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은루(銀淚) - 4
화리트는 죽이지 않고 떠난 비아스를 저주했다. 아마도 그녀는 그것을
원했을 것이다. 화리트가 그 자신의 피로 이루어진 웅덩이 속에 누워 고
통 속에서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길 원했을 것이다. 지금껏 욕설 삼아 니
르곤 했지만, 이제 화리트는 확실히 니를 수 있었다. 비아스는 완전히
미쳤다.
[죽고 싶지 않아… 제발, 누가 좀 도와줘!]
고통 때문에 정신이 집중되지 않았다. 화리트는 자신이 심장탑을 울리
기는커녕 주위에 있는 사람이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니름도 내기 어렵다
는 것을 깨달았다. 목소리를 내어볼까 했지만, 화리트는 그것이 쓸모없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차피 고함을 지를 정도의 힘도 없거니와 나가
들은 소리에 무관심하다. 화리트는 정신을 더 집중시키려 애썼다.
[살려줘, 제발! 살려줘요! 내가 죽어가고 있어. 살려줘요!]
하지만 아무 소득이 없었고 대신 정신을 집중할수록 고통만이 가중될
뿐이었다. 지독한 아픔 때문에 화리트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
다.
그 때 누군가의 정신이 그에게 다가왔다.
화리트는 앞을 보려 했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화리트는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가의 은루는 불신자들의 투명한
눈물과 달리 시야를 거의 가려버린다. 화리트는 은빛 암흑 속을 향해 외
쳤다.
[거기 누구 있어요? 살려줘요, 제발 살려줘요!]
[화리트. 나야. 륜이야.]
[륜? 륜이라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이 화리트의 눈가를 스쳤다. 은빛 암흑이 사라
지며 화리트는 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륜은 일그러진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폐쇄가 너무 길었어. 움직일 수가 없었어. 지금
에서야, 지금에서야 겨우 움직일 수 있게 되었어. 그래서 막지 못했어.
막을 수 있었는데. 미안해. 얼빠진, 멍청한 짓을 했어. 내가 막지 못했
어!]
화리트는 륜이 무슨 니름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물어볼 필
요는 없었다. 지금껏 억압되어 있었던 륜의 정신은 개방되자마자 폭풍
같은 기세로 화리트에게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가장 내밀한 부분까
지, 의식적으로는 열 수도 없는 부분까지 완전히 열려버린 륜의 정신을
느끼며 화리트는 숨을 급히 들이켰다.
화리트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륜이 왜 도망쳤는지. 그리고 륜이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 정신폐쇄의
후유증 때문에 움직일 수 없어 친구가 공격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었던
륜의 마음 속에는 자괴감이 가득했고, 그것을 본 화리트는 절대로 륜을
탓할 수 없었다. 니름이나 글이 아닌 정신 그 자체를 보았기에 거기엔
완전한 이해만이 있었다.
화리트는 이해했다.
그리고 화리트는 다른 것들도 이해했다. 공포와 혼란에 빠져있던 륜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정리할 수 없었지만 화리트는 자신의 누나가 어
떻게 살인 계획을 짰는지 알 수 있었다. 화리트는 자신이 본 것처럼 유
벡스의 시체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고, 다시 한번 비아스의 잔인함에 치
를 떨었다.
그 순간 화리트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륜의 정신이 완전히 열려버린
까닭에 화리트는 륜의 모든 것을 알게 되었고, 심지어 륜의 시야까지도
공유하고 있었다. 화리트는 륜의 눈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화리트는 공황 상태에 빠져드는 대신
오히려 더 침착해졌다. 혼란에 빠진 륜의 정신과 직접 부딪힌 덕분이다.
화리트는 침착하게 륜의 시각을 이용했고 자신이 살아나기 어렵겠다는
판단을 내리는 순간에도 거의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
냉정 속에서, 화리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판단했다.
[륜. 내 니름 들어.]
[화리트, 미안해. 정말 잘못했어. 내가 막았어야 했는데. 왜 움직일 수
없었는지…]
[디듀스류노 라르간드 페이!]
륜은 흠칫하며 정신을 차렸다. 그 순간 륜은 무서운 공포를 느꼈다. 륜
은 '자신 속에 들어와서 화리트를 보고 있는 화리트'를 느꼈다.
그것은 피아가 혼란되고 안팎이 서로를 부정하며 결과가 원인을 구축하
는 순간이었다. 니름을 사용하기에 정신의 작용에 친숙한 나가에게도 그
순간의 혼란스러움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하지만 화리트는 륜이 공포에
빠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화리트는 륜의 정신에 고리를 걸고 륜의
정신 그 자체에 대한 지배권을 난폭하게 시도했다.
타인의 정신을 지배한다는 것은 마술의 영역에서나 가능한 일이지만,
그들은 나가였고, 또한 한쪽의 정신이 완벽하게 열려있었기에 그것은 어
느 정도 성립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륜은 공포 대신 머리가 깨질 듯
한 두통을 느꼈다. 륜은 신음을 흘렸다.
[이런 일이…]
[나도 가능할 줄은 몰랐어. 하지만 이 상황에 걸맞는 이론을 구성해볼
시간은 없어. 잘 들어. 디듀스류노 라르간드 페이.]
화리트는 의식적으로 륜에게 가장 권위있는 호칭을 사용했다.
[나는 살기 어려워. 그리고 넌 거기에 대해 조금도 책임을 느낄 필요가
없어. 반복하겠어.]
그리고 화리트는 놀라운 일을 해내었다. 화리트는 계속해서 륜에게 책
임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니름을 수없이 반복하며 동시에 다른 내용을
닐렀다. 륜은 넋이 빠진 채 한 사람이 니르는 두 개의 니름을 들었다.
[넌 내 죽음에 아무런 책임도 없 [내 니름을 잘 들어. 디듀스류노
어. 디듀스류노 라르간드 페이. 라르간드 페이. 나에겐 해야 할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 그 일이 하나 있어. 비아스는 그저
건 불가항력이었어. 넌 나를 돕길 증오하던 동생을 죽였다고 생각하
원했고 그걸로 나는 만족해. 더없 겠지만 그와 동시에 비아스는 내
이 고맙게 생각해. 넌 내 죽음에 사명까지도 파괴했어. 하지만 난
아무런 책임이 없어. 나를 죽인 비아스에게 내 목숨은 내주었을지
건 네가 아냐. 나를 죽인 건 비아 언정 내 사명까지 파괴하게 하지
스 마케로우야. 넌 책임이 없어. 는 않겠어. 그러니 너에게 부탁하
넌 책임이 없어. 넌 책임이 없 겠어. 내 사명을 대신 완수해줘.
어.] 내 마지막 부탁이야.]
화리트는 륜이 친구의 죽음을 방기했다는 죄책감에 평생토록 시달리는
것은 조금도 원하지 않았다. 륜은 경악을 느끼면서도 정신을 닫을 수는
없었다.
