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새-4화 (4/62)

1. 은루(銀淚) - 3

티나한은 자신의 거취를 분명히 했다.  티나한은 대사원과 자신이 맺은

계약에 대해 말했고 케이건의 괴벽은 임무 수행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내가 그 친구와 함께 일하는데 있어서 고려해야 할 것은 한 가지 사실

뿐이야. 그 녀석이 도움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 그런데 케이건은 나가와

키보렌에 대한 최고의 전문가지. 쳇. 나가를  잡아먹고 사니 오죽 잘 알

겠냐. 그러니 동행하겠어."

"그런 태도가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자신의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

건 나와 상관 없다면 신경쓰지 않겠다는 것이?"

"옳지 않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자기와 아무 상관 없는 일에 일일이 끼

여드는 것도 못된 참견꾼 버릇이야. 그런데 내가 보기에 나가와 나는 아

무 상관이 없어. 아,  솔직히, 세계의 절반을  독차지하고서 저희들끼리

살겠다는 놈들을 배려해줄 이유는 없잖아. 그러니 나는 케이건이 나가를

삶아먹든 튀겨먹든 신경쓰지 않겠어."

"나가도 사람입니다. 그렇잖습니까?"

"너 두억시니를 사람이라고 생각하냐?"

비형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티나한은 부리 끝을

만지작거렸다.

"사람으로 태어나면 사람이냐? 사람 같이  굴어야 사람이지. 나가는 사

람 같이 굴지 않아. 그러니 난 그 지랄 같은 놈들에게 신경쓰지 않겠어.

그리고 케이건의 태도는 공평하잖아. 케이건은 머리 나쁜 비겁자처럼 말

하진 않았어. 머리 나쁜 비겁자들은 '나는 너를 욕하고 괴롭히고 때리고

죽여도 되지만 너는 내게 그렇게  할 수 없다. 그건  상상도 안 된다'는

식으로 말하지. 하지만 케이건은 그러지  않았어. 오히려 모든 나가에게

자기를 죽이려 시도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지. 당연한 말이지만, 그거 입

밖으로 내어 말하긴 어려운 거라고."

"그거 얼핏 듣기에 멋지지만, 결국 우리 함께 서로를 표적 삼아 근사한

살육광이 되자는 말일 뿐이잖아요. 안 그래요?"

"살육은 상대가 사람일 때 쓰는 말이야."

결국 그것이 문제였다. 비형은  그렇게 판단했다. 나가를  사람으로 볼

수 있는가. 그리고 비형은 이 여행에 동참해야 할 개인적인 이유를 발견

해냈다. 케이건 드라카의 기괴한 행동을 평가하기  위해 그는 나가에 대

해 더 알아야 했다.

비형과 티나한이 동행을 수락한다고 말했을 때 케이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 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케이건은 실제적인 사항들

을 검토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티나한과 비형은 다시  자신들이 얼빠진

바보처럼 느껴지는, 그다지 달갑다고  하긴 어려운 감정을  곱씹어야 했

다. 케이건이 그들을 풋내기 취급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케이건의 태도

는 친절함 쪽에 가까웠다. 하지만 두 사람은 케이건의 친절이 필요한 만

큼 정확한 분량만 계량되어 사용되곤 한다는 기분을 받았다.

예를 들어, 케이건은 상식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지시를 말했다. 더워질

수록 두꺼운 옷을 입어라. 주위에 나가가 있는 것 같으면 최대한 소란을

떨어라. 추적을 당하게 되면 최대한 천천히 도망쳐라. 그래도 발각될 것

같으면 사방이 노출된 바위 위로 올라가라. 티나한과 비형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고  그러자 케이건은 그  지시들에 대해 설명했

다. 더워질수록 나가들을 만날 확률이 높으니  체온을 감추는 두꺼운 옷

을 입어야 한다. 나가들이 소리를 듣고  쫓아올 리는 없으니, 주위에 나

가가 있는 것 같으면  최대한 시끄럽게 굴어서  키보렌의 야생 동물들을

사방으로 도망치게 만들어 온도를 보는 나가의  눈을 속여야 한다. 쓸데

없이 빨리 움직임으로써 체온을 상승시켜  나가들에게 좋은 표적이 되어

줄 이유는 없으니 추적을 당하게 되면 오히려 천천히 움직여야 한다. 한

낮의 열대에서 노출된 바위는 대단히 뜨거우므로 그 위에 올라가 앉아있

으면 나가는 뜨거운 사람과  뜨거운 바위를 구분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

다. 비형과 티나한은 감탄하며 웃을 준비를  했다. 만약 케이건이 말 끝

에 '참 신기하죠?' 등으로 말하며 가볍게 미소를 짓기만 했다면 두 사람

은 동의의 웃음을 보내며 그 사실들에  대해 한동안 즐겁게 담소를 나누

었을 것이다. 하지만 케이건은  농담도, 미소도 없이  다음 지시 사항을

말하기 시작함으로써 웃을 준비를  갖추고 있던 두  사람을 당혹하게 했

다.

