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새-9화 (9/62)

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2-4.                         관련자료:없음  [52214]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3-29 00:08  조회:12509

눈물을 마시는 새.

2. 눈물처럼 흐르는 죽음 - 4

티나한과 비형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륜은 청각에 집중하지 않

았다. 청각에 계속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고,

따라서 휴식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륜은 티나한과 비형의 이

야기를 듣지 못한 채 고요 속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 고요 속에서 륜은 니름을 들었다.

륜은 사모가 그를 쫓아 여기까지 온 것인 줄 알고 깜짝 놀랐다. 하지만

다시 들어본 니름은 나가의 것과는 달랐다.  나가의 세련된 니름과는 비

교도 할 수 없이 엉성한 니름이었지만,  비명이나 웃음소리처럼 그 의미

는 분명했다.

"오라는 것 같습니다. 이리 오라고 니르고 있군요."

티나한은 긴장했다.

"두억시니가, 그 뭐냐, 니른다고? 그걸 하고 있는 걸까?"

"모르겠습니다. 이 두억시니들은 워낙  형태가 다양하니 니를  줄 아는

자도 있을지 모르겠군요."

티나한은 륜의 말을 이해했다. 두억시니에 대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두억시니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는 것뿐이었다. 비형이 도깨비다운 낙천적인 제안을 꺼내었다.

"오라는데 가 볼까요? 륜, 그 니름이라는 것도 목소리처럼 방향을 잡을

수 있는 겁니까?"

"가능합니다. 하지만 소리와는 좀 다릅니다. '왼쪽'이라는 말은 오른쪽

이나 앞, 혹은 뒤에서 들려오더라도 왼쪽을 가리키는 말이죠? 그것과 비

슷합니다. 누군가가 '이쪽으로 오라'고 니르면,  저는 그 '이쪽'이 어느

쪽인지 알 수 있습니다."

"재미있네요. 어쨌든 가 보죠?"

티나한은 부리를 부딪혔다.

"가 보자고? '이리 와. 너희들 참 맛있겠구나.' 라는 내용이면 어쩔 거

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놀라겠어요?"

"놀라주지. 그 중요한 게 뭔데?"

"지금 말하고, 아니, 니르고 있는  자가 두억시니인지 아닌지는 모르지

만, 어쨌든 그 자는 여기 들어와서 처음  만나는 말이 통하는 자라는 거

죠. 어때요, 중요한가요?"

륜과 티나한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것은 정말 중요한 지적이었다. 말

이 통하는 상대에게는 농담을 건넬 수도  있고 욕설을 퍼부어줄 수도 있

고 우아하게 철학을 나눌 수도 있지만,  도움을 청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분명 도움이 필요했다.

티나한은 철창을 움켜쥐었다.

"좋아. 가 보자. 잠시만… 됐어. 두억시니는 없다. 불 붙여."

세 사람과 한 마리의 몸에 다시 도깨비불이 붙었다. 그들이 광원이었기

에 어디에도 그들의 그림자는 생기지 않았다.  이토록 완벽한 어둠 속에

서 그림자가 없다는 것은 기묘하게 보였다.

다짐대로 륜은 정확한 방향을 가늠할 수  있었다. 계단과 모퉁이, 갈림

길 앞에서 륜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티나한은 그 빠른 이동에 만족

했지만 동시에 불안을 느꼈다.

"거, 이상하군. 그렇게 달려들던 놈들이 왜 이렇게 조용한 거지?"

두억시니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지난 다섯 시간 동안의 기억은 아

직 생생했고 그래서 그들은 이 이유를 모를 침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천장이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고 바닥도.

그들이 멈춰선 곳은 거대한  우물 같은 수직통로의  중간쯤에 튀어나온

선반 같은 곳이었다. 수직통로의 위쪽은 빛이  닿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

히 높았고 바닥 또한 만만찮게 깊었다.  수직통로의 직경 또한 거대해서

반대편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륜은 반대쪽을 가리켰다.

"저 건너편에서 니름이 들려옵니다. 뭔가 뜨거운 것이 잔뜩 있는데, 뭔

지는 모르겠습니다. 벽을 타고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소리가 들린다."

"예?"

"너는 안 들리겠지만 나한테는 들려. 저  반대편 벽쪽에서 뭔가가 움직

이고 있다. 네가 말하는 그 흐르는  것인가 본데. 어이, 비형. 도깨비불

하나 던져봐. 저 앞쪽 허공에 띄울 수 있을까?"

비형은 그렇게 했다. 비형이 던진 도깨비불은 수직통로의 중간, 허공에

떠서 사방에 빛을 뿌렸다.

수직통로의 둥근 벽면이 모두 드러난 순간 세 사람은 얼어붙고 말았다.

거무튀튀한 석벽을 따라 팔과 다리와  몸통, 그리고 머리들이 뒤범벅이

되어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척추가 대롱대롱 매달린 뇌,  토막난 내장, 부러진 뼈와  찢어진 근육,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잔뜩 부풀어오른 안구,  그리고 치아와 혈관과 피

부와 너덜거리는 팔다리들이 수직통로의 벽을  따라 아주 느리게 흘러내

렸다. 그것이 그렇게 천천히 떨어지는 까닭은 담즙과 혈액, 정체를 모를

체액과 배설물과 고름 등이 아교처럼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이

다. 그래서 그 소름끼치는 폭포는 녹아내리는  촛농이나 방패에 붙은 핏

덩이처럼 꿈틀거리며 천천히 벽면을 미끄러지고 있었다.

비형은 허리를 확 굽힌 다음 요란스럽게 토하기 시작했다. 티나한 또한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지만 비형이 추락하지  않도록 도깨비의 허리를 움

켜잡았다. 온몸의 비늘을 부딪혀 타다닷 하는 소리를 내던 륜이 말했다.

"아래를… 아래를 보세요."

아래를 본 티나한은 더욱 끔찍한, 하지만 동시에 경이적인 모습을 보았

다.

벽면을 따라 흘러내린 그 추악한 흐름은  바닥에 쌓여 서서히 고형화되

었다. 그 퇴적물에서 육신의 각 부분이  제멋대로 조합된 물체들이 하나

둘씩 나타났다. 충분히 고형화된 그 물체들은  손, 혹은 손으로 쓰일 수

있는 것을 이용해 몸을 일으켰다.  두억시니였다. 그렇게 제멋대로 조립

된 두억시니들은 퇴적물에서 분리된 다음  독립적인 두억시니가 되어 바

닥의 주위에 있는 여러 개의 통로로 걸어들어갔다.

"아래에서 분리된다면… 비형, 비형! 정신  차리고 도깨비불을 위로 좀

올려봐."

비형은 여전히 허리를 숙인 채 손만 까딱거렸다. 공중에 떠있던 도깨비

불이 위로 솟구치는 것에 따라 티나한과 륜의 얼굴도 올라갔다.

