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
240화
“한때 열세 번째 별 중, 화이트 스톰이라 불리던 자가 있었다. 백색의 별 마이크로, 그가 내게 날개를 달아 주었지.”
흑발에 검은 갑옷과 망토까지 두른 그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게 흰 날개가 망토 안에서 튀어나왔다.
펄럭!
광휘가 흐르는 그의 눈빛.
“나는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느냐?”
나직이 묻는 그에게 찬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쐐액!
순간, 날개를 펄럭인 메테우스가 공간을 질주했다.
눈 깜짝할 새 찬영의 육안에서 사라진 메테우스.
하지만 찬영에겐 심연의 눈이 있었다.
스륵.
일렁이는 그의 잔영이 보인다.
찬영은 기다릴 것도 없이 손을 뻗었다.
파지짓!
룸으로 일으킨 백색의 칼날과 부딪친 어둠의 클레이모어.
찬영은 강한 저릿함을 느꼈다.
‘이제껏 겪은 어떤 암흑 마력과도 견줄 수 없는 수준이야!’
암흑 마력의 응축된 밀도 자체가 다르다.
차원의 돌까지 흡수하는 데다가 자신보다 약한 암흑 마력은 전부 무효화시킨다.
‘그런데 이건 완벽히 달라…….’
그때 룸의 검을 눈앞에 둔 메테우스가 클레이모어를 밀어 치며 찬영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방금 전 일격을 막아 낸 찬영을 보며 메테우스도 놀란 눈치.
“사명이란 존재가 이런 거였나? 놀랍군. 마나, 신성력도 아닌 좀 더 원초적인 힘 같아.”
팽팽한 힘 대결 속에서 메테우스는 찬영의 근간을 탐색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찬영의 심연의 눈 또한 재차 발동했다.
‘네가 가진 힘은 뭐지?’
대답을 찾기 위해 그의 생각을 들여다보았다.
하나둘 그의 생각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올드 원의 말대로군.
-만만치 않은 자야.
-너도 그렇게 느끼나?
순간 마지막으로 들려온 메테우스의 생각.
찬영이 눈을 부릅떴다.
“읽었다고?”
메테우스가 빙긋, 미소 지으며 맞대고 있던 검을 뒤로 물렸다.
파밧.
순간 잔영처럼 흩어지며 멀찍이 거리를 둔 메테우스.
그가 찬영을 보며 물었다.
“열세 번째 별은 너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고 했을 텐데.”
“심연의 눈?”
반문한 찬영에게 메테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와 비슷하지. 하나 나는 너와 같이 진실을 들여다보진 못한다. 그저 너와 같은 자의 것을 느끼고 차단할 뿐이지. 심연의 눈을 동경했던 브뤼셀의 딸이자 분홍 별.”
메테우스의 미소가 짙어졌다.
“지저의 방패.”
동시에 열세 번째 별이 모두 드러났다.
덩달아 찬영의 눈빛도 깊게 가라앉았다.
심연의 눈까지 차단된 이 순간, 그와 서로 가진 힘의 우열을 가리려면 정면 승부가 최선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메테우스도 그걸 느낀 듯 자신이 가진 검을 들어 보였다.
“사명, 너는 가진 바 모든 걸 걸어야 할 것이다.”
“닥쳐.”
찬영이 땅을 박찼다.
쐐액!
타키온을 통해 공간을 단숨에 박찬 찬영.
찰나 간 메테우스의 등이 보였다.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 회전하는 메테우스의 검이 보랏빛 기류를 일으키며 앞으로 쏟아졌다.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의 힘.
황급히 룸을 방패로 일으켜 그 힘에 대항했다.
콰지직!
룸 안쪽의 균열이 난 게 보인다.
‘룸을 흔들고 있어!’
입술을 콱 깨문 후 룸을 더욱 불어넣었다.
방패로 화한 룸이 방패 위로 뾰족한 수십 개의 가시로 구현되어 메테우스를 향해 일제히 뻗어졌다.
“잔재주다.”
한 마디 말을 남기고 다시 사라지는 메테우스.
찬영이 이에 질세라 심연의 눈을 통해 그를 찾았다.
‘여기다!’
순간적으로 허리춤으로 다가오는 그림자.
찬영은 지체 없이 룸의 방패를 일으켰다.
서걱!
하지만 메테우스의 검은 허리가 아닌 찬영의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포스 알데바란을 착용한 상태에서도 암흑 마력은 무효화되지 않았다.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포스 알데바란을 단숨에 베어 나간 것이다.
“크흡!”
비틀거리며 균형이 흔들린 찬영.
황급히 타키온을 통해 뒤로 물러나긴 했지만..
“헉, 헉!”
그보다 정신적인 충격이 더했다.
‘포스 알데바란이 그에게 통하지 않아.’
무기력함을 느낄 만큼 메테우스가 가진 힘은 강력했다.
