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새-2화 (2/62)

눈물을 마시는 새.

1. 은루(銀淚) - 1

영웅왕은 말했다. "뭐? 나가가 눈물을 흘린다고? 이봐.  충고 하

나 하지. 다음엔 날씨가 맑을 때 보라구. 비가  오고 있을 때와는

좀 다른 생각을 하게 될 거야." - 펜조일의 <영웅왕, 영웅도 아니

고 왕도 아닌>

륜 페이는 차가운 돌제단 위에 누워있었다.

그 외엔 아무 것도 없었다. 등을 대고 있는 돌제단 이외에 확실성을 가

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던  륜 페이는 자신이

배경을 결여한 그림의 주인공이나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순간 륜은 움찔했다. 그림은  노래처럼 나가에겐 없는  문화다. 하지만

별볼일 없는 청력 때문에 음악에 관심이  없는 것과 반대로 나가에게 미

술이 없는 것은 그들의 경이적인 시력 때문이다.  온도를 볼 수 있는 나

가에겐, 인간의 가장 위대한 화가가 그린  그림도 같은 크기의 천조각에

비해 그다지 화려해 보이지 않는다. 나가가 볼  수 있는 색깔의 폭은 대

단히 넓지만 차갑거나 뜨거운 물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나가는 그림

을 그리지 않는다.

따라서, 나가가 자신을 그림 속의  등장인물처럼 생각해보는 것은 자연

스러운 일이 아니다.

륜 페이는 자신이 어떻게 '그림'이라는 생각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지식을 얻은  경로가 다른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니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것도. 그것은 수치  어린 비밀이었다. 륜은

자신의 니름이 읽혔나 알아보기 위해 주위를 황급히 둘러보았다.

어둠 속에서 차가운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륜은 그들의 손에 쥐어진, 그들보다도 더 차가운  빛깔의 단검을 볼 수

있었다. 륜은 비명을 질렀지만 '소리'는 나가에게  큰 영향을 주지 못한

다. 제단으로 다가오던 나가들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비명을 질러

대던 륜은 황급히 닐렀다. 하지만 륜은  곧 당황하고 말았다. 그는 니를

수 없었다.

"나는 나가가 아닌가?"

손을 내저으려던 륜은 그제야 자신의 팔다리가 제단에 결박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륜이 헛된 몸부림을 치는  동안 그림자들은 제단을 둘러쌌다.

그 중 한 사람이 륜의 셔츠를 찢었다.  천이 찢어지는 끔찍한 소리에 륜

은 공황 상태에 빠져 드러난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단단한 비늘

들 아래로 맥박치는 심장이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뜨겁게 맥박치고 있었

기 때문에 륜은 그것을 볼 수 있었다.  륜은 제단을 둘러싼 자들을 돌아

보았고 그들의 가슴 부분에서 차가운 암흑만을 발견하고는 몸을 떨었다.

그들은 모두 심장을 적출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륜의 심장도 빼내려 하고 있었다.

"잠깐! 나는 나가가 아냐!  잘못 알았어! 심장을 뽑으면,  그러면 나는

죽어!"

륜은 목이 터져라 외쳤다. 아무리 청력이  나빠도 들리긴 했을 테지만,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움직인 자가 있긴 했다. 오른쪽에 선

자가 단검을 높이 들어올렸던 것이다. 어둠 속에서, 단검은 온갖 빛깔과

온도를 반사하여 화려하게 빛났다. 륜이 다시 비명을 지르려 할 때 단검

이 무자비하게 내려꽂혔다.

륜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륜이 본 것은 붉은 색이 아니었다. 폭발적으로 쏟아져나오는 뜨거운 핏

방울은 륜의 눈에 온갖 현란한 빛깔의 분수처럼 보였다. 갈라진 가슴 윗

부분의 공기들이 색채의 향연으로 대류하는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차갑던 공기 속으로 갑자기  뜨거운 체온이 방출되었기  때문이다. 륜은

잠시 고통도 잊은 채 그 모습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갑자기, 오른쪽에 있던 자가 손을 뻗었다. 륜은 자신의 갈라진 가슴 속

으로 다른 자의 손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숨이  멎는 기분을 느꼈다.

그 손이 거칠게 움직임에 따라 가슴 속에서 빛의  강 같은 것이 콸콸 쏟

아져나왔다. 물론 륜 자신의 피였다.

가슴을 헤집던 손은 마침내  불타는 보석처럼 보이는  것을 끄집어내었

다. 맥동하는 열류가 극광처럼 주위로  번져나갔다. 심장이었다. 너무도

뜨겁게 맥박치고 있었기에, 그  심장은 주위의 암흑을  모조리 불사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찬란한 빛 때문에 륜은 자신의 심장을 꺼내어든 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륜 페이의 얼굴이었다.

[니름도 안 되는 꿈이야. 륜. 우선,  적출식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지

도 않아. 게다가 네가 묘사하는 심장은 꼭  더운 피의 불신자들 것 같잖

아. 상상력 과잉이군. 뭐, 신비한 맛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겠어.]

화리트 마케로우는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지었지만 륜은  웃지 않았다.

화리트는 미소를 거두며 차분하게 닐렀다.

[미안해. 끔찍한 꿈이었겠지. 생각보다 심장  적출에 대해 더 근심하고

있나 보군. 하지만 그건 네 불안  심리가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야. 꿈에

무슨 의미나 예지능력 같은 것이 있다고 믿는 건 도깨비 밖에 없어.]

[인간들도 꿈을 믿어.]

[그런가? 그럴 수도 있겠지. 어리석기로는 거기서 거길 테니.]

[그리고 나도 믿고 싶은데.]

화리트는 정신을 닫은 채 친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적당한 니름이

떠오르지 않았고, 그래서 화리트는 식탁 위로 관심을 돌렸다.

식탁 위에는 쥐들이 놓여 있었다. 다친 곳은  전혀 없었지만 쥐들은 미

세하게 경련할 뿐 도망치지는 않았다. 이 정갈한 솜씨는 륜 페이의 둘째

누나인 사모 페이의 솜씨가 분명하다.

사모 페이라는 이름이 하텐그라쥬의 시민들에게  야기하는 반응은 극단

적으로 나뉜다.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쪽은 대개 남자다. 사모는 침대

로 끌어들이지 않으면서도 남자에게 친절하기  때문이다. 온화한 성품이

지만 솔직함을 높은 덕망으로 여기는  화리트의 첫째누나 소메로 마케로

우는 사모의 그런 처사에 대해 '같이  자지 않는다면, 남자에게 무슨 쓸

모가 있지? 가식일 뿐이야.' 라고 표현한  바 있었다. 그리고 사모를 싫

어하는 쪽은 대개 여자다. 남자들이 모두  페이 가문으로 찾아들기 때문

이다. 언제 침실로 끌려들어갈지 모르는 긴장감을  느낄 필요가 없이 마

음 편히 머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스한 쥐를 들어올리며, 화리트는 사모  페이의 기벽이 그녀가 찾아낸

어떤 타협점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니름을  돌릴 겸해서 화리트는 그

사실을 확인해보았다.

