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9
239화
혹한의 제국이 복원된 지 근 한 달이 가까워졌다.
한 달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왕국 곳곳에 흩어졌던 왕관 조각 세 개를 전부 향로로 되돌린 덕분에 다섯 개 조각이 모두 모였다.
이어서 요드와 함께 나머지 열세 번째 별을 회수하는 데에도 시간을 기울였다.
한 명은 빌라도 부족의 베흐라는 샤먼이었고, 다른 한 명은 놀랍게도 낯이 익었던 아즈렉 부족의 브루파였다.
의외로 그들은 조금의 주저 없이 라이크 홉스와 함께 움직이겠다고 나섰다.
천군만마를 얻은 듯했다.
미리 제안을 했던 데이크와 짐머 또한 라이크 홉스에 합류해 있었으니까.
그렇게 동서남북 활발히 움직이는 동안 캘린더의 일자 또한 차곡차곡 쌓여 어느새 30회 받기에 가까워졌다.
그사이 10회 20회 보상 받기를 통해 나온 건 인라의 퍼즐 조각 ‘2’와 ‘5’.
기다렸던 인라의 퍼즐 조각이 완성된 것이다.
놀랍게도 퍼즐 조각은 룸의 상승과 함께 또 다른 히든 퀘스트로 연계되었다.
-‘뇌정의 구슬’을 회수하라.
-뇌정의 구슬 획득 시, 엘리야의 날개가 뇌정을 담은 엘리야의 날개로 성장합니다.
-뇌정을 담은 엘리야의 날개로 성장 시 룸 소모 없이 날개 자체적으로 워프 사용 가능.
퀘스트를 보자마자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워프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는 조건보다 매혹적인 조건은 당장 눈을 씻고 봐도 없었으니까.
* * *
“또 떠나신다고요?”
지수가 차를 마시며 찬영에게 물었다.
“네, 그래야죠.”
“한번 만나 뵙기도 어렵네요.”
“지수 씨도요.”
바쁜 건 매한가지, 질문을 던진 지수가 겸연쩍게 미소 지었다.
“저보다 더 바쁘신 걸요.”
“제가 바쁜 만큼, 모든 것들이 더 안정화될 테니까요.”
찬영의 대답에 지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찬영의 입지는 무척 큰 데다가 그는 대륙의 어떤 곳도 막힘없이 단기간에 다녀온다.
마치 대륙이 그에겐 장기판에 불과한 것 같다.
단숨에 오고 가니까.
“그렇게 힘쓰신 덕택에 열세 번째 별들이 대부분 모인 거겠죠?”
“아무렴요.”
찬영은 오랜만에 즐기는 티타임에 지그시 눈을 감았다.
워낙 정신없이 돌아다니니 이런 조그마한 찻잔을 쥐는 일상마저도 어색하다.
“이제 열 세 번째 별 중 두 개의 별만 남았어요. 그들을 찾아야겠죠.”
뇌정의 구슬부터 찾은 후가 되겠지만.
“오래 걸리시나요?”
“최대한 빨리 돌아와야죠. 제국이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신경이 쓰이거든요.”
찬영의 말대로 오딘 제국은 현재 무척 조용했다.
그렇다고 교류가 있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조용했다.
하지만 왕국 측에서는 급할 게 없었다.
토르잔과의 우호를 다지며 내부 전열을 다시 가다듬는 중이었고, 그러는 동안 오딘 제국과 맞닿는 경계선에 연합군 창설을 대대적으로 선포했다.
그러는 동안 상황을 관망하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찬영 또한 왕국의 입장을 고려하여 당장은 남은 왕관 조각을 찾으러 떠나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
자칫 혹한 제국에 있는 왕관 조각을 찾으러 갔다가 전쟁 선포를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기에…….
그보다는 움직여도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 지역을 활보하며 남아 있는 것들을 회수하는 게 나았다.
“그럼, 이제 두 개의 별을 찾으러?”
“네, 그래야죠. 어디에 있을 지는 요드를 통해 알아내야겠지만.”
찬영이 미소 지었다.
* * *
휘잉.
오딘 제국이 있는 설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늘 차가웠다.
“이놈의 바람은 적응이 안 되는군.”
엔드 요새를 오랫동안 지켜온 노기사, 루힐 남작은 빠르게 말을 달려 강가 주변을 탐색했다.
그가 이끄는 열댓 명의 소대가 해야 할 일이다.
강가에 몬스터 등 위협적인 존재들이 출몰하는 것에 미리 대비하기 위한 것.
‘그래도 요즘은 별일이 없어서 다행이긴 하지만…….’
당연히 이유는 모른다.
몬스터의 숫자가 전보다 훨씬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나타난 몬스터들의 이동 경로가 요새가 아닌 제국이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저 멀리, 강의 반대 방향을 체크하고 돌아온 기사가 그에게 보고했다.
“남작님,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돛단배 한 척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오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더냐?”
“오 분이면 강가까지 다다를 것입니다.”
“알았다.”
오늘은 평화롭지 못할 모양이다.
* * *
“크헉……!”