[부탁… 뭐지?]
륜의 죄책감을 완전히 억압했다는 자신이 들자 화리트는 다시 하나의
니름으로 닐렀다.
[북쪽으로, 계속 북쪽으로 달려가. 아주 거대한 강을 만날 거야. 무룬
강이지. 거기서 세 명의 불신자를 만나게 돼.]
[불신자라고!]
[그래. 도깨비와 인간, 레콘이야. 너를 안내할 자지. 노래를 불러야
해.]
화리트는 다시 정신을 둘로 나눠 자신이 배운 노래를 륜의 정신 속에
심어놓으며 닐렀다.
[그게 신호야. 그러면 그 불신자들이 너를 데리고 한계선을 넘을 거야.
내 배낭을 가져가. 그 속에 도움될 물건들이 있어. 하인샤 대사원의 쥬
타기 대선사(大禪師)를 만나. 그 인간이 해야할 일을 가르쳐줄 거야.]
륜은 이 충격적인 니름에 놀라 화리트를 바라보았다. 화리트는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네가 알고 있던 그 충실하고 보수적이고 언제나 도덕적인 니름
만 하는 수련자 화리트는 사실 음모꾼이야. 내 연기가 괜찮았어?]
[인간에게 무엇을… 왜?]
[부탁이야. 이건 나가를 위한 일이야. 길게 니를 시간이 없으니 간단히
니르겠어. 넌 한계선 이남엔 적이 없다고 닐렀지? 적은 심장탑에 있다고
닐렀지? 그 때 너는 요스비에 대한 일을 니른 것이겠지만,] 륜의 모든
정신을 들여다본 화리트는 요스비에 대한 사실들도 알고 있었다. [놀랍
게도 그 때 너는 진실을 니른 거야. 나가의 적은 심장탑에 있어.]
[나가의 적이…?]
[그래. 너는 인간들과 힘을 합쳐 나가의 적을 물리쳐야 해. 그건 너만
이 할 수 있어.]
[나만이? 어째서?]
화리트는 다시 한번 륜의 신명(神名)을 불렀다.
[왜냐 하면 넌 디듀스류노 라르간드 페이니까.]
륜은 굳은 얼굴로 화리트를 바라보았다. 고통 때문인지 화리트의 눈에
선 다시 은루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은 웃고 있었다.
[이건 수호자나 수련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발자국 없는 여신의 신
랑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네가 수련자가 아니라고 니르지 마. 디듀
스류노 라르간드 페이. 나는 네가 왜 수련자 지위를 반납했는지 항상 궁
금했어. 이젠 알겠군. 요스비 때문이었군.]
륜은 화리트가 요스비에 대해 안다는 사실에 충격받지 않았다. 충격받
을 만큼의 판단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를 죽인 건… 수호자들이었어.]
[그래. 그래서 더 이상 수련자로 있을 수 없었던 것이군.]
[맞아. 화리트. 맞아. 나는 견딜 수 없었어.]
[알겠어. 하지만 너는 신명을 받은 수련자였어. 넌 발자국 없는 여신의
이름을 알아. 너의 여신은 라르간드지. 라르간드라고 부르면, 넌 여신을
부를 수 있어. 네가 수련자건 아니건 상관없어. 여신이 네게 준 건 이름
이지 지위가 아니니까. 이름만이 중요한 거야.]
륜은 다시 충격을 받았다.
[정말이야?]
[그래. 네가 남아서 좀 더 공부를 했다면 알 수 있었을 거야. 넌 여신
을 부를 수 있어. 여신이 네게 이름을 줬으니까. 하인샤 대사원에 가서
해야할 일도 바로 그것과 관련이 있지. 그러니 너에겐 자격이 있어. 게
다가…]
화리트는 고통어린 미소를 지었다.
[너는 내 친구야. 다른 자격자를 찾을 수 없는 이런 난처한 상황에서
너처럼 자격도 있고 믿을 수도 있는 사람이 있다니, 나는 정말 행운아인
것 같군.]
륜의 눈 앞에 은빛이 흐렸다. 무심코 화리트의 눈을 닦으려 했던 륜은
그 은빛 눈물이 자신의 눈에서 흘러나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화리트는 피로한 정신으로 닐렀다.
[이제 가.]
[화리트, 일어나야 돼. 넌 나을 수 있어. 사람들을 부르겠어.]
[안돼.]
화리트는 자신이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는 의미로 닐렀지만, 륜은 사람
을 불러서는 안된다는 니름으로 알아들었다. 아직까지도 륜의 정신은 열
려있었고 그래서 화리트는 륜의 오해를 알아차렸다. 하지만 화리트는 그
오해를 해소하지 않았다. 그는 너무 피곤했다. 다른 것을 더 원하지도
않았다.
마지막 힘을 짜내어, 화리트는 륜이 거부할 수 없는 지배력을 행사했
다.
[가! 디듀스류노 라르간드 페이!]
륜은 벌떡 일어나 문쪽으로 달려나갔다.
홀로 남게 된 화리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등의 고통도 더 이상 느껴
지지 않았다. 어떤 추위 같은 것이 사방에서 그의 몸 속으로 스며들어왔
지만 화리트는 그 추위가 포근하다고 생각했다.
화리트는 자신이 륜을 이용했음을 알고 있었다. 그 순간 화리트에게 사
명의 중요성 같은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설령 화리트는 륜이 실패한
다 하더라도 별로 아쉽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그는 성공 여부를 알지도
못할 것이다.
화리트가 원했던 것은 자신의 삶과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뿐이었
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는. 그것은 죽음의 공포 앞에 위엄을
지킬 수 있는 화리트의 도구였다.
그래서 화리트는 공포 없이 침착하게 자신의 여신을 부를 수 있었다.
세파빌, 나의 여신이여.
화리트는 시야 안쪽에서 무엇인가가 어른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희게 빛나고 있었으며 동시에 암흑이었다. 다시 은빛 눈물이 동공을 덮
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화리트는 그렇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화리트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 빛나면서도 어두운 어른거림을 향해 미
소지었다.
심장탑의 깊숙한 곳. 아니, 높은 곳.
일반적으로 은밀한 곳은 지하나 혹은 그 비슷한 곳에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200 미터라는 압도적인 높이의 심장탑의 경우에는 높은 곳일수록
은밀하다. 그 누구도 올라가는 데만 몇 시간이 걸리는 심장탑 상층부에
대수롭잖은 일로 올라가지는 않는다. 따라서 지금 심장탑 55층의 조그마
한 방에 모여있는 세 사람의 경우 그들의 회합이 은밀한 것임은 더없이
분명하다. 55층을 걸어오르는 일을 감수한 회합이므로.
그런 희생은, 그러나 그들 중 두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일이다. 마지막
한 사람의 경우에는 다른 두 사람이 겪어야 했던 고생을 겪지 않았다.
