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3-2. 관련자료:없음 [52467]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4-04 00:49 조회:11609
눈물을 마시는 새.
3. 왕 잡아먹는 괴물 - 2
뛰는 것에 가까운 속도로 일행과 멀어진 케이건은 구릉 하나를 완전히
넘은 후에야 걸음을 조금 늦췄다.
일은 끝났다. 하인샤 대사원이 벌이는 온갖 이상한 일들에 대해 만족할
만한 설명을 덧붙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케이건 또한 그들에
게 설명을 요구한 적은 없다. 가끔 그 승려들이 세상에서 오직 케이건만
이 할 수 있는 임무를 요청할 때도, 케이건은 그들이 임무의 중요성을
잘 설명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임무이기에 그것을
수락했다.
그 오랜 봉사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덧붙인 지금, 케이건은 만족감 따
위는 느끼지 않았다.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행한
일에 만족감을 느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이제 또다시 승려들이 그를
불러야만 하는 일이 생길 때까지, 케이건은 카라보라의 오두막을 보살피
며 나가들을 요리하는 나날을 평화롭게 보낼 것이다.
목가적 살육의 나날.
케이건은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풍경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래를 내
려다본 케이건은 자신이 걸음을 멈췄음을 깨달았다. 케이건은 자신의 발
을 가만히 내려다본 채 그렇게 서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피를 마시는 새가 가장 오래 살지. 누구도 내놓고 싶지 않은 귀중한
것을 마시니. 하지만 그 피비린내 때문에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아."
케이건은 허리를 낮추며 바라기의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핏발 선 야수
의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케이건은 조금 전 들려온 목소리가 자신의
목소리임을 깨닫고는 어이 없는 기분을 느꼈다. 똑바로 선 케이건은 칼
자루를 놓은 다음 자신의 얼굴을 감싸쥐었다.
"그 도깨비에게 괜한 말을 했군."
이름이 뭐더라?
케이건은 도깨비와 레콘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당황하지
는 않았다. 그가 당황한 것은 오히려 륜의 이름이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
았다는 사실이었다. 요스비 때문일 것이다.
요스비의 아들이라고 했다. 미친 놈!
"내가 요스비의 아들이야! 이 빌어먹을 자식아, 네가 요스비에게 받은
건 어쩔 수 없이 흘려야 했던 몇 방울의 체액 뿐이다. 그런 주제에 아버
지라고? 나는 요스비의 왼팔을 먹었다!"
케이건은 광포하게 걸음을 뗐다. 마치 그러면 빨리 륜의 이름을 잊을
수 있는 것처럼. 그러나 륜의 이름은 도통 지워지지 않았다. 케이건은
바라기를 뽑아 륜의 이름이 담긴 머리의 일부분을 잘라내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내가 요스비의 아들이다!
"내 아버지들은…"
케이건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바라기를 뽑아들었다. 그러나 이미 무릎
에 힘이 빠지고 있었다. 케이건은 바라기로 땅을 짚으려 했으나 쌍신검
은 옆으로 미끄러졌다. 케이건은 무릎과 턱을 호되게 부딪히며 땅에 쓰
러졌다. 그리고 그의 손을 벗어난 바라기도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뒤이어
쓰러졌다.
케이건은 땅에 볼을 댄 채 바라기를 바라보았다. 볼이 쓰라렸지만 무시
했다. 잠시 후, 케이건은 피식 웃었다. 입김에 휘말린 흙먼지가 피어올
랐다.
"케이건, 이 얼간이 자식아."
"케이건, 이 멍청한 녀석아."
"케이건…"
내 이름이 뭐더라.
"케이건? 거기서 뭐해요?"
케이건은 눈을 떴다. 그제야 케이건은 자신이 기절했음을 깨달았다. 땅
을 짚으며 일어난 케이건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도깨비가 걸어오고 있었다. '비형 스라블이야.' 기억이 마구 떠올라 케
이건은 현기증을 느꼈다. '나늬라는 이름의 딱정벌레를 가지고 있는' 케
이건은 비틀거리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오, 이런 빌어먹을. 잊어먹지
않았던 건가?' 케이건은 겁에 질렸다. '설마 다른 것들도?'
"케이건, 괜찮아요?"
'정말 걱정스러운 듯이 묻고 있어.' 케이건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런
데 저 표정은 즐거워 하는 것도 같군. 이상해. 걱정스러운 건데, 동시에
즐거운 거야. 비웃는 건가?' 아니었다. '그럼, 다시 만나서 즐겁다는 거
야?' 비형이 말했다.
"다치신 모양이군요. 이거, 기뻐해야 될지 슬퍼해야 될지 모르겠는데
요?"
"다치지 않았소. 그런데 기뻐할 이유는 뭐요?"
비형은 큼직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멀리 가기 전에 따라잡았으니까요. 이제 왜 따라왔냐고 물으실
거죠?"
"묻겠소."
비형은 두 팔을 옆으로 쫙 펼쳐 비극적으로 말했다.
"나늬가 륜을 태우지 않아요! 어쩌면 좋죠?"
말투와는 달리 비형의 얼굴은 즐거워 못견디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
다.
륜이 한 발을 내디뎠다. 티나한이 벗겨준 나무껍질을 씹어먹던 나늬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륜을 향해 뿔을 내밀었다. 륜은 겁먹은 얼굴로 비형
을 돌아보았지만 비형은 염려 말고 계속 걸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륜은
심호흡을 한 다음 다시 한 발을 내디뎠다.
나늬는 나무껍질을 포기하며 뒤로 물러났다. 케이건은 놀라지 않았다.
세 번째로 보는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케이건은 약간 짜증스러
워 하는 눈으로 비형을 쳐다보았다.
"수화로 물어보시오. 왜 륜을 피하는 건지."
"당신이 오기 전에 이미 물어봤어요. 대답하지 않던데요?"
"한번 더 해보시오."
비형은 어깨를 으쓱인 다음 나늬에게 다가갔다. 도깨비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케이건은 딱정벌레의 더듬이를 응시했다. 보통의 경우라면,
딱정벌레는 그 더듬이를 움직여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을 것이다. 하지만
비형의 반복되는 수화에도 불구하고 나늬의 더듬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
다. 오른손으로 턱을 받친 채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케이건은 비형
을 돌아보았다. 그 눈초리는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비
형은 그런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비형은 자신없는 투로 말했다.
"음, 어, 하늘치를 본 딱정벌레와 비슷한 반응이에요. 딱정벌레가 절대
로 하늘치에게 가까이 가지 않으려 한다는 이야기는 아시죠?"
티나한이 참지 못하고 외쳤다.
"알다 마다! 그 때문에 내가 아직 하늘치의 등에 오르지 못했는데! 하
지만 륜이 하늘치냐?"
"반응이 비슷하다는 거예요. 하늘치에게 왜 가까이 가지 않냐고 물어보
면 딱정벌레는 아무 대답도 안 하지요. 지금도 그렇지요?"
"지금껏 한 달이 넘게 함께 여행한 사이니 나가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
런 것은 아닐 테고, 거 참.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군."
