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4
244화
더 이상 창이라고 할 게 없었다.
매번 보았던 보상이나 상태 창 등은 눈에 보이지 않았고 오로지 단 하나의 문구만이 눈앞에 보였다.
-무(無)로의 진입
-167 : 59 : 59
타임 워치가 시작되었다.
찬영은 잠시 눈을 감았다.
이게 뭘 뜻하는지 그간의 일들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나의 죽음.’
아니, 어쩌면 죽음이 아닐지도 모른다.
‘정확히 말하면 대륙이 나를 구현시킬 수 없는 거겠지.’
씁쓸했다.
지난 시간 자신이 살아갈 공간을 위해 싸웠으나 그로 인해 더 이상 자신이 원하는 공간 안에서 살아갈 수 없게 된다는 건.
‘……다시 보기로 했는데.’
어쩌면 그럴 기회조차 꿈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언젠가 돌아올 그녀가 살아갈 시간을 지킬 수 있다면…….
‘기꺼이!’
찬영은 마음을 추스르고 달라진 자신의 힘에 집중했다.
이제 해야 할 일은 단순하다.
‘일주일 안에 모든 걸 끝내겠다.’
지구, 대륙에 이은 격변을 가져올 올드 원과의 마지막 전투가 다가왔다는 게 느껴진다.
이윽고 찬영이 발길을 옮겼다.
메테우스는 자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 * *
저벅.
메테우스는 클레이모어를 등에 매단 채 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6인의 선지자들이 졸졸 쫓아왔다.
“멸망의 왕이시여.”
한가운데에 있던 선지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조차 잊을 만큼 오랜 세월 이 시간을 기다려온 존재.
왕국의 멸망을 기다려온 그를 향해 메테우스가 말했다.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소멸의 문을 열어라.”
“그리하겠습니다.”
고개 숙인 선지자와 함께 나머지 다섯의 선지자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 중에는 찬영에게 한 번 죽임을 당했던 선지자들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라이프 베슬을 통해 다시 살아 돌아온 것이다.
그들은 하나 같이 감격에 찬 눈빛으로 소리쳤다.
“신인류를 위하여!”
“올드 원께서 강림하실 것이다!!”
그들은 감격에 찬 눈빛으로 빠르게 올드 원의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엎드려 있는 그들 한가운데에 생성되기 시작한 보랏빛 원형 게이트.
그 게이트는 빠른 속도로 선지자들의 신체 구석구석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크하하!”
선지자들은 소멸되어 가는 중에도 기뻐했다.
그토록 염원하던 ‘신인류’로 나아가는 순간이 왔다고 믿는 것이다.
그 때 사라지는 그들을 향해 메테우스가 말했다.
“어리석은 것들.”
선지자들은 그가 보기에 멍청한 짓을 하고 있었다.
멸망 직후 올드 원이 신인류로 그들을 택한다고?
‘퍽이나.’
올드 원은 그저 자신들의 뜻을 대신할 하수인들이 필요한 것뿐이다.
직접 올드 원을 마주하고 난 후 자신은 확실히 깨달았다.
선지자들이 권능이라고 칭하는 것들은 올드 원의 일부.
어디까지나 레퀴엠들의 권능이다.
‘올드 원으로부터 직접 받은 힘이 아닌 것이지.’
하나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
올드 원의 꼭두각시가 되기로 했고 그들의 힘을 직접 이어받았다.
꼭두각시가 되어서라도 대륙을 망가트릴 강한 힘을 쥘 수 있다면 그렇게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기왕 꼭두각시가 될 거라면 레퀴엠의 그릇으로 사용될 꼭두각시는 되지 않겠다.’
레퀴엠의 힘을 일부 이어받아 신이라 된 것처럼 행세하는 선지자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하긴, 어느 쪽이든 상관없겠지.”
뭐가 됐든 자신은 그저 원하던 것만 성취하면 된다.
대륙은 이제 자신의 소중한 것을 앗아간 대가를 그대로 치르게 될 것이다.
-올드 원의 종들이여, 나의 부름에 응답할 준비가 되었느냐?
메테우스의 부름에 도열한 수천 마리의 몬스터 떼가 울부짖었다.
레드스컬, 젤럿, 그롭 버그 등 게이트에서 출몰했던 수많은 몬스터들이 서로 배척하지 않고 오로지 왕성을 향해 괴성을 질렀다.
이어서 몬스터들이 파도처럼 반으로 갈라졌다.
-크아앙!
뼈다귀만 있는 군마들이 눈동자에서 푸른 불길을 일으키며 하나둘, 다각거리며 걸어 나왔다.
혹한 제국을 지키던 그들의 왕과 기사, 그리고 음습한 저주를 사용하는 왕의 수족을 지키던 마법사들까지.
그들은 올드 원의 권능을 지닌 메테우스를 통해 모조리 올드 원의 종, 듀라한이 되었다.
듀라한.
스스로의 목을 잘라 없애고, 산 자로서의 삶을 지운 그들은 올드 원에게 영혼이 팔린 존재들.
목이 없는 잿빛 풀 플레이트를 착용한 그들의 몸 주변에는 올드 원의 속박을 상징하는 보랏빛 체인이 휘감겨 있었다.
