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은루(銀淚) - 2
다행히도 티나한은 그가 혐오하는 도깨비의 인격적 결점이나 종족의 악
습에 대해 말하지는 않았다. 티나한이 도깨비에게 가진 불만은 단 하나,
도깨비들이 절대로 하늘치에게 다가가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비
형은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를 물었고 티나한의 설명을 듣자 반색하며
외쳤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군요! 하늘치 유적 발굴자! 맞습니까?"
티나한은 주막 주인이 가져온 술통의 뚜껑을 열며 우울하게 말했다.
"그래. 너희 도깨비들이 도와줬으면 이미 하늘치의 등을 밟았을 거다."
"하지만 딱정벌레가 절대로 하늘치에게 다가가려 하지 않는데 저희들로
서도 무슨 도리가 있겠습니까. 저희들 중에도 하늘치 유적에 뭐가 있는
지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딱정벌레가 도통 말을 듣지
않아요. 가장 잘 훈련된 딱정벌레도 하늘치만 보면 고양이 본 쥐처럼 달
아나버려요. 그런 설명을 못 들었습니까?"
"들었어.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실험도 한 번 해봤고. 정말 달아나더
군. 얼어죽을. 딱정벌레에게 수화까지 가르치는 너희들인데 왜 하늘치가
온순하다는 것은 가르쳐줄 수 없는 거냐? 엉?"
"하늘치가 정말 공격적이지 않다면 '성난 하늘치 같다'는 속담은 생기
지 않았을 거라 생각되지 않아요?"
"그 웃기는 속담은 나도 지겹도록 들어봤어. 하지만 나는 진짜 성난 하
늘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그거 틀림없이 사실 무근일 거야. 하늘치
가 워낙 크다 보니까 그 모습에 지레 겁을 집어먹은 얼간이들이 아무 생
각 없이 만들어낸…"
그 때 조용히 있던 케이건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꼭 그렇진 않소."
티나한과 비형은 케이건을 돌아보았다. 케이건은 담담하게 말했다.
"성난 하늘치는 있었소. 그 하늘치가 왜 분노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
소. 그 하늘치를 분노하게 한 왕국이 지상에서 사라졌거든."
티나한은 고개를 갸웃했다.
"왕국? 아, 그 왕이라는 것이 있던 시대의 이야기야? 옛날 이야기군."
"옛시대의 전승이오. 하지만 분명히 그런 일이 있긴 했소."
"하지만 그런 옛날 이야기를 어떻게 믿을 수 있냐? 그것도 어느 잡것이
만들어낸 이야기일지 모르잖아."
"하인샤 대사원에 가보면 확인할 수 있을 거요. 그곳 서고에는 승려들
이 악착같이 지켜온 기록들이 있으니까. 그리고 대사원의 이야기가 나왔
으니 말인데, 이제 우리 일정에 대해 이야기했으면 하오만."
케이건은 속으로 안도했다. 비형과 티나한이 동의의 고개짓을 보내어온
것이다. 케이건은 곧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말, 그러니까 죽은 말을
꺼내어놓았다.
"내가 알기로 딱정벌레에는 두 명까지 탈 수 있소. 그리고 티나한 당신
은 딱정벌레에 뒤지지 않을 정도의 속력으로 사막을 달릴 수 있소. 따라
서 내일 낮에는 자두고, 내일 일몰에 이곳을 떠났으면 하오. 나와 비형
이 딱정벌레에 타고 티나한 당신은 달리는 거요. 그러면 모레 아침까진
충분히 푼텐 사막 남쪽에 도달할 수 있을 거요. 그 시점에서 딱정벌레를
돌려보내고 휴식을 취한 다음 키보렌으로 들어갑시다."
비형과 티나한은 당황했다. 그들은 논의가 될 거라 생각했지만 케이건
의 말은 지시에 가까웠다. 물론 그 말은 명령이 아닌 청유였지만 제반지
식이 전혀 없는 두 사람으로서는 동의 외엔 할 것이 없었다. 그런 사태
가 계속될 것을 짐작한 비형은 손을 들어 케이건의 말을 중단시켰다.
"말을 끊어서 미안합니다만, 케이건. 아무래도 우리 둘은 당신 말에 고
개를 끄덕이는 것 이외엔 할 것이 없을 것 같은데요. 솔직히 저는 나가
에 대해서는 그들이 심장을 뽑고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 이외에는 별로
아는 것이 없고 키보렌에 대해서는 거기에 나무가 끔찍하게 많다는 것
외에 아무 것도 몰라요. 당신은 어때요, 티나한?"
티나한은 부리를 약간 뒤틀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형은 다시 케이건을
돌아보았다.
"이런 상태니 우리에게 일일이 동의를 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당신이 필요한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냥 당신이 지시하고
우리가 따르는 식으로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길잡이'라면서
요?"
"하지만 당신들도 필요한 사항들을 알고 있어야 하오. 만약 내가 키보
렌에서 죽으면 어떻게 할 작정이오?"
"그런 일이 있어선 안되겠지만, 혹여나 그런 일이 벌어지면 저는 주위
에 온통 불을 지른 다음 최대한 빨리 북쪽으로 도망칠 겁니다. 당신이
만약 죽게 되면 남은 건 둘뿐이죠. 둘로는 하나를 상대할 수 없어요. 셋
만이 하나를 상대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케이건은 한숨을 쉬었다.
"역시 좀 알아야겠군. 당신 장기를 발휘하겠다는 건 절대로 좋은 의견
이 아니오. 온도를 보는 나가들은 그 불을 누구보다도 빨리 파악할 거
요. 잠시 주위의 나가 정찰대를 쫓아버릴 수는 있겠지만, 곧 사흘 거리
내에 있는 나가 정찰대를 모조리 불러모으게 될 거요. 그 수목애호가들
은 나무를 불지른 당신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요. 소드락을 잔뜩 복
용하고 달려들 그 수많은 나가들 앞에선 티나한의 철창도 아무 소용이
없을 거요."
