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새-6화 (6/62)

좋은 밤 되세요.

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2-1.                         관련자료:없음  [52090]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3-26 00:30  조회:12684

눈물을 마시는 새.

2. 눈물처럼 흐르는 죽음 - 1

물을 싫어한다는 점에서 나가는 레콘과 같다. 하지만  레콘이 돌

멩이보다 나을 것 없는 수영실력 때문에 물을 두려워하는 것에 비

해볼 때 나가는 물의 차가움 때문에 수영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

손이 부모의 이름을 잇는다는 점에서 나가는 인간과 같다. 하지만

인간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르고 나가는 어머니의  이름을 따른다.

죽음의 공포를 물리쳤다는 점에서 나가는 도깨비와  같다. 하지만

도깨비가 죽음 이후에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

지 않는 데 비해 나가들은 심장을 적출함으로써  놀라운 생명력을

얻은 것에 불과하다. (중략) 영육(靈肉)이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

는다는 이런 특징 때문에 혹자는 도깨비가 가장 신에 가까운 종족

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오해다. 도깨비들  또한 영

과 육이 함께 탄생하며, 비록 육이 죽은 다음에도 영이 존재할 수

있지만 그것은 다른 도깨비들의 육이 가까이 있을  때, 즉 도깨비

들의 공동체와 접촉해 있는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만약 어떤 도깨

비가 외진 곳에서 홀로 죽었다면 그 도깨비의 영은 불로써 자신을

감싼 다음 살아있는 도깨비들을 찾아 무서운 기세로 날아간다. 간

혹 도깨비가 없는 곳에서 도깨비불이 발견되곤 하는데, 이것이 바

로 죽은 도깨비의 영이다. (중략) 살해할 수  없는 도깨비를 육체

적 위협으로 분노하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도깨비

들의 호의적인 성정을 무시하고  그들을 압박하는 실수를  저지를

경우, 그것은 최악의 재난에의 첩경이 될 것이다. 저 무도하고 사

악한 페시론 섬 사람들이 저지른 실수가 바로 그것이다. - 가이너

카쉬냅의 <생각하는 동물들>

아침, 엽맥을 타고 흐르던 이슬이 잎사귀 끝에 멈췄다. 그 안에 뒤집힌

세상을 담아보이며 부풀던 이슬은 마침내 세상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듯

아래로 떨어졌다. 떨어진 이슬이 풀잎을 때리자 초향이 자욱하게 번져나

갔다.

땅바닥을 살피던 케이건은 고개를 들었다.

그는 키보렌에 있었다.

케이건의 주위로 거대한 기근들이 장막처럼 펼쳐져  있고 그 어두운 결

을 따라 이슬을 머금은 이끼들이 빛나고 있었다.  말할 수 없이 많은 그

림자들이 뒤엉켜 쌓여있는 거대한 원시림  속에서 케이건은 티끌처럼 작

은 얼룩이었다.

케이건은 이슬을 잔뜩 머금은 꽃을 딴 다음  그것을 입에 물었다. 입술

사이로 꽃잎을 미끄러지게 한  케이건은 입 안에  남은 이슬을 음미하며

눈을 감았다. 고요한 아침이었고, 비록 그가 사랑할 수 없는 숲이었지만

케이건은 그 침묵의 시간을 연장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곧 꽃을 던지며 몸을 돌렸다.

넝쿨과 관목을 헤치며 야영지로 돌아온 케이건은 티나한이 일어난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비형은 아직까지도 딱정벌레에 기댄  채 쿨쿨 자고 있

었다. 케이건을 본 티나한은 깃털을 잔뜩 부풀리며 말했다.

"찌뿌드드하군… 어디 갔나 왔냐?"

"자취를 좀 찾아보고 있었소. 나가 정찰대의 자취가 있더군."

티나한은 긴장하며 자신의 철창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열흘 전에 지나간 거요."

"열흘? 허, 그렇게 오래된 자취가 남아있나?"

"그렇게 요란한 자취를 남기고 다니는 자들도  드문 편이오. 소리에 신

경쓰지 않으니 나뭇가지건 풀잎이건  진흙탕이건 닥치는대로 짓밟으면서

다니니까."

정찰대는 모두 여덟이었다. 그들의 진행방향과 엇갈리는 방향으로 움직

이고 있었기에 다시 만날  가능성은 적었다. 하지만  나가 정찰대원들의

이동 방향은 불규칙하기 때문에 케이건은 확신하지는 않았다. 나가 정찰

대는 제멋대로 움직인다.  이들에겐 '집결지'나 '요새',  혹은 '근거지'

같은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나가 정찰대는  한번 정찰을 나설 경우 1년

이나 2년, 심지어 5년까지도 계속 정찰을 다닌다. 다른 종족들이라면 보

급의 문제 때문에 도저히 그런 식의  정찰이 불가능하겠지만, 키보렌 속

에 있는 나가 정찰대는 보급창 속에서 정찰 활동을 하는 셈이다. 케이건

이 이 위험한 여행을 감행하면서도 음식물  때문에 고민하지 않은 것 또

한 이곳이 키보렌이기 때문이다. 케이건은 나가 정찰대들의 자취 이외에

무수한 숲의 동물들의 자취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래동안 한 자리에 머무는 것은  바보짓일 거요. 비형을 깨워

출발합시다."

한낮의 키보렌은 어둡고 습하고 무거웠다.

온도를 감추기 위해 인간과 도깨비, 그리고 레콘은 팔다리를 가리는 두

꺼운 옷을 입고 있었으며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나가 정찰대에 대해

주의력을 계속 혹사당하는 상태에서 걷고 있었다. 하지만 키보렌이 끝없

이 가져다주는 중압감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태양의 모진 화살들은 키

보렌의 머릿부분을 뚫지 못했고 그 아래쪽엔 끝없는 그늘들이 펼쳐져 있

었다. 비형과 티나한은 이 땅 어디엔가는 분명히 수천년 동안 햇빛이 닿

은 적 없는 땅도 있으리라 확신했다.

일행은 펠도리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거대하고 두터운 나뭇잎들

은 무례하게 뻗어나와 그들의 뺨을 찰싹찰싹 때렸고 이끼에 뒤덮인 뿌리

들은 무릎을 잡아채는 함정이었다. 나무들은  여행자나 지도제작자의 편

의 따위와는 아무 상관없이  그들만의 법칙으로 자라나  있었고, 따라서

백 미터를 전진하기 위해 수백 미터를 돌아가야 하는 일 쯤은 신경쓸 일

도 되지 못했다. 열 발자국 앞에 무엇이  있을지 장담하는 것은 극히 어

려운 일이 되고 있었다. 딱딱한 땅이  나타날지, 죽은 나무들이 둥둥 떠

있는 물웅덩이가 나타날지, 절벽이 나타날지. 실제로 먼 곳에서 숲의 일

부로 보였던 것이 가까이 다가가면 덩굴과  이끼, 나뭇잎 따위로 뒤덮인

낭떠러지인 것을 깨닫게 되는 일이 자주  있었고 그 때마다 그들은 몇백

미터씩 돌아가야 했다. 일행은 몇  번이나 펠도리강을 잃어버릴 뻔했다.