그들은 생전의 힘에 결합된 암흑 마력을 근간으로 오로지 파괴에 혈안이 되어 있다.
‘이것이 끝이 아니지.’
메테우스의 미소가 짙어졌다.
지금의 군세만으로도 왕성은 두려움에 벌벌 떨 것이다.
하나 레퀴엠의 힘을 이어받은 선지자들과 동수, 혹은 그 이상일 존재들이 더 남아 있다.
듀라한 중에서도 강한 힘을 보유한 두 명의 존재들.
‘데스 나이트.’
그 중 한 명은 교황 아론을 타락시켰던 자이자 선지자들의 하수인이었던 베락이었고, 다른 한 명은…….
‘카베이.’
본인조차 몰랐으나 그는 갓피스의 자질을 타고난 존재.
이를 알아본 메테우스는 복종을 맹세한 그를 올드 원의 먹잇감으로 던져 버렸다.
-크아아앙!
때마침 해골마보다 세 배는 큼직한 거대한 발톱을 가진 맹수 두 마리가 도열한 해골마의 뒤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오고 있었다.
얼핏, 용의 날개를 매단 거대 호랑이의 형체.
하나 그건 그저 수족일 뿐.
정작 그것들보다 위협적인 건 보랏빛 대검을 집어 들고 있는 두 명의 데스 나이트였다.
그것들은 각각 탑처럼 높은, 검은 왕관을 머리에 얹은 채 위협적인 피어를 일으켰다.
과거의 무엇이었는지, 어떤 영혼이었는지 그들은 모두 망각했고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파괴와 절망을 먹고 산다.
-크아아아앙!
데스 나이트의 피어에 답하듯 포효하는 죽은 병사들.
‘구울.’
한 때 오딘의 백성이자 병사들이었던 존재들은 이젠 메테우스와 선지자들에 의해 완벽한 종이 되었다.
피부에서는 보랏빛 끈적한 독이 섞인 점액들이 흐르고, 끊임없는 피의 갈증을 느끼는 것들.
그것들은 어떤 병사보다 빠르고 집단지성을 갖추고 있으며 살아 숨 쉬는 것에 집착한다.
쾅!
그 사이 메테우스를 향해 뼈로 이뤄진 거대한 삼두룡이 빠르게 활강해 굉음을 내며 착지했다.
파밧!
눈 깜짝할 새 삼두룡의 가운데 머리 위에 올라탄 메테우스가 용의 뿔을 손에 쥐며 어둠의 클레이모어를 뽑아 들었다.
웅, 웅!
검 끝에 휘몰아치기 시작한 거대한 힘에 하늘에 잿빛 구름과 벼락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콰쾅!
흩날리는 머리칼 사이로 하늘을 올려다본 메테우스가 기분 좋게 웃었다.
살육하기 좋은 날이다.
“왕이여, 네가 내 것을 앗아간 대가로 나는…….”
메테우스의 시선이 삼두룡이 서 있는 평원 아래, 빼곡히 자리 잡은 올드 원의 군대를 내려다보았다.
“지옥을 통째로 가져왔느니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메테우스를 태운 삼두룡이 검은 먹구름을 향해 다시 날아올랐다. 그 뒤로 수천의 군대가 노도처럼 왕성 장벽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 * *
구궁, 장벽이 흔들린다.
“온다.”
꿀꺽…….
누군가 입을 열었으나 들려온 건 마른침 삼키는 소리뿐.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 속에 병사들은 말을 잃었다.
이 자리에 모인 엘프, 드워프, 레오족, 인간 할 것 없이 모두가 겁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이미 숫자만 봐도 판명 난 싸움이었다.
“우린 죽을 거야.”
누군가 겁에 질려 한 마디를 뱉은 그때.
“닥쳐, 아직 안 죽었어.”
베이콥 영주와 함께 왕성에 남아 있던 벡이 병사의 어깨를 콱 누르며 말했다.
“그리고 어차피 죽을 바엔 겁쟁이로 남는 것보단…….”
스릉.
벡이 자신의 검을 뽑아들었다.
“전사로 뒈져야지.”
“그 친구 마음에 드는군.”
드워프 족의 누군가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순간 저 멀리 장벽에서 깃발들이 하나둘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신호다.”
벡이 기다렸다는 듯 곁에 선 뷰로도 공작을 쳐다봤다.
뷰로도 공작이 소리쳤다.
“퇴각하라! 장벽에서 떨어져 외성의 다음 거점으로 이동하라!”
그리고 뿔피리가 울려 퍼졌다.
부우웅!
동시에 솟아오르는 왕의 깃발.
“폐하께서 가장 늦게 퇴각하실 것이다. 늦지 않게 움직여라!!”
구백 명이 넘는 군사들은 황급히 장벽에서 떨어져 빠르게 다음 거점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벡은 그 중 제일 늦게 움직이며 끝까지 성벽 밖에서 다가오는 적들을 노려봤다.
‘쉽지 않겠어.’
폐하가 원하는 계획이 실행되려면 현재 성벽 위에 있는 병력이 전부, 피해 없이 성벽 뒤 도시로 피신해야만 한다.