루힐 남작은 어깨를 콱 잡은 채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출혈 때문에 의식이 점점 희미해진다.
“아, 안 돼. 가, 갈 수 없다.”
그 순간 시야 밖으로 검은 남자가 사라지려 했다.
본능적으로 손을 뻗은 루힐 남작.
콱.
그가 온 힘을 다해 쏟은 손이 검은 망토 끝자락을 쥐었다.
그러자 망토를 입은 남자가 차가운 눈길로 고개를 돌렸다.
“이 힘없는 한 손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냐?”
“……그, 그것이 나의 소임. 설사 나를, 나를 죽이더라도 너는 요, 요새를 지나갈 수 없을 것이다.”
“어째서?”
“이미…… 이미, 적이 오는 것을 헉, 헉 알고 있으니…….”
숨이 차오르고 루힐 남작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쌓여 있는 돌의 장벽이 나를 막을 수 있을 거라 자신하는 건가? 무엇을 믿고?”
남자가 반문했지만 루힐 남작은 대답하지 못했다.
옷자락을 쥔 채 숨이 멎은 것이다.
“어리석은 것.”
남자의 차가운 눈길에 잠시나마 동정이 깃들었다.
충성심이란 허울에 빠진 그를 보니 예전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머릿속에 과거의 기억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메테우스, 이러지 말아요.
-너야말로 왜 나를 막는 거야! 우리의 희생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고? 지금이라도 마음 돌려. 그럼 난 지체 없이 당신과 떠나겠어!
-안 돼요. 우린 계속 가야만 하니까.
-나보다 그따위 대의가 중요하다는 건가?
-당신과 내가 살아갈 곳은 대륙이에요.
-당신이 죽는다고! 그딴 게 다 무슨 의미인데!!
메테우스가 미간을 깊이 찌푸렸다.
머릿속을 파고드는 그 날의 일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비단 그녀를 향한 게 아니었다.
그녀를 막지 못한 자신과 그녀를 대의라는 것으로 중무장시켜 자신에게서 떨어트린 자들에 대한 분노.
“이제 라이크 왕국의 왕을 갈가리 찢어 버릴 것이다.”
베아트리체가 지키려 했던 모든 것은 더는 자신에게 의미가 없다.
그녀가 사라진 대륙 따위 존재 하나 마나.
‘다 소멸시킬 것이다. 하나도 빠짐없이.’
그것이 메테우스가 올드 원과의 거래를 받아들인 이유다.
그 조건에는 단 하나.
-사명을 상대하라.
천천히 고개를 든 메테우스의 시야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이미 라이프 베슬에서 부활한 선지자들로부터 놈의 관한 얘기는 질리도록 들었다.
새로운 시대의 갓피스이며, 왕국을 지키는 자이며, 올드 원을 찾아 헤매는 자라고.
“올드 원의 거래가 아니더라도 넌 나와 만났어야 했구나. 어차피 네놈이 내 앞을 막아서려 했을 테니.”
메테우스는 요새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뿌우우!
적의 급습에 요새가 황급히 방어를 대비했다.
요새의 치안 책임자인 베르코 자작이 황급히 요새 성벽 위로 올라섰다.
그 후 들어온 보고는 할 말을 잃을 만큼 기가 막혔다.
루힐 남작이 적의 등장을 알린 후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적은 단 한명이라고 했건만.’
하나 여태껏 귀환하지 않았다는 것은 곧 그의 죽음을 알리는 것.
베르코 자작은 모든 문을 걸어 잠그고, 적에 대항했다.
“공성 병기도 준비하라.”
강가 주변에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 주변 강가에서는 처음 보는 낯선 안개.
‘마법을 다루는 것인가?’
확신할 수 없지만 분명 자연을 다룰 만큼 강력한 힘을 보유한 자인 게 분명했다.
“긴급 마법 통신망을 통해 폐하께 이 사실을 알리고, 요새 마법 병단들을 배치시켜라.”
적이 어떤 존재인지 가늠할 수 없는 상황.
베르코 자작은 가진 바 모든 것을 쏟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마나 탱크를 기반으로 한 공성 병기, 아티팩트, 최근 요새에 지원 받은 모든 장비들을 꺼낼 참이었다.
그리고…….
“주둔하고 계신 그분들의 도움 또한 필요하다 일러라.”
라이크 홉스들에게 지원을 청하기로 했다.
“이미 나와 있소.”
그 순간, 자작의 등 뒤가 어둑어둑해졌다.
자작이 고개를 돌리자 시야에 들어온 건 열댓 명의 라이크 홉스.
찬영 대신 단장직을 맡고 있는 그라스가 코를 킁킁거리며 안개를 바라보았다.
“느낌이 좋지 않군.”
“동감입니다.”
벡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 옆에 나란히 선 브루파가 창을 고쳐 쥐었다.
“탐색을 다녀오겠소.”
그라스가 고개를 저었다.
“허락할 수 없소. 혼자 움직이는 건 위험하오.”
그라스의 단호한 대답에 브루파는 더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브루파 또한 한 달여가 지나는 동안 충분히 라이크 홉스란 집단에 녹아든 것이다.
