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4
234화
하룬의 도끼가 반으로 쩍 갈라졌다.
그 사이로 하룬의 경악하는 얼굴이 찬영의 눈에 들어왔다.
‘제법인데…….’
방금 전 도끼를 베던 순간, 찬영은 손끝에 가벼운 반탄력을 느꼈다.
웬만한 상대가 아니고서는 룸으로 이뤄진 검과 부딪쳤을 때 이 정도 얼얼함을 주기 쉽지 않다.
‘그 말은 곧 그가 강한 상대라는 거겠지.’
찬영은 물러나지 않고 서 있는 하룬을 올려다보았다.
6m에 달하는 체구.
거인이 따로 없다.
“네놈은 누구냐?”
거친 호흡을 뱉으며 묻는 하룬에게 찬영은 손에 쥔 빛의 칼날을 금세 없앴다.
“대답은 나중에.”
그보다 중요한 게 있으니까…….
찬영의 시선 끝에 피를 흘리고 있는 서스가 보였다.
“이런 미친놈을 보았나!”
찬영의 대답에 흥분한 하룬은 도끼가 부서진 건 생각도 하지 않고 주먹을 휘둘러 왔다.
하지만 이미 파악은 끝났다.
‘심연의 눈.’
거친 숨결, 땀방울, 그의 스피릿이 타고 흐르는 혈관의 세세한 모든 것들.
숨겨진 약점이 이를 통해 드러난다.
“기세는 좋지만…….”
달려드는 그를 가볍게 좌우로 피해낸 후 힐끗 쳐다봤다.
완력은 강하나 투박한 움직임.
“이쯤하면 됐어.”
땅을 박찼다.
퍽!
찬영의 무릎이 순식간에 그의 턱에 닿았다.
“커헉!”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거구.
쿵!
능선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하룬과 함께 주변의 정적이 휘돈다.
잠깐의 침묵.
침묵 속에서 그들의 경악이 느껴진다.
하지만 오래 가지 않아 흥분한 자들이 전투에 가담하려 들 것이다.
그러니 말해야 한다.
주목 받은 지금이야말로 최적의 순간.
지잉! 서걱.
다시 일으킨 룸의 칼날로 땅을 베었다.
쿠쿵!
능선이 갈라지며 그들의 기세가 꺾인 게 느껴졌다.
쐐기를 박아야 한다.
“무지한 자들이여, 너희들의 여왕께서 무엇을 가져왔는지 직접 두 눈으로 보아라!”
‘당신 차례입니다, 여왕.’
찬영이 옆으로 비켜서자 여왕이 양손으로 정령왕의 불꽃을 능선 아래가 보이게 들어 올렸다.
번쩍!
그녀가 꺼내든 빛이 더피 부족 전사들을 밝히며 환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 순간 여왕의 두 눈동자가 별빛처럼 더 신비롭게 느껴진 건 빛의 후광 덕분이었을까?
아니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인내해 온 그녀 스스로 내는 빛이었을까?
‘어느 쪽이던 그녀의 뜻대로 평화가 오겠지.’
그 변화는 벌써 시작됐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려던 더피 부족의 전사들이 하나둘 무기를 손에서 내려놓고 있었으니까.
동시에 여왕의 앳되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빛의 한가운데서 의연히 울려 퍼졌다.
“정령왕의 사자는 신탁의 약조를 지켰으며, 정령왕께서 보낸 정령께서 불씨를 다시 지피셨으니 나 태초의 생명을 지키고자 태어난 달라이는 그대들에게 명한다. 그대들의 맹약을 지켜라!”
그녀의 위엄에 대항하는 전사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 순간 찬영이 ‘창조’의 권능을 통해 서스에게 룸을 사용했다.
빠르게 회복되기 시작한 서스.
빛의 한가운데에서 그는 마치 부활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된 것이요? 아니, 대체 그대는 누구요?”
회복된 서스가 상기된 눈빛으로 찬영과 여왕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정령왕의 사자입니다, 아버님.”
“그럼, 신탁이……!”
“예. 맞습니다.”
