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3-1. 관련자료:없음 [52431]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4-03 00:25 조회:11799
눈물을 마시는 새.
3. 왕 잡아먹는 괴물 - 1
수십 판의 윷놀이에서 전패한 아라짓 전사가 마침내 격노하여 키
탈저 사냥꾼에게 외쳤다.
"이 쥐새끼 같은 놈, 왕의 은혜에 감사하라! 너희 발칙한 놈들이
지금껏 멸망하지 않은 것은 왕께서 아직 그것을 내게 명하지 않으
셨기 때문이다!"
키탈저 사냥꾼은 윷가락을 주워모아 아라짓 전사에게 건네며 태
연히 말했다.
"왕을 사랑하나 본데, 그렇다면 내게 감사하게. 자네 왕이 지금
껏 살아있는 건 내가 아직 그를 사냥하지 않았기 때문일세."
아라짓 전사는 폭소를 터뜨린 다음 다시 윷가락을 던졌다. 그리
고 또다시 패했다. - 페치렌 지방의 오래된 민담 中
비아스 마케로우와 카린돌 마케로우가 거친 언쟁을 일으켰을 때, 마케
로우 가문의 여인들은 난처해하기는 했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고 생각했다.
카린돌 마케로우의 처사는 마케로우 가문의 여인들 뿐만 아니라 하텐그
라쥬의 모든 여인들을 당황하게 했다. 남자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점에
서는 저 악명 높은 사모 페이와 쌍벽을 이룰 정도였던 - 그러나 이유는
완전히 달랐던 - 카린돌이 지난 한 달 동안 보여준 애정 행각은 기록적
인 수준이었다. 카린돌은 방문 중인 남자들 모두와 자려고 들었고, 그것
이 여의치 않을 경우엔 집밖으로 나가서 남자를 끌어오기까지 했다. 이
런 몰상식한 행동에 대해 다른 가문들은 분통을 터뜨렸고 마케로우의 여
인들은 어이 없는 표정을 지었다. 마침내 더 참지 못한 비아스가 카린돌
을 꾸짖은 것이 언쟁의 시작이었다.
비아스는 사모 페이조차도 거리로 나가 무력한 남자에게 겁을 잔뜩 준
다음 집으로 끌고 들어오는 짓은 하지 않았으며, 남자의 선택권을 무시
하는 그런 처사로 카린돌이 마케로우 가문을 욕되게 하고 있다고 지적했
다. 하지만 카린돌은 차갑게 웃으며 그런 우스꽝스러운 환상은 아버지라
는 니름 만큼이나 웃긴다고 대답했다.
[오, 제발 부탁인데 남자에게 의지가 있고 지성이 있다는 식의 웃기는
의인화는 하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그 '남자의 선택권'이라는 건 결국
주사위와 마찬가지잖아. 아무도 주사위에게 1부터 6까지의 숫자를 내놓
을 선택권이 있다고 니르지는 않을걸. 그녀들이 남자를 가지고 주사위
놀이를 하고 싶다면, 그러라고 해. 하지만 내가 꼭 그녀들과 같이 놀아
줘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
[같이 놀지 않겠다면, 방해는 하지 말아야 할 것 아냐. 주사위는 왜 뺏
어가는 거야?]
[내게 필요하니까.]
[그렇다면 너도 놀이에 참가해!]
[그 멍청한 놀이에 참가하는 방법 말고도 내게 필요한 것을 얻을 방법
은 있어. 그리고 나는 그 방법을 사용하고 있고. 나는 오히려 다른 여자
들에게 이렇게 닐러주고 싶은데? 그렇게 남자를 무서워할 필요는 없다
고.]
비아스는 어리둥절해졌다.
[남자를 무서워하다니, 무슨 니름이야?]
[여자들이 왜 집에서 남자를 기다리기만 하는 줄 알아? 여자들이 거리
로 나가서 직접 남자를 놓고 경쟁하게 되면 남자들의 콧대가 높아질까봐
걱정하기 때문이야. 나가 남자들이 저 불신자들의 남자들처럼 될까봐서
지. 쓸데없는 걱정이야. 남자들은 안돼.]
거기서 끝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카린돌은 한 마디를 덧붙였
다.
[그렇지 않으면, 조금 고상하게 해석하는 방법도 있지. 불운한 여인들
이 생기지 않게 하려는 배려라고 볼 수도 있어. 경쟁을 하게 되면 남자
를 구경도 할 수 없는 불쌍한 여자들이 생기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카린돌은 마치 무의식적으로 떠올린 것처럼 비아스 마케로우의
얼굴을 머리 속으로 그려보였다. 비아스가 미친 듯이 화를 내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절단된 수족마저 재생시키는 나가들의 '심각한 언쟁'이
라는 것은 다른 종족들의 그것과는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결국 최연
장자인 소메로가 두 사람을 호되게 꾸짖어야 했다. 두 사람은 소메로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소메로를 거슬릴 경우 가주 두세나의 분노를 사게 될
것을 생각하여 화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시늉뿐인 화해임은 비아스와 카린돌 모두 잘 알고 있었
다. 표출하지 못한 분노에 몸을 불사르던 비아스는 결국 심장을 적출한
나가를 죽일 방법을 본격적으로 고려하기 시작했다.
[걱정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걱정? 해.]
[걱정하신다고요?]
[그녀의 조악한 두뇌로 나를 죽일 계획을 짜내는 것이 너무 어려운 일
이라서 그녀가 포기할까봐 걱정해.]
카린돌의 대답은 남자를 경직되게 했다. 몸을 맞대고 있었기에 그 경직
은 곧장 카린돌에게 전달되었다. 카린돌은 빙긋 웃으며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무서워하는 거지?]
[무서워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잖아요.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게 니르시
는 겁니까?]
[내가 유도한 결과에 대해 무서워할 필요는 없잖아.]
[일부러 비아스를 충동질하고 있다는 니름입니까? 왜 자신을 위험에 몰
아넣죠?]
[그래야만 그녀가 큰 실수를 저지를 테니까. 여자의 세계에서는 위험
없이는 얻는 것도 없어. 스바치.]
여자들 특유의 뻐기는 니름투에 스바치는 미소를 지었다.
[허풍 떨지 마세요. 어차피 나가를 죽일 방법 같은 건 없잖아요. 그래
서 걱정하시지 않는 거죠?]
[나가를 죽일 방법은 없다고? 내 동생은 죽었어.]
[화리트요? 하지만 그 애는 심장을 적출하지 않았잖습니까. 그래서 그
렇게 쉽게 죽은 것이고.]
[그럼 심장을 적출한 나가는 쉽게 죽지 않는 건가?]
[그렇잖아요?]
카린돌은 잠시 정신을 닫았다가 다시 닐렀다.
[꼭 그렇지는 않아.]
[무슨 니름이십니까?]
