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3
233화
화려한 황금색 왕관을 쓰고, 나풀거리는 새하얀 실크 예복을 입은 구릿빛 피부의 소녀.
앳된 얼굴이었으나 무슨 일을 겪은 것인지 흑요석 같은 눈동자에는 나이답지 않은 차분함이 있었다.
‘달라이…….’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그때.
브루파와 전사들이 황급히 그녀를 둘러싸고 외쳤다.
“여왕이시여, 이곳은 위험합니다!”
“아뇨, 나는 괜찮습니다. 나를 해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해하러 오셨다면 정령께서 이분을 따르지 않았겠지요.”
달라이는 눈을 들어 태양빛을 가린 거대한 그림자, 타우린을 바라보았다.
타우린에게서 느껴지는 건 분명한 스피릿.
브루파 또한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다.
‘잊혔다는 정령이 그를 따르고 있는 거야.’
눈앞에 있는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
여기에 찬영이 한몫 더 거들었다.
“물론입니다.”
그는 곧바로 여왕 앞에 양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이곳으로 발을 디디기 전, 빌로우를 통해 여왕을 대할 예법을 배운 덕분이었다.
‘당신에게 존중을 표합니다.’
이건 찬영의 진심.
약자였다면 굴복의 의미.
하나 그는 삽시간에 결계를 해체할 만큼의 강자였기에, 경계하던 브루파의 눈빛 또한 크게 흔들렸다.
“창을 놓으세요. 브루파.”
“하나 여왕님!”
“정령왕께서 부르신 분입니다. 증표를 가지고 계실 테지요.”
찬영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증표라, 내 생각대로라면…….’
찬영은 제자리에서 포스 알데바란을 해체하며 입고 있는 상의를 오른쪽으로 벗어 내렸다.
그러자 열세 개의 T자의 I 끝이 한가운데 모여 있는 정령 표식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충분합니까?”
여왕은 대답 대신 브루파를 쳐다봤다.
이미 브루파는 놀란 후였다.
“말도 안 돼!”
‘오로지 신탁을 이어받은 여왕에게만 전해진다는 표식이 어떻게 그에게 있단 말인가?’
직접 보고도 믿기 힘든 상황에 브루파는 혼란스러워하는 눈치였다.
덕분에 처음과 같은 경계심은 사라진 기색이었다.
이를 느낀 찬영이 쐐기를 박았다.
“당신들의 전쟁을 원하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들 뜻대로 내분이 일어나선 안 돼요.”
“확실합니까?”
마음을 추스른 브루파가 굳은 표정으로 물어왔다.
“네, 막아야 합니다.”
“하지만…….”
어느새 창을 거둔 브루파가 대답 대신 신전을 바라보았다.
전쟁을 포기하게 하려면 더피 부족의 명분을 빼앗아야 한다.
‘정령왕의 불꽃.’
이를 되찾지 않게 되면 모든 걸 잃는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그렇게 브루파의 눈빛에 실망이 스칠 무렵.
“불꽃은 살릴 수 있으실 거예요. 신탁이 그리 말했습니다. 정령왕의 사자가 돌아오면 모든 게 제자리를 되찾을 것이라고…….”
찬영은 그녀의 얘기를 듣고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혹시 불꽃이 있던 장소가 신전 안입니까?”
“맞습니다.”
공주의 대답에 찬영의 눈이 이채가 흘렀다.
‘그럼……?’
예상이 얼추 맞았다.
‘빛의 왕관이 정령왕의 불꽃과 관련이 있었던 거야.’
자신이 정령왕의 표식을 지닌 것도, 미니 맵에 표시된 왕관 조각 위치가 여왕의 신전에 있는 것도, 어쩌면…….
‘잊힌 별들의 힘은 나를 통한다. 내가 그것들을 완성시키는 마지막 조각이라면?’
찬영이 여왕을 보며 말했다.
“여왕님, 제가 신전에 들어갈 수 있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러니…… 브루파.”
그녀의 부름에 브루파가 결국 손에 쥐고 있던 창을 땅에 박았다.
“여왕의 뜻대로 하소서.”
