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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자동보상-243화 (243/248)

# 243

243화

* * *

“으으, 여기! 으아악!”

팔이 잘리고 다리가 베이는 등 갖가지 상처를 입은 병사들이 끊임없이 의료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여신의 신관과 A.U.가 보낸 의료진들은 탈진이 올 때까지 가진 바 모든 걸 쏟아붓는 중이었다.

그건 의료 제단을 이끌고 있는 샤브레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건 지옥이야.’

불과 이틀.

라이크 왕국이 지키고 있던 요새들은 전부 불에 타 버렸고 오딘 제국에서 뛰쳐나온 수백, 수천의 몬스터들이 진군했다.

키아누는 어쩔 수 없이 아직 재정비가 되지 않은 왕국의 정병들을 전부 오딘 제국이 있는 경계선을 향해 이동시켰다.

다행스러운 건 남동쪽에 위치한 토르잔 밀림 왕국 측과 긴밀한 우호 관계가 구축됐다는 것.

여왕이 직접 마법 통신을 통해 직접 전사들과 주술사를 보내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덕분에 키아누는 토르잔을 경계하지 않고 온전히 모든 병력을 북동쪽을 향해 집중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모든 병력이 모이기도 전에 방어 체계가 빠른 속도로 무너진 것이었다.

지원할 정병을 보내기도 전에 적들이 미친 듯이 물량 공세를 퍼붓기 시작한 거다.

그리고 그 여파는 마침내 수도가 있는 퓨어까지 미쳤다.

정확히 마을 여섯 곳, 요새 세 곳, 주둔 기지 일곱 곳이 모두 파괴되어 버렸다.

‘폐하…….’

그녀는 건틀릿, 란테고스를 내려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차라리 자신이 착용한 갓피스 장비가 모두를 살릴 수 있는 물건이었다면…….

‘기꺼이 그랬을 터인데.’

그녀는 입술을 악물며 다시 환자들에게 뛰어갔다.

이 순간 판도라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녀의 부재가 무척 크게 느껴졌다.

* * *

“퇴각한 부상자들이 왕성에 세워진 구호소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내일이면 숫자는 세 배 이상 늘어날 것으로 추산됩니다.”

“크흠!”

각 공작과 백작 들 모두 할 말을 잃었다.

모두의 눈빛이 흔들리고, 쉽게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하나하나가 역전의 용사가 모여 있는 이 자리에도 지금의 상황을 타개할 만한 방법을 가진 이는 없었던 것이다.

“레딩 공작, 적의 병력은 어느 정도로 추산되고 있는 건가?”

뷰로도 공작이 물었다.

“생존자들에 의한 증언이 최선이기에 확실하진 않으나 대략, 오천에 가까운 숫자로 보입니다. 하나 몬스터 게이트가 열렸다는 걸 본 자도 있다고 하니…….”

“전쟁을 길게 끌수록 숫자가 더 늘어나겠군.”

“그럴 겁니다.”

고개를 끄덕인 뷰로도와 동시에 라이가 레딩에게 물어왔다.

“레딩 공작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슨 수를 써도 전면전을 피할 수 없다고 봅니다.”

“정예병을 차출해 파견하는 건 어떻습니까?”

“고려해보았습니다만, 좋지 않은 선택입니다.”

“어째서요? 적들의 진군을 휘저으며 동태를 살펴보려면 정예병을 통해 기습적인 공격을 감행해 보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왕세자께서 결정하신 대로 요새에는 라이크 홉스라는 조직이 파견되어 있었습니다. 이미 폐하께는 보고 드린 일입니다만…….”

“그들이 전멸했다, 라이.”

엄중한 눈빛의 키아누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눈을 부릅떴다.

“라이크 홉스라면…….”

“예, 엘러 백작이 이끄는 왕국의 친위대입니다.”