케이건의 친절은 그런 식이었다. 필요하다고 여겨지면 케이건은 설명을

듣는 쪽이 미안해질 정도로 끈기있게 설명했다.  하지만 그 설명의 어떤

대목에서도 웃거나 미소 짓지는 않았다. 두어 시간 후 케이건이 "이야기

한 사항들을 모두 숙지하셨소?"  라고 말했을 때,  숙지하기는커녕 벌써

가물가물, 그토록 귀한 지식들이 마구 헷갈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숙지했어."

다음날 황혼 무렵, 그들은 얼굴에 증오와 안도감을 동시에 담은 주인을

뒤로 한 채 푼텐 사막 남쪽을 향해 떠나갔다. 비형과 케이건은 딱정벌레

에 탔고 티나한은 그들의 뒤를 따라 달렸다.

케이건이 딱정벌레에 익숙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비형은 좌절감을

느꼈다. 비형은 케이건에게 설명이란 어떻게 하는 것인가를 보여줄 심산

이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태연하게 딱정벌레에  올랐고 체절판의 어디를

건드려야 되고 어디를 건드리지 말아야 하는가를 몸에 밴 사람처럼 구별

해냈다. 그리고는 절망적으로 트집  잡을 것을 찾던  비형을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케이건의 앉음새에서 잘못된 점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

한 비형은 허둥지둥 케이건의 앞에 앉았다.

세 사람은 사막의 밤을 가로질렀다.

먼 곳에서 그들을 보는  방랑자가 있었다면 그  장대함과 소란스러움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딱정벌레의 날개 소리는 광포했고 사막의

모래 위를 질풍처럼 달리는  티나한의 뒤쪽에는 작은  모래 폭풍이 생길

지경이었다. 그 때문에 그들의 모습은 고대의  이름 없는 괴수가 포효하

며 사막을 달려가는 것처럼  보였다. 딱정벌레처럼 생긴  머리와 모래로

이루어진 몸을 가진 불가해한 괴수.

하지만 그토록 요란한 모습으로 달려가는 세  사람은 보기 드물 정도로

과묵한 여행자들이기도 했다. 케이건과 비형은 그들 양쪽에서 굉음을 울

리며 움직이는 날개 때문에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불가능했고 그들

의 아래쪽을 달리는 티나한  또한 당연하게도 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푼텐 사막이 생긴 이래 가장 소란스러운 여행

자들이었으며 동시에 가장 고요한 여행자들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소란 속에서 침묵하며 키보렌을 향해 달려갔다.

냉혹의 도시 하텐그라쥬는 고요 속에서 소란스러웠다.

나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행사가  있는 오늘 같은  날에도 하텐그라쥬는

건설된 이후로 항상  그러했듯이 고요했다. 그곳에서는  어떤 말소리도,

고함도, 노래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정신의 언어를  들을 수 있는

존재라면 하텐그라쥬의 대로와 건물,  골목과 광장을 가득  메운 니름에

넋을 잃을 지경이 될 것이다. 흥분한 어린 나가들은 거칠다 싶을 정도로

정신을 열어젖히고 있었고 그들의 호위자들은 그것을 말리기는커녕 오히

려 부추기고 있었다. 거기에는  목소리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전장(戰場)에서처럼 모두가  흥분하여 제멋대로 떠들

고 고함을 지르는 곳에서는 침묵을 지키는 인간이 오히려 불쾌감과 불안

을 느낀다. 주위의 난폭한 감정과  정신들에 동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니름을 사용하는 나가들은 그런 작용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하며, 따라서

모두가 흥분하여 정신을 열어젖히고 떠드는  이곳에서 억지로 정신을 닫

아거는 것은 정신에 대단히 해롭다.

그래서 륜 페이는 대로 가운데서 허물어지듯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는 지금껏 완고하게 정신을 닫아걸고 있었다.

륜을 호위하던 남자들은 당황하여 륜을  둘러보았다. 주위에는 심장 적

출을 하기 위해 심장탑으로 향하는 나가들이 가득했고 그들은 모두 이쪽

을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었다. 다행히 호위자들 중 경륜이 많은 늙은 나

가가 재빨리 지시를 내렸다. 호위자들은 륜을  들어올려 옆 건물의 계단

에 기대어 앉게 했다. 쏘바라는 이름의 늙은 나가는 다른 호위자들로 하

여금 주위를 가리도록 명령한 다음 조심스럽게 륜을 관찰했다.

