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눈물을 마시는 새. 0. 관련자료:없음 [51496]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2-03-14 01:56 조회:47388
하늘을 불사르던 용의 노여움도 잊혀지고
왕자들의 석비도 사토 속에 묻혀버린
그리고, 그런 것들에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생존이 천박한 농담이 된 시대에
한 남자가 사막을 걷고 있었다.
눈물을 마시는 새.
0. 구출대.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 - 해묵은 금언.
그보다 더 적합한 이름이 없어 그저 '마지막 주막'이라 불리는 곳에 남
자가 다가온 것은 푼텐 사막의 여행자들이 잠자리를 찾아드는 새벽녘이
었다.
주막 주인은 남자가 도달하기 한 시간 전부터 남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보통의 경우 주인은 그보다 일찍 길손을 발견하는 편이다. 광활한 푼텐
사막에서는 시야를 가로막는 것이 별로 없다. 사구들이 있긴 하지만 그
것들도 장애물은 되지 못한다. 마지막 주막이 있는 위치는 30 미터 높이
의 바윗덩이 위였기 때문이다. 직경 40 미터 쯤 되는 그 바위의 윗부분
은 모조리 마지막 주막에 의해 점령당해 있었다. 그런 특이한 위치에 있
었기에 주인은 주막을 향해 걸어오는 길손을 몇 시간 전부터 발견하곤
했다. 그 길손들은 대개 동쪽이나 서쪽, 그리고 북쪽에서 와서 마지막
주막에 머물렀다가 다시 동쪽이나 서쪽, 그리고 북쪽으로 떠난다.
하지만 남자는 남쪽에서 오고 있었다. 주인이 거의 신경쓰지 않는 방향
이었고, 그래서 주인은 한 시간 거리에 이를 때까지 남자를 발견하지 못
했다.
주인은 남자가 길을 어지간히도 잘못 들었다가, 주막을 지나치기 직전
가까스로 불빛을 발견한 것이 틀림없다고 짐작했다. 그렇게 판단한 주인
은 남자가 주막까지의 남은 거리를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줄여나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끔 무료한 시선을 돌려 다른 방향을 바
라보았지만 다른 길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검은 고체를 연상시키던 사막의 하늘에 조금씩 물빛이 배어들었다. 남
자의 모습은 이제 완연히 커져 있었다. 대략 10분쯤 후에 도착하겠다고
판단한 주인은 주전자와 물그릇을 준비해둘 요량으로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던 주인의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주인은 눈살을 찡그리며
다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엇이 자신의 주의를 끌었는지 알아차
렸다.
남자의 뒤편으로 검은 선이 뒤따르고 있었다. 밝아진 하늘 아래에서 주
인은 그 검은 선이 지평선까지 점점이 이어져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주
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남자가 뭔가 무거운 것을 끌고 있는 것일까? 바
람은 그다지 불지 않았고 따라서 남자가 뭔가 묵직한 것을 끌고 있다면
그 자국은 빛이 강해지는 이 시점에 그림자를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
다. 혹 남자의 낙타가 죽어버려서 남자는 어쩔 수 없이 귀중한 짐을 끌
고 오는 것일까? 주인은 남자의 등뒤를 자세히 보려 했지만 남자는 무릎
까지 오는 펑퍼짐한 방풍복을 걸치고 있어서 그 뒤쪽을 보기가 어려웠
다.
그러나 조금 후, 주위가 더 환해지자 주인은 자신의 상상이 너무 온건
했음을 깨달았다. 주인은 놀라움 속에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의 발 뒤로 이어지는 검은 선은 어떤 액체가 모래 속으로 배어든
자국이었다. 그리고 어떤 여행자도 일부러 물을 흘리지는 않을 것이다.
메마른 사막의 모래조차도 완전히 빨아먹지 못하고 검붉은 자국을 남겨
놓게 만든 그것은 피였다.
"이보오. 괜찮은 거요?"
커다란 천으로 머리와 입 주위를 가린 채 걸어오던 남자는 느닷없이 들
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작은 사구 위에 서있는 주막 주
인을 보곤 손을 어깨 쪽으로 가져갔다.
"누구냐?"
"저기 주막에서 온 사람이오. 주막으로 오던 중 아니었소?"
주인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여전히 손을 목 뒤에 놓아둔 채 말했
다.
"더 다가오지 마시오. 비무장이오?"
"난 도적이 아니오. 설마 도적이 맨몸으로 낙타도 타지 않고 다닐까.
난 저 주막 주인이고 당신을 보다가 도와주려고 온 거요."
"뭘 도와주겠다는 거요? 설마 주막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겠다는 것은
아닐 테고."
주인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주인은 다시 남자의 뒤쪽을 훔쳐
보았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자 그 자국이 피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질
뿐이었다. 주인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본 남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거 말이오? 신경쓰실 거 없소."
"피를 그렇게 흘리는데 신경쓰지 말라는 거요?"
"내 피가 아니오."
주인은 어리둥절해져서 남자의 뒤편으로 돌아갔다. 남자는 주인이 관찰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남자는 등뒤로 커다란 자루 같은 것을 끌고 있었다. 그 자루는 검붉게
물들어 있었고 그것이 피의 길을 만들고 있는 원인이었다. 주인은 흠칫
하여 남자의 목쪽을 쳐다보았고 방풍복의 옷깃 너머에서 솟아나온 커다
란 칼자루를 발견하곤 치를 떨었다. 거대한 검을 매고 피가 배어나오는
자루를 끌고 있는 남자라니.
"자루 속에 든 것이 뭐요?"
"이미 말했지만 신경쓸 필요 없는 것이오."
"그거 피잖소!"
"인간의 피가 아니오."
남자는 퉁명스럽게 대답한 다음 주인을 내버려둔 채 다시 걷기 시작했
다. 남자가 다시 움직이자 주인은 그 자루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사람을 넣어도 두 명은 넣을 것 같은 그 자루는 모래 위에
커다란 자국을 남기며 끌려갔다. 험악한 눈으로 남자의 등을 쏘아보던
주인은 조금 후 남자를 앞질러 걸어갔다.
"먼저 가서 준비 좀 하겠소이다."
남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주인은 주막을 향해 달음박질 쳤다.
물론 말한 바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주막에 당도하기 직전까지
주인은 자신의 칼을 어디에 두었는지 생각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쓴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그 커다란 장검의 소재는 도통 기억나
지 않았다. 어차피 칼 한 자루로 남자를 대적할 생각도 아니었던 주인은
계단을 올라서자마자 고함을 질러 식솔들을 깨웠다.
영문을 모른 채 달려나온 아내는 칼이 어디에 있냐는 남편의 질문에 당
황했다. 다행히도 약간 늦게 나온 젊은 아들은 칼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고 칼을 쓸 일이 생긴 듯하자 흥분하여 달려갔다. 주인은 설명을 강
요하는 아내를 부엌에 밀어넣다시피 한 다음 물그릇과 주전자를 탁자 위
에 내어놓았다.
그 때 바위를 올라온 남자가 주막 안으로 들어섰다.