[스바치. 뭔가를 묶은 자는 그것을 풀 수도 있어.]
[네? 무슨 니름인지 모르겠군요.]
[우리의 죽음을 묶은 심장탑은 그 죽음을 우리에게 풀어줄 수도 있다는
니름이야.]
스바치의 몸이 다시 경직했다. 스바치는 고개를 돌려 카린돌의 옆얼굴
을 바라보았다.
[심장… 파괴요?]
[어? 너 수련자였나?]
스바치는 자신이 실언을 했음을 깨달았다. 어떻게 니름을 둘러댈까 고
민하던 스바치는 거꾸로 질문하기로 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그걸 아시죠?]
[그럼 수호자가 되길 포기했나 보군.]
카린돌은 대답을 회피하려는 기색을 보였다. 덕분에 스바치는 자신의
정체에 대한 곤혹스러운 거짓니름을 짜낼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스바치는 앉아서 카린돌을 똑바로 내려다보며 닐렀다.
[예.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걸 어떻게… 혹 화리트가 닐러준
건가요?]
[너도 과거에 수련자였다면 잘 알 거 아냐. 그건 절대로 니를 수 없는
비밀일 텐데. 너 누군가에게 그걸 닐러준 적이 있냐?]
[아니오. 없습니다. 화리트가 닐러준 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어떻게 아
시는 거죠? 대답해 주세요! 이건 중요한 일입니다.]
카린돌은 귀찮은 일에 휘말렸다는 기색을 뚜렷이 보였다. 하지만 스바
치가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을 확인하자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닐렀다.
[과거, 페이 가문에서 그런 일이 있었지.]
[페이 가문에서요?]
[그래. 화리트와 륜이 절친한 친구였다는 건 알지? 그래서 그 두 녀석
은 자주 서로의 가문을 방문했지. 그런데 그 시절 나는 같은 어머니에게
서 태어났다는 것 때문에 화리트에게 책임감 같은 것을 느끼곤 했어. 그
래서 화리트가 페이 가문을 방문하고 싶어하면 나도 같이 가주겠다고 한
적이 많았지. 왜 그랬는지는 알겠지?]
스바치는 알 수 있었다. 조그만 소년이 집안을 방문한 남자들을 이끌고
나가버리면 가문의 성인 여성들은 결코 달가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다른 가문을 방문하는 것처럼 남자 뺏기를 당할 수 있는 종류의 외출이
라면 더욱 더. 그래서 카린돌은 자신도 동행하겠다고 니름으로써 화리트
의 외출이 좀 쉬워지게 도와줬던 것이다. 어린 시절, 화리트에게 카린돌
은 고마운 셋째 누나였을 것이다. 카린돌에게 화리트는 순진한 책임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도와줘야 했던 귀찮은 남동생에 불과했겠지만.
[그러던 어느 날, 다른 때처럼 화리트와 함께 페이 가문을 방문했다가
그 집에서 방문 중이던 남자 하나가 죽는 꼴을 보았지. 그 장소에 화리
트는 없었어. 하지만 륜이 있었지. 눈 앞에서 사람이 죽는 꼴을 봤으니
그 꼬마의 기분이 어땠겠어? 그 순간, 그 녀석의 마음이 열려버린 거
지.]
[그래서 읽었군요!]
카린돌은 갑자기 킥킥거렸다.
[그래. 아버지라는 웃기는 이름이 한참 들리더군.]
[아버지요?]
[그 남자가 녀석의 어머니의 짝이었나 봐. 그런데 나는 다른 것도 읽었
지. 그 때 륜은 수련자였거든.]
스바치는 상황을 깨달았다. 카린돌은 정신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에
해당하는 니름을 보내며 계속 닐렀다.
[그래. 나는 한 순간 다 알아버렸지. 그 남자는 처벌을 당한 거라는
것, 그 처벌이 바로 심장 파괴라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 심장
파괴라는 건 심장탑에 보관되어 있는 심장을 터뜨림으로써 심장의 소유
자를 단숨에 죽이는 비밀스럽고 무시무시한 처벌이라는 것까지.]
스바치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단순히 충격 때문이 아니었다. 어느
새 다가온 사이커가 그의 목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린돌은 사이커를 스바치의 목 비늘 사이로 밀어넣으며 천천히 닐렀
다.
[자, 이제 너희들 수호자들의 비밀을 다 알고 있는 나를 어떻게 할 거
지?]
스바치는 몸을 떨며 닐렀다.
[다 읽으셨다면, 마케로우. 그걸 왜 비밀로 하고 있는지도 아시겠군
요?]
[알아. 그 비밀이 공개되면 누군가가 단숨에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사
실이 두려워진 얼간이들은 심장을 적출하지 않으려들 테지. 그러면 우리
나가들의 가장 강력한 이점을 잃게 되고, 그 순간 우리들은 곡물을 먹는
불신자들의 말발굽 아래 쓰러질 테지.]
[그 이유를 다 이해하신다면…]
[그래. 다른 여자들 중에도 그 비밀을 아는 자들은 있지? 하지만 그녀
들은 그 이유가 합당하기 때문에 수호자들을 깡그리 불태우거나 심장탑
을 박살내는 대신 너희들이 심장 적출을 계속할 수 있도록 놔두지. 어쨌
든 여신의 신랑이 될 수 있는 건 남자들 뿐이니 도리가 없어. 그리고 너
희 수호자들이 그 심장 파괴를 함부로 쓰지 않는 건…]
[당신이 니르신 대로 천한 남자들이 감히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한 여자들에 의해 수호자들이 모조리 화형당하고 심
장탑이 파괴되어, 마침내 나가들이 여신과의 연결을 잃어버려 저 두억시
니들처럼 될 위험이 높기 때문에.]
[나를 심장탑의 수호자들에게 고자질할 건가?]
[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
니까요. 심장 파괴는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불가능한 여자들에게만
비밀입니다.]
[잘 생각했어.]
사이커가 사라졌다. 스바치는 목을 만져보곤 비늘이 몇 개인가 떨어져
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시에 스바치는 자신이 이 방에서 사이
커를 보지 못했다는 것도 떠올렸다. 침대 아래에 숨겨뒀던 것일까?
[정말 화나지 않으십니까, 마케로우?]
[화?]
[제가 그런 경우를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과거 수련자였을 때 스승님
께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보통 여자분들은 그런 비밀을 알게 되면 격
노하게 되신다고들 하더군요. 무적인 줄 알았던 자신이 실은 언제라도
간단한 손놀림만으로 죽을 수 있는 약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여자도 아
닌 남자들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 때문에. 그런데 당신은 너무 평온
해 보이는군요.]
[지금까지 다 닐렀잖아? 심장 적출은 나가에게 필요한 일이야. 꼭 필요
한 일의 부수적 결과로 수호자들에게 약간의 능력이 생긴다면, 그건 필
요불가결한 일이지. 게다가 그 능력의 남용에 따르는 위험을 수호자들
자신이 잘 알고 있지. 걱정할 것은 없어.]
