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2-2. 관련자료:없음 [52131]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3-27 00:20 조회:12105
눈물을 마시는 새.
2. 눈물처럼 흐르는 죽음 - 2
구출대는 무룬강을 따라 열흘 정도를 걸었다. 그 거대한 강을 따라 걷
는 여행이 길어질수록 티나한의 성격은 점점 더 날카로와졌다. 비록 티
나한이 존경할 만한 자제력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가 - 그것도 7 미터짜리 철창을 들고 있는 - 신경이 날카로와져 있
다는 것은 다른 동행자들을 불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가장 곤혹스러
운 것은 티나한이 도통 자려들지 않는 것이었다. 비형은 그 이유를 물었
고 티나한은 더듬거리며 대답을 거부했다. 그런 사태가 이틀 동안 계속
되자 케이건은 단검을 꺼내든 다음 말없이 덩굴을 베기 시작했다. 덩굴
을 엮어 튼튼한 밧줄을 만든 케이건은 그것을 티나한에게 건네었다. 그
광경은 비형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오? 고통을 덜기 위해 자살하라는 건가요?"
"…아니오. 나무와 발목을 묶은 다음 자라는 거요."
티나한은 마침내 편히 잠들 수 있게 되었다. 그제야 비형은 티나한이
자다가 강물에 빠질까봐 걱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의 야영
지가 보통 강물에서 수십 미터씩 떨어진 곳임을 놓고 볼 때 비형은 레콘
들의 공수증(恐水症)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호기심이 발동
한 비형은 어느날 밤 티나한이 자고 있는 동안 그 밧줄을 풀어보았다.
비형은 그 결과에 만족할 수 있었다. 다음날 비형은 분기탱천한 티나한
의 손에 하마터면 유명을 달리할 뻔했다.
케이건이 노랫소리를 들은 것은 비형이 티나한을 향해 '더 가까이 오면
침 뱉을지도 몰라요?' 라는 둥의 헛소리를 외치고 있을 때였다.
남겨진 수명을 헤는 일도 두렵고
썩어들어가는 수족을 추스리는 짓도 포기한지 오래.
지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목 아래에 걸터앉아
빛나던 이들을 생각한다.
케이건은 고개를 돌리며 손을 들어올렸다. 비형을 향해 풍부한 해부학
적 지식이 담긴 폭언을 퍼부어대느라 바빴던 티나한은 그 손짓을 보지
못했고, 그래서 케이건은 손을 거칠게 흔들었다. 티나한이 겨우 부리를
닫자 강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노래는 보다 뚜렷하게 들렸다.
사랑하는 나의 왕이여, 내 주인이여.
질투 많은 운명조차 일벗지 못할 영광을 주신 분이여.
어버이께서 주신 내 육은 이곳에서 썩어들어가나
왕께서 일깨워주신 내 영은 영광 속에서 영원하리라.
륜은 스스로 노래를 부르며 동시에 그 노래를 감상했다. 화리트가 그의
머리속에 심어둔 노래는 기억의 형태였고 따라서 륜은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처음으로 그 노래를 듣는 셈이었다. 륜은 그 단순한 선율이 이상하
도록 힘에 차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지만 그가 느낄 수 있는 것도 거
기까지였다. 륜은 왕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빙하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열대의 키보렌에서 나고 자란 그가 빙
하의 무서움에 대해 피상적인 이해밖에 할 수 없듯이, 왕이 없는 사회에
서 살아온 륜은 자신이 부르는 연군가(戀君歌)의 정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노래가 바치는 찬양의 대상은 곧 다른 이에게 옮겨갔
다. 륜은 자신이 부르는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아름다운 나의 벗이여. 내 형제여.
살았을 적 언제나 내 곁에, 죽은 후엔 영원히 내 속에 남은 이여.
다시 돌아온 봄이건만, 꽃잎 맞으며 그대와 같이 걸을 수 없으니
봄은 왔으되 결코 봄이 아니구나.
케이건은 눈 앞의 세상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손을 옆으로 뻗었다.
단단한 나무의 감각이 그에게 위안이 되어주었고, 케이건은 가까스로 현
실감각을 잃지 않았다. 비형은 기대감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노래입니다! 그 나가겠지요?"
"그런 것 같소."
"그런데 건너편이잖아요. 어떻게 우리의 가수에게 연락하죠? 고함을 지
를까요?"
"나가니까 못 들을 거요. 노래를 부르기는 하지만… 우리가 건너가도록
합시다."
티나한은 그 말에 대경실색해서 강물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티나한 당신은 여기 있으시오. 나와 비형이 딱정벌레를 타고 건너가서
그 나가를 데려오겠소."
티나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형은 딱정벌레를 불렀다. 나늬가
비형 앞으로 걸어오자 비형은 재빨리 올라탔다. 하지만 케이건은 여전히
강변에 선 채 강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가느다란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
고 있었다. 그의 홀린 듯한 시선을 보며 비형은 당황하여 외쳤다.
"뭐해요, 케이건?"
"아."
케이건은 누구에게 끌려오듯 부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딱정벌레 위에 올
라앉았다. 비형이 등딱지를 두드려 신호를 보내자 나늬는 겉날개를 펼치
더니 폭발하는 기세로 날아올랐다. 삽시간에 숲이 발 아래로 쑥 내려갔
다. 비형은 다시 신호를 보내어 강물 위로 날아가게 한 다음 등 뒤의 케
이건을 돌아보았다. 뭔가 말을 걸고 싶었지만 웅왕거리는 날개 소리 때
문에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비형은 묻는 듯한 시선을 보내었고 케이
건은 그 시선을 외면했다.
강물을 내려다보며, 케이건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대사원에서 저 나가
에게 가르쳐준 노래가 하필 저것이라니. 물론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한 신
호가 되어주었고 그래서 케이건은 진정할 수 있었다. 그 때 비형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고개를 돌려보자, 비형은 입모양을 크게 강조하며 말하
고 있었다.
'보입니다!'
케이건은 허리를 옆으로 기울여 비형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
곳에선 나가 한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케이건은 고개를 끄덕였고 비형
은 딱정벌레를 그쪽으로 몰아갔다.
나가의 모습이 더 커졌다.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지만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다가가는 딱정벌레 쪽은 쳐다보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케이건이 갑자기 신음을 흘렸다.
"요스비?"
저 아래쪽에서 걷고 있는 나가는 요스비가 틀림없었다. 그 걸음걸이는
요스비의 걸음걸이였고 그 손동작은 요스비의 손동작이었다. 무엇보다도
허리에 차고 있는 사이커가 확실한 증거였다.
케이건은 비명처럼 외쳤다.
"요스비!"