케이건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머지 일행들은 그의 입을 주시했다. 그리
고 머리 속으로는 그들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케이건은, 아마도, 나늬의 기행을 꾸짖거나 불평하지는 않을 것이다.
과연 케이건은 그러했다.
"걸어야겠소. 여러분. 대사원에서는 좀 더 기다려야겠군."
티나한이 만족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다시 같이 여행하는 거야, 케이건?"
"걷는 일이라면 내가 필요할 거요."
모두의 얼굴에 안도감이 떠올랐다. 비형은 나늬를 꾸짖으면서도 "너 때
문에 늦어지게 되었잖아, 도대체 왜 이런 고집을 부리는 거야?" 그 얼굴
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륜의 웃음은 조금 묘했다. 나가의 표정을 정확
히 읽을 수 있는 케이건이 그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륜의 묘한 표정은
들키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나늬의 이상 행동에 대한 억측들을 교환
하고 있을 때 륜은 손을 허리 뒤로 돌려 자신의 배낭 아래쪽을 살짝 쓰
다듬었다.
'이것 때문인가?'
그 때 배낭이 꿈틀했다. 깜짝 놀란 륜은 비명을 내질렀다. 다행히 니름
이었기에 아무도 륜의 비명을 듣지는 못했다. 륜은 일행들을 죽 둘러보
고는 다시 배낭에 닿은 손바닥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손바닥에는
더 이상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하다. 움직였는데?'
파름 평원에서 바라볼 때, 파름산 중턱에서부터 정상 바로 아래까지 드
러누워 있는 하인샤 대사원은 하나의 사찰로는 보이지 않는다. 일단 파
름산의 5부능선부터 8부능선까지 펼쳐져 있는 그 거대한 면적 때문에 그
러하고 건물들 사이에 통일성이 결여되었기에 그러하다. 게다가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있는 계곡과 숲, 봉우리 때문에 건물들 사이의 연관성이 희
박하게 보인다. 그 때문에 하인샤 대사원의 전체적인 모습은 마치 산비
탈을 따라 건설된 도시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하인샤 대사원
이라는 하나의 가람이다.
그 불합리한 구조 때문에 파름산 승려들은 경내의 다른 부속 건물까지
가야 할 때도 장거리 여행을 시작할 때의 긴장감을 느껴야 했다. 물론
하인샤 대사원의 승려가 대사원의 경내에서 사망하게 될 경우 그건 객사
로 보아야 된다는 말은 과장 섞인 농담일 뿐이다. 하지만 어린 행자들이
단지 경내의 다른 지점으로 가는 도중에도 외진 산 속을 헤매는 듯한 기
분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어깨에 사문살이의 더께가 두껍게 쌓일 때
쯤 되면 그런 기분 따위는 느끼지 않지만.
하인샤 대사원의 이런 이상한 모습은, 어처구니없이 길고 온갖 놀라운
사건들로 점철된 그 사원의 역사를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어렵다. 종단
역사상 최연소 대덕으로 이름 높은 오레놀은 하인샤 대사원의 첫 번째
주춧돌이 놓였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를 완전히 암기하고 있었
고, 그래서 평소 승려들에게 대사원의 이런 기묘한 모습에 오히려 자부
심을 느껴야 한다고 주장하곤 했다. 하지만 숨이 턱에 닿은 채 쥬타기
대선사의 암자로 올라가고 있는 지금 오레놀은 자부심 비슷한 감정도 느
끼기 어려웠다. 그는 자신이 지쳐 쓰러지는 것이 먼저일지 암자에 도착
하는 것이 먼저일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어디에도 없는 신의 가호 때문인지 사문살이 동안 단련된 튼튼한 다리
근육 덕택인지야 불명확하지만 어쨌든 오레놀은 쥬타기 대선사에게 보고
할 때까지 졸도하지 않을 수 있었다.
"용이, 눈을 떴다고, 합니다!"
암자 한켠의 텃밭을 갈고 있던 쥬타기 대선사는 쟁기를 떨어뜨리고 말
았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용이라고?"
"예! 용이 눈을 떴습니다!"
쥬타기 대선사는 수염을 부르르 떨다가 가까스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대선사는 떨어뜨린 쟁기를 집어들었다.
"일단 가서 물 한 잔 마시자꾸나."
대선사는 쟁기를 든 채 암자의 툇마루 쪽으로 걸어갔다. 쟁기와 모자를
내려놓은 대선사는 조그마한 부엌에 들어가 손수 물 한 바가지를 들고
나왔다. 대선사는 그것을 오레놀에게 내밀었고 오레놀은 황송해하며 황
급히 물을 마셨다. 수건으로 얼굴을 훔치며 기다리던 대선사는 오레놀에
게서 바가지를 돌려받아 물 한 모금을 마신 다음 입을 열었다.
"자세히 설명해 보거라."
"선원에서 참선 중이던 자들 중 군령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군령자가 어떻게?"
"그 군령자는 카시다 사원의 소개장을 가지고 와서 선원에서 참선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군령자가 어제 참선하는 도중 갑자기 자기
들 중에 용인(龍人)이 하나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깨달았다고?"
"그 군령자도 자기들 중에 용인이 있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용인은 너무 오래 전에 군령의 일부가 되었고 지금까지
잠들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용인이 갑자기 깨어나서는 아라
짓 어(語)로 용근이 눈을 떴다고 외쳤습니다. 함께 참선 중이던 행자들
이 기겁했다고 하더군요."
놀라움 속에서도 대선사는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군령자
는 자기들 속에 수천년 전에 죽은 자의 영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기겁하
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보통 그보다 덜 오래된 영들이 알려주는 경우
일 가능성이 높다. 그토록 오래된 영들은 깨어나지 않는다. 아무리 군령
의 일부가 된 자라 하더라도 결국 불사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
떻게 깨어났다는 것일까?
"그 용인은 완전히 깨어난 거냐?"
"아니오. 그 말만 외친 다음 다시 잠들었다고 합니다. 군령자는 여러
번 시도해 보았지만 자기 속에서 다시 그 용인을 찾아내지는 못했습니
다. 아마도 깊은 참선 때문에 그 용인이 잠깐 깨어날 수 있었던 모양입
니다."
쥬타기 대선사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추측해보았다. 참선은 자신을 잊어
가는 것이다. 군령자라면 아마도 잊어야 할 자신들이 많을 테고 그 많은
자신을 모두 잊게 되자 가장 오래된 자신이 표면으로 떠올랐을 수도 있
다. 대덕의 추측은 그럴 법했다.
"그런데 아라짓 어라고 했느냐?"
"예. 그 군령자는 자기들 중의 자기가 한 말이 뭔지도 모르는 눈치랍니
다."
"그런데 너는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참선을 지도하시던 데호라 대사(大師)께서 은밀히 알려주셨습니다."
대선사는 허벅지를 탁 쳤다. 데호라 대사는 고문과 고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이름이 높다.