[륜? 정신 차려라, 괜찮으냐? 나 쏘바다.]

륜은 두 눈을 쏘바에게 향하고 있었지만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륜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던 쏘바는 문득 륜이 입을 뻐끔거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륜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쏘바는

당황하며 청각에 주의를 기울였다. 청각을  사용한지가 너무 오래되었기

에 쏘바는 한참 후에야 륜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

"안 돼… 갈 수 없어. 안 돼…"

쏘바는 륜이 왜 이런 행동을 보이는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의 과

거 경험 속에서도 적출식 때 이런 모습을 보였던 어린 나가들이 있었다.

물론 륜처럼 심각한 모습을 보인 나가는 없었지만.

[정신차려, 륜! 괜찮아. 아무런 일도 없어.]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다고!"

[죽는 것이 아냐. 심장을 꺼낼 뿐이야. 오히려  죽음을 피하게 되는 거

야. 자, 진정해. 륜.]

"아냐, 죽는 거야. 죽게 될 거야. 그렇게, 나도, 나도!"

나도? 페이 가문에 적출식 도중에 사고를  만난 사람이 있었나? 쏘바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의 호위자들을 둘러보았지만 대답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자들이 가문의 일을 알  리가 없다. 다시 륜을 돌아본

쏘바는 륜이 허리에 찬 사이커를 꽉 움켜쥐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륜이

칼부림이라도 할까 두려워진 쏘바는 륜의 어깨를 눌렀다.

[죽지 않아. 절대로 그런  일은 없어. 륜. 자,  일어나. 적출식을 하지

않으면 오히려 죽는 거야! 더운 피 때문에 사냥당하게 돼!]

"싫어! 싫어! 그러지 않을 거야. 아무도 내 심장을 가져갈 수 없어! 집

에 돌아가, 집에 돌아가요!"

쏘바는 낭패감 때문에 어쩔 줄을 모르게 되었다.  그는 누군가 이 난국

을 해결해줄 사람이 없나  찾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때 그의 눈에

어떤 사람이 들어왔다. 쏘바는 날카로운 니름을 발했다.

[화리트! 수련자 화리트!]

대로를 걸어가던 화리트는 느닷없이 자신에게  쏟아져오는 니름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를 호위하고 있던 카루와 스바치는 검을 움켜쥐기까지

했다. 세 나가는 곧 이상한 모습으로 몰려있는 나가들을 발견했다. 화리

트는 그들의 등 뒤에 주저앉아 있는 친구의 모습을 발견했다.

[륜?]

화리트는 황급히 걸어가려 했다. 그러나 그 때 스바치가 화리트의 팔을

움켜잡았다. 스바치는 화리트에게 정신을 집중시키며 닐렀다.

[안돼. 함정일지도 모른다.]

화리트는 당황했지만 정신을 집중할 수는 있었다. [함정?]

[우리 계획이 들킨 건지도 몰라.]

[륜은 그런 것과는 관계가 없어요! 오히려 가지 않으면 더 수상하게 여

겨질 텐데요?]

스바치는 고개를 가로젓고 싶었다. 륜  페이 주변에 몰려있는 나가들은

너무 많았다. 하지만 화리트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스바치와 카루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재빨리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의 의구심은 쏘바가 반가운 니름을 보내었을  때야 겨우 해소될 수

있었다.

[자네 여기 있는 륜의 친구지? 이 친구를 좀 달래줄 수 있겠나? 적출공

포증인 것 같아. 우리는 이 친구에 대해 도통 알지를 못하니.]

화리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륜의 옆에  걸터앉았다. 륜은 화리트를 보지

못한 것처럼 계속 하늘을 향해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목소리를 내고 있어.]

쏘바가 설명했을 때 화리트 역시 그것을 깨달았다. 화리트는 청력에 주

의를 기울였다. 그러자 곧 륜의 흐느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으로 돌아가, 안돼! 집은 안돼.  집에는 갈 수 없어.  나는 갈 곳이

없어. 나는 죽을 거야. 나는…"

화리트는 륜의 상태가 대단히  심각하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륜의 어깨를 부여잡은 다음,  화리트는 자신의 정신을  최대한 집중시켜

마치 송곳 같은 형태로 만들었다.

[디듀스류노 라르간드 페이!]

최대한 집중된 화리트의 니름은 주위의  나가들에게 들리지 않았다. 하

지만 사람들은 륜의 모습에 변화가 생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륜은 눈

을 껌뻑거리더니 화리트를 돌아보았다.  초점을 잃은 채  방황하던 그의

눈에 화리트의 모습이 어리기 시작했다.

[아스화리탈 세파빌 마케로우?]