왜냐하면 55층의 그 방은 그 사람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막
강한 힘의 소유자임을 짐작하기 위해서 꼭 나가의 문화와 관습과 역사에
정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른 자들로 하여금 55층을 걸어 올라오게
하는 자가 가진 권력의 크기를 짐작하기 위해선 사람의 보편적 상식이면
충분하다.
그 방의 주인, 수호자 세리스마는 가장 위대한 수호자들 중 한 사람이
었다. 냉혹의 도시 하텐그라쥬의 수호자들 중에서도 가장 존경받는 수호
자에 속하는 그는 실로 55층에 거주할 만한 자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55
층을 걸어내려간 것도 벌써 십수년 전이다. 풍부한 빗물이 그의 식수였
고 한 달에 한번씩 불운한 수련자들이 다 죽어가는 얼굴을 한 채 가져다
주는, 역시 다 죽어가는 얼굴을 한 염소나 양, 송아지, 사슴 등이 그의
양식이었다. 세리스마는 참으로 위대한 수호자인 것이다.
하지만 그 위대한 세리스마는 지금 몹시 불행한 얼굴을 한 채 두 명의
방문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명의 방문자들 또한 편찮은 얼굴이었다. 물론 이 끔찍한 높이를 걸
어올라왔으니 세상에 다시없는 낙천주의자라 하더라도 좀 불편한 기색을
띄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형이하학적인 고민거리 이외
에 그들은 형이상학적인 고민거리도 넘치도록 가지고 있었다.
두 명의 방문자 중 한 명인 스바치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보고를 계속했
다.
[숲에서 옷과 책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조사자들은 그 옷과 책이 물
에 적셔졌던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 어린 살인자 녀석은 심장 앞에 젖은
책을 대고 젖은 옷까지 걸친 다음 적출식을 마친 나가들과 함께 자연스
럽게 나왔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심장을 적출하지 않았다는 것을 들키지
않았겠지요.]
보고를 듣던 수호자 세리스마는 스바치의 얼굴을 보며 닐렀다.
[그런데 자네는 왜 그렇게 곤혹스러워 하는 거지?]
[너무 이상합니다. 그 륜 페이라는 녀석이 적출공포증 기미를 보였다는
것은 저와 카루도 눈으로 확인한 바입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앞뒤가
안 맞습니다.]
스바치 옆에 서있던 카루 역시 그 니름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리스마는 닐렀다.
[설명해 보게.]
[사건을 시간대 순으로 다시 정리해보겠습니다. 먼저 홀에 있던 륜 페
이가 도망쳤습니다. 공포에 질린 것처럼 정신없는 모습이었지요. 많은
사람들이 그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화리트 마케로우가
홀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화리트는 다른 사람들이 신경쓰지 않는 사이
에 어디론가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적출식이 끝난 후 수호자들이 특수
도서실에서 화리트와 유벡스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수호자들이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륜 페이는 적출공포증에 빠져서 특수 도서실에 숨
어있다가 다른 자들과 뒤섞여 도망치려 한 것이다. 이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실제로 적출식에 관한 무서운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던 애들이
가끔 저지르는 일이니까. 하지만 이번 사건이 다른 경우들과 다른 점은,
륜이 실제로 그 시도에 성공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발견한 자들을 잔
인하게 살해했다는 점이다.' 대충 이런 결론이지요. 그리고 수호자들은
가문 평의회에 륜 페이의 처벌을 요구했습니다.]
[나 또한 수호자야. 그걸 다 설명할 필요는 없는데.]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사건의 이상한 점들을 살펴보려면 그걸 전부
되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적출공포증 때문에 어딘가로 숨어버리
는 것은, 수호자들의 결론대로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럴
경우 그가 발각되었을 때 취할 행동은 울음을 터뜨리거나 발작을 일으키
는 쪽 아닐까요? 수호자를 난도질하고 가장 친한 친구를 등 뒤에서 베어
버리는 것은 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공포에 질리면 사람들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비이성적인 행동도 보
여주지.]
[그렇다 하더라도, 그럼 륜 페이가 심장탑을 나올 때 보여준 이성적인
대처는 어떻게 된 것일까요? 조금 전에 그런 끔찍한 살인행각을 벌인 청
년이 침착하게 자신의 심장을 가리기 위한 수단을 강구한다는 것은 납득
되지가 않습니다.]
[정신 나간 자들도 어떤 부분에선 놀라울 정도로 치밀하지.]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습니다. 화리트 마케로우는 왜 특수 도서실에
간 것일까요? 왜 홀에 남아서 수호자들을 기다리는 대신 특수 도서실에
가서 친구의 사이커에 죽었을까요?]
[다른 자들에게 륜이 도망쳤다는 니름을 듣고 그를 찾아보려고 한 것일
지도 모르잖나.]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화리트가 홀에 들어오고나서 그와 이야기를
나눠봤다는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화리트는 륜 페이가 도망쳤
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네의 결론은 뭔가?]
스바치는 단호하게 닐렀다.
[우리 계획이 들킨 겁니다. 그 륜 페이는 치밀하게 준비된 암살자였을
겁니다. 그리고 적출공포증에 빠진 나가가 저지른 짓처럼 보이게 하려고
그런 연극을 했던 겁니다. 그 녀석은 대로와 홀에서 두 번 그런 모습을
보여줬지요. 그리고 적당한 곳에 숨어있다가, 화리트가 들어오자 다른
사람 몰래 니름을 보내어 화리트를 불러내었습니다. 화리트는 적출공포
증에 빠진 친구를 도와주려 했겠지요. 륜 페이는 그렇게 화리트를 유인
한 다음 특수 도서실에서 살해한 겁니다.]
수호자 세리스마는 손가락을 깍지끼며 고개를 조금 숙였다.
[그렇다면 그 불쌍한 유벡스는 왜?]
[일단 살해 현장을 만들기 위해서죠. 또한, 유벡스 사서를 잔인하게 살
해함으로써 륜 페이가 친구도 죽일 수 있는 상태라는 점을 부각시키려는
목적도 있었을 겁니다. 화리트만을 살해하면 이상하게 보였겠지요. 절친
한 친구니까요. 하지만 유벡스 사서도 죽임으로써 그것이 광기에 젖은
무차별 살인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죠.]
[하지만 왜 그런 연극을 했을까? 우리 계획이 들킨 거라면, 우리를 곧
장 공격하는 대신 왜 그런 복잡한 수단을 써가며 화리트 마케로우를 죽
인 거지?]
[아마도 경고일 겁니다. 우리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신중
하느라 그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에겐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세리스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그 가정이 그럴 듯하긴 하지만 자네는 중요한 정보를 모르고 있
네. 화리트와 륜은 보통 친구 사이가 아니야. 그 두 사람에 대해서는 내
가 잘 알아. 왜냐 하면…]
[륜 페이가 한 때 수련자였기 때문입니까?]