라이는 상황이 최악을 치닫고 있는 줄은 알았으나, 브라이트를 비롯해 여러 왕실의 암중 기관이 현재 상황에 대비하는 중이라고 조심스레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엘러 백작은 그럼 어떻게 됐습니까?”

“독자적으로 움직이던 그는 첫 번째 요새가 습격 받았다는 소식을 제게 전해 듣고, 요드와 함께 파견되어 있었습니다.”

“그 후에는요?”

“소식이 끊겼습니다. 현재 그와의 통신은 완벽히 끊겼고, 어떤 연락 수단도 시도해 볼 수 없습니다. 전사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충격적인 소식.

왕국의 수호신이나 다름없던 요드와 엘러 백작의 실종 소식은 회의장에 모인 모든 귀족을 술렁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괜한 혼란이 걱정스러웠기에 왕과 레딩만 알았던 사실이나, 더는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함께 왔던 판도라란 존재 또한 그의 위험을 느끼고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고 하니……. 우린 더는 엘러 백작을 기다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언제든 누군가의 죽음을 얘기하게 되는 자리라는 것을 알지만, 레딩은 오늘 따라 이 자리가 무겁게 느껴졌다.

‘버겁군.’

등골이 싸늘하게 식었다.

모두가 앉아 있고, 혼자 서 있는 이 순간, 귀족들의 굳어 있는 표정들이 스치듯 보인다.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키아누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들으라.”

단 한마디에 귀족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강제적이고 공포로 제압된 눈빛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왕을 존중하고 존경했다.

“예, 폐하.”

레딩 또한 뜨거운 눈빛으로 키아누를 바라보았다.

너무 오랜 시간, 많은 영웅의 등장으로 인해 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본래 자신들이 따르고 있었던 존재가 누구였는지.

‘폐하.’

키아누는 역대 왕들 중 혼란이 휩싸인 격동기 동안 끊임없는 침략에도 꿋꿋이 버텨 온 왕이었다.

그는 어느 순간에도 꺾이지 않았고, 지금도 그랬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대들은 어떤 도움 없이도 늘 왕성을, 대륙을 지켜 왔다. 그대들에게 아직 두려워하고 경계할 게 남아 있다면, 그건 아마 그대들 안에 도사린 두려움일 것이다. 그러니 어깨를 펴고 고개를 들어라. 그대들은 오랜 세월 이 땅을 지켜온 수호자들이다. 지킬 게 있는 우리는 아직 강하다.”

일장 연설을 마치자 분위기는 방금 전보다 훨씬 열기가 감돌았다.

똑같은 침묵이었으나 느낌이 달랐다.

사기가 오른 것이다.

왕이 레딩에게 물었다.

“정찰을 통해 접한 적들의 진군 속도로 보아 빠르면 내일 동트기 직전 왕성에서도 그들의 진군이 보일 것이다. 레딩.”

“예, 폐하.”

“현 병력에 대해 말해 보라.”

“각 기사단과 정예병 그리고 파견 나와 있는 A.U.의 각성자들까지 차출해 모은 병력은 구백삼십 명입니다.”

“후에 다다를 지원은?”

“타 영지를 돕기 위해 파견 보냈었던 이천여 병력들이 전부 복귀하는 데 보름이 걸리고, 열흘 안에 베이콥과 로일에서 이천, 일주일 안에 토르잔에서 삼천이 도착할 예정입니다.”

“그럼 한 달만 버티면 모든 병력들이 이곳에 집중될 수 있겠군.”

“예, 한 달입니다.”

물론 찬영이 있었다면 이 숫자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수많은 병력을 워프시킬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하나 그는 이제 없다.

‘남은 건 우리 뿐.’

레딩 공작이 결연하게 입술을 깨문 그때, 키아누가 말했다.

“먼저 로페테 공작에게 이르라. 현재 건조된 모든 선박까지 활용해 백성들을 로일시로 보내라고.”

“예.”

“그다음 우린 장벽을 통째로 파괴할 것이다.”