자신에 대한 폄하보다 자신의 무기에 대한 폄하를 더 큰 모욕으로 느끼
는 것이 레콘이지만, 불행하게도 티나한은 자신의 철창을 가소롭게 여기
는 이 발언에 대해 화를 낼 수 없었다. 케이건의 말 중에 의미를 모르는
말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티나한은 '온도를 본다'거나 '나가
정찰대', '수목애호가', '소드락' 등이 무슨 말인지 질문했다. 비형 역
시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케이건은 충격을 받았다.
그제야 케이건은 한계선 이북과 이남이 얼마나 오랫동안 단절되어 있었
는지를 절감했다. 수백년 전 나가들의 폭풍 같은 북진이 기온이라는 절
대적 한계에 부딪혀 중단되고 마침내 대확장 전쟁이 끝났을 때 세계는
두 동강이 나버린 셈이다. 나가들의 땅 키보렌과 그 북쪽의 땅. 뒤쪽의
세계는 산이나 황야, 사막, 초원, 숲, 빙하 등이 있는 정상적인 세계다.
그러나 앞쪽의 세계에는 밀림뿐이다. 키보렌이라는 단 하나의, 세계의
반을 뒤덮은 숲.
케이건은 거기서 희극의 요소를 발견했다. 오직 단 한 사람, 한계선에
가장 근접한 도시 카라보라의 최남단에 나가를 도축-가공-요리할 수 있
는 시설과 장비를 완비해두고 매일 같이 나가를 잡아먹으며 사는 인간
한 명을 제외한다면, 이제 모든 이들에게 나가들과 그들의 땅 키보렌은
신화 속의 존재나 마찬가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만약 나가들이 그들
이외에 그들을 증거해줄 자를 찾아내야 한다면 그들은 그들을 가장 증오
하는 자를 찾아와야 할 것이다. 대사원의 영리한 승려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증오란 원래 그렇다.
"왜 우는 겁니까?"
비형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케이건은 현실로 돌아왔다. 눈가를 만져본
케이건은 손끝이 젖는 것을 깨달았다. 우는 것을 싫어하는 티나한은 화
난 표정으로 케이건을 쏘아보고 있었다. 케이건은 눈가를 훔쳤다.
"왜 울었는지 모르겠소."
"뭔가 언짢은 일이라도 생각나신 건가요?"
케이건은 그 질문을 무시했다. 그리곤 건조한 어투로 티나한의 질문에
대답했다.
"나가들의 귀는 신통찮지만 대신 그 눈은 대단히 밝은 편이오. 그들의
눈은 온도를 볼 수 있는데, 그 때문에 어두운 밤에도 우리 같은 뜨거운
생물들을 볼 수 있소. '나가 잡는 것은 도깨비'라는 옛말은 거기서 나온
말이오. 그 옛날 수완 좋은 도깨비들은 사람이나 동물 모양의 도깨비불
을 만들어서 나가의 눈을 속이곤 했소. 체온과 비슷한 정도의 차가운 도
깨비불로 말이오."
비형은 그만 케이건의 눈물에 대해 까맣게 잊고 말았다. 도깨비들에게
도 이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우와! 정말입니까? 제 도깨비불에 나가가 속습니까?"
"그래요. 키보렌에 들어가면 당신도 그 재주를 써야 할 거요. 당신이
요술쟁이일 거라고 했잖소? 그리고 수목애호가라는 건 당신들도 짐작할
수 있을 거요. 그들은 자신을 나무의 친구로 여기오. 틀린 말은 아니지.
그들의 땅 전체에 나무를 심으니까. 따라서 그들은 나무를 태우는 것을
아주 싫어하오. 그들 자신들도 필요에 따라 나무를 태우기도 하지만, 그
경우엔 나무 장례식을 치뤄주지. 아, 그리고 이것은 나가들이 도깨비를
싫어하는 두 번째 이유요. 도깨비불은 나가를 속일 수도 있고 나무를 불
태울 수도 있으니까."
비형은 감탄하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건은 티나한을 돌아보며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나가 정찰대라는 건 키보렌을 돌아 다니는 정찰대를 말하는 거요. 물
론 여자로 구성되고, 보통 모험심이 많은 나가나 가문에서의 권력싸움에
서 밀려난 나가들이 주축을 이루지. 나가의 각 도시는 두서너 개의 정찰
대를 가지고 있소. 이 자들이 주로 정찰을 하는 곳은 한계선 이남 지역
이오. 불신자들, 그러니까 우리 같은 자들의 침입을 경계하는 거지. 그
리고 나무를 보살피는 일을 하오. 나무들의 전염병을 다스리거나 산불
때문에 피폐해진 숲을 복원하는 등의 일을 하오. 사실 뒤쪽의 일이 주된
일이요. 키보렌에 내려가는 자는 없으니. 그리고 소드락이라는 건 나가
들의 비약이오. 한계선 지대까지 올라올 경우 나가들은 추위 때문에 움
직임이 대단히 느려지지. 하지만 그 소드락이라는 것을 먹으면 짧은 시
간 동안이나마 키보렌에서 가장 더운 땅에서와 같은 정도의 속도로 움직
일 수 있소. 따라서 한계선 근처의 땅을 돌아 다니는 나가 정찰대는 항
상 소드락을 가지고 다니지. 색깔은 붉은색이오. 만약 그들과의 싸움 중
그들이 붉은색 약을 삼키려들면 반드시 제지해야 하오. 까다로와지니까.
그것만 제지할 수 있다면 한계선 근처의 땅에서 나가를 상대하는 것에
결정적인 불리함은 없다고 하겠소."
케이건이 폭포처럼 쏟아놓은 지식들은 비형과 티나한을 헐떡이게 만들
었다. 티나한과 비형은 똑같은 시선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는데 그것은
도대체 어디서 그런 지식들을 얻었느냐고 묻는 시선이었다. 하지만 케이
건은 그 시선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케이건은 자리에서 일
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마저 울러 가야겠소. 왜 울었는지 생각날지 모르니. 따라오지 말길 바
라오."