[지금 이 집엔 남자가 몇이나 머물고 있지?]

[여덟 명인가.]

화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페이 가문에 현재 가임기인 여인은 두어 명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두어 명의 여인에  여덟 명의 남자라면 임신 가

능성은 대단히 높다. 조만간  페이 가문엔 더 많은  다음 세대가 태어날

것이다. 그리고 가문은 더욱 번성할 것이다. 사모 페이는 임신과 양육의

기쁨을 포기하는 대신 자신만의 평화와 가족의 아낌을 얻은 것이다.

[여덟 명이라. 네 적출식은 화려하겠어. 륜.  그렇게 많은 남자들의 호

위를 받으며 심장탑까지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걸. 사모 페이

님은 정말 대단하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앞으로 아흐레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쉽지

만.]

화리트는 놀란 얼굴로 륜을 바라보았다.  화리트는 자신의 친구가 심장

적출 그 자체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가 뭐라

니르기도 전에 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맛이 없군. 식사하고 돌아갈 건가?]

[그럴 계획인데.]

[그럼 지금 인사하지. 잘 가.]

당황한 화리트가 뭐라 니르기도 전에  륜은 식당을 나섰다. 따라나설까

했던 화리트는 잠시 후  그러지 않기로 했다. 친구의  성격을 알고 있던

화리트는 지금 륜을 붙잡아봐야 소동이나 일으키게 될 것이 분명함을 잘

알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화리트 마케로우는 자신의  호위자들을 찾아갔고, 그들 중

두 명이 페이 가문에 잔류하기로 했다는 니름에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리

고 말았다.

마케로우 가문의 가주 두세나는 분노에 미쳐 날뛸 것이다. 화리트는 호

위자가 줄었다는 사실에는 별 불만이  없었지만 가주의 분노는 꺼림칙했

다. 마케로우 가문에는 가임기의 여자가 다섯이나 있었지만 머물고 있는

남자는 넷 뿐이었다. 그 중 두 명을 하룻밤 새에 페이 가문에 뺏긴 것이

며, 두세나 마케로우는 아흐레 후면 마케로우  가문과는 아무 관련이 없

어질 아들 때문에 그런 손실을 입었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을 것이다.

잠깐 동안 화리트는 자신도 페이 가문에  잔류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친구와 함께 적출식을 기다리며 지내는  것도 나쁠 것은 없을

것 같았다. 페이 가문은 장차 수호자가  될, 바꿔 닐러서 그들의 여자들

을 임신시켜줄 가능성이 없는 수련자  화리트에게 별다른 관심은 없겠지

만 그가 머묾으로써 두 명의 남자가 더 남게 된다는 사실에는 만족할 것

이다.(물론 이미 열 명이나 있으니 크게 기뻐하진 않겠지만.)

하지만 그 경우 마케로우  가문에는 체류 중인 남자가  하나도 없게 된

다. 가임기의 여자가 없다면 모를까 다섯이나  되는데 남자가 없다는 것

은 엄청난 손실이다. 그리고 화리트 마케로우는  22년 동안 자신을 키워

준 가문에 그 정도의 손실을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화리트는 남아있던 두 명의 호위자와 함께 페이 가문을 나섰다.

하텐그라쥬의 도로는 도시가 건설된 이후  항상 그러했듯 고요했다. 물

론 정신을 연다면 그 속에서 오가는 무수한 니름을 들을 수 있겠지만 화

리트는 생각에 잠기길 원했기 때문에 정신을 잠시 닫아두었다.

고요 속에서 화리트는 사모 페이에 대해 생각했다.

나가로서는 대단히 특이하게도 처녀로 남길 원하는 여자. 그러나 그 처

녀성이 거꾸로 페이 가문에  풍요로운 후대를 약속한다.  나가 남자들은

고향이나 향수라는 개념을 알지 못하지만,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사모

페이가 페이 가문에 깃들게 하는 분위기가 그에 해당할 것이다. 단지 여

자를 임신시켜줄 목적이 아닌, 그저 마음 편히 다음 방랑을 준비하며 몇

달씩 머무르게 만드는 분위기. 그런데도 남자들은  페이 가문에 많은 자

녀를 남겨주고 떠난다.

느닷없이 날카로운 니름이 화리트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녀에게 안기고 싶나.]

화리트는 옆을 돌아보았다. 함께  걷고 있던 호위자들 중  하나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화리트는 불쾌한 기분으로 닐렀다.

[제 마음을 들여다보셨습니까, 카루?]

['열려'있었다. 사모 페이에 대해 너무 깊이 생각했어.]

화리트는 창피한 기분을 느꼈다. 카루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며 닐렀

다.

[안됐지만 불가능한 이유가 셋이나 있다.]

[셋? 하나가 아니고?]

[우선 너는 수호자가 될  몸이야. 너는 발자국 없는  여신의 신랑이 될

테고 여자를 임신시킬 수는 없어.]

[그게 제가 생각했던 것이군요. 제가 떠올리지 못한 둘은 뭐죠?]

[사모 페이 자신이 거부하겠지.  알고 있겠지만 그  뜻은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녀 덕분에 다른 여인들이 쉽게 남자를  구할 수 있어서 페이 가

문에서도 처녀로 남겠다는 그녀의 뜻을 존중하지.]

[세번째는?]

[세번째는 우리들만이 알고 있는 바로 그 이유지.]

[알고 있습니다. 잊지 않았어요.]

허물을 벗은지 얼마 되지  않는 카루의 피부는 매끈했다.  하지만 그는

나이를 잔뜩 먹은 나가이며 그의 니름에서는 그의 경험의 깊이가 배어나

오고 있었다.

[많은 수련자들이 적출식이 있기 직전에 수련자의 지위를 포기하지. 적

출식이 끝나면 수호자가 되고, 그러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그걸 의지의 박약으로 보고 비난할 자도  있겠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

다. 그건 자연스러운 감정이니까.  하지만, 그들로 하여금  여신의 신랑

자리를 포기하게끔 하는 그 감정이 너를  지배하고 있다면 곤란하지. 사

명을 잊은 건 아니겠지?]

[제 사명은 절대로 잊지 않습니다. 카루.]

화리트는 자신이 그렇게 유약한  인물로 보였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준비는 어떻게 되어 있죠? 구출

대는 준비되었습니까?]

[거의 준비가 끝난 것 같아.]

다른 종족들로 구성된 구출대에 대해 생각하던 화리트는 불안감을 느꼈

다. 물론 수련자의 교육과정 중에는 이종족에  대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

기에 화리트는 최소한 그의 친구인 륜보다는 더 많이 알고 있었지만, 그

래도 배워 아는 것과 직접 경험하는 것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다. 화리트

의 불안을 느낀 카루가 닐렀다.