남자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본 다음 주전자가 놓인 탁자 쪽으로 걸어갔
다. 남자의 뒤쪽에는 여전히 그 끔찍한 자루가 뒤따르고 있었고 그래서
바닥에 핏자국이 남았다. 주인은 그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탁자에 도
달한 남자는 방풍복을 벗어 의자에 걸쳐둔 다음 배낭을 벗었다. 그리고
손을 목 뒤로 가져갔다.
주인은 잠깐 동안 피가 배어나오는 자루를 잊어버렸다.
주인은 한 번도 그런 칼을 본 적이 없었다. 30 센티미터 쯤 되는 칼자
루 위에는 역시 30 센티미터 쯤 되는 고동이 달려 있었다. 고동이 그토
록이나 긴 이유는 분명했다. 길이가 120 센티미터는 될 듯한 거대한 칼
날 두 개가 나란히 부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다리가 붙어버린 쌍
둥이 같은 모습의 검이었다.
그 해괴한 쌍신검(雙身劍)은 착용하는 방법도 독특했다. 남자는 가죽끈
과 연결 쇠고리들로 이루어진 복잡한 장신구를 가슴 위쪽에 묶고 있었
다. 그 왼쪽 어깨 쪽에는 둥그스름한 어깨 보호대가 붙어 있었고 등쪽,
목 뒤에서 조금 내려간 곳에는 걸이 모양의 쇠붙이가 부착되어 있었다.
남자의 쌍신검의 두 칼날 사이 부분이 그 걸이에 걸리게 되어 있었다.
칼집은 있지도 않았다.
남자는 쌍신검을 탁자 위에 놓아둔 다음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머리와
입 주위를 감싼 천을 풀기 시작했다.
그 때 주인의 아들이 칼을 들고 돌아왔다. 다행히도 눈치 빠른 아들은
칼을 등 뒤에 숨긴 채 걸어왔다. 주인은 눈짓을 해서 아들을 뒤로 물러
나게 한 다음 남자에게 다가갔다.
"자루에 든 것이 뭔지 설명해주시겠소?"
천을 다 푼 남자는 그것을 탁자 위에 놓아두었다. 땀과 모래로 덩이진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흘러내렸고 며칠 동안 다듬지 않은 수염은
남자의 입 주위를 시커멓게 뒤덮고 있었다. 그 볼썽사나운 얼굴을 주인
에게로 돌린 남자는 엉뚱한 말을 꺼냈다.
"여기가 마지막 주막 맞소?"
"그렇게들 부르지. 남쪽으로는 더 이상 주막이 없거든."
"그렇더군."
무심히 넘어가려던 주인은 문득 남자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닫고는 눈을
크게 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남쪽에서 오셨단 말이오?"
"거기서 왔소."
차라리 하늘에서 왔다고 하는 편이 믿기 쉬울 것이다.
"거 참, 남쪽에는 아무 것도 없소."
"키보렌이 있소."
"하, 키보렌? 물론 그게 있지. 무수한 나무들도 있고 빌어먹을 정도로
많은 동물도 있지. 그리고 나가들도 있고. 그러니,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나 마찬가지잖소."
비웃는 주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는 또다시 엉뚱한 말을 꺼냈다.
"편지를 주시오."
"예?"
"이곳이 마지막 주막이라면 케이건 드라카에게 온 편지가 있을 텐데."
주인은 다시 눈을 크게 떴다. 분명히 그런 편지가 있었다. 수십 일 전
북쪽에서 죽을 지경이 되어 걸어온 대사원의 승려는 케이건 드라카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하며 서신 하나를 건네주었다. 오레놀이라는 이름의 그
승려는 며칠 동안이나 몸조리를 한 다음 겨우 북쪽으로 돌아갔다.
고개를 끄덕일 뻔한 주인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먼저 내 질문에 대답해주시오. 자루에 든 것은 뭐요? 그리고 남쪽에서
왔다니, 그건 무슨 말이오?"
케이건 드라카라는 이름의 남자는 주전자를 들어올렸다. 주인은 재빨리
끼여들었다.
"한 그릇에 두 닢이오. 여기 물값은 비싸지. 물이 나오기 때문에 주막
이 가능하거든."
케이건은 그 말에는 댓구도 하지 않은 채 물그릇에 물을 따랐다. 물을
다 따른 다음에야 케이건은 주인의 질문에 대답했다.
"내가 남쪽에서 온 것은 푼텐 사막을 적게 가로지르기 위해서였소. 내
출발지는 카라보라였소. 거기서 남쪽으로 해서 키보렌에 들어섰소. 그
다음 죽 서쪽으로 오다가 다시 북쪽으로 발걸음을 돌려 이 주막으로 왔
소."
주인은 소리내어 코방귀를 뀌었다. 케이건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푼텐 사막의 동쪽 끝 카라보라는 주막에서 200 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
었다. 따라서 200 킬로미터나 되는 사막 여행을 피하려면 남자가 말하는
것처럼 남쪽으로 빙 돌아오는 편이 낫다. 푼텐 사막의 남쪽 끝에서부터
주막까지는 불과 50 킬로미터 거리다.
하지만 그 말은 거꾸로 말해서 키보렌 밀림 속을 200 킬로미터 가량 걸
어야 한다는 의미다. 나가들이 득시글거리는 키보렌 밀림을 가로지르는
200 킬로미터의 여행. 같은 거리의 바다 위를 걷는 편이 훨씬 안전할 것
이다. 주인이 그것을 지적하려 할 때 케이건이 자루를 가리켰다.
"자루에 든 것은 그 여행을 통해 얻은 거요. 풀어보시오. 내가 남쪽에
서 왔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 거요."
주인은 미심쩍은 눈으로 자루를 쳐다보았다가 다시 케이건 드라카를 쳐
다보았다. 하지만 케이건은 동편 2 닢짜리 물로 목을 축일 뿐이었다. 주
인은 조심스럽게 자루를 풀어보았다.
잠시 후, 부엌에 있던 주인의 아내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비명에 주저앉
고 말았다.
가장 높이 날아오르는 하늘치도 이곳에서는 땅을 볼 수 없다. 동서남북
의 모든 지평선까지 뻗어있는 키보렌에서는.
열기를 머금은 채 무겁게 드리워져 있는 먹구름은 숲의 정수리에 거의
닿을 듯하다. 어떤 도낏날도 경험하지 않은 키보렌의 나무들은 늙고, 거
대하고, 음험하다. 긴 시간 동안 무질서하게 자라난 가지들은 어찌할 도
리가 없을 정도로 뒤얽혀 있고, 허공에서 손을 맞잡은 가지들은 그 위에
말라죽은 나뭇잎을 잔뜩 얹은 채 아래로 잔뜩 휘어져 있었다. 하여, 거
센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키보렌에선 숲의 머리부분에서 나뭇잎들이 하늘
로 솟아오른다.