그리고 케이건은 탁자 옆에 세워둔 쌍신검을 집어든 다음 밖으로 나갔
다. 남겨진 두 사람은 의아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 때 비형은
주막의 주인이 그들을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감님?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도깨비의 친절한 말투는 주인에게 용기를 복돋워주었다. 주인은 결심을
하고는 부엌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솥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두 사
람이 앉아있는 탁자에 솥을 내려놓은 주인은 주막 밖을 훔쳐보며 말했
다.
"미안하오만 말씀 나누시는 것을 조금 들었소이다. 두 분은 저 자를 오
늘 처음 만나시는 것 같은데, 맞소?"
"영감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런데요?"
"저 자를 멀리하시오. 미친 자요! 제정신이 아니오!"
티나한은 잠시 케이건을 자신의 동료로 여겨야 되는지 고민했다. 만일
그렇다면 티나한은 동료를 대신하여 이 무례한 주막 주인을 걷지도 기지
도 못할 정도로 손을 봐줘야 했다. 하지만 아직 만난지 하룻밤도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은 티나한은 잠시 유보를 두기로 했다. 자신이 가공할 위
험에 빠질 뻔했다는 것을 모르는 주막 주인은 필사적인 얼굴로 도깨비를
바라보았다. 비형은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침도 흘리지 않고 눈도 까뒤집지 않고 자신이 만물의 질서를
결정한다고 주장하지도 않던데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영감님?"
주인은 비장한 얼굴로 솥뚜껑을 움켜쥐었다가 확 열어보였다. 비형과
티나한은 그 동작에 감명을 받았고, 그래서 그 내용물에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흐음, 위험해 보이는군. 식은 고깃국이라."
비형과 티나한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주인을 바라보았고 주인은 자신
의 실수를 깨달았다.
"이건 나가 고기요!"
주인은 만족감을 느꼈다. 티나한과 비형은 그제야 그가 기대하던 반응
을 보여줬다. 비형은 허옇게 질려 뒤로 물러났고 티나한은 고개를 숙여
솥 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저 자는 자기가 키보렌을 통해서 사막으로 들어왔다고 하더군요. 제가
믿지 않자 저 자는 이걸 내보이고는 삶아달라고 말했소! 먹겠다고 말이
오! 세상에, 말이나 되는 소리요? 하지만 오금이 저려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소. 눈을 이렇게 뜨고 쳐다보는데, 나는 그런 눈은 난생 처음이었
소! 남아있는 고기들을 보여드리고 싶지만 이게 마지막 남은 것이오. 저
자가 다 먹었소! 이걸 먹었단 말입니다!"
"어, 흠. 진짜 나가였나? 다른 동물이 아니라? 아무리 이 푼텐 사막이
키보렌에 가까이 있다지만 너도 나가를 본 적은 없을 거 아냐."
티나한은 의심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주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요, 나도 처음 봤소! 하지만 보면 알아요. 나가가 아니라면 세상
에 어떤 동물이 비늘이 덮인 팔을 가지고 있겠소? 그 팔을 꺼내다가 난
기절할 뻔했소!"
티나한이 갑자기 젓가락을 집어들었다. 비형과 주인이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는 가운데 티나한은 솥 안을 뒤져 고깃덩이를 하나씩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그 뼈의 모양을 꼼꼼히 살폈다. 잠시 후, 티나한은 하나의 고
깃덩이를 탁자 위에 놓고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비형도 그 고기를 보았
고 거기에 붙어있는 것을 본 순간 허리를 숙여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희미한 비늘 자국 끝에 붙어있는 것은 손톱이었
다. 동물에겐 거의 없는 넓적한 손톱.
케이건은 절벽 모서리에 걸터앉아 지저분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검은 하늘에 번져가는 묽은 별빛, 그리고 물고기의 배처럼 창백하게 번
득이는 달. 사막의 밤하늘은 빛이 얼마나 지저분한가를 고발하고 있는
듯했다. 얼룩진 빛들 아래로 사막은 정순한 암흑 속을 흐르고 있었다.
휘저어놓은 구정물 같은 하늘을 보고 있는 케이건의 눈 앞에 큼직한 손
이 나타났다.
케이건은 그 손을 응시했다. 큼직한 손바닥 위엔 조그마한 고깃덩이가
놓여 있었다. 손톱이 붙어있는 고깃덩이였다.
"젠장. 원숭이는 아니더라. 비늘이 있으니까. 나가가 맞는 것 같은데."
천천히 고개를 돌린 케이건은 아득하게 보이는 티나한의 얼굴과 그 옆,
훨씬 아래쪽에 보이는 비형의 얼굴을 차례로 바라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
렸다.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앉아줬으면 좋겠소. 너무 높아서."
두 사람은 케이건의 옆에 걸터앉았다. 그래도 두 사람의 머리는 케이건
보다 훨씬 높았다. 티나한은 자신의 손바닥에 놓인 고기를 물끄러미 바
라보다가 그것을 사막으로 집어던졌다.
"큼. 설명 좀 들을까?"
"이 주막으로 오던 도중 만난 나가 정찰대원들의 사체 조각이오. 놔두
면 다시 재생할 것이 분명하기에 토막을 낸 다음 중요 부위 몇 개를 집
어왔소. 그 중에 손도 하나 섞여있었던 모양이군."
케이건의 말투는 침착했다. 티나한은 언성을 높일 수 없었다.
"그렇게 잘 재생하나?"
"단 한 번이지만, 머리를 재생시킨 나가를 본 적이 있소."
티나한의 벼슬이 곤두섰다.
"머, 머리를?"
"그렇소. 그녀를 쓰러뜨렸을 때 나는 몹시 지쳐있었고 시간을 더 끌 수
도 없는 상황이었소. 그래서 그녀의 머리만 잘라낸 다음 나머지는 밀림
속에 팽개쳐뒀지. 그 머리는 가져와서 삶아먹었소. 2년 후, 그녀를 다시
만났소. 반가워하더군. 2년 만에 머리를 재생시키곤 나를 찾아다니고 있
었던 모양이오."