날개 소리 때문에 케이건의 목소리는 지워졌다. 케이건은 비형을 다그
치듯 그 어깨를 흔들었지만 비형은 섣불리 내려서지 못했다. 강변엔 강
물 속으로 뿌리를 뻗은 나무들이 가득했고 따라서 딱정벌레를 착륙시킬
만한 곳이 없었다. 비형은 어쩔 수 없이 딱정벌레를 선회시키며 착륙할
만한 장소를 골랐다. 그의 사정을 짐작한 케이건은 입술을 깨물며 초조
함을 달랬다. 그의 눈은 나가에게서 떨어지지 못했다.
그 때 비형이 다시 케이건의 어깨를 쳤다. 비형은 놀란 눈으로 다른 방
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방향을 본 케이건은 또다른 나가 한 명이 걸
어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여자 나가였다. 그리고, 커다란 검을 뽑아든
채 노래를 부르던 나가의 등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나뭇가지를 밀고
수풀을 헤치는 모습이 퍽이나 대단한 소리가 날 것 같았지만 앞쪽에 있
는 나가는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한 듯 지금까지와 똑같이 걷고 있었다.
케이건은 황급히 외쳤다.
"내려갑시다!"
"뭐라고요?"
"내려가자고! 요스비가 위험하오!"
케이건의 입 모양을 읽은 비형은 - 요스비가 무슨 말인지 몰라 당황했
지만 - 고개를 가로저었다. 발 아래는 여전히 울창한 밀림이었다. 케이
건도 그것을 깨달은 듯 다시 손짓을 하며 외쳤다.
"겉날개를 펴고 활공하시오! 뛰어내리겠소!"
비형은 감탄한 표정으로 케이건을 보았다. 그런 것도 알고 있냐고 묻는
얼굴이었지만 케이건은 다급한 시선으로 마주 볼 뿐이었다. 비형은 황급
히 딱정벌레에게 신호를 보내었다.
나늬는 위로 힘껏 날아올랐다. 그리고 높은 하늘에 도달하자 속날개를
접어넣었다.
굉음이 사라졌다.
딱정벌레는 단단한 겉날개만 편 채 허공을 스르륵 미끄러졌다. 속날개
가 움직이고 있을 때 그 탑승자는 옆으로 뛰거나 하지는 못한다. 속날개
의 무시무시한 움직임에 휘말려 큰 사고를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
만 겉날개만 펴고 날아가는 지금은 옆으로 뛸 수 있는 요건이 갖춰졌다.
비형과 나늬는 필사의 기술을 다해 나가들을 향해 활공했다.
칼을 뽑아든 채 걸어오던 여자 나가는 이미 앞쪽의 나가에 지척까지 이
르렀다. 갑자기 앞쪽에 있던 남자 나가가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니름을 들은 것일까? 남자는 놀란 기색으로 여자를 바라
보았고 여자는 칼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순간, 케이건이 우레 같은 노성
을 지르며 아래로 뛰어내렸다.
"멈춰! 삼켜버리겠다!"
비형은 저 말이 저토록 실감나게 들릴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물이 요란하게 튀어오르는 소리야 들리지 않았지만, 날아든 물방울은
륜의 볼을 때렸다. 하지만 륜은 강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넋을 잃은
얼굴로 사모 페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머리 속에서는 인정하고 싶지 않
은 사모의 니름이 계속해서 되풀이되고 있었다.
'쇼자인-테-쉬크톨?'
멍하니 굳어있던 륜과 달리 사모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며 강변을 바
라보았다. 놀라움을 금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져
거창한 물보라를 일으킨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녀
의 놀라움은 인간이 강변 위로 올라왔을 때 경악으로 바뀌었다.
인간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지도 않은 채 곧장 등 뒤의 검을 뽑아
들었고, 그 검을 보았을 때 사모는 가문을 방문한 남자들이 들려주던 무
시무시한 괴물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었다.
[나가살육자?]
나가들 사이에서는 오래전부터 한계선 근처에 출몰하며 나가를 잡아먹
는 괴물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그 괴물은 바라기라 불리는 쌍신
검을 휘두르며 추위와 함께 나타난다. 그리고 추위 때문에 꽁꽁 얼어붙
은 나가를 얼음 깨어먹듯이 씹어먹는다고 한다. 지금껏 사모는 그 나가
살육자가 한계선의 추위를 상징하는 상상의 괴물일 거라고 여겼다. 하지
만 지금, 그녀의 눈앞에서는 그 이야기 속에서 묘사하는 것과 똑같은 인
간이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은 채 달려오고 있었고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
고 니르기엔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도전의 포효는 맹렬했고, 그 뒤를 이은 공격은 성난 하늘치 같았다.
사모는 아슬아슬한 순간에 쉬크톨을 위로 들어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낭패한 기분을 느끼며 다섯 번 더 방어해야 했다. 쌍신검의 공격은 여섯
번의 공격이 모두가 한 번의 공격인 것처럼 계속 이어졌다. 쉬크톨과 바
라기가 부딪히며 소름끼치는 굉음과 빗발 같은 섬광이 사방으로 비산했
다.
여섯 번째 공격에서 사모는 겨우 틈을 찾아낼 수 있었다. 사모는 그 틈
으로 세차게 쉬크톨을 찔러넣었다. 하지만 나가살육자는 예상하고 있었
다는 듯이 쉬크톨의 궤적에서 물러났다. 아니, 예상한 것이 아니라 몸에
익은 동작이었다. 사모는 그 회피에 크게 놀라며 긴장했다.
케이건 역시 놀랐다. 조금 전 그를 향해 날아든 반격기술은 분명히 요
스비의 것이었다. 여자를 다시 관찰한 케이건은 그 손의 위치나 발의 각
도 등에서 요스비의 흔적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케이건은 여자에
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등 뒤를 향해 외쳤다.
"요스비! 이 여자, 네 제자인가?"
뒤쪽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요스비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케이건은
눈 앞에 있는 여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한계선 근처에서 만날 수
있는 느린 나가가 아니었다. 눈 앞에 있는 여자는 한계선의 나가가 소드
락을 복용했을 때와 거의 비슷한 속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요스비의 제
자라면 무턱대고 벨 수 없다고 생각하며 케이건은 두 손목을 비틀어 바
라기를 반 바퀴 돌려쥐었다.
사모는 그 움직임에 의아해했다. 그러나 케이건이 공격을 시작한 순간,
사모는 그 무지막지한 공격에 당황했다. 숙련된 무술가답게 사모는 눈깜
짝할 사이에 사태를 이해했다.
바라기의 두 검날은 무게가 서로 달랐다.