[우리들 중 한 명이 너를 한계선까지 데려다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니오. 여러분들도 할 일이 있잖습니까.  저는 오히려 혼자 한계선까

지 가는 편을 생각해 봤습니다. 왜 그 자들이 위험하게 키보렌까지 내려

와서 저를 안내해야 하지요? 저 혼자서 한계선을 넘은 다음 그곳에서 그

들과 만나는 편이 서로에게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스바치라는 이름의 또다른 호위자가 닐렀다.

[화리트. 너는 한계선이 무슨 담장이나  울타리처럼 뚜렷하게 구분되는

선이라고 생각하나 본데, 한계선은 그런 것이  아냐. 우리 도시 중 가장

북쪽에 있는 비스그라쥬와 불신자들의 도시 중 가장 남쪽에 있는 카라보

라 사이가 한계선이 가장 좁아지는 곳인데 그곳도 200 킬로미터는 되지.

한계선의 다른 지점들은 보통 500 킬로미터나 천 킬로미터 쯤 돼.]

화리트는 어이가 없어졌다.

[그걸 '선'이라고 니른단 니름입니까? 그렇게 넓은 지역을?]

[그 선은 기온에 의해 정해지는 거니까. 기온이라는 것은 몇 미터 앞에

서 갑자기 바뀌거나 하지는 않는 거다.  수백 킬로미터를 걸어가는 동안

서서히 바뀌는 거지. 비스그라쥬만 해도 황금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렇게

추운 곳에 도시를 건설할 필요가 없지. 어쨌든  그 혹한의 땅을 수백 킬

로미터나 걸어간다는 것은 니름이 안돼. 아무리  소드락이 있다 해도 그

건 불가능해. 하지만 그 더운 피의  불신자들은 키보렌에 내려와도 움직

일 수 없게 되거나 하지는 않아. 당연히 그들이 내려와서 너를 데려가야

해. 이제 이해하겠어?]

[이해했습니다.]

[좋아. 노래는 잘 연습하고 있나?]

[아무래도 어색하더군요. 그 노래라는 것이.]

갑자기 카루는 육성으로 말했다. "해봐."

화리트는 당황하여 카루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걷고 있는 곳은 하텐그

라쥬의 대로였다. 많은 나가들이  그들의 주위를 거닐고  있었고 주위를

둘러싼 건물들 안에도 무수한 나가들이 있을  것이다. 화리트는 차마 육

성으로 대답하지 못했다.

[여기서요? 미쳤습니까?]

"화리트, 네 노래가 다른 자의 주의를 끌 거라고 생각했다면 노래를 부

른다는 계획은 세우지도 않았어."

[하지만 그건 밀림에서의 일이잖습니까. 밀림에서야  새들도 울고 동물

들도 소리를 내니 괜찮겠지만, 이곳은 하텐그라쥬잖아요.]

"그러니 더 나아. 여기서는 모두 다  니름으로 이야기하고 있어서 주위

에서 들리는 소리에 절대  신경쓰지 않아. 지금 나는  굉장히 큰 소리로

말하고 있어. 하지만 아무도 내게 신경쓰고 있지 않잖아?"

화리트는 주위를 둘러보았고 카루의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했다. 나가

인 그가 자연스럽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라면 카루는 우렁차다고 할 정

도로 큰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주위의  나가들은 카루에게

전혀 신경쓰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화리트는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낯섬, 퇴폐적, 기이함, 거북

함, 불쾌. 화리트가 노래에 대해 느끼는  감정들이었고, 어쨌든 보다 건

전한 영향을 주는 감정은  느껴본 바가 없다. 카루의  재촉이 몇 번이나

더 있은 후에야 화리트는 가까스로 노래 비슷한 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리고 화리트는 카루의 말처럼 아무도 그의  노래에 신경쓰고 있지 않

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화리트는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더 높였지

만 무심한 눈길이나마 그에게 보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화리트는 환

한 표정으로 카루를 쳐다보았고 카루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화리트는

생각했다. '도깨비 감투를 쓴  기분이 바로 이럴까?'  도깨비 감투를 쓴

도깨비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다른 도깨비는 볼 수  없는 것처럼, 다른

나가들은 화리트의 노래를 전혀 듣지  못하고 있었다.(실제로 아주 작은

소리로나마 들리긴 하겠지만 신경쓰지 않기 때문에 못 듣는 것과 마찬가

지다.) 화리트는 완전히 자신감을 얻었고 더욱 높은 소리로 노래를 불렀

다.

그리고 스바치와 카루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다른 자들이 저걸 못 들어

서 다행이야.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륜 페이는 얼빠진 표정으로 멀어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륜이 당혹

감을 느낀 것은 그것이 화리트의 목소리였기  때문은 아니다. 그는 친구

가 왜 저런 미치광이  같은 내용을 괴상한  발음으로 말하며 걸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썩어들어가는 수족? 왕? 그게 무슨 말이야? 영을 일깨운

다고?' 륜은 머리를  내저으며 고민해보았지만 불가사의한  기분만 더욱

깊어질 뿐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음 순간 륜은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음악… 노래군!'

륜은 벌떡 일어나 발코니의 난간을  움켜쥐었다. 한껏 상체를 내밀었지

만 이미 노래소리는 멀어지고 있었다. 륜은  화리트를 따라가려는 듯 몸

을 반쯤 돌렸지만 그의  충동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멈췄

다. 성인이 되지 않은 나가가 호위 없이  밖으로 나가는 것은 대단히 위

험하다. 화리트의 경고처럼 '사냥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페이 가

문에는 다른 가문의 질시를 받을 만큼  많은 남자들이 머물고 있었지만,

륜은 그 꼴도 보기 싫은 작자들에게 뭔가를 부탁하고 싶지 않았다. 륜은

누나와 이모들을 생각해 보았지만 그들 중 어린 남동생을 위해 바깥으로

나서줄 사람은 없었다.

[들어가도 되니, 륜?]

륜은 다시 생각을 바꿨다.  그를 위해 나서줄 사람이  한 명은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 부탁할 수는 없다. 륜은 황급히 방 가운데로 걸어가

며 닐렀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렸다. 눈을 내리깔고  있던 륜은 우아한 발만을  볼 수 있었다.

그 발은 천천히 걸어와 륜 앞에 멈춰섰고 륜은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들

여다보지 않기 위해 최대한 고개를 숙여야 했다.

[고개 들어. 륜. 목 아프겠구나.]

허락이 떨어졌기에 륜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에겐 너무 익숙

한 표정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무엇인가에 크게  놀란 듯한

눈. 그러나 그 아래  입술에는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거리를 둔 듯한

미소가 항상 매달려 있다. 륜은 억지로 정신을 열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사모.]