[사람이 그렇게 합리적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잖아요.]
[스바치. 내가 그 일을 처음 알게 된 건 11년 전이야. 그리고 그 후 5
년 뒤 나는 심장을 적출하러 갔어.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스바치는 기가 막혔다. 적출식이 불멸의 수단일 때도 적지 않은 나가들
이 적출 공포증을 느낀다. 그런데 카린돌은 심장 적출이 누군가에게 자
신의 생사를 완전히 내맡기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런 공포도 없
이 적출을 했다고 니르고 있었다.
[정말 여자다우시군요. 용감하세요.]
[관둬. 그 여자답다는 니름, 남자들이 자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싶
을 때 여자를 부려먹기 위해 하는 니름이야.]
그렇게 니르면서도 카린돌은 미소지었다, 이제 한결 한가로와진 카린돌
의 니름이 들려왔다.
[그런데 그 남자는 왜 심장 파괴를 당했을까?]
[그 남자요?]
[그래. 페이 가문에서 죽은 그 남자. 너도 옛날에 수련자였다면 혹 알
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사용하길 꺼리는 심장 파괴를 왜 선택했어야 했
지? 그 남자가 그렇게 위험했나?]
[그 남자의 이름이 뭡니까?]
[잘 기억이 안 나는군. 요스… 요스베인지 요스비인지, 그런 이름이었
던 것 같아.]
[요스비야. 륜 페이가 수련자를 그만둔 것은 바로 그 사건 때문이지.]
세리스마의 대답에 스바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55층을 걸어올라온 자신
의 다리를 두드리며, 스바치는 의아한 듯 질문했다.
[그 요스비라는 남자가 륜의 아버지였다는 말이군요. 그렇다면 륜 페이
가 왜 적출 공포증에 걸린 건지도 알만하군요.]
[목전에서 그런 걸 봤으니 심장을 적출하고 싶지 않았겠지.]
[예. 그런데 그 남자는 왜 심장 파괴를 당한 겁니까? 그렇게 위험한 남
자였습니까?]
[심장 파괴에 대해서 잘 아나?]
[알만큼은 압니다.]
[아니. 자네는 몰라. 그게 뭔지를 아는 것과 그것이 의미하는 것을 아
는 것에는 차이가 있어. 카린돌 마케로우가 아무런 정보도 없이 추측해
냈듯이 그건 대단히 위험한 도구야. 그런 위험성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다른 자들에게 비밀로 하고 있어. 스바치. 그렇다면 그 위험한 처벌을
당한 자의 죄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은 더욱 위험하지 않겠나? 미안하
지만 닐러줄 수 없어.]
스바치는 불만을 느끼지는 않았다.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스바치
의 평온한 정신을 본 세리스마는 웃으며 니름을 이었다.
[그런데 화리트 살해범의 정체는 알아내었나? 카루가 의심하는대로 비
아스가 살해범이라는 증거를 찾아내었나?]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비아스에게 접근하는 편이 나
았을 것 같습니다. 우회하는 편이 더 안전할 거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
지만, 카린돌은 쓸만한 니름을 조금도 해주지 않는군요. 지금으로선 카
린돌과 비아스의 반목 때문에 비아스에게 접근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계획은 굉장히 아슬아슬한 가능성 위를 위태롭게 걸어가고
있는 것이군.]
세리스마의 표현은 스바치까지도 우울하게 만들었다.
[이 계획의 중요함에 대해서는 더 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겠지. 자네나
카루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화리트 살해범이 누군지 알아내어야 해. 그래
야 우리가 대사원에 보낼 사람과 보내지 말아야 할 사람을 분명히 알아
낼 수 있어. 힘들겠지만 노력해 주게. 스바치.]
스바치는 결연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은 무엇보다도 중요하
다.
[자, 계획이 뭔지 닐러보겠어?]
피라미드의 돌에 기댄 채 숨을 몰아쉬던 카루는 기겁하며 사모를 바라
보았다. 그는 놀란 눈으로 사모 페이를 바라보았지만 사모는 하늘만 바
라볼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카루는 닫았던 정신을 열었다.
[계획이라니, 무슨 니름이시죠?]
그들은 피라미드의 중턱에 기대어 있었고 그들을 바깥까지 인도했던 박
쥐들은 저 먼 숲의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뜨거운 불빛이 되어 번득이고
있었다. 밤하늘을 수놓는 그 불빛들을 바라보던 사모는 고개만 돌려 카
루를 쳐다보았다.
[꽤나 중요한 것인가 보군. 그렇다면 네가 결심하기 좋도록 내가 몇 가
지를 닐러보겠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서 내 동생을 데려가는
저 불신자들은 뭐지? 키보렌에 세 명이나 되는 불신자가 나타났다는 것
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뿐이야. 그
들이 누굴 만나러 온 거지. 그리고, 내 동생이 그들과 함께 행동하고 있
어.]
그것은 카루도 의아하게 생각하는 일이었다. 길잡이들은 암호를 통해
륜이 화리트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텐데 왜 륜을 데려가는 것일까?
륜이 도망치기 위해 그들에게 부탁한 것일까? 사모의 니름은 계속되었
다.
[그렇다면 그들은 내 동생을 데려가려고 온 거야. 그리고 너. 너는 그
들이 내 동생을 잘 데려가는지 감시하러 온 거야.]
[저는 마케로우 가문의…]
[카루. 두억시니에 대해서는 나보다 네가 더 잘 알더군. 그런 네가 고
작 암살이 제대로 수행되는지 감시하기 위해 저 끔찍한 피라미드 안까지
따라오지는 않았을 거야. 그대로 하텐그라쥬로 돌아가서 그들은 두억시
니에게 잡아먹혔다고 닐러줄 수도 있지. 아니면 그냥 돈을 포기하던가.
하지만 너는 저 안까지 나를 따라왔어. 왜 그랬을까? 그건 네가 마케로
우 가문의 의뢰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그렇다면, 내가 알지 못하
는 무슨 계획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려운 일일까?]
카루는 주저앉은 채로 뒷걸음을 쳤다. 그러나 사모는 그가 도망치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이 앉은 자리에서 조용히 카루를 바라보기만 했다.
뒤로 물러나던 카루는 마침내 튀어나온 돌에 부딪혔고, 그 자리에 멈췄
다. 카루에겐 그 상황 전체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사모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닐렀다.
[좀 더 닐러볼까? 어떤 나가들과 한계선 북부의 불신자들 사이에 공모
가 있는 거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은 내 동생을 한계선 너머로 보
내는 계획이야.]