수호자 세리스마는 놀란 얼굴로 스바치를 바라보았다.
[그걸 어떻게 알았나?]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 날, 대로에서 륜이 쓰러졌을 때 화리트가
륜을 달래려 했습니다. 그 때 륜이 화리트를 이렇게 부르더군요. 아스화
리탈 세파빌 마케로우. 저는 그게 화리트의 신명이라고 짐작합니다만.]
세리스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바치는 계속 닐렀다.
[그리고 화리트의 태도에서 화리트 또한 륜 페이의 신명을 불렀을 거라
고 짐작합니다. 그건 들리지 않았습니다만, 상관없습니다. 서로의 신명
을 안다는 것은 그들이 한 때 같은 수련자였다는 의미겠지요? 그리고 아
마도 륜 페이는 중도에 포기했을 겁니다.]
[그들은 7살 때 같이 수련자가 되었어. 비록 륜이 중도포기했지만 그들
의 우정은 계속되었어. 15년 동안의 우정일세. 그들이 어떻게 륜에게 그
런 친구를 죽이게 할 수 있겠나?]
[어떤 사람을 살인자로 만드는 방법은 많습니다. 륜이 수련자의 지위를
반납한 이후로 자기 집에만 있었다 하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왜
냐하면 페이 가문엔 언제나 남자들이 많이 찾아가니까요. 지속적으로 세
뇌와 교육이 이루어졌을 수 있습니다.]
세리스마는 대단히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 때 조용히 듣고 있던 카
루가 닐렀다.
[신경 쓰이는 것이 있습니다.]
스바치와 세리스마는 카루를 돌아보았다. 카루는 침착하게 닐렀다.
[화리트는 죽기 전 자신이 살해당할 거라고 닐렀습니다. 그리고 살해자
의 이름도 가르쳐줬습니다.]
세리스마는 놀란 표정으로 스바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스바치는 짜증
스럽다는 듯이 닐렀다.
[그 황당한 이야기 니름인가? 그건 화리트의 적출공포증이 비뚤게 표현
된 거야. 자네도 그렇게 생각했잖아.]
[잠깐만.] 수호자가 닐렀다. [내가 듣지 못한 것이 있나 본데?]
스바치는 눈살을 찌푸린 채 설명했다.
[화리트는 누나인 비아스 마케로우가 자신을 죽일 거라고 닐렀습니다.
하지만 그건 화리트의 적출공포증, 누나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 그리고
비아스의 탁월한 약술이 합쳐져서 낳은 피해망상입니다. 화리트는 비아
스가 독약으로 자기를 죽일 거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화리트는 사이커
에 죽었습니다. 륜 페이가 사이커를 가지고 있었다는 건 모두가 봤습니
다.]
[비아스 마케로우에게 화리트를 죽여야 하는 이유가 있었나?]
세리스마의 질문에 스바치와 카루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수호자는 그들
의 그런 태도를 이상하게 여겼지만 잠자코 기다렸다.
잠시 후 카루가 조심스럽게 단어를 선택하며 닐렀다.
[이것은 저희들의 추리가 아닌 화리트의 추리입니다만… 비아스 마케로
우는 자녀를 원한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모든 여인들이 그것을 원하겠지
만, 비아스는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수
단을 이용할 수도 있다고 여긴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비아스는 화리트에
게 모종의 제의를 했고, 화리트는 그것을 거절한 모양입니다.]
니름을 끝낸 카루는 놀랐다. 세리스마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세리스마는 슬픈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있었나.]
[놀라시지 않으시는군요?]
[비아스 마케로우는 그런 생각을 처음 떠올린 여자도 아닐 테고, 결코
마지막 여자도 아닐 테지.]
카루와 스바치는 그만 니름이 막히고 말았다. 세리스마는 담담하게 닐
렀다.
[여자들이 남자들을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겉으론 남자를 생각하는 척,
위하는 척하지만, 결국 그녀들이 원하는 것은 남자들을 침대에 눕혀놓고
그 체액을 짜내가는 일 뿐이야. 그들은 남자들이 아무런 지성이 없는 동
물이었으면 더 좋을걸. 실제로 어느 정도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남자
란 떠돌이 동물이잖나. 그리고 동물에게 거절당했다면 분노할 수도 있겠
지.]
카루와 스바치는 씁쓸한 동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세리스마는 불편
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니름을 이었다.
[화리트의 추측 이외에 그 가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다른 증거가 있나,
카루?]
[글쎄요. 그 날 그녀는 자신의 방에서 연구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그녀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단순히 그녀를 본 사람이 없다고 해서 그녀가 살인자라고 할 수는 없
을 텐데.]
[예. 하지만 그녀는 고명한 약술사이고 따라서 특수 도서실의 열람권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저택을 나온 다음 적출식
당일의 혼란을 틈타 심장탑에 숨어들었을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는 유벡
스를 죽여 특수 도서실을 비워놓은 다음, 남동생을 거기로 유인해서 죽
일 수도 있었을 겁니다.]
[비아스 마케로우는 열람권을 가지고 있네. 하지만 유벡스가 죽은 이상
그 날 그녀가 특수 도서실에 찾아왔는지 확인할 도리가 없군. 그렇다면
그녀에겐 화리트에 대한 증오 이외에 다른 혐의점은 없는 것이군? 물론
증오는 살인의 가장 보편적인 이유 중에 하나이지만.]
카루는 뭐라 대답하려 했지만 세리스마는 손을 내저었다.
[화리트 마케로우는 죽었네. 그의 살해범은 반드시 밝혀내어 처벌을 받
아야 할 것이야. 하지만 살해범을 찾아낸다고 해서 화리트가 다시 살아
날 수는 없는 것처럼, 우리 계획 또한 재개될 수 없어. 계획은 실패했
네. 지금부터 수련자들 중 적당한 이를 찾아봐야 할지도 몰라.]
스바치는 신경질적으로 칼자루를 움켜쥐었다가 다시 놓았다.
[1년을 더 기다리는 겁니까? 그들이 그렇게 시간을 줄까요?]
[도리가 없네. 이미 토론했던 것이잖나. 이것은 수련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나가는 적출식을 마쳐야만 키보렌을 안전하게 건널 수 있어. 그
러니 다음 적출식을 기다리며 적당한 사람을 찾을 수밖에.]
니름을 마친 세리스마는 카루가 묘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
다. 수호자의 시선을 본 스바치도 카루를 돌아보았다. 카루는 조심스럽
게 닐렀다.
[어쩌면 1년을 더 기다리지 않아도 될지 모릅니다.]
[무슨 니름인가? 남아있는 수련자가 있던가? 몇몇이 아직 방랑을 떠나
지 않고 하텐그라쥬에 남아있다는 것은 알고 있네만 그들 중 적당한 후
보자가 있었나?]