수십 미터 높은 곳 벽면에 거대한 입 같은 구멍이 있었다. 폭포는 거기

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낮은 쪽에 있던 그들은 각도가 맞지 않아 구멍

뒤편을 볼 수 없었지만  티나한과 륜은 그  구멍 뒤편에서 두억시니들이

해체되고 있으리라는 예감을 느꼈다.

[그렇다.]

륜은 펄쩍 뛸 만큼 놀랐다. 그리고, 그런  경악 속에서 나가인 륜은 당

연히 니름으로 대답했다. 그래서 티나한이나 비형은 륜의 경악을 눈치채

지 못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 생각이 맞다. 위에서 두억시니들이 해체되고 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죠?]

[여기다.]

륜은 그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폭포! 이 유해(遺骸)의 폭포가 '당신'입니까?]

[그렇다.]

티나한과 비형은 유해의 폭포 그 자체가  하나의 인격체라는 말에 당황

했다. 륜은 설명하려고 애썼지만, 솔직히  자신도 이해하고 있는지 확신

할 수 없었다.

집단의 무의식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의식의 공재는? 륜은 그런 것들

에 대해 알지 못했다. 륜이 말할 수 있는 것은 피와 살점과 뼈다귀의 폭

포가 들려준 설명뿐이었다.

유해의 폭포가 쏟아져나오는 구멍 뒤쪽에는  거대한 공터가 있었다. 과

거의 어느 시점, 그곳에서 어떤 두억시니가 죽었다. 그 두억시니는 무서

운 독을 가지고 있었고 죽은 후에도  지독한 독기를 뿜어내었다. 그래서

근처를 지나던 다른 두억시니들까지 독기에 감염되어 죽었다. 독기는 얼

마 후 사라졌지만 그 무렵 공터에는 이미 무수한 시체가 쌓여 산을 이루

다시피 했다.

그 시체 더미가 썩으며 흘러나온 부패액이  구멍을 통해 아래로 흘러내

리기 시작한 것이 폭포의 탄생이었다. 석벽을  타고 흘러내리던 작은 물

줄기가 어느날인가 자신을 자각했던 것이다.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일

어날 수 있었던가?

"이 피라미드 구조에는 일종의 신비한  힘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하긴,

그렇지 않으면 이런 기이한 건축물을 만들  이유가 없겠지요. 지상의 피

라미드와 지하의 거꾸로 된 피라미드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역사

였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눈 앞의 수직통로는 피라미드의 중앙을 관통하

고 있고 따라서 피라미드의 신비한 힘은  이 수직통로를 타고 흐르는 모

양입니다. 그 힘이 두억시니의 시체들에 작용한 것 같습니다."

"마법이라는… 그런 것 말인가요?"

"그런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물줄기는 자신을 자각하며 시간을  보내었다. 피 그 자

체가 생명이 아니라 피의 흐름이 생명이듯, 물줄기의 자아는 흐름 그 자

체였기 때문에 액체가 바닥에 쏟아지는 것은 그 '물줄기 존재'에게 아무

런 영향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물줄기에겐  나름의 걱정이 있었다.

구멍 위쪽에 쌓여있던 시체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물줄기는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보았다. 물줄기는 '원했다.'

사망이 임박한 두억시니들이 공터로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마치 그곳에

서 죽어야 한다는 것처럼  몰려들어서는 그곳에서 죽었다.  다시 시체가

늘어났고, 물줄기는 소멸의 위험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물

줄기는 그 때까지와는 다른 '무엇'이 되었다.  '소망할 수 있는 물줄기'

가 된 것이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지만 소망은 사라지기는  할지언정 절대로 충족되지

는 않는다. 불이 언제나 더 많은  땔감을 소망하지만 땔감을 공급한다고

해서 불이 충족되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땔감이 공급되면 불은 더

욱 커진다. 소망 또한 마찬가지다.

물줄기의 소망은 점점 거대해졌다. 조그마한 흐름이었던 물줄기가 육체

의 파편으로 이루어진 폭포로 바뀌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바닥에 한없이 쌓이면 흐름 자체가 중단된다는  - 폭포에게는 그것이 죽

음이다. - 이유 때문에 흐름의 속도를  늦추고 바닥에 도달한 육체의 파

편들을 다시 두억시니로 환원시키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유해의 폭포는

폭발적인 성장을 잠시 중단했다.

하지만 여전히 소망은 충족되지 않았고,  그래서 유해의 폭포는 사유를

시작했다.

그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언어 없는 사유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어떤 자도 유해의 폭포에게 언어를 가르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두억시니

들의 유해에 남아있는 종족적 기억과 피라미드 자체가 기억하고 있는 두

억시니들의 기억이 폭포에게 사유할 능력을 부여했다.

유해의 폭포는 성급함을 알지 못했고 지루함이라는 것을 느끼지도 못했

다. 그래서 유해의 폭포는 천년 동안 꾸준히 사유했다.

그리고 천년이 지났을  때, 언제나처럼 두억시니를  불러들이던 폭포의

소환에 엉뚱한 반응이 나타났다. 폭포는 천년의  사유를 잠시 중단한 다

음 그 기묘한 반응에 주의를 기울였다.

비형이 가까스로 욕지기를 억누르고 말했다.

"그게 우리라는 겁니까?"

"예. 우리가 여기까지 오면서 두억시니를 만나지  않은 것은 저 폭포가

그렇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피라미드에 두억시니들이 그렇

게 많은 이유도 저 유해의 폭포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 폭포는 자신을

계속 구성하기 위해 두억시니들이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마치 군령자 같

군요."

티나한은 동료인 롭스를 떠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군령자에 대해서는 내가 좀  알아. 내 발굴 동료  중에 군령자가 하나

있거든. 군령자는 여러 개의 영들이 한  몸에 모여있는 거지. 그런데 저

건 여러 개의 몸이 모여서 하나의 영이 된 것 같은데?"

"그렇군요. 그렇다면 저 폭포는  군령자가 아니라 군육자((群肉者)라고

불러야 하겠군요."

"적당한 이름인 것 같군. 어쨌든 저 해괴망측한 것에게 나가는 길을 물

어볼 수 있겠어?"

륜은 유해의 폭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티나한과 비형은 초조하게 륜

을 바라보았지만 유해의 폭포 쪽은 쳐다보지 않았다. 그들에겐 지루하게

느껴지는 시간이 지난 다음, 륜은 고개를 갸웃한 채 말했다.

"저 폭포의 니름이 놀랄 정도로 세련되어졌군요. 처음에는 정말 어색했

는데. 아마 원래부터 단어는 많이 알고  있었으니 그걸 정리하기만 하면

되었던 모양입니다."

"단어? 아, 두억시니들. 그런데 물어본 것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네. 나가는 길을 알려줄 수 있지만  먼저 자신의 요구를 들어달라는군

요. 대가의 개념으로 니른 것은 아닙니다.  그런 개념을 모르니까요. 다

만 우리가 가버리면 자기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으니 그 전에 자기 요구

부터 들어달라는 식이군요."

"그래? 그 요구가 뭔데?"

"자기가 천년 동안 사유했지만 아직 대답을 알지  못한 것에 대해 대답

해주길 원하는군요. 그런데 그게 좀 까다로운 질문인데요."

