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새-8화 (8/62)

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2-3.                         관련자료:없음  [52175]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3-28 00:39  조회:12279

눈물을 마시는 새.

2. 눈물처럼 흐르는 죽음 - 3

비아스 마케로우는 눈을 떴다. 잠자리는 마치 젖은 빨래더미 같았다.

무거운 머리를 힘겹게 들어올린 비아스는 침대에  앉은 채 밖을 쳐다보

았다. 바깥 공기는 놀랍도록 차가웠고 검은 밤  공기 속으로 더 검은 선

들이 그어지고 있었다. 빗소리를 들은  것은 아니지만, 비아스는 바깥에

비가 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물은 온도를 삼킨다. 강물과 바다, 그리고 내리쏟아지는 빗줄기는 나가

의 눈에 우울한 불투명으로 보인다. 비아스는 창문을 열어놓았음을 깨닫

고는 짧게 투덜거렸다. 약술 실험을 끝낸 다음 환기를 시키기 위해 창문

을 열어두었고, 그 때문에 방 안의 공기가 안면을 방해할 정도로 낮아져

있었다. 창문을 닫아야겠지만 비아스는 왠지 침대를 벗어나고 싶지 않았

다. 방 안을 감도는 차가운 공기는 묘하게 적대적이었다.

갑자기 날카로운 정신적 파장이 들려왔다.

비아스는 움찔하며 그것에 집중했다.  잠시 후 비아스는 이를  갈며 벽

저편을 쏘아보았다. 카린돌 마케로우의 니름이었다. 아니, 니름이라기보

다는 그저 강렬한 '감정'이었다.

남자를 찍어누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비아스의 비늘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하텐그라쥬의 모든

가임기 여성들의 공적을 쫓아낸 것은 그녀였지만,  이 불쾌한 비가 내리

는 밤 그녀는 홀로 불쾌한 침대 속에 갇혀있었다. 그리고 카린돌은 일부

러 날카로운 니름을 발해서 그런 비아스를 조롱하고 있었다.

저것은 나를 약올리기 위해 남자를 끌어들인 거야.

비아스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카린돌은 남자를 원했던 적이

없다. 그런데 그 날  저녁, 오래간만에 찾아온  방문자 앞에서 카린돌은

비아스와 다른 여자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소메로와 비아스, 그리고 두 명의  이모들은 남자를 유혹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따라서 느닷없이 나타난  카린돌이 남자의 옆에  털썩 주저앉을

때까지도 카린돌의 존재를 깨닫지 못했다. 카린돌은 당황하고 있는 다른

여자들을 무시하며 남자의 허리를 슬쩍 끌어당기며 닐렀다.

[귀엽게 생겼군.]

카린돌은 그대로 남자를 자기 방으로  데려갔다. 다른 여자들은 카린돌

이 남자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것 자체에 놀라느라 어떤 대처를 할 수 없

었다. 다만 장녀인 소메로만은 희미한 미소  같은 것을 지으며 카린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비아스는 그 미소에 동정심이 담겨있다는 것을 깨

닫고는 소메로에게 묻는 시선을 보내었다. 소메로는 부드러운 니름을 보

내었다.

[화리트를 대신할 것이 필요한 것이겠지.]

[설마 그렇게 혐오하던 남자가 화리트의 대신이 될 수…]

[아니, 자식.]

[아.]

비아스는 정신적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모들도 그제야 알

았다는 얼굴이 되었다. 소메로는 기품있게 옷자락을 정돈하며 닐렀다.

[카린돌은 자식을 가지고 싶은 거야. 피로  이어졌던 유일한 가족이 없

어졌으니까. 그러니 너무 언짢게 생각하지 말거라. 비아스.]

비아스는 소메로의 설명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비 내리는 밤,

비아스는 카린돌이 과연 자식을  가지고 싶어서 남자를  끌고 간 것인지

단순히 자신을 약올리기 위해 남자를 뺏어간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건물 저편에서부터 들려오는 카린돌의 의미없는 감정어는 비아스에게 이

렇게 니르는 것 같았다.

'사모 페이가 없어져도 넌  남자를 가질 수 없어.  네가 지금껏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것은 사모 때문이  아니거든. 그건 너 자신의 문제였어.

화리트가 너를 어떻게 거부했는지 생각해봐. 설마 사모가 방해했기 때문

이라고 니르지는 않겠지?'

비아스는 이것이 불합리한 망상임을 잘  알고 있었다. 카린돌이 밖으로

니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머리  속에 담아두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졌

지만, 그렇다고 해서 카린돌이 비아스와 화리트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

해서까지 알고 있을 리는 없다. 하지만 증오의 감정 속에 사로잡혀 있을

때 합리성을 따지기 어려운 것은 나가 또한 마찬가지이다.

비아스의 비늘들이 무서운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다른 종족들이 들었

다면 공포에 질릴 만한 소리였지만 비아스는 자신의 몸에서 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의  기분은 잘 알고  있었다. 비아스는 자신이

카린돌에 대한 살의에 불타고 있음을 깨달았다.

'카린돌을 죽인다고?'

생각의 그 지점에서, 비아스는 움찔하며 멈춰선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내면을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비아스는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심장도 뽑지 않은 남자를 죽이는 것과 성인 여자를 죽이

는 일이 똑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비아스는 카린돌을 죽였을 경우에 얻

는 장점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은 화리트 자신을 제외한

다면 카린돌은 비아스가 화리트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

람이다. 카린돌은 그 사실에 대해 함구할  것이라고 암시했지만 그런 종

류의 암시에 영속성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또한 카린돌을 제거하면

경쟁상대를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비아스는 그 가능성에서 눈

을 돌리지 못했다.

자식을 가질 수 있어.

'그건 네 문제라니까. 누가 방해해서 그런게 아니야.'

카린돌의 정신인지 비아스 자신 속에 있는 누구인지 구분할 수 없는 정

신이 들려왔다. 비아스는 노하여 외쳤다.

닥쳐! 사모 때문에 남자 씨가 마를 지경이었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었

어!

'사모가 없어진 지금도 네가  그렇게 홀로 침대에 앉아있는  이유는 뭐

지?'

네년 때문이지, 카린돌 마케로우. 네년 때문이라고.

누군지 구분할 수 없던 소리는 사라졌다. 우울한 차가움으로 가득한 어

둠을 노려보며 비아스는 이를 갈았다.

내 자식을 만들어주길 거부했던 꼬마는 죽었고, 내 남자를 뺏어갔던 여

자는 하텐그라쥬 밖으로 쫓겨났어. 내가 그렇게 했지. 너라고 예외가 될

것 같나, 카린돌?

카린돌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비아스 속에 있는 살인자가 속삭였다.

'아니. 예외가 되지.'

어째서?

'화리트와 달리 카린돌에겐 심장이 없으니까.  전설 속의 나가살육자처

럼 꽁꽁 얼려서 깨어버리는 방법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떻게 죽이지?'

