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회: 영지, 영지를 얻자. -->
“그럼 오빠, 그런거라면 영지를 경영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경영?”
“네, 저희 제국에서 적당한 영지 하나와 작위를 내려드릴 테니 오빠의 마음이 내키는대로 키워보세요. 물론 저희의 마음이라면 모든 것을 지원하고 싶지만...”
루이나가 말끝을 흐리며 뒤를 바라보자 다른 여성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를 위해서라면 대신전을 오라버니가 있는 영지로 옮길게요. 그리고 영지에 축복을 내려드릴게요.”
대신전. 쉽게 말해서 전 대륙에 펼쳐져 있는 신전을 총괄하는 신전.
그것을 나 때문에 옮긴다고? 수백 년 동안 자리했던 대신전을?
그게 말이 되냐아아아아아아아!!!
“교황도 아니고 신의 선택을 직접 받은 성녀에게 그 정도의 권한은 있어요.”
아무리 혀를 살짝 내밀며 귀엽게 말해도 그것은 별로다.
나는 내가 살았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은 거지 대륙의 역사를 바꾸고 싶은 게 아니니까.
“그럼 나는 내 휘하에 있는 모든 엘프와 세계수를...”
“그만!”
어라? 방금 리엘의 말을 끊은 것은 내가 아니다.
나에게 영지를 경영해보지 않겠냐고 물었던 루이나다.
루이나는 찰랑거리는 머릿결을 휘날리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빠는 지금 권력이나 돈에 욕심이 있어서 영지를 경영하는 게 아니야. 오빠는 발전시키는 그 ‘시간’과 발전하는 것을 바라보는 ‘보람’을 원하는 거라고. 그런데 우리들이 그걸 다 해주면 무슨 소용이야?”
아니, 돈 욕심은 많은데?
돈은 다다익선이니까.
뭐, 그래도 지금 루이나가 한 말은 틀리지 않다.
그래, 내가 진정으로 원한 것. 그것은 보람이다.
어떤 일이든지 힘겨운 일을 끝마치면 생겨나는 보람. 나는 그것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까 오빠가 원할 때가 아니면 특별한 지원은 하지 않고 다른 영지와 비슷한 수준의 지원만 할게요. 어때요 오빠?”
“영지 경영이라...”
옛날에 보던 판타지 소설을 보면 환생한 고등학생이 영지 경영을 하는 것도 있었다.
대륙에 21세기 지구에서 쓰던 것들을 만들어서 판매한다.
하지만 내가 아는 거래 봐야 과거에 관심이 좀 있던 유리랑 도자기 만드는 법정도 밖에 모르는데...
뭐, 적당한 영지를 경영하는 거라면 특별한 재주는 필요 없겠지?
설마 루이나가 사막으로 이루어진 영지나 몬스터들이 드글거리는 곳을 영지로 주지는 않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나가 그렇게 마음 써주니까 고맙게 받도록 할게.”
“아이 참... 그럴 때는 상으로 뭐라도 해 주셔야죠~”
쪽!
“히이잇!”
“앗!”
“너무 해 오빠!”
루이나의 볼에 뽀뽀를 해주자 루이나는 깜짝 놀라면서 풀린 얼굴을 하였고 다른 히로인들의 항의가 들려왔다.
“헤헤헤, 이게 바로 오빠가 나를 가장 좋아한다는 증거라고!”
루이나의 말에 다른 히로인들이 눈을 부라리며 루이나를 노려봤다.
“나도 해 줘!”
“저도 해주세요! 주인님!”
나는 결국 달려드는 히로인들의 볼에 모두 한 번씩 뽀뽀를 해주었다.
흑, 내 순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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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긴장하지 마세요.”
“아니, 그대로 황제 폐하를 뵈는데 긴장을 안 하는 편이 이상한 거 아닌가?”
나는 지금 귀족들이 입는 거치적거리는 이상한 장식들이 잔뜩 달린 옷을 입고 루이나의 아버지이며 이 레펜하르트 제국의 황제 폐하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근데 내 뒤에 다른 히로인들은 왜 따라오는 것일까?
뭐, 나를 빼면 하나같이 황제 폐하를 충분히 만날 자격이 있는 사람(?)들 뿐이지만.
“황녀님을 뵙습니다!”
“황녀님을 뵙습니다!”
“아버지를 뵈러 왔으니 문을 열도록.”
“충!”
루이나는 내 옆에 애교를 부리며 붙어있으면서도 황제의 집무실을 지키는 근위 기사들에게 엄한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역시 루이나! 너도 보통 황녀는 아니구나!