거대한 나무들은 죽은 후 쓰러지기도 하지만 좀 작은 나무들은 죽은 후
에도 뒤얽힌 가지 때문에 쓰러지지 못하고 그 자신을 위한 비목이 되어
서 있다. 그 중엔 옆의 형제들에게 비스듬하게 기댄 채 죽어있는 나무들
도 많았고, 따라서 초록빛 바다를 연상시키는 키보렌의 아랫쪽에는 무질
서하게 뻗어나간 수직선과 사선과 수평선이 뒤얽혀 새들조차 길을 잃을
미로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정신질환자의 망상 같은 미로는 자
라나며, 휘어지고, 썩어들어가며, 살아있는 척하고, 간혹 와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무너져 바스러진 나무껍질과 나뭇잎을 사방으로 흩날린다.
하지만 대개의 나날 동안 키보렌은 그 초록빛 베일 아래쪽에 암흑을 감
금한 채 침묵의 나날을 보낸다.
그곳에 냉혹의 도시가 있었다.
강대한 레콘도 그 이름을 말할 때 불쾌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곳,
쾌활한 도깨비도 그 이름을 말할 때 미소지을 수 없는 곳, 그리고 날조
에 능한 인간은 자신들이 붙인 이름 '침묵의 도시'를 고집하는 곳. 그러
나 그곳은 냉혹의 도시이며, 자신을 증거하기 위해 타인의 찬양이나 저
주가 필요하지 않은 위대한 업적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것들 중 하나
다.
하텐그라쥬.
무한히 펼쳐진 키보렌의 푸른 밀림 가운데서 하텐그라쥬는 외로운 흰색
섬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하얀 섬은 중앙에 솟아오른 200 미터 높이의
심장탑이 그다지 높아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대한 대도시다. 곧게 뻗은
대로들 좌우로 장엄한 건물들이 위용을 뽐내며 서 있고 건물들보다 더
자주 눈에 들어오는 광장들은 나가들이 노획한 전리품들로 치장되어 있
다. 한계선 이남에 있는 나가들의 다른 도시들은, 역시 높은 심장탑과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가지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이 위대한 도시 하텐그
라쥬의 모사품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모사품들도 그렇지만 이 아름다운 도시는 두 가지 점에서 다른 종
족들의 도시와 매우 다르다. 이 도시에서는 소리를 들을 수 없고 밤을
추방하는 불빛이 없다. 하얀 열주와 회랑과 광장들 사이로 나가들은 아
무런 소리없이 유령처럼 오가며, 어디에서도 목소리나 노래 같은 것은
들을 수 없다.
그래서 륜 페이가 입을 열었을 때 화리트 마케로우는 큰 충격을 받아야
했다.
"심장을 가지고 사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등뒤로 도깨비 일개 군단이 행진해도 알아듣기 어려운 나가의 청력이지
만, 하텐그라쥬의 비정상적인 고요함 때문에 화리트는 친구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있었다. 화리트는 당황했고 친구의 무례를 탓할 생각도 떠올리
지 못했다.
[심장을 가지고 사는 것? 매일매일 죽을까봐 두려워하며 사는 것이지.]
륜 페이는 화리트의 니름이 몹시 혼란스러운 것을 감지했다. 친구를 더
이상 당혹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륜은 입을 다물고 닐렀다.
[매일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니름도 되잖아?]
그리고 륜은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 위에 얹어보였다. 똑같은 행동
을 취한다면 화리트 역시 자신의 가슴 속에서 뛰고 있을 심장박동을 느
낄 수 있었겠지만, 화리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너무 창피스러운 일이
기 때문이다.
[륜.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그러지 않겠지?]
[그러다니, 뭐?]
[가슴을 만지지는 않겠지? 그러지마. 무례한 짓이야.] 화리트는 자신이
너무 딱딱하게 닐렀다고 느끼고는 덧붙여 닐렀다. [어차피 열흘 후에는
그런 행동 그만두게 되겠지만.]
륜은 오른손을 내렸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하텐그라쥬의 중심부를 바
라보았다. 그곳엔 심장탑이 하텐그라쥬의 가장 높은 건물들의 수십배 높
이로 솟아있었다. 심장탑을 바라보는 륜의 눈동자에는 혐오와 공포가 뒤
섞여 있었다. 발코니의 난간을 움켜쥔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기까지
했다.
페이 저택의 발코니에 서있는 륜 페이와 그의 친구 화리트 마케로우는
모두 22살로 같은 나이이며, 나가의 규범으로는 아직 어른 대접을 받을
수 없는 나이이기도 하다. 하지만 열흘 후, 샤나가성(星)이 달 뒤로 숨
는 날이 오면 그들은 심장탑으로 불려가게 될 것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꺼낼 것이다.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아, 화리트.]
[꺼림칙해 할 건 전혀 없어. 륜. 적출식 중에 죽은 나가는 한 명도 없
어. 사고가 생긴다느니, 매년 한두 명은 꼭 나오지 않는다느니 하는 건
모두 어른들이 애들 겁주려고 하는 농담이야.]
화리트는 자상하게 닐렀지만 륜의 얼굴은 어두웠다.
[사고가 생길까봐 무서워하지는 않아. 나는 심장을 꺼낸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
화리트는 놀랐다.
[왜지? 륜. 불사가 싫다는 거야?]
[불사는 아니지.]
[그러면 반불사라고 하지. 그것이 별 것 아니라고 니를 거야? 어떤 적
의 공격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시시한 일은 아닐 것 같은데.]
[적이라고? 나가의 적이 어디에 있지? 한계선 남쪽엔 더 이상 나가의
적은 존재하지 않아. 그리고 우리는 한계선 위로 올라가지도 않고. 도대
체 나가를 위협하는 적이 어디에 있단 니름이야?]
륜의 니름은 격앙되어 있었다. 화리트는 차분하게 설명하기로 했다.
[물론 우리는 한계선 이북의 그 추운 땅으로 올라가진 않아. 하지만 그
들, 더운 피의 불신자들은 한계선 이남으로 내려올 수 있어. 그들은 곡
물을 먹어. 그래서 숫자가 엄청나게 많아. 하지만 우리는 그들처럼 숫자
를 늘일 수 없어. 불사의 몸은 불신자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키는 나가
의 무기야.]
"그들이 내려온다고!"
륜은 다시 육성으로 외쳤다.
"어떻게! 인간의 말은 우리의 숲에서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어.
저 거대한 레콘은 자기 몸조차 추스릴 수 없고! 그리고 그들 모두는 온
도를 볼 수 없어. 밤이 찾아들지 않게 할 재주가 있다면 모를까, 그 불
신자들이 어떻게 감히 우리의 숲에 들어온단 말이야!"
륜은 성난 하늘치처럼 외쳤다. 마치 불신자를 대하듯 말을 하는 륜을
보며 화리트는 불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화리트는 꾹 참으며 부드럽게
닐렀다.
[도깨비는?]
나가 최강의 적수의 이름은 륜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나가는 말을 타고
곡물을 먹는 인간도, 바위를 깨고 하늘을 나는 레콘도 두려워 하지 않는
다. 하지만 도깨비의 경우는 좀 다르다. 화리트는 모든 나가들이 잘 아
는 사실을 차분하게 닐렀다.
[나가 잡는 것은 도깨비라지? 우리는 도깨비와 그 놈들의 그 저주스러
운 불꽃을 구분할 수 없어. 그들도 온도를 볼 수는 없지만, 우리들 또한
그들을 볼 수 없다는 것은 마찬가지야. 그리고 도깨비의 불은 우리의 아
름다운 숲을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어. 페시론 섬과 아킨스로우
협곡을 생각해봐.]