[있습니다. 좀 묘한 후보자이긴 하지만. 그는 한 때 수련자였고, 키보
렌의 땅을 반드시 도망쳐야 하는 이유도 가지고 있습니다.]
어리둥절해 하던 두 사람은 카루의 정신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리
고 거기서 어떤 이름을 발견했다.
[륜 페이! 그 살인자를?]
스바치는 경악해서 외쳤지만 카루는 단호하게 닐렀다.
[만약 화리트의 가정이 맞다면 살인자는 비아스 마케로우지 륜 페이가
아냐. 하지만 륜은 한계선을 넘어 도망쳐야 되는 이유를 가지고 있지.
적출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륜 페이는 신명을 가진 수련자였어.]
카루는 세리스마를 돌아보았다.
[륜 페이를 추적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수호자 세리스마. 만약 그가
살해자가 아니라면 우리 일을 도와줄지도 모릅니다.]
세리스마는 침중하게 닐렀다.
[만약 살해자라면?]
[그렇다면,] 카루는 자신의 칼을 잠깐 쥐어보였다. [수호자 유벡스와
화리트의 복수를 해줄 수 있겠지요.]
[복수권을 요구합니다.]
가문평의회장은 일순 고요해졌다. 물론 나가들의 모임은 항상 고요하므
로 이것은 나가적인 표현으로, 즉 평의회의 구성원들 전부가 한순간에
정신을 닫았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평의회의 구성원들인 각 가문
의 대표자들은 모두 의장석을 돌아보았다.
평의회 의장 라토 센은 늙은 나가였다. 나가들이 나이허물이라고 부르
는 허물 조각들이 얼굴과 손등 곳곳에 남아있었다. 더 이상 허물이 깔끔
하게 벗겨지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나가들 사이에서는 이 모습이
연륜의 증거와 존경의 이유가 된다. 하지만 그 위대한 라토 센도 복수권
이라는 니름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복수권이라고 하셨소, 비아스 마케로우?]
[그렇습니다.]
반원형의 의석에 앉아있던 가문의 대표자들은 겨우 약한 니름을 내보낼
여유를 되찾았다. 예의를 담아 미약하게 발산되는 그녀들의 반응은 모두
어처구니가 없다는 쪽인 듯했다. '당연하지.' 라토 센은 그녀들의 반응
을 이해할 수 있었고 동시에 솜나니 페이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했다.
반원형 의석의 안쪽엔 두 개의 책상이 서로 마주보는 형태로 놓여있었
다. 그곳엔 이 사건의 이해당사자인 페이 가문과 마케로우 가문의 두 대
표가 서로를 마주보며 앉아있었다. 페이 가문의 장녀이자 가문의 대표자
인 솜나니 페이는 페이 가문쪽의 의자에 앉아있었고, 지금 비아스가 무
슨 니름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속으로 이를
갈던 라토 센은 편파적이라는 항의를 들을 것을 감수하며 한 번 더 시간
을 끌었다.
[그렇다면 귀하의 가문은 페이 가문에게 복수의 권리를 행사하겠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라토 센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솜나니 페이는 여전히 멍청한 얼굴을
하고 앉아있었다. 그 얼굴을 보던 센 의장은 문득 솜나니 페이가 복수권
이 무슨 니름인지 모를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맙소사, 그렇군. 그
걸 모르고 있어!' 센 의장은 재빨리 전략을 세운 다음 닐렀다.
[매우 고풍스러운 권리를 요구하는군요. 비아스 마케로우.]
[하지만 정당한 권리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계신 의원 여러분들 중엔 전승학에 관
심이 없으신 분들도 계실 테니 내가 그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마케로
우 가문이 무엇을 요구하는 건지 잠시 부연하겠습니다.]
라토 센 의장은 자신이 하는 일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끔
찍한 분란을 피하는 것이 의장의 첫 번째 임무이며, 그 임무를 위해서라
면 잠시 창피를 무릅쓸 수밖에 없다. 비아스가 항의하려는 듯한 몸짓을
했지만 의장은 매서운 눈으로 비아스를 제지하며 닐렀다.
[앉아요. 비아스 마케로우. 무엇을 니르려는지 압니다. 하지만 본인에
게 편파적이라느니 하는 모욕적인 니름을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
다. 복수권은 잘 사용되지 않는 표현입니다. 당신이 그런 희귀한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이 평의회에 대한 모독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지적해두고 싶습니다.]
비아스는 투덜거리며 앉았다. 그리고 솜나니 페이는 이제야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이해했다는 얼굴이 되었다. 센 의장은 솜나니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 승복이나 거부를 니르기 전에 그것이 뭔지 알
려주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의장에게 감사해하는
눈짓을 보내었지만 센 의장은 성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복수권이란 쇼자인-테-쉬크톨을 니르는 표현입니다.]
솜나니가 기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니름도 안됩니다!]
[앉으시오, 솜나니 페이! 당신에게 발언권을 허락한 적이 없소!]
솜나니 페이는 재빨리 자리에 앉았다. 자신에게 호의를 보여주는 의장
을 분노하게 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하지만 자리에 앉은 솜나니 페이는
무서운 시선으로 비아스를 노려보았다. 의장은 이제 솜나니 페이와 비아
스 마케로우 양쪽에게 분노에 찬 표정을 보내며 닐렀다.
[또한 다른 니름으로는 암살자 지명권이라고도 합니다. 이처럼 잘 알려
진 표현이 많으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비아스 마케로우.]
비아스는 마지못한 듯 고개를 숙여보였다. 센 의장은 계속 닐렀다.
[간단히 니른다면, 마케로우 가문은 화리트 마케로우의 죽음에 대한 대
가로 페이 가문의 일원을 암살자로 지명할 수 있는 권리를 원하는 겁니
다.]
의석에서 날카로운 니름들이 터져나왔다. 미처 정신을 제대로 닫지 못
한 의원들이었다. 그녀들은 황급히 정신을 닫으려 했지만 라토 센 의장
의 분노어린 시선을 받고 말았다. 라토 센 의장은 문득 소란을 이유로
이 의회를 페회해버리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하지만 불가능한 소망이었
다. 라토 센 의장은 의원석을 매서운 눈으로 쏘아본 다음 엄격하게 닐렀
다.
[이제 이해하지 못하신 분들은 없는 것 같군. 솜나니 페이. 니르시오.]
솜나니는 [감사합니다.] 라고 닐렀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비아스를 향
해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솜나니는 주먹을 꽉 쥔 채 닐렀다.
[발자국 없는 여신께 맹세코, 이런 황당한 요구는 들어본 적도 없습니
다. 어떻게 감히 암살자를 지명하겠다는 겁니까? 화리트 마케로우는 남
자입니다! 저희 가문은 이런 니름도 안되는 요구를 단연코 거부합니다!]
