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8
248화
* * *
옥좌에 앉아 있던 왕은 회의실에 들어오는 햇살을 바라보며 창가로 다가갔다.
그 곁으로 한 걸음 다가온 레딩 공작.
“떠났겠군.”
“예, 폐하.”
뒷짐 진 키아누가 재건되고 있는 성벽들을 보며 말했다.
“백성들은 재건의 희망을 노래하고 있는데, 그의 모든 선택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겠군.”
찬영에게 고작 이틀밖에 남지 않았단 소식은 금방 왕실 관계자들에게 흘러 들어갔다.
소식을 들은 자들은 모두가 침통해했고 특히 왕은 그에게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 것을 가장 안타까워했다.
“안타까워 마십시오. 폐하.”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그의 희생의 결과가 어쩌면 실패할지도 모르는 이 순간에 말이야.”
그때 레딩이 고개를 저었다.
“실패할 때의 일을 대비하는 것은 온당하십니다. 하오나 슬퍼하지는 마십시오. 그는 자신의 선택이 막연한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그가 제게 그러더군요. 자신은 끝까지 원하고 갈망하는 선택을 했고, 이 순간마저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으니 조금의 후회도 남지 않는다고…….”
“부디 그러길 바라지.”
왕은 레딩에게 시선을 돌려 다시 창밖의 하늘을 바라봤다.
유독 따스한 세상의 빛.
‘내일도 이 하늘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 찬영. 그대 또한 함께 볼 수 있길.’
이제 남은 그의 행보가 모든 걸 결정지을 것이다.
* * *
찬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남은 갓피스인 제이나, 샤브레 공주와 함께 찬영은 다섯 번째 차원 다리를 건넜다.
한데…….
‘없다.’
제이나도, 그리고 샤브레 공주도 곁에 있지 않았다.
오로지 이곳에 있는 건 자신뿐.
하나 찬영은 놀라지 않았다.
눈앞에 나타난 하나의 창이 그 이유에 대해 명확히 설명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잊힌 세계수의 땅에 진입하였습니다.
-남은 모든 갓피스의 힘이 사명에게 귀속되어 차원 다리를 통과할 수 있는 갓피스들의 자격이 일제히 소실됩니다.
-사명은 무의 세계로 진입하기 전에 세계수에 빛의 왕관을 주입해야 합니다.
‘그거였나?’
찬영은 잊힌 별들의 힘이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고 원했는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처음부터 갓피스들은 날 완성시키기 위한 씨앗들이었어.’
이제 그 씨앗이 크고 자라나 잊힌 별들이 원했던 길 위에 서게 된 것이다.
‘그들을 되살리는 데 내가 쓰인다는 것.’
찬영은 심사가 복잡했다.
사실 메테우스의 죽음조차도 석연찮은 게 많았다.
‘암흑 마력을 가진 그가 내 힘을 흡수하고, 나 역시 차원의 돌의 힘을 흡수할 수 있었던 것은…….’
아직 그 이유가 뭐였는지 제대로 풀어낼 길이 없다.
‘어쩌면…….’
찬영은 올드 원과 잊힌 별들이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생각이 달라 서로 배척하게 된 건지도 모르지. 그럼 올드 원이 날 원하는 건 내가 가진 잊힌 별들의 힘을 흡수하기 위함인가?’
글쎄, 아직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당장은 세계수로 다가가는 수밖엔.’
생각을 마친 찬영은 주변을 경계하며 둘러보았다.
현재 놓인 상황과 달리 주변은 무척 고요하다.
따뜻한 햇살, 저 멀리 흐르는 바다까지…….
밟고 있는 모래사장을 따라가다 보니 전부 다 익숙한 풍경인 걸 알 수 있었다.
‘베아트리체와 만났었던 풍경 중 하나구나.’
탁!
찬영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쐐액!
하늘 위로 오르자 저 멀리 우거진 숲과 그 위에 불쑥 솟아 있는 장엄한 자태의 나무가 보였다.
오색 창연한 빛을 품은 나무.
그 나무는 뿌리부터 이어진 수많은 줄기와 잎사귀를 따라 이 공간을 넘어선 저 높은 어딘가를 향해 뻗어져 있었다.
‘저것이 세계수.’
찬영은 그곳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어째서 이곳을 지키는 존재가 아무것도 없지?’
의아했지만 계속 나아갔다.
이곳은 세계의 멸망을 좌우할 최후의 공간.
지니고 있는 왕관을 저 나무에 주입해야 자신이 원했던 일이 모두 종결된다.
나무의 초입까지 다다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우거진 숲을 지나 멀리 탑처럼 솟은 나무 앞에 도착할 때까지 어떤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나무에 다다랐을 때 찬영은 그들이 없었던 게 아니라, 세계수의 뿌리 안에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만큼 세계수는 거대했다.
위로 뻗어진 나무의 끝이 감히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도착했다고 생각한 순간마저도 고작해야 뿌리의 시작점에 온 것뿐이었다.
마치 가도 가도 끝을 알 수 없는 길 위에 선 기분.