[조금 전 화리트가 떠났다고 들었어. 그 애가  좀 더 있어줄 줄 알았는

데. 떠난 지 얼마 안되었다면 다시 불러도 될까?]

륜은 하마터면 그러라고 니를 뻔했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사모는 다시 그 놀란 듯한 눈으로  동생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 앉았다. 륜은 가만히 선 채  기다렸고 그러자 사모는 난처하다는

듯이 닐렀다.

[앉으라고 니를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니?]

[물론 그렇습니다.]

[앉아. 륜 페이.]

륜은 의자에 앉았다. 동생을  앉히긴 했지만, 사모는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륜은 그녀를 도와주듯 닐렀

다.

[페이라고 부르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응? 무슨 소리야. 넌 아직 페이야.]

[아흐레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 때까진 페이지.]

륜은 논쟁하고 싶지 않다는 듯한 몸짓을 취해보였다. 동시에 그것은 소

견머리 없는 남자로서 여자의  뜻에 따른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사모는

그 동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화리트를 부른 건 나였어. 륜.]

륜은 비틀린 웃음을 지어보였다.

[예. 성공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두 명이라고요? 두세나 님은 대단히

약이 오르겠군요.]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사모는 곧 억울해하는 니름을 보내었다.

[륜. 나는 남자 뺏기 하려고 화리트를 초청한 것이 아냐.]

[두세나 마케로우 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텐데요.]

[두세나 님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사실이 아냐. 난 네가 적출식을 앞

두고 너무 불안해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친구라도 불러주면 좋을 것 같

아서 화리트를 초대한 거야.  화리트도 내 생각에 동의해서  와 준 것이

고. 그런데 어떻게 하루만에 돌려보내는 거니?]

륜은 사모의 정신을 오해한 척 엉뚱한 대답을 했다.

[하긴, 며칠 더 붙잡아뒀더라면  남은 두 남자도 뺏을  수 있었겠군요.

제멋대로 행동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 모자란 생각으로는  그 경우

자칫 마케로우 가문과 깊은 불화가…]

[륜 페이!]

륜은 정신을 닫았다. 사모의 몸에서 비늘 부딪히는 소리가 날카롭게 퍼

져나왔다. 분노한 기색이었지만, 정작 사모의 정신이 열렸을 때 그 니름

은 분노보다는 슬픔에 가까웠다.

[왜 그렇게 비꼬는 거지? 이제 우리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어. 네 니름처럼 아흐레 뿐이야.  왜 우리가 이 아까운 시간을

서로에게 화내며 보내야 하지?  나와 이야기 하려고  하지도 않고, 기껏

부른 친구도 바로 돌려보내고. 륜. 닐러봐.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아무 것도 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제 아흐레 후면 페이 가문과 아무런

관련도 없어질 자를 위해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사모 페이는 충격 받은 얼굴로 륜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동생이 매몰차

게 모든 인연을 끊어버리려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불합리한 일은 아니다. 페이라는 이름도 잃게  되고 다시는 가문으로 돌

아오지 못하게 되니 인연은 어차피 사라진다.  하지만 사모는 좋은 친구

로 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남동생  또한 그것을 원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륜은 그녀의 소박한 희망과는  정반대되는 자세를 고집하고 있었

다.

[륜. 너는 우리가 전혀 모르는 사이처럼 되길 원하니? 왜 그래?]

륜은 물끄러미 사모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구며 닐렀다.

[사모.]

[응? 니르렴.]

[저는 당신이 가지지 않을 아이의 대용품이 되고 싶진 않습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의자가 넘어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사모는 무

서운 눈으로 륜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륜은  누나를 올려다보는 대신 자

신의 무릎을 내려다보며 니름을 이었다.

[아이를 원한다면 당신의 아이를 가지세요. 당신의 이모와 자매들과 경

쟁하세요. 그게 싫다면, 다른 여자들과의  경쟁이 그렇게 두렵다면 아이

를 포기하세요. 적당한  타협이라는 것은 곤란합니다.  남동생은 아이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떻게… 감히 그런 니름을!]

사모의 비늘들이 무서운 소리를 내뿜었다.  사모 페이가 이토록 분노하

는 모습을 본 자는 아무도 없었다. 륜은 두려움을 느꼈지만 끝까지 자신

의 정신을 열어놓았다.

[더 늦어지면 곤란하실 겁니다. 지금도 이미 늦지요. 이미 두세 명씩의

딸을 가진 여자들도 있으니까. 서두르시죠. 다행히도 이 집안엔 열 명이

나 되는 남자가 있으니, 아이를 가지는 것은 별로 어려울 것이…]

륜은 니름을 끝맺지 못했다.  사모가 그의 뺨을 있는  힘껏 후려갈겼기

때문이다.

륜은 볼을 쓸어만지며 사모를 올려다보았고, 그리고 놀랐다.

사모의 두 눈에선 은빛 액체가 흐르고 있었다.  나가가 거의 보이지 않

는 것이며, 그 놀라운 색깔 때문에 다른 종족들은 뭔가 마법이 깃들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평범한 눈물일  뿐이다. 그러나 륜에겐 평범

한 눈물이 아니었다. 륜은 뺨을 어루만지는 것조차 멈춘 채 멍한 표정으

로 사모를 바라보았다.

사모 또한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에 놀란  듯했다. 그녀의 떨리는 손가

락이 눈가를 스쳤다. 곧 그녀의 손가락이 은빛으로 빛났다. 륜은 조심스

럽게 사모를 불렀다.

[사모.]

사모 페이는 륜의 니름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녀의 정신은 완전히 닫

혀있었다.

갑자기 사모가 손을 옆으로 뿌렸다.

그러자, 섬광의 방울들이 어두운 방 안을 가로질렀다.

륜은 눈을 뗄 수 없었다. 허공을 잘라내듯  날아간 은빛 선들은 바닥에

떨어져 작은 폭발처럼 번득였다. 그 은빛  뿐만이 아니라 그 뜨거움까지

볼 수 있는 나가의 눈에 그것은 가히  폭발과도 같았다. 정신을 차린 륜

이 다시 눈을 돌렸을 때 사모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대신 문까지 점점

이 이어진 은빛 눈물들만이 바닥에서 빛나고 있었다.

두세나 마케로우가 화리트에게 어떤 폭력도 구사하지 않은 것은 화리트

가 자신의 아들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리고 함께 있을 시간이 얼마 남

지 않은 가족에게 나쁜 추억을 남기지  않으려는 배려 때문도 아니었다.

두세나 마케로우는 그런 황당한 이유와는 거리가 먼 모범적인 나가의 가

주였다. 무시무시한 폭언과  욕설을 퍼부어대었으면서도  두세나가 끝내

화리트에게 손을 대지는 않은 것은, 화리트가 수련자이기 때문이다.