비아스는 의장에게 발언권을 요구한 다음 닐렀다.
[솜나니 페이. 쇼자인-테-쉬크톨에는 거부할 권한 같은 것은 없습니
다.]
[하지만 남자입니다!]
솜나니는 또다시 발어권도 없이 외쳤지만 라토 센 의장은 더 이상 화를
낼 기력도 없다는 듯이 잠자코 기다렸다. 비아스는 차갑게 웃으며 닐렀
다.
[하지만 남자이기 전에 마케로우입니다. 화리트 마케로우는 심장을 적
출하기 전에 죽었습니다. 죽은 시점에서는 여전히 마케로우였던 셈이지
요. 따라서 우리는 우리 가문의 일원의 죽음에 대해 쇼자인-테-쉬크톨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솜나니는 이번엔 발언권을 요구한 다음 닐렀다.
[마케로우는 심장탑 안에 들어간 다음 사망했습니다. 당신 가문은 심장
탑까지 그를 호위해줬습니다. 마케로우 가문의 호위자들은 분명히 살아
있는 화리트를 심장탑에 들여보내줬고, 그리고 호위 임무를 끝냈습니다.
따라서 심장탑에 들어갔을 때부터 이미 화리트는 더 이상 마케로우의 일
원이 아닙니다. 가문이 호위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가문의 일원이 될 수
있습니까? 상식적으로 니름이 안 됩니다. 만일 화리트가 적출식 도중에
사고로 죽었다면 당신네 가문은 심장탑의 수호자들을 상대로 암살자를
지명할 겁니까?]
솜나니의 반론은 그럭저럭 훌륭했고 센 의장은 많은 의원들이 그녀에게
동조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솜나니가 니른 것이 질문이었기에 비아
스는 곧바로 대답했다.
[재고해볼 가치도 없는 니름입니다. 솜나니 페이. 상식에서 벗어난 것
은 그쪽입니다. 제 동생인 화리트는 당신네 가문을 자주 방문했지요. 페
이 가문에 체재하는 동안 화리트는 우리 가문의 호위자들에게 호위를 받
고 있었습니까?]
솜나니는 으르릉거리듯 비아스를 쏘아볼 뿐 대답하지는 않았다. 비아스
는 씩 웃었다.
[그 침묵은 화리트가 당신들의 집 안에서 호위를 받지 않았다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당신 논리대로라면 그 때 화리트가 호위를 받지 않고 있으
니 마케로우의 일원도 아니었겠군요? 이런 논리에 찬성하십니까?]
솜나니는 약이 잔뜩 올라서 외쳤다.
[륜 또한 남자입니다! 우리 가문의 일원이 아니라고요! 그 자의 일로
우리 가문에 암살자를 지명하는 건 얼토당토하지 않은…]
솜나니의 전략적 실수였다. 라토 센은 정신적 신음을 흘렸다. 솜나니
페이는 '호위'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물고 늘어졌어야 했다. 비아스는
상대방의 실수를 놓치지 않았다.
[아니, 륜 '페이'입니다. 화리트 마케로우와 마찬가지로 륜 페이 역시
심장을 적출하지 않은 상태에서 살해를 저질렀습니다. 이것은 확인된 사
실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페이 가문의 일원이 마케로우 가문의 일원에게
저지른 범죄입니다. 쇼자인-테-쉬크톨의 구성요건에 완벽히 들어맞습니
다.]
평의회 의원들은 비아스의 설명에 감동을 받은 듯했다. 남자가 남자를
죽인 사건에 가문 대 가문의 해결방식인 쇼자인-테-쉬크톨을 요구한다는
니름에 어이없어하던 의원들도 비아스의 설명이 그럴 듯하다는 듯이 호
의적인 정신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솜나니는 그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
고, 한층 절망적인 기분에 빠져들었다. 동시에 솜나니는 비아스의 의도
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저 여자는 왜 저러는 거야? 보상금을 받아내고 조용히 끝내면
그만일 것을. 우리가 이미 제의했잖아. 남자 따위에게 지불할 금액으로
는 너무 많은 액수였어. 그걸 받는 쪽이 훨씬 현명해. 도대체 왜 암살자
를 지명하겠다는 거지? 고작 남자잖아. 여자라면…'
문득 솜나니는 끔찍한 사실을 떠올렸다. 그 순간 솜나니는 비아스의 의
도를 이해했다. 그녀는 경악한 채 비아스를 바라보았지만 니름을 제대로
니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를 지명하겠다는…]
비아스는 한껏 미소지으며 닐렀다.
[당신 가문에는 예의와 법도에 정통하여 모든 이의 존경을 받는 분이
계시잖습니까? 마케로우 가문은 존경과 신뢰를 담아 사모 페이를 륜 페
이에 대한 암살자로 지명하고자 합니다.]
솜나니 페이는 앙칼진 니름들을 쏟아내었다. 평의회 의장실에서 감히
꺼낼 니름들이 아니었지만, 라토 센 의장은 그녀를 용서하기로 했다.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비아스를 향해 살벌한 니름들을 쏟아내던 솜나니는
결국 의장에게 화살을 돌렸다.
[의장님, 도대체 어떻게 그걸 허락하실 수 있어요?]
[조용히 해, 솜나니. 의원들이 모두 찬성하는 기색이었다는 것은 자네
도 알 텐데. 그 상황에서 내가 비아스의 요구를 거부했다간 무슨 일이
일어났겠나? 시간을 좀 끌 수야 있겠지만 그랬다간 비아스는 당장 의원
투표를 요구했을 거야. 그리고 반드시 승리했을 테고. 내가 자네 가문을
위해 그런 수모와 위험까지 겪었어야 했단 니름인가?]
솜나니는 약간 진정했다.
[도와주신 것은 잊지 않겠어요. 의장님. 제기랄, 그 년이 보상금을 거
절했을 때부터 눈치챘어야 하는 건데. 하지만 설마 남자를 상대로 쇼자
인을 요구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니름을 잘라먹지마. 의미가 이상해지니까. 쉬크톨이 없잖아.]
의장이 별걸 가지고 깐깐하게 군다고 생각하던 솜나니는 곧 의장이 그
런 의미로 니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센 의장은 책상 위에 놓
인 꾸러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솜나니는 그것을 가리키며, 하지만 그걸
가리키기 싫다는 듯이 손을 당기며 아주 이상한 모습으로 닐렀다.
[쉬크톨입니까?]
[그래.]
솜나니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저는 그걸 가져갈 수 없어요. 어떻게 사모에게 그걸 가져다준단 니름
입니까!]
[하지만 가져다줘야 해. 이미 결정을 내렸으니까. 알고 있겠지만 사모
페이가 유언을 남기고 주위를 정리할 수 있도록 허락된 시간은 사흘이
야. 사흘 안에 이 쉬크톨을 가지고 떠나야 해. 그리고, 륜 페이의 목을
가져오기 전까진 절대로 멈출 수도, 잠시 쉴 수도, 돌아올 수도 없어.]