"무슨 질문인데요?"

륜은 미간을 찡그렸다.

"두억시니가 왜 신을 잃었는지 알고 싶답니다."

사모는 다시 쉬크톨을 힘있게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녀를 향해 달려오

는 것처럼 보이던 두억시니는  그녀의 예상과 달리  점점 작아지고 있었

다. 두억시니를 자세히 바라본 사모는 그  두억시니의 상하체가 서로 반

대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억시니는 자신의 다리를 내

려다보며 흉포하게 으르릉거렸지만, 사모에게 달려들려는 두억시니의 의

도는 오히려 두억시니로 하여금 사모에게서 점점 멀어지게 만들었다.

사모는 웃지 않았다.

[너무 비참하군.]

[저도 비참해요.]

카루는 투덜거렸지만 사모는 냉랭한 정신어를 보내었다.

[너나 나 같은 사람은 그렇게 말해선 안될 것 같은데. 저렇게까지 삶의

기쁨을 박탈당한 자들 앞에선.]

[저 녀석들은 자기가 비참하다는 걸 모를  겁니다. 하지만 저는 비참하

다고 느끼고 있다고요. 아니, 위험을 느낀다고 해야 할까요.]

사모는 고개를 돌려 카루를 바라보았다. 사모의 눈길을 본 카루는 어깨

를 과장되게 늘어뜨려 보였다. 하지만 사모는 조금의 동정심도 표현하지

않았다.

[그 배낭, 이젠 꽤 가벼울 텐데.]

실제로 카루의 배낭은 조금 전보다 많이 가벼워져 있었다. 하지만 카루

의 고민거리는 바로 배낭이 가볍다는 것에 있었다. 카루는 배낭 속에 손

을 집어넣었다가 꺼냈고, 그의 손바닥엔 돌멩이 한 개가 놓여있었다.

[보세요. 페이. 이젠 꽤 식었어요.]

[아직은 알아볼 수 있어.]

[예. 하지만 돌아나갈 시간을 생각한다면 아슬아슬하지 않겠어요?]

유적으로 들어선 사모와 카루는 륜의 일행이 어디로 향했는지를 분명하

게 알 수 있었다. 비형과 티나한의 체온은 포석과 피라미드 위에 뚜렷한

온도를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료에 대한 걱정 때문에 무턱대고

피라미드 안으로 뛰어든 륜 일행과 달리 사모와 카루는 피라미드의 거대

한 구조를 확인하자마자 곧 걸음을 멈췄다. 그들은 도깨비불을 만들어낼

수 없었고 돌로 만들어진 피라미드의 차가움은 나가의 눈에 아무런 도움

도 되지 않았다. 한 마디로, 그들에겐 길을 찾아낼 방법이 없었다.

사모는 별 말 없이  피라미드 밖에 주저앉았다. 해가  떠오르고나서 몇

시간이 지날 때까지 사모는 조용히 피라미드를 바라보기만 했다. 카루가

바닥난 인내심 속에서 안달할 때 사모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카루

에게 약간 묘한 명령을 내렸다. 배낭  가득히 돌멩이를 집어넣으라는 말

을 들었을 때 카루는 사모가  두억시니들에게 돌이라도 던지려나 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모는 피라미드 속으로 들어서자 그 돌멩이를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뜨리도록 했다. 그리고 몇 시간  동안 햇빛에 달궈진 돌멩

이들이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것을 보며 카루는 감탄했다. 나가의 눈

에 그것은 횃불 만큼이나 선명한 표식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피라미드 내부는 압도적일 정도로  넓었다. 어느새 배낭이 가벼

워져 있었지만 그들은 앞으로  얼마나 더 들어가야  할지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배낭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며 카루는 불안을 느꼈고, 그 불안

은 배낭 속에 남아있던 돌의 온기가 눈에 뜨일 정도로 줄어든 것을 보자

더욱 커졌다.

[돌아갈 길이 식어가고 있어요. 자칫하면 어둠 속에서 꼼짝달싹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모는 카루의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사

모는 대답하지 않은 채 앞쪽의 어둠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카루는 결국

조바심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페이. 돌이 식기 전에…]

[이 자들이 왜 신을 잃었을까?]

사모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카루는 약간 당황했다.

[예? 자신들의 오만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건 나도 알아. 구체적으로 어떤 오만이라는 거지?]

[글쎄요. 신이 필요없다고 생각한 것  아닐까요? 혹은 자신들이 신보다

낫다고 생각했다거나.]

사모는 통로의 벽과 천장, 바닥을 죽 둘러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자들이 이런 것을 만들 수 있을까?]

[무슨 말씀이시죠?]

사모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이상한 니름을 닐렀다.

[이웃을 바라볼 창문을 값진  주렴으로 덮고 어두운 방  안에서 자신을

잃고 찾아헤매니, 이를 지혜로움이라 불렀더라. 저 오만한 두억시니.]

[누가 한 니름이죠?]

[니름이 아니라 노래야.]

[노래…요?]

[그래. 내가 거론한 건 중간 부분이고,  처음엔 이렇게 시작했어. 남겨

진 수명을 헤는 일도 두렵고 썩어들어가는 수족을 추스리는 짓도 포기한

지 오래. 지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목  아래에 걸터앉아… 응?  왜 그러

지?]

카루는 가까스로 침착을 유지할 수 있었다.

[썩는다니… 그거, 나가의 이야기가 아니겠군요? 우리들의 수족은 썩지

않으니까요.]

사모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니름을 닐렀다.

[당연히 아니지. 우리가 무슨 노래를 부르겠어. 이건 아라짓 전사의 노

래라는 거야. 인간들의 노래지.]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그걸 아시죠?]

[내게 칼 쓰는 법을 가르쳐주었던 요스비라는 자가 있지. 그 자는 한계

선 이북의 괴상한 풍습을  많이 알았어. 좀 지나칠  정도로 많은 관심을

가졌고 그 때문에 그 끝이 좋지 않았지. 그 자에게 들었던 노래야.]

카루는 일어선 비늘을 누이려 애쓰며 긴장을 가라앉혔다. 그가 전혀 예

상할 수 없는 순간에 화리트에게 가르쳐주었던 노래를 들었던 충격은 대

단한 것이었다. '제기랄. 가능한 일이야.  인간들이 그 노래를 가르쳐줬

어. 그러니 요스비라는 작자가 인간들의 관습에  관심이 많았다면 그 노

래를 알 수도 있었겠지.' 다행히 사모는 카루의 이상한 모습이 '노래'라

는 것에 놀란 탓이라 짐작했다.

[많이 놀란 모양이군. 미안해. 어쨌든  그건 내가 알기로는 두억시니가

신을 잃은 이유에 대한  가장 긴 설명이야. 대개들  두억시니가 왜 신을

잃었냐고 물어보면 두억시니가  오만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지. 그거면

충분하다는 듯이.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오만했다는 거지?  그런데 그

노래에선 설명을 하고 있어. 만족하기엔 너무 짧은 설명이지만 말이야.]