"데호라 대사께서 말하시길 그 군령자는 이미 관심을 잃었고 함께 참선
중이던 다른 행자들 또한 잊어버릴 거라더군요. 참선 중에 온갖 이상한
말을 외치는 자들이 다 있으니까요."
쥬타기 대선사는 안도했다.
"그렇다면 현재로선 데호라 대사와 너와 나만 알고 있는 것이군?"
"그리고, 혹 아직까지 남아있다면 용인들이 알고 있겠지요."
"용인이 어디 남아있겠느냐. 용근을 먹어야 용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
데 나가들이 용화를 모두 파괴한 것이 언젯적의 일이냐."
"하지만 속세에서는 아직도 가끔 용근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들이 떠돌
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바로 어제 용근이 눈을 떴다고 하지 않습
니까? 그렇다면 아직까지 남아있는 용화가 최소한 한 송이는 있었다는
말입니다. 한 송이가 있었다면 다른 용화들도 있었을 수 있잖습니까? 그
리고 누군가가 그것을 먹었을 수도 있지요."
쥬타기 대선사는 오레놀 대덕의 설명이 옳다고 생각했다. 무의식 중에
염주를 꺼내든 대선사는 그것을 헤아리며 생각에 잠겼다. 오레놀은 조바
심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용근이 발견되었다면, 그리고 벌써 발아와 개화까지 끝내고 눈을 떴다
면 조만간 용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발견되기 전에 빨리 그것을 찾
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지한 자들에게 사로잡혀 그 성정이 훼손
되어, 마침내 괴물이 될지도 모릅니다. 속세에는 용을 괴물로 만들어서
라도 왕이 되려는 작자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어떻게 찾겠느냐? 용인이 아니고선 용을 감지해낼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용인은 깊이 잠들어 깨지 않는다고 하
지 않았느냐. 설사 다른 용인을 찾아낸다 하더라도 용인은 용근을 먹으
려들 테니 역시 도움을 받을 수 없다."
대덕은 분한 듯이 말했다.
"이럴 때 케이건 드라카 님이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그 분은 지금 오
지도 않을 나가를 기다리며 사지에 계시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노릇
입니다."
"케이건이 놀라운 인물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라도 삶은 달걀에서 병아
리를 꺼내보일 재주는 없다. 용인이 아닌 그가 세상 천지 어디에 있는지
도 모를 용을 어떻게 찾아낼 수 있겠느냐. 어쨌든 네 말이 틀리지는 않
다. 용근이 눈을 떴다면 그것을 꼭 찾아내어야 하겠구나. 오레놀. 조타
중대사(重大師)에게 가서 각 사원으로 보낼 서찰을 준비하라고 일러라."
"어떤 내용으로 하면 되겠습니까?"
쥬타기 대선사의 염주가 멈췄다. 대선사는 하늘을 이고 있는 파름산의
정상을 - 대선사의 암자에서는 매우 가깝게 보인다. -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꿈을 꾸었다."
"네? 꿈이오?"
"그래. 내 꿈에 어디에도 없는 신이 현몽하셨다. 신께서는 내게 도탄에
빠진 세상을 구하기 위해 조만간 용의 모습으로 세상에 화신(化身)하실
거라고 알리셨다."
그만 넋이 나간 오레놀은 입을 쩍 벌린 채 대선사를 바라보았다. 대선
사는 굵은 눈주름을 일그러뜨려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승려들로 하여금 그런 내용의 헛소문을 퍼뜨리게 하라는 말이다."
"네? 헛소문이오?"
"그래. 우연히 용을 발견한 미욱한 자들이 그것을 제멋대로 취하려는
시도는 일단 막고 봐야 할 것 아니냐. 운이 좋다면 용을 발견한 자들이
가까운 사원에 그 소재를 알려줄지도 모르지."
오레놀은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하지만 대덕은 곧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대선사님. 그건 망언이잖습니까."
"불망언(不妄言)의 계를 어기는 일이라는 말이냐?"
"어떻게 봐도 그렇습니다. 말씀하신 일의 옳고 그름을 논하기 전에, 승
려들이 기겁을 할 겁니다. 어떻게 사제들이 앞장서서 망언을 알리고 다
니겠습니까?"
"아, 그거라면 괜찮다. 승려들에겐 그게 사실이라고 알려라. 그럼 파계
는 나 혼자 하는 것이 되겠지?"
"대선사님, 어찌 그런… 말도 안 됩니다."
오레놀은 강하게 도리질을 했다. 몇 번 더 대덕을 다독이던 대선사는
결국 역정을 내며 외쳤다.
"야, 이 놈아! 세상에 죄란 죄 다 지고 가는 마당에 내 죄 하나 더 지
고 가겠다는데 따박따박 말대꾸냐? 거기 앉아서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달음박질이나 쳐라. 용근이 눈을 떴다지 않느냐? 당장 그 엉덩이 안 뗄
테냐!"
대선사는 그렇게 외치며 툇마루에 기대어둔 쟁기를 움켜쥐었다. 혼비백
산한 대덕은 걸음아 나 살려라 달려갔다.
풀 한 포기조차 귀한 쓸쓸한 평야 가운데 탑은 좌절한 소망처럼 서 있
었다.
탑 안쪽에 누운 륜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탑의 상층부가 완전히 파괴되
었기 때문에 둥근 하늘이 보였다. 완전한 원은 아니었다. 륜의 발쪽 부
분 하늘이 약간 불룩했다. 그 부분의 탑이 더 많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 부분의 높이는 4 미터 가량. 남아있는 가장 높은 부분도 6 미터를 넘
진 않았다.
누운 륜의 주위로 십여 개의 도깨비불이 둥글게 배치되어 있었다. 그
불의 원 바깥쪽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앉아있던 케이건이 나직하게 말
했다.
"그럼, 나가겠다."
륜은 아무 말도 못한 채 눈으로만 대답했다. 그의 눈은 제발 가지 말라
고 말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빨리 떠나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케이건은
이해했다. 일어선 케이건은 탑 서쪽에 있는 문으로 다가갔다. 그곳엔 케
이건의 방풍복이 휘장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방풍복을 들어올리며 케이
건은 다시 륜을 돌아보았다.
륜은 하늘을 바라보며 떨고 있었다.
탑 밖으로 나온 케이건에게 강력한 동풍이 불어닥쳤다. 방풍복이 우쭐
거리며 떠올랐지만 케이건은 제때 그것을 나꿔채었다. 케이건은 방풍복
을 다시 정돈하여 탑 안쪽이 보이지 않게끔 했다. 나늬에 걸터앉아 있던
비형이 먼저 반색하며 말했다.
"어때요? 괜찮은가요?"
"괜찮소."
황야 위로 동풍은 성난 하늘치처럼 치닫고 있었다. 티나한의 깃털은 모
조리 일어서 그 모습이 마치 바람 부는 보리밭 같았다. 티나한은 수염볏
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이런 게 있어서 다행이다. 그런데 옛날 사람들은 사방으로 지평선 밖
에 안 보이는 이런 황야에 웬 탑을 세운 거지?"