륜의 집중되지 못한 니름은 주위  사람들에게도 들렸다. 다른 사람들은

이 이상한 호칭에 의아해 했으나 카루와  스바치는 그 니름에 흠칫했다.

그들은 재빨리 서로를 쳐다보고는 그들이 잘못 듣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

했다. 화리트는 륜의 어깨를 꼭 부여잡으며 계속해서 륜에게만 닐렀다.

[좋아. 륜. 정신차려. 일어날  수 있겠어? 아니,  이 니름은 잊어버려.

잠시 앉아있는 것이 좋을 것 같군.]

화리트가 집중된 니름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가까스로  깨달은 륜은

자신의 정신을 집중시켰다.

[내가 어떻게 된 거지? 여기는 어디야?]

화리트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센 저택의 대문 앞이야. 네가 어떻게 된 건지는 오히려 이쪽에서 묻고

싶은데.] 화리트는 적출공포증이라는 니름은 꺼내지 않았다. [무슨 생각

을 했지?]

[생각?]

륜은 그렇게 닐렀지만 그  얼굴은 마치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니름을 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화리트의 눈에 륜

이 꽉 움켜쥐고 있던 사이커가 들어왔다.  화리트는 그 사이커를 턱으로

가리켜보였다.

[가문의 선물이야? 근사해 보이는군.  난 끈 자를 때나  쓸모가 있을까

싶은 단검 한 자루 받았어.]

륜은 화리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자신의 허

리를 내려다보았다. 륜의 시선은 그  사이커에 고정되었다. 화리트는 륜

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잠시 후, 륜이 다시 정신을 열었을 때 그 니름은 어색할 정도로 안정되

어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꼴불견을 보인 모양이군. 도와줘서 고마워, 화리트.]

[뭐? 아, 그래. 일어날 수 있겠어?]

[내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손이 사라진다면. 어깨가 아픈데.]

화리트는 가까스로 쓴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화리트가 손을 치우자 륜

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마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했다는 듯

이 툭툭 털고 일어났다. 그러나 륜은  다시 움찔하며 멈춰섰다. 륜의 시

선을 따라가본 화리트는 심장탑을 보게 되었다.

화리트는 륜의 어깨를 툭 쳤다. 륜은 잠에서 깨어나듯 흐리멍텅한 눈으

로 화리트를 돌아보았다. 화리트는 이럴 때 어떻게 닐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륜, 가야지?]

[응? 아, 그래. 가야지.]

하지만 륜은 여전히 발을 뗄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화리트는 좀 더 친

구와 있어주고 싶었지만 저쪽에서 스바치와  카루가 초조한 표정으로 쳐

다보고 있는 것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럼 심장탑에서 보지. 잘 갈 수 있는 거지?]

[물론이야.] 전혀 그렇게 들리지 않았지만  륜은 반복해서 닐렀다. [물

론 갈 수 있어.]

륜의 호위자들은 화리트가 륜과 동행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호위자의 숫자가  비슷하다면 모를까, 지금처럼  한쪽의 호위자

숫자가 너무 적을 경우 함께 걸어가는  것은 다른 가문에 호위를 의탁하

는 것처럼 보일 가능성이 높다. 지체  있는 가문에서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물론 그들의 상상력이 약간 더  풍부했다면 화리트가 잠시 후면

상관없어질 가문의 명예에 그렇게 크게 신경쓰지 않을 점이라는 것을 알

아차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  정도의 상상력은 없었고, 그

래서 륜의 호위자들은 화리트에게 감사한 다음 륜과 함께 앞장서 걸어갔

다.

뒤에 남겨진 화리트는 슬픈 표정으로  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화리

트의 감정은 그로 하여금 친구의 고통을  감싸주며 함께 걸어갈 것을 요

구하고 있었지만 그의 이성은 동료들과 함께  있을 것을 종용했다. 가까

이 다가온 카루는 고개를 내저으며 닐렀다.

[열흘 전의 네 방문이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나 보군. 화리트. 적출

공포증이라는 니름은 들었지만 저렇게 심한 경우는 처음 봤는데. 심장탑

에서 난동이라도 부리지 않을지 걱정되는군.]

[수호자들은 그를 잘 다룰 겁니다.]

[그러길 바래야겠군. 칼도 큼직한 것을  찼던데, 난동을 부리면 큰일이

겠어.]

화리트는 더 이상 륜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걸음을 떼며

이야기를 돌렸다.

[그럼 하던 이야기나 계속하지요. 무룬강을 어떻게 알아보죠?]

[그건 걱정마. 그것과 같은 강은 어디에도 없다. 북쪽으로 죽 올라가다

가 반대쪽 기슭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큰 강을  만나면, 그게 무룬강이

야. 못 보고 지나치기가 어렵지.]