"이런 젠장맞을… 어떻게 됐냐?"
케이건은 티나한을 잠시 돌아보았다가 다시 사막의 암흑으로 시선을 돌
렸다.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오."
티나한은 그 결과에 대해 더 묻지 않기로 했다. 대신 다른 것을 질문했
다.
"그러니까, 네가 최소한 2년 이상 이 웃기는 짓을 계속해왔단 말이군?"
"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나가를 습격한 다음, 그, 그 시체를 삶아먹었단 말이야?"
"가끔은 구워먹기도 했소. 그런데 도대체 뭘 원하는 거요?"
"뭐?"
케이건은 단조롭게 말했다.
"원하는 것을 명확히 하시오. 비난하려는 거요? 아니면 당신도 나가를
잡아먹고 싶은 거요? 이도저도 아니라면 내 생활에 대해 무의미한 참견
을 할 작정이오?"
티나한은 당황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목적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 때 지금껏 입을 꽉 다물고 있던 비형이 고함을 질렀다.
"비난하겠습니다! 비난하고 비난하고 또 비난합니다. 알겠습니까?"
케이건은 비형을 돌아보았다. 비형은 꽉 움켜쥔 주먹을 허공에 대고 휘
두르며 외쳤다.
"나가도 당신과 같은 사람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먹을 수 있습
니까? 변명할 수 있습니까?"
"안 하겠소."
비형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잠시 자신의 손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
겠다는 듯이 허둥대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 일의 부도덕함을 인정하는 겁니까? 완전히? 분명히? 번복
의 여지없이?"
"원한다면 인정하겠소. 사실 나에겐 큰 상관이 없는 문제니까."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가장 단순하게 말하자면, 당신이 무슨 말을 하건 내겐 아무 상관이 없
다는 거요. 욕을 하고 싶다면 욕을 하고 저주를 하고 싶다면 마음껏 저
주를 퍼부으시오."
"제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
하고 그만두십시오! 제가 바라는 것은 그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알았소."
"그럼 그 일을 뉘우치고 그만두시겠습니까?"
"뉘우치지도, 그만두지도 않겠소."
비형은 기가 막혔다.
"그럼 저를 납득시킬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해보세요! 왜 그런 짓을 하
는 겁니까?"
"설명하지 않겠소."
나무에 대고 고함지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비형은 그렇게 느꼈다. 무
엇보다도 비형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케이건이 도무지 악당처럼 보
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케이건은 미친 듯이 웃지도 않았고 흉흉한 눈
빛을 번득이지도 않았다. 그는 건조하지만 무례하지는 않은 말들을 조용
히 말하고 있었다. 비형이 비명이라도 질러볼까 하는 무의미한 충동을
느꼈을 때 케이건이 다시 말했다.
"그렇게 내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미안하지만 내가 줄 것은 하
나밖에 없소. 비형. 당신은 모든 나가들이 나에 대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권리를 행사할 수 있소."
"권리? 무슨 권리 말입니까?"
"나를 죽이려 시도할 권리."
비형은 움찔했다. 케이건은 서서히 일어난 다음 비형을 돌아보았다. 그
의 눈빛은 잔잔했다.
"당신이 그렇게도 혐오한다는 '사람이 사람을 먹는 일'을 중단시킬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오. 비형. 나를 죽이시오. 다만 그것을 시도할 경
우 당신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소."
"그 말은, 당신을 죽이려들면 저를 죽이겠다는 겁니까?"
"그렇게 해야 한다면 그럴 거요."
비형이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눈 아래에 있는 케이건을 향해 애원하
듯 외쳤다.
"그렇다면 당신도 죽고 싶지 않다는 말이잖아요! 나가들도 그럴 겁니
다. 죽고 싶지 않을 거라고요. 당신 자신도 원하지 않는 일을 왜 남에게
하는 겁니까?"
"그들도 죽고 싶어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예?"
케이건은 오른손을 서서히 움직였다. 비형은 그제야 쌍신검을 보았다.
케이건은 지금껏 그것을 쥐고 있었지만 교묘한 몸동작과 그림자, 그리고
어둠 속에 숨어 있어 비형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비형은 그토록 거대
한 검이 단검이나 되는 양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쌍신검을 서
서히 들어올린 케이건은 그것을 어깨 뒤 고리에 걸며 말했다.
"그들이 그것을 원하지 않기에 하는 거요."
케이건은 주막으로 걸어갔다.
다른 종족들과 공유할 만한 예술을 별로 가지고 있지 않은 나가지만,
그들에게 예술이 없는 것은 아니다. 너무 월등한 시각 때문에 미술이 없
고 너무 빈약한 청각 때문에 음악이 없지만 나가에게도 훌륭하게 움직일
수 있는 몸은 있다. 따라서 그들은 춤을 출 줄 안다.
몸을 움직이는 즐거움을 느낀다는 무용의 본질에서 나가의 무용은 다른
종족들의 무용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하지만 무용의 감상에 있어서는
다시 차이가 발생한다. 다른 종족들 또한 몸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흐
름과 박자를 즐길 줄 알지만 나가는 거기에 덧붙여 무용가의 주위에서
움직이는 기류를 본다.
나가들은 춤을 출 때 손에 독특한 물품을 들곤 하는데, 긴 쇠막대에 나
무 손잡이가 달린 이 물건을 인간이 본다면 아마도 인두라고 생각할 것
이다. 춤채라고 불리는 이 물건은 실제로 인두에서 파생된 것이며 인두
처럼 화로에 의해 달궈진다. 하지만 그 쓰임새에 있어서 춤채는 인두와
는 아무 상관이 없다.
나가 무용수들은 달궈진 춤채을 들고 춤을 춘다. 춤채가 없을 경우 횃
불 등의 물건을 쓰기도 하지만 횃불의 경우엔 그 온도가 너무 높아서 효
과가 신통찮다. 달궈진 쇠막대, 무용수의 손에 쥐어진 두 개의 찬란한
광선이 가장 적합하다. 무용수는 그 광선들로 공기를 희롱하고 전율시키
고 광포하게 날뛰게 만든다. 따라서 나가는, 그리고 오로지 나가만이,
무용수 주위에 일어나는 형언키 어려운 색채의 향연을 볼 수 있다.
