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6
246화
빛의 입자는 순식간에 새하얀 광휘의 슈트를 드러냈다.
얇은 갑판이 촘촘히 이어져 있는 백색의 슈트.
한가운데엔 꺽쇠 형태의 얇고 새하얀 금속들이 전신에 매끈하게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안엔 움푹 패여 있는 원반 회전축들이 은은한 빛을 흘리며 양 어깨 위와 명치, 오금 양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어서 빛의 입자를 통해 마지막으로 구현된 찬영의 얼굴.
화르륵!
백발을 흩날리며 나타난 찬영의 이마 위엔 하얀 빛을 품은 세 번째 눈동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완전히 달라진 외관.
하나 그의 변화를 짐작한 메테우스는 놀라지 않았다.
“언제 오나 기다렸다.”
그저 그렇게 말할 뿐.
“가장 소중한 걸 잃기 전엔 고통이란 걸 말할 자격이 없지.”
씩 미소 짓는 메테우스.
동시에 그가 잡혀 있는 손에 더 강하게 힘을 줬다.
“넌 내 손에 네 소중한 것을 떨어트리지 말아야 했다.”
“크흑!”
제이나는 강하게 조여진 숨통에 신음성을 흘렸다.
하지만 그녀는 눈을 감지 않았다.
설사, 이곳에서 죽더라도…….
‘끝까지 싸워.’
제이나는 찬영을 바라봤다.
무표정이었던 찬영이 그녀를 향해 웃었다.
그가 입을 벙긋거렸다.
“돌아올 줄 알았어. 그렇게 믿었으니까.”
제이나는 대답할 수 없었지만 눈빛으로 말했다.
‘알아요.’
그 순간 메테우스의 표정이 급변했다.
‘어째서?’
손이 더 조여지질 않았다.
“날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이어서 메테우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지며, 절반을 감싸고 있는 보랏빛 쇠사슬에서 화르륵 불꽃이 일렁였다.
단숨에 제이나를 쥐고 있는 왼손까지 번져 가는 보랏빛 암흑 마력.
조용히 그를 지켜보던 찬영이 말했다.
“네가 믿었어야 하는 건 절망이 아니라, 메들린 단 한 사람이었어.”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찬영의 손끝에서 흐른 빛이 메테우스의 팔을 뒤덮었다.
그러자 제이나를 향해 뻗어 가던 보랏빛 불꽃을 하얀 빛이 빠른 속도로 집어삼켰다.
쐐액!
메테우스의 손가락뼈들이 뒤로 꺾였다.
빠각!
메테우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악!”
하지만 고통보다도 더 믿기지 않는 건 자신이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이었다.
‘이럴 리 없어!’
자신은 영혼을 매개로 싸우는 아크 리치.
올드 원의 권능으로 둘러진 방어벽이 깨져 타격을 입기 전엔 죽지도 않고, 고통을 입지도 않는다.
‘네놈이 올드 원의 권능을 베었다고?’
그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빛이 뭉쳐진 찬영의 주먹이 메테우스의 가슴을 때렸다.
“크헉!”
비명과 함께 제이나를 놓치고 클레이모어와 함께 허공으로 날아오른 메테우스.
찬영이 그 뒤를 쫓으려다 힐끗 제이나를 돌아봤다.
“제이나.”
“콜록, 콜록!”
바닥에 엎드려 있던 제이나가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어서 가요, 나는 괜찮으니까. 할 일이 많잖아요.”
고개를 끄덕인 찬영이 공중에서 방향을 전환한 메테우스를 노려봤다.
쉬이이익, 츠츠츠.
이어서 슈트 곳곳에 자리 잡은 원반 회전축이 빠르게 휘돌고, 찬영의 이마 위에 있던 눈동자에서 빛의 아지랑이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척추를 따라 머리와 이마를 감싸며 닫히는 매끈한 헬멧의 이마 부근, 뾰족하고 새하얀 원통형의 뿔이 솟아오른다.
초월의 눈이 중첩되어 완성된 진정한 사명의 자태, 그것의 이름은…….
‘초월의 알데바란’
마치 오랫동안 알았던 것처럼 찬영은 기억하고 있었다.
취익!
하얀 김이 전신 슈트 곳곳에 자리 잡은 원반 회전축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한 그때.
찬영은 빛을 본뜬 것이 아닌 빛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
파밧!
중력도, 시간도 무시하며 솟아오른 한 줄기 빛.
메테우스가 닿지 못하는 지엄한 권능.
빛의 칼날이 단칼에 메테우스를 베었다.
서걱!
베여 나가는 그의 뼈.
하지만 그건 단순히 뼈만 베어나간 것이 아니었다.
“크학!”
그의 영혼이 베여 나갔다.
영혼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고통이 메테우스를 집어삼켰다.
허공에서 빙글 회전한 메테우스가 거친 숨을 내쉬며 상처 부위를 붙잡았다.