[그것은 너무도 예외적인 경우야. 도깨비들은 절대로 전쟁을 좋아하지
않아. 그게 아주 재미있는 장난거리라고 생각한다면 모를까.]
[가능성 있는 일이잖아? 나는 그 놈들의 장난에 한계가 있기나 한지 모
르겠어. 어쨌든 어느날 세상이 멸망한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나는 이렇게
생각할 거야. 아아. 어느 자제력 부족한 도깨비 하나가 드디어 일을 저
질렀구나.]
친구의 장난스러운 니름에 륜은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나도 도깨비에 대한 농담은 몇 개 알고 있어. 화리트. 그리고 그 농담
들이 도깨비에 대해 내가 들은 유일한 것들이야. 나는 어디서도 도깨비
들이 위협적이라는 니름은 듣지 못했어. 물론 그들은 우리의 눈을 현혹
시킬 수 있는 유일한 자들이지만, 동시에 그 자들은 전쟁에 아무 관심이
없는 유일한 불신자들이기도 해. 그렇다면 도깨비 또한 우리가 심장 없
는 생물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될 수 없어.]
[넓은 세상엔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적이 있을 수도 있지.]
[아아, 물론 있지. 적은 존재해.]
그리고 륜은 혐오감을 담아 육성으로 외쳤다.
"바로 저기에!"
화리트는 얼굴을 일그려뜨렸다. 친구의 무모함과 무례함을 익히 알기에
대단히 높은 관대함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그였지만, 이번의 행동은 도
가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륜 페이는 심장탑을 가리키고 있었다.
[륜. 목소리를 내지마. 심장탑은 그런 불경의 대상이 될 수 없어.]
탑을 가리키던 손을 내리긴 했지만 륜은 말로도 니름으로도 화리트의
니름에 대답하진 않았다. 화리트는 갑자기 자신이 불청객이나 된 것 같
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화리트는 안색을 바꾸며 몇 가지 시시한 잡담으
로 화제를 돌려보았지만 륜의 반응을 얻을 수는 없었다. 결국 화리트는
륜이 침묵으로써 주장하고 있는 것에 부딪혀 보기로 했다.
[심장을 적출하지 않겠다는 거야?]
륜은 여전히 아무 니름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몸에 돋아난 비늘들은 서
로 부딪히며 불길한 소리를 내었다. 화리트의 얼굴이 슬퍼졌다.
[그걸 정말 원하는 것은 아니겠지?]
[내가 만일 그러겠다면, 그들은 어떻게 하지?]
화리트는 절망감 가득한 니름을 보내었다. [그건 불가능해.]
[대답해줘. 수련자이니 알고 있을 것 아냐. 만일 어떤 나가가 자기 심
장을 가지고 살다가 죽겠다고 주장한다면, 수호자들은 어떻게 하지? 강
제로 적출하나?]
[아냐. 수호자들은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아. 하지만 도움이 될 경우를
몇 개 알긴 해. 22세가 되던 해에 적출식을 못한 나가들이 몇 명 있었
지. 피치못할 사정 같은 것들 때문에.]
[어떻게 됐지?]
[여자들은 물론 가문의 보호를 받으며 다음 해까지 기다렸다가 무사히
심장을 적출했지.]
[남자들은!]
[다음 해가 올 때까지 필사적으로 숨어다녀야 했어. 하지만 살아남은
남자들은 아무도 없어. 모두 살해당했지.]
[살해? 누구에게?]
[모르는 척하지 말아, 륜. 불신자들이 한계선 이남으로 내려오지 못한
다고 닐렀던 것은 너잖아.] 그러나 화리트는 설명을 덧붙였다. [모두 나
가에게 살해당했지.]
륜의 비늘들이 다시 서로 부딪히며 불협화음을 이루었다.
화리트는 의자에 앉았다. 탁자엔 그가 가져온 상자가 놓여있었다. 친구
와 함께 먹기 위해 선물 삼아 가져온 것이지만 도대체 뭔가를 먹거나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화리트는 상자 속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닐렀다.
[륜. 열흘 후엔 더 이상 페이 가문은 너를 보호해주지 않아. 너는 자유
로운 남자가 되니까. 하지만 자유로운 남자와 자유로운 사냥감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어. 심장을 적출한다면 여자들은 너를 남자로 인정하겠지
만, 심장을 가지고 있다면 그저 비에나가일 뿐이야. 추적하고, 죽이지.
그리고-]
화리트는 륜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의 손은 상자 위를 맴돌았다. 갑
자기 그의 손이 벼락처럼 상자 속으로 내려꽂혔다. 화리트의 손이 다시
올라왔을 때 거기엔 커다란 쥐 한 마리가 꽉 움켜져 있었다. 쥐는 필사
적으로 찍찍거렸지만 화리트는 여전히 륜을 바라보며 닐렀다.
[먹힐 수도 있어.]
륜 페이는 쥐를 입 쪽으로 가져가는 화리트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바
라보았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찍찍거림이 뚝 그쳤다.
키준 산맥의 서북쪽 바이소 산.
한 여행자가 바이소 산의 능선을 따라 걷고 있었다. 실팍한 지팡이나
두툼한 옷은 보통의 여행자와 별 다를 바 없지만, 여행자의 머리는 깨끗
하게 삭발한 모습이었다. 승려임에 분명하지만 키준 산맥의 이 지역에서
승려의 모습은 조금 이채롭게 보인다. 이 근처에는 사원은커녕 마을도
없다.
하지만 승려가 길을 잃은 것은 아닌 듯하다. 승려는 바이소 계곡을 내
려가고 있었는데 그 계곡 바닥을 흐르는 개울 옆에는 분명히 건물로 보
이는 것이 몇 개 놓여있었다. 바람을 별로 타지 않을 만한 우묵한 곳에
서있는 그 건물들은 사금 채취자나 사냥꾼들이 지을 만한 오두막이었다.
승려는 그 오두막들을 향해 꾸준히 걸어내려갔다.
주위가 갑자기 어두워졌다.
해가 구름 속에 들어갔나 하고 의아해하던 승려의 등 뒤에서 갑자기 돌
풍이 불어닥쳤다.
강한 돌풍에 승려는 앞으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덤불에 틀어
박히는 바람에 승려는 계곡 바닥까지 굴러가는 낭패한 지경을 모면했다.
간이 콩알만해진 승려는 헐떡거리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승려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승려가 내려온 산의 뒤편에서부터 튀어나온 것은 거대한 하늘치였다.
거대한 가슴지느러미는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입은 산이라도 집어
삼킬 것 같았고 그 뒤에 흩어져 있는 수천 개의 눈은 온갖 빛깔로 영롱
하게 빛났다. 도저히 직시하기 힘든 그 눈들을 피해 시선을 더 뒤쪽으로
옮긴 승려는 곧 탄성을 내질렀다. 사람들이 말하던 것이 그곳에 있었다.
무너진 탑과 담장, 열주, 그리고 햇빛을 받아 불타오르는 반구형 지붕.