[그 노래는, 그러니까 두억시니들이 주위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끊고 자

기 자신도 잃었다는 뜻입니까?]

[그리고 그 상황을 지성적인 행동으로 여겼다는 거지.]

[그런데요?]

사모는 손을 약간 들어 주위의 벽을 가리켰다.

[그런 자들이 이렇게 훌륭한 건축물을 만들 수 있을까?]

[이것은 개미들도 만드는 것이잖습니까? 개미탑은  속이 비어있고 원뿔

모양이지요. 이 피라미드처럼.]

[이웃도 모르고 자신도 잃은 개미는 개미탑을 쌓을 수 없어.]

카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카루는  대화가 엉뚱한 방향으로 치닫

고 있는 것이 더 신경쓰였다.

[무슨 니름이신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이야기는 밖에 나가서 들

으면 안 될까요, 페이? 돌이 식어가고 있습니다.]

사모는 한숨을 내쉬었다.

[넌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나?]

[네? 느껴지다니오?]

[이 안에 두억시니가 왜 신을 잃었는지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는 누군가

가 있다는 것. 뒤통수가 간지러울 정도인데.  내가 그 이야기를 꺼낸 건

그 때문이야.]

티나한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륜을 바라보았다.

"두억시니가 왜 신을 잃었냐니, 오만함 때문이잖아?"

"그렇게 말해줬습니다. 그런데 그 오만이라는 것이 어떤 오만이냐고 묻

는군요."

티나한은 난처한 듯 비형을 돌아보았다. 비형은 어깨를 으쓱였다.

"케이건이라면 혹 알지도 모르겠군요. 케이건은  그런 전승지식이나 고

대어 같은 것에 해박하잖습니까?"

다시 한 번 그들은 케이건의 부재가 가져다주는 손실을 절감했다. 왼손

으로 수염볏을 비틀대던 티나한이 맥풀린 어조로 말했다.

"할 수 없지. 우리도 정확하게는 모른다고 말해줘."

륜은 다시 진득하게 흘러내리는 육체의 파편들을 돌아보았다.

[우리도 두억시니가 어떤 오만 때문에  신을 잃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서요.]

유해의 폭포는 잠시 침묵하며 흘러내리다가 다시 질문했다.

[너희들은 신을 잃지 않았는가?]

[그렇습니다.]

[너희들은 어떻게 너희들의 신과 소통하는가?]

[우리 나가들은 수호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발자국 없는 여신께 제를

올리고 그 뜻을 지상에 실천하는 일을  담당합니다. 여신께서는 그 증거

로 저희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주십니다.  그리고 인간들에게는 어디에도

없는 신께 제를 올리는  승려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디에도

없는 신의 뜻만을 따를 뿐 세속의  연은 끊는다는 의미로 머리카락을 깎

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도깨비는 어르신들, 그러니까  죽은 도깨비들이

주로 자신을 죽이는 신께  제를 올리는 일을 맡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레콘은…]

륜은 잠시 말을 멈추고 티나한을  돌아보았다. 티나한은 고개를 갸웃했

다.

"왜?"

"당신들은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께 어떻게 제를 올리지요?"

"안 올려. 사원도 없는걸."

"없는 건 아니잖아요."

"너 그게 어디 있는지 아냐? 아무도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없는 것이나

다름없지."

륜은 그대로 전해주었다. 유해의 폭포가 니른 다음 질문은 륜을 당황하

게 했다.

"저 폭포가 니르길, 그럼 레콘들도 신을 잃었냐고 묻는데요?"

티나한 또한 당황했다. 티나한은 평소 행운에 대해 여신께 감사하고 불

운에 대해 여신께 불평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 이상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레콘에겐 보편적인

모습이다. 고민하던 티나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는 않아. 야, 너희들이 보기에 우리가 여신을 잃은 것 같아?"

비형과 륜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륜은  그 생각을 그대로 들려주

었다.

[아니오. 레콘이 그들의 여신을 잃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유해의 폭포는 다시 침묵했다. 조금 후,  다시 시작된 폭포의 니름에는

노기가 담겨 있었다.

[전부 제멋대로 신과 관계 맺고 심지어 무관심한 자들까지 있구나.]

륜은 그 분노한 어조에 놀라며 유해의 폭포를 바라보았다. 노기와 더불

어 폭포의 니름은 점점 더 세련되어지고 있었다. 륜은 숫제 나가와 이야

기를 나누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너희들은 신을 잃지 않았단 니름이지. 오직 두억시니만이 신

을 잃었군. 너무 오래되어서 잊어버렸다는 그 정체 모를 오만함 때문에.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니를 수 있느냐? 보아라!]

[네?]

[나를 봐! 네 눈 앞에 있는 나를, 그리고  이 피라미드 안을 맴도는 나

의 일부를 봐라. 한 종족에게 있어 신을 잃는 것보다 더 큰 사건이 없을

거라는 것을 짐작할 수  없느냐? 이것은 종족의  죽음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를 잊을  수 있느냐! 이런 꼴이  되어도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면! 오래 되어서 잊어버렸다는 것은 도무지 니름이 안돼!]

륜은 폭포의 니름이 옳다고 생각했다. 왜 그토록 중요한 일을 잊어버렸

을까? 유해의 폭포는 선고하듯 닐렀다.

[결론은 한 가지야. 너희들은 나를 속이고 있어!]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왜 당신을 속이겠습니까?]

[거짓니름 하지 마라!  사실대로 닐러라.  두억시니가 왜  신을 잃었느

냐!]

[그렇게 니르셔도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겁니다.  저도 이해할 수 없지만

당신들의 오만…]

[그만! 그런 기만은 그만둬. 더욱이 네 본심을 짐작하는 자 앞에선!]

[네? 무슨 니름이십니까?]

[두억시니는 신을 잃지 않았어. 두억시니의  신은 살해당한 거다. 너희

들이 두억시니의 신을 죽인  거다! 그리고는 두억시니의  오만이 어쩌니

하는 가당찮은 거짓니름을 하는 거다!]

륜 페이는 유해의 폭포가  보내오는 거친 니름에 놀라  뒤로 물러났고,

그 다음에야 비로소 그 니름의 의미에 놀랐다. 비형과 티나한이 놀란 눈

으로 바라보았지만 륜은 먼저 폭포를 향해 닐렀다.

[어떻게 그런 니름도 안 되는 추측을 한  겁니까.  신을 살해하다니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허튼 니름하지 마라! 나는 네 정신을 읽었다.  네 기억 속에는 분명히

다른 신의 살해에 대한  계획이 있었다. 그런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은, 과거에도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다는 의미겠지. 너희들이 두억시니의

신을 죽인 거다!]

륜은 유해의 폭포가 미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살신(殺神) 계획'이

라고? 그 비슷한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던 륜으로서는 유해의 폭포가

니르는 니름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문득 륜은 유해의 폭포가 자신을 읽었다면 자신 또한 폭포의 정신을 읽

을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륜은 시도해보았고, 성공했다.