케이건은 문 바로 옆의 벽면에 기대어 앉았다. 동풍이 불고 있었지만
서쪽으로 난 문 근처에서는 바람이 더욱 거세었다. 탑의 벽면을 타고 흐
르는 와류 때문이었다. 케이건은 덥수룩한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높새바람탑이오."
"응?"
"영웅왕이 즉위한 뒤 얼마 후, 영웅왕은 이곳에 요새를 세울 것을 명령
했소. 나가들을 감시하기 위해서였지. 당시 나가들은 심장적출법도 모르
고 산 것을 먹기에 밀림에서만 사는 약소종족에 불과했소. 해서, 왕의
신하들은 곡물을 먹지 않고 더운 지방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가는 절대로
왕국의 적이 될 수 없다고 자신했소. 하지만 영웅왕은 나가들을 경계했
소. 결국 왕과 신하들의 타협으로 요새 대신 이 감시탑이 서게 되었소.
동풍에서 딴 높새바람탑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지. 그리고 세기도 힘든 세
월이 지난 지금, 우리는 영웅왕의 예견이 증명된, 그러나 유쾌하지는 않
은 현실 속에 있소. 그걸 영웅왕의 혜안이라고 부르든 레콘의 야수적 본
능이라고 부르든 그건 당신들의 자유일 거요."
티나한은 레콘의 야수적 본능이라는 말에 우쭐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비형은 그런 티나한을 향해 빙그레 웃어주고는 다시 탑 안쪽을 들여다보
는 시늉을 했다.
"영웅왕께서도 한 나가가 피치못할 사정으로 이곳을 이용하게 된 것을
용서하시겠지요. 그런데 얼마쯤 걸리지요?"
"짐작하기 어렵소. 내 생각엔 아주 오래 걸릴 것 같소. 보통 자기 집에
있는 여자들은 안정감 때문에 반나절 쯤이면 끝내는 걸로 알고 있소. 남
자들도 허물벗기를 할 때가 되면 어느 가문이든 방문하지만 아무래도 여
자보다 오래 걸리는 편이오. 그런데 륜은 남자고, 이곳은 가문은커녕 나
가의 밀림조차도 아니오. 게다가 지금 그의 상황은 그에게 절대로 유쾌
한 것은 아닐 거요. 어쩌면 나가 역사상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린 허물벗
기가 될지도 모르오. 탑 안쪽의 불들이 그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랄밖에.
어쨌든, 우리로서는 그가 제 발로 밖으로 나올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소."
인간은 물로 몸을 씻는다. 도깨비는 불로 몸을 태운다. 레콘은 오래된
깃털이 뽑혀나간다. 그리고 나가는 늙은 피부를 벗고 새로운 몸을 얻는
다. 케이건만이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는 일이 벌어졌을 때 륜은, 이제
는 친숙해졌다고는 하나 그래도 불신자들인 동행자들 앞에서 허물벗기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비늘이 떨어져나갈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다행히 나늬를 타고 날아오른 비형이 평야 가운데 외로이 서있는 탑을
발견했다. 탑에 도달하자마자 케이건은 비형에게 불을 피우게 한 다음
나머지 일행을 모두 내쫓았다. 비형은 미쳐버리겠다는 듯이 행동했지만
도깨비의 무궁한 호기심도 케이건의 단호한 태도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
다. 케이건이 문 근처에 자리 잡은 데에는 비형이 훔쳐보는 것을 경계하
려는 의도도 약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말해주겠소.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어쨌든 허물
벗기가 끝나면 륜은 즉시 많은 음식을 먹어야 하오. 물론 살아있는 것이
어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겠지."
티나한은 난처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얼마나 먹어야 되는데?"
"사슴이나, 그 정도 크기의 동물 한 마리 정도는 먹어야 할 거요."
"젠장. 난 그 큰 사슴이 어떻게 저 배 속에 들어가는지 상상이 안 돼!
몸이 터져야 정상 아니야? 나가의 살갗 아래에는 뼈도 근육도 없이 모조
리 밥통이 들어찬 게 아닌가 싶군. 어쨌든, 이런 황량한 곳에서 어떻게
그런 큰 동물을 찾아내지?"
케이건은 비형을 돌아보았다. 비형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소스라치게 놀
랐다.
"서, 설마 나늬를? 륜을 태우지도 못하니 아무 쓸모도 없다는 비정
한…"
"그런 말은 하지 않았소. 비형. 그건 먹을 수 없소."
비형에게 케이건의 말은 꼭 먹을 수 있으면 먹이겠다는 투로 들렸다.
비형의 상상과 상관없이 케이건은 계속 말했다.
"티나한과 함께 날아올라서 가까운 곳에 숲이나, 혹은 동물을 찾아낼
만한 장소가 있는지 찾아보시오. 그리고 내가 말했던 것과 같은 동물을
하나 잡아보도록 해보시오. 내가 이곳을 지키고 있겠소."
티나한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이봐. 케이건. 물론 나는 최후의 대장간에서 이 철창을 쥔 이후로 이
놈에 대한 신뢰를 한 번도 잃어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이 놈으로 사냥
은 무리야."
케이건은 티나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케이건이 바라기 한 자루로
농장을 차려도 손색이 없을 사냥감들을 잡아오곤 했던 것을 상기한 티나
한은 벼슬을 빨갛게 물들이며 황급히 비형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비형도 사냥은 못하고. 역시 키보렌에 있었을 때처럼 네가 가
는 게 좋겠는데."
말을 맺으며 티나한은 만약 케이건이 없다면 구출대의 최대의 적은 기
아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케이건은 탑을 흘깃 돌아보았다.
"지금 륜의 곁에는 내가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소. 사냥에 전혀 자신이
없으시오?"
"어, 대호를 때려눕히라면 얼마든지 하겠어. 하지만 륜이 먹으려면 생
포해와야 하잖아."
케이건은 잠깐 고민하다가 일어섰다.
"알겠소. 티나한 당신이 이곳을 지키도록 하시오. 사방이 지평선이니
시간이 꽤 걸릴지도 모르겠소. 그 동안, 혹 륜이 도움을 청하더라도 절
대로 탑 안으로 들어가지는 마시오."
"응? 도움을 청해도?"
"그렇소. 고통 때문에 아마 그런 소리를 할 거요. 말 그대로 살이 찢어
지는 고통이니까. 하지만 아무리 간절히 부탁하더라도 들어가서는 안돼
요. 어차피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없소."
"아, 그래. 알겠어."
"그럼, 비형. 출발합시다."
륜을 거부하던 나늬는 케이건을 태연하게 태웠다. 그 모습에 대해 비형
이 몇 마디 잡담을 하려 했지만 케이건의 재촉 때문에 포기하고는 하늘
로 날아올랐다. 동풍과 딱정벌레의 날개 바람이 뒤섞여 돌풍을 만들어내
었기에 티나한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딱정벌레는
이미 까마득한 점이 되어 있었다.
티나한은 높새바람탑에 기대어 앉았다.