그와 마주한 찬영.
빛의 검을 늘어트리고 있는 그에게 메테우스가 물었다.
“어떻게 이렇게 달라질 수 있지?”
“달라진 게 아니다.”
“그럼?”
“때를 기다리며 준비해 왔던 변화가 시작된 것이지.”
세차게 흔들리는 메테우스의 눈빛을 보며 찬영이 말을 이었다.
“난 일주일 안에 사라진다.”
“……소멸을 자처했다는 것이냐?”
“그래야만 널 벨 수 있었으니까.”
“그깟 대의 때문에?”
“아니, 네가 본 그 여자 때문에.”
이어서 찬영이 메테우스에게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너는 대의를 벗어나서 네가 원하는 복수를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건 이제껏 그에게 해 주고 싶었던 얘기.
“정말 왕을 베고, 대륙을 망가트린다고 네 현실이 바뀔 수 있다고 믿는 건가?”
그러자 메테우스가 말했다.
“시간을 되돌려 준다고 했다. 시간을 되돌리는 건 널 붙잡은 이후에 가능하다고 했지.”
“날 붙잡은 이후에?”
“난 다시 그때로 돌아갈 것이다. 메들린이 날 보고 웃던 때로.”
메테우스의 눈가에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난 네 앞을 가로막을 수밖에 없어. 그 약속을 한 것이…….”
“올드 원이기 때문이지.”
“그래.”
“그럼 계속 사력을 다해 막아라. 나 역시 그럴 테니.”
말이 끝나기 무섭게 메테우스의 두 눈에서 보라색 불꽃이 다시 활활 타올랐다.
화르륵!
“일어나라, 나의 군대여.”
그러자 그를 중심으로 지상으로 떨어진 거대한 보랏빛 원 기둥이 빠른 속도로 절대영도의 빙하를 소멸시키기 시작했다.
키에엑!
때에 맞춰 지상 저 멀리에서 소멸의 문의 의식을 마친 6인의 선지자들의 신체가 하나둘 기형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레퀴엠의 힘을 이어받은 그릇의 흔적.
-그오오오!
탈피를 마친 여섯 선지자들이 하나둘 일어나며 울음을 터트렸다.
동시에 절대영도에서 살아남은 데스 나이트, 듀란트와 함께 무너진 장벽을 넘어 수도로 달려가는 적들.
메테우스가 찬영을 향해 외쳤다.
“저것들이 네가 지키려는 왕국을 불태우는 게 먼저일까, 아니면 네가 날 쓰러트리는 게 먼저일까?”
클레이모어를 치켜든 메테우스는 스스로 멈출 수 없게 되어 폭주해 버린 존재 같았다.
“두고 보면 알겠지.”
“……어서 오너라.”
파밧!
두 초월적인 존재가 서로를 향해 다시 부딪쳤다.
쐐액!
전투의 시작은 메테우스의 화이트 스톰으로 시작되었다.
그와 어울리지 않는 흰 날개가 광흔을 일으키며 공간을 가로 질러 사라졌다.
유성우처럼 찬영을 향해 쏘아지는 메테우스.
찬영이 정면으로 따라붙었다.
쐐액!
동시에 메테우스의 가속도를 받아 휘둘린 클레이모어.
그 안에 담겨진 미증유의 암흑 마력이 초승달처럼 날아갔다.
푸스스!
찬영의 백색 칼날이 솟아올라 날아온 암흑 마력을 반으로 베어 버린 그때.
‘사라졌다?’
그 순간 위에서 날아오는 강력한 암흑 마력.
이를 피하기 위해 허리를 옆으로 돌리자마자 등 뒤에서 클레이모어가 날아왔다.
빠르게 클레이모어를 벤 순간.
찬영의 시야에 열댓 명으로 늘어나 있는 메테우스가 보였다.
싸늘하게 웃은 메테우스들이 일제히 찬영에게 달려들었다.
빠른 속도로 찬영의 온몸을 헤집기 시작하는 메테우스들.
등, 허리, 어깨 할 것 없이 공격이 날아들었고 호흡을 뱉어 낼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찬영이 하늘을 뚫고 빠른 속도로 날아올랐다.
펑! 펑!
대기를 가르며 솟아오른 찬영을 뒤쫓아 가는 메테우스들.
하지만 날아가면 날아갈수록 찬영과의 거리는 벌어지기만 했다.
맹렬히 휘도는 원반 회전축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찬영의 속도가 증대된 것이다.
펑! 펑!
가면 갈수록 늘어나는 가속도.
그럴수록 찬영의 신체가 마치 소멸되듯 빛의 입자가 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를 뒤쫓던 메테우스들이 일제히 속도를 줄였다.
‘놓쳤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어디로 갔는지 조금도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한데 그때였다.
두리번거리던 한 메테우스의 몸에서 갑자기 하얀 빛줄기가 솟아오르더니 다른 메테우스의 정수리를 꿰뚫었다.