"도망쳐요!"

티나한은 륜의 외침에 벼슬을 꼿꼿이 세우고,  철창을 꽉 움켜쥐고, 눈

을 부라리기까지 했지만, 그 외침을 따르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야? 왜 그래, 륜?"

륜은 뒷걸음질치며 두서없이 외쳤다.

"저 폭포는 우리들을 자기 일부로 만들 생각이에요! 저 놈은 우리를 삼

킬 생각입니다. 저 유해들처럼 될 거란 말입니다!"

티나한은 몸을 잔뜩 부풀리며 폭포를 향해 앞으로 성큼 걸어나갔다. 하

지만 그 위풍당당한 기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티나한은 아래를 내려다보

며 고개를 갸웃거렸고 비형은 보다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했다.

"그런데 어떻게?"

"네?"

"폭포가 어떻게 우리를 삼킨다는 거죠? 위로 흐르기라도 하나요?"

그 순간 폭포가 위로 흐르기 시작했다.

경악으로 부릅떠진 일행의 눈 앞에서 폭포는 괴기스러운 움직임으로 꿈

틀댔다. 폭포의 아랫부분이 위로 치솟아 위에서 쏟아지던 유해들과 부딪

혔고 그 합류 지점에서 유해의 파편들이  앞으로 돌출되기 시작했다. 돌

출부는 두 개였고 점차 길어졌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형성하며 돌출된

유해들은 마침내 두 개의 팔이 되었다.  한쪽 팔에는 다섯 손가락, 다른

쪽 팔에는 일곱 개의 손가락이 튀어나왔다. 손가락의 길이는 제각각이었

지만 한 가지 인상적인 공통점이 있었다. 모든 손가락의 첫째 마디는 포

도 송이처럼 뒤엉킨 수백 개의 안구로 이루어져 있었다. 비늘 소리를 내

며 경련하는 륜에게 무시무시한 니름이 다가왔다.

[나와 같은 자가 또 생기도록 내버려둘 순 없다. 그 니름도 안 되는 살

신 계획과 너를 한꺼번에 없애주마. 너를  내 일부로 만들겠다! 내가 되

어서 내가 느끼는 고통을 느껴봐라!]

경직되어 있던 일행들 중 티나한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 그 무시

무시한 손은 이미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수백 개의 안구에 비친 수백 명의 자신을 향해 티나한은 계명성을 내질

렀다.

수백 명의 티나한이 산산조각났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고성에  의해 손가락의 첫마디들이 파괴

되었다. 안구가 사방으로 튕겨져나가는  역겹기 짝이 없는  광경 속에서

륜과 비형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 순간 폭포에서 생물이 내는 것

같지 않은 기괴한 포효가 울려퍼졌다.

손가락 첫째 마디를 잃은 손들은 분노하듯 거칠게 서로 엉켜들었다. 두

개의 팔이 허공에서 꿈틀거리며 하나로  합쳐지자 거대한 뱀처럼 바뀌었

다. 팔과 다리와 몸통과 머리와 내장과  척추가 뒤엉킨, 둘레가 몇 아름

이나 될 것 같은 공포스러운  뱀이 허공에 머리를 띄운  채 일행을 향해

포효했다.

"치루루루루!"

뱀의 입 속에서 이빨처럼 자리잡은 부러진 뼈들이 섬뜩한 빛을 뿜었다.

티나한은 철창을 움켜쥐며 외쳤다.

"썩을, 도망가!"

"안돼요! 막혔는 걸요?"

뒤를 흘깃 돌아본 티나한은 벼슬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그

들의 등 뒤로 두억시니들이 잔뜩 몰려들어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티

나한이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고민할 때  유해의 뱀이 끔찍한 소리를 지르

며 달려들었다. 티나한은 더 이상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퇴로를 뚫어!"

그리고 티나한은 달려드는 유해의 뱀을 향해 철창을 내뻗었다.

비형은 어쩔 줄 몰라하며 앞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뒤쪽에서는 티나

한이 달려드는 유해의 뱀을 상대로 격렬한 격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 무

게만 해도 무지막지한 철창에 레콘의 힘이 더해지자 유해의 뱀은 다가올

때마다 그 일부가 박살나며  물러났다. 하지만 폭포는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고 유해의 뱀은 계속 자신을 재구성하며  달려들었다. 말 그대로 폭

포와 싸우는 셈이었다. 비형처럼  앞뒤를 쳐다보던 륜이  조급하게 외쳤

다.

"비형! 불을 질러요!"

비형은 정신이 퍼뜩 든 표정으로 륜을 내려다보았다. 륜은 통로를 막고

있는 두억시니를 가리켰다. 하지만 도깨비는 격렬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

다.

"그럴 수 없습니다. 어떻게 살아있는 자들에게 불을 지릅니까?"

"저게 살아있는 겁니까!"

"하지만 죽은 것도 아니잖습니까?"

륜은 비늘을 곤두세우며 비형을 바라보았다. 지난 다섯 시간 동안 그토

록 험악한 고초를 겪으면서도 비형은 그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지금 또

다시 거부하고 있었다. 륜이 도깨비를 설득하려  할 때 두억시니들이 괴

성을 지르며 돌격해왔다.

"딱딱하게 끊는 망치 바르면!"

"무거운 해 늙어 태어나면 개나리 웃지요!"

륜은 황급히 허리춤을 뒤져  붉은 알약을 꺼내었다. 비형이  눈을 크게

뜬 순간 륜은 소드락을 삼켰다.

"좋습니다. 제가 뚫겠습니다. 따라오세요!"

사이커를 두 손으로 움켜쥔 륜은  질풍처럼 달려갔다. 두억시니들은 모

순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달려들었지만 륜은 그들을 정면으로 상대할 생

각이 없었다. 왼쪽 벽으로 뛰어오른 륜은 그대로 벽을 따라 달리다가 몸

을 뒤집으며 천장을 걷어찼다. 그리고 두억시니의 머리 위로 떨어져내렸

다.

그로부터 몇 분 동안, 륜은 바닥에 한  번도 발을 딛지 않았다. 그리고

다리를 아래로 향했던 시간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두억시니의 어깨나

머리, 그 둘이 다 없는 경우엔 다른  것을 밟거나 짚으며 계속 도약하는

륜의 모습은 거꾸로 뜬 채 싸우는 듯했다.

그러나 그 경이적인 분투에도 불구하고 륜은  거의 퇴로를 확장하지 못

했다. 계속 재구성되는 유해의 뱀과 마찬가지로 두억시니들 또한 끊임없

이 몰려들었다. 10 분이 지났을 때 륜은  겨우 10 미터를 나아갔을 뿐이

었다. 소드락의 지속시간을 절반 이상 써버린 륜은 초조함을 느꼈다.

티나한 역시 난처한 지경에 빠져있었다. 비록 상대방이 수십 미터가 넘

는 거대한 크기였지만 티나한의 패기는 조금도 퇴색되지 않았다. 하지만

벽에 난 구멍 속에 서있던 티나한의 행동 범위는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우회 공격을 한다거나 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상태에서 오로지 정면

으로만 부딪혀야 했던 것이다. 유해의 뱀은 그런 상황을 십분 활용했다.