보통의 검에서도 검날의 무게 중심을 일부러 어긋나게 만드는 경우가
있으며 사이커나 쉬크톨 또한 그런 검에 속한다. 다루기가 쉽지 않지만,
숙련자가 다룰 경우 이런 '비틀린검'은 대단한 파괴력을 발휘한다. 무게
가 서로 다른 바라기의 두 개의 검날 또한 무게 중심이 비틀린 칼처럼
작용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보통의 칼과 다른 점이 있었
는데, 검날의 방향을 바꿈으로써 검법이 두 가지로 변화할 수 있다는 점
이었다. 조금 전의 연속공격이 민첩했다면 지금의 공격은 실로 육중했
다. 단순히 칼날의 무게가 두 배라는 것 이상의 거대한 기백에 사모는
감히 방어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물러나야 했다.
사모가 멀찌감치 떨어지자 케이건은 바라기를 옆으로 약간 눕히며 외쳤
다.
"요스비의 제자인가?"
사모는 케이건의 입을 보고서 상대방이 말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
는 청각에 주의를 기울이며 말했다.
"뭐라고 했지?"
"요스비의 제자인가?"
사모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알았지? 넌 누구야?"
"이 근방에서는 나가살육자로 알려져 있는 것 같더군." 케이건은 그렇
게 자신을 소개하곤 등뒤를 향해 외쳤다. "이봐, 저 여자가 왜 널 공격
하나?"
'저 자가 륜까지도 알고 있나?' 사모는 계속되는 놀라움 속에서 겨우
입을 열었다.
"나가살육자. 네가 요스비를 어떻게 알고 있지? 아니, 그것은 천천히
말하지. 비켜라."
"왜?"
"이것은 쇼자인-테-쉬크톨이다. 알고 있어?"
케이건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범죄자의 추적-살해를 친족에게 일임하
는 이 무서운 관습은 잊기 어려운 것이다. 케이건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
모는 자신의 검을 앞으로 내밀어보였다.
"이 검은 쉬크톨이며, 한 사람을 죽인 다음 부러져야 되는 칼이야. 그
리고 그 한 사람은 네가 아니다. 비켜줘."
케이건은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저 여자는 요스비의 혈족이
란 말이군.' 그러나 다시 생각해본 케이건은 그럴 리가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나가 남자에겐 혈족이 없다.
"출가외인인 남자에게 쇼자인-테-쉬크톨이라니?"
"우리에 대해 많이 알고 있군. 하지만 더 많은 것을 알려줄 생각은 없
어. 당장 비켜!"
케이건은 비키는 대신 젖은 머리카락을 세게 쓸어넘겼다. 머리카락은
기이하게 꿈틀거리다가 어깨와 얼굴에 달라붙었다. 두억시니 같은 모습
이 된 케이건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먹어주지."
케이건은 검을 뒤로 바싹 당기며 검의 무게와 균형을 맞추듯 허리를 앞
으로 약간 굽혔다. 사모는 그 황당하기까지 한 자세에 놀랐다. 어떤 검
법에서도 준비자세에서 상체를 앞으로 숙이지는 않는다. 뒤로 간다면 모
를까, 앞으로 나아가는 데는 방해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모 페이는 바
라기가 신경쓰였다. '저런 이상한 칼에는, 이상한 자세가 필요할지도 모
른다.' 처음 보는 이 묘한 자세에 적응하기 위해 사모는 쉬크톨을 비스
듬히 내민 채 잠시 기다렸다.
케이건이 원한 것이 그것이었다.
케이건은 뒤로 홱 돌아 달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는 그 도주에 사모는
잠시 지체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륜은
케이건이 자신의 허리를 껴안으며 물에 뛰어들 때까지도 반항하지 못했
다.
케이건과 륜은 요란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강물에 빠졌다.
륜은 공포에 찬 니름을 닐렀다. 하지만 상대방이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
은 륜은 육성으로 외쳤다. "나는 나가라고!" 덕분에 륜은 꽤 많은 물을
삼키게 되었다. 물 속에서 고함을 지르면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입 속으로 왈칵 쏟아져들어오는 물 때문에 륜은 공황 상태에 빠져버렸
다. 헤엄친다는 것은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지만 륜은 본능적으로 거칠
게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물의 차가움 때문에 몸은 빠르게 식어갔고 륜
은 다리의 움직임이 느려지는 것을 깨닫고는 공포에 질려버렸다.
륜의 몸이 굳어지자 케이건은 좀 더 쉽게 륜을 다룰 수 있었다. 한쪽
팔로 바라기와 륜의 허리를 껴안고 다른 손으로 힘껏 물을 저으며 케이
건은 수면을 향해 헤엄쳤다. 물보다 무거운 몸을 가진 사람은 레콘뿐이
다. 차가움 때문에 물에 들어가지 않지만, 나가도 인간이나 도깨비처럼
물과 비슷한 비중을 가지고 있다. 또한 몸부림을 치거나 하지 않는 륜은
케이건을 편하게 해주었다. 케이건은 곧 수면 위로 머리를 내밀 수 있었
다.
물밖으로 머리를 내민 케이건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았
다. 곧 케이건은 쉬크톨을 움켜쥔 채 무서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는
사모를 발견했다. 하지만 사모는 물에 뛰어들지는 못했다. 케이건은 그
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누운 자세로 헤엄을 치며 비형을 찾았
다.
비형은 하늘에서 빙글빙글 돌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케이건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인 다음 아래로 내려오라고 손
짓했다. 륜이 아무리 다루기 쉽다 해도 그를 껴안은 채 넓은 무룬강을
가로질러 갈 수는 없었다. 비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 명을 태우고 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어떻게 태울 작정입니까?'
비형의 얼굴을 읽은 케이건은 손짓으로 자신의 뜻을 전달했다.
'내려와서 이 나가만 데려가시오. 그 딱정벌레는 발로 나가를 끌어올릴
수 있잖소. 나는 혼자서 헤엄쳐 건널 거요.'
케이건은 의미가 분명한 손짓을 해보였고 비형은 곧 이해했다. 위험한
일이었기에 비형은 조심스럽게 아래쪽으로 딱정벌레를 몰아갔다.
딱정벌레가 수면 가까이로 내려오자 거센 바람이 케이건의 얼굴을 때렸
다. 강물은 거대한 파문을 일으키며 옆으로 번져갔고 그 때문에 케이건
과 륜은 위아래로 거칠게 출렁거렸다. 파도와 물방울이 튀어오르자 겁을
먹은 딱정벌레 나늬는 더듬이를 움직여 더 내려가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말했다. 비형은 나늬의 등을 쓸어만지며 달래었다. 비형의 격려에 나늬
는 다시 아래로 조금씩 내려갔다. 케이건은 위아래로 출렁거리면서도 내
려오는 딱정벌레의 발을 주의깊게 바라보았다.
모두 극도로 집중하고 있었기에 다가오는 위험을 깨달은 것은 강 건너
편에서 보고 있던 티나한이었다. 티나한은 가슴을 거대하게 부풀린 다음
벽력처럼 외쳤다.
