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8
238화
“왕세자 저하께서는 오딘의 경계와 닿고 있는 모든 구획에 연합군 창설을 공식적으로 선포할 생각이시네.”
레딩이 토르잔에서 돌아온 찬영에게 입을 뗐다.
찬영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A.U.와의 공동 전선을 꾸려 왕국의 기틀을 다시 다지고, 토르잔과의 연합군을 창설해 오딘을 경계한다?’
여기까지는 자신 역시 예상했기도 했고, 들은 바도 있었다.
하나 그다음 들려온 이야기는 꽤나 의외였다.
“그런 중,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시더군.”
“어떤 것인지요?”
“왕세자 저하께서는 요새에 실질적인 군대를 파견하실 생각이 없으시더군.”
“하긴, 그럴 만한 병력이 없지 않으십니까?”
“그렇지. 이제 막 회담 수순에 이른 토르잔과의 연합군이 창설이 되려면 시간도 꽤나 걸릴 테고 말이야. 하나 명분은 이미 두 왕국이 일치됐네.”
“두 왕국 모두 뉴 빌드란 공공적의 적이 있으니까요.”
“맞네. 공공의 적인 뉴 빌드를 상대로 연합군이 창설되었다는 명분. 그건 오딘 제국을 크게 흔들어놓을 것이 분명하지. 혼란스러운 오딘 제국의 상황으로 인해 그들의 백성이 대거 유입되리라 보고 계시네. 탈영병도 속출하게 되겠지.”
“하면, 그들을 모두…….”
“왕국의 품에 받아들이자는 것이지.”
대륙의 평화를 수호하는 명분.
그것이 오딘을 향한 칼날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오딘 제국민도 한둘이 아닐 텐데요. 밀려드는 그들을 감당하시려면 왕국도 많은 투자를 해야 할 겁니다.”
“그대의 조언이 맞네. 하나 왕국에는 이런 얘기가 있네. ‘백성보다 빛나는 것은 없다.’ 그들을 향한 지원은 어떤 식으로든 빛이 되어 돌아오지. 생존은 생산을 이끌고, 생산은 번영을 가져오니까.”
그 얘기를 듣고 나니 찬영도 레딩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그리고 왕국을 경영하는 이들의 안목에 새삼 놀랐다.
“아마 혹한의 제국에서 교류를 먼저 청하게 될 겁니다. 제국민의 분열을 막기 위해서라도…….”
“맞네, 그 때부터 상인 길드들이 활성화되고 무역로가 다시 예전처럼 열리겠지. 무역로가 열리면 용병 길드부터 로그 길드들이 제자리를 구축해 갈 것일세. 자네가 내게 부탁한 대로 탈파가 그 선두에 서겠지.”
찬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이곳에 도착해 레딩을 만난 이후 찬영은 빌로우가 부탁했던 일을 부탁했고, 그에 대한 협약서도 받았다.
이제 탈파 측에서 사인만 하면 마법 종이는 복제도, 태워지지도 않는 협약서가 된다.
“말씀하신 대로 탈파는 공작님께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나도 그 부분에는 이의가 없네. 왕국 내에선 브라이트와 공조할 만한 조직이 많지 않으니까. 아무튼, 일이 그렇게까지 진행한 후엔 요새 부근은 상업 도시로 성장하리라 보고 있네.”
“첫 기틀을 다질 때만 많은 투자가 들어가겠군요.”
“그런 셈이지. 자생할 계획이 생기고 자본도 생기니 말이야.”
“하지만…….”
“음?”
“어디까지나 계획대로 흘러갔을 때의 일이 아닌지요?”
“뭘 걱정하는지 알겠군. 카베이 때문인가?”
“비단 그가 아니더라도 오딘 제국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흉흉한 소문들로 인해 그들 사이에 반란이 일어난다면 교역이 불가능해지지 않겠습니까?”
“그 반대일세. 오히려 상대적으로 약자의 편에 선 일부 무리들이 우리와 손을 잡으려 들겠지.”
“하면…….”
“그래, 자네에게 부탁할 것이 생기겠지.”
찬영은 이미 일인 군단.
그가 나선다면 전황은 삽시간에 뒤바뀐다.
병력의 숫자 같은 것도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이게 무슨 의미인지 찬영이 모를 리 없었다.
“전쟁……!”
“맞네. 불가항력이 될 것이야. 하여 폐하께서도 명하셨네. 오늘부로 왕성을 지키고 있는 요드와 함께 움직이게. 자네가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아.”
레딩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 * *
레딩과의 독대 후 왕성에서 빌로우와 처음 만났던 주점으로 돌아온 찬영은 그곳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로레인에게 다가갔다.
“오래 걸렸네?”
두 발을 다른 의자에 올린 채 술을 들이켜고 있던 그녀가 자세를 바로하며 찬영에게 다른 술잔을 건넸다.