비록 다가설 때마다 들소라도  일격에 관통할 듯한  무서운 공격을 받고

물러나야 했지만, 유해의 뱀은  얼마든지 자신을 재구성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때마다 조금씩 더 거대해진 모습으로 달려들었다.

마치 티나한을 쓰러뜨릴 수  있는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계속 시험하는

듯했다.

비형은 앞 뒤 어느 쪽도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비형은 나늬에게 기대어 어깨를 떨었다.

"왜 이래야 되는 거야?"

"제발 불을 질러요! 비형!"

비형은 고개를 들어 륜을 바라보았다.  소드락에 취해있던 륜은 깨닫지

못했지만 그의 몸에는 무수한 상처가 나  있었다. 날카로운 손톱이 달린

손이 마치 거대한 거미인 양 륜의 등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며 비형은

진저리를 쳤다. 륜은 심장을 가진 나가다.  수족이 잘려도 재생할 수 있

는 다른 나가들과는 다르다.

비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두 손을 들어올렸다. 그에겐 륜 페이를 하인

샤 대사원에 데려다주어야 하는 임무가  있었다.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

그가 행동하지 않는다면 셋이 되지 않는다. 마침내 비형이 저 페시론 섬

의 악당들이 마지막에 본, 그리고 아킨스로우  협곡에 영원한 징벌의 낙

인을 찍었던 바로 그것을 만들어내려 했을 때였다.

비형은 한 두억시니의 얼굴을 보았다.

지독하게 못생긴 두억시니였다. 오른쪽 눈은  비뚤어진 코에 거의 달라

붙어 있었고 왼쪽 눈은 이마에 붙어있다시피  했다. 윗입술은 거의 없어

고르지 못한 치열을 드러내고 있었고  아랫입술은 두툼했지만 심하게 갈

라져 있었다. 마치 탈수증에 시달리는 듯했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

다. 그 두억시니는 끊임없이 울고 있었다.

눈물샘에 어떤 이상이 있는  듯했다. 실제로 그 추악한  얼굴 어디에도

비통해하는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양손을 합쳐  여섯 개 밖에 안 되

는 손톱을 륜의 몸에 박아넣으려 안달하는 그 몸짓에는 맹목적인 분노만

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 무의미한 몇 방울의 눈물이 비형의  두 손 위에 영글던 대재

앙을 꺼트렸다.

비형은 두 손을 떨구었다.  소드락의 약효가 떨어지면 륜은  죽을 것이

다. 그리고 티나한 또한. 비형은 자신의  죽음에 슬퍼하지는 않았다. 죽

음을 안타까워하는 도깨비는 없으니까. 그 순간 비형은, 극히 차분한 정

신으로 케이건 드라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왜 죽이고, 왜 먹어버리는 거죠?"

한계에 달한 근육이 몸 속에서 뒤틀리는 듯하고 그 자신이 휘두르는 사

이커의 검끝이 세 개로 보일 지경이었지만, 륜은 이를 악물며 다시 도약

했다. 그리고 팔이 빠져라 사이커를 내찔렀다. 한번 더 팔을 휘둘렀다간

정말 팔이 어깨에서 빠져나갈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너무도 현실감 있

게 다가왔다. 하지만 두억시니들의 숫자는 줄어드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

다. 소드락의 효과는 이미 감퇴하고 있었고 륜은  한 번 더 소드락을 삼

킬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나는 요스비처럼 죽지 않아! 나는 화리트처럼 죽지 않겠어! 내 심장은

아무도 가져갈 수 없어!]

륜은 눈 앞의 두억시니를 요스비처럼, 화리트처럼 죽였다. 매섭게 날아

간 사이커가 두억시니의 심장을 터뜨릴 때마다 륜은 살아있음을 느꼈다.

죽음으로 이루어진 뱀이 다시 살아나며  달려들었다. 티나한은 거친 욕

지거리를 내뱉으며 철창을 휘둘렀다. 맹렬한  동작의 갈피마다 티나한의

몸에서 깃털이 떨어져 허공에  나부꼈다. 최후의 대장간에서  막 벼려진

철창을 힘있게 움켜쥔 그  날 이후 처음으로  티나한은 철창이 무겁다는

느낌을 받았다. 철창엔 피와 담즙과 살점들이  두텁게 달라붙었고 그 위

에 깃털이 엉겨붙어 있지만, 그 무게가 무거울 리는 없다.

유해의 뱀이 다시 다가왔다. 철창을 내찌르려던 티나한은 그 동작을 완

료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는 당혹했다. 붙일  단위도 별로 없을 찰라

의 시간이지만 어쨌든 분명히 늦게 될 것이라고 판단한 티나한은 무의식

적으로 계명성을 내질렀다. 유해의 뱀은  움찔하며 물러났다. 훌륭한 임

기응변이었지만 티나한은 임기응변을 시도해야 했다는 사실 자체에 격노

했다. 티나한은 발을 쾅쾅 구르며 철창을 틀어쥐었다.

"와! 이리 와 덤벼라, 이 살지도 죽지도 않은 녀석아! 열흘이라도 싸워

주마! 또 재생하냐? 죽은  것들을 뭉쳐서 살아나는  거냐! 제기랄, 무슨

말이야, 이게? 이 말도 안 되는 자식아, 덤벼라!"

"레콘?"

티나한은 하마터면 철창을 놓칠 뻔했다.

"마, 말도 하네? 목소리 진짜 좋군. 그런다고 용서해줄 줄 아느냐?"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레콘. 누구와 말다툼을 하는 거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티나한은 고개를 들어 유해의 폭포가 쏟아져나

오던 맞은편 벽의 구멍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 구멍은 마치 뱀이 쏟아져

나오는 뱀굴처럼 보였다. 그 구멍 입구에, 유해로 이루어진 뱀의 동체를

밟고 서있는 한 나가 여인이 있었다.

"암살자!"

티나한의 외침과 함께 유해의 뱀은 허공에서  몸을 꼬아 자신의 동체를

돌아보았다. 수족과 내장과 뼈다귀로 이루어진 그  머리 양쪽에 박혀 있

는 두 개의 머리가 마치 눈처럼 사모 페이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단순한

시체 더미를 밟고 있는 줄 알았던 사모는 그 모습에 크게 놀랐다.

[여신이여, 도대체 이게 무슨…!]

"치루루루루!"

괴성과 함께 유해의 뱀의 몸에서 수족들이 마치 털처럼 곤두섰다. 실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뱀의 몸 전체에서 손가락을  잔뜩 편 손이나 발가락

을 경련시키는 다리가 일어선 것이다. 사모  페이의 뒤쪽에 있던 카루는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사모 페이는 비늘을 곤두세우며 쉬크톨

을 날렵하게 뽑아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뱀의 동체에 꽂아넣었다.

유해의 뱀은 피라미드가 진동하는 괴성을 토해내었다. 사모는 쉬크톨을

뽑아들며 외쳤다.