[이 도깨비 같은 녀석아, 잘 들어라! 네가  다른 가문에 자식을 만들어

줄 일이 없다는 사실에 감사해라. 네가 우리 가문의 출산을 훼방놓은 것

도 모자라 다른 가문의 자식을 늘여준다면, 나는 참을 수 없을 것이다!]

화리트는 어머니의 지혜에  감탄했다. 두세나는 수호자가  될 아들에게

손을 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강력한 권력자가 될 나가에

게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만들지 못하는 나가라서 봐준다는 식으

로 바꿔 닐렀다. 화리트는 그 멋진 화법에 걸맞게 비탄스러워 하는 표정

을 지어보임으로써 - 즉,  여자에게 자식을 만들어줄  수 없는 몸이라는

사실에 대해 상심해하는 척함으로써 두세나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두세나는 만족했지만, 그러나 화리트의 시련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가

임기에 있는 세 명의 누나와 두 명의 이모가 불을 토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그를 호위했던 카루와 스바치가  이모들의 침실에 들어가겠다

고 나서주었다. 누나들 중  최연장자인 소메로는 가주처럼  수호자가 될

동생을 심하게 꾸짖지 않을 정도의 분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모

든 남자를 저능아 취급하는 카린돌은 멍청한 남자가 저지를 만한 얼빠진

실수라고 생각했기에 역시 심하게 꾸짖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리트는 비아스 마케로우에게 불세례를 당

해야 했다.

[내가 몇 살인지 닐러보겠어?]

비아스의 무시무시한 니름은 화리트의 정신을 태워버릴 듯했다. 화리트

는 수련자의 신분을 내세워 정신을 닫아볼까 생각했지만 곧 마음을 바꿨

다. 결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서른넷이십니다.]

[그래. 서른넷이지. 12년째라고!]

[제 불찰이었습니다. 비아스. 용서하십시오.]

[용서라고? 이번에야말로 내 차례였어. 내 자식을 가져야 했어! 그런데

네가 남자를 두 명이나 잃고 왔단 니름이다!  이게 용서할 수 있는 일이

야?]

화리트는 착잡한 심정으로 카루와 스바치 중  한 명이 비아스와 자주었

더라면 하고 생각했다. 비아스 마케로우는  카린돌이나 화리트와는 달리

두세나의 자식이 아니었다. 그리고 소메로처럼 최연장자도 아니었다. 소

메로는 두세나의 여동생의 자식이었지만, 그래도  나이와 그에 어울리는

처신으로써 가주의 총애를 받고 있다. 하지만 비아스 마케로우에겐 내세

울 것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결사적으로 자식에 매달리는 것이

다.

화리트는 과거의 어떤 경험을  통해 그녀가 얼마나  자식을 원하는지에

대해 무섭도록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 경험은 끔찍한 것이었고, 그래서

화리트는 황급히 그 기억을 떨쳐버리며 조심스럽게 닐렀다.

[도리가 없잖습니까. 그들이 페이 가문에 남겠다는데  제가 끌고 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네가 그년의 집에 가지 않았다면 일어날 리가 없는 일이잖아!]

화리트는 '그년'이 페이 가문의  가주 지커엔 페이를  니르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당연히 사모 페이일 것이다.

[비아스. 륜 페이는 제 친구입니다.  친구가 적출식을 앞두고 불안해하

는데 당연히 방문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수련자인 저에겐 의

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넌 마케로우 가문의 일원으로서 그 남자들을 단속할 의무가 있

어! 아흐레밖에 남지 않았지만  어쨌든 넌 아직  마케로우야. 두 명이라

니, 이모들은 그들을 내놓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당신에겐 자식 대신 더 많은 자매가 생기겠지.' 화리트는 심술

궂게 생각했다. 자식도 없고 최연장자도 아닌, 하지만 가주가 되고 싶어

안달난 여자에게 더 많은 자매란 도깨비 장난 같은 노릇일 뿐이다.

화리트는 무의식 중에 닐렀다.

[자식이 없어도 그 덕성으로써  모든 가족들의 존경을 받는  자도 있지

요.]

비아스는 흠칫한 얼굴로 화리트를 바라보았다. 화리트는 자신이 비아냥

거렸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당황했다. 하지만 곧이어 화리트는 자신이 수

련자라는 사실과 이제 곧 마케로우라는 이름을 버리게 될 거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좋아, 그렇다면.' 화리트는 머릿속으로  어떤 인물의 초상을

떠올린 다음 정신을 약간 열어보였다.

비아스는 성난 하늘치 같은 니름을 보내었다.

[사모 페이?]

[그 분은 자녀를 가지려  하시지 않으십니다만, 글쎄요. 만약  그 분이

자녀를 원하시게 되신다면 지금 누님이 겪는  것 같은 곤란은 겪지 않으

실 것 같군요.]

[네 이놈!]

[저를 함부로 부르지 마십시오. 그리고 제 잘못이 아닌 일로 이렇게 꾸

중을 계속 듣는 것도 사양하고 싶습니다.  저는 누님의 동생이기에 앞서

수련자입니다. 장차 발자국 없는 여신의 신랑이 될 사람이지요. 제 지위

에 걸맞는 대접을 부탁합니다.]

비아스는 당장이라도 화리트를 공격할 듯  으르릉거렸지만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수호자가 될  아들과 자손이 없는 딸  중 가주 두세나가

어느 쪽을 편들지는 자명했다.  누나의 마음 속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던 화리트는 쌀쌀맞은 미소를 지으며 닐렀다.

[그리고, 수련자로서 충고 하나 하지요.  비아스. 덕을 쌓으세요. 그건

아기를 가지는 것과 달리 남자가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니름을 마친 화리트는 폭발을 기다렸다.  하지만 비아스는 자제력을 잃

지 않았다. 대신 비아스는 도깨비 같은 얼굴이 되어 닐렀다.

[충고 고맙군. 아우님. 보답 삼아 나도 충고 하나 하지.] "저걸 조심하

렴."

비아스는 그를 놔둔 채 떠났다. 그녀가 떠나고  문이 닫힐 때까지도 화

리트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서 있었다. 그것은 그가 생전 처음 듣는 비

아스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화리트가 정말 놀랐던 것은 비아스의  목소리에 담긴 내용 때문

이었다. 그가 난생 처음 듣는 목소리로  말할 때, 비아스는 심장탑을 가

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화리트는 불과 하루 전 그의 친구가 똑같은 행동

을 취했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륜은 목소리로써 심장탑

이 적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비아스는  목소리로써 심장탑을 주의하라고

말했다. 그의 친구와 누나가 나가가 거의  사용하지 않는 목소리로써 비

슷한 내용을 '말했다'는 사실은 화리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래서 화리트는 심장탑에 대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스바치는 자신을 흔드는 손을 피해 몸을 돌리며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제발 좀 봐주십시오. 아침부터 그걸 할 기력은 없습니다. 저는 어젯밤

에 너무…]

[스바치, 정신 차려요! 납니다! '그것'이 뭐든 난 당신과 '그걸' 할 생

각은 없습니다!]