칼이나 손, 그 어느 것으로도 사모는 카루를 위협하고 있지 않았다. 사
모는 그저 조용한 눈빛과 차분한 니름을 건네고 있을 뿐이었다. 사모는
심지어 일어서지도 않았다. 도망칠 테면 도망치라는 태도였기에 카루는
오히려 도망칠 수 없었다. 사모가 왜 그런 태도를 취하는지 알 수 없었
기 때문이다.
[니르지 않겠다면 곤란한데. 카루. 나는 꼭 알아야겠어. 도대체 그 계
획이 무엇이기에 내 동생이 가장 친한 친구를 그렇게 무참하게 살해해야
하는 거지?]
[륜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뭐라고?]
사모는 놀란 표정으로 카루를 돌아보았다. 카루는 무의식적으로 내뱉고
만 니름을 후회했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사모가 그를 다그쳤다.
[무슨 니름이야. 륜이 아닐지도 모르다니… 륜이 화리트의 살해자가 아
닐 수도 있다는 거야?]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기까지 따라온 것은 그것을 확
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륜이 화리트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누가?]
카루는 포기하는 심정으로 닐렀다.
[저는 비아스 마케로우가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사모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너는 지금 비아스 마케로우가 자기 남동생을 죽였다고 니르는 거냐?
그런 니름도 안 되는 이야기를 나보고 믿으라고?]
[그게 그렇게 특별한 일입니까? 당신도 지금 그러려고 하지 않습니까.]
덤벼들듯 니른 카루는 곧 그것을 후회했다. 사모가 고통스러운 듯이 얼
굴을 돌려버렸다.
[죄송합니다. 페이.]
사모는 카루를 외면한 채 닐렀다.
[…왜 비아스를 의심하는지 닐러봐.]
[살해 당일 비아스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비아스는
특수 도서실의 열람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동생을 끔찍하게 증
오합니다. 그것은 화리트의 생전에 그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화리트는 심지어 자기 누나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니름도 했습니
다.]
사모는 큰 한숨을 내쉬었다.
[맙소사. 비아스군.]
[네?]
[비아스 마케로우가 자기 남동생을 죽인 것이군. 너무 끔찍한 일이야.]
[아니,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시는 겁니까?]
사모는 하늘을 바라보며 닐렀다.
[나는 처음부터 륜이 화리트를 죽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
카루는 크게 놀랐다.
[네? 아니, 그게 무슨 니름이십니까?]
[화리트가 정면에서 칼을 맞지 않았으니까.]
[예?]
[화리트는 등 뒤에서 칼을 맞았어. 장소는 특수 도서실 입구 근처. 그
런데 나오다가 칼을 맞은 건 아닐 거야. 도서실을 둘러봤다면 살해자도
발견했을 테니.]
[살해자를 발견하고 도망치다가 맞은 걸 수도 있잖습니까?]
[도망친다는 건 상대가 반드시 자신을 죽일 거라는 걸 알고 있을 때에
나 가능한 일이야. 화리트가 륜이 자신을 죽일 거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까? 그렇지는 않겠지. 게다가 도망치는 사람의 등은 내려베기 어려워.
화리트는 들어가다가 미리 알지 못한 상태에서 맞은 거야. 륜이 도서실
안에 숨어있었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륜이 화리트보다 늦게 도달했다면…]
[륜이 화리트보다 늦게 도달했다면, 그 시점에 수호자 유벡스는 살아있
었을 거야. 수호자 유벡스가 륜이 화리트의 등을 벨 때까지 아무런 경고
도 해주지 않았을까? 만약 륜이 유벡스를 먼저 죽였다면, 화리트가 돌아
보지 않았을까? 나는 둘 다 가능성이 적다고 보는데.]
[그렇군요!]
[그래. 살해자는 유벡스를 먼저 죽였어. 그리고 그를 잔인하게 토막낸
다음 숨겨두었지. 그리고 홀로 돌아온 다음 화리트를 몰래 불러내어 도
서실로 데려갔지. 그리고 뒤에서 화리트를 따라가다가 그대로 벤 거야.
그런데, 이건 적출공포증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나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야. 그것은 화리트를 죽이기 위해 빈틈없이 계획한 자의 소행이지.]
카루는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곧 카루는 스바치가 제시했던
가설을 떠올렸다.
[니르시는 바가 옳습니다만, 륜 자신이 화리트를 죽이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한 사람일 수도 있잖습니까? 적출공포증에 빠진 척하면서요.]
사모는 카루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닐렀다.
[너희들이 보내려고 했던 것은 륜이 아니라 화리트였던 모양이군. 륜이
준비된 암살자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걸 보니.]
카루는 솔직하게 니르기로 결정했다. 거짓니름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
다.
[예. 우리가 보내려고 했던 자는 화리트였습니다. 그런데 그 화리트가
죽었습니다. 저는 살해자가 륜인지 비아스인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당신
은 조금 전 륜이 적출공포증에 빠져 화리트를 죽였을 가능성은 없음을
증명했습니다. 하지만 륜이 적출공포증에 빠진 척한 암살자라면 어떻습
니까?]
[그렇다면 륜은 어떻게 불신자들과 함께 행동하고 있는 거지? 너희들이
보내려고 했던 건 화리트인데.]
[아… 화리트인 척하며 우리 계획에 끼여든 거죠. 바꿔치기인 겁니다.]
사모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각을 많이 했나 보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어. 나는 륜을 알아. 하
지만 그건 내 주관적인 평가니 너는 받아들이지 않겠지. 그러니 객관적
으로 닐러주겠어. 먼저, 바꿔치기를 하려 했다면 그렇게 요란하게 화리
트를 죽이지는 않았을 거야. 물론 여건상 그런 끔찍한 방법 밖에 없을
경우도 있겠지만 그래도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남는데, 나에 대한 공격이
전혀 없다는 점이지.]
[네?]
[그렇잖아? 륜이 화리트와 바꿔치기된 거라면, 그 바꿔치기를 기획하고
륜을 준비시킨 자들이 있겠지. 설마 륜 혼자서 이 모든 일을 해냈다고
말하지는 않겠지. 그런데 그런 자들이 있다며 그 자들은 너희들이 화리
트를 보내고 싶어한 것 만큼이나 륜을 한계선 너머로 보내고 싶을 거야.
그 경우엔 내가 그들의 방해물이 되지. 따라서 오래 전에 나에 대한 공
격 시도가 있었어야 해. 하지만 그런 시도는 없었어.]
카루는 정신적 탄성을 질렀다. 사모의 지적은 정확했다.
[따라서 바꿔치기를 기획한 자들은 없는 거지. 너희들의 그 뭔지 모를
계획은 노출되지 않았어. 카루. 그런 복잡한 가설 대신 가장 단순한 것
을 선택하는 편이 가능성이 높아.]
[단순한 것?]
[내가 정리해주지. 카루. 먼저, 비아스 마케로우가 화리트를 죽였어.