그건 추가로 합류한 다른 인원들도 동일했다.
현재 찬영 대신 책임자로 있는 그라스를 인정한 것이다.
그 때 로버트가 말했다.
“저는 성벽 위에 있지요. 궁수 지원이 필요할 겁니다.”
“그러시오. 허면 남은 인원 중 선별 인원이 나와 함께 움직이겠소. 베흐는 언제든 필요에 따라 안개를 밝힐 주술을 준비해 주시오. 그리고…….”
얼마 뒤 말을 마친 그라스는 민첩한 인원들을 중심으로 순찰 병력을 꾸리고 안개 속으로 진입했다.
무엇이 자신들을 기다릴지 모른 채.
* * *
저벅저벅.
그라스는 달리던 걸 멈추고 코를 킁킁거렸다.
이건 강가 근처에서 맡던 냄새가 아니다.
그보다 음습하고, 낯설며…….
‘위험한 냄새가 난다.’
서늘한 살기가 냄새에 섞여 난다는 게 옳을 것 같다.
“이 근처요.”
그라스가 창을 쥐며 주변을 경계했다.
동시에 각자 등을 맞대며 전투를 준비하는 인원들.
“숨을 죽이고 뭉쳐 있으시오.”
그라스는 몸을 낮춘 채 언제든 튀어나갈 자세를 취했다.
그때.
저벅저벅.
걸음 소리가 들렸다.
“벡, 홀랜드!”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벡과 홀랜드가 서로 투명한 줄을 팽팽하게 잡아 당겼다.
안개 속으로 걸어오며 반경 10m에 풀어 뒀던 것이다.
그 순간 베흐가 주술을 일으켰다.
그러자 줄에 새겨져 있던 주술이 빛을 일으켰다.
팽팽해진 줄을 따라 빠르게 회전하는 빛.
파파파팟!
이제 줄에 닿은 적은 움직일 때마다 빛을 흘리게 될 것이다.
빛을 주시하던 그라스의 육안에 적의 인영이 그제야 잡혔다.
“공격하라!”
그라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든 병력이 드러난 적의 그림자를 향해 공격을 쏟아부었다.
콰콰콰쾅!
번쩍거리는 안개 속.
하지만 공격을 멈춘 후에도 그라스의 위화감은 가시질 않았다.
‘통하지 않았어.’
적의 거친 호흡소리도 전혀 느껴지질 않는다.
여전히 살아 움직인다는 얘기.
그 순간, 등을 맞대고 있는 라이크 홉스 한가운데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 찾나?”
그라스가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돌린 순간.
보랏빛 검광이 그들을 일제히 덮쳤다.
콰콰콰!
이어서 그 검광은 놀랍게도 안개 속을 뚫은 거대한 칼이 되었다.
“저, 저건 대체…….”
같은 시각 성벽 위에 있던 로버트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성벽을 뒤덮은 보랏빛 검이 좌측에서부터 어마어마한 굉음을 일으키며 성벽을 통째로 분쇄하고 있었던 것이다.
* * *
“맙소사…….”
소식을 듣고 돌아온 찬영은 요드를 탄 채 빠르게 지상으로 활강했다.
요새는 완벽히 폐허가 되어 있었다.
생명의 기운은 조금도 느껴지는 게 없었고, 아무 것도 살아남은 것 같지 않았다.
오로지 보이는 건 쌓여 있는 시체 위에 홀로 검을 꽂고 앉아 있는 검은 망토의 남자.
-크오오!
분노한 찬영 대신 요드의 피어가 울려 퍼졌다.
그러자 메테우스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요드를 올려다보았다.
오히려 여유로운 눈빛.
“계속 용의 뒤에 숨어 있을 것이냐?”
쐐액!
대답 대신 찬영이 그의 앞에 떨어져 내렸다.
탁.
중력을 무시한 듯 굉음도 없이 가볍게 툭, 발을 박찬 찬영이 포스 알데바란의 헬멧을 해제하며 메테우스를 쳐다봤다.
‘저자는……?’
머리칼로 얼굴을 대부분 덮은 탓에 인상이 조금 달라졌지만, 분명히 기억 속에 있는 존재.
“메테우스.”
찬영은 확신했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살아 있었다니…….’
이어서 메테우스가 물었다.
“나를 아는 모양이구나.”
“지금 와서 그건 중요하지 않아. 대체 왜 이따위 짓을?”
찬영은 대답 대신 그의 의중을 물었다.
세상의 전부와 같았던 사랑하는 존재를 잃었다지만…….
“대체 왜!”
찬영의 머릿속에 라이크 홉스의 일원들이 떠올랐다.
놈이 그들을 모조리 죽인 것이다.
그들에겐 각자 이루어야 할 목표가 있었다.
절대 죽어서는 안 되는 이들이다.
“그것도 네깟 놈에게 죽어선 안 됐어.”
찬영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이 순간 가장 화가 나는 건…….
잊힌 별들의 일부라고 생각했던 열세 번째 별 중 두 개의 별이 놈의 것이라는 거다.
“언제 오나 기다렸다. 같은 열세 번째 별이여.”
메테우스가 히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