비아스는 침묵했다. 그러나 그 침묵은 길지 않았고, 잠시 후 그녀는 자

신의 내부를 향해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심장이 없는 나가를 어떻게 죽이지?

모든 나가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카루는  노련한 방랑자였다. 타고난 방

랑자인 레콘들이라면 나가들이 적대적인 환경  하에서 방랑한 적이 없다

는 것을 지적하긴 할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한계선 남쪽

이라면, 나가들에겐 집에 있는  것과 다를 바가 뭐  있느냐?' 산 것만을

먹기에 요리 도구 따위를 지참할 필요가  없고, 불규칙한 식사량과 식사

간격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추위를 막아줄 불이나  옷 같은 것도 가지

고 다닐 필요가 없는 나가 남자의 방랑은, 인간이나 레콘이 보기엔 방랑

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손쉬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어떤 적대적인 환경도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함이나 지혜로움은

방랑자에게 요구되는 첫째 자질은  아니다. 방랑은 더  어려운 조건에서

수행했을 때 더 높은 가치를  가지는 놀이나 운동 경기  같은 것이 아니

다. 손 뻗어오거나 말 걸어오지 않는 세상  속에서 자신을 표지 삼아 떠

도는 행위에서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고독을 견디는  힘이다. 그런

점에서, 카루는 노련한 방랑자라고 할 수 있다.

노련한 방랑자답게, 카루는 가장 적절한 대처를 취했다. 카루는 애원했

다.

[저, 제 목에 겨누고 계신 칼부터 좀 치워주시면 안 될까요?]

눈 깜짝할 사이에 나타나 그의 목을 겨누고 있는 여자는 평온한 니름을

보내어왔다.

[나는 암살자야.]

[알고 있습니다. 사모 페이시죠? 얼마 전에 하텐그라쥬에서 떠나왔습니

다. 제 피가 이 칼에 묻으면 추적에 방해될 텐데요.]

사모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면 더욱 치워주기 곤란한데.]

[예?]

[너는 나를 훔쳐보고 있었어. 지난 이틀 동안.]

카루는 노련한 방랑자의 자부심에 금이 가는 것을 느꼈다. 사모는 계속

닐렀다.

[뭘 모르고 따라오는 거라고 생각하고 쫓아버릴 생각이었어. 하지만 너

는 내가 누군지 알고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도  알면서 따라온 것이군.

그건 정말 이상한데. 도와주러 따라온다는 것은 니름이 안되고, 그럼 남

는 건 방해하려는 의도인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쉬크톨이 단단한 까닭은

쇼자인-테-쉬크톨의 모든 방해물을 베어넘길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야.

자, 이제 자신이 고귀한 임무의 방해물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보겠어?]

[입증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죠?  이미 말씀드렸듯이  제 피가  묻으

면…]

[닦아내고 내 피를 다시  먹이면 돼. 쇼자인-테-쉬크톨의  훌륭한 점이

지. 반드시 피붙이가 추적하기 때문에 피를 조달하는 것은 쉽지.]

[아, 그렇군요. 그래서, 저를 어떻게 하실 거죠?]

[글쎄. 특별히 생각해둔 바는 없어. 지금으로선 발목을 베는 것 정도가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돼. 발목이 다시 자라났을 때 쯤이면 네가 무엇이

든 나를 더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해지겠지.]

카루는 얼굴을 찡그리며 과장되게 슬퍼했다.

[오, 그러지 마세요. 1년 동안 절뚝거리란 니름입니까?]

[그럼 눈을 찔러줄까? 몇 개월이면 될 테니. 하지만 그건 더 불편할 텐

데.]

카루는 하텐그라쥬에서 가장 유명한 여인과 조금  더 농담을 나누고 싶

었지만 곧 그 생각을 바꿔먹었다. 쉬크톨의 검끝이 얼굴쪽으로 올라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카루는 다급히 나가와  인간과 도깨비, 심지어 레콘

까지도 위협을 잠시 멈추게 할 수 있는 마법의 니름을 꺼냈다.

[저 기억 안나십니까?]

쉬크톨의 불길한 움직임이  멈췄다. 사모는 카루를  뚫어지게 바라보았

다. 잠시 후 사모는 약간 자신없는 어투로 닐렀다.

[페이 가문을 방문했었니? 미안하지만 나는 남자들과 그다지 깊이 사귀

지 않아서 기억이 안 나는데.]

[저는 마케로우 가문의 방문자였습니다. 화리트를  호위해서 페이 가문

에 찾아간 일이 있습니다.]

[아! 기억나는군. 스바치였던가?]

[스바치는 제 동행이었지요. 저는 카루입니다.]

사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카루. 하지만 아직 뭔가가 입증되진 않은 것 같아.]

카루는 조금 전 농담을 하면서 이미 대답할 니름을 준비해두었다.

[먼저 좀 상관없게 들리는 니름을 하겠습니다.  당신과 륜 페이는 매우

각별한 남매 사이로 알려져 있습니다. 맞습니까?]

사모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걸 내가 인정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거지?]

[제가 이 통탄할 만한 비극에 대해 유감을 표시할 수 있게 되죠.]

쉬크톨이 다시 올라왔고, 카루는 다급히 니름을 이었다.

[하지만 그에 앞서 당신이 이 임무에 어려움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의심

을 제기할 수 있죠.]

[불쾌한 의심이군. 하지만 의심하는 거야 네 자유겠지. 그래서?]

[그래서, 마케로우 가문은 당신이 성실히 임무를 수행할지 궁금해할 수

도 있겠지요. 어쨌든 사랑하는 남동생을 죽이는 일이니까요.]

[암살이 제대로 이행되는지 감시하라는 부탁을 받은 거야?]

[그런 니름은 하지 않았습니다.]

사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쇼자인-테-쉬크톨의  실행 여부를 의심한다는

것은 대단히 무례한 일이므로 그걸 인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은 바

로 카루가 바라는 바였다. 실제로 카루는  마케로우 가문과는 아무 상관

이 없었으므로.

아무 것도 인정하지 않으며 사모를 오해하게  한 카루의 니름재주는 제

법 훌륭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카루는 사모의 분노를 정면으로 받게 되

었다.

[이런 생각이 드는데. 카루.]

[어떤 생각이십니까?]

[네 머리를 잘라낸 다음 가지고 돌아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 그럼 '내

사랑하는 남동생'도 살릴 수 있고, 가문에  부과된 목숨값도 갚게 되고,

그 속임수를 보고할 감시자 또한 없어지는 거지.]

[제 머리를 어떻게…]

[칼자국을 심하게 내어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로 만들면 되겠지. 괜찮

은 생각인 것 같지 않아? 어떻게 생각해, 카루?]

자신의 니름재주를 저주하며,  카루는 그만 자신이  마케로우 가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니를 뻔했다. 하지만 그가 니르기 전 사모가 쉬크톨

을 거둬들였다.

[별로 괜찮은 생각이 아냐.]

[제 생각에도 그렇군요.]