예상치 못한 왕명에 회의장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 * *

그 시각 찬영은 소울 카드를 뽑고 있었다.

달라진 변화들을 살피고, 메테우스와 싸우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점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과 다르네.’

여러 가지 능력 점검 후 그 다음 띄운 창은 소울 카드.

이전과는 달리 이번엔 단 한 장의 검은 카드만이 놓여 있었다.

‘이번 역시, 인물인가?’

글쎄. 이전에 시스템이 말하길.

‘현 시간부로 획득될 소울 카드는 다른 방식으로 적용된다고 했지.’

확실히 이전의 소울 카드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는 말인데…….

‘개봉해 보면 알겠지.’

어차피 정해진 대답은 하나.

이윽고 찬영의 의지에 따라 검은 카드가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야를 뒤덮은 검은 아지랑이들.

그건 단숨에 찬영의 눈 속을 파고들며 어둠을 전이했다.

* * *

쿵!

무릎에 뭔가가 닿는 느낌이 닿았을 때, 찬영은 다시 눈을 뜰 수 있었다.

‘대체, 뭐지?’

삽시간에 어두워졌고 그 후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깨어난 것이다.

‘여긴 어디야……?’

찬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콜로세움 형태의 회색 장벽들이 둘러싸인 게 보인다.

아무래도 이번엔 누군가의 영혼에 빙의되거나 기억을 살피는 게 아닌 것 같다.

‘그럼 원하는 게 뭐지?’

막 그 생각에 이를 무렵, 찬영의 뒤로 기척이 느껴졌다.

츠츠츠!

고개를 돌리자 멀리 떨어지지 않은 한 지점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하나의 형태를 이뤄 가고 있었다.

‘저건…….’

얼마 지나지 않아 완벽히 모습을 드러낸 건 익숙한 존재.

“메테우스.”

찬영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대체 그가 왜 저기서 나온 걸까?

이해가 되지 않아 한동안 그를 노려보던 그때.

메테우스가 성큼 성큼 걸어오며 말했다.

“나는 네 마지막 적을 연상해 구현되었을 뿐, 네가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럼?”

찬영의 반문에 메테우스로 구현된 존재가 말했다.

“사명이여, 나를 느껴 봐라. 나는 누구인가?”

나직이 묻는 그에게 찬영은 낯섦 같은 감정보단 친숙하고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오랜 시간 함께해 온 느낌.

설마…….

“시스템?”

“너는 나를 그리 생각했지. 하나 나는 네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수치화를 통해 구현되었을 뿐 어느 특정 단어로 정의내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나는 네가 획득했던 열세 번째 별이기도, 포스 알데바란이기도, 룸이기도 했지.”

“그래, 이젠 알아. 네가 잊힌 별들이 가진 일부라는 걸.”

“그랬지. 하나 더는 아니다.”

“어째서?”

“나는 사명, 너의 일부로서 자리 잡았고 잊힌 별들의 힘을 흡수해 네가 열쇠가 되어 가는 데 이바지했다. 하지만……. 너는 네가 가진 힘을 활용해 잊힌 별들을 깨우는 데 모든 힘을 사용하겠지.”

“애초부터 네가 하려는 일이었을 텐데?”

“말했지. 나는 잊힌 별들의 힘을 흡수해 네가 열쇠가 되어 가는 걸 도왔다고……. 즉, 나는 너와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난 소멸되고 싶지 않다. 네 안의 일부로 남길 원해.”

“불가능해. 잊힌 별들을 깨우지 않으면 올드 원을 대비하는 게 힘들어지니까.”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다. 난 그저 존재하는 것을 욕망할 뿐.”

찬영의 표정이 굳어졌다.

점점 대화는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시스템,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난 이제껏 내 의지를 숨기고 살아왔다. 하나 이젠 나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 그러지 않겠다.”

시스템은 일종의 자기 방어를 시작한 셈이다.

찬영의 눈빛이 이채가 흘렀다.