페이 가문의 여인들과 가문에 체류 중인 열 명의 남자들은 한결 같이
사모 페이가 만들어내는 찬란한 움직임에 넋이 빠져 있었다.
걷고, 웅크렸다가, 도약하고, 빙그르르 도는 일련의 동작들. 사모가 허
공에 펼쳐내는 빛의 피륙을 타고 기류가 현란하게 춤춘다. 동작과 동작
이 나뉘어지는 순간들마다 사모는 나가로 돌아오지만 다음 동작이 시작
되자 어느새 빛으로 이루어진 생명체로 바뀐다. 구경꾼들은 모두 사모에
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춤이 끝났다.
남자들은 자신의 앞에 놓인 물그릇에 손을 담근 다음 화로 표면에 물방
울을 던졌다. 그리고 춤을 춘 자가 사모였기에 여인들 또한 사심없이 찬
탄을 표했다. 사모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인 다음 춤채를 화로에 꽂고
중앙에서 물러났다. 사모와 비교되고 싶지 않았던 여자들은 자리를 지켰
고 남자들 중 두 명이 동시에 뛰어나왔다가 서로를 머쓱하게 바라보았
다. 그들이 겸양과 양보를 표시하는 사이 사모는 구경꾼들의 원진을 빠
져나왔다.
사모가 기둥 옆을 지나칠 때 기둥 뒤에서 한 손이 튀어나왔다.
사모는 놀란 얼굴로 그 손을 바라보았다. 손에는 물잔이 쥐어져 있었
다. 잠시 후 그 손을 따라 기둥 뒤에서 륜 페이의 얼굴이 나타났다. 사
모는 어색하게 물잔을 받아들었다.
[멋진 춤입니다. 화로가 다 식었군요.]
사모는 싱긋 웃었다. 모든 구경꾼들이 경쟁적으로 물방울을 던졌기에
화로의 표면은 차갑게 식어있었다. 뜨거운 화로에 차가운 물방울이 튕겨
졌을 때의 온도 변화와 공기의 급격한 움직임은 나가의 눈에는 유성의
번득임보다 강렬하게 보인다. 찬사의 표시로 사용되기에 충분하다. 따라
서 '화로가 식는다'는 니름은 나가 관용어로 놀라운 기량에 바치는 찬사
를 의미한다.
물을 마신 사모는 잔을 돌려주며 닐렀다.
[너는 물 뿌리지도 않았잖아.]
[나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적출식에 관련된 농담도 지겹고 격려랍시고
해주는 니름들도. 물론 좋은 뜻에서 들려주는 니름들이라는 것 잘 알지
만.]
륜은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계속 닐렀다.
[대신 저는 박수를 쳤어요. 들으셨습니까?]
사모는 고개를 갸웃했다.
[박수가 뭐지? 듣는다고?]
[불신자들은 소리를 잘 듣지요. 그래서 그들은 찬사를 표시하고 싶을
때 손바닥을 부딪혀서 소리를 냅니다.]
륜은 직접 시범을 보였다. 귀를 기울였던 사모는 동생의 손에서 퍼져나
오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괴상하다. 그게 어떻게 칭찬의 의미가 되는지 모르겠군. 그런데 넌 어
떻게 그런 것을 알지? 아, 화리트가 가르쳐주었니?]
[아니오. 다른 사람이 가르쳐주었습니다.]
[다른 사람?]
[예. 다른 사람.]
[아.]
사모는 륜이 누구를 니르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이런 무언의 공감은 나
가에게도 침묵의 시간을 가져오며 그래서 사모와 륜은 잠시 정신을 닫은
채 서로를 쳐다보았다. 륜은 어색하게 주위를 둘러보다가 닐렀다.
[바람 좀 쐬시지 않겠습니까?]
사모가 앞장서서 걸었다. 그들은 문을 열고 홀을 나왔다. 열주가 늘어
선 바깥 복도는 그대로 정원을 면하고 있었다. 사모는 정원 가운데로 걸
어갔고 그녀의 뒤를 따르던 륜은 자신들이 정자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자의 돌의자는 한낮의 햇살을 받아 뜨겁게 데워져 있어 앉기 좋았다.
자리에 앉은 사모는 갑자기 닐렀다.
[앉아. 륜.]
이미 허리를 반쯤 굽히고 있던 륜은 그만 엉거주춤한 동작으로 멈춰 선
채 사모를 바라보았다. 사모는 기분좋게 웃었고 륜 역시 당혹한 웃음을
지은 채 사모의 맞은편에 앉았다. 사모는 짓궂게 닐렀다.
[너는 너무도 예의 바른 남자라서 여자가 앉으라고 닐러야 앉잖아.]
[어제는 제가 너무 무례했습니다. 사모.]
[오오, 역시 예의 바른 남자. 저렇게 엄숙하게 사과하니 사과 받는 쪽
이 오히려 부끄러워지는군.]
륜 페이는 그만 어찌해야 될지 모르게 되었다. 사모는 부드럽게 닐렀
다.
[어제는 내가 참 민망한 꼴 보였지? 미안해. 많이 당황했나 보구나. 나
도 그렇게 울 줄은 몰랐어.]
[신경쓰지 않습니다.]
[대단히 신경쓰였단 니름이군.] 륜은 다시 곤혹스러워했고 사모는 몸을
약간 기울이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무리한 부탁이겠지만, 더이상 신경
쓰지마.]
륜은 돌탁자에 시선을 둔 채 니름없이 앉아있었다. 사모는 다시 눈을
내려 륜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 아이는 되어줄 수 없더라도 친구는 되겠지? 내가 원하는 것은 간단
하단다. 시시한 잡담들로 가득한 서신이나 나누고, 몇 년에 한번씩이라
도 네가 우연히 하텐그라쥬를 지나치게 될 때 서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
누고, 때로는 내가 너를 만나러 여행하기도 하고. 그게 거북하니?]