[감시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그래도 좋아.  카루. 그러기로 하고 대가를

약속받았을 테니. 마케로우 가문은 자신이 당연히 받을 것을 의심함으로

써 헛돈을 쓰게 되었군.]

한숨을 돌린 다음, 카루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남동생을 반드시 죽일 생각이시군요?]

[마케로우 가문이 그걸 원하잖아?]

[이건 제가 궁금해서 여쭙는 겁니다. 사랑하는 남동생이지 않습니까?]

섬광이 카루의 눈을 찔렀다. 사모는  고의적으로 쉬크톨을 칼집에 마찰

시키며 뽑아내었고, 마찰열에 의해 순간적으로  뜨거워진 쉬크톨이 공기

를 찢자 카루의 눈 앞은 현란한 색채의 소용돌이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색채가 사라졌을 때 카루는 쉬크톨의 검끝이  자신의 왼쪽 눈 바로 앞에

떠있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감시는 허락했지만 질문은 허락한 기억이 없어. 카루. 눈 하나로도 감

시는 할 수 있을 테지?]

[제발…]

[이건 두번째 경고야. 그리고 나는 세번째 경고를 해본 기억이 별로 없

는 것 같아. 네가 유념해둘 만한 사실이라고 생각돼.]

쉬크톨이 돌아갔다. 정신을 짓누르던 공포가  사라진 후에야 카루는 사

모의 동작들이 얼마나 매끄럽고 우아하며 단순한지에 대해 놀랄 수 있었

다.

사모는 배낭을 들어올린  다음 니름없이 걸어갔다.  카루는 조심스럽게

그 뒤를 따랐고, 그녀가 그것을 묵인한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암살자와 동행하는 것 만큼이나 확실하게  륜을 찾아낼 방법은 없었다.

쉬크톨을 든 암살자는 반드시 륜을 찾아낼 테니까. 그리고 혹 륜이 화리

트의 대행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경우,  카루는 다른 누구보다도 암살자

의 곁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조금 전  사모의 칼놀림을 본 카루는 자신

이 그녀를 막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카루는 사모로 하여

금 그가 가지고 있는 의심, 즉 화리트의 살해자가 륜이 아닐지도 모른다

는 의심에 동참하게끔 해야겠다고 결정했다.

하지만 동시에 카루는 이틀 정도가 지나기  전까진 사모에게 니름을 걸

지 말아야겠다고도 결정했다.

륜은 서서히 다른 일행에게 익숙해졌다.  그것이 '서서히' 이루어진 까

닭은 륜이 조심성 많고 주의 깊은 성격이어서가 아니다. 그와 다른 일행

들의 의사 전달 방식이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륜은 자신이 재치있는 사람이라고까진 생각하진  않았지만 상황에 어울

리는 농담 한두 마디 정도는 떠올릴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 믿음에

는 잘못된 것이 없다. 하지만 륜은  언제나 니름으로 농담을 건넸고, 주

위의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에 당황했다. 그가  사태를 깨달았을

때는 언제나 가장 재미있는 순간이 지나간  후였다. 그리고 같은 상황이

비형에게는 더욱 가혹하게 일어났다. 비형은 언제나 농담할 기회만 기다

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형은  도깨비다운 슬기로움을 발휘하여

말이 아닌 표정이나 동작으로 륜을 웃게 만드는 재주를 습득했다.

륜은 도깨비와 레콘에 대해 매일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 사실을

즐겼다. 하지만 마지막 일행인 인간에 대해서는 언제나 모호한 기분밖에

느낄 수 없었다. 케이건의 해박함은 비형과 티나한에게는 유쾌한 놀라움

으로 다가왔지만 륜에게는 불만거리로 다가왔다.  일찍이 티나한과 비형

을 당황하게 했던 '케이건의 친절'은 륜에겐  분노의 대상이 되었다. 티

나한이 닷새 동안 세 번이나 똑같은 질문을  했을 때, 그리고 그 때마다

처음 질문을 받았다는 듯이 똑같은 대답을 차분히 들려주는 케이건을 보

았을 때 륜은 마침내 분노를 터뜨렸다.

륜은 요스비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하라고 케이건을 윽박질렀

다. 륜은 자신이 요스비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 권리가 있

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케이건은 거절했다.  그것은 비형과 티나한도 당

황하게 만들었다.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고 무엇에도 무관심한  것 같은

케이건이 그렇게 완강하게 대답을 거절하는 모습은 비형에게는 신비로와

보일 지경이었다.

그것이 부끄럽기 때문일까?

비형은 어떤 추측을 떠올렸다. 혹  케이건은 증오의 대상에게서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수치스러워 하고 있는 것일까? '나가들이 원하지 않기에'

케이건은 '나가들을 토막내어  삶아먹는다.' 그리고  요스비라는 나가는

'케이건이 죽음의 위기에 처하자  자신의 왼팔을 잘라  먹였다'고 했다.

비형이 알고 있는 사실들만을 놓고 볼 때 그것은 '적의 일원에게서 구원

받은 생명'이라는 케케묵은 이야깃거리를 구성하고 있다. 비형은 그것이

사실에 가까우리라 생각했다. '그렇구나. 자기가 미워해야 하는 자가 오

히려 자기를 구해줬다는 것에 당황하고 수치스러워하는 거야! 그래서 그

요스비라는 나가에 대해서는 아예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은 거야. 그것

이외엔 해답이 없잖아?' 비형은 자신의  추리를 직설적인 도깨비 화법으

로 케이건에게 들려주었다. 그리고는 곧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

다.

비형은 거의 모든 종류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비

형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을 보였다.  케이건은 멍하니 그를 마주보

았다.

"제 이야기가 틀렸습니까?"

"아니… 글쎄. 출발합시다."

그리고 케이건은 하루하고도 반나절 동안  일행을 걷게 했다. 티나한마

저 투덜거릴 정도의 살인적인 행진이었지만  비형은 케이건이 분노 때문

에 그렇게 행동했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이틀째 되던 날, 지쳐쓰러질 지

경이 된 비형에게 다가온 케이건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 모르겠소. 비형. 그건 아닌 것 같군."

비형은 한참 동안 숨을 골라야 했다. 단지 피로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음부터 말입니다, 제 질문이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더 걸어야 적합한

대답을 떠올릴 수 있는 종류일 경우,  그냥 그 질문을 잊어주십시오. 알

겠습니까?"

"알겠소."

"…정말 그런 것이었습니까?"

"그랬소."

마침내 륜은 포기했다.  케이건은 실수로라도 요스비에  대해 거론하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륜은 케이건에게 더 이상 요구하는 것이 도리에 맞

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비형이나  티나한이 얼간이 같은 질

문을 조심하게 된 것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자신을 위해 열성을 기울이

는 사람에게 그가 싫어하는 것을 요구할 수는 없다. 케이건은 언제나 다

른 세 사람을 위해 행동하고 있었다. 만약  케이건이 없다면 다른 세 사

람은 큰 낭패를 겪을 것이다.