만약 침착하고 끈기있게 일행을 인도해나가는 케이건이 없었다면 구출대

는 오래전에 키보렌의 밀림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비형은 쾌활했다.

소리에 신경쓸 필요는 없었기에 비형은 제멋대로  떠들고 큰 소리로 웃

고 간혹 뒤를 따라오는 자신의 딱정벌레에게 노래까지도 불러주었다. 비

형은 정말 이것을 즐기는  듯했고, 키보렌이 왜 악명을  얻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놀란 눈으로 케이건을 바라보곤 했다. 케이건은 나

가 정찰대와 조우하는 순간부터 즐거움 따위는 전설 비슷한 것이 되어버

릴 것을 알고 있기에 비형의 유쾌함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멧돼

지보다 더 큰 소리를 내며 걸어오고 있는 딱정벌레에게도 신경쓰지 않았

다.

케이건은 딱정벌레를 데리고 가는 것에 난색을 표했다. 그의 원래 계획

은 키보렌에 도착하자마자 딱정벌레를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비

형은 딱정벌레가 두터운 외피 덕분에 열을 그다지 발산하지 않으며 어차

피 변온동물이기 때문에 나가 정찰대의 시선을 끌지는 않을 거라고 주장

했다. 비형의 설명을 다 들은 케이건은 손을 들어 딱정벌레를 가리켰다.

"너무 커요." 아무리 온도를  적게 발산하더라도 길이가  6 미터나 되는

생물이 걸어가는 것이 보이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비형은 크기로 말

하자면 티나한이나 그의 철창이 훨씬 더  크며, 만일의 경우 딱정벌레를

타고 날아오를 수 있다는 점 등을  지적했다. 케이건은 후자의 가능성이

매혹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 놈은 나무를 갉아먹고 꽃을 뜯어먹지 않소? 나무가 그 지경

이 되면 우리의 수목애호가들이 분노에 차서 추적할 텐데. 그 자들의 관

심은 모두 나무에 돌려져 있거든."

"야생 딱정벌레도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주의를 끌지  않도록 조금씩

먹게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나늬는 소식하는  편이거든요. 덩치에 안

맞죠?"

나늬는 딱정벌레의 이름이었고  케이건과 티나한은  딱정벌레의 우람한

뿔과 두터운 갑피를 보며 이토록 소름끼치는 작명감각도 드물 거라 생각

했다. 결국 케이건은 '길잡이'로서 딱정벌레의 동행을 허용했다. 그리고

는 자신의 결정을 책임을 지는 이답게 시도 때도 없이 요란한 소리를 내

며 나무를 갉아먹는 딱정벌레의 모습을 묵인했다. 비형의 보장대로 나늬

는 나무에 이상을 끼치지는 않았지만 대신  한 시간이 멀다 하고 나무에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티나한은  비형과 나늬 중 누

가 더 시끄러운지 판단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침내 비형과 그의 딱정벌레가 입  다물어야 할 시간이 다가왔

다. 케이건은 저녁거리를 장만해야겠다고 판단했고 나무 위를 오가는 원

숭이를 목표로 정했다.

"티나한. 부탁합시다."

티나한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돌멩이를 주워들었다.  그리고는 비형이

뒤로 돌아설 때까지 기다린 다음 나무  위를 향해 돌멩이를 집어던졌다.

그것은 레콘의 기준에서만 돌멩이였지 원숭이에겐 거의 바위나 마찬가지

였다. 화살보다 빠른 속도로 날아간 바위는 원숭이를 일격에 즉사시켰고

부수적으로 나뭇가지와 잎을 잔뜩 떨어트렸다.

비형이 여전히 뒤로 돌아서 있는 동안 나늬가  땅을 팠고, 케이건과 티

나한은 원숭이를 손질한 다음 거대한 나뭇잎들로  싸서 땅 속에 묻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홀린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  애쓰면서 묵묵히 비형의

작업을 바라보았다.

동행자 중 한 명이 도깨비라는 것을 알았을 때 케이건은 도깨비로 하여

금 화식(火食)의 습관을 어떻게 포기하게 할까 고민했다. 한계선을 오르

내리며 나가를 무수히 상대해본 케이건은, 나가처럼  산 채로 먹지야 않

지만 불을 피우는 위험을 감수하느니 날고기를 씹어먹는 쪽을 선택한다.

따라서 케이건은 과일까지도 구워먹는 도깨비가 어떻게 생식을 할 수 있

을지 고민했다.

하지만 비형은 도깨비다운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아직까지도 확신

이 없었던 티나한은 조심스럽게 땅을 만져보았고 비형은 그것을 보며 큰

소리로 웃었다. 땅은 차가웠다.  하지만 잠시 후  그들이 땅을 파헤치자

완전히 탄 나뭇잎과 잘 구워진 원숭이 고기가 나타났다. 비형은 땅 속에

있는 것을 도깨비불로 구운 것이다. 익은 고기를 뜯으며, 케이건은 도깨

비가 물 속에서도 불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야기가 허무맹랑한 전설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케이건은 자신 또한 유쾌하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케이건은 키보렌에 대해 호의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가  숲에 대해

가지는 감정은 단순하며 단단한 논리에 의해 도출된다. 케이건은 나가를

증오한다. 나가는 숲을 사랑한다. 따라서 케이건은 숲을 증오한다. 케이

건에게 세상의 모든 숲을 불태울 권한과  세상의 모든 나가를 불태울 권

한을 놓고 한 가지를  택하라고 말한다면 그는  주저없이 전자를 선택할

것이다. 숲을 불태우면 나가들에게 지독한 고통을 주게 되므로.

하지만 서녘으로 지는 해가 세상을 향해 마지막 빛을 뿌릴 때, 숲이 일

몰의 애가를 부르기 시작할 때, 숲의 머릿결 사이로 새어드는 주홍빛 광

선들이 질감을 가진 피륙처럼 허공을 미끄러질 때, 딱정벌레를 쓰다듬던

도깨비가 문득 돌아보며 익살맞은 미소를 지을 때, 케이건은 내일이라는

미지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었던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느꼈다. 식사를 마친 다음, 케이건은  쌍신검의 내력을 설명해달라는 비

형의 요구를 선선히 들어주며 그런 자신을 불가사의하게 느꼈다.

"오래 전, 검 한 자루에 만족하지 못했던 레콘 검사가 있었소. 그 레콘

은 신발도 두 짝이고 장갑도 두 짝이니 칼도  두 자루를 써야 한다고 생

각했지. 그래서 그는 최후의 대장간에서 자신을  위해 두 자루의 아름다

운 검을 만들었소."

티나한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정벌레는  웅크리고 있었고

비형은 그 거대한 몸에 기대어 앉은 채 케이건을 마주보고 있었다. 타오

르는 저녁 속에 열대의 밀림은 붉게  변색된 그림처럼 보였고 풍경의 깊

이감은 황당하리만큼 무시되고 있었다.