그 이유는 나도 몰라. 하지만 화리트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
던 모양이니 그 생각을 존중하겠어. 죽어가던 화리트에게 적출공포증 때
문에 도망쳤던 륜이 도착했지. 그런 걸 봐야 했다니… 어쨌든, 화리트는
죽기 직전 륜에게 계획을 떠넘겼어. 그래서 륜은 화리트의 부탁을 받아
들여 대신 행동하고 있어. 친구의 마지막 부탁인데다가, 어차피 도망칠
생각이었으니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지. 그것이 가장 단순해. 그리
고 현재의 상황에 잘 들어맞고.]
카루는 반색하며 외쳤다.
[당신 니름이 다 옳습니다! 륜은 살해자가 아니었군요! 당신은 처음부
터 그걸 알고 있었다고요?]
[륜이 살해자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어.]
[아니, 어, 그럼 왜 진작 니르시지 않으신 겁니까?]
[응?]
[페이 가문에 쇼자인-테-쉬크톨이 요구되었을 때 말입니다. 왜 조금 전
하신 니름을 그들에게 들려주지 않으신 거죠? 그러면 동생의 누명을 벗
겨줄 수 있을 테고 당신도 암살자가 되지 않을 수 있을 텐데요.]
사모는 씁쓸한 표정으로 닐렀다.
[카루. 내 동생은 친구를 죽이지 않았어. 하지만 다른 죄를 지었지.]
[다른 죄?]
[심장을 적출하지 않았어. 어차피 내 동생은 살 수 없어.]
카루는 비늘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그럼… 다른 사람 대신 당신 손으로…?]
카루는 니름을 맺지 못한 채 정신을 닫았다. 하지만 카루는 그것을 받
아들일 수 없었고, 그래서 다시 정신을 열었다.
[하지만 륜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륜이 화리트 대신 행동하니까? 화리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기에 륜
이 대신할 수 있는 거지?]
[그건 닐러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륜이 화리트를 대신해서 해야 할
일이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는 것은 닐러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륜은
우리 요구 없이도 친구의 부탁을 받아 그 일을 하러 가고 있습니다. 제
발 그것을 방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페이. 당신은 륜이 화리트 살해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쇼자인-테-쉬크톨은 성립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다른 사람의 손에 죽을 바엔 당신 손으로 죽이겠다는
것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륜이 한계선을 무사히 넘으면 다른 나가의 손
에도 죽지 않습니다! 륜은 완전한 생존을 보장받는 거라고요!]
카루의 희열에도 불구하고 사모는 카루를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카루는
그 분노에 당황하며 계속 닐렀다.
[그렇잖습니까? 다른 나가들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신만 방해
하지 않는다면, 길잡이들이 훌륭하니 륜은 조만간 그들과 함께 한계선을
넘을 겁니다. 그럼 어떤 나가가 륜을 죽이겠습니까?]
[카루.]
[네?]
[알려줄 게 두 가지 있어. 첫째, 내 동생은 나가야. 둘째, 한계선이라
는 것은 그 북쪽에서는 나가가 살 수 없다는 의미지. 그 두 가지를 결합
해봐.]
카루는 어리둥절해 했다. 그러나 카루는 곧 사모의 말을 이해하고는 비
늘을 서로 부딪혔다. 사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동생은 북쪽에서 살 수 없어. 너희들은 화리트를 적출시킨
다음 보낼 생각이었겠지. 화리트였다면 다시 돌아올 수 있어. 하지만 내
동생은 돌아올 수 없어. 심장을 가지고 있으니. 그래서, 그 차가운 곳에
서 괴로워하다가 죽게 돼. 조금 전 어떤 나가도 륜을 죽일 수 없다고 했
나? 그 말이 맞아. 대신 무시무시한 추위가 륜을 고통스럽게 죽이겠지.
심장을 적출한 나가도 살 수 없는 그 냉혹한 곳에서, 심장을 적출하지
않은 내 동생은 몇 배로 더 지독한 고통을… 그만둬! 그렇게 되게 할 수
는 없어! 그건 다른 나가의 손에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야!]
멍한 표정으로 사모를 바라보던 카루는 갑자기 가슴 속에서 뭔가가 치
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고, 카루는 쓰러지지 않
기 위해 두 손으로 돌을 짚었다. 낮 동안 달궈진 피라미드의 돌은 따스
했다. 그리고 나가의 시야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더 끔찍한 죽음을 부탁합니다. 페이…]
사모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카루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의 눈
에서 떨어진 눈물이 돌에 부딪혀 작은 섬광을 이루었다가 곧 검게 식어
갔다.
[페이. 이런 니름 드리는 저를 도저히 용서하실 수 없으실 겁니다. 예.
저도 지금에서야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륜에겐 다시 없이 끔찍한 죽음이
라는 것. 하지만, 하지만 그 일은 중요합니다. 화리트가 하려 했고 이제
륜이 하려 하는 그 일은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 중요합니다. 륜도 중요
함을 알았기에 화리트에게서 사명을 넘겨받은 것 아니겠습니까? 제발 동
생을 보내주십시오. 당신이 동생에게 주려는 것이 편안한 죽음임은 압니
다. 누님으로서 주실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기에, 무서운 슬픔 속에서
그 일을 하시는 것도 알고요. 하지만, 다시 없을 고통 속에 죽게 되더라
도 륜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부탁합니다.]
사모는 여전히 침묵했다. 그 침묵은 카루에게 더할 수 없는 슬픔을 안
겨주었다. 차라리 폭언과 저주를 퍼붓는 사모가 그에겐 훨씬 편안했을
것이다.
견디다 못한 카루는 고개를 들어 사모를 바라보았다.
사모가 없었다.
놀란 카루는 황급히 일어섰다. 주위를 둘러보던 카루는 저 피라미드 아
래를 걸어가는 사모 페이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그녀의 곧은 허리와 정
확한 발걸음 어디에도 그가 조금 전 줄 수밖에 없었던 슬픔은 드러나지
않았다. 카루는 망연히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끝없이 되뇌었다.
죄송합니다, 페이. 죄송해요. 제발 동생을 보내주십시오.
키보렌의 어둠은, 딱딱한 나무 등걸을 타고 흘러내리는 이슬로 몸을 씻
고 음습한 초향 속에서 태양을 향해 소리 없이 호곡하는 그 어둠은, 신
록으로 자신을 뒤덮은 대지가 완강히 햇살을 거부한 채 터무니없이 긴
시간 동안 키워온 밤의 사생아였다.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그 그림자들
을 가로질러 남에서 북으로 움직이는 륜과 구출대 일행에게 북쪽이 가까
워졌음을 알려주는 단서는 하나 뿐이었다. 온도. 한계선이 완연히 가까
워지고 있었고 륜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느려졌다.
암살자가 아직 뒤를 따르고 있는 상황에서 케이건은 그런 느린 전진이
달갑지 않았다.