[사모. 저는…]
륜은 문장을 완성하지 않은 채 정신을 닫았다. 잠시 기다리던 사모는
확인하듯 닐렀다.
[나는 대용품 따위로 나 스스로를 기만하지는 않아. 하지만 네게 내 모
습이 그렇게 비춰졌다면 내 태도나 행동에 뭔가 그렇게 비칠 만한 소지
가 있었다는 니름이겠지. 고치겠어. 그러니 너는 지금부터 내가 하는 니
름을 가장 내 본심에 가까운 니름으로 여겨줘. 내가 원하는 건 아이가
아닌 친구야.]
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에겐 이미 많은 친구가 있잖습니까.]
[세상에는 멋진 농담과 감사의 니름처럼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 있
어. 좋은 친구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고 보는데.]
륜은 그런 의미로 니르지 않았다. 모든 가족들의 아낌을 받는 사모 페
이와 같은 여인이 친구에 굶주릴 리는 없다. 그녀는 륜에게 끈을 남겨두
자고 니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끈의 한쪽에 자신이 서주겠다고 제안하
는 것이다.
문득 륜은 자신이 얼마나 사모 페이를 사랑하는지를 깨달았다. 심장을
잃는 것은 페이라는 이름을 잃는 것이고 페이라는 이름을 잃는 것은 사
모 페이와의 끈을 잃는 것이었다. 남동생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그녀
의 침실에 들 수도 없는, 아무 것도 아닌 관계. 하지만 륜이 모든 관계
가 사라진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사모는 친구라는 이름의 끈을 새로 이
어보였다. 그가 그토록 큰 상처를 주었고 그 때문에 그녀가 은루(銀淚)
를 흘렸음에도 불구하고.
륜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모는 환하게 웃었다.
[고맙구나. 아, 들어가서 춤 추지 않을래?]
[전 여기에 더 있겠습니다.]
[그래.]
사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돌리기 전, 사모는 돌탁자 너머로 손
을 뻗어 륜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리고 륜이 하고 싶었던 니름을
꺼내었다.
[고마워, 륜.]
륜은 아무 니름도 못한 채 사모를 떠나보냈다.
방심 상태 속에 앉아있는 륜의 곁으로 수만 가지의 의미가 될 수 있었
던 순간들이 아무런 의미도 되지 못한 채 흘러지나갔다.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던 륜의 시야에 어떤 물체가 들어온 것은 꽤 많은 시간이 지난
다음의 일이었다.
륜은 심장탑을 보고 있었다.
도시 어느 곳에 있어도 그 200 미터 높이의 탑은 눈에 들어온다. 그 아
름다운 탑을 바라보며 륜은 자신에 대해 놀랐다. 요근래 그가 심장탑을
바라볼 때 그 시선은 항상 분노로 채색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거의 분노가 없는 상태에서 심장탑을 바라보고 있었다. 륜은 왜 자신이
분노를 느끼지 않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답은 단순했다. 심장탑은 심장을 빼앗아 가는 곳이며 그럼으로써 그와
사모 페이의 관계를 강탈하는 자들이 있는 곳이다. 하지만 조금 전, 사
모는 그들이 뺏어갈 수 없는 관계를 륜에게 선물했다.
륜은 두 손을 모으고 그 위에 이마를 얹었다.
갑자기 격한 울음이 터져나왔다.
분노는 사라졌지만 대신 비늘이 떨어져나갈 정도의 공포가 그를 엄습했
기 때문이다.
항상 그곳에 있었지만 지금껏 분노에 가려져 있던 공포가 마침내 륜의
마음 속 깊은 심연으로부터 부상했다. 륜은 사모에게 감사하며 동시에
그녀를 원망했다. 분노하고 있을 때 륜은 심장탑을 쏘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륜은 은빛 눈물로 얼굴과 두 손을 적시는 것 이외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11년이 지났지만, 륜 속의 어떤 부분은 여전히 11살
에 붙들어 매어져 있었고 륜은 11세 소년으로서 울고 있었다.
11년 전, 심장탑 안의 어떤 손이 그토록 가볍게 죽음을 행사했을 때,
온몸으로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한 남자의 모습은 륜의 영원한 악몽이
되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요스비.
륜의 아버지였다.
마침내 샤나가가 달 뒤로 숨었다. 그리고 화리트 마케로우는 절망적인
기분에 젖어있었다.
카루와 스바치는 비아스가 독극물을 제조하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포착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는데, 왜냐하
면 비아스가 그들 앞에서 독극물 수십 병을 늘어놓았다 하더라도 그 병
에 '독극물'이라고 적혀 있지 않다면 카루와 스바치는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카루와 스바치는 솔직하게 그 점을 인정했다. 하지만
카루는 동시에 가주가 되고 싶어하는 비아스가 그런 위험한 짓을 하지는
않을 거라는 점을 지적했고 화리트는 그 지적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적출식 도중에 누군가가 죽는다면 그것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거야.
화리트. 비록 죽은 것이 남자라도 대단한 추문이 될 것은 분명해. 분명
히 책임자를 가려내기 위한 면밀한 조사가 이루어질 테고, 우수한 약술
사인 비아스가 가장 먼저 의심을 받겠지. 비아스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
고 싶진 않을걸. 더군다나 그냥 네가 밉다는 이유로 그러지는 않을 거
야. 이성적으로, 비아스에겐 너를 죽일 이유가 없어. 비아스는 이성적인
나가지?]
물론 비아스는 이성적인 나가다. 12년 동안이나 아이를 갖지 못했으면
서도 자신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는 비아스 외에 누가 더 이성적일 수 있
겠는가. 화리트는 카루의 니름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가문이 마지막으로 선물해주는 깨끗이 세탁된 의복을 걸치면서
도 화리트는 즐거움을 맛보지 못했다.