"그 칼들의 이름은 각자 해바라기와 달바라기였소. 그 레콘은 그 두 자

루의 검으로 적들을 물리치고  위대한 일들을 이룩했소.  무수한 레콘을

쓰러뜨려 레콘 미녀들을 쟁취했고 사악한  두억시니들 중에서도 가장 무

서운 것들을 물리쳤소. 결국 그는 자신이 왕이 되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

었소. 그것은 레콘에 의해 건설된 처음이자 마지막 왕국이었소. 왕은 책

임감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소. 그는 해바라기와 달바라기를 칼집에 꽂

아놓은 다음 왕국을 다스렸지. 하지만 시간의  흐름은 왕을 비껴가지 않

았고 왕은 늙어갔소. 그러자 나가들이 노왕의 땅을 탐내게 되었소. 나가

들은 노왕의 땅에 숲을 만들고자 했지. 노왕의 위대한 전설을 알고 있었

지만, 나가들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었소.  노왕에겐 왕자가 없었거든.

아들을 낳지 못한 것은 아니오. 하지만 그 아들들은 왕의 곁에 남아있지

않았지."

티나한은 알 것 같았다. 가문의 이름을 잇는 것은 나가와 인간 뿐이다.

레콘의 경우엔,

"모두들 신부를 찾아 떠나갔군?"

"그렇소. 당신네 레콘들이 왕국을 건설할 수 없는 까닭이 그것이지. 또

한 당신네들의 일원의 이야기를 인간인  나에게 들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 왕에겐 신하들이 있었을 텐데? 그 신하들은… 아!"

"그렇소. 인간이나 도깨비였지. 그들은 왕을 좋아했지만 왕처럼 강하진

않았소. 하지만 왕의 적은 불사의  나가들이었소. 그래서 노왕은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일어섰소. 그가 전장에 나섰을 때 나가들은 왕

이 노쇠했다고 말할 수 없었소. 나가의  역사에서 그런 치욕적인 패배는

다시는 없었을 거요. 트집잡기  좋아하는 자들은 전쟁터가  너무 추웠다

고, 그러니까 나가들이 정상적인 움직임을 취할  수 없을 정도의 기온이

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런  자들도 왕의 위대함을  폄하할 수는 없을

거요. 하지만 그 전투에서 왕은 한 손을 잃고 말았소. 어떤 믿기 어려운

전설에 따르면, 한 용맹한 나가가 검을  쥔 왕의 손을 삼켜버렸고, 왕은

자신의 손목과 함께 나가의 목을 베었다고 하더군요."

비형은 그 광경을 상상해보며 묘한 숨소리를 내었다. 케이건은 계속 말

했다.

"어쨌든 왕은 자신의 두 자루 검을 쓸  수 없게 되었소. 하지만 노왕은

그것 중 하나를 선택하거나 할 수는 없었소. 그 칼들은 왕의 인생이었으

니까. 그는 레콘이었소. 아마도  가장 레콘다운 레콘이었을  거요. 그가

세운 왕국보다 그 두 자루의 검이 진실로 왕이 살아온 나날에 대한 증거

물이었소. 그리고 그가 획득했던 무수한 미녀들보다  그 두 자루의 검이

참된 왕의 반려였소."

티나한은 자신의 철창을 돌아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렇소. 왕은 두 자루의 검을 들고 다시  최후의 대장간을 찾았소. 티

나한 당신은 잘 알겠지만 최후의 대장간은 단 한 번만 무기를 만들어 주

지. 두 번째는 없소. 하지만 왕의  요구는 두 번째의 무기를 만들어달라

는 것이 아니었소. 해바라기와 달바라기를 하나로 합쳐달라는 것이었소.

최후의 대장장이는 그 요구를  수락했지. 완성된 검은,  두 개의 검신을

가졌지만 한 손으로 쓸 수 있도록 하나의 칼자루를 가진 모습이 되었소.

만족한 왕은 그 검을 바라기라 불렀소.  그것이 이 검이오. 왕의 자존심

이지."

세 명의 이야깃꾼은 도깨비를 죽일 수 있다.  이야기에 잔뜩 도취된 비

형은 침을 삼키며 말했다.

"그 왕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늙어 죽었소. 모든 이들이 왕이 죽으면  왕국이 산산조각날 거라고 믿

었지만 그렇게 되진 않았소. 왕의 부하들 중 인간 한 명이 그 왕국을 이

어받아 다스렸고, 놀랍게도 왕국은 그  이후로 오랫동안 이어졌소. 하지

만 끝내 나가들의 무자비한 공격 앞에 무너졌지. 지금은 나가들의 숲 아

래로 사라져 왕국의 흔적조차 찾기 어렵소. 남은 것은 그 무엇 앞에서도

물러설 줄 몰랐던 영웅왕에게 헌정된 노래들과 이 바라기뿐이오."

비형은 그 익숙한 이름에 놀랐다.

"영웅왕! 그 레콘 왕이 바로 영웅왕이었군요. 그럼 그게 영웅왕의 검입

니까?"

"그렇소."

"그럼 자그마치 1,500년 전의 칼일 텐데? 어떻게 아직까지 그렇게 완벽

한 상태인 거죠?"

케이건이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티나한이  자신의 철창을 가리키며 말

했다.

"최후의 대장간에서 만들어지는 무기는 관리만  잘 하면 거의 영구적으

로 쓸 수 있어. 그러니 평생 동안 한 자루만 만들어줘도 충분한 거지."

고개를 끄덕이던 도깨비는 문득 인간의 얼굴을  보았고 그 시선은 그대

로 고정되고 말았다. 케이건은  나무 밑둥에 기대어  앉아있었고 가냘픈

햇빛 한 자락이 그의 턱과 가슴을  비스듬히 가로지르고 있었다. 케이건

의 엄격한 시선은 흙투성이 발을 내려다보는  듯했지만, 동시에 더 이상

올려다볼 것 없는 남자의 시선처럼 보이기도 했다. 비형은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묘한 기분 속에서 질문했다.

"당신은 누굽니까?"

케이건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세파를 타넘는 사소한 재주로 나날을

버티는 거칠고 지친 방랑자로 돌아왔다.

"나는 케이건 드라카요."

비형은 단순히 그것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비형의 그런 생

각은 다음날 새벽에 확인되었다. 새벽녘,  티나한과 비형은 드디어 나가

를 목격하게 되었다.

하인샤 대사원에 밤이 찾아들었다.

더 이상 죽편의 글씨를 알아볼 수 없었기에 쥬타기 대선사는 불평 섞인

한숨을 내쉬며 등불을 더듬었다. 엄지와 검지로 심지를 붙잡은 대선사는

그것을 빠르게 비볐다. 곧 심지에선 불꽃이 피어올랐다. 방 안이 충분히

밝아지자 대선사는 다시 서안 위에 놓인 죽편을 들여다보았다.

고대의 신비스러운 기술로 처리된 죽편은 까마득한 옛날의 지식을 완벽

한 상태로 보존하고 있었다. 실전된 기술을 복원하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처지기에 사제들은 죽편의 놀라운 내구성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사제들은 게으른 자들이 아니며, 언젠가  죽편이 망가질 때를 대비

하여 많은 필사본들을 만들어둔다. 하지만 지금 대선사가 들여다보고 있

는 죽편은 감히 복사할 생각도 떠올릴 수 없는 물건이다. 그렇기에 죽편

을 만지는 대선사의 손길은 조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문밖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선사님. 오레놀입니다."