내분을 전쟁 전에 막으려면 더는 시간을 끌어선 안 된다는 걸 알기에 결단을 내린 것이다.
“자, 정령왕의 사자와 정령께서는 저를 따르시지요.”
여왕이 그제야 걸음을 옮겼다.
* * *
“여기가……!”
그렇게 일행을 두고 타우린과 함께 여왕의 뒤를 따라 신전의 꼭대기로 향한 찬영.
그의 눈에 황금으로 된 제단이 들어왔다.
고개를 좌우로 돌려봐도 온통 황금뿐.
하나 이를 더 돋보이게 하는 건 정밀한 세공 기술이었다.
새, 나무, 맹수 등 수많은 생명체들이 신전 꼭대기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밀림을 작게 구현해 놓은 것 같아.’
잠시 급한 상황을 잊을 만큼 신전의 위용에 완벽히 사로잡혀 버렸다.
그때 여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쪽입니다.”
“예.”
황금 조각상들을 지나 제단 꼭대기로 향하는 수십 개 계단을 바라보던 찬영은 계단이 시작되는 자리에 하얀 빛을 일으키고 있는 무리를 바라봤다.
여왕에게서도 느꼈지만 스피릿이란 건, 마나와는 다르고 오히려 룸과 가까운 힘인 것 같다.
“저들은……?”
“샤먼입니다. 고위 샤먼 라르를 중심으로 신전 주변으로 스피릿을 끌어 모으고 있지요. 머지않아 이 근방을 중심으로 ‘스피릿 소울’이 깨어날 것입니다.”
“스피릿 소울?”
“머지않아 보게 되실 거예요.”
여왕의 대답에 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지금은 그게 급한 게 아니지.
“다시 이쪽으로…….”
“예.”
그렇게 계단까지 지나 제단의 맨 꼭대기에 선 찬영은 새카만 회색 잿더미가 들어 있는 커다란 원반형 향로를 마주했다.
“이겁니까?”
“예, 정령왕의 불꽃은 늘 이곳에 함께했지요. 하나 멸망 직전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다시 살아 돌아왔을 때에도 불꽃은 재생되지 않았지요.”
“내분은 그때부터 시작됐군요.”
여왕은 쓰게 미소 지은 후 스피릿을 끌어모으고 있는 샤먼들을 내려다보았다.
“브루파도, 이곳에 있는 고위 샤먼도, 전장에 나가 있는 부족의 전사들도 모두 내 예언을 따라 믿고 움직였어요. 난 그들의 목숨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정령왕의 사자여.”
찬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다, 그녀가 자신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나 역시 그러니까.’
찬영은 향로 가까이 왔을 때 나타난 창을 쳐다봤다.
-남아 있는 잔재가 당신에게 응답합니다. 향로에 손을 대세요.
‘그래, 이걸 기다렸다.’
사실 로레인이 말렸던 처음 계획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뉴 빌드의 개입 탓에 훨씬 더 직접적이고, 여왕에게 무리하게 접근했지만…….’
수단은 동일하다.
어쨌든 그들의 내분을 막고 신뢰도를 높일 수 있는 건 오로지 내분을 막아 내는 것.
정령왕의 불꽃을 되살려 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현명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확신할 순 없었지만 해 볼 만했지.’
그렇게 움직일 이유는 충분했다.
‘내겐 정령계로부터 부여 받은 정령왕의 표식과 타우린 등 정령과 관계된 힘이 있으니까.’
여기에 빛의 왕관 조각이 하필 여왕의 신전을 가리킬 리가 없다는 생각이 보태졌다.
즉, 자신이 가진 잊힌 별들의 다양한 연결고리 등이 어쩌면 꺼진 정령왕의 불꽃을 되살릴 수 있는 근거가 될 거란 판단이 선거다.
‘그리고 지금.’
시스템은 그게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찬영은 지체 없이 손을 향로에 가져갔다.
이어서 향로와 손이 맞닿은 그 순간.
-정령왕의 표식이 가진 힘이 향로에 주입됩니다.
-파괴되었던 왕의 왕관 조각이 정령왕의 불꽃을 머금고 깨어납니다.