[진짜 살아있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던 유해의 뱀은  자신이 쏟아지던 구멍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 거대한 동체가 구멍을 막아버리자  티나한은 더 이상 사

모 페이를 볼 수 없게 되었다. 티나한은  부리를 딱 부딪힌 다음 주저없

이 몸을 돌렸다.

"일어나! 비형, 나늬!"

티나한은 비형과 나늬를 지나쳐 륜이 고군분투하는 곳으로 뛰어들었다.

티나한이 괴성을 지르며 철창을 세 번 내찌르자 륜이 지난 십여 분 동안

가까스로 확장시킨 거리가 간단히 두 배로 연장되었다. 놀랄만한 돌격력

이었다. 륜은 티나한이 지금껏 유해의 뱀을  제압하지 못한 이유가 돌격

할 거리가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륜은 티나한에게 유해의 뱀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티나한은 두억시니들을 꿰뚫느라 대답할 여력이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도 륜 자신이 입을  열 힘조차 없었다. 소드락의  효과는 완전히 사라졌

다. 기절하고 싶을 정도로 피곤했고 몸 곳곳이 고문당하듯 아팠다. 사이

커를 지팡이처럼 짚은 채 륜은 거칠게 헐떡였다.

그 때 뒤에서 다가온 비형이 륜을 부축했다.  륜은 힘겹게 미소 지으며

비형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비형은 웃지 않았다.  덩치 큰 도깨비는 거의  울 듯한 얼굴로,

하지만 묘하게 평온한 얼굴로 그저 동료를 일으켜세웠다.

"륜. 갈까요?"

"아, 네."

륜을 막아섰을 때 철벽 같았던 두억시니의  무리는 티나한 앞에선 싸리

울타리만도 못했다. 범람하는 홍수가 들판을  쓸어버리는 기세로 티나한

은 두억시니의 무리를 헤쳐놓았다. 그 덕분에 륜과 비형, 그리고 나늬는

난자당한 두억시니들로 이루어진 길, 유해의  길을 걸어야 했다. 비형에

게 부축받으며 걷던 륜은 비형이 이상한 짓을 하는 것을 목격했다.

도깨비는 슬픈 표정으로 자신의 발에 도깨비불을 붙였다. 그 불은 비형

이나 륜에겐 아무 해도 입히지 않았지만  발을 내딛을 때마다 유해의 길

을 불태웠다.

처음 얼마 동안 티나한이 느꼈던 것은  보다 멀리까지 도망쳐야 된다는

단순한 감정이었다. 그러나 거친  호흡이 균일해지고 뛰는  행동 자체에

더 이상 신경을 쓸 필요가 없어지는 시점이 다가왔을 때 티나한은 그 자

연스러운 달리기에 거북함을 느꼈다. 티나한은 왜 거북함을 느꼈는지 생

각해 보았고, 그 답은 자명했다. 티나한은 길을 알지 못했다.

"이런, 젠장.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계속 이렇게 돌아다녀도 되는 건

가?"

륜 또한 당혹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은 들어왔을 때와 마

찬가지로 무작정 도망치고 있었다. 길을 찾아내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했

다. 그 때 조용히 걷고 있던 비형이 말했다.

"바닥에 재미있는 것이 있군요. 이게 뭘까요?"

비형은 바닥에서 큼직한 돌멩이를 들어올렸다. 티나한은 무슨 소리냐는

듯이 비형을 바라보았다.

"돌이잖아? 그게 어쨌다는 거야?"

"봐요. 반질반질하지요? 마모가 심하게 되어 있는 돌이에요. 여기엔 이

런 돌이 있을 수 없죠. 이건 바깥에 있던 돌 같은데요?"

"게다가 따스하군요."

티나한과 비형은 륜을 돌아보았다. 륜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돌멩이를

바라보다가 저 앞쪽의 통로를 가리켰다.

"저 앞에도 비슷한 게 있군요. 이건 햇빛에 달궈졌던 돌입니다. 아직은

보이는 걸로 봐서 밖에서 여기로 옮겨진지 몇 시간 되지 않는 것 같은데

요."

티나한과 비형은 륜이 떠올린 것과 똑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암흑 속에

서 뜨거운 돌을 볼 수 있는 것은 륜과 같은 종족 뿐이다. 티나한이 아랫

부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네 누나가 떨어뜨려 놓은 것이군. 똑똑한데."

"언제 여기까지 따라오신 걸까요."

"음? 아까 듣지 못했어? 아차, 넌 듣지 못했겠군. 소리에 신경 쓸 여유

가 없었겠군."

"무슨 말입니까?"

티나한은 유해의 뱀이 있던 방향을 가리키려 했다. 하지만 한참을 달린

후라 그곳이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티나한은 아무 방향이나

대충 가리키며 말했다.

"아까 네 누나를 봤다."

"네? 보셨다고요?"

"그래. 유해의 폭포가 쏟아지던 구멍에서 나타났다. 네 누나가 뱀의 주

의를 끌어준 덕분에 난 몸을 빼낼 수 있었어."

륜은 경악했다. 얼굴을 떨며  티나한을 바라보던 륜은 갑자기  몸을 홱

돌렸다. 티나한은 당황하며 륜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륜은 거칠게 몸부

림쳤다.

"놔요! 누님을 도우러 가야 합니다! 그 괴물에게 남겨두고 오다니요!"

"이봐, 진정해! 도우러 가다니, 그래서 죽겠다는 거야? 네 누나의 칼에

맞아 죽을 거야?"

륜은 흠칫하며 티나한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티나한은 큼직한 손으로

륜의 어깨를 꾹 누르며 말했다.

"그럴 수는 없잖아?"

"하지만… 하지만…"

"네 누나는 괜찮을 거다. 이 안에 있는 우리를 찾아낸 정도이니 틀림없

이 몸을 빼낼 수도 있을 거야. 지금 급한  건 우리라구. 저 돌, 조금 후

면 완전히 식어서 보이지 않게 되겠지?"

륜은 말문이 막힌 듯  고개를 끄덕였다. 티나한은 부리를  딱 소리나게

부딪혔다.

"그럼 빨리 나가야 해. 저 돌마저 식어버리면 우리는 나갈 수 없어."

"하지만 누님이…"

륜은 계속 주저하며 뒤로  돌아가려 했다. 티나한은 이  답답한 나가를

강제로 끌고 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뜨거운 돌멩이를 따라

가기 위해선 륜의 협력이 필요했다. 그렇게  둘이 옥식각신하고 있을 때

비형이 나직이 질문했다.

"륜. 돌아갈 길을 아나요?"

륜은 울 것 같은 얼굴로 비형을 쳐다보았다.  티나한은 조금 전 자신들

이 있던 방향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었다. 륜은  당연히 돌아가는 길을

알지 못했다. 륜은 고개를 떨구었다.  티나한은 벼슬을 쥐어뜯으며 말했

다.

"륜. 미안하지만 서둘러줘. 돌이 식잖아."