영원히 떠나는 아들을 위해 마케로우 가문은 지체 있는 가문다운 준비
를 해주었다. 깨끗한 옷과 며칠 입을 여벌 옷, 금편 꾸러미와 예리한 단
검. 심지어 춤채 한 벌까지 준비되어 있는 것을 보고 화리트는 고소를
금할 수 없었다. 춤에 소질이 거의 없는 화리트에게 춤채를 준비해주는
것은 배려라고 하긴 힘들다. 흠잡힐 데 없는 채비를 갖춰줬다는 것을 과
시하고 싶은 것 뿐이리라.
화리트는 역시 가문이 준비해준 작은 배낭에 그 모든 것을 쑤셔넣은 다
음 가문의 여자들에게 차례로 인사를 나섰다.
두세나 마케로우와 소메로 마케로우는 각자 훌륭한 처신을 보여줬다.
몇 가지 덕담과 - 상하를 잘 가리고 언제나 예를 잃지 말라는 등의 - 약
간의 가식적인 아쉬움을 보여주었다. 화리트 역시 22년 동안 키워준 것
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 절대로 그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니름으로 화답
했다. 물론 은혜 어쩌고는 완전히 무의미한 니름이다. 이제 문밖을 나서
면 화리트와 마케로우 가문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남지 않게 된다.
하지만 카린돌 마케로우는 화리트를 놀라게 했다. 무서운 니름을 듣게
될 것이 뻔하다고 생각하며 카린돌을 찾아갔던 화리트는, 카린돌이 갑자
기 자신을 포옹했을 때 기절하는 줄 알았다.
[네가 떠나면 이제 나 홀로 남게 되는구나.]
화리트는 무슨 니름인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와 카린돌은 둘 다
두세나 가주의 자식들이다. 하지만 가주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은 두세
나의 친자가 아닌 소메로다. 물론 소메로는 가주 계승자로 여겨질 만큼
품위있는 사람이지만 만일 그녀가 가주가 된다면 가주의 친자인 카린돌
은 불편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차피 남자에 불과한 화리
트는 카린돌에게 의지가 되진 않겠지만, 이렇게 완전히 떠나는 것을 보
게 되자 카린돌은 감정이 북받쳤던 것이다. 화리트는 주저하다가 조심스
럽게 위로의 니름을 꺼냈다.
[누님. 소메로 누님은 덕 있는 분이십니다.]
카린돌은 사나운 눈으로 화리트를 쏘아보았다.
[멍청한 녀석 같으니. 그래. 소메로는 덕 밖에 가지고 있지 않지. 야심
이나 교활함도 가지고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화리트는 카린돌이 무슨 니름을 하는지 몰라 당황했다. 그러나 카린돌
의 니름이 무슨 뜻인지 깨달은 것은 비아스의 방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였다.
놀라움 때문에 화리트는 복도 가운데 멈춰서고 말았다.
카린돌은 소메로가 '야심이나 교활함이 없어서' 비아스에게 가주의 계
승을 뺏기게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었고, 그 결과가 가져올 것들
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소메로는 덕을 가진 나가며 따라서 카린돌에게도
약간 불편한 기분 이상은 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비아스가 가주가 된
다면 카린돌의 남은 나날은 단순히 불편한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정말 비아스가 소메로를 젖히고 가주가 될 수 있을까? 카린돌은 어떤
근거로 그런 생각을 한 걸까?'
상념에 빠져있던 화리트는 한참 후에야 비아스의 방문 앞에 출입금지
표시가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또 뭔가 위험한 약술 실험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녀를 만나고 싶지 않았던 화리트는 잘됐다고 생각하며
재빨리 몸을 돌렸다.
정문 앞에서 카루와 스바치가 무장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근심
섞인 표정을 보며 화리트는 그들이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
다. 화리트는 짐짓 기운차게 닐렀다.
[자, 심장을 뽑으러 갑시다!]
페이 가문에서는 륜 페이가 적출식 준비를 하고 있었다. 흠잡을 데 없
지만 정성이 없는 선물을 받은 그의 친구와 달리 륜은 보다 정성이 깃든
선물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륜은 즐겁지 않았다.
[남자는 무기를 가져야 돼. 륜. 밀림을 홀로 돌아다니다 보면 무엇을
만나게 될지 모르는 거야.]
륜은 사모 페이의 무기고를 보며 어이 없는 기분을 느꼈다. 춤의 재능
은 무술의 재능과 통하는 면이 많고 뛰어난 무용가인 사모는 대단한 무
술가이기도 했다. 그녀의 무기들이 훌륭한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질
려버릴 정도로 많았고, 사모는 그 모든 무기를 모두 쥐어볼 것을 권하고
있었다.
무성의한 태도로 이리저리 둘러보던 륜의 눈이 벽에 걸린 사이커 하나
에 멈춰섰다.
사이커는 나가의 전통검이며 그 예리함은 겹쳐 쌓은 양피지 열 장을 한
번에 벨 수 없으면 사이커라 부르지도 않는다는 니름이 있을 정도다. 륜
이 본 것은 사이커 중에서도 대단한 고급품이었다. 하지만 검에 대한 식
견이 깊지 못한 륜이 그 검의 우수함을 알아본 것은 아니다. 륜은 그저
그 도신의 파형문이 마음에 들었다.
륜은 그 사이커를 집어든 다음 몇 번 휘둘러보았다. 사모를 돌아본 륜
은, 그녀의 기묘한 표정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죄송합니다. 누님께서 아끼시는 것인가 보군요.]
륜은 그 사이커를 도로 걸어두려 했다. 하지만 사모는 손을 들어 제지
했다.
[아니, 괜찮아. 내가 사용하는 것이 아냐. 난 네가 그걸 곧장 집어들어
서 좀 놀란 것 뿐이야.]
[특별한 사이커인가요?]
[응. 그래. 그 사이커는, 그 사람이 쓰던 거야.]
륜은 움찔했다. 그는 사모를 바라보다가 다시 눈길을 내려 손에 들린
사이커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이오?]
[그래. 그 사람.]