그것은 북쪽으로의 귀환 15일째에 일어난  사건으로 분명해졌다. 그 날

아침 눈을 뜬 일행은 비가 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티나한은 주먹을 휘둘러 동굴을 만들었다.  비형은 그렇게 표현했고 륜

은 굳이 반대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물론 티나한이 종유석과 석순으

로 치장된 아름다운 동굴을  만들어내었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강맹한 주먹이 - 혹은, 필사적인 주먹이 휘둘러진 자리엔 파석과 잡석들

이 벽과 기초를 이루었고  티나한이 밀어버린 다섯  개의 바위들은(그중

하나는 최소 7톤은 넘어보였다.) 서로  맛물려 지붕이 되었다. 대피소를

만드는 방식치고는 언어도단이랄 만큼  초인적이었기에 나머지 일행들은

경외감도 느끼지 못했다. 어쨌든 그 믿기  어려운 대역사 끝에 티나한은

레콘 다섯 명이라도 숨어서  비를 피할 수  있을만한 동굴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레콘은 하나뿐이었고 그에 필적할 만한  크기의 일행은 나늬 뿐

이었기에 동굴은 꽤 널찍했다. 그리고 티나한은 그 동굴 가장 깊은 곳에

웅크리고 앉아 세상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심히 애처로운 광경이었다.

"저는 바위를 깨고 하늘을 난다는  말이 일종의 비유법이라고 생각했습

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건 담백하기 짝이 없는 사실증언이었군요?"

비형은 대피소 가운데 불을 일으키며  낄낄거렸다. 대피소의 입구 가까

이에 앉아있던 케이건은 쏟아지는  비를 보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륜은 티나한과 비슷한 정도의  깊이에서 바위에 기대어 앉아있었

다. 륜은 아직까지도 자신이 등을 기대고 있는 바위가 자연에 의해 수만

년에 걸쳐 형성된 것이 아니라 공포에  질린 레콘이 반 시간만에 만들어

낸 것이라는 사실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상태였다.

쏟아지는 빗물 때문에 기온은  나가가 '얼어붙을' 정도로  낮아져 있었

다. 케이건이 대피소를 만드는 티나한에게 그런 미친짓을 계속한다면 내

버려두고 가겠다고 경고했으면서도 그러지 않고 머물게 된 것은 륜 때문

이었다. 평균적인 건강을 가진 인간이라면 가볍게 비를 맞으며 걸어다닐

만한 날씨였지만, 강물 속에서도 몸이 얼어붙는 나가에겐 다리를 떼기도

어려운 '혹한'이었다.

케이건이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소리없이  내쉰 것이지만 그의 입김

이 빗속으로 하얗게 퍼져가는 것을 보며 륜은 미안한 마음에 말했다.

"케이건. 저는 소드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걸 먹으면…"

"17분 동안만 작용하지. 하루를  걸으려면 수십 개를 먹어야  될 텐데,

그럼 네가 죽고 말아. 관두게. 좀 쉬어두는 것도 좋겠지."

말을 마친 케이건은 앉아있던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났다.

"먹을 것을 좀 찾아보겠소. 날씨가 이  모양이라서 자신은 없지만 시간

났을 때 좀 잡아두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비형이 고개를 들었다.

"아, 저도 같이 갈까요?"

"아니오. 당신은 여기서 다른 분들을  지키도록 하시오. 나가 정찰대는

이런 날씨에 돌아다니지 않지만 다른 짐승이나 위험한 것들이 비를 피하

러 뛰어들어올 수도 있으니까."

불을 쬐고 있던 륜이 조심스럽게 손짓했다.

"저, 죄송한데요. 케이건."

"알고 있네. 살아있는 것을 잡아오겠어."

"어려운 부탁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륜은 케이건이 들쥐 한 마리라도 잡아다 준다면 정말 기쁠 거라고 생각

했다. 사냥꾼들이 아닌 자들이 가지고 있는  환상들 중에는 숲에 사냥꾼

들이 집어가길 기다리는 대형 사냥감들이  지천으로 널려있다는 환상 또

한 포함된다. 그러나 사냥에 대해 좀 아는  인간들은 평생 동안 두 자릿

수 이상의 사슴을 잡는다면 타고난 사냥꾼이라 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나가 또한 타고난 사냥꾼이며, 따라서 사냥꾼 일을 별로 해보지 않은 륜

도 그런 사정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일행들은 반나절 후 한 마리의 살아있는 고라니와 세 마리의 토

끼와 두 마리의 화식조, 바나나 두 다발과  각종 식용식물 등을 들고 돌

아온 케이건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혼자서  고라니를 생포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며 화식조는 사냥꾼을  죽일 수도 있는 맹금이다.

하지만 일행들은 세 마리의 토끼에 가장 큰 불가사의를 느꼈다. 비 오는

날에는 토끼를 잡을 수 없다. 비형과 티나한과 륜은 토끼굴 안에 틀어박

혀 있었을 토끼들을 케이건이 도대체 무슨  수로 잡았는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 엄청난 음식물 앞에서, 문제는 한 가지밖에 남지 않았다.

비형이 밖으로 나갔다. 반 시간 가량 빗속에서 어정거리다가 돌아온 비

형은 사냥감들이 깔끔하게 손질되어  있는 것을 보고  안도했다. 그리고

고라니가 사라진 것과 륜의 배가 엄청나게 커져 있는 것을 보며 마냥 신

기해 했다. 륜은 숨이 가쁜 듯  씩씩거렸지만 행복해 하는 듯했다. 바나

나잎에 싸인 고기를 땅에 파묻으며  티나한은 의문을 표시했다.(물론 그

전에 비형에게 물기를 깔끔하게 닦으라고 성화를 부렸다.)

"그렇게…" 피라고 말할 뻔했던  티나한은 간신히 말을  바꿨다. "그걸

보기 싫어하는 너희들인데, 그럼  너희 동네에서는 고기를  누가 손질하

지?"

"산 채로 태우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겠어요?"

대답하는 비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티나한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

였다.

"그것 참."

"그래서 우린 사냥이나 도축을 그렇게 자주  하지는 않아요. 보기 좋은

광경도 아니고… 킴에게서 곡물재배를 배우지 않았다면 도깨비들은 배가

고파서 즈믄누리를 세우진 못했을 거라 말하는  사람도 많죠. 그래서 즈

믄누리의 건설은 킴이 도깨비에게 온 이후의 일일 거라는 거죠. 그럴 듯

한 이야기죠?"

도깨비들에게 곡물을 재배하는 법을 가르쳤다는 전설 속의 인간의 이름

이 킴이었기에, 도깨비는 모든 인간을  킴이라고 부른다. 자칫 혼란스럽

기 쉽지만 그 속엔 원래 그런 경의가 담겨 있다. 지금에 와서는 그저 단

순한 대명사처럼 되어버렸지만.

케이건과 티나한, 비형은 주로 식물들을  먹은 다음 고기는 훈연시키기

로 했다. 여건이 좋지는  못했지만 도깨비의 기술이  있었기에 그럭저럭

훈연시킬 수 있었다. 륜은 생전 처음 보는 그 광경에 매료되었다.