아니, 근데 황녀인 순간부터 이미 평범 하고는 거리가 머니까 이게 정상이려나?
아무튼 근위 기사들이 금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문을 열자 나와 히로인들이 그 방으로 들어섰다.
드디어 루이나의 아버지이자 이 대륙 최강국을 다스리는 황제와 대면하게 되었다.
....살아서 나갈 수는 있겠지?
“허허, 긴장하지 말고 이리 와서들 앉게나.”
황제가 인자한 목소리로 입을 열자 안심하고 자리에 앉을려고 했는데...
“아, 네 새끼는 앉지 말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가 죽어버려!”
....응?
“네 새끼가 감히 내 딸을 홀린 잡놈의 새끼냐아아아아아! 죽어라아아아아!!!”
너무 당황해서 입도 떨어지지 않는 가운데 황제가 나에게 달려들었고 그의 손에 쥐고 있던 보검이 내 목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 어쩐지 오늘은 재수가 좋더라니....
그럼 나는 이만 저승행 기차를 타고 우주멀리 사라지겠다.
뽝!!!
죽음을 각오한 순간 ‘빡!’도 아니고 그보다 훨씬 찰진(?) ‘뽝!!’소리가 황제의 머리통에서 터져 나왔다.
“아빠!! 내가 아까 분명히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만약 일반 귀족이 그렇게 했다면 목이 백 개라도 백 개 모두 다 잘려나갔겠지만 그녀는 황제의 딸.
충분히 황제인 아빠를 때릴 자격이 있었다.
하하, 살아남은 건가?
“어흐으으으윽!! 딸자식 키워도 소용없다더니!! 어흐으으윽!”
내가 살아남은 반면에 황제는 정신적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땅에 엎어져서 통곡하기 시작했다.
황제가 궁상을 떨면서 통곡하는 모습이라. 이 모습을 21세기 지구에서 보았다면 수많은 기자들이 특종감으로 다뤘을 텐데.
나라도 이 장면을 오랫동안 머리에 새겨놔야겠다.
“황제 폐하, 그만 일어나시지요.”
“네 까짓 놈이 뭔데 남의 귀한 딸을 채가려는 거냐아아아아!! 내 몸에 손 대지마!!”
흥, 너무 궁상을 떠는 게 불쌍해서 일으켜 세워주려고 한 건데 싫음 말던가!
한 동안 궁상이 이어지고 나서야 황제는 얼굴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돌아왔다.
지금 보니까 상당히 잘 생기기는 했다.
루이나의 은발은 이 아저씨에게서 유전된 거구나. 찰랑이는 은발이 마치 보석처럼 빛났다.
얼굴도 완전히 슈퍼 모델 뺨치게 생겼다. 평범한 얼굴과 바꾸고 싶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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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궁상이 끝나고 다시 자리에 앉자 황제는 나에게 눈길도 안주고 다른 히로인들에게 얼굴을 돌렸다.
“허허허, 오랜만에 뵙는군요. 루셀 다크니스 국왕님.”
“그렇군요. 황제 폐하.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하이엘프 리엘님도 오랜만에 뵙는군요. 그 때 주셨던 세계수의 꽃잎차와 하이엘프주는 정말 최고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더 못 드려서 유감이지만....”
하이엘프주라는 게 그렇게 맛이 있나?
한 번 먹어보고 싶다. 부탁하면 주려나?
“리엘, 나도 하이엘프주라는 맛보고 싶은데 한 잔만 줄 수 있어?”
“히로님이 원하신다면 몇 백 병이라도요!”
“아니, 한 병만 줄래? 모두 나눠마시자.”
리엘은 내 부탁이 진심으로 기쁘다는 표정으로 아공간에서 하이엘프주를 하나와 잔 여러 개를 꺼내서 잔에 모두 하이엘프주를 따라서 나눠주었다.
황금빛 액체가 담긴 병이 열리자 마치 수백 개의 꽃이 동시에 향을 뿜는 것 같은 향이 코를 즐겁게 해주었다.
황제는 ‘아까워서’ 부인도 주지 않고 하루에 딱 반잔만 마셨던 하이엘프주의 맛이 생각났는지 입맛을 다시었다.
리엘이 하이엘프주를 황제의 앞에 내려놓자 황제의 목에서 침이 꿀떡 넘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나를 진심으로 부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긴, 하이엘프주를 만들 수 있는 하이엘프가 몇 백 병이라도 주겠다고 했으니 부럽기도 하겠지.
마시지 않아도 맛을 알 정돈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