[모두… 없애지 않았습니까? 그 사람의 물건은…?]
[그래야 하지.]
사모는 빙그레 웃었다. 륜은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고 자칫 사이커를
떨어뜨릴까봐 두 손으로 그것을 쥐었다. 륜은 사이커가 손 안에서 꿈틀
거리는 줄 알고 놀랐다. 물론 그의 손이 떨렸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눈 가까이로 사이커를 들어올린 륜은 칼뿌리 근처에서 뭔가가 지워진 흔
적을 발견했다. 정확하게 니르면 지워진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어떤 글
자에 정교한 솜씨로 무늬를 더해 글자가 무늬 속으로 사라지게 만들어
놓았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찾을 수 없겠지만, 륜은 그 무늬 속의 글자
를 읽어낼 수 있었다.
[어떻게 숨겨두셨습니까?]
[내 사이커 하나를 대신 내어줬지. 네가 가지렴. 그 사람도 반대할 것
같지는 않군.]
그리고 사모는 궤짝을 열어 적당한 검대를 꺼내어 륜에게 건네었다. 륜
은 약간 서툰 솜씨로 그것을 허리에 묶었다. 감사를 표하려던 륜은 문득
발작적으로 닐렀다.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에 이미 오래 전에 그런 희망은
포기했죠. 하지만, 저는 하나라도 가지고 싶었습니다. 제 아버지의 물건
을.]
사모는 륜이 니른 '아버지'라는 단어에 약간 놀랐다.
[아버지라고?]
륜은 낭패한 얼굴이 되었다.
[저, 아버지라는 것은…]
[아니, 그 니름이 무슨 뜻인지는 알아. 불신자들의 미신이지.]
[미신이라고요?]
사모는 난처한 듯이 웃었다. 논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륜은 물러날 기미가 없었다.
[그래. 미신이지. 아버지라는 것은 없어.]
[그렇다면 누님은 왜 이 사이커를 보관하신 겁니까? 누님도 아버지의
딸이기 때문에 이것을 보관한 것 아닙니까?]
사모의 얼굴에 다시 놀라워 하는 감정이 떠올랐다.
[그것도 알고 있었니? 그래. 내 어머니의 짝이 그였다는 것은 맞아. 하
지만 나는 아버지라는 그 기괴한 미신 때문에 그것을 보관한 것이 아냐.
요스비는 내 무술 스승이었지. 나는 스승에 대한 추억 때문에 그걸 보관
했던 거야.]
사모의 냉정한 대답은 륜을 괴롭게 만들었다. 사모는 앞으로 한 발 다
가와 륜을 똑바로 바라보며 닐렀다.
[륜.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지만, 우리는 그 남자가 준 것만으로 이루
어진 것이 아냐. '아버지'라는 그 우스운 단어를 꼭 사용하고 싶다면,
너는 어머님이 드신 동물들과 마신 물까지도 모두 아버지라고 불러야해.
니름도 안 되는 일이잖아?]
[알아요. 잘 알고 있습니다.]
[나도 네가 잘 알 거라고 믿어. 그러니, 떠나기 전 내 앞에서 그 니름
을 취소해.]
[무엇을 취소하라는 니름이십니까?]
[아버지라는 니름. 취소해. 앞으로 다시는 그런 단어를 사용하지 않겠
다고 약속해. 그런 미신에 사로잡히면 올바른 생각을 할 수 없어.]
륜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것을 어떻게 약속할 수 있단 니름
인가. 11년 전의 내 기억을 없애주기라도 한다면 모를까.'
그러나 륜은 고개를 끄덕였다. 페이라는 이름을 잃기 직전에 그가 유일
하게 사랑하는 페이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른 가족들에게도 모두 인사를 한 다음 륜은 밖으로 나왔다. 정문 앞
에는 페이 가문에 체류 중인 열 명의 남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륜은 가벼운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모두 간편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많은 경우 이런 호위자들은 심장탑에서 적출식을 방금 끝내고 나온 처
녀들을 따라 다른 가문으로 옮겨가곤 한다. 하지만 간편한 복장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이 남자들이 륜을 호위해준 다음 모두 페이 가문으로 돌아
올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열 명의, 한결같이 간편한 복장의 남자들. 이
런 자들의 호위를 받고 하텐그라쥬를 걸어가는 것은 엄청난 선망과 질시
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다. 륜은 가까이 있는 남자 한 명에게 질문했다.
[모두 돌아오실 겁니까?]
[그래. 륜.]
이미 페이는 사라졌다. 륜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심장탑에서 새로 성인이 된 처녀들도 많이 볼 수 있을 텐데요.]
남자는 싱긋 웃었다.
[나는 이 집이 좋아. 다른 사람들도 그런 것 같고. 그 처녀들은 오늘
성인이 될 너나 다른 청년들을 유혹할 수 있겠지.]
륜은 갑자기 격렬한 질투를 느꼈다. 이 남자들은 돌아올 수 있지만, 이
집에서 태어나고 자란 륜은 이제 다시는 이 집으로 돌아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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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건의 검의 모습이 상상되지 않으신다는 분들이 계시는군요. 부족한
묘사력을 탓하며 간단한 도해 첨부합니다.
┃
┣━━━━━━━━━━━━━━━━━
━━━┫
┣━━━━━━━━━━━━━━━━━
┃
예… 정말 간단한 도해군요. 왼쪽이 칼자루, 오른쪽에 있는 두 개의 선
이 칼날을 나타내는 겁니다. 보시다시피 칼날이 두 개입니다. 그래서 쌍
신검이라고 서술했죠. 칼날 사이의 빈틈은 어딘가에 걸 수 있겠죠? 그래
서 케이건은 등에 부착된 고리에 저 검을 거는 겁니다. (매거나 차는 것
이 아니라.) 저 칼이 왜 저 모양인지는 차차 설명될 시간이 오겠죠.
좋은 밤 되세요.
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1-3. 관련자료:없음 [51817]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3-20 01:24 조회:12951
눈물을 마시는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