미소 짓는 여왕과 함께 서스가 다시 창을 집어 들었다.
“고맙습니다. 정령왕의 사자여. 이 은혜는…….”
“긴 얘기는 나중에 하시지요. 이쪽은 제 동료들입니다.”
찬영은 엷은 미소와 함께 같이 온 로레인, 빌로우와 나란히 섰다.
이윽고 정령왕의 불꽃이 휘감은 자리 한가운데, 여왕의 곁에 나란히 서게 된 네 사람.
잠시 기절했다가 일어난 하룬마저 흥분을 늦추고, 넋을 잃은 채 상황을 주시했다.
“정령왕의 불꽃이 부활했다고?”
반사적으로 읊조리는 하룬.
이제껏 여왕이 거짓말을 했다고 믿어 왔기에 지금의 상황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거였다.
자연히 하룬의 눈동자가 자신의 의심을 거들었던 샤먼에게로 향했다.
“보블, 보블은 어디 있느냐! 보블을 데려와라!”
“나를 찾는가?”
후드가 달린 누더기 로브를 입은 보블이 빛과 상반되는 그늘진 나무 아래에서 걸어 나왔다.
“그래, 너를 찾았다. 어서 해명해 보아라. 저 불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냐!”
턱이 반쯤 부서진 채 어눌하게 말하는 하룬.
그러자 보블이 그의 곁으로 다가와 나직이 물었다.
“너는 전쟁을 원했고, 나는 그에 맞는 명분을 주었지. 그런데 이제 와서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니 내게 그 원망을 늘어놓는 것이냐?”
“닥쳐라! 애초에 예언이랍시고 네놈이 떠들어 대지 않았느냐! 여왕이 정령왕의 불꽃을 소멸시킨 것이라고!”
“쯧쯧, 탐욕이 깃든 자는 믿고 싶은 것만 믿지.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네놈이 무엇을 원했는지가 중요하지.”
“너는 불꽃이 나에게만 향한다고 했다. 나를 속였던 게로구나!”
하룬은 화가 났다.
‘놈이 내 앞에 고개 숙이던 것이 불과 며칠 전이거늘!’
자신의 패색이 짙은 것을 느낀 놈이 태세를 바꾸려는 게 분명했다.
‘네놈은 여왕 앞에 다시 그 혀를 놀리겠지.’
흙먼지를 움켜쥐며 다시 몸을 일으키는 하룬.
“나를 얕잡아 본 대가를 치르게 해 주마.”
보블의 앞이 그늘진 그때였다.
지팡이를 쥔 보블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흘렀다.
“네놈이 착각하는 게 하나 있다.”
“뭐라?”
위협적으로 그르릉, 가래 끓는 소리를 내던 그에게 보블이 덧붙였다.
“상대를 얕잡아본 것은 네놈이니라!”
하룬은 대답 대신 주먹을 내리찍었다.
그 순간, 보블이 검은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의미 없이 그 사이를 뚫고 나간 주먹.
다시 형체를 일부 드러내며 허공으로 솟아오른 보블.
“크으으!”
치를 떠는 하룬에게 보블이 소리쳤다.
“너는 네 탐욕에 스스로 눈을 가린 것이다. 그 덕에 네 왕국은 쉽게 멸망하겠지.”
뿌드득.
하룬은 대답도 못하고 이만 갈았다.
틀린 말이 없었기에 반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보블이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평생 숲속에서 살아온 너희들을 매복할 곳이 많은 밀림 안에서 소탕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
보블은 하룬의 뒤에 스멀스멀 모여드는 더피 전사들을 우습다는 듯 쳐다봤다.
“고작 너희들로 나를 막겠다고? 우스운 일이다. 너희들이 모인다고 강해진 것 같으냐? 천만에! 애초부터 너희들을 한 데 모은 것은 나였느니라!”
웅성대는 전사들.
혼란에 휩싸인 그들을 향해 보블이 쐐기를 박았다.
“내분으로 자멸하는 꼴을 보고 싶었다만, 이것도 나쁘지 않겠지.”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야!”