"들어오거라."

미닫이 문이 옆으로 미끄러지며 오레놀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대덕(大德)의 법계를 가지고  있는 젊은 천재이건만  대선사의 앞에서는

마치 행자라도 된 듯이  행동하는 오레놀을 보며  대선사는 미소를 지었

다. 하지만 오레놀의 손에는 커다란 단지  같은 것이 들려있었고 그것을

본 대선사는 긴장했다. 오레놀은 단지를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뱀들이 요동을 치고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거라."

대선사는 죽편을 조심스럽게 말아놓은 다음 서안을 통채로 옆으로 치웠

다. 대선사의 준비가 끝나자 오레놀은 단지의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바

닥에 쏟았다.

단지에서 검게 번득이는 뱀들이 뒤엉켜  쏟아졌다. 한결같이 맹독을 자

랑하는 뱀들은 방바닥을 기며 배를 뒤집고  몸을 또아리 틀고 서로 깨물

기까지 했다. 오레놀의 말처럼 뱀들은 요동을 치고 있었다. 뱀들이 쥬타

기 대선사와 오레놀의 방향으로  움직이려 할 때  대선사가 빠르게 말했

다.

"보여다오."

뱀들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스르륵 움직였다. 방바닥과 뱀의 배가 마찰

하며 가느다란 소리가 쉼없이  울려퍼졌다. 차츰 뱀들의  움직임이 어떤

무늬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계속 움직이고  중복되거나 끊어지기도 했지

만, 무엇을 보아야 할지 알고 있는 자에게  그 무늬가 전하는 바는 분명

했다. 사어(蛇語)를 읽을 줄 아는 오레놀은  경악한 얼굴로 대선사를 바

라보았다.

"그들의 수련자가 죽었군요!"

"…뱀들을 단속하거라."

맡은 바 소임을 다한  뱀들은 기세가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오레놀이

황급히 단지 주둥이를 바닥에 기울이자  뱀들은 단지 안으로 기어들어갔

다. 오레놀은 뚜껑을 닫은 다음  대선사를 바라보았다. 쥬타기 대선사는

고통에 가까운 표정으로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모든 가능성을 고려하고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고 생각했건만, 적출공

포증 나가라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혹 거짓말이 아닐까요? 그쪽에서 겁을 먹었다거나…"

"애초에 이 일을 제안한 것이 세리스마였다. 함부로 의심할 수는 없지.

그리고, 너무 황당한 일이다보니 오히려 그럴 듯하게 느껴지는군."

"그렇다면 어찌해야 됩니까? 1년을 더 기다릴 수 있을까요?"

쥬타기 대선사는 이맛살을 찡그리며 염주를 집어들었다. 어디에도 없는

신께 바치는 기도문이 섬세하게 새겨진 염주는  그 구슬을 한 번 헤아릴

때마다 신께 기도를 한 번 올리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염주를 헤

아리던 대선사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보다 더 급한 문제가 있군. 구출대는 이미 출발했을 것이다. 사지로

들어간 그들에게 연락을 보낼 방법이 없구나."

"과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케이건 드라카 님이 함께 가지 않

습니까?"

"글쎄다. 그 수련자가 다른 곳도 아닌 심장탑  안에서 죽을 줄 누가 상

상했겠느냐? 나가들에게 불사를 부여하는 심장탑이 그의 무덤이 되다니,

참으로 얄궂은 일이다. 일이 이렇게 되니  나는 케이건까지도 잃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드는구나. 게다가 상황이 바뀌었다."

"상황이 바뀌다니오?"

"정찰이 강화될 테지. 그 수련자를 살해한 나가가 키보렌으로 도망쳤다

고 하지 않느냐."

오레놀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쥬타기 대선사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사람들은 바라기의 두  칼날은 나가와 두억시니의  손으로부터 주인을

보호한다고들 말하지. 그런 종류의 말들은  언제나 사실을 말한다기보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의미가 더 강하지.  나도 그렇게 되기를 바래야

겠구나. 영웅왕의 검이 나가들로부터 그 주인을 보호하길."

"도깨비도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대선사님. 흔히들 나가 잡는 건 도깨

비라고 하잖습니까. 도깨비가 요술쟁이니만큼 그들은 안전할 겁니다."

오레놀은 풀이 죽은 대선사를 위로하기 위해 밝게 말했다. 하지만 대선

사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도깨비가 페시론 섬에서처럼 불놀이라도 시작했다간 키보렌

의 나가 정찰대원을 다 끌어들이게 될 거다. 케이건이 신경써야 되는 건

나가 뿐만이 아닐걸."

케이건은 비형이나 티나한이 나가 정찰대에 대해 걱정하는 것보다는 훨

씬 덜 걱정하고 있었다. 이유를 묻는  두 사람에게 케이건은 '눈은 앞만

보고 귀는 사방을 듣는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의 주장은 사실로 증명

되었다.

한밤의 암흑 속에서 누구보다 유리한 것은 나가다.  다른 세 종족은 나

가가 코끝까지 접근해도 볼 수 없지만  나가는 수 킬로미터 밖에서도 다

른 세 종족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 키보렌에서는 사정이

조금 달랐는데, 빽빽한 나무들이 시계를 수 미터까지 줄여버리기 때문에

나가의 눈으로도 다른 종족들을 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나무들은 소리를

감추지는 않으며, 그래서 불침번을  서고 있던 케이건은  나가 정찰대가

백 미터 거리까지 접근했을 때 그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케이건은

재빨리 다른 두 일행을 깨웠다. 놀랍게도 케이건은 고함을 질렀다.

"일어나시오! 나가들이 다가오고 있소."

기겁한 두 사람은 헐레벌떡  일어났다. 케이건은 다시 소리  높이 외쳤

다. "천천히 움직이시오! 흥분해서 체온을 높일  필요는 없소." 잠이 덜

깬 두 사람은 한참 동안 허둥댄 다음에야 겨우 케이건이 그런 내용의 주

의를 줬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케이건이 굳이  소리를 낮추려들지

않는 이유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티나한에겐 아직 케이건 같은 여

유가 없었다.

"젠장! 어디서 다가오고 있나?"

"뭐라고 했소? 속삭이지 마시오. 잘 안 들리니까."

"어디서 다가오냐고 물었어."

티나한은 겨우 소리를 높였지만 그 목소리는  보통 말하는 정도에도 미

치지 못했다. 주위가 캄캄했기에 케이건은 티나한의  손을 잡아 직접 방

향을 가르쳐준 다음 말했다.

"나를 따라오시오. 비형, 당신 딱정벌레를 챙겨요."

그리고 케이건은 앞장서서 걸어갔다. 마음이 조급했던 티나한은 케이건

의 뒤를 급히 따라가다가 하마터면 케이건을  밀어 넘어뜨릴 뻔했다. 화

를 낼 법도 하지만, 케이건은 진력내는 기색도  없이 다시 그 특유의 친

절한 어조로 말했다. "천천히 걸으시오, 티나한." 티나한은 수염볏을 빨

갛게 부풀린 채 걸음을 늦췄다. 그리고 비형과 딱정벌레 나늬가 그 뒤를

따랐다.