[제가 호수나 바다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물맛을 보면 바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테고, 흐르고 있으니

호수가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을 거다.  그 다음은 물이 흐르는 방향을

거슬러 올라가면 돼. 아주 간단하지.]

그리고 스바치와 카루는 야외 생활에  대한 조언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들이 경쟁적으로 들려주는 지혜를 정리하며 다음과 같다. '키보렌에서

나가가 굶어죽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사냥에 충분히 능숙해지

기 전까지는 그런 황당하고  수치스럽기까지 한 사망의  가능성도 있다.

심장을 뽑은 나가는 사고로 죽지는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고 언제나 과감

하게 행동하라.' 흥이 오른 카루는 자신의  첫 사냥 때 멧돼지의 엄니에

꿰인 채로 질질 끌려가면서도 그 목을  졸라 죽였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

기를 꺼내어 화리트를 몽롱하게 만들었다. 만약 화리트가 이전에 멧돼지

를 보았다면, 즉 졸라죽인다는 것이 불가능한  그 두꺼운 목을 보았다면

웃음을 터뜨렸을지도 모른다.

호위자들과 헤어져 심장탑 안으로 들어왔을 때, 륜 페이는 이미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달아나겠어.' 그러나  주의할 점이 있는데,  륜이 그런

결심을 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륜 페이는 11살 때

그 결심을 했다.

따라서 심장탑에 들어서는 순간 륜의 생애 중 11년은 소나기를 맞은 흙

덩이처럼 힘없이 녹아 사라져갔다. 결과적으로 륜은  그 순간 11살 소년

으로 돌아가버렸다. 물론 륜 자신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고, 그래서 륜은

자신이 22살 청년의 이성과 판단력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심장탑 1층의 홀에 아무와도 눈을 마주치기  싫다는 듯한 얼굴로 서있다

가 느닷없이 복도를 향해 질주하는 것이 과연 성인의 행동인지는 의심스

럽다. 어쨌든 륜이 달려갈 때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나가가 최소한

일곱 명은 넘었다.

언제 수호자들이 와서 그들을 데려갈지 모르는 상태에서 자리를 비운다

는 것은 절대로 상식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하지만 놀란 나가들이 륜을

부르기도 전에 륜은 이미 복도 저  안쪽으로 사라져버렸다. 나가들은 잠

시 당황했지만 그들 역시 자리를 비울  마음은 들지 않았기에 잠자코 기

다리기로 했다.

륜은 복도를 달리면서 한 가지 생각만 하고 있었다. '다른 출입구를 찾

아야 해.' 정문으로는 나갈 수 없다. 심장을 가진 상태로 나가들이 잔뜩

기다리고 있을 정문으로 나갔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호

위자들도 더 이상 없었다. 심장탑에서 나올  처녀들에게 관심이 없는 륜

의 호위자들은 모두 페이 저택으로 돌아갔을  테고, 설령 그들이 남아있

었다 하더라도 심장을 가진 륜을 보호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심장에 생각이 미친 륜은 기겁하며 멈춰섰다.

그는 자신의 가슴을 만져보았고  심장이 격렬하게 뛰는  것을 깨닫고는

공포에 빠져버렸다. 물론 심장탑의 수호자들은 심장을 가진 륜을 보더라

도 놀라거나 하지는 않고 대신 길을  잃었겠거니 생각해줄 것이다. 하지

만 수호자들에게 발각될 경우  륜은 꼼짝없이 끌려가  적출을 당할 것이

며, 그것은 륜으로서는 절대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귀결이었다.

다행히 륜은 심장탑의 내부  구조를 알고 있었다. 완벽하게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어디 쯤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주위를 둘러보며 오래 전의 기억을 더듬던  륜은 자신이 동쪽 계단에 가

까이 다가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쪽 계단을 통해  올라가면 전시실과

창고, 특수 도서실 등이 나타난다는 것을 떠올린 륜은 그 시설들이 모두

적출식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속으로  쾌재를 올렸다.

심장탑의 모든 수호자들은 적출식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결정

을 내린 륜은 재빨리 동쪽 계단을 향해 나아갔다.