거칠 것 없는 평야 위로 동풍이 울부짖으며 내달렸다. 대기는 흙먼지로
혼탁했고 생기 잃은 태양은 창백한 원반이 되어 하늘을 방황했다. 티나
한은 구름도 없고 맑지도 않은 그 하늘이 불쾌했다. 가장 깨끗한 얼음
같은 바이소 계곡의 하늘을 생각하며 티나한은 동풍에 대해 투덜거렸다.
일 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구.
어딜 가나 부는 흙바람 때문에 지평선은 파도 치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턱 아래 깃털이 계속 떠올라 수염볏을 간지럽히는 탓에 티나한은 몇 번
이나 깃털을 쓸어내렸다.
지랄 같은 곳이군.
몇 시간이 지났을 때 케이건이 만든 훈제육을 씹고 있던 티나한은 지평
선 근처에서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
한 동안 티나한은 그것이 지평선을 따라 춤추는 흙먼지인지 아니면 이
동하는 물체인지 결정하지 못한 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반 시간 가까이
지나자 티나한은 그것을 이동하는 물체라고 결론내렸다. 그리고 다시 반
시간이 지났을 때 티나한은 그것을 높새바람탑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수
십 명의 인간이라고 판단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 시점에서 티나
한은 훈제육을 왼손으로 바꿔쥔 다음 오른손은 철창 위에 가볍게 얹어놓
았다. 일어설 필요까지는 느끼지 않았다. 레콘이 앉은 채 휘두르는 7 미
터짜리 철창은 인간에겐 자연재해에 필적한다.
얼마 후 티나한과 다가오는 무리는 서로의 얼굴 표정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몇 사람은 말을 타고 있었고 다른 자들은 걷고 있었
다. '륜에게 말을 보여주면 재미있어 할 텐데.' 모두들 무장을 하고 있
는 그 무리를 보며 티나한은 어렴풋이 어떤 개념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
다. 하지만 그 개념을 자신이 아는 단어로 옮기는 데는 약간 무리가 있
었다. 무리들이 멈춰서고 그 중 한 명이 앞으로 걸어올 때에야 티나한은
겨우 그 단어를 떠올렸다, '저거, 군대라는 건가?'
앞으로 걸어오는 남자의 모습은 볼만했다. 위세당당하게 보이려 애쓰는
기색이 분명했지만 눈꺼풀이 불안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어느 유적에서
뽑아온 철기둥이 아닌가 싶은 철창을 무릎에 얹어놓은 채 험악하게 쏘아
보고 있는 레콘에게 걸어가기엔 그 남자의 담이 조금 부족했다. 티나한
은 우호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석 달 가량 키보렌을 헤매다가 방금
돌아온 그의 차림새는 꽤 험악했다.
남자는 정확히 8 미터 쯤 되는 거리에서 멈춰섰다. 티나한은 눈대중이
제법이라고 생각했다. 남자는 뒤에 두고 온 일행을 한 번 돌아보고는 겨
우 입을 열었다.
"여, 영웅왕 폐하이십니까?"
티나한은 한참 후에야 겨우 부리를 열 수 있었다.
"어, 날짜를 잘못 알았나 본데. 한 1500 년 쯤."
남자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재담을 즐기신다는 말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만 소인이 미욱하와
이해하지 못했사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이 동풍탑을 순시하러 오
신…"
"장소도 좀 착각했나 본데. 이건 높새바람탑이야."
티나한은 그렇게 대답해줄 수 있어서 뿌듯했다. 하지만 남자는 멍한 표
정으로 티나한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남자는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정중히 고개를 숙여보였다. 티나한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마주 목례
해주는 동안 남자는 다시 무리에게 돌아가버렸다. 남자는 일행들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 돌아왔다. 남자의 얼굴은 한결 밝아져 있
었다.
"저희 선지자께서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이 탑을 가리키는 신성한 아
라짓 어를 번역한 말이라고. 괴악한 말로 귀를 어지럽혀드린 점 깊이 사
죄드립니다. 하지만 저희 선지자께서는, 부디 그 자의 불충과 무례를 용
서하시길 바랍니다. 아직까지도 감히 폐하가 영웅왕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혹시 내기를 했다면 가서 그 선지자라는 작자에게 내깃돈을 줘. 너희
선지자가 이겼으니."
티나한은 자신이 어떤 무리를 만난 건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남자
는 창백한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
"영웅왕이 아니시라고요?"
"아냐. 날짜를 좀 잘 알고 다니는 편이 좋겠어."
남자는 부르르 떨더니 다시 자신의 무리에게로 돌아갔다. 무리 속에서
약간의 소동과 언쟁이 들려왔지만 동풍 때문에 티나한은 잘 들을 수 없
었다. 잠시 후, 이번엔 무리 전체가 티나한을 향해 다가왔다. 선두에는
말을 타고 화려한 옷을 입은 인간이 고개를 뻣뻣이 든 채 걸어오고 있었
다. 조금 전 남자가 섰던 위치에 정확히 멈춰선 무리는 마치 진귀한 구
경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티나한을 바라보았다. 티나한이 불쾌감에 뭐라
말하려 할 때 화려한 옷차림의 남자가 말했다.
"너는 여행자냐?"
티나한이 당장 철창을 날려 남자의 목을 따버리지 않은 것은 이런 무례
한 언사를 밥 먹듯이 하는 동료를 가진 덕분이었다. 티나한은 가까스로
흥분을 가라앉힌 채 말했다.
"너 군령자냐? 혹, 지금 레콘이야?"
"무엄하다! 저 자를 능지처참하라!" 라고 외친 건 남자의 옆에서 말을
타고 있는 머리가 짧은 노인이었다. 티나한은 이제 화도 못 내겠다고 생
각하며 이들이 혹 군령자의 군대가 아닌가 하는 황당한 생각으로 자신을
위로했다. 그 때 화려한 옷차림의 남자가 말했다.
"고정하시게. 위대한 선지자여. 레콘이라는 자들은 원래가 오만하기 한
량이 없다네. 저 자에게 짐이 누군지 설명해주게."
선지자라 불린 노인은 티나한을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다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이 오만무도하고 가련한 놈아, 잘 들어라! 네 놈 앞에 계신 이 분은
위대한 영웅왕 폐하의 49대 손이신 무적왕 폐하이시다! 네가 감히 영웅
왕의 적손 앞에서 영웅왕의 현신을 사칭했으니 그 죄가 하늘을 찌름을
알지 못하겠느냐?"
티나한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내가 그랬던가? 미안하군. 그런데 저거 인간이잖아."
"이 놈! 끝까지 그 괴악한 미신으로서 우리를 우롱하려 드는구나. 하지
만 나는 신의 말씀을 들었다. 영웅왕은 레콘이 아니라 인간이셨다! 그런
계시가 있으셨기에 나는 네가 영웅왕을 사칭하고 있음을 진작에 깨달은
것이니라!"
선지자의 입가로 허연 거품이 묻어나는 것을 보며, 티나한은 계명성을
내뿜는 것을 포기해버렸다. 한계선을 넘어온 것이 확실히 실감이 난다고
생각하며 티나한은 배낭 속에서 또다른 훈제육을 꺼내어들었다.