스바치는 어리둥절한 기분을 느끼며 똑바로  누웠다. 그리고 그를 흔들

던 나가가 아침부터 그 짓을 요구하러  온 마케로우 가문의 어떤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화리트? 살았다. 젠장,  어젯밤 너희 이모님은  나를 거의  죽일 뻔했

어.]

화리트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모님은 마지막 출산을 한지 꽤 오래되었지요.]

[그래. 어찌나 밀어붙이던지, 앞으로  몇 년 동안 여자  근처에도 가기

싫어질 것 같아. 그런데 무슨 일로 찾아온 거냐?]

스바치는 피로와 새벽녘의 차가운 기온  때문에 느릿느릿 일어났다. 그

리고 그의 상태를 알기에 화리트는 조바심을 참으며 스바치가 완전한 상

태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잠시 후 스바치는 그럭저럭 이야기를 나눌 만

한 상태가 되었고 그래서 화리트는 용건을 꺼내었다.

[나는 적출식을 해선 안됩니다.]

스바치는 화리트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옆에 잠들어 있는 카루를 돌아보

았다. 하지만 카루 역시 스바치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

은 피로에 절어 있었다.  스바치는 카루를 좀 더  자게 내버려두기로 했

다.

[네 친구, 륜? 그 친구의 불안감이 네게 전염된 건가 본데, 화리트. 적

출식 도중에 누가 죽는 일은 굉장히 드물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적출을 하지 않으면 넌 하텐그라쥬를 떠날 수 없어. 사명을 완수할 수

없단 니름이야. 아니, 그에 앞서 너 자신이  살아남을 수 없지. 왜 그런

니름을 하는 건지 닐러보겠어?]

[어제 나는 비아스 누님을  화나게 만들었어요. 너무  분노해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누님은 아주 인상적인 암시를 하나 던져주고 말았어

요. 나를 죽일 거라는 암시.]

스바치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고 문

너머에서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조심스럽게 닐렀

다.

[확실한 거야?]

[저는 그렇게 생각됩니다.]

[비아스 마케로우 님이 왜 너를 죽이고 싶어하게 된 거지?]

[12년 동안이나 아이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죠.]

스바치는 당황하여 화리트를 바라보았다. 화리트는 차분한 니름을 보내

었다.

[비아스 누님은 한 번도 자식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애타게 남

자를 원하지만,  거꾸로 그녀에게 아이를 만들어 줄 일이 없는 남동생은

끔찍히 미워하지요. 따라서 나에 대해 약간 화가 났다는 것은  누나에겐

충분한 이유일 겁니다.]

스바치는 화리트의 니름에서 어떤 기묘한  속뜻을 발견했고, 자신이 발

견한 것에 당혹했다.

[어, 니름도 안되는 질문인 것 같다만, 혹시 그녀가 너를…]

[당신이 짐작하는 대로입니다. 스바치.]

[오, 맙소사.] 스바치는 다른 니름을 떠올릴 수  없었기에 한 번 더 닐

렀다. [맙소사.]

화리트는 슬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누나는 돌았어요. 집요한 강박증을 가지고 있지요.]

[그녀가 정말 너에게… 그걸 요구했냐?]

[수련자를 건드리면 여신의 저주를 부를 거라는 니름으로 겨우 말릴 수

있었지요.]

스바치는 동정심에 찬 눈으로 화리트를 보다가 닐렀다.

[끔찍하군. 좋아. 나와 카루가 그녀의 침실을 찾아간다면? 그녀가 원하

는 것을 준다면 비아스는 만족하고 너에 대한 증오를 잊어줄까?]

[여드레 안에 임신시킬 수 있어요?]

[우리가 교대로 매일 찾아간다면 그녀는  임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

[그건 비아스 자신이 원하지 않을 겁니다.]

[응? 그게 무슨 니름이야? 자식을 원한다면서?]

[예. 하지만 비아스가 자식을 원하는 이유는  가주가 되고 싶기 때문입

니다. 누나는 가주님의 친자도  아니고 소메로 같은  최연장자도 아닙니

다.]

[아아. 딸밖에 기대를 걸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니름이군.]

[예. 누나가 단순히 딸만을 원하는 거라면  당신들을 그렇게 간단히 이

모들에게 양보하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그녀는  야망을 가지고 있고, 따

라서 가문의 다른 여자들을 분개하게 할 일은 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

면 당신들은 남은 여드레 안에 기껏 한두번 정도 누나를 찾아갈 수 있을

테지요. 그 정도로는 비아스가 임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줄 것 같진

않군요.]

[그녀가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너를 죽일 것 같냐?]

[그녀는 심장탑을 조심하라고 닐렀지요. 아마도 적출식 도중에 내게 어

떤 사고가 일어날 겁니다.]

스바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닐렀다.

[니름도 안돼. 그녀가  수호자들을 매수하기라도 한단  니름이야? 그건

불가능해.]

[그런 황당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요. 스바치.  수호자들에 대해서는

당신보다 내가 더 잘 알 겁니다.  내가 바로 수련자니까. 하지만 비아스

는 뛰어난 약술사입니다. 누나를 결코 좋아하지 않지만, 나는 그녀의 기

술은 믿기 때문에 비아스가 만든 소드락을  빼돌린 거지요. 그녀의 기술

이라면 적출식 도중에 사고가 일어나게끔 하는  약을 만들 수 있을지 모

릅니다. 그리고 남은 여드레 안에 그걸 내게 먹이겠지요.]

스바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화리트의 니름을 반복했다.

[적출식 도중에 사고가 일어나는 약? 그런 것이 가능할까?]

[모르지요. 하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라면  심장탑을 조심하라는 그녀의

암시를 설명할 방법이 없어요. 분명히 심장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겁

니다. 적출식 도중에.]

[좋아. 약이라. 그럼 이 집 안에서 아무 것도 먹지 않는다면?]

[어떻게 니름입니까?]

[우리들과 함께 도시 바깥으로 나가서 식사를  한다면? 카루는 솜씨 좋

은 사냥꾼이다. 너는 아직 쥐보다 더 큰  것을 먹어본 적이 없겠지만 그

건 큰 문제가 아냐. 어차피 어른이 되면 그렇게 해야 되니까. 밖에 나가

서 여드레 정도 버틸 수 있는 큰 동물을 하나 먹으면 어때?]

[스바치. 내가 또 당신들과 함께 외출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다른 사

람은 몰라도 사랑하는 나의  이모님은 절대로 그걸  허락해주지 않을 것

같은데요?]

스바치는 신음을 흘리고는 정신을 닫았다.  화리트는 초조함을 느꼈다.

'제기랄, 뭘 생각하는 거야.  결론은 뻔하잖은가. 계획  변경이야. 나는

당장 탈출해야 한다고.'