“네놈들이 한데 모여 준 덕분에 평화롭게 흩어져 있을 때보다 훨씬 괴멸시키기가 쉬워졌다는 얘기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보블의 손끝에서 거미줄 같은 보랏빛 기운이 하나의 문을 생성했다.
콰지직!
그 문은 단숨에 땅 위에 뿌리를 박으며 5m의 타원형의 홀이 되었고 그 홀 안에서 괴성이 들려왔다.
-키에엑!
그 후 홀 안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하는 수십 개의 다리를 가진 각종 거미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두려워 마라, 종말은 이제 시작이니라.”
이어서 지축이 울렸다.
부족 전사들의 시선이 진동의 근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크아앙!
그러자 능선 아래에선 수백의 짐승들이 네 발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눈, 코, 입이 없는 무면無面의 맹수들.
그것들은 가시가 달린 두터운 꼬리를 좌우로 휘두르며 파도처럼 밀려드는 중이었다.
“몬스터다!”
“적이 나타났다!”
“매복이다, 부족민을 도와라!”
하나둘, 사태를 파악한 토르잔 왕국의 전사들이 혼란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하룬마저 자신의 부족민을 지키기에 급급해하며 밀려드는 몬스터에 대항했다.
“제기랄!! 보블, 네놈이 나를 속였구나!”
하룬은 이를 악물었다.
입안이 썼다.
여왕과 아즈렉 부족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며 끝끝내 부족에게 최악의 선택을 했다는 것이!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부족장님!”
목갑을 쥔 부족 전사가 다가와 말했다.
하룬이 눈을 부릅뜬 채 정령왕의 불꽃이 담긴 목갑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인정해야 한다.
“어서 이것을 여왕께 가져다드려라. 또 다른 정령왕의 불씨로 용서를 구하겠다고……!”
“예.”
고개를 끄덕인 부족 전사와 함께 하룬이 자신을 따르는 전사들을 향해 외쳤다.
“그가 여왕께 갈 수 있도록 길을 터라! 다가오는 몬스터들을 모두 베어 버려라!”
하룬의 고함 소리가 숲에 울려퍼졌고, 여왕의 곁에 있던 전사가 서스에게 물었다.
“그를 도와야 합니까?”
서스가 대답 대신 여왕을 바라봤다.
“어찌하면 될까요? 여왕이시여.”
여왕이 정령왕의 불꽃을 손에 든 채 대답했다.
“반역에 대한 대가를 후일 물을 것입니다. 하나 지금은 그와 그의 부족을 구하는 길이 왕국을 구하는 길일 것이니!”
그녀는 어느 때보다 강인해져 있었다.
“모든 부족은 더피 부족을 도와 그들과 합류하라! 정령왕의 가호가 우리와 함께할 것이니라!”
서스가 재차 외쳤다.
“합류하라!”
빠르게 능선을 타고 함께 싸우기 시작한 세 개 부족.
능선이 난전에 휩싸인 건 눈 깜짝할 새였다.
* * *
보블은 허공에 뜬 채 난전이 되어 버린 전투를 내려다보았다.
‘어리석긴…….’
네 발의 베르크는 쉴롭 무리의 하수인들이며, 거미를 닮은 지능 높은 쉴롭들은 베르크들을 지휘하며 자신의 권능 아래 있다.
오랜 세월을 리치로 살아오며 쉴롭을 제어하는 권능에 익숙해지려 노력해 왔다.
‘비로소 쥬크 님의 그릇에 가까워지고 있다.’
남아 있는 선지자들마저 올드원의 뜻에 따르고…….
영원히 죽지 않는 자신은 위대한 ‘그’의 행보와 함께 나가리라.
“너희들의 왕국은 그 아래 짓밟히게 될 것이다.”
보블이 선회해서 다시 하룬을 향해 날아갔다.
‘처음은 네놈의 목숨이니라.’
검은 연기와 함께 날아가던 그의 일부가 방금 전 들고 있던 지팡이로 구현됐다.
하나 단순한 지팡이가 아니었다.