티나한이 재촉하고도 한참 후에야 륜은 겨우  한쪽 방향으로 걷기 시작

했다. 티나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 뒤를 따랐고 비형과 나늬도 조

용히 발걸음을 뗐다.

세 사람과 딱정벌레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돌멩이를 따라 걷기 시작했

다.

바닥은 차갑고 길은 어두웠다. 간혹 먼 곳에서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

는 소리가 전해져왔다. 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바닥을  타고 전해져오는

그 진동은 륜도 느낄 수 있었다. 그  때마다 륜은 멈칫하며 걸음을 멈췄

고 티나한은 그 때마다 륜을 재촉했다. 그러면 륜은 다시 마지못한 듯이

걸음을 뗐다. 묘하게도 지난 몇 시간  동안 그들을 괴롭혔던 두억시니는

더 나타나지 않았다.

얼마 후, 그들은 어둠에 덮이는, 그러나 그들에게는 너무 밝은 동쪽 하

늘 아래로 걸어나오게 되었다.

그 후 십여 분 동안의 경험은 티나한을 난처하게 했다.

티나한은 륜과 비형, 그리고  나늬와도 기꺼이 기쁨을  나누고 싶었다.

열 시간 가까이 앞도 제대로 볼 수 없는  미궁 속에 갇혀 있다가 빠져나

온 자들끼리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것이 티나한의 나무랄 수 없

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비형은 피라미드를 빠져나오자마자 그와 륜을 내버려둔 채 약간

떨어진 바위 위로 걸어가 앉았다.  그리고는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았다.

주인이 그렇게 행동하자 딱정벌레 나늬는 그 주인의 발치로 걸어가 피로

한 몸을 눕혔다. 비형이 계속해서 도깨비불을 운용하느라 피곤해진 거라

생각한 티나한은 아쉬운대로 륜과  함께 즐거워하려 했다.  하지만 륜은

비형과 반대쪽으로 걸어가서는 역시 자신을  주위와 격리시키는 듯한 몸

짓을 취했다. 그러자 티나한은  그만 어쩔 줄  모르게 되었다. 티나한은

륜을 달래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조심스럽게 륜에게 다가갔다.

"륜. 네 누나는 괜찮을 거야. 그 시체들이 살아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중앙통로에 어떤 마법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잖아? 그럼 그 유

해의 폭포는 중앙 통로에서  멀리 떨어지지 못할 거야.  네 누나는 그저

힘껏 달리기만 했어도 도망칠 수 있었을 거야."

륜은 티나한을 돌아보았다.

"그랬을까요? 하지만 우리들처럼  두억시니들이 몰려와서  길을 막았다

면…?"

"아니. 두억시니들은 전부 우리를 막으려 몰려들었을 거야. 반대쪽에는

없었을 걸. 그러니 네 누나도 그곳까지 쉽게 온 것일 테고."

"고마워요, 티나한."

티나한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불길한 추측은 말하지 않았다. 그들이

빠져나올 때 두억시니들은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쯤 그

암살자는 암흑 속에서 노도처럼 몰려드는 두억시니들과 싸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때 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군요."

티나한은 찔끔하며 물었다.

"응? 어, 그게 뭔데?"

"그 유해의 폭포가 했던 니름이 마음에 걸리는군요."

티나한은 속으로 안도했다. 륜은 피라미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유해의 폭포는 신을 죽이는 계획에 대해  거론했습니다. 제 기억 속에

서 그런 계획을 읽었다고 주장했지요. 저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

었습니다. 그런데, 저 안에 있었던 나가가 저 뿐만이 아니라면, 그 유해

의 뱀이 읽었다고 주장한 것은 사실 제 기억이 아니라 제 누님의 기억이

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이, 그 유해의 뱀은 군체(群體)였으

니까요."

"군체라?"

"예. 그 유해의 뱀은 무수한 두억시니의  유해로 이루어진 하나의 정신

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폭포는  저와 또다른 나가를  구분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티나한은 익숙하지 않은 개념들로 사고를 진행시키느라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륜은 여러 번  설명을 반복했고 덕분에  티나한은 가까스로

륜의 설명을 이해했다.

"그렇다면 네 누나가 신을 죽일 계획을 머리  속에 가지고 있었다는 거

냐? 그 폭포는 그걸 읽은 다음 그게 네  기억이라고 생각했고? 둘 다 나

가라서 구분을 못했기 때문에? 그런데 그건  말이 안 되는 소리잖아. 네

누나가 혹시 이야깃꾼이냐?"

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누님은 점잖은 분이예요. 그런 황당한 이야기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으실 겁니다. 하지만 어디선가 그 이야기를 들으셨을 수는, 그리고 너

무 황당해서 기억해두고 계셨을 수는 있지요.  더 이상은 짐작되는 바가

없군요."

티나한은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그  동작은 륜을  위한 것일

뿐, 그 이야기 자체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신을 도대체 어떻게

죽인단 말인가? 티나한은 그런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 자체가 불쾌

했다. 하지만 친누나에게 목숨의 위협을 당하고 있는 륜에게 화를 낼 수

는 없었고, 그래서 티나한은 괜스레 비형에게 짜증이 났다.

티나한은 외따로 떨어져  있는 비형에게 다가갔다.  티나한이 다가오는

것을 느낀 나늬는 더듬이를 돌려대었지만  비형은 여전히 하늘만 바라보

고 있었다. 티나한은 철창을 높이 들었다가 쾅 소리나게 땅에 찍었고 비

형은 그제서야 천천히 고개를 돌려 티나한을 바라보았다.

"이봐. 아까 왜 불을 지르지 않았어?"

"아까 말인가요?"

"그래. 때마침 암살자가 나타났기에망정이지, 하마터면 다 죽을 뻔했잖

아. 아니면 그 우라질 폭포의 일부가 되어 흘러내리게 되었거나."

티나한을 멍하니 바라보던 비형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쩌나 싶어 바

라보던 티나한은 비형이 다시 하늘에 초점을  맞춘 채 꼼짝도 하지 않자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야, 이 자식아!"

"예?"

"왜 불을 지르지 않았냐고 물었잖아! 뭔가 대답이 될 만한 소리를 지껄

여 보라고! 나도 싸웠고 륜도  싸웠어! 그런데 넌 왜 안  싸운 거야? 넌

죽어도 상관없다는 거였냐!"

"상관없다고요?"

"넌 죽어도 안 죽잖아! 그래서 신경쓰지 않은 거냐!"

"불쌍하지 않아요?"

티나한은 기가 막혔다.

"뭐라고? 불쌍하다고? 우리를  죽이려 했던  놈이 불쌍하긴  뭐가 불쌍

해?"

"우리를 죽이려 했다는 것 자체가 불쌍한 것 아닌가요?"

"도대체 무슨 소리냐!"

"천년만에 의식을 가지게 된  자가 자신에게 의식을 부여해  준 존재를

미워하고 파괴하려 들게 된 것이 불쌍한 일 아닌가요?"

티나한은 벼슬이 출렁거릴 정도로 격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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