결국 케이건은 륜에게 소드락을 복용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부작용을
염려한 케이건은 소드락의 복용을 하루 한 번으로 제한했다. 륜이 소드
락을 복용한 다음 17분 동안 전속력으로 달리고, 나머지 일행이 그 뒤를
따르는 식이었다. 지쳐빠진 륜이 고립 상태에 처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
해 케이건은 가속 상태의 륜을 따를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즉 티나한에
게 륜을 뒤따르도록 했다.
그래서 일행의 여행은 꽤 이상한 모습이 되었다. 해 뜰 무렵, 부족하나
마 몸을 데운 륜은 소드락을 복용한 다음 티나한과 함께 무서운 속도로
북쪽을 향해 달렸다. 그 후 17분 동안의 달리기로 티나한과 륜의 하루치
여행은 끝났다. 그리고 그들은 나머지 일행을 기다렸다. 오후가 되었을
때 케이건과 비형, 그리고 나늬가 그들을 따라잡았다. 거기서 일행은 밤
을 보낸 다음, 다음 날 똑같은 일을 재개하는 것이다. 비형은 소드락의
효과에 감탄하며 자신도 먹어보고 싶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케이건은 고
개를 가로저었다.
"더운 피 생물에겐 소용이 없소. 나가와 식물에게만 쓸모가 있지."
"식물이오?"
"원래는 나무를 위해 개발한 약이라고 알고 있소. 그런데 나가에게도
쓸모가 있었던 거지."
케이건이 짜낸 고심책으로 일행은 그럭저럭 높은 이동속도를 유지했다.
하지만 북쪽으로 다가가면 갈수록 륜의 속도는 현저하게 떨어졌다. 마침
내 느린 쪽 - 케이건과 비형, 나늬 - 이 정오도 되지 않아서 빠른 쪽 -
륜과 티나한 - 을 따라잡는 지경에 이르렀다.
케이건은 티나한과 비형에게 이미 설명했던 것을 다시 설명했다.
"한계선 근처에서 소드락의 효과는 겨우 나가의 고향에서와 똑같은 정
도의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정도요. 북쪽이 상당히 가까워진 거지. 아
직까지 우리에겐 좀 더운 날씨지만 륜에겐 이미 혹한의 추위인 셈이오."
륜은 초췌한 표정으로 케이건의 말에 동의했다.
"소드락을 두 번 복용하면 어떨까요? 오전과 오후로 나뉘서 말입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암살자도 쫓아오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일 테니
까. 게다가 하루 두 번 복용했다가 정찰대라도 만나게 되면 세 번째를
복용해야 해. 그러면 네가 위험해져."
티나한이 제안했다.
"내가 륜을 업고 뛰면 어떨까?"
"소드락을 먹지 않은 상태에서 그렇게 달리면 륜은 얼어죽을 지도 모르
오. 륜은 심장을 가지고 있소. 위험을 감수하기 어렵소."
케이건은 잠시 고민한 다음 일행의 이동 방식을 바꿨다.
"티나한 당신이 륜을 업으시오. 당신의 깃털과 체온이라면 륜이 이 추
위를 견디는 데 도움이 되겠지. 하지만 뛰지는 말고 우리들과 함께 걷도
록 합시다. 그것도 당신이 더워지지 않을 정도의 느린 속도로 걷는 거
요. 조금이라도 덥다고 생각되면 즉시 말하시오."
비형과 티나한도 어느덧 케이건이 보는 식으로 밀림을 보게 되었다. 가
장 중요한 것은 온도였고 소리에 대해서는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아도 좋
다. 따라서 숲이 울창한 곳은 버석거리는 소리를 마음껏 내며 돌아다녀
도 좋지만 숲이 듬성듬성해서 걷기 좋은 곳은 오히려 피해야 한다. 숲을
가꾸기 위해 정찰대가 몰려올 수 있으므로. 발자국이 남는 흙이나 풀밭
은 마음대로 걸어도 좋지만 발자국이 남지 않는 바위나 돌은 오히려 조
심해야 한다. 체온 때문에 돌이 데워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낮의 햇빛에 노출된 뜨거운 돌은 상관없다…
그렇게 상식을 잠재우는데 성공한 도깨비와 레콘에게 케이건의 느닷없
는 선언은 충격적이었다.
"한계선을 넘었소."
티나한은 큰 눈을 끔뻑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제나 그제 보았던
숲과 똑같은 숲이 그들 주위에 펼쳐져 있었다. 나무들은 똑같이 장대했
고 더위는 여전히 짜증스러웠다. 하지만 케이건은 자신의 말을 완전히
확신하는 사람 특유의 평온한 어조로 덧붙였다.
"모두들 수고하셨소."
티나한은 별다른 것을 깨닫지 못했지만 비형은 놀란 표정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동료들이 저지르는 무수한 멍청한 행동을 꾸짖지
않는 것만큼이나 칭찬도 하지 않았다. 비형의 시선을 받은 케이건은 문
득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비형은 그 표정이 뭔가 곤란한 실수를 저지른
직후 바우 성주를 바라보는 자신의 표정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표정은 곧 사라졌고 케이건은 다시 특유의 친절하면서도 건조한 어투
로 설명했다.
"한계선이 측정 가능한 형태의 선인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정찰대와
조우할 가능성이 없으므로 한계선을 넘었다고 표현해도 무방할 거요. 물
론 이제부터는 이 무법지대를 애용하는 북쪽의 무뢰배들을 만나게 될지
도 모르지만 생각이 있는 자라면 절대로 레콘이 있는 일행에게 다가오지
는 않을 거요. 그러니 더 이상 긴장하지 않아도 좋소. 비형. 륜에게 불
을 지르시오."
평온한 어조 때문에 마지막 말의 충격은 좀 늦게 찾아들었다. 티나한에
게 업혀있던 륜과 비형은 거의 동시에 비명처럼 외쳤다. "예?"
그러나 케이건이 한계선을 넘은 기념으로 륜을 구워버리자는 제안을 한
것은 아니었다. 비형은 케이건의 상세한 지시에 따라 빛은 없지만 따스
한 열이 있는 도깨비불을 만들어 륜의 몸에 붙였다. 륜은 다시 원기를
회복했고 자신의 발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티나한은 감탄하면서도 왜
진작 그런 방법을 쓰지 않았냐고 질문했다. 케이건이 대답하기에 앞서
륜이 먼저 대답했다.
"제 몸을 덮고 있는 이 불은 당신들의 체온과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와 마찬가지잖아. 어차피 우리도 보였을 테니 너 하나
더 보여봤자 거기서 거기…"
"잘 이해를 못하시는군요. 제 몸 전부가 똑같은 온도인 겁니다. 당신이
머리 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한 가지 색으로 이루어진 옷을 입고 숲을 걸
으면 그게 얼마나 눈에 잘 띄겠습니까? 지금 제 눈에 저 자신은 그런 식
으로 보입니다."