승려는 그것이 사람들의 말처럼 호화스럽지는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보석이 박힌 기둥과 금으로 뒤덮인 지붕들에 대해서 말한다.
물론 그것은 햇빛의 반사광을 저열한 욕망으로 해석한 결과다. 하늘치의
등에 있는 것은 무거운 세월의 더께 아래에 무너진 태고의 유적일 뿐이
었다. 그곳에서는 반짝이는 돌덩이나 누런 쇠붙이가 아닌 덧쌓인 시간들
이 찬란히 불타고 있었다. 승려는 눈물을 흘렸다.
등에 유적을 얹은 채 하늘을 떠가는 거대한 물고기를 보던 승려는 한참
후에야 계곡 아래의 소란을 들었다. 승려는 일어나 앉은 다음, 아쉬움을
억누르며 계곡 바닥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
는 일에 놀라움과 우려를 금치 못했다.
계곡 바닥에서는 세 마리의 말들이 한 무리를 이룬 채 서있었다. 마차
와 비슷한 배열이었지만 조금 달랐다. 일단 세 마리의 말 중 가운데 말
에는 기수가 올라타 있었다. 그리고 말들은 멍에를 매고 있었지만 그 뒤
편에 연결되어 있는 것은 마차가 아니었다. 길고 튼튼해 뵈는 밧줄이 멍
에에 연결되어 있었고 밧줄의 반대쪽 끝에는 사람들이 묶여 있었다. 그
리고 그 사람들은 승려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하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물건을 등에 매달고 있었다.
그것은 장방형의 거대한 연이었다. 다만 보통 연의 수백 배는 넘는 크
기였다. 승려는 말들이 왜 필요한지 깨닫고는 신음을 흘렸다.
그 때 승려가 듣지 못했던 신호가 울렸던 모양이다. 말들이 갑자기 달
리기 시작했다.
계곡 아래쪽의 사람들은 치밀하게 준비를 해 둔 모양이었다. 말들은 계
곡풍을 받을 수 있는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밧줄이 팽팽하게 당겨지
다가 갑자기 연들이 하늘로 불쑥 솟아올랐다. 연은 모두 다섯 개였다.
승려는 말들을 이용하여 연을 띄울 수 있다는 점은 이해했지만 그것을
지탱하거나 조종할 수 있을지는 의문스러웠다. 그 때 승려는 말들과 연
결된 밧줄 이외에 별도의 밧줄이 연에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승려
는 그 별도의 밧줄이 어디에 연결되어 있는지를 살폈다. 그것은 땅에 고
정된 거대한 도르래에 연결되어 있었다. 승려는 다시 그들의 준비성에
감탄했다. 말들은 연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그리고 연은 거
대한 얼레라고 할 수 있는 도르래에 의해 조종되는 모양이었다.
승려의 예측대로 곧 연에 매달려 있던 자들이 단검을 뽑아들었다. 그
사람들은 연과 말을 연결하는 밧줄을 끊었고 그러자 연들은 말들과 분리
되어 날아올랐다. 하지만 별도의 밧줄이 도르래에 연결되어 있었고 그곳
에는 체격이 우람한 자들이 도르래의 손잡이를 붙잡고 있었다.
그들은 연을 이용하여 하늘치의 등에 오른다는 대담하기 짝이 없는 계
획을 시도 중이었다. 승려는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모험심에는 감동했고, 그래서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 없이 응원을 보내
었다.
그 때 승려는 연들 중 하나에 이상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다른 네 연들과 달리 제대로 날아오르지 못한 채 불안하게 흔들리는 연
이 있었다. 승려는 놀란 눈으로 그 연을 살폈고 곧 그 연이 아직까지 말
들에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어찌된 일일까? 승려는 눈을 부릅뜨고
살폈다. 곧 승려는 그 연에 탄 자가 엉뚱한 밧줄을 잘랐음을 깨달았다.
그 자는 말과 연결된 밧줄 대신 도르래와 연결된 밧줄을 잘라버린 것이
다. 계곡 아래쪽에서는 사람들이 욕설과 비명을 질러대었고 그 연과 연
결된 말들을 몰던 기수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폭언을 퍼부어대고 있
었다. 연은 무지막지한 힘으로 솟아오르고 있었고 자칫하면 말까지 끌려
올라갈 정도였다. 기수는 모진 결심을 한 듯 검을 뽑았다. 승려는 부정
의 고함을 질렀지만 들릴 리가 없는 거리였다.
기수가 연줄을 끊자마자 연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승려는 벌떡 일어나서 그 연을 바라보았다. 두 개의 밧줄이 모든 끊어
진 그 연은 지상과의 모든 연결을 잃은 채 바람에 떠밀려 이리저리 흔들
리고 있었다. 승려는 그 연에 탄 자에 대한 동정심에 미쳐버릴 것만 같
았다. 그 연에 탄 자는 죽도록 무서울 것이다.
마침내 연은 서서히 아래로 떨어졌다. 연은 승려가 있는 능선쪽으로 떠
밀리듯 내려왔다. 연이 추락하는 순간 승려는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요란한 충돌음이 일어났다. 승려는 떨리는 가슴을 내리누른 채 연을 향
해 달려갔다. 자신이 보게 될 끔찍한 모습을 각오하며 승려는 그 불운한
이의 죽음을 애도했다.
어찌나 억울했는지, 그 자는 죽지도 못한 채 일어나서 폭언을 퍼붓고
있었다?
승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얼이 빠져버렸다. 연에 타고 있던
자는 몸을 고정시키고 있던 줄을 거칠게 뜯어내며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향해 무지스러운 욕설을 퍼부어대고 있었다. 아무리 연이 낙하속도
를 줄여주었더라도 충돌 당시의 속도는 몸이 으스러질 정도였을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작자일까?
그 때 승려는 상대방의 키가 거의 3 미터에 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터무니없이 큰 연 때문에 승려는 지금껏 그 자가 얼마나 거대한지 모르
고 있었다. 승려는 곧 어떻게 된 사태인지 이해했다. 하지만 흥분은 쉽
게 가라앉지 않았고, 그래서 승려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괘, 괜찮으십니까?"
"너 뭐야! 약 올리냐!"
상대방은 무시무시한 부리를 승려에게로 휙 돌렸다. 승려는 오금이 저
려왔다.
"지나가다가 추락하는 것을 보고 달려왔습니다. 어디 다치시진 않았습
니까?"
분노 때문에 어쩔 줄 몰라하던 상대방은 그제야 목소리를 조금 누그러
뜨렸다.
"안 다쳤다. 제기랄, 안 다쳤다고! 이제 안심이냐?"
"대단하군요. 그렇게 떨어졌는데 안 다치시다니. 레콘이 아니었다면 죽
었을 겁니다."
레콘은 부리를 딱 소리나게 부딪혔다. 인간이라면 코방귀를 뀌는 것에
해당하는 몸짓이었다. 승려는 경외감을 감추지 못한 채 레콘의 팔다리를
훑어보았다. 곳곳에 찰과상을 입었는지 깃털이 군데군데 피에 젖어 있었
지만 기적적으로 부러진 곳은 없는 모양이다. 승려는 그를 만져보고 싶
을 정도였다. 하지만 레콘은 승려가 쏘아보거나 말거나 신경쓰지 않은
채 나머지 네 개의 연을 쳐다보았다.