어쩔 수 없이 여행이 중단된 이상, 케이건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

기간 동안 여행이 재개되었을 때를  대비한 보급품을 준비해두기로 결정

했다. 티나한과 비형에게 훈연을 맡긴 다음  케이건은 다시 사냥을 나섰

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는 먼젓번  사냥에서 깜빡했던 것을 가지고

돌아왔다. 케이건이 덩굴로 어깨에 연결해서 끌고온 거대한 통나무는 일

행을 또다시 어이없게 만들었고 나늬를 행복하게 했다.

비는 나흘 동안 그치지 않고 쏟아졌다. 그리고  나흘 후 대피소는 웬만

한 사냥꾼의 움막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훌륭한 주거지로 바뀌어 있

었다. 케이건은 매일 산더미 같은  음식물을 채집해왔고, 나머지 일행은

그 엄청난 노동량에도 놀랐지만 바라기 한  자루로 어떻게 그런 일이 가

능했는가에 대해서는 곤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별

말을 하지 않았고 비형과 티나한은  불쌍하게도 횡설수설로 서로를 위로

하기 시작했다.

"'모여라!' 하고 외치면 사방에서  달려온 사냥감들이 케이건  앞에 픽

쓰러지는 겁니다. 어때요?"

"잠깐. 내 생각엔 '오너라!' 하고 외쳤을 것  같다. 아니면 '이리 오시

게!' 했을까?"

"오! '이리 오시게!' 가 마음에 드는데요. 위풍당당해요. 어느 쪽이죠,

케이건?"

"내일 그렇게 해 보고 결과를 알려주겠소. 비형."

도깨비불에 손을 쬐던 케이건이 단조롭게 대답했다.

티나한이 만든 대피소는 안락했다. 빗물이  새어들지 않도록 하려는 목

적에서였지만 어쨌든 티나한은 튼튼한 벽과  천장을 만들어내었고 그 공

간은 비형의 도깨비불에 의해  덥혀졌다. 그러나 케이건은  언제나 가장

쌀쌀한 입구 근처의 자리에 앉았다. 언제나  그 자리를 고집하는 케이건

의 모습은 언제든 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동시에 대피

소로 다가오는 위험을 제일 먼저 감지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매

일 엄청난 노동을 하면서도 케이건은 밤에는  가장 오랜 시간 동안 불침

번을 섰고 그러면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티나한의 관심을 빗물에서 돌려

놓기 위해 앞으로의 여정에 대한 이야기나 옛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덧쌓이는 빗소리 속에서, 티나한과 비형, 그리고 륜은 케이건의 단조로

운 목소리를 통해  하늘치를 사랑했던 낭만적인(하지만 영리하다고는 말

하기 힘든) 용 퀴도부리타의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와  키탈저 사냥꾼들이

3대에 걸쳐 도전하여  가까스로 쓰러뜨린 대호(大虎) 별비에  대한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이야깃거리를 선택하는 것에

특별한 기준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래서 세 사람은 똑같은

목소리를 통해  역사상 가장 잔인한 인간들이었던 아라짓 전사들의 어둡

고 소름끼치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여자는 모두 죽이고, 남자는 모두 겁탈했소."

륜은 약간 놀랐지만 비형과 티나한은 대단히 당황했다.

"어, 그거 앞뒤가 바뀐 것 아닙니까?"

"아니오. 좀 기괴하게 느껴지리라는 것 짐작되지만,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소. 아라짓 전사들은 왕의 허락 없이는 자식을 만들 수 없었

소. 그래서 그렇게 한 거요. 상대가  남자라면 자식이 태어날 일은 없으

니까."

세 사람은 신음을 흘렸다.

어쨌든 케이건은 그런 식으로 다른 동행들에게 식량과 안전, 그리고 여

흥까지 제공했다. 알지 못하는 새 그들은  케이건이 없는 상황을 상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을 사랑이거나  신뢰, 혹은 의존 심리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전부이거나.

닷새째 저녁, 밤이 깊을 때까지도 케이건이 돌아오지  않았을 때 세 사

람이 끔찍한 기분에 빠져버린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젖은 머리카락을 머리 뒤로 쓸어넘기며  케이건은 한숨을 내쉬었다. 추

적추적 내리는 빗줄기 사이로 케이건의 하얀 숨결이 빠르게 흩어져갔다.

볼을 타고 내려와 턱에 망울졌다가  가슴으로 떨어지는 빗물은 시리도록

서늘했다.

케이건은 세 사람이 기다릴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바위 위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케이건은  자신이 왜 움직이지 않는지

알고 있었다.

케이건은 피에 젖은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기억이 나질 않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케이건의  두 손바닥에서 진득한  핏물이 맴돌이를

일으키다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눈앞에서  대롱거리는 젖은 머리

카락에서도 붉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케이건은 오른발로 돌멩이를 걷어찼다. 핏물을 튕겨올리며 굴러간 돌멩

이는 앞쪽의 머리를 때렸었다. 머리는 비늘을 곤두세우며 성을 내었지만

케이건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보다는 그 옆에  있던 또다른 머리가 입을

뻐끔거리는 모습이 더 케이건의 관심을 끌었다.  그 머리는 당황한 것처

럼 보였다. 케이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희들은 항상 그러더군."

머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케이건을 올려다보았다.

"목이 잘리면 소리를 낼 수 없어. 입이나 성대가 있어도 공기를 밀어내

는 폐가 없으면 소용없지."

머리는 실망과 분노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무표정한 얼굴로

물끄러미 세 개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빨간  물웅덩이 가운데 똑바로 놓

여있는 세 개의 머리는, 마치 붉은 호수에  잠겨 머리를 내밀고 있는 세

명의 나가처럼 보였다. 케이건은 입술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귀찮은

머리카락을 끄집어내며 말했다.

"입 모양을 읽을 수는 있겠지. 말해봐."

왜 우리를 죽인 거냐.

케이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머리가 말한 '우리'는 케이건이 생각했던 '우리'와는 조금 달

랐다.

내 아이, 왜 내 아이를.

"아이를 가지고 있었나."

타오르는 눈빛이 케이건을  쏘아보았다. 케이건은 그  머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숲의 공터에는 나가를 이루고 있던 몸의

여러 부분들이 너저분하게 흩어진 채 내리는  비를 맞고 있었다. 케이건

은 자신의 업적에 영웅적인  면은 조금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비 때문에 차갑게 식어 있던 세 명의 나가는 거의 반항다운 반항도 못했

고 케이건은 손쉽게 그녀들을 도륙할 수 있었다.

냉혹한 학살의 증거를 자세히 관찰하던 케이건은  곧 찾던 것을 발견했

다. 잘린 허리에서 비져나온 둥근 알이 핏물 속에서 하얗게 빛나고 있었

다.