그 후 한 시간 동안 티나한과 비형,  나늬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케이건은, 비형의 표현을 따르자면 달팽이와의  불꽃 튀는 접전이 예상

되는 속도로 움직였다. 나가 정찰대가 지척까지  이른 상태에서 걷는 것

치고는 느려도 너무 느렸다.  티나한과 비형은 애가  타들어갈 지경이었

다. 하지만 케이건은 추적당하고 있다는 것,  밤이라 앞이 잘 보이지 않

는다는 것, 숲이라는 것 등을 고려하면  체온이 상승할 가능성이 평소보

다 훨씬 높으며, 따라서  이 이상 빠르게 움직일  필요는 없다고 말하며

그 느린 속도를 고집했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케이건은 주변의  나무를 걷어차기 시작했다. 케

이건이 처음 나무를 걷어찼을  때 티나한은 소스라치게  놀라 속삭였다.

"조심해!" 티나한은 그것이 케이건의 실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케이건

은 조금 후 다시 나무를 걷어찼다. 경악  때문에 세 배로 부푼 티나한은

케이건의 어깨를 움켜쥐곤 잔뜩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빌어먹을, 뭐 하는 짓이야!"

"뭐라 하셨소? 속삭이지 마시오, 티나한."

"무슨 정신나간 짓거리냐고 물었다!"

"우리 주위에 있을 야행성 동물들을  위협해서 사방으로 도망치게 하고

있소. 그 '뜨거운' 생물들은  나가들의 눈을 현혹할  수 있으니까. 이제

어깨 좀 놔주겠소?"

케이건은 밀림에 들어오기 전 몇번씩이나  들려주었던 설명을 언성조차

높이지 않은 채 차분하게 반복했다. 그제야  그런 설명을 들었다는 것을

떠올린 티나한은 벼슬을 붉히며  케이건의 어깨를 놓았다.  다시 걸음을

떼게 된 케이건은 일행의 후미를 따르는 비형에게 내키면 노래를 불러도

좋다고 제안했지만 비형은 도저히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케

이건은 혼자서 나무를 걷어차고 박수를 치며 소동을 일으켰고, 티나한과

비형, 나늬는 남은 수명이 뭉텅뭉텅 잘려나가는  기분을 느끼며 그 뒤를

따라걸었다.

신경이 잔뜩 곤두선 다른 일행들이 기절할  지경이 되었을 때 케이건은

그 소란스럽고 느리디 느린 도피행을  중단시켰다. 일출이 가까워졌는지

주위의 사물이 훨씬 잘 보였고, 그래서  티나한과 비형은 자신들이 높은

벼랑 아래쪽에 멈춰서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티나한의 깃털은 엉망으로

뒤엉켜 있었고 비형은 호흡 곤란까지 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벼랑을 올려다보며 단조롭게 말했다.

"곤란하군."

티나한과 비형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표정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은 벼랑을 올려다보다가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곧 오른

쪽으로 걸어갔다. 티나한은 더 질문을 참을 수 없었다.

"뭐가 곤란하게 된 거냐? 들킨 거야?"

"아니오. 그들은 우리를 발견하지 못했소. 하지만 내가 방향을 잘못 잡

았소. 그 나가들은 이 벼랑으로 오고  있었던 모양이오. 그들과 벼랑 사

이에 우연히 우리가 있었던 모양이오."

"벼랑으로 온다고? 왜?"

"좀 있으면 알게 될 거요." 그리고 케이건은  뒤쪽을 향해 귀를 기울였

다. "서두릅시다. 가까이 왔소."

비형과 티나한도 여러 사람이 걸어오고 있는 듯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

다. 티나한은 잔뜩 긴장하여 철창을 움켜쥐었지만 케이건은 서두르지 않

았다. 마지막까지 천천히 걸어가던 케이건은 벼랑 아래쪽의 우묵한 곳을

발견하자 그 아래에 주저앉았다.

"앉으시오. 나가들은 아까 거기서 왼쪽으로 갈 거요."

비형은 뒤를 흘끔흘끔 쳐다보며 질문했다.

"왼쪽으로? 왜지요?"

"그쪽으로 해야 벼랑 위로 올라갈 수  있겠더군. 그리고 그쪽이 동쪽이

고. 그들은 그 벼랑 위로 올라갈 생각이었을 거요. 여기 있으면 벼랑 위

에선 보이지 않을 거요. 앉읍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앉기  어려웠다. 두 사람은 초조한  듯 케이건과 숲,

그리고 벼랑 위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케이건은 그런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숲이 한층 환해졌을 때 티나한이 그들을 발견했다.

티나한은 벼랑에 몸을 바짝 붙이더니 숨이 멎는 표정으로 벼랑 위를 쳐

다보았다. 비형은 티나한을 따라 벼랑 위를 쳐다보았고, 역시 벼랑에 찰

싹 달라붙었다.

벼랑 위에는 여섯 명의 나가들이 동쪽 하늘을 보며 서있었다.

비형과 티나한은 생전 처음으로 나가를 보게 되었다. 키는 도깨비나 레

콘보다는 인간과 비슷할 정도로  작았다. 비늘이 뒤덮인  몸은 이국적인

옷에 의해 가려져 있었다. 변온동물인 나가들에게 체온을 보존하는 옷의

의미는 필요없었기에 나가의 의복은 티나한과  비형에게 퍽 기이하고 복

잡하게 보였다. 다른 종족들의 옷은 아무리  화려하다 하더라도 몇 가지

기본적인 제약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쨌든 인간과 도깨비와 레콘는 상

의와 하의를 입을 뿐이지 좌의나 우의, 혹은 전의나 후의라고 불러야 할

만한 옷은 알지도 못한다. 벼랑  위에 서 있는 여섯  명의 나가를 보며,

도깨비와 레콘은 여섯 명의 사람이 아니라 심오하고 복잡한 의미를 애써

표현한 여섯 개의 상징물을 보는 기분을 느꼈다.

나가들과 그들 사이의 거리는 직선으로 오십  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았

다. 두려움 속에서 비형과 티나한은 케이건이  왜 그들을 서쪽으로 데려

왔는지 깨달았다. 동쪽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나가들은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고개를 뒤로 돌리기만 해도 그들을 발견할 수 있을 테지

만 나가들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동쪽만 바라보았다.

비형과 티나한이 홀린 듯 나가를 올려다보고  있을 때 케이건이 느닷없

이 말했다.

"햇빛을 받는 거요."

비형과 티나한은 기절할 만큼 놀랐다. 하지만 벼랑 위의 나가들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케이건은 일어나 그들과 함께 나가를 올려다보며 말했

다.

"햇빛을 받아 체온을 높이려는 거요."

비형은 작은 탄성을 질렀다. 햇빛을 받으려면 당연히 벼랑 위처럼 노출

된 곳이 좋을 것이다.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케이건을 돌아본 비형은

케이건의 표정에 놀라고 말았다.

그것은 비형이 익숙한 얼굴, 즉 동료들의 어떤 멍청한 행동이나 말에도

짜증을 내거나 자제력을 잃지 않은 채 차분하게 설명해주곤 하던 케이건

의 얼굴이 아니었다. 나가들의  등 뒤에 숨어 그들을  노려보고 있는 그

얼굴은 육식동물의 얼굴이었다.