승려 또한 하늘을 쳐다보았다. 나머지 네 개의 연은 하늘치에게로 접근
하고 있었다. 레콘은 발을 동동 굴렀다.
"조금만 더 가! 조금만 더!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이여, 제발! 밧줄 더
풀어, 이 잡것들아!"
하지만 행운은 이 대담한 모험가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부연하자면 100
미터 쯤 멀었다.
연줄은 하늘치에게서 약 100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동이 나고 말았
다. 연들은 이리저리 흔들리며 어쩔 줄 몰라했지만 하늘치는 그들의 머
리 위를 유유히 지나갔다. 계곡 아래쪽 사람들은 연이 위험에 처하기 전
에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들이 밧줄을 다시 감아들이고 있는 것을 본
레콘은 비명을 질렀다.
"안돼!"
레콘은 벼슬을 쥐어뜯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승려는 그를 위로했다.
"정말 대담무쌍한 계획입니다. 저는 거의 성공하는 줄 알았어요. 하늘
치가 약간만 더 낮게 날았으면 틀림없이 성공했을 겁니다."
레콘은 승려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계곡 건너편의 하
늘로 유유히 헤엄쳐가는 하늘치의 꼬리 지느러미만을 바라보았다. 하늘
치는 조금도 변함없는 모습으로 헤엄치고 있었다. 그들이 고독한 비행을
계속한 이래 수천년 만에 비로소 지상의 존재들과 만날 뻔했다는 것, 그
리고 불과 100 미터의 거리만 남겨둔 채 그 접촉이 실패했다는 사실은
하늘치에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는 듯했다. 하늘치는 완벽히 무관심
한 모습으로 저편 하늘로 사라져갔다.
마침내 하늘치의 모습이 산맥 저편으로 사라졌을 때는 많은 시간이 지
난 후였다. 감동에 젖어있던 승려는 레콘이 일어나서 깃털을 터는 소리
를 듣고는 그를 돌아보았다. 레콘은 부서진 연을 돌아보며 투덜거리다가
갑자기 노기에 차서 외쳤다.
"롭스 이 자식, 죽여버릴 테다! 100 미터나 모자라다니!"
승려는 롭스가 누군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 자의 목숨이 명재경각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승려는 레콘을 말리려 했지만 다음 순
간 레콘은 이미 산 사면을 뛰어내려가고 있었다. 뛴다기보다는 난다에
가까운 동작으로 성큼성큼 달려가는 레콘을 보며 승려는 부리나케 뛰어
갔다.
숨 넘어갈 지경이 되어 계곡 아래쪽에 도달한 승려는 사태가 예상보다
훨씬 덜 심각한 것을 알게 되었다. 레콘은 롭스라고 짐작되는 털복숭이
인간을 향해 화를 내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롭스는 레콘을 상대로도 조
금도 기죽지 않은 모습이었다. 심지어 그 롭스는 레콘을 쩔쩔매게 만들
었다.
"이 우라질 대장놈아, 네가 연에 타겠다고 발광하지만 않았어도 연줄은
충분히 남았어! 하도 고집부려서 태워줬더니 엉뚱한 밧줄을 잘라서 연을
박살내냐!"
승려는 눈을 크게 떴다. 인간이 저럴 수는 없다. 레콘을 상대로 저렇게
마구 말할 수 있는 것은 같은 레콘뿐이다. 놀라움 속에서 롭스를 관찰하
던 승려는 잠시 후에야 롭스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젠장. 흥분했단 말이다. 마침내 하늘치의 등에 오른다고 생각하니까
흥분해서 나도 모르게 그만… 어, 그리고, 내가 제대로 밧줄을 잘랐더라
도 어차피 실패했을 거 아냐? 다른 연들도 못 올라갔어!"
"그러니까 처음부터 연에 타겠다는 소리는 안 했어야지! 우리가 말렸잖
아! 연줄이 모자라게 된 건 네녀석의 고집 때문이라고! 대장 네놈을 날
려올리느라고 다른 밧줄이 부족했던 거야!"
레콘은 폭풍 같은 숨소리를 내었지만 뭐라 대꾸하지는 못했다.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도 사태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피식거릴 뿐 누구도
롭스의 목숨을 걱정하고 있지는 않은 듯했다. 그 때 롭스가 승려를 발견
했다.
"응? 중인가? 무슨 볼일이 있나?"
승려는 이 방자한 질문에 화를 내지 않았다. 그의 추측이 맞다면 롭스
는 현재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승려는 공손히 손을 모아 합장
하며 말했다.
"저는 오레놀이라고 합니다. 여기 계신 레콘분께 용무가 있어서 왔습니
다."
레콘은 그 말에 놀라 눈을 껌뻑거렸다.
"무슨 말이냐? 지나가던 길이라고 한 것 같은데?"
"이곳으로 오던 중이었습니다. 저는 이곳에 계신 분들의 지휘자인 티나
한이라는 이름의 레콘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당신이 그
분인 것 같군요."
"내가 티나한이긴 한데, 나를 왜 만나러 온 건데?"
"저는 하인샤 대사원에서 왔습니다."
갑자기 티나한의 벼슬이 굳어졌다. 롭스 또한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황
급히 말했다.
"아, 그러시군요. 잠시 안으로 드시겠습니까?"
"인간으로 바뀌셨습니까?"
"예? 아, 아니오. 도깨비입니다. 킴이 편하시겠습니까?"
오레놀은 웃으며 그 군령자(群靈者)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모습이 인간이시니 아무래도 인간이신 것이 좋겠습니다."
오레놀의 예측대로 롭스는 군령자였다. 다수의 영을 가지고 있는 군령
자가 아니라면 어떤 인간이 레콘을 향해 마구 대할 수 있겠는가. 티나한
을 상대로 했을 때 롭스는 레콘의 영을 내세웠을 것이다.
오레놀의 요구대로 인간의 영을 전면에 내세운 롭스는 티나한과 함께
그를 근처에 있는 오두막으로 데리고 갔다. 다른 사람들이 따라오려 했
지만 롭스는 그들을 모두 쫓아버렸다.
오두막 안은 지저분하고 어두웠다. 티나한은 연장과 잡동사니가 잔뜩
쌓여있는 탁자 한 귀퉁이를 슬쩍 들어 간단히 탁자를 치우더니 오레놀을
그 옆의 의자에 앉게 했다. 그리고 롭스는 궤짝에서 술병과 그릇을 꺼내
어 탁자 위에 놓았다. 하지만 승려인 오레놀은 술을 사양했다. 롭스는
어깨를 으쓱인 다음 그릇을 치워버렸다. 그리고는 술병째로 한 모금 마
신 다음 티나한에게 건네었다.
"다른 건 없군요. 물이라도?"
"아니오. 괜찮습니다. 제가 날짜를 아주 잘 잡아서 왔군요. 굉장한 광
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성공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을 겁니다. 티나한이 고집만 부리지 않았
어도."