-창조의 권능을 개방하세요.
‘됐어!’
이건 모든 조각이 맞아떨어진 결과.
이제 남은 건 하나뿐이다.
‘나.’
“창조.”
룸을 근간으로 시작된 권능이 찬영의 손을 통해 향로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웅, 웅, 웅!
향로의 백색의 빛이 물들고.
-음모오오!
타우린이 뭔가에 화답하듯 울부짖었다.
-왕관 조각의 기틀을 다시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정령이 필요합니다. 타우린이 이에 화답합니다.
이미 향로에 룸을 주입하는 데 집중하는 찬영은 자신의 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했다.
저벅저벅.
향로를 향해 나아가는 타우린의 몸이 빛의 입자로 분열되며 흩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정령이시여…….”
여왕은 타우린의 희생에 또륵,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서서히 찬영의 곁에서 사라져 가는 타우린과 함께 눈이 부신 휘광이 모두를 감싸 안기 시작했다.
* * *
-정령왕의 향로가 살아 숨 쉽니다. 정령왕의 불꽃을 머금은 왕관 조각은 언제든 이동 가능합니다.
-남은 조각들을 향로 안에 주입하세요. 조각을 모두 주입하면 왕관이 향로 안에서 구현 됩니다.
-단, 조각들은 오로지 향로 안에서만 합성됩니다.
-구현된 왕관은 이동 가능한 물체가 되며 정령왕의 불꽃은 향로 안에 남게 됩니다.
빛이 사라진 직후, 찬영은 제일 먼저 이 문구를 읽었고 다시 향로 위에 일렁이는 불꽃을 보았다.
그리고 알게 됐다.
‘왕관과 정령왕의 불꽃은 처음부터 하나였던 거구나. 왕관이 사라지면서 정령왕의 불꽃도 힘을 잃었던 거였어. 하지만 이젠 다르지…….’
정령왕의 표식, 자신의 힘들이 향로의 힘을 불어넣어 기틀을 마련했다. 그러니 이제 정령왕의 불꽃을 머금은 왕관 조각들을 끌어다 향로 안에 넣기만 하면 되는 거다.
“이제 된 거야.”
찬영은 기뻐하며 여왕을 쳐다봤다.
한데 그때, 분명 여왕 곁에 있어야 할 타우린이 보이지 않았다.
“여왕님, 방금 여기 있던 그 정령은 어디로…….”
막 입을 뗀 찬영과 함께 여왕이 울음을 터트렸다.
그제야 위화감을 느낀 찬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앞에 뜬 다른 창들을 살피며 알게 됐다.
-왕관 조각의 기틀을 다시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정령이 필요합니다. 타우린이 이에 화답합니다.
‘맙소사.’
당연히 할 말을 잃을 수밖에.
매번 목숨의 구함을 받았던 녀석이 이렇게 갑자기 작별 인사도 없이 사라졌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이렇게 가 버렸다고?’
찬영은 괜히 애꿎은 향로만 쓸어내렸다.
마음속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기분이다.
‘네가 조각의 완성일 줄 전혀 몰랐는데…….’
어쩌면 타우린은 알면서도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내가 쉽게 보내지 못할 걸 알았을 테니까.’
한동안 고개를 숙이던 찬영이 이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건 녀석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얻은 기회…….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계속 움직여야 했고 토르잔의 내분을 막아내야만 했다.
타우린도 그러길 원했을 테니까.
“여왕님.”
“예, 정령왕의 사자이시여.”
그녀의 목소리에 울먹임이 가득했다.
모든 걸 지켜보았기에 진심으로 타우린의 희생에 고마워했고 슬퍼하고 있는 거다.
“정령께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까요?”
“내분을 막는 게 조금이나마 그 뜻에 보답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겠지요.”
“예, 그러니 굳건해지세요. 불꽃이 돌아온 것을 다시 알리고 토르잔의 여왕임을 알리세요. 제가 뒤에 있겠습니다.”
굳은 표정의 찬영은 지체 없이 정령왕의 불꽃으로 일렁대는 왕관 조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제 때가 왔다.