비형은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케이건은 살코기를 먹는 야수였다.

천천히 세어서 열까지 세었을 무렵,  케이건은 살기등등한 안광을 거둔

다음 조용히 몸을 돌렸다. 비형과 티나한은 주뼛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불안 때문에 그들은 자꾸 뒤를 돌아보았지만 나가들은 여전히 하늘만 바

라보고 있었다.

케이건은 그날 하루 종일 입을 열지 않았다.

키보렌은 나가에 의해 조성된  나가를 위한 땅이며, 난생  처음 야외로

나온 나가조차도 키보렌에서는 충분히 살아갈 수 있었다. 계속해서 북쪽

으로 걸어가면서, 륜은 약간의  시행착오 후에 자신이  먹은 음식물로서

지탱할 수 있는 나날들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나가가 어느

정도의 생물까지 삼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큰개미핥기를 삼켜야 했을 때 륜은  반신반의하는 상태였다. 하지만 정

찰대에 대한 공포와, 무엇보다도 화리트의 유언  때문에 륜은 잠시도 멈

출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큰개미핥기는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유혹이

었다. 륜은 큰개미핥기의 조그마한 입을 보며  그것이 크게 위험하지 않

은 동물일 거라 여겼다.

하지만 이 거대한 곤충포식자는 그 식습관과 달리 사나운 동물이다. 륜

의 예상대로 큰개미핥기는 륜을  물어뜯지는 않았다. 이빨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미집을 파헤치는 그 앞발의  발톱은 다른 맹수의 이

빨만큼이나 무서운 무기다. 륜은 하마터면 허벅지가 찢어질 뻔한 위기를

겪으면서 가까스로 사이커를 휘두를 수 있었다.

큰개미핥기가 죽은 다음 륜은 자신의 두번째 실수를 알게 되었다. 큰개

미핥기는 숲의 동물들 중 그 재미있는 생김새로뿐만이 아니라 그 지독한

악취로도 유명한 동물이다.

굶주림 때문에 륜은 모진 결심을 했다. 륜은 늘어진 큰개미핥기를 머리

부터 삼키기 시작했다. 턱이 찢어질 듯  아팠고 개미핥기의 뻣뻣한 털들

은 목구멍을 사정없이 찔렀다. 또한 악취 때문에 거의 질식할 지경이 되

었다. 하지만 륜은 끝내 큰개미핥기를 삼킬 수 있었다. 엄청나게 늘어난

몸 때문에 잠시 동안 걷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했지만, 그 거대한 동물을

삼킨 덕분에 륜은 엿새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걸어갈 수 있었다. 그

리고 엿새 동안 계속해서 두려움에 시달려야 했다.

륜은 자신 또한 다른 나가에게 '삼켜질' 수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납득

했다.

변온동물은 주위의 온도에 따라 체온이  변한다. 하지만 변온동물의 체

온이 주위의 온도와 완전히 같지는 않다.  격렬한 움직임 후에는 변온동

물도 주위의 온도보다 약간 높은 체온을 띠게 된다. 그리고 계속해서 박

동하는 심장은 일정한 열을 발산한다. 쉼없이  걷고 있으며 또한 심장을

가지고 있는 륜은 나가의 시각으로  볼 때 환할 정도로  빛을 내고 있었

다. 심장이 두근거릴 때마다 륜은 소스라치며 가슴을 가렸고 물웅덩이를

지날 때마다 편집광적으로 진흙을  몸에 발랐다. 피와  이끼, 진흙 등이

엉겨붙은 입 주위로 파리들이 끝없이 날아들었지만 륜은 감히 몸을 씻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습격자는 륜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그를 포착했다.

원숭이들이 따라붙기 시작했을 때 륜은 의아한 기분을 느꼈다. 거의 대

부분의 야생동물은 육식성 맹수라 할 수  있는 나가를 피하게 마련이다.

처음 한두 마리가 나무 위에서 그를 노려볼 때만 해도 륜은 자신이 원숭

이의 영역권에 들어왔는가 하고 가볍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움직이자

원숭이들은 그를 따라 움직였다. 한두 마리였던 원숭이들은 차츰 불어났

고, 몇 시간 후 륜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난 원숭이를 보게 되었

다. 나무 위로만 뛰어다니던 원숭이들도  숫자가 불어나자 대담해졌는지

그 중 몇몇은 땅으로 내려오기까지 했다.  륜은 사이커를 뽑아 위협적으

로 휘둘렀지만 원숭이들은 달아나는 대신  멀찌감치 떨어진 자리에 서서

기다렸다. 그리고 륜이 발걸음을 옮기자 다시  원숭이들은 그 뒤를 뒤따

랐다.

마침내 륜은 제자리에 멈춰서서  원숭이들을 향해 난폭한  정신을 뿌렸

다. 륜이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원숭이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륜은 당황하며 원숭이들을 바라보았다. 원숭이들은  나무 위와 땅 위에

서 여전히 차갑고 위협적인 눈초리로 륜을  바라보았다. 그 중 도망치거

나, 하다못해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이는 녀석은 한 마리도 없었다.

륜은 이 황당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깨달

았다. 그래서, 잠시 후  수풀을 헤치며 나가  정찰대원들이 나타났을 때

륜은 공포를 느끼긴 했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정찰대원들은 모두 다섯이었다. 륜은 사이커를  왼손에 바꿔든 다음 그

것을 등 뒤로 돌린 채 정찰대원들을  응시했다. 정찰대원들은 륜을 보며

대단히 놀라는 기색이었다.

[나가잖아? 그런데, 심장이?]

륜은 도망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했다. 정찰대원들은 도시에서

보던 나가들과 전혀 다른 존재들처럼 보였다. 그녀들에겐 나가의 특징이

라고 할 수 있는 차가움이 많이 결여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의 눈을

들여다 본 륜은 생각을 바꿨다. 정찰대원들에게 냉혹함은 길이 잘 든 도

구처럼 소중히 갈무리되어 있을 뿐이었다.

정찰대원들은 아무런 의사교환 없이도 동시에 검을 뽑아들었다. 하지만

원숭이들에 의해 륜의 퇴로가 막혀있기  때문인지 곧장 달려들지는 않았

다. 대신 그녀들은 재미있다는 듯이 서로 정신을 나눴다.

[비에나가로군. 병신이야.]

[귀엽게 생겼는데.]

[저 꼬락서니가 귀엽다고? 남자면 다 귀엽게 보인다는 것이겠지?]

여자들은 농담을 나누며 한가롭기까지 한  태도로 륜을 관찰했다. 륜은

전력을 기울여 정신을  폐쇄하면서 동시에 필사적으로  누가 원숭이들의

억압자인지를 살폈다. 그 동안에도 여자들은  느긋하게 농담을 주고받았

다. 그 때 우두머리처럼 보이는 여자가 귀찮다는 듯이 닐렀다.

[시끄러워, 이것들아. 숲속을  너무 오래 돌아다니더니  모두 제정신이

아니군. 병신을 가지고 뭐하려고?]

[그래도 가지고 놀 수야 있잖아. 잠깐만. 이봐. 니를 줄 알아?]