‘옳으신 선택이야.’
적은 숫자로 장벽을 지키기란 쉽지 않다.
특히나 이렇게 대규모 공세가 펼쳐질 땐 더욱 더.
‘하지만 적의 이동 속도가 너무 빨라.’
비행 몬스터들은 벌써 장벽 가까이로 다가오고 있다.
시간을 더 끌어야 한다.
‘젠장!’
벡은 자신의 활을 당겨 비행 몬스터를 향해 쏘아 올렸다.
쐐액!
키에엑!
제일 먼저 다가온 가고일 떼 중 한 마리가 쏘아진 화살을 입으로 콱, 문 그때.
콰쾅!
강한 마나 폭발이 일어났다.
그 폭발에 휩쓸려 서너 마리의 가고일들이 성벽으로 추락했다.
쾅! 쾅!
우뚝 서 있는 벡의 옆으로 추락하는 가고일들.
하지만 가고일 몇 마리 죽이는 걸로는 그들의 진군 속도를 조금도 늦출 수 없었다.
“젠장.”
더구나 저 가고일 떼 사이로 드러나기 시작한 저 삼두룡은…….
“도망쳐!”
벡이 자신을 도와 활을 쏘던 엘프들을 향해 소리쳤다.
화르륵!
하지만 삼두룡 세 마리가 동시에 쏘아 보낸 불꽃 기둥은 순식간에 엘프들을 녹여 버렸다.
“안 돼…….”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대강 사백여 명의 병력이 빠져나간 뒤였지만 그들이 빠져나가는 사이 자리 잡은 나머지 병력들은 빠져나갈 엄두도 못 내고 적들을 상대했다.
서걱! 서걱!
그 와중에 자신을 뒤따르는 에머리경과 홀랜드 등 십안의 기사단을 데리고 이동하는 뷰로도 공작의 검술은 그야말로 신기에 가까웠다.
눈 깜짝할 새 장벽을 올라온 구울 수십 마리를 베어 버린 뷰로도 공작이 조금도 거칠어지지 않은 호흡으로 입을 열었다.
“아직도 퇴각하지 않고 뭐 하고 있나! 어서 합류하게!”
“예!”
벡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늘 위를 쳐다봤다.
삼두룡이 또 다시 불을 뿜으려는지, 회색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공작 예하!”
“보고 있네!”
그 순간 뷰로도 공작이 있는 힘껏 땅을 박찼다.
펑!
단숨에 몇 피트를 솟아오른 뷰로도 공작의 검 끝에 남색 빛의 오라가 피어올랐다.
순식간에 검을 품고 치솟는 강렬한 오라.
하지만 그때였다.
쐐애액!
삼두룡에게 짓쳐들기도 전에 가고일 떼가 달려들었다.
“칫!”
뷰로도 공작은 짧은 호흡과 함께 단 칼에 가고일 한 마리의 날개를 베어 버린 후, 추락하려는 가고일의 몸통을 밟고 또 한 번 추진력을 얻었다.
펑!
그러자 또다시 공작의 점프를 가로막는 가고일 떼.
뷰로도 공작은 회전하며 오라를 빠르게 휘둘렀다.
마치 타오르는 남색 불꽃처럼 요동친 오라 소용돌이가 가고일 떼를 가로질렀다.
그야말로 초인적인 공세.
아래에서 내려다보던 메테우스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감돌았다.
“뷰로도 공작.”
그의 얼굴을 안다.
속속들이 떠오르는 기억.
“네놈을 죽이면 왕은 체감하겠지. 죽음이 목전에 왔다는 것을.”
메테우스의 검은 풀 플레이트가 빛을 발한 순간.
그는 이미 삼두룡에서 뛰어올라 허공에 있는 뷰로도 공작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쐐액!
그사이 허공을 격하고 가고일의 몸통 위를 밟은 뷰로도 공작.
거칠 것 없던 그의 앞으로 검은색 클레이모어가 떨어졌다.
쾅!
단숨에 부딪친 두 자루의 검.
하지만 결과는 전혀 정반대였다.
“크흣!”
뷰로도 공작이 검압에 떠밀려 검을 놓친 것이다.
오라가 실려 있던 검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흔들리는 뷰로도 공작의 눈동자가 메테우스의 시야에 들어왔다.
“오랜만이구나, 뷰로도 공작.”
“너는……?”
잘 알진 못하나 그는 분명 베아트리체의 곁에 있었던 한 강렬한 기운을 가진 전사였었다.
‘전대 갓피스가 왕국을?’
놀란 뷰로도 공작과 함께 메테우스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죽어라.”
쐐액!
메테우스는 지체 없이 클레이모어를 휘둘렀다.
뷰로도 공작은 그 검을 이겨낼 힘도, 여유도 없었다.
온전히 검을 받아내야만 했다.
‘이리 가서 송구하옵니다. 폐하.’
뷰로도 공작은 핏발 선 눈동자를 있는 힘껏 부릅떴다.
하지만 그때였다.
새하얀 섬광들이 뷰로도 공작의 눈앞을 뒤덮은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