그때 메테우스가 비틀거리는 찬영을 보며 말했다.
“그릇으로 사용되는 선지자들 따위와 내가 가진 힘을 비교할 생각이었다면 당장 집어치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찬영이 창조의 권능으로 허리를 치료하며 물었다.
“같은 암흑 마력이 아니라는 거냐?”
“나는 그릇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올드 원과 거래한 존재, 바탕이 다르다. 무엇보다…….”
메테우스가 자신의 클레이모어를 들어 보였다.
“우스 동력기의 힘을 보유한 게 너뿐이라고 생각하나.”
찬영이 눈을 부릅떴다.
“설마……!”
“우스 동력기와 차원의 돌, 그리고 알데바란이 이 안에 모두 담겨 있지.”
“케노의 무덤…….”
“그래, 홉스에서 온갖 트랩을 헤치고 내게 그 물건을 전해 줬지. 웃기지 않은가? 베아트리체가 한때, 나를 마지막 대륙의 희망이라고 생각했다는 게…….”
“그 검이 그럼?”
“맞다, 메들린의 이름을 본떠 선지자들로부터 제작하게 했지.”
“허면 그들과 거래를 했다고?”
찬영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된다.
“피치 못할 일이었지. 홉스를 막기 위해서 나는 더 큰 힘이 필요했다.”
찬영은 선지자보다 더 올드 원에 가까운 존재를 만났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그의 비틀린 분노가 올드 원과 손을 잡게 한 것이다.
“하면 올드 원의 목적에 대해서도 잘 알겠군.”
“너다, 사명.”
찬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할 일도 아니지.’
자신은 잊힌 별의 힘을 깨우고 있다.
즉, 올드 원이 가장 두려워 할 적을 재건시키는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난 너를 그들에게 바칠 것이다.”
“복수 때문에?”
“안 되나?”
메테우스의 눈동자에 깃든 살의, 분노는 분명 그를 단단히 집어삼키고 있었다.
“네 분노를 식히는 데에 어째서 상관없는 이들의 희생이어야 하지?”
“그들도 똑같이 느껴야 한다. 세상 전부를 잃는 게 어떤 기분인지를.”
이 순간 찬영은 그에게 어떤 말도 해 줄 수가 없었다.
제이나가 돌아오지 않는 동안 자신 또한 어딘가 떨어져나간 기분이었다.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두려움에 휩싸인 적도 있었다.
하나 자신에겐 돌아올 거란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그에겐…….
‘없지.’
그 때 메테우스가 소리쳤다.
“난 당시, 올드 원과 거래를 마친 후 그녀를 무사히 대륙으로 돌려보낼 수 있었다. 올드 원은 내가 사명을 찾아온다면 더는 몬스터 따위를 보내지 않는다고 약조했어!”
“믿기 힘든 일이야.”
“하지만 희생 없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의미 없는 희생보단 지푸라기라도 잡았어야 했어! 사명 하나 기다리기 위해 그녀를, 그 수많은 동료들을 희생시키지 말았어야 했다!!”
그의 말이 틀리다고 말할 수 없었다.
만약 그와 자신이 같은 처지였고, 제이나가 희생되어야 했다면?
찬영은 그의 말에 일부분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네 입장이 이해된다고 해서 네가 하는 모든 일들이 정당화된다고 말할 순 없어.”
이미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라이크 홉스는 대륙이 가진 희망 중 하나.
그는 그걸 송두리째 앗아 갔다.
이어서 메테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자비 같은 건 머릿속에 없었지. 내가 전부를 잃은 만큼 모두 대가를 치러야만 해.”
한동안 그의 절규를 듣고 있던 찬영은 이윽고 고개를 단호히 저었다.
“아니, 네 슬픔을 동정하고 이해하지만 네 방법은 잘못됐어. 무엇보다 희생하기로 택한 건 네가 사랑했던 그녀였어.”
“회유 당한 것뿐이다.”
치유를 완료한 찬영이 다시 룸의 검을 구현해 내며 말을 이었다.
“아니, 그녀를 벤 건 너다. 메테우스.”
찬영은 그와 자신이 닮은 게 많다고 생각했다.
잊힌 별의 힘을 지닌 것부터 장비들까지 모조리.
하지만 그와 자신을 다른 존재로 만드는 간극은 단 하나.
사랑하는 이의 선택을 믿고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너는 메들린을 믿지 못했어.”
“네깟 게 운운할 이름이 아니다.”
“난 너와 다른 선택을 하겠어.”
“글쎄, 그럴 수 있을까?”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메테우스.
그의 표정을 본 찬영은 직감했다.
‘감춰둔 게 있어.’
눈을 가늘게 뜬 찬영이 메테우스에게 물었다.
“무슨 말이지?”
“네가 이곳에 있는 동안, 네가 지키려 했던 왕국의 수많은 곳이 어찌 됐을 것 같으냐?”