롭스는 그렇게 말하며 티나한을 쏘아보았다. 티나한은 부리를 딱 부딪
혔고, 오레놀은 미소지었다. 모든 사람들이 입을 다물자 잠시 탁자 주위
는 끔찍한 침묵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티나한이 못견디겠다는 듯이 외쳤다.
"좋아! 오레놀이라고 했지? 도대체 며칠 밀렸지?"
"반년입니다."
티나한은 기겁한 얼굴로 롭스를 돌아보았다. 롭스는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벌써 그렇게… 아니, 언제 시간이 그렇게 흘렀죠? 죄송합니다. 외진
곳에 있다 보니 시간 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절대로 떼어먹으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 대사원에서는 여러분들의 성실성을 의심하지는 않았습니다. 무슨
착오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제가 알아보러 온 것입
니다."
오레놀은 그렇게 말한 다음 약간 미안한 듯한 웃음을 지었다.
"이왕이면 여러분들이 성공하신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라며 왔습니
다."
"성공할 수 있었어! 너도 봤잖아!"
티나한이 탁자를 내리쳤다. 당연하게도 탁자는 박살이 났다. 오레놀과
티나한은 얼빠진 표정으로 부서진 탁자를 내려다보았고 롭스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신음을 흘렸다.
"아주 거덜을 내는구나. 젠장."
티나한은 고개를 떨구었다. 롭스는 부서진 탁자를 대충 밀어내고는 마
음이 좀 가라앉은 듯 차분하게 말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저희들은 지금 원금은커녕 이자도 드릴 형편이
못됩니다. 이 탁자라도 드려야 할 형편인데, 불행하게도 그것마저 우리
의 존경하는 대장께서 박살을 내었군요. 하지만 저희들은 성공할 수 있
습니다. 직접 보셨으니 더 설명드릴 필요도 없겠군요. 저희들의 계획은
완벽합니다."
"아, 네. 정말 대단한 광경이었습니다. 저는 대사원을 떠나올 땐 반신
반의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대
단히 위험하게 보이긴 하지만 성공할 가능성도 있음직하군요. 그런데 성
공하셨을 경우 어떻게 내려오실 작정이셨죠?"
"연줄을 타고 도로 내려올 겁니다. 연이 하늘치의 등에 올라서면 도르
래 쪽에서 밧줄을 끊는 거죠. 그러면 올라갔던 사람은 언제든 밧줄을 타
고 내려올 수 있습니다."
오레놀은 눈앞에 있는 사람들이 도대체 이성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이천 미터는 족히 될 높이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오
다니, 오레놀이라면 죽었다 깨도 시도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레놀은 그
광경이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성공하지 못했죠?"
"성공할 수 있습니다! 제발 조금만 더 말미를 주십시오. 방금 전 그건
마지막 연습 같은 거였습니다. 예, 그렇게 생각하면 되죠. 준비도, 연습
도 다 끝났으니 다음 번엔 반드시 성공합니다!"
"예. 그러시길 바랍니다."
오레놀의 대답에 롭스는 눈을 크게 떴다.
"말미를 더 주시는 겁니까?"
티나한 또한 기대감이 가득 담긴 눈으로 오레놀을 바라보았다. 오레놀
은 팔목에 건 염주를 꺼내어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언제까지 기다리면 되겠습니까?"
롭스는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한참 머뭇거리던 롭스는 마침내 입을 열
었다.
"여섯 달 정도가 필요합니다."
오레놀은 롭스를 빤히 바라보았고 롭스는 그 시선에 얼굴을 붉혔다. 오
레놀은 조용히 말했다.
"반년을 더 기다리라는 말씀입니까?"
"반년 후면 확실히 성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늘치의 이동에
대해 많은 것을 조사했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우리가 기록한 장
부가 있습니다."
그리고 롭스는 오두막 한 구석에 쌓아둔 두꺼운 장부를 가져왔다. 양피
지를 묶어서 만든 그 장부는 얼마나 뒤적거렸는지 귀퉁이가 너덜너덜해
져 있었다. 롭스는 그 책에 기록된 숫자들과 기호들을 가지고 오레놀의
넋을 반쯤 흩어놓았다. 오레놀은 롭스의 말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결론은 그럭저럭 알아들었다. 롭스는 향후 여섯 달 이내에 일곱 마리
의 하늘치가 바이소 계곡을 지나갈 텐데, 그 중 두 마리가 적당한 고도
로 통과하게 될 거라고 자신하는 듯했다.
"다른 다섯 마리는 덩치가 훨씬 큽니다. 이유는 아무도 모릅니다만 하
늘치는 덩치가 클수록 더 높이 날지요. 물론 덩치가 큰 녀석의 등에는
더 굉장한 유적이 있지만 거기까지 날아오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장 좋은 바람이 분다고 판단한 이 바이소 계곡에서도 그 정도 높이까
지는 날아오를 수 없습니다. 오늘 통과한 것 같은 조그마한 녀석만이-"
오레놀은 그 대목에서 신음을 흘렸다. "저희들의 연으로 날아오를 수 있
는 높이에서 날아다닙니다. 그런 꼬마들을 기다리려면 여섯 달은 필요합
니다."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니 우려를 느
끼지 않을 수 없군요."
롭스는 눈을 부라렸다.
"우려라니오! 우리의 예측에 이견이라도 있냐?"
롭스의 말투가 중간에 바뀐 것을 보니 다시 레콘의 영이 뛰쳐나온 듯했
다. 오레놀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하늘치를 오늘 처음 본 사람입니다. 제가
느끼는 우려는 여러분들에 관한 겁니다. 이자도 갚을 수 없다고 하셨는
데, 그럼 향후 여섯 달 동안 이곳에서 어떻게 지내실 생각입니까?"
롭스는 눈을 끔뻑거리다가 한숨을 쉬며 장부를 덮었다. 티나한은 미간
을 찡그리며 말했다.
"젠장. 힘들 테지. 하지만 버틸 수 있어. 바이소 산에는 먹을 만한 것
들이 있어. 어떻게든 여섯 달은 버틸 수 있을 거야. 그러니 그건 걱정하
지마. 너희들은 상환 기간만 연장해주면 돼."
"여러분들은 꽤 인원이 많더군요. 말들도 있고."
"그래도 버틸 수 있어. 말이 있으니까 정 안되면 밭뙈기라도 갈면 되는
거야."
"여섯 달 뒤에 여러분들이 모두 굶어죽거나 도망치기라도 하면 저희들
은 빌려드린 돈을 상환받을 수 없을 텐데요."
"그런 일은 없어! 나는 반드시 하늘치의 등 위에 올라갈 거라구!"
오레놀은 다시 염주를 만지작거렸다. 티나한은 그 염주가 신경에 거슬
린다고 생각했지만 그 말을 꺼내지 않을 정도의 분별력은 있었다. 그리
고 롭스는 젊은 승려의 입에서 현실성이 없으니 장비를 모두 압류하겠다
는 말이 나올까봐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때 오레놀이 말했다.
"제안을 하나 하겠습니다."
"뭐? 무슨 제안인데?"