[굳이 그렇게 니르시지 않아도…]
[잠자코 들어! 그대로 전해주란 니름이야. 여기엔 타협도 없고 속임수
도 안되고 흐지부지 끝나는 것도 없어! 륜 자신이 죽거나 암살자가 죽었
다는 것이 확실해지기 전까진 절대로 쇼자인-테-쉬크톨은 끝나지 않아.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화리트 마케로우의 목숨값이 지불되는 거야. 알겠
나!]
[마케로우 가문은 화리트의 죽음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에요. 사모를
하텐그라쥬에서 쫓아내려는 거에요!]
[물론 알아.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의원들이 모두 비아스에게 동조했으
니까. 사모의 태도가 다른 가문들에겐 끔찍한 오만으로 보일 거라는 것
을 몰랐나? 아이를 가지지도 않으면서 남자란 남자는 다 휩쓸어가는 것
이? 사모가 차라리 아이라도 가졌다면 덜 약올랐을 거야. 순수한 경쟁에
서 패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지금의 사모는 먹지도 않을 쥐를 뺏어서 물
에 던지는 꼴이야. 그게 얼마나 가증스러운 건지 모르겠단 니름이야?]
[사모는 그럴 생각 조금도 없었어요!]
[알고 있어! 하지만 그렇더라 해도 너희들이 사모를 달랬어야 했어! 결
국 너희들의 실수였어. 륜 페이를 얼빠진 살인자로 만든 것도, 사모 페
이를 증오의 과녁으로 만든 것도 너희들이 사모라는 행운을 즐길 줄만
알았지 조심성은 발휘할 줄 몰랐기 때문이야! 그러니 이젠 그 대가를 치
뤄야 되는 거야. 그러지 않고선 하텐그라쥬에 발 붙이고 살 수 없어!]
솜나니는 굳어버린 얼굴로 의장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거부하는 표정이었지만 의장은 그녀가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늙은 의장은 피곤한 듯 의자에 등을 기대며 책상 위
의 쉬크톨을 바라보았다.
암살자를 위해서만 만들어지고 암살자에 의해서만 사용되는 견고하고
예리한 검. 그것이 견고한 까닭은 세상의 끝까지라도 암살 대상을 추적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며, 그것이 예리한 까닭은 육친을 벨 때 고통
을 덜 주기 위해서이다. 타고난 전사들인 레콘들이 이 검을 몹시 탐내지
만, 쉬크톨이 나가 이외의 다른 종족의 손에 들어간 적은 없다. 암살이
끝난 다음 암살자들이 쉬크톨을 부러뜨리기 때문이다.
라토 센 의장은 쉬크톨을 가리키는 옛문구 하나를 떠올렸다. 피붙이의
피를 마시기 위해 창조된 난폭한 괴물. 센 의장은 힘겹게 니름을 맺었
다.
[차라리 이런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하도록 해, 솜나니. 사모가 륜의
모가지를 베어오면 그녀에 대한 다른 가문들의 증오가 조금이라도 덜어
질 테니까. 너희 가문엔 아무 쓸모도 없는 남자 하나만 잡으면 되는 거
야. 행운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어?]
그 시각, 마케로우 가문에서는 비아스가 가주로부터 받은 열렬한 칭찬
에 우쭐해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두세나 마케로우는 딸이 해낸
일을 거의 믿을 수 없었다.
[정말 잘했다! 이야말로 몸빠진살로 용을 잡은 꼴이다. 그 도깨비 같은
년이 마침내 하텐그라쥬를 떠나는 모습을 보게 되었구나!]
[륜 페이 덕분이지요.]
[남자의 멍청한 짓이 쓸모가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게다가 죽은 건 우
리의 멍청한 아들이었고. 심장을 적출하지 않았으니 아직 마케로우라고?
정말 멋진 지적이었다. 버린 미끼들로 대어를 낚다니, 네 재주가 정말
대단하구나. 난 네가 약술에만 재능이 있다고 믿었다. 물론 그것도 훌륭
한 일이지만, 이런 가문의 일에 재주를 보일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어.]
비아스는 긴장했다. 두세나는 그저 호인처럼 허허거리며 좋아하면서 동
시에 그 니름 속에 정교한 함정을 파놓고 있었다. 여기서 서툴게 겸양을
표시한다면 야심가로 낙인찍힐 것이다. 겨우 한 가지 위업을 해낸 것으
로 소메로 마케로우가 받는 신임에 도전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차라
리 거만하게 굴어버릴까? 가주는 그것을 자신감의 표현으로 받아들일지
도 모른다. 하지만 그 또한 위험하다.
찰라의 시간이었지만 굉장한 고민을 한 끝에 비아스는 적절한 대답을
골라내었다.
[저는 화리트의 죽음이 어이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적출하기 전
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죽었던 것이겠지요. 그리고 적출하지 않았다
는 것은 그가 아직 우리의 책임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두세나는 웃었다.
[논리적이군. 그것이 학자의 태도냐?]
[상대방이 페이 가문이었다는 것이 행운이죠.]
다행히도 두세나는 만족했다. 비아스는 인사를 한 다음 물러나왔다.
마케로우 가문은 니름 그대로 잔치 분위기였다. 아마 하텐그라쥬에 있
는 가문들 거의 대부분이 비아스 마케로우가 한 일을 놓고 즐거워하고
있을 것이다. 비아스는 소메로와 두 이모에게서도 대단한 찬사를 받았
고, 응접실에서는 다른 가문들이 보낸 서신과 선물들을 한 꾸러미 가득
받아들게 되었다. 그 선물들 중 특히 인상적인 것은 금촉과 금깃이 달린
훌륭한 몸빠진살이었다. 비아스는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몸빠진살은 가느다랗고 잘 휘어지는 화살을 니른다. 몸빠진살로 사냥을
할 때는 그것을 명중시킨 다음 상처 입은 동물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추
적하는 방법을 쓸 정도로 덜 치명적인 화살이다. 당연히 초식동물이 그
대상이며, 맹폭하게 달려드는 야수들에게 몸빠진살을 날리는 것은 시비
를 거는 일밖에 안된다. 따라서 '몸빠진살로 용을 잡는다'는 니름은 턱
없이 작은 일격으로 거대한 목표를 쓰러뜨리는 믿기 어려운 위업을 의미
한다. 비아스는 어느 가문이 이 상징적인 선물을 보내었는지 궁금해했고
그것이 센 가문이라는 것을 알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가문다운 품격이
있는 선물이었다.
즐거워하며 자기 방으로 돌아온 비아스는, 방 가운데서 오도카니 앉아
있는 카린돌을 보곤 웃음을 거뒀다.
[어떻게 들어왔지?]