케이건은 몸을 무겁게 일으켰다. 그리고 나가의 머리를 들어올렸다. 머

리는 묵직했다. 핏물에 젖은 머리를 두 손으로  움켜쥐어 들어올린 케이

건은 그것을 하늘을 보게 눕혔다. 잘린 목의  단면을 들여다보며 케이건

은 나직히 말했다.

"말해라."

그리고 케이건은 잘린 목에 입을 가져가 힘껏 숨을 불어넣었다.

"…게 무슨 짓…!"

나가의 미성(美聲)이 터지듯  뿜어져나왔다가 스스로의  놀라움에 의해

잦아들었다. 케이건은 입을 다시 뗐다. 입 주위는 온통 피범벅이었다.

"내가 잠시 네 폐가 되어주지. 할말이 있으면 해라. 나가."

케이건은 다시 잘린 목에 입술을 가져갔다. 땅에  놓여있던 두 개의 머

리는 눈을 흡뜬 채 그 기괴한 광경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의 입에서 흘러

나온 바람이 다시 나가의 목을 통과하며 나가의 아름다운 목소리로 바뀌

었다. 젖은 숲이 풍기는 방향은 비릿한  피내음과 뒤섞여 주위를 맴돌았

고 나가의 아름답고 애절한 목소리는 비의  씨실에 짜 넣어진 구슬픈 날

실이 되었다.

"이렇게 죽을 수 없어.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며칠만 있

으면, 며칠만 있으면 시모그라쥬에  도착하는 거였는데… 겨우  며칠 후

에. 그리고 내 가족들 품에서… 아기를  낳는 거야. 내 아기를… 그런데

어떻게!"

케이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도 없었고, 입을  떼지 않고서는

대답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케이건은 계속  나가의 기도 속으로 호흡을

불어넣었다. 비가 쏟아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가는 비통하게 울부짖

었다.

"왜? 왜 내가 죽어야 하는 거지? 이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야. 나는 적

출을 했어! 수호자들의 가호 아래 심장을  뽑았어! 그런 내가 왜 죽어야

하지? 왜 저 불쌍한 것이 알껍질도  벗어나지도 못한 채… 여신이여, 도

대체 왜!"

나가의 눈에서 흘러나온 은루가 볼을 타고  흘러내려 그 머리를 움켜쥐

고 있는 케이건의 손을 적시고 있었다.  핏물에 젖어있던 케이건의 붉은

손에 차가운 은빛 광택이 더해졌다.

케이건은 기도에서 입을 뗀 다음 나가의 귀를 입가로 가져왔다. 피범벅

이 된 입술을 나가의 귀로 가져간 케이건은 나직히 속삭였다.

"내 호흡을 빌렸으니, 나도 네 머리를 좀 빌리겠다. 나가."

나가는 무슨 말인지 되물었지만 케이건이 호흡을 빌려주지 않았기에 그

말은 침묵이 되고 말았다. 케이건은 머리를 바위 위에 올려놓은 다음 유

해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나가의 허리에  손을 집어넣어 알을 꺼내었

다.

큼직한 알은 껍질까지 완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케이건은  그 알을

조심스럽게 다루어 바위 위,  나가의 머리 옆에  세워놓았다. 둥근 알은

잘 서지 않았고, 그래서 케이건은 젖은 흙덩이를 한 움큼 집어들어 알을

고정시켰다. 쏟아지는 비가 알껍질 위의 피를  씻어내었고 바위 위의 알

은 하얀 보석처럼 빛났다. 케이건은 나가의 머리를 다시 집어들었다.

"알 속에 있는 네 자식을 만나고 싶겠지."

케이건은 나가의 머리를 높이 치켜들었다. 케이건이 무슨 짓을 할 작정

인지 깨달은 나가는 비명을 내질렀다.  물론 침묵의 비명이었다. 하지만

땅 위에 남아있던 두 개의 머리는 공포에  질린 니름을 들을 수 있었다.

차마 볼 수 없었던 두 머리는 눈을 감았다.

케이건은 알 위에 나가의 머리를 내려쳤다.

알이 박살나며 피와 난황, 그리고 살점이  빗줄기 속으로 비산했다. 케

이건은 다시 머리를 들어 바위를 강타했다.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물

과 핏물의 분출이 계속되었다. 쾅, 쾅, 쾅.

세 번 더 내려친 다음 케이건은 그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나가의 두개

골이 으스러져 그 얼굴은 괴이하게 일그러졌고 깨진 코로는 뇌수와 피가

흘러나왔다. 케이건은 으깨진 머리를  무심히 집어던진 다음  얼굴에 튄

오물들을 훔쳐내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머리로부터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대답을  기대하고 있지 않았던 케이

건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흥미로운 사색거리가 될 것 같지 않나? 서로 부딪히는 순간에 저 여자

는 자기 머리가 깨지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을까, 알이 깨지는 것을 걱정

하고 있었을까."

무도한 질문에 빗줄기마저 움츠러드는 듯했다.  나가의 머리들은 두 눈

가득 증오를 담은 채 케이건을 노려보았다.  케이건은 엷은 한숨을 내쉬

고선 다시 바위에 걸터앉았다.

케이건은 이제껏 길잡이였다. 그리고 길잡이 아닌 다른 것이 되는 것을

거부했다. 륜이 요스비에 대한  질문을 하며 '친구의  아들-아버지의 친

구'라는 관계를 요구해왔을 때 케이건은  그것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길잡이라는 역할에 혼란을 겪게 될 가능성이  너무 높았다. 하지만 우연

히 만난 세 명의 나가를 도륙한 지금,  케이건은 더 이상 길잡이가 아니

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일행에게 돌아갈 수 없었다.

나가살육자가 된 지금, 케이건은 륜을 보자마자 살해할 것이 분명했다.

케이건은 자신이 그렇게 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새벽녘, 비가 그친 고요 속을 날카롭게 가르는 비명을 듣자마자 대피소

밖으로 달려나간 비형과 티나한의 행동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역시 케이건의  부재 때문에 야기된 불

안감일 것이다. 놀란 륜이  그들을 따라 나왔을 때  티나한이 그 소리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륜은 긴장하며 청력에 주의를  기울였고 바로 그 때

또다시 비명이 들려왔다.

소리에 대한 반응이 빠른 비형과 티나한이 먼저 달려갔다. 나늬와 함께

조금 늦게 달려가며 륜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케이건일까요?"

"나가라면 소리를 낼 리가  없고, 동물들이 내는 소리는  아냐. 케이건

뿐이잖아. 틀림없이 우리 도움이 필요한  거다. 그래서 지금까지 돌아오

지 못한 것이고."

티나한은 단호하게 선언했다. 비는 그쳤고  그래서 티나한은 닷새 동안

꼼짝도 못한 것에 대한 분노라도 터뜨리듯이  빠르게 달려갔다. 그 뒤를

따라 비형과 나늬가 달려갔고 륜이 제일  뒤쳐졌다. 묘하게도 비명은 계

속 멀어지고 있었다. 불안에 빠진 일행은  체온을 높이지 말라는 케이건

의 경고도 잊어버린 채 마구 달렸다.