"비-형-! 조-심-해-!"
가까운 곳에 서있으면 그 소리에 밀려 쓰러진다는 레콘의 계명성(鷄鳴
聲)이 터지자 숲에서 새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날아올랐다. 그 거대
한 소리는 딱정벌레의 광포한 날개 소리를 뚫고 비형의 귀에 전달되었
다. 비형은 깜짝 놀라 강 건너편을 바라보았고, 그 때 티나한이 다시 계
명성을 질렀다.
"날-아-올-라-!"
비형은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위로 날아올랐다. 케이건은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딱정벌레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시야를 가리던 딱정벌레
가 사라지자 케이건 또한 다가오는 위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케이건은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정신억압자라니!"
한 손으론 왕독수리의 목깃털을, 다른 손으론 쉬크톨을 움켜쥔 채 사모
페이가 폭풍 같은 기세로 날아들고 있었다.
황급히 피하긴 했지만, 비형은 티나한이 가르쳐준 위험이 정확하게 무
엇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나늬의 복안은 등 뒤에서 날아드는 위험을
볼 수 있었다. 나늬는 빠른 속도로 상승했고 비형은 하마터면 강물에 떨
어질 뻔했다. 순식간에 백여 미터나 솟구친 나늬는 허공에서 몸을 뒤집
었고 비형은 그제야 저 아래에서 날개치는 왕독수리를 볼 수 있었다.
왕독수리는 나늬가 있던 지점을 빠르게 통과했다. 케이건은 머리 위를
스치듯 지나가는 왕독수리의 모습에 눈을 감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케
이건의 머리 위를 지나친 왕독수리는 그대로 반대쪽 강변으로 날아갔다.
티나한은 벼슬을 곤두세우며 철창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왕독수리는 숲
에 부딪히지 않기 위해 고도를 높였다. 왕독수리는 강변의 숲머리를 스
칠 듯이 날아 선회했고, 날개 바람에 휘말린 나뭇잎들이 폭발하듯 튀어
올랐다. 마치 키보렌이 왕독수리의 발을 붙잡으려 수천 개의 손을 뻗어
올리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하지만 왕독수리는 영광에 찬 날개짓으로
키보렌의 손길을 뿌리치며 휘돌아올랐다.
다시 강물 위로 날아들며 사모는 거대한 외침을 토했다.
"강변으로 돌아가라! 그렇잖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
케이건은 분노에 찬 눈으로 사모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상황은 나아지
지 않았다. 왕독수리는 딱정벌레와 달리 악어를 잡아채는 사냥 실력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케이건이 거부한다면 사모는 쉽게 그를 낚아올릴 것
이다. 암담한 상황 속에서 케이건은 동행자의 자격 요건에 대한 회의를
느꼈다.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고? 도대체 대적자여야 할 레콘이 강 저편
에 고립되어 있다니.
하지만 티나한은, 그리고 레콘을 동행시킨 하인샤 대사원의 승려들은
케이건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저리 꺼져라, 이 덩치 큰 병아리야!"
우레 같은 고함 소리와 함께 나무가 날아들었다.
그것은 진짜 '나무'였다. 뿌리와 줄기, 가지, 그리고 잎사귀들까지 갖
춘 버젓하고 보편타당한 나무였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나무는 하늘을 날
아다니지 않는다. 왕독수리를 다급히 날아오르게 하면서도 사모는 자신
이 있던 자리를 통과하는 5년생 고무나무를 공포에 질린 채 내려다보았
다.
가공할 속도로 날아온 나무는 수면과 충돌한 후 다시 날아올랐다. 물이
화산처럼 치솟는 가운데 나무는 강변의 숲에 틀어박혔다. 사모는 왕독수
리의 등깃털을 잡아뽑을 듯이 움켜쥔 채 반대쪽 강변을 바라보았다. 그
곳에서는 레콘이 또다른 나무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서, 사모는 그러나 분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무를 사랑하는 나가였다.
"그 짓 당장 멈춰라! 나무를 내버려둬!"
티나한은 부리를 부딪히며 나무를 놓았다. 사모는 안도했으나 곧 커다
란 실망과 분노, 그리고 황당함을 느꼈다. 티나한은 양손으로 나무 한
그루씩을 붙잡았다. 고무나무와 광대싸리를 한 그루씩 움켜쥔 티나한은
허리를 낮췄다가 일시에 펴며 두 팔을 좌우로 밀었다. 각자 4 미터가 넘
는 나무들이 부르르 떨리는 모습을 보며 사모는 비명을 질렀다.
"당장 멈춰!"
티나한은 들은체만체하며 다시 허리를 낮췄다가 일시에 폈다. 그의 몸
이 세 배로 부풀어오르며 두 그루의 나무는 좌우로 벌어져 뿌리가 드러
났다. 티나한은 두 그루의 나무를 투창처럼 차례로 집어던졌다. 사모는
왕독수리를 더 높이 날아오르게 할 수밖에 없었다. 영웅적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실로 초인적인 위업을 펼쳐보였으면서도 티나한은 도통 성취감
을 느낄 수 없었다.
"젠장! 안 맞는군!"
강물 속에서 출렁거리며, 케이건은 구출대의 일원으로 레콘을 배정한
대사원의 승려들도 레콘이 이런 종류의 활약을 펼쳐주리라 예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티나한이 수톤짜리 바위를 집어던졌다 하더라
도 이토록 놀랍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바위가 나무보다 무거운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땅에 뿌리를 내린 나무는 고정되어 있다는 느낌이 바
위보다 훨씬 강하다. 오직 하늘치를 상대해온 티나한만이, 즉 하늘을 날
아 다니는 수 킬로미터 크기의 물고기를 겨냥하며 살아온 레콘만이 물고
기도 하늘을 날아다니는데 나무가 하늘을 날아다녀서 안될 것이 뭐냐는
식의 상식 파괴를 저지를 수 있을 것이다.
'대적자가 맞군.' 케이건은 가볍게 감탄하며 티나한이 있는 강변을 향
해 헤엄쳐갔다. 그의 왼쪽 겨드랑이에 끼여있는 륜은 이제 뻣뻣하게 변
해 있었고, 그래서 오히려 케이건이 물에 뜨는 것을 도와주고 있었다.
허파에 공기가 들어있는 인간이나 나가는 물에 뜬다. 익사자가 물에 가
라앉는 것은 물을 삼켰기 때문이다. 케이건은 륜이 물을 마시지 않도록
얼굴을 하늘로 향하게 한 채 조심스럽게 륜을 끌고 갔다. 수백 미터나
되는 강폭이지만, 티나한이 계속 엄호해준다면 케이건은 어떻게 가로지
를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하지만 강 저편에서 들려온 단말마의 비명은 그런 낙관적인 전망을 싹
날려버렸다. 고개를 든 케이건은 상류를 보았다.