륜은 사이커를 꽉 움켜쥐며 조심스럽게 닐렀다.

[할 줄 알아요.]

여자들은 감탄했다.

[와, 닐렀어! 완전히 병신은 아닌가 본데?]

하지만 우두머리는 더 피곤하다는 듯이 닐렀다.

[그럼 미친 놈이겠지. 그냥 죽여.]

[아깝잖아. 대장. 허물 세  번 벗을 동안 남자라곤  구경도 못했어. 좀

미친 거야 어때. 어차피,] 그녀는 자기  머리를 가리켜보였다. [이건 남

자에겐 별 쓸모도 없는 거잖아. 아래쪽에  있는 게 중요하지. 그리고 머

리가 빈 남자가 그건 쓸만하다던데?]

여자들은 다시 정신적 홍소를 터뜨렸고 대장이라 불린 여자도 쓴웃음을

지었다. 륜은 참기 어려운 기분을 느끼며 왼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뜻대로 되진 않을 겁니다!]

륜은 위협적으로 사이커를 내뻗었지만 여자들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들은 반항하는 것이 더 귀엽다느니 하며 낄낄거렸다. 하지만 대장은

이를 드러내며 한 여자를 돌아보았다.

[저건 좀 따갑겠는걸. 수디. 저거 치우게  해. 가지고 놀더라도 가시는

제거한 다음에…]

그 순간 륜은 행동을 개시했다.

왼손에 쥔 사이커에 여자들의 주의를 집중시키면서, 륜은 뒤로 돌린 오

른손으로 배낭 속의 알약을 꺼내어 든  상태였다. 대장이 수디라는 여인

을 돌아본 순간 륜은  그녀가 억압자인 것을  직감하며 오른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륜이 알약을 삼킬  때까지도 여인들은 륜이  울음을 터뜨리는

줄 착각하고는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륜이 땅을 박찼을 때 그녀

들의 미소는 싹 사라졌다.

그리고 륜 또한 소드락의 효과에 경악했다.

주관시간이 끔찍하게 가속되는 순간 륜은 대단히 느린 춤을 추는 것 같

은 여인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정찰대원들은  륜이 너무 빨랐기에, 그리

고 그녀들 가운데로 뛰어들었기에  륜을 제대로 공격하지  못했다. 느린

객관시간 속에 있는 그녀들이 발산하는  기괴한 니름에 전율하면서 륜은

대장의 다리를 벤 다음 수디의 등 뒤로 돌아갔다. 륜이 두 손으로 쥔 사

이커의 칼자루로 힘껏 수디의 뒤통수를 때릴 때까지도 수디는 채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그리고 륜이 칼을 다시 꽂은 다음 100 미터 이상 도망쳤

을 때 비로소 수디의 몸이 땅 위에 쓰러졌다.

가속된 움직임으로 있는 힘껏 때렸기 때문에 수디는 곧장 기절했다. 그

리고 륜이 기대하던 대로의 일이 일어났다. 정신억압에서 갑자기 풀려난

원숭이들이 일대 소동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원숭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도망쳤고 그 뜨거운 체온들의 격류

때문에 정찰대원들은 륜의 모습을 놓치고 말았다.  설령 륜의 모습을 포

착했다 하더라도 그녀들이 륜을 따라잡긴 어려웠을 것이다. 소드락의 지

속시간 동안 륜은 계속 달렸고, 마침내 17분이 지났을 때는 20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서 땅에 쓰러졌다. 그리고 륜은 요란하게 구토했다.

소드락의 후유증과 격렬한 움직임 때문에 륜의 체온은 대단히 상승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륜  주위의 공기들 또한 달궈졌고  그래서 륜의 눈에

들어오는 숲의 모습은 나가의 니름으로서만 표현될 수 있는 묘한 빛깔을

띠게 되었다.  세상은 분홍색에  가까운 번득임-스며듦-되튀김-그림자로

뒤덮여 있었다. 나무들은 보랏빛과 주홍색에 가까운 색깔로 타오르고 있

었고 그의 토사물은 황당하기 짝이 없는 빛깔로 춤추는 소용돌이였다.

개미핥기의 시체가 통째로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지독한

구토를 한 끝에, 륜은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륜

은 더 어처구니 없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괴이하게 생긴 땅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 땅은 검고 평평했으며 대리석처럼  매끈했다. 그리고 대리석 만큼이

나 딱딱하게 보였다. 하지만  륜은 그 땅이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검은 땅 어디에도 나무는 없었다. 대신 륜은 검은 지표면 아래로 어슴푸

레하게 비치는 불꽃들을 보았다. 륜은 일어나 앉아서 그 땅을 똑바로 바

라보았다. 하지만 검은 땅은 초점을 맞춰 보기 어려웠고 그 아래에서 얼

비치는 불빛들은 더욱 더 집중하여 보기  어려웠다. 자신이 어떤 알려지

지 않은 신의 땅이나 금단의 마법이  남아있는 땅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억측을 해 보며 륜은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발걸음을 떼면서 륜은

관절을 타고 흐르는 충격에 신음했다. 소드락의  가속 효과 때문에 륜의

몸은 지독히 혹사당한 상태였다. 다음 발을 더 조심스럽게 내딛고, 그리

고 한 발자국 더 걸어갔을 때 륜은 검은 땅 바로 앞에 서게 되었다.

륜은 발 바로 앞에  있는 검은 땅을 바라보았지만  도무지 초점을 맞출

수 없는 것은 여전했다. 륜은 무릎을 꿇은 다음, 멍청한 짓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하며 그 땅을 만져보았다.

그리고 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룬강이었다. 륜은 거대한 물과,  그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보고

있었다. 륜은 미소를 지으며 졸도했다.

강물 위를 구르는 빛들을 바라보던 케이건은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물은 온도를 삼키지. 그 나가에게 무룬강은  거대한 암흑처럼 보일 거

요."

비형은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했다.

"밤의 강물처럼?"

"비슷하오. 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소."

"어떻게 다르지요?"

"당신과 나는 바람을 볼 수 없소. 하지만  우리 눈에 바람이 검게 보이

진 않지. 바람 뒤편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나가는 물을

잘 보지 못하고, 깊은 물은  그 아래쪽에 있는 것을  가리지요. 그 둘의

차이를 생각해보시오."

비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이 마침내 무룬강에 도달한 것은 그들의  여행이 시작된지 스무 날

이 지난 후였다. 그 동안 그들은 나가 정찰대와  몇 번 더 마주쳤다. 하

지만 케이건은 언제나 나가 정찰대가 그들을 발견하기 전에 그들을 먼저

발견해서 일행을 대피시켰다. 한 번을 제외하면 위험한 사건은 없었다.

그 사건은 티나한이 불침번을 설 때 일어났다. 케이건은 티나한에게 철

창을 덩굴로 단단히 감싸두라고 지시했다. 티나한은 그 지시를 받아들였

지만, 두 사람이 잠자리에 들자 자신의 철창을 감아둔 덩굴을 풀고 오래

간만에 창을 잠시 손질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레콘다운 처사였다.