화리트에게는 너무 길게 느껴지는 순간이 지난 다음, 스바치는 다시 정

신을 열었다.

[화리트. 네가 불안해하는 것은 잘 느낄 수  있다만, 아무리 생각해 봐

도 모조리 가정뿐이군.]

화리트는 깜짝 놀랐다.

[예?]

[너는 비아스가 너를 죽일  거라는 객관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녀가 너를 어떻게  죽일지조차 확실히 알지  못해. 물론 너는

어떤 가정을 닐러주었지만 나는 네가 니르는  약 같은 것은 들어본 적이

없어. 너 또한 그런 약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겠지?  내 니름이 맞

나?]

화리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스바치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일

어나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런 듣도보도 못한 환상적인  약물을 끌어댈 필요가 없는  해석도 있

지.]

[어떤 해석이죠?]

[넌 부정하고 싶을지 모르겠다만 아무래도 이  니름을 하고 싶군. 화리

트 마케로우. 네가 적출식 직전의 나가라면  누구나 느끼는 불안감에 빠

져있다고 인정할 생각이 없냐? 아니, 곧장  대답하지마. 넌 네가 수련자

이고 그런 허무맹랑한 불안  심리 따위와는 관계  없는 완벽히 이성적인

나가라고 니르려는 것이겠지.]

그렇게 니를 생각이었던 화리트는 정신적으로 약간 투덜거렸다. 스바치

는 계속 닐렀다.

[완전히 이성적인 생물이라는 것은 없어. 생각해봐. 넌 네 친구 륜처럼

적출식 때문에 불안해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  불안을 인정하는 것이 너

무 창피한 일이니까 네 누나에게 불안심리를 투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

라. 너는 아마도 당장, 그러니까 적출식 전에 도망쳐야 된다고 니르려는

것이겠지. 뭔가 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스바치, 나는 적출공포증 따위…]

[잠깐. 먼저 이 질문에 대답해줘. 비아스가  너를 죽이고 싶었다면, 왜

그녀는 지난 22년 동안 그러지 않았지? 그녀에겐 기회가 많았을 것 같은

데.]

화리트는 입을 벌린 채 스바치를  바라보았고 스바치는 빙그레 웃었다.

가까스로 화리트는 대답을 떠올릴 수 있었다.

[22년이 아니에요. 어제 결심했을 겁니다. 내가 어제 그녀를 화나게 했

으니까.]

[흐음. 지금껏 구체화되지 않았던  증오가 바로 어제  살의로 바뀌었단

니름인가. 뭐, 좋아. 언제나  잔을 넘치게 하는 건  마지막 한 방울이니

까. 하지만 그녀가 왜 최고의 권위자들 앞에서 너를 독살하려는 건지 설

명할 수 있겠어?]

[최고의 권위자?]

[심장탑의 수호자들. 적출식 도중에 사고가  일어나면 수호자들은 너의

시체를 면밀히 검사하겠지. 비아스의 솜씨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나라

면 도깨비 앞에서 불장난을 치지는 않을 텐데.]

화리트는 할 니름이 없다는 심정이 되었다. 스바치는 체온을 높이기 위

해 창가로 걸어가며 닐렀다.

[네 불안을 웃음거리로 만들지는 않겠어.  화리트. 네가 나보다는 비아

스에 대해 더 잘 알겠지. 그리고,  네게 약간이라도 위험 요소가 있다면

우리들의 사명 또한 위험에 처하게 되지. 그러니, 지금 네 니름이 좀 황

당하게 들린다는 점은 고백하겠지만, 그래도 나는  네 니름에 대해 진지

하게 생각해보겠어. 이렇게 하자. 나와 카루는  될 수 있는대로 자주 그

녀를 찾아가겠어. 그녀를 즐겁게 해주려고 노력하며 동시에 그녀를 관찰

하겠어. 그리고 너는 좀  더 객관적이고 확실한  증거를 찾아줘. 그리고

조심하고.]

스바치의 니름은 합리적이었다.  갑자기 화리트는 자신이  얼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스바치의 니름대로  그는 적출식이 무섭다고 니

를 수 없어서 비아스가 적출식 도중 자신을 죽게 할 거라고 니르는 것일

지도 모른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화리트는 창피한 기분을 느꼈다. 맙소

사. 그런 어처구니 없는 약이라니.

결국 화리트는 스바치의 의견에 찬성하기로 했다. 그리고, 동시에 굉장

히 조심하기로 결심했다.

케이건은 푼텐 사막을 바라보았다. 희게  불타오르는 사막 위로 하늘빛

은 검푸른 색에 가까웠다. 사막의 하늘은  여간해선 푸르게 보이지 않는

다. 하늘이 푸르게 보이는 곳은 보다  습기가 많은 땅이다. 하지만 지금

케이건은 남쪽 창가에 앉아있었고 푼텐 사막 남쪽에는 습한 키보렌 밀림

이 있었다. 그 때문에 그곳의 하늘은 푸르렀고, 사막의 요괴스러운 흰빛

에 대비되자 질병처럼 검푸르게 보였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케이건은 들어오라고 말했다. 문이 열리

고 발자국 소리가 조금 난 후에야 케이건은 고개를 돌렸다.

"손님. 탁자 위에 내려놓으면 되겠습니까?"

케이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막의 젊은 아들 모티는  들고 온 솥을 탁

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묻지도 않은 말을 꺼내놓았다.

"어머니는 이걸 만지려고도 하지 않으세요. 아버지도 마찬가지고. 그래

서 제가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모티는 막대기를 물고 온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

만 케이건은 모티를 칭찬하는 대신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케이건의 응

시가 길어지자 모티는 당황하고 말았다.

"저, 다른 건 필요 없으십니까?"

"필요없네, 모티. 나가 보게."

모티는 우물쭈물하다가 갑자기 말했다.

"아, 참. 아버지께서 이걸  여쭤보라고 하셨는데요. 며칠  동안 묵으실

생각입니까?"

"오래 있진 않을 거야. 나는 도깨비 한 명과 레콘 한 명을 기다리고 있

네. 조만간 그들이 도착할 걸세."

더 이상 화제를 끌어댈 수 없던 모티는 마치 쫓겨나가는 듯한 낭패스러

운 태도로 방을 나갔다. 홀로 남은 케이건은  탁자 위에 놓인 솥을 물끄

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음 속으론 모티의 태도에 대해 생각했다.

인간이란 얼마나 괴상한 생물인가. 케이건은  마지막 주막의 주인을 만

난지 이틀도 되지 않았지만 그가 어떤  인물일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

었다. 사막과 그것이 품고 있는 무한한  위협으로부터 주막을 지켜온 자

가 얼마나 단단한 사내인지 추측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그 주

인은 아마도 울며 거부했을 부인에게 요리를 강요하고 젊은 아들에게 그

요리를 가져가게 했다. 어쩌면 요리는 직접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솥

을 가지고 나타난 것은 젊은 아들 모티였다. 케이건은 그것을 바라지 않

았다.

