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5
245화
-앱솔루트 제로 포인트(Absolute Zero Point)
하얀 빛은 순식간에 절대영도의 얼음벽이 되었다.
콰드득!
단숨에 메테우스와 뷰로도 공작 사이를 중심으로 하늘과 평원을 가로지르며 뻗어 오른 하얀 장벽.
클레이모어가 빠르게 얼어붙으며 메테우스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흘러 나왔다.
순식간에 팔까지 타고 오르는 절대영도의 얼음.
하지만 메테우스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깟 마법으로 나를 막을 순 없다.”
화르륵!
불꽃처럼 그의 팔을 타고 흐른 암흑 마력.
절대영도의 얼음 마법마저 그의 마력을 견뎌 내진 못했다.
단숨에 녹아내리며 흩어진 것이다.
동시에 태양 문양이 그려진 백색 망토가 펄럭이는 게 보였다.
그 사이로 마주친 마법사의 시선.
마법사가 입을 벙긋거렸다.
“넌 막지 못했지만…….”
이어서 지상을 향하는 마법사의 시선.
그 눈빛을 따라 메테우스가 고개를 돌리자, 그의 시야에 들어온 장벽 밖은 그야말로 빙하가 되어 있었다.
몬스터와 구울들은 움직이던 자리에서 꼼짝 없이 얼어붙었고 해골마와 듀라한들마저 신체 일부가 얼어붙어 이동이 불가능해졌다.
그가 탔었던 삼두룡마저 날개가 얼어붙어 성벽 아래에 볼품없이 고꾸라져 있었으니…….
‘애초부터 저것들을 노린 것인가?’
메테우스는 마법사의 잔꾀에 싸늘하게 미소 지었다.
“당했군.”
이만한 위력의 마법을 다루는 아는 마법사가 대륙에 남아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아니, 이런 마법사는 자신의 대에서도 본 적이 없다.
“9서클인가?”
메테우스의 입가에 즐거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지.’
이어서 메테우스의 클레이모어가 빠르게 얼음 장벽 일부를 베어 버리며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빠르게 자신을 노린 마법사를 찾아 헤매는 메테우스.
그의 눈에 어느새 뷰로도 공작을 부축해 장벽 아래 착지한 마법사가 보였다.
태양이 그려진 망토.
‘저기군.’
파밧!
메테우스는 눈 깜짝할 새 성벽 위에 착지했다.
동시에 마법사가 뷰로도 공작을 뒤에 세운 채 입을 열었다.
“공작 예하, 여긴 제가 맡겠습니다.”
“함께하자꾸나.”
“그보다 폐하를 부탁드려요. 그런데 그는……?”
제이나는 이 사태가 어떻게 된 것인지 의아했다.
‘찬영은 어디로 간 거지?’
그가 있었는데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어두워진 뷰로도 공작의 안색.
“그는 전사했다.”
제이나가 이를 악물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최전방 요새에서 그가 실종됐다. 그의 실종과 함께 판도라 역시 사라져 버렸고.”
“알겠습니다…….”
제이나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숨이 멎은 것 같은 기분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돌아올 거죠?’
제이나는 이 순간 찬영을 믿기로 했다.
믿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이곳은 전장, 뒤흔들리는 마음도 바로 잡아야 한다.
“괜찮겠느냐?”
뷰로도 공작이 걱정스레 물었다.
“걱정 마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굳어진 표정으로 대답하는 제이나에게 뷰로도 공작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방금 전 그 마법은 그야말로 놀라운 신의 기예.
“기어코 9서클에 오른 것이냐?”
“세계의 순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조금 더 넓어졌을 뿐입니다.”
제이나는 자신이 겪었던 수련을 떠올렸다.
말로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시간조차 부유하는 공간에서 자신이 대륙에서의 20년과 같은 시간을 겪었으니까.
“네 지혜가 어느 정도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네 아비가 참으로 자랑스러워하겠구나.”
뷰로도 공작은 그 말을 끝으로 빠르게 병력을 이끌고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때마침 몇 걸음 남기지 않고 걸어온 메테우스.
제이나가 그를 향해 돌아서며 물었다.
“왜 시간을 줬지?”
제이나는 뷰로도 공작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계속 메테우스를 경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메테우스는 마치 대화를 기다려주는 사람처럼 느긋하게 자신에게 다가섰다.
이유가 궁금했다.
메테우스는 클레이모어를 고쳐 쥐며 말했다.
“……나는 너희들이 두려워하고 고통스러워할수록 내 존재 의의가 분명해진다. 난 그들이 너에게 희망을 보고, 왕에게 그것을 전하길 바랐다.”
“네가 이 싸움을 이길 것처럼 확신하는군.”
“너도 느낄 텐데, 아닌가? 내가 저따위 하찮은 것들을 믿고 이곳까지 온 게 아니라는 것을.”