하지만 그건 시작일 뿐.
한 메테우스의 소멸을 시작으로 뻗어 간 빛의 쇠사슬이 수천 개의 빛으로 나뉘어 순식간에 허공을 뒤덮고 있던 메테우스들을 소멸시켰다.
그렇게 단 하나의 메테우스가 남았을 때 수천 개의 쇠사슬을 주변에 벽처럼 세운 찬영이 허공을 유영하듯 다가왔다.
메테우스의 보랏빛 안광이 찬영을 향했다.
“……어떻게?”
찬영이 대답 대신 자신의 이마에 자리 잡은 뿔을 가리켰다.
뿔에선 새하얀 빛이 흐르는 중이었다.
“패배가 심연의 눈을 한층 더 성장시켰어.”
“그래서?”
“그래, 네가 영혼을 나누어 날 공격했다면 나는 네 영혼을 반사시켜 그대로 복사했지.”
“현혹 위의 현혹이라…….”
“타격이 있을 텐데?”
푸스스.
찬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메테우스의 반쪽 얼굴뼈가 부서져 나갔다.
먼지처럼 흩어지는 뼈를 바라보던 메테우스가 무덤덤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아직 안 끝났다.”
동시에 부서졌던 메테우스의 뼈 위로 빛의 입자들이 하나둘 모여 그를 재생시켰다.
다시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메테우스가 찬영의 앞으로 날아들며 눈을 빛냈다.
“방금 네 공격이 내 영혼을 베어 버린 순간, 네 힘 또한 흡수했다. 계속 베어 봐라. 너는 네 스스로 힘을 빼는 일밖에 하지 못할 테니까.”
메테우스가 다시 빠른 속도로 개수를 불려나갔다.
이제껏 찬영이 겪어 온 분열, 재생 등의 힘과는 한 차원 다른 단계의 힘이었다.
어느새 찬영의 주위를 다시 뒤덮으며 허공을 가득 메운 수백 명의 메테우스.
그들이 일제히 외쳤다.
“네 패배다, 사명! 시간은 내 편이니까!”
찬영이 조용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 * *
눈을 번쩍 뜬 제이나.
‘아, 방금…….’
불과 10여 초 전의 상황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두 마리의 데스 나이트를 쫓으려던 그때.
땅에서 솟아오른 거대한 촉수가 그녀를 기습한 것이다.
‘큰일 날 뻔했어.’
아직도 머리가 얼얼했다.
9서클로의 진입을 통해 신체와 정신력이 이전과 비교도 될 수 없이 성장했지만, 워낙 놈의 공격이 강했다.
그리고 자신은 무적이 아니었고.
“어서 일어나게, 제이나!”
그 사이 그녀를 가로 막고 있었던 건 12m의 거신 ‘샤의 영혼’.
애초의 장벽 폭발과 함께 시가전을 기다리고 있던 왕이 계획을 변경해 전장에 뛰어든 것이다.
왕은 거체를 몰아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10m의 거대한 지렁이를 향해 신성력의 검을 꽂아 넣었다.
-어림없다! 신인류의 탄생하는 방해하는 미개한 생명체여! 우리는 슈드 무엘님의 것!
여섯 명의 선지자는 소멸의 문을 통해 자신들을 하나의 그릇으로 묶었다.
한 명으로 감당하지 못하는 슈드 무엘의 힘을 여섯 명으로 나눠 감당해 훨씬 강력하고 많은 초인적 능력을 전해 받은 것이다.
이어서 거대 지렁이가 머리를 열었다.
쐐애애액!
거센 풍압과 함께 수백 개의 거대 촉수가 어마어마한 인력으로 왕의 검을 빨아들였다.
눈 깜짝할 새 검이 빼앗긴 왕이 거체를 몰아 지렁이를 두 주먹으로 밀어 쳤다.
쾅!
지렁이의 꼬리가 순식간에 왕의 다리를 잡아 땅속으로 끌어당겼다.
쿠쿠쿠쿵!
마치 늪지대에 빠진 것처럼 빨려 들어가는 키아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놈의 입에서 흘러내리는 산성액이 샤의 영혼을 녹이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큰일이군!’
왕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샤의 영혼을 계속 타고 있을 건지, 아님 빠져 나올 건지.
‘더는 안 되겠구나!’
샤의 영혼이 거의 목까지 빠져들어 갔을 때쯤.
두 마리의 데스 나이트가 빠른 속도로 건물을 파괴하며 백성들이 있는 왕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막아야 한다!’
왕은 빠르게 샤의 영혼을 탈출했다.
설사 불가항력인 상황이더라도 자신은 그래야 했다.
‘희생일지라도…….’
하지만 키아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보고야 말았다.
“저건……!”
샤의 영혼 위로 걸어 나온 왕.
그의 눈앞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