케이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왕독수리는 발에 거대한 악어를 움켜쥔 채 날아들고 있었다. 생애의 많
은 부분이 다양한 폭력으로 얼룩져있는 케이건이나 티나한 같은 사내들
도 이런 종류의 공격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티나한이 기막힌 비명을
지를 때 왕독수리의 발이 악어를 탁 놓았다.
사지를 꿈틀거리며 날아드는 4 미터 크기의 악어라는, 유사 이래의 전
란사의 한 장을 충분히 장식하고도 남을 위력적인 공대지 공격이 무룬강
수면 위에 작열했다.
악어는 티나한의 몇 미터 앞에 떨어졌다. 수 미터 크기의 물보라가 강
변을 덮쳤다. 물론 티나한은 왕독수리가 악어를 놓자마자 나무와 수풀을
닥치는대로 부러뜨리며 뒤로 도망친 후였고, 그래서 물을 뒤집어쓰는 끔
찍한 꼴은 당하지 않았다. 삽시간에 강변에서 20 미터나 물러난 티나한
의 뒤로는 코끼리떼가 지나간 것 같은 자취가 남았다. 자신이 만든 그
엄청난 자국의 첨단부에 주저앉아서, 티나한은 헐떡이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사모는 경멸어린 눈으로 레콘을 노려본 다음 다시 수면을 향해
날아들었다. 케이건은 이제야말로 꼼짝할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케이건과 티나한, 그리고 사모 페이는 한 사람을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지요?"
그 호탕한 외침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딱정벌레 날개 소리에 묻
혀졌기 때문이다. 문득 좋지 않은 예감을 느낀 사모는 주위를 둘러보았
다.
그리고 사모는 수십 마리나 되는 딱정벌레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모
습을 보곤 숨이 턱 막혀버렸다.
물론 비형에게는 딱정벌레의 체온이 나가의 눈에 어느 정도로 보일지
짐작할 방도가 없었다. 무익한 추론을 계속하는 대신, 비형은 온갖 온도
의 도깨비불을 만들어내었다. 그러자 도깨비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 일어났다. 비형은 그만 도깨비불을 만들어
내는 행위 자체에 심취해버린 것이다.
하늘 저쪽에서 딱정벌레, 풍뎅이, 사슴벌레, 그리고 하늘소라 짐작되
는, 그러나 상식적으로 존재할 수도 없는 형태의 추상적인 도깨비불을
만들어내며 즐겁게 날아다니던 비형은 티나한의 단말마에 겨우 예술 세
계에서 현실 세계로 관심을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현실 세계를 직시하
게 된 예술가가 흔히 그러하듯 비형은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
다. 비형은 마음 속으로 티나한과 케이건에게 사과하며 지금껏 만들어낸
예술품 전부와 함께 사모에게로 돌격했다.
'오늘 이곳 무룬강은 상식 파괴의 향연장이로군.'
눈을 부릅뜬 채 하늘을 쏘아보며 케이건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늘 한쪽
을 완전히 뒤덮은 채 4 미터에서 12 미터까지 이르는 온갖 크기의 불꽃
의 딱정벌레들이 불꽃의 도깨비 기수들을 태운 채 유성우처럼 날아들고
있었다. 현란함에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광경이었지만, 케이건은 어렵
지 않게 비형을 찾아낼 수 있었다. 동시에 케이건은 왕독수리 위의 나가
는 절대로 비형을 찾아내지 못하리라 확신했다.
실제로 그러했다. 냉철한 이성으로 그것이 도깨비불이라는 것을 어렵잖
게 판단했지만, 사모는 그 중 어느 것이 진짜인지 확인할 도리가 없었
다. 그녀의 당황은 왕독수리에게도 그대로 전해졌고 그러자 왕독수리의
비행이 눈에 띄게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사모에게 더욱 좋지 않았던 것은, 강변에서 멀찍이 떨어진 티나한이 수
모를 입은 전사가 당연히 취해야 할 행동에 착수했다는 점이다. 티나한
의 보복은 하늘에 숲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티나한은 울분을 그런 식으
로 풀어야 한다는 듯이 닥치는대로 나무를 뽑아서 집어던졌다. 자신에게
닥쳐오는 위험은 둘째 치더라도, 사모는 나무들이 그런 무지한 피해를
당하는 것을 견디기 어려웠다.
마침내 사모는 왕독수리의 내면을 향해 강력한 '개념'과 '의지'를 쏘아
보냈다.
왕독수리는 기류를 타고 높이 솟아올랐다. 지평선이 발 아래로 쑥 내려
가고 땅이 어떤 무가치한 거짓말처럼 여겨지는 고도에 도달했을 때 사모
는 고개를 돌려 저 아래에 푸른 뱀처럼 꿈틀거리는 무룬강을 내려다보았
다. 검은 강물 위를 방황하는 도깨비불들은 이 까마득한 높이에서 반딧
불이들의 군무처럼 보였다.
그리고 사모는 자신이 암살에 실패한 것에 대해 화를 내어야 할지 안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륜.'
동생의 이름을 불렀을 때 사모는 나가살육자가 말했던 다른 이름도 떠
올렸다. 사모는 그 이름의 소유자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죽
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모가 그 자에게 느낄 수 있는 감
정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 이름을 들었을 때 사모의 감정은 순수한 당혹
뿐이었다.
'요스비. 당신 이름이 왜 자꾸 거론되는 거지?'
차가운 몸에 햇살이 스며들길 한참, 마침내 륜은 온기 속에서 눈을 떴
다. 그리고 곧 그 사실을 후회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괴물 같은 세 명의 불신자의 얼굴이었다. 물고
기처럼 미끈미끈한 인간의 얼굴과 붉은 과일을 연상시키는 도깨비의 우
둘투둘한 얼굴, 그리고 깃털이 부숭부숭 덮인 레콘의 얼굴. 공포에 질린
륜이 눈을 부릅떴을 때 그들 중 도깨비가 입을 여닫았다. 륜은 비명을
질렀다.
[살려줘! 나를 잡아먹지마!]
륜의 탓할 수 없는 오해였다. 말을 하는 기행을 저지르곤 했던 륜이었
지만 그 또한 나가였고 아직 입의 움직임과 소리라는 것의 관계를 본능
적으로 깨달을 수는 없었다. 륜은 황급히 자신의 허리를 더듬었다. 하지
만 사이커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 때 인간이 손을 들어 륜
의 주의를 끌었다. 인간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과 귀를 번갈아 가리켰
다. 륜은 그 의미를 깨달았다. 청각에 주의를 집중시키자 마침내 인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리나? 들리면 대답을 해. 니르지 말고 말로."