"그래. 미안해. 영웅왕으로 착각될 만큼 위엄 있는 모습으로 여기 앉아
있었던 점 사과해주지. 그리고 내 식사를 방해한 것에 대한 사과도 받지
않겠어. 이제 좀 떠나주지?"
말을 마친 티나한은 훈제육을 한 입 베어물었다. 그 때 티나한은 이상
한 소리를 들었다.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선지자를 바라본 티나한은 자신
이 들은 소리가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선지자는 찬란히 빛나는 눈
으로 훈제육을 바라보며 또다시 침을 삼켰다.
"혹, 귀하께선 우리 무적왕 폐하께 우정과 존경의 표시로 작은 공물을
바치실 생각이 없으시오?"
티나한은 무적왕이라는 자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티나한은 무적왕의 얼
굴에서 왕국에 대한 열망보다도 더 큰 열망을 발견했다.
티나한은 무적왕 일행이 혹 왕국을 세운다면 그들의 건국신화 속에 자
신이 황야에서 홀연히 나타나 모래와 흙으로 고기를 만들어낸 신의 사자
로 기록될지도 모른다는 희망 따위는 떠올리지도 않았다. 그가 고기를
나눠준 것은 좀 더 현실적인(그러나 여전히 가능성은 없는) 이유에서였
다. 티나한은 혹 이 자들이 다른 자들과 달리 왕국을 세우는 데 성공하
기라도 한다면 훗날 자금을 좀 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하
늘치의 등을 정복하려는 그의 꿈은 어쨌든 돈을 많이 잡아먹는 꿈이었
다.
그래서 티나한은 케이건이 만들어놓은 훈제육을 엄숙한 얼굴로 '선물했
고', 무적왕이라는 자가 감사의 표시로 그를 '아라짓 전사'에 임명하겠
다고 제안했을 때도 폭소를 터뜨리지는 않았다.
"아라짓 전사라고 했냐?"
무적왕은 티나한의 말투가 거슬리는 기색이었지만 꾹 참으며 훈제육을
씹었다.
"그렇소. 짐의 조상이신 영웅왕 폐하의 본을 받아 짐 또한 짐의 저 강
대한 전사들을 아라짓 전사라 부르고 있소."
티나한은 그 강대한 전사라는 자들이 일하기 싫어서 집을 뛰쳐나온 청
년들이거나 무전취식을 필생의 야망으로 삼는 건달들일 테고, 공짜 밥을
먹을 수 있기에 기치 창검을 높이 들며 국왕 폐하 어쩌고저쩌고 하는 놀
이에 동참하고 있을 거라는 짐작을 내비치지는 않았다.
"고맙지만 사양하겠어. 내 일이 있거든. 아, 훗날 내 일로 도움을 청할
지도 모르겠는데 그 때 여유가 되면 좀 도와주면 좋겠군."
"반드시 그러겠소. 여봐라, 기록관! 이 일을 기록해두도록 하라."
고기를 씹던 병사 하나가 자신의 짐을 주섬주섬 뒤적거렸다. 케이건이
사냥을 해 올 것을 생각해서 티나한은 가지고 있던 식량을 거의 다 주었
고 그것은 꽤 양이 많아서 마흔 명이나 되는 무적왕의 부하들 모두에게
조금씩이나마 돌아갔다. 그래서 그들 모두는 꽤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
었다. 티나한은 이름의 철자를 묻는 기록관에게 아무렇게나 써두라고 대
답한 다음 다시 무적왕에게 질문했다.
"오래 굶주렸나 보군. 이렇게 식량도 구하기 힘든 곳에 왜 들어왔나?"
무적왕은 선지자를 돌아보았다. 선지자는 입 속으로 들어온 수염을 끄
집어내며 말했다.
"위대한 무적왕 폐하께서는 과거 페치렌에서 피혁 장사를 하고 계시었
소. 영웅왕의 적손에게 도무지 어울리는 일이 아니지만, 폐하께선 자신
의 혈통을 모르고 계셨거든. 그러나 페치렌에 붉은 번개가 치던 날, 폐
하께선 피혁들 사이에서 기어나온 사악한 발 달린 뱀을 한 자루 검으로
물리침으로써 자신의 고귀한 혈통을 드러내어 보이셨소."
"발 달린 뱀?"
선지자는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곧 병사들이 목함 같은 것을 가져왔다.
선지자는 심호흡을 하고는 목함의 뚜껑을 들어올렸다. 목함 안쪽에는
귀한 천으로 안감이 대어져 있었다. 목함 안을 들여다 본 티나한은 일종
의 기형 뱀을 볼 수 있었다. 40 센티미터 쯤 되는 그 뱀의 머리는 잘려
져 있었고 몸 중간 쯤에는, 굳이 발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그렇게도 보이
는 돌출물이 하나 붙어있었다. 티나한은 척추에서 꼬리 하나가 잘못 생
겨난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런 기형은 오래 살지 못한다. '혹 죽은
뱀을 벤 것이 아닐까?' 하지만 선지자는 그 뱀을 보는 것조차 무섭다는
듯이 목함을 외면하며 말했다.
"참으로 무시무시하지 않소? 보셨다면 이만 덮고 싶소이다. 비록 죽었
지만 이 사악한 피조물은 그 생전에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여자를 임신시
키고 남자에겐 질병을 전염시켰소. 실제로 무적왕 폐하의 따님께서는 이
뱀을 본 것 때문에 임신하시어…"
"흐음. 흠. 뭐, 덮어도 좋아."
선지자는 말이 끊겨서 좀 불쾌한 기색이었지만 순순히 목함의 뚜껑을
덮었다. 그리곤 다시 기운차게 말했다.
"어쨌건, 이 사특한 괴수를 벰으로써 무적왕 폐하께서는 그 위명을 높
이셨소. 운수납자(雲水衲子)였던 본인은 그 소문을 듣고 참으로 놀라워
폐하를 찾아뵈었소."
운수납자라는 말에 티나한은 노인의 머리가 왜 짧은지 알 수 있었다.
전(前) 승려였던 노인은 턱으로 목함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이 뱀을 보고 폐하의 용안을 본 순간 폐하께서 영웅왕 폐하의
적손임을 단번에 깨달았소. 그 때의 감격은 지금 되돌이켜 보아도 가슴
이 뜨거워지는구려. 제 설명을 들은 폐하께선 그 날로 사업을 중단하시
고 뜻있고 의기로운 젊은이들을 가려 뽑아 그들을 무장시킨 다음 위대한
왕국 재건의 길에 들어서신 거요. 왕호를 정하는 일은 전혀 어렵지 않았
소. 나는 사특한 괴수를 물리친 업적을 기려 무적왕이라는 왕호를 지어
드렸소이다. 그리고 폐하께선 황송하게도 본인에게 선지자라는 과분한
칭호를 하사하셨소."