"대사원에서는 레콘 한 명을 필요로 합니다."
"레콘?"
"예. 그래서 대사원에서는 티나한 당신이 대사원을 위해 어떤 일을 해
주길 바랍니다. 그것을 해주신다면 지금까지 빌려가신 돈을 모두 탕감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여섯 달 동안 필요하신 자금을 다시 빌려
드리겠습니다."
티나한과 롭스는 이 굉장한 조건에 그만 넋이 나간 듯했다. 롭스가 먼
저 정신을 수습하고 말했다.
"그 일이라는 것이 뭡니까?"
"다시 인간이신가요? 죄송합니다만 그 일의 내용은 일을 할 분에게만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간이 넉 달 정도 필요할 테고,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는 것은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롭스는 오레놀이 마지막에 끼워넣은 말이 티나한을 겨냥한 것이라고 생
각했다. 위험한 일이라고 했을 때 도망가는 레콘은 어디에도 없다. 과연
티나한은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흥. 얼마나 위험하기에?"
하지만 오레놀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오레놀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티나한을 바라보았다.
"이런 비유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물에 빠지는 것만큼이나 위험합
니다."
티나한의 벼슬이 뻣뻣하게 곤두섰다.
인간들이 등불이나 촛불로써 낮의 일부를 밤 속으로 끌어들였을 때 그
낮에 의해 추방된 밤의 일부는 자신의 자리를 잃고 방황했다. 어떤 도깨
비가 그 방황하던 밤을 낮 속으로 끌어들였다. 밤을 얻음으로써 그는 밤
의 다섯 딸인 혼란, 매혹, 감금, 은닉, 꿈 또한 얻을 수 있었다. 도깨비
는 그들의 도움으로 거성을 쌓았다.
도깨비다운 품위있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그것이 재미있을 거라 여겼
다.
혼란은 성의 내부를 결정했고 매혹은 성의 외형을 결정했다. 감금은 무
수한 미궁과 미로와 함정을 결정했고 은닉은 비밀통로와 비밀문, 암호를
결정했다. 그러나 다섯째 딸이 성의 건축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쳤는
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밤의 막내딸인 꿈은 다른 네 언니와는 전혀 다
르다. 꿈은 가장 밤다운 것이지만 동시에 밤과는 정반대 되는 성질을 가
지고 있다. 밤은 감추고 숨기고 덮지만 꿈은 드러내고 발견하고 열어보
이며, 그러한 꿈의 성질은 공교롭게도 낮을 닮아 있다. 그러나 밝은 낮
에는 볼 수 없고 암흑 속에서만 볼 수 있는 꿈의 성질은, 별과 마찬가지
로, 그 본성이 밤에 속함을 증명한다. 이 복잡한 성질의 막내딸은 언니
들과 함께 성의 건축에 개입했지만 그 개입이 어떤 성질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물론 꿈의 개입을 차치하더라도 즈믄누리는 충분히 불가사의한 건축물
이다.
즈믄누리가 모두 몇 층인지, 그 안에 몇 개의 방이 있고 몇 개의 통로
가 있고 몇 개의 계단이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은 오직 성주 뿐
이다. 물론 즈믄누리를 자주 방문하는 자들에게 알려진 몇 가지 사실은
있다. 예를 들어, 본관 4층은 항상 7층에서 올라가야만 도달할 수 있다
든지, 성 안 어디에서든 모퉁이를 세 번 오른쪽으로 돌면 대식당에 도달
하게 된다든지, 동쪽탑 꼭대기에 서서 왼쪽으로 두 바퀴를 돌면 반드시
성주의 서재에 엉덩방아를 찧게 된다든지 하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리고
즈믄누리의 역대 성주들은 취향에 따라 서재 가운데 방석을 갖다놓거나
쇠못을 뿌려두거나 불 붙은 초를 놓아두거나 했다.
조금 전 딱정벌레똥을 가득 담은 양동이를 들고 걸어가던 성주를 목격
했던 즈믄누리의 무사장 사빈 하수언은, 그래서 동쪽탑 꼭대기에 서서
우수에 찬 얼굴로 검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 서재 바닥에 엉덩이를 부닥치는 건 성주의 몸종인 비형의 일이었
다. 하지만 지금 무사장은 성주에게 직접 전해야 하는 전갈을 가지고 있
었다. 한숨을 내쉬며, 사빈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두 바퀴를 돌았다.
주위의 풍경이 확 바뀌는 것과 동시에 사빈은 서재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사빈은 약간 어리둥절해하며 일어났다. 서재 바닥에는 아무 것도 없었
다. 엉덩이를 털며 일어난 사빈은 성주의 책상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즈믄누리의 11대 성주 바우 머리돌은 모종삽을 든 채 사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빈은 성주의 발치에 있는 양동이와 창가에 놓인 화분들을 보
고는 그제서야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좋은 꿈 꾸셨습니까, 성주님. 그건 거름 하시려고 가져온 겁니까?"
"그럼?"
"아, 저는 혹시 그걸 바닥에 뿌려두시려고…"
사빈은 말을 멈췄다. 성주의 눈이 번득였던 것이다.
"흐음!"
성주의 헛기침 소리를 들으며 사빈은 마음 속으로 다음 번 방문자에 대
해 사과했다. 그리고 동시에 '성주님이 부르셨다네' 라고 말해줄 사람의
인명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누가 좋을까? 사빈이 이런 망상에 빠져 있
자 바우 성주는 약간 초조해하며 말했다.
"그런데, 용건은?"
"아, 성주님. 거름보다는 일조량의 문제가 아닐까요? 즈믄누리는 어두
우니까요."
"용건은!"
사빈은 싱긋 웃었다. 성주는 그를 당장이라도 내보내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사빈은 성주에게 협조하기로 했다. 사빈은 의자를 끌어와 앉았
다.
"머리를 빡빡 깎는 킴들의 딱정벌레가 성주님께 전할 전갈을 가져왔습
니다."
"아, 자기를 중이라고 부르는 킴들 말인가. 그런데 왜 자네가 직접 온
건가? 비형은 뭐 하는데?"
비형은 성주의 몸종의 이름이다. 사빈은 어깨를 으쓱였다.
"킴들이 그걸 원하더군요. 아시잖습니까? 자기들이 중대하다고 생각하
는 일을 그 자들이 어떻게 처리하는지."
"어떻게 처리하더라?"
"…최소한의 사람만이 그 일의 내용에 대해 알아야 된다고 생각합니
다."
"아, 그래?"
"이건 제 이론입니다만, 킴들은 중요한 일은 몇몇 사람만이 알아야 그
중요성이 유지된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참 괴상한 생각이죠? 아는 사람
이 많아야 도와줄 사람도 많아질 텐데."
"훼방꾼도 많아질 수 있잖아."
"그게 정말 중요한 일이라면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방해하겠습니까?"
"킴들은 쓸데없이 생각이 많아서 그래. 어쨌든 그 자들이 그걸 원하니
맞장구를 쳐주기로 하지. 우리 둘만 알자구. 무슨 전갈인데?"
"그 킴들은 도깨비 한 명을 파견해달라는 요청을 보냈습니다."
"무엇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