"들립니다."
도깨비가 경탄하며 외쳤다.
"목소리가 참 아름답군요! 왜 그 좋은 목소리를 쓰지 않는 겁니까?"
"우리는 니를 수 있어서… 그런데 당신들은 나를 해칠 작정입니까?"
인간과 도깨비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인간이 다시 미심쩍다는 듯이 말
했다.
"노래를 부르지 않았나?"
륜은 그제야 화리트가 해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륜은 안도하며 서서히
일어났다.
"당신들이 그 세 명의 불신자군요. 저를 대사원으로 데려다줄."
일어나 앉은 륜은 자신이 햇빛이 잘 드는 강변의 바위 위에 눕혀져 있
음을 알게 되었다. 나가에 대해 잘 아는 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도깨비
가 몸서리를 치며 말했다.
"허! 정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멋진 목소리인데요. 나는 비형 스라블이
라고 합니다. 그런데 니른다는 건 무슨 말이죠?"
"우리들이 의사를 나누는 방식을 니르는, 아니, 말하는 겁니다."
륜은 힘들게 미소를 지었다. 그 때 인간이 손에 든 것을 앞으로 내보였
다. 륜은 그것이 자신의 사이커임을 알고는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인간은
사이커를 도로 끌어당겼다. 륜이 놀라서 쳐다보자 인간은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나는 케이건 드라카다. 그런데 너는 누구냐?"
"예?"
"너는 누구냐고 물었다. 왜 요스비의 사이커를 가지고 있는 거지?"
륜이 깨어나기 전, 양지 바른 곳에 똑바로 누운 륜을 자세히 관찰한 케
이건은 그 나가가 요스비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의아해진 케이건
은 륜의 사이커를 다시 확인했다. 하지만 그것은 요스비의 사이커가 분
명했고, 그래서 케이건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륜 또한 혼란을 겪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지금껏 요스비의 이름
을 육성으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저는 륜 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이커는 제 아버님의 것인데요?
제 아버님은…"
아버지의 이름을 말하려는 순간, 륜은 깨달았다. 륜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요스비, 요스비입니다! 맞아, 그렇게 발음하는군! 이럴 수가, 육성으
론 처음 발음해보는군요."
케이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육성으로 처음 발음했다는 것을 믿지 못
해서가 아니었다. 케이건은 륜이 말한 다른 단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버지라고? 나가에게는 아버지가 없다. 무슨 말이냐?"
"당신, 우리에 대해 대단히 많이 아는군요?"
"질문에 대답해줬으면 좋겠는데. 아버지라는 것은 무슨 뜻이지?"
"저를 만들어준 남자죠. 당신들이 사용하는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나가는 아버지라는 것을 믿지 않아. 어차피 난혼이라서 아버지가 누군
지 알기도 어렵지만, 그보다는 남자가 주는 것은 어머니가 먹고 마신 모
든 것들과 같이 재료의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그래서 너
희들은 어머니만 인정해. 내가 말한 것 중 사실과 다른 것이 있나, 륜
페이?"
륜은 놀라움 속에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 말이 다 맞습니다. 정확하게 알고 계시는군요."
티나한과 비형은 다시 감탄하며 케이건을 바라보았지만 케이건은 우쭐
해하거나 미소 한 번도 짓지 않은 채 차갑게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네가 왜 아버지라는 말을 사용하는 건지 설명해주겠
나?"
"그 전에 당신이 어떻게 요스비를 아시는지 설명해주시겠습니까?"
"그의 왼팔을 나눠먹었기 때문에 알고 있다."
륜은 경악했다. 티나한과 비형 또한 놀란 눈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륜은 잘 나오지 않는 육성을 억지로 쥐어짰다.
"뭐라고… 했습니까?"
"요스비의 왼팔을 나눠먹었던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가 잘랐고, 내가
요리했지."
륜은 괴성을 지른 다음 졸도해버렸다.
케이건은 탐탁찮은 표정을 한 채 기절한 륜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괴
괴한 침묵 후에 비형이 질린 얼굴로 말했다.
"지금 나눈 이야기가 다 무슨 말이죠?"
"이 친구는 내가 알던 나가의 아들인가 보오. 하지만 이해할 수 없군.
일반적으로 나가들은 부자 관계를 모르오. 그런 관계가 있다는 것은 알
고 있지만, 우리 같은 미개한 불신자들이나 믿는 비논리적인 미신 정도
로 취급하지. 그래서 나는 이 친구의 말을 믿기 어렵소."
"아니, 그것 말고요. 왼팔을… 나눠먹었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이
죠?"
케이건은 비형을, 그리고 티나한을 차례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비
형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다른 말을 꺼내었다.
"미안하지만 여기서 지체할 시간이 없소. 불을 본 나가들이 벌떼처럼
몰려들 거요. 빨리 갑시다. 티나한. 괜찮다면 이 나가를 좀 업어주시
오."
비형은 대답을 피하는 케이건에게 불만을 느꼈지만 케이건의 지적은 무
시할 수 없었다. 그가 하늘에 만들어보인 딱정벌레들은 수십 킬로미터
밖에서도 보였을 것이다. 티나한은 혼절한 륜을 들어올려 어깨에 걸쳤
다. 그리고 나서 일행은 북쪽을 향해 걸어갔다.
얼마 있지 않아 해가 졌다. 하지만 케이건은 멈춰 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보름달이 뜨는 것을 확인한 케이건은 밤에도 계속 걸을 것을 요
구했다. 케이건은 그들이 쫓아버렸던 정신억압자가 되돌아올 거라 믿었
다. 그 나가는 쇼자인-테-쉬크톨이라는 말을 거론했고 말했고, 케이건이
아는 바에 따르면 쇼자인-테-쉬크톨은 절대로 중단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 쉬크톨은 반드시 륜이 있는 곳을 찾아낼 것이다. 그래서 케이건은 나
가들의 활동이 느려지는 밤 동안 거리를 더 벌려두길 원했다. 케이건의
설명을 들은 두 사람은 한숨을 쉬며 동의했다.
기묘한 밤이었다.
응결되어 흘러내리는 수증기는 열대의 밀림이 흘리는 식은땀이었다. 보
름달은 그들의 앞길을 밝혀주기보다는 오히려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뒤
엉킨 가지들 사이로 쏟아져내리는 달빛은 질량을 가진 무거운 모래가 흘
러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원근의 사악한 자리바뀜들. 발 아래는 때로는
땅이었고 때로는 쌓인 나뭇잎이었고 때론 늪이었다. 늪지대의 허공을 맴
도는 광기어린 불빛들은 일행의 소음 때문에 더욱 괴상한 춤을 추었다.