그리고 선지자와 무적왕은 서로를 뜨거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티나한
은 치밀어오르는 웃음을 참기 위해 하늘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그 모습
은 선지자에게 '하늘의 뜻이 행사되는 방식의 신비로움에 감동하는' 모
습으로 비춰졌다.
"이렇듯 왕국 재건의 길을 위한 모든 것이 갖추어졌으나 한 가지 부족
한 것이 있소. 왕국에는 국모가 있어야 하오. 그런데 폐하께선 상처하신
지 오래요. 하지만 나는 이 부분에서 진정한 하늘의 뜻을 깨달았소. 하
늘이 사특한 괴수를 내시어 영웅왕의 적손을 드러나게 했고 나를 폐하께
인도하시어 그 왕통을 확인하게 하셨으니, 이제 하늘의 여인을 보내어
그 마지막 증거를 보이실 거요."
"아아, 그래서 왕비감을 찾아다니신다? 특별한 여자겠군?"
"그렇소. 괴수가 나온 날 붉은 번개가 쳤으니 나는 아마도 푸른 번개가
치는 곳에서 왕비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추측해 보았소. 하지만 그런
풍문은 들리지 않았소. 저 용맹한 아라짓 전사들은 한 자리에 머무는 것
을 답답해 했고. 그래서 나는 폐하께 영웅왕의 흔적을 따라 주유할 것을
권했소. 영웅왕의 업적을 기리고 그 정기를 받을 수도 있거니와, 어떤
조짐이 발견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들이니까."
"그래서 이 높새바람탑으로 온 건가? 영웅왕이 세운 거니까?"
"그렇소. 하지만 이곳에도 국모가 되실 여인은 없구려."
선지자는 말을 끝내며 아쉽다는 듯이 티나한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라는 것이 마치 이제 정체를 드러내어 여자로 변신해보면 어떻겠냐고 강
요하는 듯한 눈빛이어서 티나한은 능력만 된다면 그렇게 해주고 싶은 생
각까지도 들었다. 그 때였다.
"도와… 줘요."
탑에서 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탑을 돌아보며 반쯤 일어서던 티나한
은 케이건이 경고했던 것을 떠올리곤 다시 자리에 앉아 무적왕 일행을
돌아보았다. 무적왕과 선지자는 눈을 크게 뜬 채 탑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적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름다워. 진짜 아름다운 소리다. 이런 목소리는 생전 처음 들었어."
정성껏 갈고닦았던 어투는 사라지고 어느 새 무적왕은 평범한 장사치처
럼 말하고 있었다. 티나한은 근본을 못 속이겠다고 생각하며 그만 킬킬
거리고 말았다. 그 웃음을 본 선지자가 대로하며 일어섰다.
"이 마귀!"
티나한은 울컥했지만 곧 왕을 비웃는 것이 실례라는 것을 깨닫고는 사
과하려 했다. 그러나 선지자는 티나한에게 그럴 여유를 주지 않았다. 선
지자는 껑충 뛰듯이 일어나서는 병사들에게 외쳤다.
"용맹한 아라짓 전사들이여, 왕을 보호하라! 마귀가 여기 있다!"
"이봐. 웃은 건 미안하지만 마귀라니. 너무하잖아."
선지자는 티나한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상황을 도통 파악하지
못한 병사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고 전(前) 피혁상
또한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티나한과 선지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선지
자는 그의 팔을 나꿔채서는 질질 끌 듯이 하며 뒤로 물러났다.
"폐하, 일어나소서! 마귀입니다. 마귀에요!"
무적왕은 일어서려고 했지만 선지자가 워낙 잡아끄는 통에 제대로 일어
서지 못했다. 결국 무적왕은 선지자의 팔을 뿌리치고서야 겨우 일어났
다. 숨이 찬지 얼굴이 빨갛게 된 무적왕은 떨리는 손으로 옷을 털었다.
"선지자.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저 자는 마귀입니다!"
"하지만 서, 선지자. 저 자는 우리에게 음식을 나눠줬잖아?"
그러자 선지자는 무적왕의 입에 손가락을 쑤셔넣으려 했다. 경악한 무
적왕이 가까스로 그 손가락을 피하자 선지자는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
다.
"토하십시오! 빨리 토해요! 저 자는 마귀입니다!"
그리고 선지자는 높새바람탑을 가리키며 티나한이 절대로 잊을 수 없을
말을 외쳤다.
"하늘이 내신 여인이 저기 있습니다. 저 귀신이 가둔 겁니다! 저 마귀
는 폐하께서 왕비님을 만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흙먼지와 벌레를 먹인
겁니다!"
무적왕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무적왕은 재빨리 자신의 손가락을 입에
쑤셔넣어 토하려 했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에게 이미 다른 명령을 내리
고 있었다. "페하! 검을!" 무적왕은 당황하며 허리에 찬 검을 움켜쥐었
다. 그러나 손이 떨리고 있었고 게다가 침이 잔뜩 묻어 있어서 칼자루를
놓치고 말았다. 무적왕은 욕설을 내뱉으며 다시 검을 잡아당겼고 옷이
약간 뜯어지는 소리와 함께 가까스로 검이 뽑혀 나왔다. 병사들도 그제
야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각자의 병장기를 쥔 채 일어났다.
티나한은 철창에 손을 얹어놓은 채 가만히 앉아서 기다렸다. 어쩌는지
보려는 심산이었다. 무적왕 또한 검을 뽑아들기는 했으나 그걸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달려온 병사들도 그들의 무
적왕보다 더 앞쪽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그 때 륜이 또다시 말했다.
"제발… 도와줘요. 제발."
티나한은 익숙해졌기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던 그 목소리에 새삼 감탄했
다. 과연 여자로 착각할 만하군.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들은 무적왕과 병
사들은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거기에 힘을 얻은 선지자가 씩씩하게 외
쳤다.
"네 이놈, 마귀야! 정체가 드러났으니 썩 꺼져라!"
선지자의 외침과 함께 병기들이 흉측하게 꿈틀거렸다. 하지만 티나한은
눈도 깜빡하지 않은 채 말했다.
"한번만 더 용서해주기로 한다. 설명할 테니 잘 들어. 저건 내 동료야.
지금 몸이 좋지 않아서 저 안에서 쉬고 있어."
"동료? 동료 같은 소리 하지마라. 그럼 왜 들어가서 돌보지 않는 거
냐!"
"들어가선 안 되는 사정이 있거든."
설명하면서도 티나한은 자신의 설명이 과연 받아들여질지 의문스러웠
다. 과연 무적왕 일행은 의심스럽기 그지 없다는 표정을 보내어왔다. 선
지자는 기고만장하여 말했다.
"그 사정이 무엇인지 안다. 네 말이 거짓이기 때문이지!"
레콘도 아닌 주제에 꼬박꼬박 하대(下待)를 하는 선지자를 보며 티나한
은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설령 대선사라 하더라도 레콘에게 감히 그
러지는 못한다. 그런데 파계승 따위가 레콘을 업신여기고 있는 것이다.
"보자보자 하니 이게 정말… 진짜 마귀 짓 한번 해 줄까!"