“한잔?”
“아뇨, 그보다…….”
찬영은 가지고 온 협약서를 그녀에게 건넸다.
협약서를 읽은 후 빌로우에게 전달한 그녀.
얼마 지나지 않아 빌로우가 크게 만족해하며 말했다.
“이만하면 성공적인 첫걸음인 것 같습니다. 슬슬 오딘 제국으로 발을 넓혀야겠군요.”
오딘 제국에도 탈파의 조직원들은 있다.
빌로우는 다시 그들과 연락해 볼 참이었다.
“그럼 나도 가야지. 그쪽은?”
로레인의 시선이 찬영을 향했다.
찬영이 그녀와 마주 앉으며 대답했다.
“라이크 홉스와 함께 왕국에 남아 있는 왕관 조각들을 수거해 토르잔 밀림 왕국에 가져다 놔야죠. 그리고…….”
찬영은 복원된 후 미니 맵을 통해 알게 된 한 가지를 떠올렸다.
‘마지막 퍼즐 조각.’
오딘 제국 영토 내에서 계속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는 왕관 조각.
대체 어떤 존재가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왕관의 마지막 퍼즐 조각과 다섯 번째 차원 다리로의 이동은 계속 이동 중인 이 존재에 달려 있었다.
“그 후엔 차원 다리로 이동하게 될 겁니다.”
찬영은 뒷말을 잇지 않았다.
이제 로레인은 탈파의 주인이지, 갓피스가 아니다.
‘위그드라실로의 여정은 그녀가 아닌 내 몫이니까.’
이윽고 말을 마친 찬영.
로레인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래, 그럼 인사할까? 각자 공사가 다망하잖아.”
그녀 말대로였다.
오딘이 복원된 후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늘어난 게 사실.
“그러시죠.”
“조만간 또 보자고.”
“네.”
항상 이런 얘기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와 다시 조우했다.
하지만 웬일인지 이번엔 그녀의 이야기에 이상하리만치 여운이 많이 남았다.
마치 오랫동안 못 보게 될 것처럼.
찬영이 잠시 묘한 기분에 휩싸인 사이.
로레인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빌로우와 함께 주점 밖으로 나섰다.
그렇게 시야에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찬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음 일정을 실행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수도엔 노을이 지며,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 * *
퓨어의 구호소 천막.
현재 그곳에 머물고 있던 판도라는 어느새 어둑해진 사위를 느끼며 한적한 나무 옆으로 향했다.
지잉.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둡던 그늘 사이로 하얀 빛과 함께 걸어 나오는 인영이 보였다.
“잘 있었어요?”
“네, 하지만 사명은 그렇지 못해 보이는군요.”
“느끼고 있었나 봅니다.”
“공유의 인장은 간접적인 체험을 가능케 해 주니까요.”
찬영은 사명의 제작 당시를 떠올리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하지만 변화가 시작됐어요.”
찬영은 자신이 겪었던 일을 얘기하며 당시 잠시 사라졌던 손을 올려보였다.
“순간 감각들이 사라져 가는 게 느꼈습니다. 하지만 기분 나쁜 고통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편안해지고 있었죠.”
판도라는 조용히 듣기만 했다.
뭔가를 생각하는지.
“……내 생각이 맞는다면, 사명은 육체를 잃어 가고 있을 겁니다.”
“대체 왜죠?”
“사명이 최근 큰 변화를 겪은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당시 아주 강인하고 거대한 힘이 공유의 인장을 통해 느껴졌으니까.”
“최근이라면……?”
찬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가 무슨 얘기를 하는 지 알 것 같다.
“육체가 재구성됐어요. 그런데…….”
로레인, 글로리를 포함해 많은 숫자의 갓피스들이 자신에게 힘을 내준 그날이 떠오른다.
“그게 제 육체가 사라지는 것과 어떻게 관련이 있다는 거죠?”
“확신할 순 없지만 지금 들은 현상은 데미아 님께서 소멸되시며 겪었던 현상과 같은 것 같습니다.”
“데미아 님이?”
“예, 데미아 님께서는 저를 창조하시고자 자신의 영혼을 팽창시키셨죠. 창조의 힘엔 그만한 권능이 필요했고, 권능의 힘을 늘리려면, 그 그릇이 커야 했으니까…….”
“그래서요?”
“육체는 끊임없이 초월하고 발전해 나갔지만, 데미아 님은 한 문제에 봉착하셨습니다. 그분께 이어받았던 기억을 통해 느낄 수 있죠. 그건…….”
판도라가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면서 데미아에게 주입된 기억들을 떠올렸다.
“차원의 일부가 되는 거였어요. 강대한 힘의 그릇이 되어 갈수록, 아주 본질적이고 원천적인 힘과 영혼이 동화되어 가는 것이었죠. 공기가 되듯 조금씩 본질의 스며들기 시작한 거예요. 그렇게 데미아 님께서는 결정하셔야 했죠.”