하지만 그것이 초저녁에 일어난 일이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간단히 말해

서, 낮 동안 햇빛을 잔뜩 받았던 그  철창은 나가의 눈에는 광선처럼 보

일 정도로 뜨거워져 있었다. 자연 속에는 7 미터나 되는 직선이 별로 없

으며 그것이 뜨겁다면 더욱 희귀한 것이 된다.

티나한이 두 사람을 깨웠을 때 나가들은 이미  그들을 시야에 둔 채 달

려오고 있었다. 일행은 이미 익숙해진  걸음걸이로 천천히 도망쳤다. 하

지만 케이건은 달려오는 발소리가 너무 빠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케이건

은 티나한을 돌아보았고 덩굴이 풀려있는  철창을 보자 순식간에 상황을

이해했다.

"포착되었소. 따라잡히겠군."

비형은 깜작 놀라서 외쳤다.

"그럼 달려야 합니까?"

"도깨비불로 기린을 만드시오."

"예?"

"기린 말이오. 기린 모양의 도깨비불을 만드시오."

비형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케이건의 말대로  했다. 비형의 작품을 본

케이건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예쁘긴 하지만, 나는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만한 것이 아니라

실물대의 기린을 원하오. 비형. 체온 정도의 온도로."

그제야 케이건의 의도를 이해한 비형은 케이건의 요구를 명쾌하게 충족

시키는 작품을 만들어내었다. 숲 한가운데서 갑자기 나타난 6 미터 크기

의 기린은 장관이라 할 만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사실적'이라고 말하긴

어려웠다. 어쨌든 비형은 박물학의 대가는  아니었고, 그래서 그가 만들

어낸 도깨비불은 어린애의 낙서처럼 엉성했다.  하지만 케이건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일행을 덤불 속에 숨으라고 지시했다.

잠시 후 나가들이 달려왔다. 케이건은 비형의 어깨를 툭 쳤다. "달리게

하시오." 비형은 나가들이 10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음에도 불구

하고 목소리를 조금도 낮추지 않는 케이건의  배짱에 혀를 내둘렀다. 비

형은 불꽃의 기린을 달리게 했다.

그리고 비형은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채 어쩔 줄  몰라했다. 나가들은

그 도깨비불을 흘끔 쳐다보고는 그냥 뒤로  돌아 걸어갔다. 인간이나 도

깨비의 눈으로 본다면 그  불꽃의 기린은 도저히  실제의 기린과 혼동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가들은 체온과  비슷한 온도의 그 도깨비

불을 보자 실제의 기린이라고 생각해버렸다. 나가들이 멀어진 것을 확인

한 케이건은 괴로워하는 비형에게 말했다.

"웃고 싶으면 웃어도 상관없소. 못 들으니까."

비형은 데굴데굴 구르며 웃었다. 티나한은 꽉 움켜쥐고 있던 철창을 느

슨하게 쥐며 왜 하필 기린이냐고 질문했다.  케이건은 철창과 비슷할 정

도로 긴 직선을 가진 동물은 뱀과 기린  정도인데, 뱀이 더 좋겠지만 뜨

겁지 않으니 남는 건 기린뿐이라고 대답했다.  그제야 뜨거운 철창이 말

썽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티나한은 두려움에  떨며 케이건의 반응을 기다

렸다. 티나한의 예상대로였다. 케이건은 화는커녕 짜증을 내는 기색조차

없이 단조롭게 말했다.

"덩굴을 풀고 싶다면 그  창이 충분히 식은 한밤중이  좋을 거요. 티나

한."

"…주의하지."

그 이후로 비형과 티나한은 실수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물론 실수를 좋

아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지만, 그들의  얼간이짓에 분노해야 할 케이건

이 도통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것은  불쌍한 도깨비와 레콘을 끔찍한 기분

에 젖어들게 하기 충분했다. 케이건은 출발하기 전 그가 하지 말라고 했

던 짓을 모조리 저지르는 두 사람을  보면서도 조용한 어조로 다시 주의

를 줄 뿐이었다. 그것은 두 사람에게 폭언이나 비난보다 더 끔찍했다.

그리고 비형은 풀기 어려운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케이건이 화를 내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그들에게 완전히 무관심한 경우

이거나, 아니면 보기 드문  관대함을 가지고 있는  경우. 비형은 전자의

경우로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케이건이 무관심하다면 그의 행동들에서는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한  특징들이 나타나야 할  것이다. 하지만

케이건은 언제나 나머지 일행에 대해 깊이 고려한 것이 분명한 행동만을

취하고 있었다.

야생 바나나 군락을 발견했을 때가 그런 경우였다. 비형과 티나한이 먹

을 것이 생겼으니 식사를 하며 쉬자고  주장할 때 케이건은 딱정벌레 나

늬를 흘깃 돌아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나나 나무는 갉아먹기 어

렵소. 바나나를 딴 다음  더 이동합시다. 저  딱정벌레가 먹을만한 것이

있는 곳에서 쉬도록 하지요." 그 말을  들었을 때 비형은 케이건이 언제

나 그들 전부에 대해 고려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를 채택할 경우 비형은  나가에 대한 케이건의 증오

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관대한 사람이 왜 나가에게는 관대하지 못

한 걸까? 무엇인가에 대해 많이 알면  알수록 그것을 증오하기 어렵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나가 자신을 제외한다면 그 누구보

다도 나가를 잘 알고 있을 케이건이 왜 나가를 그렇게 증오하는 것일까?

비형은 그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 대답을 찾지 못한 채 그들은 무룬강에 도달했다.

케이건은 강물을 바라보던 눈을 돌려 티나한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티나

한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누구와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

을 짓고 있었다. 저토록 거대한 강을  바라보는 레콘의 반응으로는 모범

적이라 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그래서  케이건은 티나한을 내버려둔 채

비형을 돌아보았다.

"암흑이라도 저런 거대한 암흑을 못 보고 지나칠 리는 없겠지. 이제 강

물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면서 노래가 들리는지 귀를 기울이면 될 거요."

"알겠습니다. 내려갈까요?"

"그 전에 부탁이 있소."

"예? 말씀만 하십시오! 무슨 부탁이죠?"

"앞으론 노래 좀 자제해주시오. 그 자의 노래를 들어야 하니까."

비형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시간 후, 비형은 물끄러

미 바라보는 케이건의 시선에 허둥거려야했다. "아차, 노래 부르지 말랬

지요?"

열대의 강물 위로 하야로비들이 무리지어 날았다.

강물 위로 뻗어간 기근들과  늘어진 덩굴들 때문에  어디서부터 땅이고

어디서부터 강인지 알아보는 것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강 가운데 만들어

진 사주엔 하마들이 몸을 기댄 채 게으르게 졸고 있었고 물빛 맑은 곳에

선 가끔 물고기들이 오가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

우 강은 그 넓이에 어울리는 거대한 깊이로써 햇빛을 하염없이 빨아들이

고 있었다. 도도하게 머리를 쳐들고 강을  가로지르는 뱀은 햇빛을 받아

녹주석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빛났고, 느닷없이  나타나 악어를 잡아채어

사라지는 왕독수리의 모습은 압도적일 정도의 장관이었다.

특히 비형은 왕독수리의 모습에 대단한 감명을 받은 듯했다. 보다 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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