케이건은 한숨을 쉰 다음 모티가 가져온 솥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나가 고기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카라보라에서 케이건은 훨씬 조용한 생활을  했었다. 그곳에 있는 그의

오두막에는 다른 공간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큰 조리장이 있다. 그곳에

케이건은 온갖 종류의 칼과 톱, 집게,  망치, 절구, 쇠꼬챙이 등을 갖춰

놓고 있었고 큼직한 무쇠솥 세 개를  걸쳐놓을 수 있는 부뚜막도 가지고

있었다. 이틀이나 사흘 쯤 걸려 남쪽으로 내려가 추위(물론 나가적 의미

에서)에 비틀거리는 나가 정찰대원 몇 명 잡은 다음 다시 오두막으로 돌

아올 때까지 케이건은 아무도 만나지 않을 수 있었다. 그곳에는 그의 사

냥감에 비명을 지르는 주막 주인도, 덜  여문 가치관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에는 경외감을 느껴버리는 주막 주인의 멍청한  아들도 없었다. 그 고

요한 곳에서 케이건은 나가의 시체를  토막내어 삶아먹으며 평화롭게 살

았다.

목가적인 살육의 나날이었다.

하지만 하인샤 대사원에서 그에게 전갈을 보냈고  이제 케이건은 이 괴

상한 주막에서 두 명의 동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케이

건은 씹던 뼈다귀를 탁자  위에 팽개치곤 얼굴을  감싸쥐었다. 오레놀이

남겨놓은 서신에는 그의 동행자가 도깨비와 레콘이라고 되어 있었다. 케

이건은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인간을 대하는 법도

거의 기억나지 않는 판국에 도깨비와 레콘이라니.

도깨비가 어떤 자들이더라.

진땀을 흘릴 정도로 힘겹게 기억을 더듬던  케이건은 겨우 20여년 전의

판막음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자 다른 것들도 떠올랐다. 킴이 -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케이건은 도깨비가 인간을 그렇

게 부른다는 사실을 가까스로 떠올릴 수  있었다. - 판막음을 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나선 것은 바우  머리돌 성주였다. 그리고 그

때 케이건은 이미 씨름에 나선 것을 후회한지 오래였다. 하지만 지고 싶

지 않다고도 생각했다. 그  때의 감정을 떠올린  케이건은 약간 놀랐다.

그 때는 호승심 같은 것이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

의 과거를 보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케이건은 그 마지막 씨름에 대해 생

각했다. 잡치기였던가? 호미걸이였던가?

잠시 골똘히 생각해보던 케이건은 곧 흥미를 잃었다. 그게 무슨 상관인

가. 판막음을 했으니 아마  이겼던 모양이다. 케이건은  그 씨름에 대해

더 생각해 보는 것을 관뒀다. 관심도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세 시간 후 케이건은 그런 결정을 후회했다.

마지막 주막의 주인은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도깨비 비형 스라블

을 발견했다. 하지만 주인은 그가 주막을  찾아드는 길손일 거라고는 생

각하지 못했는데, 왜냐 하면 주인은 지금껏  하늘을 날아오는 손님을 맞

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형이 마지막 주막에 꽤 가까이 다가왔을 때

야 주인은 그것이 딱정벌레를 타고  날아오는 도깨비라는 사실을 깨달았

다.

딱정벌레는 모래바람을 심하게 일으키며 바위 옆에 내려앉았고 그 모래

가 가라앉을 때 쯤 도깨비는 이미 계단  위까지 도달해 있었다. 주막 안

으로 뛰어든 비형은 주인을 흘끔 바라보았고  주인은 거의 주저없이 2층

을 가리켜 보였다.

"저기, 왼쪽 첫째 방이오."

비형은 위쪽을 흘끔 쳐다보았다. 주막의 1층 가운뎃부분은 천장까지 뚫

려 있었고 발코니형 복도가 그 주위를 빙  두르고 있어 2층의 방들을 볼

수 있었다. 주인이 가리킨 방을 확인한 비형은 빙긋 웃었다.

"좋은 꿈 꾸셨습니까! 내 딱정벌레는  마구간에 넣어두시면 됩니다! 마

구간은 있죠?"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것을 확인한  비형은 그대로 2층으로 달려올

라가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인간에게 질

문했다.

"좋은 꿈 꾸셨습니까!  우리 성주님을  어떻게 모래판에  메다꽂았습니

까?"

"나는 케이건 드라카요."

케이건과 비형은 잠시 서로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케이건은 자신이 뭔

가를 잘못 대답했나 보다 생각했지만 뭘 잘못 말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히 처음엔 이름을 말해야 할 텐데. 도깨비들은 좀 달랐던가? 그리고

비형 역시 자신이 뭔가 잘못했다고 느꼈다.  다행히도 비형은 자신의 실

수가 뭔지 깨달았다. 비형은 쾌활하게 웃었다.

"아, 이런. 미안합니다. 비형 스라블이라고  합니다. 화나지 않으신 거

죠?"

케이건은 왜 비형이 미안한 듯이 웃는 건지, 자신이 왜 화가 나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등에 땀이 흐를  것 같다고 생각하며 케이건은 조심

스럽게 말했다.

"하인샤 대사원에서… 맞소?"

"맞습니다. 절 기다리셨죠?"

"그렇소."

침묵.

"저, 어떻게 우리 성주님을 모래판에 메다꽂았습니까?"

"미안하오만 무슨 기술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오."

"예? 호미걸이였습니다! 도깨비들 중엔 그걸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저

는 성주님처럼 허리를 많이 숙이는 분에게  어떻게 호미걸이를 걸 수 있

었느냐고 질문한 겁니다. 그런데  무슨 기술이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

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만일  제가 판막음을 했다면 죽을 때까

지 그 이야기를 했을 겁니다. 잊어버린 겁니까? 완전히? 분명히? 번복의

여지없이?"

"글쎄. 그런 것 같소."

비형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케이건을 바라보았다. 케이건

은 불안을 느꼈다. 도깨비들도 이해할 수 없는 건 존경해버리던가? 생각

이 나지 않았다. 머리가  아파왔다. 케이건은 어금니를  깨문 채 비형을

쳐다보았다.

비형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배낭을 벗어 발 옆에 내려놓았다.

"그러실 수도 있겠군요. 20여년 전의  일이고, 우리처럼 씨름을 좋아하

시지 않는다면." 케이건은 안도했다. 하지만 말  끝에 항상 질문을 덧붙

이는 비형의 화법은 그에게 다시 고민거리를 제공했다. "그런데 지금 연

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케이건은 잠시 주뼛거리다가 비형에게 의자를 밀어주었다. 그리고 비형

이 의자에 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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