 일원인 화리트를 죽
인 셈이니, 마케로우 가문으로서는 쇼자인-테-쉬크톨을 요구할 수 있게
된 거다. 물론 남자들끼리의 일에 가문의 해결책을 쓴 건 좀 이상하다
만, 아마도 너와 화리트 모두 심장을 적출하기 전에 일이 일어났기 때문
에 둘 모두 각자의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 모양이다. 그래서 마케
로우 가문에서는 너희 누나를 암살자로 지명했을 테지. 아마도, 이 모든
일 또한 그 비아스 마케로우라는 여자의 획책일 것이다. 자기 죄를 은폐
하기 위해서 그랬겠지."
륜은 충격 속에서 말을 잊었다. 그가 다시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을 때
그것은 니름이었다. 당연히 케이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륜은 당황
하며 말로 바꿨다.
"그, 그게 사실입니까?"
"이상한 질문이군. 물론 추측이야. 하지만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되는
군."
륜은 그제야 의문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사모에게서 쇼자인-테-쉬크톨
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륜은 화리트의 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륜은 눈 앞에서 비아스가 화리트를 죽이는 것을 목격했다. 또한
륜과 화리트가 둘도 없는 친구임은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다. 그런 상
황에서 륜은 자신이 살해의 죄를 덮어쓸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륜이 두려워한 것은 자신이 심장을 적출하지 않았다는 사실뿐이었다.
"니름도 안 돼… 이건 니름도 안 돼."
"니름도 안 되고 말도 안 되겠지만, 어쨌든 너는 네 친구의 유지를 따
를 각오를 했겠지. 그러니 어서 먹도록 해라. 그렇지 않으면-"
"제기랄, 그 입 좀 닥쳐요!"
케이건은 륜의 패악스러운 외침에 입을 다물었다. 륜은 비늘을 곤두세
우며 외쳤다.
"제 누님이 저를 죽이려 하고 있어요! 그것도 제가 짓지도 않은 죄 때
문에! 이 상황에서 먹고 기운내라는 말을 하는 건가요!"
물끄러미 륜을 바라보던 케이건은 손가락을 세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