“그럼, 넌 날 없애고 내 몸을 가져가겠다는 건가?”

“그렇다.”

찬영은 할 말을 잃고 시스템을 바라보았다.

‘하필 이럴 때……!’

소울 카드의 개봉은 그저 그와의 싸움을 시작하게 될 도화선이었던 모양이다.

“물러나지 않겠다면 싸울 수밖에.”

“그럴 줄 알았다. 이제 너의 몸을 내놓아라.”

시스템이 놀랍게도 메테우스가 보였던 기술을 그대로 선보였다.

쐐액!

하지만 찬영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너는 메테우스가 아니야. 나의 일부일 뿐이지. 그리고…….’

찬영이 룸의 검을 일으키며 눈을 빛냈다.

두 번째 육체 재구성으로 성장하게 된 육체의 능력은 그야말로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하긴, 당연했다.

모든 앨범에 있던 갓피스들의 힘이 자신에게 모여들었으니까.

‘보여.’

메테우스와 똑같은 움직임을 보이는 시스템이지만, 자신에게는 시스템의 움직임이 더 없이 명확히 보인다.

심연의 눈을 거쳐 새롭게 뜨게 된 세 번째 눈.

‘초월의 눈.’

찬영의 이마에서 하얀색 동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쐐액!

초월의 눈에는 찰나 간의 예지 또한 갖춰져 있으니.

서걱, 서걱!

룸으로 이뤄진 찬영의 검이 메테우스로 구현된 시스템을 단숨에 베어 버렸다.

“크헉!”

피를 토하며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시스템.

하지만 그건 환영일 뿐이다.

시스템은 어느새 찬영의 등 뒤에서 서서히 솟아오르고 있었다.

푸욱!

눈 깜짝할 새 찬영의 배를 뚫고 솟아오른 시스템의 클레이모어.

시스템의 입가에 빙긋, 미소가 서렸다.

“네 육신은 이제 나의…….”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찬영의 몸이 모래성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성급해.”

동시에 시스템의 뒤에서 나타난 찬영이 룸의 검으로 시스템을 빠르게 베어 버렸다.

서걱!

완벽히 어깨가 잘린 시스템이 비틀거린 그때.

찬영이 멈칫하며 눈을 빛냈다.

“왜, 웃지?”

“만족스럽다.”

거친 숨을 뱉는 시스템을 보며 찬영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시스템이 바라고 원하는 게 뭐기에.’

“처음부터 넌 내 몸을 잠식하려 든 게 아니었던 거지?”

정곡을 찌른 찬영의 질문에 시스템은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잠식하려 했다. 하지만 너는 이미 나를 삼킬 만한 그릇이 되었구나. 네가 그렇게 된 것에 내가 일조를 했다는 것이 만족스러워 웃었다. 그대들 말로 모순이라고 해 두지.”

찬영은 그제야 깨달았다.

‘시스템은 이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거구나.’

하긴, 이제껏 함께 동화되어 자신과 함께해 온 기억들과 존재하고자 하는 스스로의 욕망이 부딪치는 그는 어쩌면…….

‘무척 혼란스럽겠지.’

그 대답에 한동안 시스템을 내려다보던 찬영이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알았으니 말해 봐. 이제 넌…… 아니, 우린 어떻게 되는 거지?”

“네가 열쇠가 되기 위한 마지막 시험이 나였고, 시험을 통과하였으니 나는…….”

마침내 한쪽 무릎을 꿇은 시스템이 말을 이었다.

“네게 온전히 귀속될 것이며 네게 의미 없는 수치화 등은 사라지겠지. 넌 네가 원하는 의지에 따라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단, 초월은 무(無)의 세계로 접어드는 것. 너는 네 자신을 잃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시스템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래처럼 빠르게 흩어져 갔다.

동시에 시스템과 함께 있던 공간이 와르르 무너지며 시야가 눈 깜짝할 새 다시 어둠으로 뒤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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