갑자기 숲이 사라졌다.

일행은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 그들 앞에는 거대한 도시가 달빛을 받으

며 빛나고 있었다. 비형은 당황했다.

"나, 나가의 도시입니까?"

"잠깐만. 무슨 도시가 이래? 불이 없잖아."

"나가들의 도시엔 불이 없어요! 밤에도 볼 수 있으니까. 몰라요?"

비형과 티나한이 그런 식으로 당황하여 떠들어댈  때 조금 늦게 도착한

륜이 말했다.

"우리들의 도시에 불이 별로 없긴 하지만  이건 우리 도시가 아닙니다.

심장탑이 없군요."

"심장탑?"

"예. 나가의 도시라면 반드시 심장탑이 있어야 합니다. 이게 나가의 도

시였다면 훨씬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심장탑을  볼 수 있어야 했을 겁니

다. 이건 폐허 같은데요."

티나한과 비형은 다시 도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륜의 말이 맞다는 것

을 깨달았다.

넓은 도시였다. 세 사람  모두 자신들이 도시의 일부밖에  보지 못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었다. 눈에 들어오는 것들은  모두 무너지거나 금이

가 있었다. 땅에는 원래 포석이 깔려있었던 것 같지만 그것들은 지금 국

냄비 속을 떠 다니는 건더기들처럼 질서없이  땅 위로 비죽 머리를 내밀

고 있었다. 곳곳에 자라난 잡초들은 늙은  도시의 볼품없는 수염처럼 보

였다.

하지만 그 위용만은 대단했다. 이  도시의 건설자들은 자신들의 도시가

경의의 대상이 되길 원했던 것 같다. 거대한 건물들과 피라미드, 늘어선

기둥들, 기념비들, 그 뒤편의 건물이 무너져 마치 하늘로 통하는 것처럼

보이는 계단들. 그 모든 것들이 달빛  속에서 육중한 그림자로 드러나고

있었다.

모두들 말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때 티나한이 거대한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모습을 발견했다.  티나한이 고함을 지르며

손짓했고 그러자 륜도 긴장하여 외쳤다.

"더운 생물입니다!"

륜이 본 것은 뜨거운 체온을 가진 사람  모양의 모습이었다. 더 자세히

보려 했을 때 그  체온은 피라미드 안으로 사라졌다.  세 사람은 다급히

피라미드를 향해 달려갔다. 달려가면서 비형이 말했다.

"자세히 봤어요? 케이건입니까?"

"사람 모양이었고 더운 생물이었습니다. 뜨거웠으니  절대로 나가는 아

니에요. 케이건이 확실합니다."

가까이 다가섰을 때 일행은 피라미드가 얼마나 높은 것인지 알 수 있었

다.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돌이 아닌 건물을 쌓아 만든 피라미드였

다. 구단짜리 피라미드의 높이는 거의 100 미터에 가까웠지만 워낙 넓은

면적 때문에 그렇게 높아 보이지 않았다.  각단의 수평면은 그대로 도로

였고 수직면은 줄줄이 늘어선 문과 창문들이었다.  그리고 각 단과 단을

연결하는 계단이나 경사도로들이 곳곳에 있었다.  마치 산의 경사면들을

따라 건설된 도시처럼 보였지만, 엄연히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피라미드

였다. 도시 속의 또다른 도시처럼 보이는 그 피라미드를 보며 일행은 기

막혀했다.

계단이나 경사도로를 따라 올라가는  것이 시간 낭비라는  판단을 내린

비형은 륜을 나늬에 태웠다. 티나한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한 단의 높이

가 10 미터나 되는 피라미드를 계단이나  되는 것처럼 뛰어올랐다. 티나

한은 여덟 번의 도약 만에 최상층에  도달했고 그 뒤를 이어 딱정벌레에

탄 비형과 륜도 도달했다.

피라미드의 최상층은 대규모의 저택이었다. 보랏빛 밤하늘과 달이 훨씬

가깝게 느껴지는 까마득한 높이에서 달빛을  받아 푸르게 빛나는 저택의

모습은 괴기스럽기까지 했다. 세  사람은 거의 동시에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기분을 느꼈고, 주춤거리는 일행을  보며 다른 사람들도 그

런 기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티나한이 언짢은 표정으로 외쳤다.

"케이건-!"

어두운 저택은 티나한의 고함소리를 삼켜버리는  것 같았다. 세 사람은

난처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 때 저택 안에서 다시 비명 같은

것이 들려왔다.

세 사람은 저택 안으로 달려갔다.

숲 속에서 달려가는 두 개의 체온을 보았을 때 사모는 밤이라는 것, 그

리고 조금 전까지 비가  내렸다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그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기온은 나가가  달리기에 매우 부적절한  온도였다. 사모와

카루는 몇 번이나 그 체온을 놓칠 뻔했다.

한 순간 체온이 사라진 자리로 뛰어들었을 때 그들은 도시를 발견했다.

사모는 당황하여 도시를 둘러보았다. 심장탑이 없는 것을 본 사모는 그

것이 나가의 도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한계선 남쪽에

나가가 아닌 다른 자들의 도시가 있을 리가 없다. 주의깊게 주위를 둘러

본 사모는 그것이 도시가 아닌 폐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렇다

고 해도 의문점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나가들은 폐허도 남겨두지 않

았기 때문이다.

대확장 전쟁 당시 한계선 남쪽에 있는  불신자들의 도시는 모두 파괴되

었고 도시를 이루던 석재와 예술품들은 모두 나가의 도시를 건설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리고 포석이나 주춧돌 하나까지 모두 사라진 도시에 나가

들은 나무를 심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나가 정찰대들의 세심하면서

도 꾸준한 손길에 의해 불신자들의 도시는  모두 밀림 아래로 사라졌다.

따라서 눈 앞에 있는 것 같은 폐허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카루가 그녀의 의문을 해결해주었다.  숲 저편으로 보이는 도시

를 보며 카루는 긴장한 채 닐렀다.

[이런 맙소사! 그들이 두억시니의 도시로 들어갔군요!]

사모는 고개를 갸웃했다.

[두억시니의 도시? 두억시니병 환자 니르는 거야?]

[아니오. 진짜 두억시니 니름입니다.  두억시니병은 사실 두억시니와는

별로 관계가 없습니다. 모습이 끔찍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을 뿐

입니다. 하지만 저 도시에는 진짜 두억시니들이 있습니다. 이 도시가 이

렇게 남아있는 것도 두억시니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모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기들의 신을 잃은 교만한 자들 니르는 거야? 신도 없는데 어떻게 아

직까지 살아있지?]

[신이 정해주신 모습이나 행동 같은 것을 다  잊어먹은 채로 살고 있습

니다. 자기들 중에 어린 것들을  잡아먹고 여성들끼리, 혹은 남성들끼리

배가 맞아서 아이를 낳고…]

[잠깐. 같은 성끼리 애를 낳는다고?]