제이나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메테우스의 말이 맞다.
예민해진 모든 감각들이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오히려 방금 얼어붙는 적들보다 그의 존재 하나가 제이나에게 훨씬 더 위협적으로 느껴진 것이다.
‘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막 그 생각에 이를 무렵, 메테우스가 제이나를 향해 클레이모어를 겨눴다.
“네 목을 왕에게 던져 주지.”
메테우스가 다시 허공을 박찼다.
펑!
제이나는 대답 대신 양손을 치켜들었다.
이제 주문은 필요 없다.
9서클에 이르며 알게 된 것은 진언眞言이라는 새로운 세계.
대륙이란 차원이 가진 힘을 공유하고, 느끼며, 마나를 빌리는 것이 아닌, 마나 그 자체가 되어 동화되는 것.
반개한 제이나의 눈동자에서 그녀도 모르는 새 새하얀 광휘가 흐르기 시작한다.
세계의 진실에 한 걸음 다가선 존재가 된 것이다.
‘키란이 그랬지.’
그건 더는 주문이란 규율에 얽매이는 마법사가 아니라고.
‘마나의 길, 마도魔道를 세워 가는 존재…….’
진언이란, 그 권능을 실어 보내는 것.
-그를 멈추게 해 다오.
그녀의 손끝을 따라 마나들이 회오리쳤다.
마나는 어디에든 있었다.
츠츠츠!
그것들은 공간을 가로질러 날아오던 메테우스의 움직임을 억제시켰다.
빠르게 그의 몸을 짓누르는 어마어마한 마나량.
그건 마나를 빌려선 불가능한 힘이었다.
대륙이란 차원에 흐르는 마나가 그녀와 일체화된 의지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찬영이 엘더 갓의 율법을 지키는 수호자가 됐다면…….
제이나는 대륙이란 차원의 수호자가 된 셈이었다.
대륙의 흐르는 모든 마나가 그녀를 위해 싸우고 있었으니까…….
“크흡!”
메테우스조차 더 이상 날개를 펴지 못하고, 중력에 깔리듯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쾅!
한쪽 무릎을 꿇은 메테우스.
고개 숙인 그를 향해 중력처럼 끊임없이 쏟아지는 마나.
하지만 우위에 선 제이나의 표정이 밝지 못했다.
‘저항하고 있어.’
감히 인간이 대항할 수 없는 대륙의 수많은 마나들이 일제히 한 인간의 몸에 쏠렸다.
‘그런데도 버텨 냈다고?’
그가 입은 검은 풀 플레이트가 산산조각 나 부서져 흩날리긴 했지만…….
그건 아무 의미 없었다.
드러난 그의 육신이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저건…….’
제이나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검은 풀 플레이트 안에 감추고 있던 그의 육신은 더 이상 인간이라 하기 힘든 것이었다.
오른쪽 절반은 보라색 쇠사슬의 형태를 띤 암흑 마력이 갑옷처럼 그를 둘러싸고 있었고, 왼쪽은 하얀 뼈만 남은 해골과 같았던 것이다.
‘육신을 포기했어?’
제이나는 저것이 뭘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리치!’
그럼 그의 본신을 타격하는 게 어쩌면 의미가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라이프 베슬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와중에 그를 막아내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
왕국을 지켜야 하는 그녀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녀는 이어서 진언을 일으켰다.
-디스트럭션 윈드(Destruction Wind)
그 순간 메테우스를 구속하고 있던 마나량이 모든 것을 베고 쪼개는 분열화시키는 바람으로 변형됐다. 하지만 그의 존재감이 아직 저 바람 안에 아직 살아 숨쉬고 있었다.
‘다른 게 필요해.’
그녀는 마나를 향해 의지를 담았다.
‘혼돈의 마나여.’
태초부터 대륙에 잠든 아주 오래된 고대의 마나들을 부른 것이다.
이 마나들은 생명체가 태어나고 자라고 죽어 가는 것에 늘 함께한다.
그녀는 마나의 흐름을 순응하는 것 이상의, 건드리지 말아야 할 섭리의 힘까지 이끌어낸 거였다.
단, 섭리를 건드리는 대가는 그녀의 영혼 일부.
한동안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건 물론이고, 자신은 수명을 절반 이상 잃게 될 거였다.
‘하지만 그걸로 그를 이길 수 있다면……!’
-카오스블레이드(Chaos Blade)
고대 마나들이 그녀의 주변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두우며 절대영도보다 냉엄한 기운이 곁을 흐르고, 동시에 그 옆으로 태양보다 밝고 뜨거운 결이 뒤섞인다.
양면의 기운을 다 갖춘 중도中道의 절대 기운이 혼돈이란 이름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들은 검의 형태로 유형화되어서 수백, 수천 개로 늘어나 허공을 뒤덮어 버렸고 오로지 제이나의 의지를 기다렸다.