그 순간 기괴한 형태의 레퀴엠들이 뿌리 쪽에 숨어 있다가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흉측한 외계 생명체를 닮은 그들은 갖가지 형태를 띤 채 찬영을 바라보았다.
흉흉해 보이는 눈빛.
하지만 그 시선을 통해 느낀 건 적의가 아니었다.
오히려 놈들은 자신을 기다린 것 같았다.
‘어째서?’
찬영은 착지한 후 왕관을 집어 들었다.
“왜, 나를 막지 않지?”
그때 레퀴엠 중 하나가 찬영의 앞을 가로 막으며 말했다.
-우린 모두가 너를 집어삼키길 원한다. 하나 애통하게도 올드 원들께서는 우리에게 그럴 권한을 주지 않으셨다. 대신 너에게 말씀을 전하셨다.
“나에게? 무엇을?”
-오래 기다렸다, 열쇠여. 너의 별들과 함께 어서 우리에게 오너라.
찬영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표정이 굳었다.
‘대체 무슨 말일까?’
쉽게 가늠되지 않는 올드 원의 이야기.
혼란스러운 와중에 수많은 레퀴엠들이 옆으로 비켜서며 찬영이 나아갈 길을 터 주었다.
-태초의 나무로 가라, 사명이여. 그렇지 않으면 삼키고 싶어질 테니. 크크큭.
기괴하게 웃기 시작한 레퀴엠들.
잠시 그들을 바라보던 찬영은 그들에게 더 질문하지 않고 나무로 향하는 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 질문은 불필요한 일이다.
오로지 이 한 순간을 위해 달려왔다.
그 순간이 지난 후 물을 것이다.
‘숨겨진 모든 이면의 진실들을, 스스로를 신이라 칭하는 그들에게.’
찬영은 걸음을 옮겼다.
거대한 크기로 인해 그늘졌지만 동시에 따뜻한 빛을 품은 세계수.
걸음을 옮긴다, 더 깊디깊은 곳으로…….
서서히 그의 등이 빛의 입자로 분열되어 가고 있었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 찬영은 부유하고 있었다.
발아래로는 거대한 은하수가 있었고 환한 빛을 품은 빛무리들이 곁을 지나다니며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일어났는가, 사명이여.
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에 집중했다.
이 목소리…….
아주 오랫동안 들어 왔던 잊힌 별들의 한 목소리였다.
서서히 머릿속에 스쳐가는 별들의 이야기.
-율법을 따르는 우린 오랜 시간 잊혔으며……….
-사명을 기다렸으며…….
-다시 부활하길 원했고…….
-우린 본래, 모두가 올드 원이었다.
그 마지막 대목에 이르렀을 때 찬영은 잘게 떨었다.
“그럼 당신들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였을 때, 율법을 따르는 그레이트 올드 원의 길은 흔들리지 않았다.
찬영은 할 말을 잃었다.
‘허면 도대체 자신이 해 왔던 일은 무엇이었던 거지?’
모든 것이 그들의 꾐에 놀아난 것뿐인 걸까?
그 생각에 접어들려던 찰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하나 우리 사이의 혼란이란 것이 생겨났다. 그건 음습하면서도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우릴 분열시켰고 갈라 놨지.
끊임없는 엘더 갓에 대한 의심.
엘더 갓이 우리를 완전히 버렸는지 우리 중 일부는 무척 두려워했다.
“너희를 제외한 대다수였겠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은하수 사이로 수많은 보랏빛 형체들 수천 개가 우주를 가득 메운다.
대다수의 올드 원들.
그들은 주변을 메운 빛의 형체들과 다른 목소리를 냈다.
-사명이여, 우린 오랫동안 네가 완성되길 바라 왔고 무의 세계에 진입하길 고대해 왔다.
엘더 갓을 다시 부를 수 있게 노래를 불러 다오.
동시에 머릿속을 파고드는 또 다른 진실들.
초월의 눈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지식.
-……엘더 갓이 두 행성에 남긴 유일한 흔적, 사명.
-사명은 열쇠, 그 열쇠를 찾으면 엘더 갓을 다시 부를 수 있다.
-그의 깊은 잠을 깨우고, 우린 그의 피조물을 파괴해 그에게 직접 보여 주리라.
우릴 이렇게 심연 속에 버려 두고 잊힌 존재에게…….
찬영은 점점 할 말을 잃었다.
‘결국 내가……?’
자신의 선택이 세상의 멸망을 불러오게 됐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의아한 게 있었다.
찬영은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빛들에게 물었다.
“그런데 너희들은 어째서 날 이곳까지 올 수 있게 도와 온 거지? 차라리 내가 오지 않는 것이 훨씬 현명한 선택이었을 텐데.”
이들은 율법을 따라야 한다고 결정했던 존재들.
어째서 이 사실을 알고도 자신을 이곳으로 오도록 계속 능력을 내주고 성장시켜 왔던 걸까?
그 순간 빛의 입자들이 찬영을 향해 돌아섰다.
-사명이여, 애석하게도 우린 이제 생각이 같다. 율법은 잊혔고, 엘더 갓은 우릴 잊었다. 우린 무엇을 위해 때 묻은 약속을 지켜야 하지?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던 빛의 입자들이 어둠의 입자들과 뒤섞여 찬영을 둘러쌌다.