[심한 경우 짝도 없이 혼자서 아이를 낳기도 합니다. 그리곤 그 자식을

잡아먹거나 그것과 짝이 맞아  또 아이를 낳지요.  수명도 제멋대로입니

다. 어떤 것들은 수백년 동안 살고, 어떤 것들은 수십일 밖에 못 살기도

하지요. 머리가 엉덩이에 달린 놈, 심장이 다섯 개인 놈, 나이를 먹을수

록 어려지는 놈… 저 놈들에겐 정해진 형태나 규칙 같은 것이 하나도 없

습니다. 신을 잃어서 그렇지요. 어쨌든, 그런 식으로 아직까지 남아있습

니다.]

[끔찍하군. 그런데 너는 어떻게 이곳을 알지?]

[남자니까요. 떠돌다 보면 발을 들이밀지 않아야 하는 곳들은 알아둬야

합니다. 정찰대원들도 저곳은 잘 알 겁니다.]

사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 그리고 사모는  발걸음을 뗐다.

카루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사모를 바라보다가 조금  후에야 겨우 니를

수 있었다.

[잠깐만요! 어디를 가시는 겁니까?]

[저 안으로. 그들이 저 안쪽으로 들어갔을 거라고 했잖아?]

[두억시니들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놈들은 죽일 수도 없어요!]

[죽지 않는다는 니름이야? 조금 전 수명이 어쩌니 했던 것 같은데.]

[제 니름은, 그러니까 표준 두억시니 처치법 1장 1절 같은 것은 없다는

니름입니다. 어떤 놈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죽지만 어떤 놈은 머리를

도려내고 몸을 반으로 찢어놔도 죽지 않는  식입니다. 어떤 놈은 죽었다

살아나기까지 하죠. 우리들도 쉽게 죽지  않지만, 저것들은 아예 어떻게

죽여야할지 알 수도 없습니다. 전부 제멋대로니까요.]

[상당히 귀찮겠네. 하지만 내겐 할 일이 있어.]

[륜은 죽을 겁니다! 심장을 가지고 있으니까 배겨낼 도리가 없…]

[아니면 그냥 살아서 별일없이 저 도시를 지나갈지도 모르지. 놈들에겐

아무 규칙도 없다면서?]

카루는 니름이 막히고 말았다. 사모의 지적은 정확했다.

사모는 부드럽게 웃으며 닐렀다.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을 해야해. 그리고 그건 내 일이지. 유익한 정보

고마워. 감시자.]

그리고 사모는 그대로 걸어갔다. 카루는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사모의

니름대로 아무런 규칙이 없는 두억시니들은 륜 일행을 그냥 내버려둘 가

능성도 충분히 있다. 카루 또한 그것을 확인해야 했다.

하지만 사모의 뒤를 따르며 카루가 생각한 것은  좀 다른 것이었다. 카

루는 사모의 웃음을 한번 더 보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륜과 비형, 티나한,  그리고 나늬는 카루가 우려

하고 있던 상황에 정확하게 봉착해 있었다.  그들의 심정에서는 조금 과

하다 싶을 정도로 정확했다.

저택 안으로 들어선 그들은 어두운 건물 안을 헤매다가 그만 저택 아래

로 내려가는 길에 접어들었다. 피라미드  안쪽에 들어서버린 것이다. 피

라미드 안쪽의 공간은 경이적이랄  만큼 넓고 복잡했다.  무수한 계단과

그물 같은 통로들이 얽혀 있는 피라미드  내부 구조는 3차원적인 미로였

다. 그 공간을 다섯 시간 가까이 방황한 지금, 세 사람은 자신들이 어느

방향에 있는지, 혹은 지표면에서 어느 정도의  높이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혹은 얼마나 낮게 있는지를.

그들은 어렴풋이 땅 위의 피라미드를 그대로  뒤집어놓은 것 같은 공간

이 지하에 있음을 깨달았다. 피라미드의 종단면을 그려보면 거대한 마름

모꼴이 되며 지표면에 그 중심이 걸쳐져  있었다. 그 때문에 피라미드는

밖에서 본 것의 두 배나 되는 내부 공간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날 만큼 거대한 공간이었지만, 그  내부가 복잡한 통로와 계단

과 방들로 가득 차있어 통로의 총연장이 수십 킬로미터에 달할 지경이었

다.

그 거대한 미궁 속에서 두억시니들이 끝없이 쏟아져나왔다.

"제기랄! 이 안에 도대체 몇 놈이나 있는 거야!"

으르렁거리는 티나한을 향해 다리가 다섯 달린 두억시니가 달려들었다.

다리로 사용되고 있긴 했지만, 그것들이 모두 다리 모양을 하고 있는 것

은 아니었다. 지금껏 다리에 상처를 입힘으로써 추격을 저지해왔던 티나

한은 그 해괴한 모습에 전율하기보다는 난감하다는 기분을 느꼈다. 두억

시니는 맹렬한 포효를 토하며 뛰어올랐다.

"흰 하늘 찢고 고름 섞인 개구리 양심!"

"동감이닷!"

되는대로 대답한 티나한은 다섯 개의 다리 중 하나를 고르는 대신 창을

옆으로 뿌리며 온몸으로 부딪혔다. 공중에  떠있던 두억시니는 티나한과

충돌하는 순간 팔매줄을 벗어난 돌멩이가  저러하랴 싶을 정도의 무서운

속도로 날아갔다. 통로 저편에 호되게 떨어진 두억시니는 내부가 어떻게

상하기라도 한 것인지 다섯 개의 다리를 모두 내저으며 비명을 질렀다.

"네 발바닥 즐거운! 푸르다! 손! 밤! 아홉의 오른쪽 물거품!"

소리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  륜은 두억시니들이 토해놓는  괴상한 말에

신경쓰지 않았지만 비형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쨌든 세 명의 이야깃꾼

은 도깨비를 죽일 수 있는 법이다. 말도  되지 않는 말이니 신경쓰지 않

으면 그만이겠지만 비형은  두억시니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였고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지 않나 진땀나게 고민했다. 물론 의미는 없었고 대신 두

통만이 있었다.

하지만 두억시니들의 기승스러운 공격도, 그들의 말도 안되는 소리들도

티나한의 기세를 꺾지는 못했다. 어두운 통로 속에서 두억시니들은 무한

히 쏟아져나왔지만 티나한이  달리는 방향으로는 대로가  생길 지경이었

다. 티나한은 어떤 두억시니도 그의 앞에 한 호흡 이상 머무르지 못하게

만들었다. 티나한은 달리는 것뿐만 아니라  찌르고, 베고, 후려치고, 걷

어차고, 쪼고, 짓밟았다. 밀폐된 통로라는 점을 고려해서 계명성만 내지

르지 않았을 뿐 모든 종류의 공격을  다 퍼부어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도는 열린  광야를 달리는 것처럼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

다. 비형과 륜, 그리고 나늬는 그 뒤를 따르는 것만으로 숨이 가쁠 지경

이었다.

그러나 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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