하지만 2층의 전시실과 창고에 다다른 륜은  낭패감을 느껴야 했다. 적

출식 행사에 바쁜 수호자들은 그 시설들을  모두 잠궈두었다. 당연한 조

처였지만 륜은 자신이 숨어들  것을 간파하고 미리  잠궈둔 것은 아닌가

하는 비이성적인 공포까지 느꼈다. 어쩔  수 없이 3층으로 올라가면서도

륜은 불안한 심정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3층에 있는 특수 도서실은 언제

나 개방되어 있지만 거기엔 사서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3층에 도착한 륜은  사서의 자리가 비어있음을  발견했다. 륜은

잠시 고민해볼 겨를도 없이 황급히 도서실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연 다음

에야 륜은 사서가 혹 도서실 안에  들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

올리고는 얼어붙고 말았다. 하지만 도서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륜은 재빨리 도서실 안으로 뛰어든 다음 문을  도로 닫았다. 그 순간에

는 륜 또한 소리라는  것에 신경쓰지 않는 나가였다.  문은 부서질 듯한

엄청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심장탑의 홀에 들어선 화리트는 여기저기서  웅성거리고 있는 나가들을

보며 공황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22년  동안 자신의 집과 심장탑, 그리

고 친구의 집 정도만을  오갔던 나가에게 그렇게  많은 나가들의 모습은

당연히 충격으로 다가왔다. 물론 도로에서도 많은  나가들을 볼 수 있지

만 그 때엔 언제나  호위자들이 함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혼자였

다.

가까스로 화리트는 다른 자들 또한 같은  기분일 거라는 사실을 떠올렸

다. 그러자 화리트는 약간의 우월감 같은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수련자

인 화리트에게 심장탑은 익숙한 건물이었다. 다른 자들은 아마도 화리트

보다 훨씬 주눅들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홀을 둘러본 화리트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

다. 나가 처녀들은 청년들에게 적출식이 끝난 다음 방문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느라 여념이 없어서 심장탑의  내부 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청년들 또한 자신들끼리 어떤 저택의 누가 가임기라느니

어떤 저택이 느긋하게 머물기 좋으니 하는 이야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

었다.

수련자인 그에겐 아무 관련이 없는 내용들이었기에 화리트는 어떤 대화

에도 참여하지 않은 채 조용히 홀을  가로질렀다. 홀을 가로지르던 도중

화리트는 페이 가문의 이름이 여러번 거론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화

리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들 중 정말 페이 저택을 방문할 만큼 용감한

청년은 별로 없을 것이다. 언제나 많은  방문자들이 머무르는 페이 가문

에 방금 심장을 적출한 청년이 찾아갔다간  풋내기 취급을 당할 것이 분

명하다. 아마도 청년들 중 대부분은 적출식 직후에 찾아온다는 허탈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며 하텐그라쥬를  떠나 방랑을 시작할 것이

다. 청년들에 대한 처녀들의 안달은, 따라서 언제나 실패로 끝날 가능성

이 높다. 화리트는 더 이상 그들에게 신경쓰는 대신 륜을 찾아보기로 했

다.

[화리트 마케로우.]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화리트는  깜짝 놀랐다.

그에게 니름을 보내온 것은 홀 옆, 복도의 그림자 속에 서있던 수호자였

다. 하지만 수호자라면 화리트를 그런 식으로 부를 리가 없다. 화리트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단 예를 차렸다.

[따라와라.]

두건을 깊숙히 내려쓴 수호자의 니름은  지나치게 단순했다. 개성이 거

의 생략된 채 의미만을 전달하는 니름이었다. 나가의 니름은 불신자들의

말과 달리 이렇듯 완전히 무개성하게 발산될 수 있다. 자칫하면 누가 니

른 건지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에 거의 그러지 않지만.

화리트는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예의있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적출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단순하게 닐러라. 다른 자들의  주의를 끌지 않도록. 네가  오기 직전

륜 페이가 도망쳤다.]

화리트는 깜짝 놀라면서도 자신 또한 니름을 단순화시켰다.

[도망이오?]

[그래. 특수 도서실로 도망쳐서 그곳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적출공

포증인 것 같다. 네가 와서 달래줘야겠다.]

니름을 단순화시킨 덕분에 그와 수호자의 대화에 신경쓰는 사람은 없었

다. 화리트는 수호자가 왜 저런 이상한 니름을 니르는 건지 깨달으며 조

심스럽게 걸음을 뗐다. 조금 전 무턱대고  달려갔던 륜과 달리 화리트는

천천히 움직이며 다른 자들의 주의를 끌지 않은 채 홀에서 빠져나갔다.

화리트가 복도로 들어서자  수호자는 빠르게 동쪽  계단으로 걸어갔다.

화리트는 그 뒤를 쫓으며 질문했다.

[혹시 누구를 다치게 하지는 않았습니까?]

[아직 그러지는 않았다. 늦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륜 페이는 눈 앞에 쓰러져 있는 시체를  보며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일반적으로 심장을 뽑아낸 나가는 사고로는  죽지 않는다. 질병에도 걸

리지 않으며 몸의 일부가 잘려도 빠르게  재생한다. 하지만 완전히 불사

체라고는 할 수 없는데, 지금 륜의 앞에  놓여있는 시체처럼 그 몸이 두

자릿수 이상의 조각들로 나눠진다면 제아무리  나가라도 죽지 않을 도리

가 없다.