찬영은 마른침을 삼켰다.
설마……?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왕국의 수도가 있는 방향을 쳐다봤다.
‘수도가 위험해졌다?’
확실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네가 예상하고, 내가 계속 말해 왔던 일을 했지.”
메테우스의 미소가 짙어지면서 그가 클레이모어, 메들린을 찬영에게 겨눴다.
“전쟁.”
그 얘기를 들은 찬영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메테우스는 그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생각이 바뀌었다. 나는 너를 시험할 것이다.”
메테우스가 찬영의 주변을 산책하듯 거닐며 계속 말했다.
“이제, 너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먼저…….”
메테우스가 자신의 허리춤에서 작은 구슬 형태의 목갑을 부쉈다.
그 순간 사방으로 뻗어지며 요동치는 환한 빛.
그 빛이 뭘 뜻하는 지 찬영이 모를 리 없었다.
‘마지막 왕관 조각!’
눈을 부릅뜬 찬영을 보며 메테우스가 정령왕의 불꽃이 깃든 왕관 조각을 들어올렸다.
“올드 원에게 듣자 하니, 너는 이걸 필요로 한다고 하더군.”
“그래서?”
“넌 이제 이것과 네가 지켜야 할 왕국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대의냐, 혹은 네 감정이냐?”
“무슨 뜻인지 물었어!”
“내가 가진 권능으로 모든 몬스터들이 왕국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카베이라는 꼭두각시를 필두로 오딘의 병사들은 차원의 돌에 현혹되어 산 자가 아닌 죽은 자에 더 가까워졌지. 선지자들은 그걸 구울이라고 하더군. 그뿐이 아니다.”
메테우스가 날개를 쫙 펼치며 말했다.
“마나를 다룰 줄 아는 모든 존재들은 선지자의 뜻에 놀아나는 듀라한이라는 괴물이 됐지. 왕국은 그 공세를 견딜 힘이 없을 것이다!”
메테우스가 은은한 빛이 나는 왕관 조각을 내밀었다.
“이런 와중에도 네가 왕관을 택한다면 나는 피 흘리지 않고 너에게 왕관을 내주겠다. 단, 왕관을 가져갈 시 넌 왕국의 어떤 싸움에도 참여해선 안 돼. 자, 이제 어떻게 하겠느냐?”
찬영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메테우스는 지금, 자신을 쥐구멍에 몰아넣고 있었다.
그러면서 묻고 있는 것이다.
‘너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냐고.’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왕관 조각을 택하는 것이 올드 원으로 향하는 지름길이 되겠지만, 이를 택하면…….
‘왕국을 도울 길이 없어져.’
찬영은 주먹을 콱 쥐었다.
이를 타개할 방법이 없다.
그의 말대로 선택을 하는 수밖에.
지켜보던 메테우스의 미소가 짙어졌다.
“대답이 없군. 왜, 네가 나와 다르다는 걸 증명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더냐? 왜, 너 역시 그들을 향한 믿음이 부족한가?”
그의 반문에 잠시 고개 숙이고 있던 찬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니.”
찬영은 머릿속에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방금 죽은 라이크 홉스들까지 전부…….
솔직히 말하면 모두를 잃을까 두려웠다.
그러나 그럴수록 오랫동안 품어온 생각은 변하지 않고 오히려 더 단단해졌다.
“한때 매번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항상 자책해 왔어.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고, 모든 일을 혼자 해결하려고도 했지.”
“그럼, 이번에도 여전히 두렵겠구나.”
“솔직히 두려워. 모두를 잃을까 걱정된다.”
“그럼 결정해라. 쓸데없는 대의 같은 게 아니라 네가 지켜야 할 게 무엇일지 떠올려보란 말이다.”
찬영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들이야.”
“옳은 선택이군.”
메테우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은 그때.
찬영의 말이 이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을 지키려 하는 것, 자유……!”
동시에 메테우스의 표정이 굳어졌고, 찬영은 다시 빛의 칼날을 손에 일으켰다.
“그들도, 나도 스스로 서길 원해. 뉴 빌드든, 올드 원이든, 너건 그 어떤 외압으로도 흔들리지 않길 바라. 나 역시 그러기 위해 계속 싸워 왔다. 그러니 흔들리지 않을 생각이다.”
스파크 튀는 룸의 검을 양손에 고쳐 쥔 찬영이 결연해진 눈빛으로 메테우스를 노려봤다.
“네게 쓸데없는 그 대의가 내겐, 아니 우리에겐 이 지옥을 버텨 온 유일한 이유였으니까.”
“그럼, 그들은 모조리 몰살 될 것이다.”
“아니. 우린 선택했고 계속 싸울 거다. 그러니 널 쓰러트리고…….”
찬영이 확신하며 말을 이었다.
“난 올드 원에게 간다.”
대답은 끝났다.
전쟁이다, 메테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