티나한은 이해했고, 다시 케이건에게 감탄했다. 온도를 볼 수 있는 륜
이라면 그런 위험을 생각해내는 것도 당연했지만 온도를 보지 못하는 케
이건이 그것을 짐작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전 같았다면 호들갑스러울 정도로 감탄했을 비형은 입을 다문
채 케이건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 눈초리를 알아차린 케이건은 비형을
돌아보자 비형은 그를 외면하며 나늬의 뿔을 쓰다듬었다.
케이건은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비형 또한 케이건이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한계선을 넘은 그 밤, 오래간만에 편안하게 잠들 수 있게 된 티나한과
륜이 세상 모르고 곯아떨어졌을 때 비형은 모닥불 가에 앉아있는 케이건
에게 다가갔고 케이건은 조용히 그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밤의 다섯째 딸을 닮은 별들이 밤하늘을 길게 가로질렀을 때 비형은 입
을 열었다.
"무사히 이곳까지 데려와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저희들
때문에 고생이 많으셨죠?"
"특별히 고생스럽다고 느낀 적은 없었소."
"지금까지 석 달 가량 봤습니다만, 정말 잡아먹으며 터득한 지식들이
대단하시더군요. 역시 양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건 양치기가 아니라 늑대
인 겁니까?"
"아마도 양은 양치기의 지식을 더 높이 칠 거요."
"그리고 늑대는 자신의 지식을 평가당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활용하는
데 더 관심이 있을 테고요?"
"그럴 테지."
비형은 갑자기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케이건이 피워둔 모닥불이 거칠
게 몸부림치며 솟아올랐다. 약간의 삭정이와 나뭇잎으로 피워둔 불이라
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대한 불꽃이 얼굴로 다가왔지만 케이건은 무
심히 비형을 바라보았다.
그 불은 뜨겁지 않았다. 비형은 동그래진 눈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물러나지 않는군요. 제가 당신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싶었을 뿐이라는
것을 짐작하신 겁니까? 아니면 얼굴이 불타든 말든 상관이 없는 겁니
까?"
"말하고픈 바가 뭐요, 비형."
"먼저 조금 전에 했던 질문에 대답해주십시오. 어느 쪽입니까?"
"앞쪽이오."
"앞쪽이라고요?"
"그렇소. 당신이 나를 태우길 원했다면 내게 곧장 불을 질렀겠지."
비형은 반가운 표정으로 외쳤다.
"당신, 도깨비는 잡아먹지 않을 겁니다. 그렇죠?"
"그렇소. 그런데?"
"그런데도 조금 전 당신은 도깨비의 행동을 정확히 이해했어요. 그렇다
면, 당신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는 일을 잘 하는 겁니다. 그런 거죠?
당신은 킴이면서도 도깨비의 입장에 설 줄 아니까 도깨비의 행동을 이해
해요. 그렇다면, 당신이 나가에 대해 잘 아는 것은 나가를 잡아먹기 때
문이 아니라…"
비형은 흠칫하며 륜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케이건은 태평했다.
"깰 염려는 하지 마시오. 듣지 못하니까."
"아… 역시 그래요! 당신은 나가의 입장에 설 줄 아는 거예요. 그래요.
처음 봤을 때 당신은 말했어요. 그들이 죽고 싶어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안다고. 아시는 거죠?"
"알고 있소."
비형은 자신의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저도 그랬습니다!"
"네?"
"그 두억시니 말입니다! 티나한에게 들으셨죠?"
"들었소. 당신이 불을 지르지 않았다고 화를 내더군."
"저도 당신과 같은 이유에서 두억시니들을 태울 수 없었어요. 신을 잃
어버린 그들의 슬픔이 느껴졌어요. 그들의 슬픔과 분노가 느껴지는데,
어떻게 그들을 태워버릴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죽소."
"네?"
케이건은 고개를 약간 기울인 채 비형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레 그의 오
른손이 앞으로 나왔다. 케이건은 비형이 일으켜놓은 불을 오른손으로 천
천히 내리눌렀다. 그러자 케이건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워졌다. 그 어둠
속에서 케이건은 말했다.
"다른 사람의 슬픔을 느끼면 당신이 죽소."
비형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전율했다. 두억시니들의 피라미드를
나온 이후 그가 계속해서 고민했던 것, 그 어떤 말로도 뚜렷해지지 않던
것이 한순간에 구체화되었다. 케이건은, 마치 비형의 흉내를 내듯 말했
다.
"그랬잖소?"
그러했다. 그 피라미드 안에서 그러했다. 맹목적 분노 앞에서 그 분노
를 보지 않고 그 너머에 있는 슬픔을 보았던 비형은 그러했다.
비형은 고개를 떨구었다.
케이건이 다시 말했다.
"그래서 자신을 죽이는 신께선 당신들에게 죽어도 죽지 않는 목숨을 줬
나 보오."
비형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자신을 죽이는 신…?"
"가서 자도록 하시오. 비형. 밤이 늦었소."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티나한은 자신이 아직 잠을 자고 있는 것이 아
닌가 의심했다. 주위의 광경은 미친 군령자의 환상 속에서도 보기 힘들
만큼 초현실적이었다.
나무들은 모두 불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불이 붙어 있을뿐 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온갖 빛깔의 불들이 나무 주위에 어른거리고 있었
고 그 때문에 나무들은 투명한 보석처럼 보였다. 나뭇가지들 사이로는
극광과도 같은 불의 너울들이 드리워져 있었고 불꽃의 날개를 단 조그마
한 딱정벌레, 풍뎅이, 사슴벌레, 하늘소 등이 너울 사이를 헤치듯 날아
다니고 있었다. 손가락만한 조그만 딱정벌레들은 모두 색깔과 형태가 달
랐고 제각기 다른 기수를 태우고 있었다. 도깨비나 레콘, 인간, 나가로
보이는 기수들도 군데군데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은 별이 담긴 유리 항아
리, 회전하는 번개, 사슴뿔이 달린 새 같은 기묘한 것들이었다. 그 중
장관인 것은 티끌 만한 크기의 건물들로 이루어진 정교한 도시를 등에
태우고 날아 다니는 딱정벌레였다. 티나한은 그 모습에서 하늘치를 떠올
리곤 잠시 가슴이 벅차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티나한은 곧 이게 어찌된
일인지 알아보았고 얼마 있지 않아 그 만화경 같은 풍경 가운데 정좌해
있는 비형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가 비형을 발견했을 때 비형은 두 손
을 얼굴 앞에 모아쥐고 있었다. 두 손이 펼쳐지자 그 안에서 조그마한
딱정벌레가 날아올랐다. 그 딱정벌레가 등에 싣고 있는 것은 꽃잎으로
만들어진 병이었고, 그 속에는 유리로 만들어진 꽃이 담겨 있었다.
티나한이 어이없어 하고 있을 때 륜의 감탄이 들려왔다.