하지만 그 시체에는 여전히 나가의 특징이 남아있었다. 륜은 덜덜 떨리

는 무릎을 힘겹게 구부려 시체 조각들 사이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시체 조각들 사이에서 니름이 들려왔다.

[돌려… 다오.]

륜은 심하게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져 있는 머리를  툭 건드렸다.

머리는 한번 기우뚱했지만, 똑바로 뒤집어지지  않았다. 륜은 이를 악물

며 그 머리를 들어올린 다음 똑바로 돌려놓았다.

한쪽 눈은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고 다른쪽  눈 또한 심하게 부어있었지

만, 어쨌든 잘려진 머리는 륜을 똑바로 보게 되었다. 걷잡을 수 없는 공

포에 륜이 혼절하기 직전 그 머리가 미약한 니름을 보내어왔다.

[라르간드…?]

륜은 흠칫하며 다시 머리를 직시했다.  끔찍한 몰골이었지만 륜은 가까

스로 그 얼굴에서 자신이 알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유벡스? 유벡스 사서님이십니까?]

특수 도서실의 사서인 유벡스는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물론 무의미한

행동이다. 목이 잘리면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법이다. 유벡스는 그 사

실에 당혹해하다가 겨우 닐렀다.

[그런데… 너, 어떻게 여기로 들어온 거냐?]

[저, 저는 적출식 때문에…]

[어떻게 특수 도서실에… 들어온 거냐? 사서인  내가 허락해준 적이 없

는데…]

머리가 잘린 것 때문인지 유벡스는  정신이 혼미스러운 듯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그의 니름은 계속  희미해지고 있었다. 죽었다고도, 살

았다고도 니를 수 없는 상태에서 그  니름이 더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마음이 급해진 륜은 엉겁결에 그 머리를 붙잡고 흔들 뻔

했지만 머리에 손이 닿기 직전 기겁하며 손을 도로 끌어당겼다.

[사서님께 누가 이런 짓을 했습니까?]

유벡스는 멍한 눈으로 륜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뭔가를 깨달은 듯했다.

[나, 공격당했어…? 라르간드. 내가 죽…었나?]

[누가 그랬습니까? 누가 사서님을 이렇게 해놓았습니까?]

유벡스의 머리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니름으로도,  표정으로도. 륜은

사서가 마침내 죽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륜이  일어나려 할 때 유벡스

의 머리에서 가느다란 니름이 흘러나왔다.

[마케로우…]

륜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마케로우라니? 륜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화리트가 특수 도서실의 사서를 난자한 다음 서가

뒤편에 숨겨놓을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륜은 다시 무릎을 꿇은 다음

유벡스의 머리를 향해 있는 힘껏 정신을 쏟아부었다.

어떤 정신의 흐름이 느껴졌다. 유벡스의 정신인 줄 알고 반가워하던 륜

은, 그러나 잠시 후 방향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 특수도서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공포가 되살아났다.

륜의 눈길은 사서의 시체를 향하고 있었지만 륜이 보고 있는 것은 요스

비의 지독했던 마지막 모습이었다. 거의 무의식  중에 륜은 유벡스의 몸

이 숨겨져 있던 서가 뒤편으로 숨어들었다. 그곳은 눈길이 거의 닿지 않

는 곳이었다. 유벡스의 미약한 정신이 아니었다면  륜 또한 유벡스의 시

체를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륜이 그 은밀한 곳에 몸을 숨겼을 때 도

서실의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륜에겐 너무도 익숙한 니름이 들려왔다.

[륜! 륜 페이!]

화리트의 니름이었다. 친구의 절절한 니름을 들은 순간 륜은 일어설 뻔

했다. 그러나 친구의 이름을 니르기 직전, 륜은 자신이 도망자라는 사실

과 유벡스의 마지막 니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륜은  다시 몸을 웅크렸

다. 그리고 서가에서 책 하나를 살짝  밀어내었다. 그러자 책 사이로 틈

이 생기며 문쪽을 훔쳐볼 수 있게 되었다.

문쪽에 서있는 것은 화리트를 보았을 때  륜은 다시 일어서고픈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화리트의 뒤편으로 수호자 한 명이 걸어오는 것을 본 륜

은 다시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화리트의  뒤를 따라온 수호자는 두건

을 깊숙히 내려쓰고 있어서 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수호자의 옷만으로도

륜의 두려움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두려움에 빠진 륜은 자폐증을 일으

킬 정도로 자신의 정신을 심하게 폐쇄했다.

그 때, 륜은 이상한 것을 보았다.