방문은 잠겨 있었다. 비아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카린돌을
바라보았지만 카린돌은 해명을 하거나, 하다못해 미소를 짓거나 하지도
않았다. 다만 무표정한 얼굴로 비아스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것은 비아
스를 언짢게 만들었다. 모든 사람들의 찬사를 받은 사람에게 보내는 시
선으로는 무례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시선이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그건 다 뭐지?]
카린돌은 비아스가 들고 있는 선물꾸러미와 서신들을 가리키며 닐렀다.
비아스는 그것을 테이블 위에 쏟아놓았다.
[여기저기서 선물을 보내는군.]
카린돌 역시 센 가문의 선물을 발견했다. 카린돌은 재미있다는 표정으
로 닐렀다.
[몸빠진살로 용을 잡았다는 니름이군. 어디서 보낸 거야?]
[센 가문의 라디올 센.]
[가주인 라토 센이나 최연장자인 수이신 센이 아니라는 거지. 역시 대
단한 가문이야. 인상적인 선물을 주면서도 빠져나갈 궁리는 해두는군.
라디올 센이 얼간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
비아스는 기분을 망쳤다.
[다른 사람이 받은 선물을 평가절하하는 것이 네 취미생활인 줄은 몰랐
군. 남자를 평가절하하는 쪽 아니었나.]
[남자를 죽이는 것보다야 나은 취미라고 생각하는데.]
비아스는 가까스로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다. 카린돌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비아스를 지
나쳐 탁자로 걸어갔다. 카린돌은 탁자 위에 놓여있던 선물 중 장신구 하
나를 집어들었다. 열을 잘 흡수하는 구리로 만들어진 근사한 장신구였
다.
[잘 가질게.]
비아스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뭐야? 무슨…]
[몇 년 전에 방 열쇠를 잃었지?]
비아스는 정신을 닫았다. 그녀는 카린돌이 어떻게 잠긴 방 안으로 들어
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카린돌을 노려보던 비아스는 카린돌의 무표정
한 얼굴이 공포를 감추기 위한 가면임을 깨달았다. 카린돌은 장신구를
들여다보며 닐렀다.
[그 날, 언니를 찾아왔었어.]
[그 날?]
[적출식 날. 화리트가 죽던 날.]
비아스는 흠칫하며 옆의 침대를 흘끔 돌아보았다. 카린돌은 냉랭하게
닐렀다.
[침대 아래에 뭐가 있나 보지?]
비아스는 미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것까지 알고 있었나? 카린돌
이 숨겨둔 사이커를 발견했다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비아스는 이를
악문 채 맨몸으로 덤빌 각오를 했다.
하지만 비아스는 카린돌이 장신구를 매다는 것을 보며 동작을 멈췄다.
카린돌이 자신을 고발할 생각이라면 저런 장신구를 달라고 할 필요는
없다. 그 순간 비아스는 어떤 단어를 떠올릴 수 있었다. '거래?' 그리고
비아스는 카린돌이 했던 니름 전부를 되새겨보았다. '인상적인 선물을
주면서도 빠져나갈 궁리는 해두는군.' 비아스의 입가에 드디어 미소가
떠올랐다.
장신구를 매단 카린돌은 무관심한 얼굴로 벽을 보며 닐렀다.
[그 날 니름이야.]
[그 날?]
[여러 가지 알려줘서 고마워. 약술은 너무 어려워. 언니 같은 뛰어난
약술사가 가족이라 다행이야.]
비아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다음에도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얼마든지 찾아와.]
[그러지. 그럼.]
카린돌은 방을 나갔다.
홀로 남게 된 비아스는 누가 이기고 누가 더 많은 것을 얻었는지 생각
해 보았다. 물론 카린돌이 더 많은 것을 얻었다. 카린돌은 비아스가 그
날 방을 비운 것도 알고 있었고 범행 도구였던 사이커까지 가지고 있다.
혹시나 해서 침대 아래를 본 비아스는 그것이 사라졌음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사소한 것이지만 카린돌은 장신구 하나도 가져갔다.
하지만 이긴 쪽은 분명치 않았다. 아마도 카린돌은 소메로보다 비아스
가 다음 가주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비아스를 고발
하기보다 그녀의 약점을 쥐는 것에 만족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
만 카린돌이 장신구로써 상징해 보인 '거래'는 위험한 거래였다. 어쨌든
카린돌이 비아스의 공모자가 되어준 지금, 이긴 것은 둘 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비아스는 그제야 집 안에서 열쇠 고장이나 분실이 자주 일어났
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카린돌은 도대체 몇 개나 되는 열쇠를 가지고 있
는 걸까? 문득 비아스는 약간의 두려움을 느꼈다.
소메로처럼 최연장자도 아니고 비아스처럼 야심도 없는 카린돌이 살아
남기 위해 해온 것이 열쇠를 수집하는 것뿐일까? 비아스는 카린돌을 잘
관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에 앞서 방문의 자물쇠를 바꿔야겠다
고도 생각했다.
솜나니 페이는 마치 자기 팔다리가 잘 붙어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하는 그녀를 도와주기 위해 사모 페이
는 쉬크톨을 돌아보았고, 솜나니는 그제야 사모를 똑바로 보며 정신을
열었다.
[무슨 니름인지 알겠니?]
사모는 긍정에 해당하는, 하지만 명확한 단어로는 환원될 수 없는 니름
으로 닐렀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비슷하지만 나가의 이런 불명확한
니름에는 보다 복잡한 여운들이 담긴다. 지금 사모는 자신이 이해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차피 긍정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니른 셈이다.
솜나니는 그 불명확한 니름을 꾸짓듯 냉정하고 확고하게 닐렀다.
[륜을 추적해서, 죽여. 그리고 그 목을 가져와야 해. 쇼자인-테-쉬크톨
이 완료되었다는 증거가 필요하니까.]
사모는 여전히 쉬크톨을 바라보면서 닐렀다.
[그렇잖으면 내 목이라도?]
[그런 니름은 하지마!]
[암살자나 암살 대상 중 하나만 죽으면 되는 거잖아요?]
[하지만 이번에는 륜이 죽어야 해. 가서 륜을 잡아. 힘들겠지만 그렇게
어렵진 않을 거야. 그 멍청한 놈은 심장을 가진 채 도망쳤어. 네가 못잡
더라도 정찰대원들이 잡아줄 거야. 오래 걸리지도 않을걸. 그러니, 너는
쫓는 시늉만 하다가 돌아와도 돼.]
문득 솜나니는 사모의 정신 속에서 기묘한 얼룩 같은 것을 발견했다.
솜나니는 그 얼룩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것이 확고한 의지라기보다는 감
정적 지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솜나니를
전율하게 했다.
솜나니는 사모의 손을 확 움켜쥐었다.
사모는 놀란 눈으로 페이 가문의 장녀를 바라보았다. 솜나니는 사모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