"화로가 식겠군요."
륜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형은 색깔 뿐만이 아니
라 온도에서도 다채로운 변화를 주고 있었다. 티나한과는 좀 다른 광경
을 보고 있었지만 륜이 보고 있는 것 또한 상상하기 힘들 만큼 초월적인
모습이었다. 그 때 두 사람의 인기척을 눈치 챈 비형이 고개를 돌렸다.
비형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좋은 꿈 꾸셨습니까?"
"지금 꾸는 것 같아. 도대체 뭐하고 있는 거지?"
티나한의 질문에 비형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한 잔 마시고 싶은 기분이었는데, 술이 없어서요. 어때요. 취한 것 같
은 풍경 아닌가요?"
티나한은 고개를 갸웃하며 왜 술 마시고 싶은 기분인지 물으려 했다.
하지만 그 때 술이 뭔지 알 수 없었던 륜이 먼저 질문했다.
"술이 뭔데요?"
비형의 대답은 륜을 당혹시켰다.
"차가운 불입니다. 거기에 달을 담아 마시지요. 그런데 당신들에겐 술
이 없나요?"
"아마 없나 봅니다. 그게 뭔지 상상도 안 되니."
그날 아침, 식사가 끝나고 다시 일행이 여행을 재개하려 했을 때 케이
건은 일행을 멈춰세웠다.
"비형. 나늬에 륜을 태우고 대사원으로 가시오."
일행은 놀란 표정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티나한이 말했다.
"어, 그럴 필요가 있어?"
"한계선 이남에서는 정찰대원의 주목을 끄는 것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땅으로 걸어왔지만, 이제 한계선을 넘은 상황에서 괜히 늑장을 부
릴 필요는 없소. 대사원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은 륜이오. 그러니 티나한
당신은 좀 천천히 걸어가도 괜찮을 거요. 물론 당신이 마음 먹고 달린다
면 그리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겠지."
"응? 그럼, 너는?"
"나는 가지 않소."
비형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가지 않는다고요?"
"그렇소. 당신이 륜을 태우고 하늘로 날아간다면 나는 더 이상 필요 없
을 거요. 여러분들을 데리고 키보렌에 들어갔다가 다시 무사히 나온 걸
로 내 일은 끝난 것 같소. 그러니 나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오."
"하지만, 대사원으로 가서 사례를 받으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사례?"
"어, 즈믄누리는 이 일에 저를 파견하는 대가로 대사원으로부터 금편
200 개를 받기로 했습니다. 티나한 당신도 하늘치 유적 발굴에 필요한
지원을 받기로 했죠?"
티나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말했다.
"나는 사례 때문에 이 일을 한 게 아니오. 나가를 제외한 자들 중 키보
렌과 나가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한 거요. 그리
고 대사원에는 약간의 빚 비슷한 것도 있고. 그 때문에 나는 이 일에 참
여했소. 그러니 나는 받을 사례가 없소."
"하지만, 어, 당신의 일은 대사원까지 륜을 데려다주는 일이잖습니까?
여기는 아직 대사원이 아닌데요?"
"딱정벌레에는 두 사람까지만 탈 수 있잖소."
비형은 우물쭈물하며 티나한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티나한 또한 할 말
이 없었다. 케이건의 말은, 그들이 지난 석 달 동안 들어왔던 그의 말과
마찬가지로 반대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말이었다. 비형이 륜을 태우고
날아가는 것이 가장 빠르고 안전하게 륜을 목적지에 데려다주는 방법이
었다. 그 비행에 케이건은 필요가 없었다.
케이건은 다른 사람들이 반대하지 않을 것을 안다는 듯이 자신의 짐을
챙겨들었다. 배낭을 매고 바라기를 등에 건 케이건은 일행을 빠르게 돌
아보았다. 그의 눈이 마지막으로 머문 곳은 비형의 얼굴이었다. 비형은
울 듯한 얼굴을 한 채 케이건을 보고 있었다.
짧게 한숨을 쉰 다음 케이건은 말했다.
"헤어지기 전에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고 싶소. 비형. 키탈저 사냥꾼들
의 옛이야기요. 괜찮겠소?"
"예? 아, 무슨 이야기죠?"
"네 마리의 형제 새가 있소. 네 형제의 식성은 모두 달랐소. 물을 마시
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 독약을 마시는 새, 그리고 눈물을 마시는 새가
있었소. 그 중 가장 오래 사는 것은 피를 마시는 새요. 가장 빨리 죽는
새는 뭐겠소?"
"독약을 마시는 새!"
고함을 지른 티나한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 보자 의기양양한 얼
굴이 되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물을 마시는 새요."
티나한은 벼슬을 곤두세웠고 륜은 살짝 웃었다. 피라는 말에 진저리를
치던 비형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의 눈물을 마시면 죽는 겁니까?"
"그렇소. 피를 마시는 새가 가장 오래 사는 건, 몸밖으로 절대로 흘리
고 싶어하지 않는 귀중한 것을 마시기 때문이지. 반대로 눈물은 몸밖으
로 흘려보내는 거요. 얼마나 몸에 해로우면 몸밖으로 흘려보내겠소? 그
런 해로운 것을 마시면 오래 못 사는 것이 당연하오. 하지만."
"하지만?"
"눈물을 마시는 새가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고 하더군."
륜과 티나한은 알 듯 모를 듯하다는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비형은 환한 표정이 되었다. 그 밝은 얼굴을 보며 케이건은 그대로 작별
인사까지 해치웠다.
"잘 가시오."
일행은 당황하여 허둥거렸지만 케이건은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갔다.
간격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그들이 뭔가 그럴 듯한 인사말을 떠올렸을
때 케이건은 이미 소리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다. 구릉
을 넘는 케이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비형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
였다. 티나한은 투덜거렸다.
"원 참. 귀찮은 녀석들 겨우 떨쳐내니 속 시원하다는 투로군. 뒤도 안
돌아보고 내빼냐?"
그러나 륜과 비형은 티나한의 말에 동감하지 않았고 티나한조차도 자신
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지난 석 달 동안 케이건은 단 한 번도 그들을
귀찮아하지 않았다. 인내심만으로 그 긴 시간을 참아넘기긴 어려웠을 것
이다. 티나한은 결국 솔직하게 말했다.
"쳇. 헤어지니까 섭섭하네. 녀석이 모든 걸 신경써줄 때는 마음이 탁
놓였는데, 막상 떠나고 나니 키보렌에 있을 때보다 더 불안하군."
비형은 빙긋 웃으며 나늬를 향해 손짓했다.
"또 만날 수 있겠죠?"
"그럴 거야. 반드시."
티나한은 그럴 거라고 믿었다. 생각할수록 티나한은 반드시 그렇게 될
거라는 강한 확신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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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3. '왕 잡아먹는 괴물' 편 시작합니다. (챕터 제목도 참…)
좋은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