티나한의 말 끝부분은 거의 계명성이 될 뻔했다. 무적왕과 병사들은 파
랗게 질린 얼굴로 물러났다. 하지만 선지자는 오히려 웃음을 터뜨렸다.
"오호라,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겠다는 거냐?"
"본색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잘 들어라! 저건 나가다! 하늘에서 내려온
여자 따위가 아니라고!"
겁을 잔뜩 집어먹었던 무적왕마저도 티나한의 말에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선지자는 티나한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좀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동료라고 하더니 이젠 나가라고? 나가가
동료라는 거냐? 그렇다면 그 나가는 한계선을 넘어와서, 네 동료가 되어
준, 목소리를 내는 나가라는 거냐? 완전히 정신 나간 마귀로구나."
티나한은 벼슬을 부르르 떨며 기어코 자리에서 일어났다.
티나한이 일어섬에 따라 무적왕과 선지자, 그리고 마흔 명의 병사들의
고개가 희극적으로 따라올라갔다. 전(前) 페치렌의 피혁상은 숨이 턱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맙소사. 산이 움직이는 것 같네!' 그러나 그들은
아직 고개를 다 들지 못한 상태였다. 티나한은 무릎에 얹어두었던 철창
을 똑바로 세워 땅을 짚었고 그러자 무적왕 일행은 7 미터나 되는 그 창
끝을 올려다보느라 목이 뒤로 꺾일 지경이었다.
"더 이상 이런 불손을 못 받아주겠다. 미쳐도 곱게 미쳤다면 또 모를
까, 아주 더럽게 미쳤군. 좋다! 정 원한다면 철-로-대-화-하-자-!"
티나한이 기어코 내지른 계명성에 몇 명의 병사는 뒤로 쓰러졌다. 쓰러
지지 않은 축들도 귀를 막으며 뒤로 물러났고 말들은 요동을 쳤다. 뒤로
수십 발자국 물러난 일행들 앞에서 무적왕은 윙윙 울리는 귀를 몇 번 때
린 다음에 말했다.
"철로 대화하자니, 무슨 소리야?"
선지자는 핏발 선 눈으로 티나한을 쏘아보며 말했다.
"살이 아닌 쇠로 대화하자는 말입니다. 폐하."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
"혀가 아닌 무기죠. 싸우자는 소리입니다. 폐하. 저 마귀가 레콘 흉내
를 아주 잘 내는군요. 폐하는 도전을 받은 겁니다."
무적왕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리고 티나한은 어이가 없어졌다. 그는
선지자라는 괘씸한 인간에게 도전한 것이었다. 하지만 선지자는 약삭빠
르게 무적왕에게 그 도전을 떠넘겼다. 하지만 티나한은 그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 선지자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철로 대화하기로 했으니 이제 말은 안 할 겁니다. 그리고 선공도 양보
할 겁니다. 도전을 받은 쪽이 먼저 공격할 권한을 가집니다. 폐하."
"선공이든 후공이든 레콘과 어떻게…"
무적왕은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여차하면 뒤로 돌격하자고 말할 기세
였다. 그러나 선지자는 여유있게 웃으며 대답했다.
"염려마십시오. 무적왕 폐하. 어떤 마귀도 감히 저를 대적하지는 못합
니다. 제게 맡기십시오."
무적왕은 감격한 표정으로 선지자를 바라보았고 티나한 또한 속으로 안
도했다. 선지자가 공격하기만 하면 그를 붙잡아서 몇 대 가볍게 - 아주
가볍게 - 때려서 감히 레콘을 업신여긴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해주겠
노라고 생각하며 티나한은 미소까지 지었다.
그러나 선지자는 앞으로 나오는 대신 옆에 있는 병사에게 뭔가 귓속말
을 했다. 병사는 뒤로 달려가더니 말에 매어둔 뭔가를 들고 왔다. 선지
자는 그것을 받아들고는, 그제야 차갑게 웃으며 티나한에게 다가왔다.
'어? 어? 야, 너!' 라는 말은 티나한의 부리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말
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지자는 자신있는 태도로 걸어왔고 티나한의
몸은 세 배로 부풀었다. 그 때 다시 탑 안에서 륜의 비명이 들려왔다.
"제발 도와주세요!"
"걱정마시오! 왕비여! 선지자가 저 마귀를 물리치실 거요! 그리고 내
그대를 만나리다!"
무적왕의 애절한 외침에도 티나한은 웃을 수 없었다. 그의 눈은 선지자
의 손에 들린 것에 고정되어 움직일 줄 몰랐다. 곤두선 깃털들은 이제
서로 부딪히며 괴상한 소리를 내었다. 선지자는 킬킬거렸다.
"이 마귀야! 감히 왕을 농락하려 한 죄값을 받아라!"
그리고 선지자는 커다란 물통의 마개를 뽑았다.
케이건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망치셨겠군."
티나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건은 그런 바보 같은 짓이 어디
있느냐, 수치를 알아라, 병신 같은 녀석아. 믿고 맡겼더니 겨우 물 몇
방울에 놀라 도망치냐. 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 다음엔?"
티나한은 도저히 벌어지지 않는 부리를 겨우 열었다.
"멀리서 봤어. 그 녀석들은 탑 안으로 들어갔어. 무슨 소동이 일어난
것 같은데, 거리가 너무 멀어서 잘 들리지는 않았어. 그런데 조금 후 그
선지자라는 새끼가 내 쪽을 향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더라고."
말을 하는 티나한의 손은 분함을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이 부들부들 떨
렸다. 케이건은 조용히 기다렸지만 비형은 참지 못하고 말했다.
"뭐라고 그랬는데요?"
"도망치려면 그냥 도망칠 것이지 왕비님을 왜 나가로 변신시켰냐고."
비형은 탄성을 질렀고 케이건은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티나한은 이
제 어깨까지 떨며 말했다.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오더군. 그런데 또 외치더군. '이 마귀야. 네
사악한 마법은 곧 깨어질 것이다. 폐하의 손이 닿자마자 왕비님의 흉측
한 나가 껍데기가 찢어지기 시작했단다. 그것이 바로 왕의 혈통을 타고
나신 분의 위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녀석들은 들것을 만들어서 륜
과 그 녀석의 옷가지와 짐까지 싣고 가버렸어. 그 놈의… 그것 때문에
오금이 저려서 따라가지도 못했어."
케이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교로운 우연이군. 그 때 허물벗기가 시작된 모양이오."
티나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형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 선지자라는 킴, 대단한데요! 그런 재주를 가지고 왜 이야깃꾼이 되
지 않았을까요?"
말을 끝낸 비형은 곧 자신들이 잡아온 여우를 돌아보아야 했다. 티나한
이 죽일 듯이 쏘아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티나한은 곧 자신을 책망하
기 시작했다.
"모두 내 잘못이야. 그 미친 놈들이 가까이 오자마자 쫓아버렸어야 되
는 건데. 미친 놈들이 하는 수작이 미친 짓 말고 뭐가 있겠어? 게다가
인간을 상대로 도전이라니, 나도 잠깐 미쳤나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