이제야 모든 조각들이 들어맞는다.
‘결국 이들은 ‘나’라는 열쇠가 힘을 각성한 채 차원 다리를 건너오게끔 기다려 오고 계획해 왔던 거야.’
대륙, 그리고 지구의 모든 종족들이 신들이란 존재에게 놀아났다.
이 순간 찬영은 처음으로 무기력하다는 걸 느꼈고,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절망적인 상황이다.
도저히 돌아설 수도, 나아갈 수도 없는…….
찬영이 그들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날 어쩔 셈이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기다릴 뿐.
-이 무의 세계에서 너는 소멸되고 열쇠가 될 것이며, 너의 소멸이 엘더 갓을 자극할 것이다.
-그 순간이 너의 행성들이 소멸되는 날이리라.
-그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야만 하겠지.
찬영은 고개를 떨어트렸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직 자신은 살아 있었고, 의지가 있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찬영은 생각했다.
그리고 또 생각했다.
생각이 나지 않을 때도 다시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두고 온 이들에 대한 생각들이 스쳐 갔다.
자신만 믿고, 계속 기다릴 수많은 이들.
멸망 앞에 두 손 모아 기도하며 신들의 희망을 바랄 수많은 생명체들.
“너희는 그들의 희망까지 밟아 버렸어.”
-존재 의의를 잃어버린 것보다 우리보다 더 비참한 존재는 없어.
그 질문에 찬영이 외쳤다.
“무의미한 학살을 정당화시키지는 않는다. 아니, 너희들 같이 자기 연민에 빠진 것들에게는 어떤 희생도 아까워.”
-사명, 분노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제자리에 주저앉아 너희 선택을 기다리는 것보단 낫겠지.”
그 말을 하며 찬영은 자신 안에 숨 쉬는 수많은 기억 속의 존재들을 떠올렸다.
그때 베아트리체의 목소리가 스쳐지나간다.
‘순간을 소중히 여겨요, 사명.’
그녀의 말대로였다.
찬영은 미소 지었다.
찰나의 시간 모든 게 자신에게는 소중했고, 그 모든 걸 선물처럼 여기게 해 줬던 이들이 떠오른다.
그중, 가장 소중했던 그녀.
‘제이나.’
-존재감이 달라지고 있어.
-하위종 주제에 무의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일으킨다고?
-그럴 리 없어,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어.
수많은 목소리들.
찬영은 그것들을 무시했다.
힘이 뭐든, 갓피스가 뭐든, 올드 원이 뭐든 이젠 아무 상관없다.
오로지 원하는 건 내 소중한 것들일 지켜지는 것.
‘내 의지대로 행하는 것.’
찬영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을 떠올렸다.
“아직 내 의지가 남아 있다면, 이곳에 온 것처럼 돌아가는 것도 모두 내 선택이겠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신들이 외쳤다.
-돌아가 봐야 네 힘을 감당하지 못한 차원 다리 때문에 너는 열쇠로도 살아 있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대로 소멸할 것이야!
-네가 소멸하면 또 다른 사명이 태어날 것이야!
-우린 시간을 되돌릴 권능을 가지고 있다!
그 얘기에 흔들렸다.
자신이 돌아간다고 한들, 그들은 다시 올드 원과의 싸움을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자신이 얼마나 그간의 경험과 노력들이 시간이라는 소중한 것을 통해 허투루 쌓인 게 아니라는 걸.
“적어도 이 순간의 선택은 내가 할 수 있겠지. 그리고…….”
찬영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빛을 열었다.
그렇게 새하얀 빛이 모든 시야를 뒤덮기 직전, 찬영이 올드 원들을 향해 말했다.
“시간을 되돌린다고 한들, 나로 인해 붕괴한 차원 다리를 너희라고 되돌릴 수 있을까?”
찬영은 씩 웃었다.
끝이다…….
* * *
아주 깊은 심연.
찬영은 꿈꾸듯 그 목소리를 들었다.
자애롭고 부드러운 목소리.
-끝이길 원하느냐?
그럴 리가 없다.
자신은 단 한 번도 끝이길 바란 적이 없다.
평생 아등바등 살아왔고 이제껏 매 순간 강렬히 삶을 살길 바라 왔다.
-네게 깃든 란테고스의 힘이 너를 다시 부활시킬 것이다. 단, 너는 새로이 시작해야 한다. 네가 가진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다시 돌아가겠느냐? 그렇지 않는다면 너를 나의 후계로 정할 것이다. 영원함을 누리겠느냐?
찬영은 그제야 깨달았다.
그가 사라졌다던 엘더 갓이라는 것을…….
전지전능한 신 위의 신, 그렇다면 그는 이미 알 것이다, 자신이 무슨 대답을 할지를.
-그래.
비로소 신이 대답했다.
“그녀 곁으로 가기를 원해.”
찬영은 이미 빛의 입자가 아닌 자신의 입술로 말하고 있었다.
《나 혼자 자동보상》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