철벅거리는 소리, 턱에 차는 호흡소리, 다급한 발소리. 때론 발길에 채
인 돌멩이가 나무에 부딪혀 소름끼칠 정도의 굉음을 울려퍼지게 만들었
다. 보다 단단하고 차가운 북방의 나무라면 낼 리가 없는 소리였건만 이
밀림 속의 어떤 나무들이 내는 소리는 섬뜩하리만큼 생물의 비명을 닮아
있었다.
륜이 깨어난 것은 새벽녘이었다. 잠깐 동안 륜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세상이 너무 이상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자신의 자세나 위
치 또한 낯설었다. 자신이 거대한 레콘의 어깨 위에 얹혀져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정신을 차리고도 한참 후였다.
륜은 내려달라고 외쳤지만 티나한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레콘이 자
신의 니름을 듣지 못한다는 것을 상기해낸 륜은 말을 했다.
"내려줘요."
티나한은 그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앞서 걸어가던 비형과 나늬, 케이
건도 들었다. 케이건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일행을 멈춰서게 했다.
땅에 서게 된 륜은 그것만으로도 혼란이 많이 사라진 기분을 느꼈다.
륜은 이제 긴 여정 동안 자신을 보호해줄 사람들에게 호의적인 미소 정
도는 지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륜의 미소는 다가오는 케이건의
모습을 보자마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티나한과 비형은 기대감과 불안
이 뒤섞인 시선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케이건 드라카라고 했습니까?"
"그렇다. 륜 페이. 네가 정말 요스비의 아들이냐?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지?"
륜은 분노 속에서 말했다.
"제 사이커가 증거입니다. 그 사이커를 가지고 있던 분께서 제가 당신
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요스비가 직접 닐러줬다는 거냐?"
"예."
케이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아는 요스비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그는 논리적인 나가였다. 내
가 죽음의 위기에 처하자 자신의 왼팔을 잘라먹였을 만큼."
륜의 눈이 커졌다. 비형과 티나한은 전율하면서도 케이건의 설명에 빠
져들었다.
"감수성 예민한 얼간이들이 그 행동을 가리켜 고귀한 자비심이나 위대
한 희생 정신이라고 환호를 보내었다면 그것은 요스비를 화나게 했을 것
이다. 요스비가 왼팔을 자르기로 결정한 것은 지극히 논리적인 관점에서
였다. 세 가지 이유에서 그는 그렇게 했다. 그가 오른손잡이였고, 두 다
리는 걷기 위해 필요했고, 나가의 팔은 언젠가는 재생된다는 것. 요스비
에겐 그것으로 충분했고 그래서 주저없이 왼팔을 잘랐다. 요스비는 그런
사람이었다. 내 팔이 재생된다 하더라도 내가 그럴 수 있을지 의문스럽
군."
륜은 자신도 의문스럽다고 생각했다. 케이건은 준엄하게 말했다.
"그래서 요스비가 그런 미신을 닐렀을 리는 없는 것 같다. 륜 페이. 나
가에게 아버지라는 것은 미신이야."
"하지만 당신께서 그렇게 니르셨습니다. 저도 그 니름을 믿고요."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케이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륜은 노하여 외쳤다.
"그렇다면 그렇게 논리적이셨던 아버님께서 왜 인간 따위에게 당신의
왼팔을 잘라주셨는지 설명해주시겠습니까? 그거야말로 미신적이고 비논
리적인 일 아닙니까? 도대체 제 아버님과 당신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
던 겁니까? 당신은 우리 아버님에게 있어 무엇이었습니까?"
케이건은 이맛살을 찌푸린 채 륜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술은 꽉 닫힌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한참 후, 케이건은 허리춤에 꽂아두었던 사이커를 뽑아들었다. 케이건
은 그것을 륜에게 내밀었고 륜은 받아들었다. 케이건은 지친 어조로 말
했다.
"말할 의무가 없다."
"예?"
"말할 의무가 없어. 내가 한 말은 다 잊어라. 너도 내게 말해줄 필요
없다. 나는 여전히 요스비가 부자 관계라는 것을 인정했다고 믿을 수 없
다. 그렇다면 네가 요스비의 아들이든 아니든 상관없는 일이겠지."
"잠깐만요! 당신은 그렇게 그만두고 싶더라도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아
요. 말씀해주십시오! 당신과 아버님은 무슨 관계였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
케이건은 몸을 돌렸다. 륜은 다급하게 외쳤다.
"다른 사람 같은 건 없어요! 당신이 유일한 사람입니다. 당신 이외에
아버님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저를 죽이기 위해…"
륜의 말을 무시하며 걷던 케이건은 문득 이상한 것을 느끼고 돌아보았
다. 그리고 케이건은 놀랐다. 륜은 무서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륜! 왜 그러나?"
비형과 티나한도 벌떡 일어나 달려왔다. 하지만 륜은 몸을 떨 뿐 대답
하지 못했다. 케이건은 그의 어깨를 힘껏 붙잡아 누른 채 잠자코 기다렸
다. 비형과 티나한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을 때까지도 륜은 입을
열지 못했다. 사실 그는 계속해서 외치고 있었지만.
[제 누님이 저를 죽이려 합니다! 제 누님이 저를 죽이려 합니다!]
륜은 격렬하게 외쳤다. 하지만 케이건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채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뒤쪽으로 다가선 도깨비
와 레콘 역시 바보처럼 어리둥절해 했다. 륜은 분노를 삼키며 외쳤지만
그들, 그 괴물 같은 세 개의 얼굴은 아무런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다. 미
칠 것 같은 분노 속에서 륜은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가 저를 죽이려… 합니…"
"죽이려 한다? 그 정신억압자? 아아. 그렇잖아도 그것을 물어볼까 했었
다. 남자에게 무슨 쇼자인-테-쉬크톨이라는 거지? 무슨 오해가 생긴 건
가?"
륜은 정신적 비명을 질렀다.
[맙소사, 그런 문제가 아냐! 사소한 오해,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리거나
짜증스러워할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사모 페이가 나를 죽이려 하는 거
란 니름이야!]
하지만 그의 맹렬한 니름은 케이건과 비형, 티나한 그 누구에게도 영향
을 끼치지 못했고 그들 세 사람은 설명을 기다린다는 듯이 륜을 바라보
고만 있었다. 더 참을 수 없었던 륜은 거칠게 몸부림치며 그의 니름을
듣지 못하는 인간을 왈칵 떠밀었다. 밀려난 케이건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왜 이러는 거야?"
기가 막힌다는 듯이 케이건을 바라보던 륜의 입이 가까스로 열렸다.
"그 여자는 제 누님입니다!"
"엑? 누나가 당신을 죽이려 한 겁니까?"