“크흡.”
제이나의 입가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어서 떨려오는 두 팔, 두 다리.
조금씩 마도사의 권능이 끝나 가는 게 느껴진다.
“가라, 혼돈의 검이여!”
마침내 수천 개의 검붉은 검들이 메테우스를 향해 유성우처럼 일제히 쏟아졌다.
콰콰콰!
장벽은 물론이고, 평원을 뒤덮고 있던 얼어붙던 빙하가 그 여파에 휩쓸려 버렸다.
장벽이 무너지고 그 일대 대부분이 폐허가 되는 건 그야말로 찰나 간이었다.
**
푸스스.
무너져 내린 장벽들로 인해 피어오른 먼지바람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주변을 뒤덮었다.
“커헉.”
제이나는 그 폐허 한가운데에 피를 토해 냈다.
흘러내린 피가 뚝뚝 그녀의 목을 쥐고 있는 손등 위로 떨어져 내렸다.
“어떻게……?”
제이나가 힘겹게 실눈을 뜨며 메테우스를 쳐다봤다.
그의 얼굴은 이제, 인간이라 보기엔 힘든 몰골이 되었다.
보라색 불꽃같은 눈동자만 활활 타오르고 있을 뿐.
모든 살가죽이 소멸된 것이다.
“네가 이끌어 낸 대륙이 가진 힘은 상위 차원의 힘을 가진 존재들의 힘보다 나약하다. 나는 그들과 거래를 한 존재, 네가 이길 수 없는 건 당연하다.”
“쿨럭!”
그녀는 대답도 못한 채 또 한 번 피를 토해냈다.
방금 전 그가 일으킨 암흑 마력에 적중당한 후부터 제대로 숨도 쉴 수 없었다.
마치 이 기운은 독처럼 몸속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메테우스가 힘겨워하는 제이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제법이었다. 사명이라는 놈조차 본신을 끌어내지 못했건만…….”
그 순간 그녀가 눈을 부릅뜨며 힘겹게 물었다.
“그를 어떻게 했지?”
“지금쯤 죽었을 것이다. 살아 있다 하더라도 쉽게 나타나진 못하겠지. 한계를 깨달았을 테니…….”
“그를 죽였다고?”
제이나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메테우스는 그 눈물을 보며 표정이 굳었다.
순간 메들린의 얼굴이 겹쳐 보인 건 왜일까?
메테우스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제이나의 몸속에 흐르던 암흑 마력을 거둬 주었다.
한결 밝아진 그녀의 안색.
“놈과 사랑하는 사이더냐? 아니, 물을 필요도 없겠군.”
메테우스가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제이나는 대답하지 않고 억지로 눈물을 삼켰다.
쉽게 가슴이 진정되질 않았다.
‘그의 죽음이 정말일까?’
뷰로도 공작이 한 얘기만 떠올려 봐도 메테우스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보기도 힘든 건 사실.
무엇보다 9서클 진언까지 이겨낸 그의 힘이라면 불가능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그녀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설사 세상이 무너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의 죽음이 진실이라는 걸 수 없이 보여 준다고 하더라도 믿지 않을 것이다.
‘내 삶은 이제 당신의 운명과 함께하니까.’
그 때 그녀가 다시 결연한 눈빛으로 말했다.
“난 믿어.”
“무엇을? 그의 죽음을?”
“아니, 그는 죽지 않았어.”
“그럴 수도 있다고 했지. 하지만 놈은 내게 패배했고 자신의 한계와 무력함을 느꼈다.”
“그는 다시 올 거야.”
메테우스는 제이나를 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점점 화가 났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아직도 그에게 뭔가를 기대한단 말인가?
“그는 돌아오지 못해. 네 믿음은 그저 두렵기에 생긴 것일 뿐이다. 믿고 싶은 거겠지. 그가 돌아올 거라는 걸.”
“그래, 두려워.”
“이제야 인정하는군.”
“하지만 그래도 믿겠어. 내가 없는 그도 그래왔을 테니까…….”
“노력이 가상하군. 그럼, 이렇게 하지.”
메테우스는 생각을 바꿨다.
둘의 믿음이 얼마나 갈 수 있을지 궁금했고, 자신처럼 그들 역시 무너지고 절망하리라 확신했다.
“너는 이제부터 내 곁에서 네가 알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걸 지켜보게 될 것이다. 그놈마저 소멸될 때, 네가 무슨 말을 할지 심히 기대되는군.”
메테우스의 보랏빛 눈동자가 분노로 이글거리던 그 때, 그의 손목 주변으로 빛의 입자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뭐지?”
이어서 메테우스가 눈을 부릅뜬 순간 빛의 입자가 손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동시에 제이나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네가 틀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