적이 된 그들을 내분으로부터 구할……!
* * *
“커헉……!”
서스는 피를 토하며 땅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계속 피를 토할 시간은 없다.
콰직!
떨어지는 도끼 피할 시간도 없으니까.
한 바퀴 더 굴러 도끼를 피해낸 서스는 구르는 속도 그대로 훌쩍 뛰어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날렵했던 전과 달리 한 발이 미끄러지며 또 다시 바닥을 굴렀다.
그 모습을 하룬이 비웃었다.
“크하하! 볼썽사납구나. 하얀 늑대여! 하긴, 집단전이나 할 줄 아는 너희 족속들이 전사다운 싸움을 하려니 얼마나 힘이 들겠느냐!”
하지만 여유 있는 말투와 달리 하룬도 썩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애써 멀쩡한 척할 뿐이다.
스피릿으로 몸을 강화해 몸을 두 배로 부풀리고 견고히 만든 탓으로 육체, 정신의 피로는 굉장했고, 서스의 공격으로 인한 타격이 조금씩 육체 피로를 가중시켰다.
힘줄만 가득하던 온몸에 거미줄 같이 미세한 선혈들이 가득한 것만 봐도 그랬다.
“하룬……. 그대도 멀쩡하진 않을 터인데?”
비틀거리며 일어난 서스는 다시 창을 고쳐 쥐었다. 사실 이젠 창을 제대로 쥘 형편도 못 되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끝만 봐도 그렇다.
‘이제 한계다.’
스피릿을 팔에 직접적으로 강화시키진 않지만, 무기에 주입하려면 어쩔 수 없이 팔을 스피릿이 지나는 그릇으로 써야 한다.
여기에 이동 속도를 상승시키기 위해 두 다리를 주술로 강화시켰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동속도, 근력 등 뭐 하나 강화되지 않은 게 없는 성난 하룬을 피해 내려면 자신 역시 모든 걸 걸었어야 했다.
“이제, 끝내자.”
씩씩대며 다가오는 하룬을 보며 서스는 입안에 고인 피를 툭 뱉으며 이를 악물었다.
“오냐.”
헝클어진 머리칼을 휘날리며 서스가 다시 땅을 박찼다.
쿵! 쿵!
이어서 그의 도끼가 날아온다.
억지로 고개를 젖혀 피해 내며 미끄러졌다.
“죽어라, 하룬!”
창으로 놈의 가슴을 찌르고 베고 또 찌른다.
하지만 강화된 육체엔 선혈만 흐를 뿐, 놈은 여전히 건재하다.
쐐액!
이번에 정수리로 날아오는 도끼.
황급히 옆으로 굴렀다.
콰직!
구름을 멈춘 그 때 볼을 지나쳐 땅을 깊이 헤집는 도끼.
조금이라도 멈칫했다면 땅이 아니라 머리가 짓눌렸을 것이다.
“크아아!”
그로 인해 얻은 잠깐의 틈.
서스는 놓치지 않고 사력을 다해 창을 뻗었다.
푸욱!
기어코, 하룬의 강화 신체를 뚫고 들어가는 그의 창.
“끄아악!”
하룬의 눈이 뒤집어지며 그의 거구가 덜컹, 흔들렸다.
하나 그는 검은 소의 부족장.
어떤 부족민보다 용맹한 존재였다.
“이놈!”
완고한 의지로 쓰러지던 몸의 균형을 다잡은 그가 단숨에 서스의 창을 도끼로 부러트렸다.
콰직!
이어서 넘어져 있는 서스의 눈앞으로 떨어지는 도끼날.
쐐애액!
서스는 눈을 감았다.
더는 반항할 힘이 없었다.
‘딸아…….’
그저 한스러운 운명을 혼자 견딜 그녀가 안타까울 뿐.
“아버지…….”
그 순간 그녀의 환청이 들려왔다.
진짜일 리 없으나 외롭게 가는 길, 무척 위로가 됐다.
서스는 씩 웃었다.
‘그래, 여기 있다.’
번쩍!
빛이 그의 눈을 뒤덮은 건 바로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