화리트의 뒤를 따라온 수호자가 문 옆쪽의 서가로 다가갔다. 그의 손이

서가 위쪽을 더듬었고 잠시 후 그 손엔 피  묻은 사이커 한 자루가 들려

졌다. 륜이 혼란과 공포 때문에 굳어있을 때, 수호자는 천천히 화리트의

뒤편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수호자는 무방비하게 서있던 화리트의 등을 향해 사이커를 휘둘

렀다.

륜은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 비명은 그의 내부에서만 메아리쳤다.

륜은 깨닫지 못했지만 그는 아직도 정신을 닫아걸고 있었다.

사이커의 경이적인 예리함 때문에  화리트는 잠깐 동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조금  후 화리트는 힘없는 신음

을 토하며 아래로 무너졌다. 동시에 그의  등에서 피가 세차게 뿜어져나

왔다. 아직 심장을 가지고  있기에 화리트의 몸에선  무지스러운 기세로

피가 뿜어져나왔다. 수호자는 옆으로 슬쩍 움직여 그 피를 피했다.

[왜…?]

화리트는 엎드린 채 니름을 발했다. 수호자는 빙긋 웃으며 화리트의 몸

을 걷어찼고 그러자 화리트는 똑바로 눕게  되었다. 그 얼굴을 향해, 수

호자는 천천히 두건을 들어올렸다.

숨어있던 륜과 화리트가 동시에 그 이름을 외쳤다.

[비아스 마케로우!]

비아스는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 어리석은 동생아.]

[약을 쓸 줄 알았는데… 이런 단순한 방법을…]

[단순한 방법이 항상 최고지.  삶의 철학으로 삼으렴. 물론  그 철학을

오랫동안 지키긴 어렵겠구나.] 화리트의 몸에서 쏟아져나오는 피를 보며

즐거워하던 비아스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덧붙였다. [넌 그 녀석처럼

여러 번 내려칠 필요는 없겠군.]

화리트가 경련을 일으켰다.

[륜? 설마 륜을?]

[아니. 내가 니르는 건 특수 도서실의 꼬장꼬장한 사서 유벡스야. 약술

서적을 좀 찾아봐야겠다고 닐렀더니 좋아하며 안내해주더군.]

[그럼 륜은?]

[륜 페이가 도망쳤다는 건 사실이야. 아까  홀에서 너를 기다리다가 그

녀석이 도망치는 모습을  봤어. 지금쯤 탑  안 어딘가를  방황하고 있겠

지.]

비아스는 거의 자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친절하게 대답하며 서가 위쪽을

다시 더듬었다. 그 위에서 커다란 양피지 뭉치 같은 것을 꺼낸 비아스는

책상 위에 그것을 펼치더니 그 위에 사이커를 놓고 양피지를 말았다. 그

다음 비아스는 입고 있던 수호자의 옷을 벗은 다음 그것을 뒤집었다. 그

러자 수호자의 옷은 나가의 학자들이 즐겨  입는 외출복 비슷한 것이 되

었다.

옷을 다시 입은 다음 책상 위에 놓인 양피지 뭉치를 집어들자 비아스는

고명한 약술사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숨어있던 륜은 마술을 보는 기분이

었고 그것은 쓰러져있던 화리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아스는 쓰러진 동

생에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내었다.

[네 피는 정말 아름답군, 화리트. 못 잊을 것 같은데.]

[당신은… 정상이 아니야. 비아스.]

[글쎄. 피를 줄줄 흘리며 쓰러져 있는 건  그쪽이야. 정상이 아닌 쪽이

누구인 것 같아?]

냉혹하게 대답한 비아스는 갑자기 허리를  숙였다. 숨어있던 륜의 입에

서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비아스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 채 쓰러져 있는

화리트의 입술에 키스했다. 화리트는 기겁하며 외쳤다.

[저리 치워!]

하지만 비아스는 한참 후에야 입을 뗐다. 똑바로 일어선 비아스는 혀로

입술을 핥은 다음 우아하게까지 느껴지는 미소를 지으며 닐렀다.

[잘 있어, 동생.]

그리고 비아스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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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역시 괴상한 글입니다.

케이건의 검에 대한 도해를 올렸더니 세로로 두 날인지 가로로 두 날인

지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계시는군요. 너무 간단한 도해였나 봅니다. 등

에 건다는 설명으로 처리가 될 줄 알았는데. 하하.

두 개의 칼날은 평면으로  나란히 배열되어 있습니다. 단면도를 그려본

다면 - - 와 같은 형태가 되겠죠. ││ 같은 형태라면, 한 번 휘두를 때

마다 두 번씩 베는 좋은 효과가 있겠습니다만  등에 걸어두면 옷을 무지

하게 베어먹을 테니 칼집 없이 걸어두기는 힘들겠죠.

좋은 밤 되세요.

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1-4.                         관련자료:없음  [51882]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3-21 01:23  조회:13336

눈물을 마시는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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