비형이 깜짝 놀라서 외쳤고 티나한 역시 놀란 듯이 어깨 깃털을 불쑥
세워보였다. 하지만 케이건은 놀라지 않았다.
"쇼자인-테-쉬크톨이라면 그 쉬크톨의 암살자는 네 친족이겠지. 하지만
너는 남자잖아. 적출식을 끝냈다면 그 여자는 네 누나가 아냐. 아니, 방
문할 수도 없으니 남보다 더한 남이지. 도대체 어떤 오해가…"
"적출하지 않았습니다."
"뭐라고?"
륜은 오른손으로 자신의 심장 부위를 덮듯이 하며 말했다.
"적출하지 않았어요. 저는 심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케이건도 다른 두 사람과 놀라움을 공유할 수 있었다. 케이건
이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경악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적출하지 않았다고?"
"예. 적출식에서 도망쳤습니다. 도망치기 전에 저는…"
그리고 륜은 화리트의 이야기를 하려 했다. 하지만 케이건은 거칠게 손
을 내저어 륜의 말을 막았다.
"적출하지 않았다는 거냐?"
륜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나가도 아닌 케이건이
왜 적출하지 않았다는 말에 신경쓰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곧 설명했다.
"나는 당연히 네가 적출했을 줄 알고 마음놓고 물에 던진 거란 말이다.
설마 익사할 리는 없을 테니까."
"예… 그러고보니 죽을 뻔했군요."
케이건은 고개를 돌려 비형을 바라보았다.
"비형. 륜을 데리고 곧장 대사원으로 날아가시오."
"예?"
"당신 딱정벌레에 이 친구를 태워서 날아가시오. 천천히 걸어돌아갈 여
유가 없소. 나는 이 친구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하고 있지 않았소. 최
악의 경우 머리와 몸 정도만 가져가도 임무가 성공한 거라 생각하고 있
었소. 보호대상이 잘 죽지도 않는 나가였을 때의 장점이지."
비형은 소름끼친다는 표정을 지었고 티나한은 부리를 쩍 벌렸다. 케이
건은 계속 설명했다.
"하지만 심장을 적출하지 않았다면 그런 식은 안 되오. 게다가 땅끝까
지라도 이 친구를 추적하기로 맹세한 암살자까지 붙어있소. 도저히 여유
를 부릴 수 없소."
"하지만 당신은 어쩌실 겁니까? 그리고 티나한은?"
"우리 둘은 천천히 따라가면 되오. 지금 신경써야 할 것은 륜이지 우리
가 아니오."
비형은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곤란합니다. 셋만이 하나를 상대한다고 하잖습니까?"
"지금 그런 옛날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오. 비형."
"하지만 대사원의 스님들은 그렇게 생각했기에 우리들을 선택했을 겁니
다. 그리고 그 선택이 정확했기에 우리는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었고요.
그러니 돌아갈 때도 셋이 함께여야 될 거라 생각되는데요. 만약 저 혼자
서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처음부터 딱정벌레에 저를 태워 이곳으로
보냈을 겁니다. 그렇잖습니까? 그냥 날아와서 륜을 태운 다음 돌아가면
훨씬 간단명료하잖습니까?"
케이건은 비형의 반론을 무시하려 했다. 하지만 곧 비형은 무시할 수
없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계획은 위험합니다. 왕독수리를 정신억압할 수
있는 나가가 한 명뿐일 리는 없잖습니까? 하늘을 날아가는 저와 륜을 보
고 참 바람직한 행동이라고 찬사를 보낼 또다른 정신억압자가 있을 수도
있잖습니까?"
케이건은 비형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케이건은 륜
에게 질문했고 륜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 누님처럼 약한 능력으로도 할 수 있으니, 좀 더 강한 정신억압력을
가진 나가라면 쉽게 왕독수리를 억압할 수 있겠지요."
"약한!" 티나한이 비명처럼 외쳤다. "이런, 얼어죽을. 그 큰 왕독수리
를 마음대로 다루는 걸 약하다고 말하는 거야?"
"왕독수리를 타는 건 균형감각이나 힘 같은 것의 문제입니다. 당신이
그런 육체적 능력들에 놀란 것이라면, 예. 누님은 화로를 식힐 만한 역
량을 보여주셨지요. 하지만 정신억압의 경우엔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
다. 왕독수리는 그다지 지혜로운 생물이 못되니까요. 원숭이를 억압한다
면 대단한 일이겠지만 왕독수리라면 쥐나 마찬가지입니다."
"쥐?"
"누님은 보통 식탁에 올릴 쥐를 마비시키는데 그 능력을 사용하곤 했지
요. 약한 능력이지만, 우아하게 사용하신 거죠."
사모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륜은 다시 가슴이 저릿해져오는 것을 느꼈
다. 쥐의 힘줄을 끊어 식탁에 올리는 다른 가문의 사육사들과 달리 사모
는 가벼운 정신억압으로 깔끔한 식사를 가능하게 했다. 사모의 정갈한
솜씨에 대한 생각에 골몰하는 바람에 륜은 비형과 티나한이 속이 거북하
다는 표정을 짓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그런 거부 반응이 없는 케이건은 다른 것에 관심을 느꼈다.
"누나를 좋아하는가 보군."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진심이라."
"네?"
케이건은 고개를 돌려 륜을 외면했다.
"네 아버지는 진심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심장이 없는 나가가 진심
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습다는 것이 요스비의 설명이었지."
륜이 당황하여 얼굴을 일그러뜨렸을 때 케이건은 덧붙이듯 말했다.
"하지만, 심장을 가진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어색할 것이 없는 것
같군."
륜은 자신의 가슴을 쓸어만지며 다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밀림을 휙 둘러본 다음 말했다.
"날 수 없다면 걸어야지. 어젯밤엔 많이 걸었으니 잠시 쉬었다가 출발
하도록 합시다. 내가 먼저 불침번을 서겠소."
륜이 다시 말하려 했을 때 케이건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더 이상 묻지 마. 나는 말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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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을 굴러 수십 미터를 뛰어오르고 맨손으로 살아있는 나무를 잡아뽑는
레콘은… 근밀도나 골밀도가 높아서 그 몸의 비중이 1보다 높습니다. 물
에 넣으면 가라앉죠. 깃털 때문에 헤엄치기도 어렵고, 그래서 레콘은 물
을 대단히 싫어합니다.(물론 물을 마시기는 합니다만.) 비중이 1보다 높
은 레콘의 몸은 인간과는 여러 가지로 다르겠죠. 피나 체액이 몸 윗부분
으로 떠오를 테니 다리가 붓는 일은 없겠지만, 걸핏하면 머리에 피가 쏠
리지 않을까 합니다. 레콘의 성격이 난폭한 건 그 때문일지도. (팬터지,
팬터지. 음하하하… 퍼버버벅!)
좋은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