“창조의 힘을 얻고 소멸될 것이냐를……?”
“네.”
데미아의 말이 무조건 옳다고 확신할 만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으나, 무시할 만한 근거 또한 어디에도 없었다.
무엇보다 데미아와 자신의 딜레마가 흡사했다.
‘나 역시 룸이 쌓이고 강해지고 있는 만큼 육체가 사라져 가고 있어.’
자신 또한 룸을 육체라는 그릇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 말은 곧 룸의 힘이 쌓일수록 어쩌면…….
‘초월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
순간 손끝부터 등골까지 단번에 소름이 돋았다.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과거라면 이런 직감이 그저 기분에 의한 것이라 치부했겠지만, 많은 성장을 겪은 후의 예민해진 직감은 대개 맞아 떨어졌다.
‘예언처럼.’
창조와 소멸의 권능까지 얻은 상황에 이상할 것도 없다.
“데미아 님을 보고 느낀 대로라면 내가 데미아 님처럼 될 확률은 어느 정도입니까?”
“90% 이상이에요.”
찬영 스스로의 직감도 그렇다고 하고 판도라마저 90%의 확률로 자신이 룸을 통해 소멸되어 가고 있다고 말한다.
“선택을 해야겠군요.”
“맞아요. 사명 또한 데미아 님과 같은 선택지에 서게 된 것이죠.”
그때 찬영이 나직이 말했다.
“두렵네요.”
찬영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진심이 툭 나와 버렸다.
이미 무엇을 해야 할지 알기 때문이다.
지금껏 걸어온 길대로 올드 원과 싸워야 할 유일한 존재는 자신뿐.
하지만 그들을 상대하려면 끊임없이 룸을 성장시켜야 한다.
즉, 그들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 스스로의 죽음을 자처하는 길이라는 것.
이 순간 제이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이 희망이라며 모든 걸 내던지고 희생을 택한 그녀.
만약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 결정 내리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설사 그렇더라도 데미아 님이 판도라를 택했던 것처럼 나는 계속 올드 원에게 가야겠습니다.”
“후회할지도 몰라요.”
“압니다.”
“끊임없이 주변을 의심하게 되며 결국에는 외로워질 거예요.”
“하지만 그 순간에도 나는 내 의지대로 살아가겠죠.”
“당신은 정말……. 데미아 님과 많은 면이 닮았군요.”
판도라에게 있어 그건 정말 엄청난 칭찬이다.
자신의 창조자와 닮았다는 것이니까.
“아뇨, 아직 그분과 완벽히 닮진 못했어요. 언젠가 비슷해질지도 모르겠지만…….”
찬영은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받아들이고 나니 훨씬 편해졌어.’
고요하게 반짝이는 별들을 보니 마음이 가라앉는다.
이제 남은 문제는 하나.
‘올드 원 앞에 도착할 때까지 내가 버틸 수 있을까?’
찬영의 눈빛에 근심이 서렸다.
* * *
밤하늘에 별빛이 유독 많았다.
석조 건물 난간에 서서 그것을 올려다보던 검은 머리의 남자는 흩날리는 머리칼 사이로 눈을 빛냈다.
저벅저벅.
들려오는 발소리.
조용히 고개를 돌린 남자는 밤하늘을 닮은 칠흑 같은 망토를 온몸에 두른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오딘 제국 황제의 목을 베었습니다.”
방 안으로 걸어 들어온 4인의 검은 로브들이 입을 모아 얘기했다.
이어서 하나같이 남자의 앞에 엎드리며 고개를 숙인 그들.
하나 남자는 그들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들고 있던 클레이모어를 힐끗 내려다봤다.
뚝, 뚝.
계속 떨어지는 피.
이 방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그가 벤 자들은 무수히 많았다.
아니, 앞으로도 더 많을 것이다.
“너희들이 나를 따르는 것은 온전히 올드 원에 의해서겠지. 그들이 나를 따르라 명했으니. 아니 그렇느냐, 선지자들아.”
4인의 선지자들은 더욱 엎드릴 뿐.
어떤 반항도, 저항도 하지 않은 채 그의 말을 기다렸다.
“하긴 상관없겠지. 너희들이 따르든 말든 나는 내가 사랑했던 것을 증오한다. 그들의 비틀어지고 추악한 대의를 경멸하고, 그들이 가진 모든 법도를 파괴할 것이다.”
“하명만 내려 주시옵소서.”
경배하듯 말하는 그들을 지나친 남자.
그는 오딘 제국 황제의 침실을 빠져나가기 직전 말했다.
“보이는 모든 곳을 불태우고 파괴하라. 그것이 나, 메테우스가 너희들에게 내리는 유일한 명령이다.”
어두운 복도로 사라지는 메테우스의 눈동자에 보랏빛의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