그건 보라색 뿌리처럼 검은 연기와 이어져 보랏빛 칼날이 되어 있었다.
쐐액!
그대로 하룬을 내려찍은 보블.
주술로 몸을 강화시킨 하룬마저도 순간적인 보블의 스피드를 쫓지 못했다.
보랏빛 검이 눈앞에 드리워지고 나서야 헛바람을 들이키며 눈을 부릅뜬 하룬.
“허업!”
“늦었느니라!”
보블의 입가에 사이한 미소가 스쳤다.
하지만 보블을 지켜보는 건 하룬 뿐이 아니었다.
콰직!
어느새 하룬과 보랏빛 칼날 사이.
찬영이 일으킨 빛의 칼날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보블의 시선이 빛을 따라 찬영을 향했다.
“너는, 아까 그……?”
찬영은 대답 대신 빛의 칼날을 바꿔 잡았다.
쐐액!
칼날은 회전하며 하룬을 스쳐 갔다.
하룬의 검도 그에 맞섰다.
검로를 바꿔 찬영에게 쏟아지는 보랏빛 기류.
그러자 보랏빛 기류 또한 검로를 바꿔 찬영에게 쏟아졌다.
퍼퍼퍼펑!
눈 깜짝할 새 수백의 연격이 쏟아졌다.
찬영과 보블, 두 사람이 하룬을 벗어나 허공으로 치솟아오르며 빠른 공방전을 교환해 갔다.
그때마다 보랏빛 검광이 찬영의 눈앞을 수도 없이 스쳤다.
하지만 그럴수록 늘어나는 건 찬영의 상처가 아니었다.
서걱! 서걱!
수백의 보랏빛 검광을 수천의 빛의 칼날이 일제히 반으로 가르며 하룬에게 쏟아진 것이다.
휘잉.
누더기 로브가 나풀거리며 주변에 흩날렸다.
“쿨럭.”
어느 순간 검을 멈추고 난전 한가운데 착지한 보블.
쿵!
울컥, 피를 토해 낸 보블은 몰골만 봐도 여유롭지 못했다.
후드 달린 누더기 로브가 전부 찢겨져 반쯤 알몸이 됐고, 보라색 혈관을 품은 핏기 없는 얇은 피부 위로 온갖 상처들이 새겨졌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건 후드 안에 감춰져 있던 그의 얼굴.
‘저자는……?’
찬영의 눈에 잠시 놀람이 스쳤다.
‘그를 알아!’
그는 최근 이그를 그릇으로 담았던 6인의 선지자 중 한 사람이자, 베오 루퍼의 기억을 통해 보았던 그자다.
“너구나. 6인의 선지자.”
“네놈이 어찌 나를?”
“모를 리가, 일전에도 네 형제가 내 손에 죽었지. 알진 모르겠지만 신성 왕국을 향한 너희들의 계획은 진즉에 끝이 났다.”
“크큭, 영원히 사는 자 앞에서 죽음을 논하는 것이더냐? 애송이, 한참 멀었구나. 어차피 멸망은 정해진 것! 시간을 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지. 설사 사명 네놈이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들!”
“나의 존재를 알고 있었군.”
“모를 리가? 올드 원께서 네놈이 우릴 찾아올 것이라 했지.”
“올드 원이?”
“그래, 이곳의 봉인이 해제되던 날, 올드 원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빛을 머금은 사명에 맞서라.’ 실은 아까부터 네놈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 언제 나설까 궁금하던 차였다.”
“나 역시.”
“음?”
“네가 등장하기 전부터 네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심연의 눈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니까.
“한데 말이야, 네 다른 친구들은 어디 있지?”
실은 계속 기다렸다.
이를 테면…….
“말론 같은 자들 말이야.”
“제법 준비를 많이 했구나.”
“어디 있냐고 물었어.”
나직이 묻는 찬영에게 보블이 싸늘하게 웃었다.
“네놈이 지키고자 한 것에 있지.”
순간 찬영의 머릿속에 스친 건 단 하나.
‘향로! 설마……?’
전혀 생각 못한 전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