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자동보상-231화 (231/248)

# 231

231화

* * *

왕국의 땅을 지나 남동쪽으로 가다 보면 접경지대가 나온다.

‘무샤프.’

울창한 수림으로 향하기 직전의 마을이다.

이곳 토착민의 조상들은 대대로 떠돌이었다.

토르잔 세 개 부족의 부족민과 부족민이 아닌 이방인들 사이에 대대로 이어진 후예들.

하나 이들은 자신들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며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 왔다.

3개국에 조금씩 발을 걸친 접경 지역에 터전을 잡고, 폐쇄적인 토르잔 부족과 2개국 사이의 중개 역할을 해 온 것이다.

토르잔은 이들을 하찮다 무시하면서도 쉽게 문화가 통하는 그들을 통해서 외부 세계를 접하는 게 가장 쉬운 길이었기에 이를 적당한 선에서 용인해 왔던 것이다.

“그래, 그런 곳이었지. 여기가…….”

로레인은 할 말을 잃었다.

그녀의 눈빛에도 긴장이 서렸다.

그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일행을 접경지대로 이끈 빌로우 역시 당혹스러워하는 눈빛을 띄었다.

옛 친구를 잃은 슬픔과 함께 지금의 상황이 믿기질 않았다.

“어째서 무샤프까지?”

무샤프는 엄연히 3개국 사이의 중간 지대.

이곳에서 3개국은 쉽게 무력행사를 하지 않는다.

자칫 3개국 전쟁의 신호탄이 될 수 있으니까.

“한데 이건…….”

완벽히 정리당했다.

무샤프의 야시장이 세워졌던 광장과 움막들.

추운 지방인 오딘 제국의 폐쇄된 석조 건물.

상대적으로 따뜻해 개방된 아치형의 구조물이 있는 라이크 왕국의 건물들까지 전부 다…….

3개국의 건물이 뒤섞여 있던 중간 지대가 완벽히 폐허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괜찮으세요?”

염려하는 찬영에게 빌로우가 쓰게 웃었다.

“이 업계는 늘 목에 칼을 대고 삽니다. 그동안 전쟁 통에 죽은 동료는 셀 수 없이 많죠. 내가 그중 하나가 될 수도 있고……. 그러니 매번 심력 소모를 했다간 먼저 지칩니다. 스스로 마음 정리를 잘 해야 하죠, 매번.”

“알겠습니다.”

“신경 써 줘서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한데…….”

찬영이 별일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폐허나 다름없는 광경을 보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빌로우는 고개를 저었다.

“허어, 글쎄요. 접경지대가 쿠스코 지방의 더피 부족과 인접해 있긴 하나 더피 부족이 했다고 저질렀다고 생각하기에는 그들이 잃는 게 너무 많습니다.”

“하긴, 몬스터 출몰로 인해 그들 역시 폐쇄보단 다른 나라와 손을 잡길 바랐을 텐데요.”

“그렇지요. 더구나 더피 부족은 남은 아즈렉 부족과 빌라도 부족의 연합을 상대해야 합니다. 굳이 무샤프를 적을 둘 필요가 없지요.”

찬영은 빌로우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야.’

더피 부족일 가능성은 여러모로 적다.

“하면 여왕을 지키는 두 개 부족이 그럴 일은요?”

“적습니다. 그들도 최대한 내전을 빠르게 종결하고 싶을 터. 서로 으르렁거리는 가운데 굳이 무샤프를 건드려서 적들을 더 늘릴 필요는 없을 겁니다. 더구나 무샤프를 괜히 건드렸다가는…….”

“무샤프의 중개인들이 더피와 손을 잡을 확률이 높아지겠죠. 그건 곧 내전의 성공 확률을 높이는 것이었을 테고요.”

“맞습니다.”

고개를 까딱인 빌로우와 함께 찬영의 생각은 하나로 귀결됐다.

‘뉴 빌드.’

여러 가지 정황을 따졌을 때, 이 참사의 범인은 그들일 확률이 높아지고 있다.

“말론의 흔적일 지도 모릅니다.”

“예, 그럴 확률이 가장 높을 것 같기도 합니다.”

빌로우가 입을 떼기 무섭게 앞서가던 로레인이 외쳤다.

“여기 생존자가 있어!!”

그 얘기를 듣자마자 찬영과 빌로우가 동시에 눈을 빛냈다.

* * *

“쿨럭..”

피를 한 움큼 토해낸 남자.

그는 찬영 일행을 앞에 두고 고통스러워하는 중이었다.

찬영은 룸을 사용해 빠르게 그를 치유했다.

창조의 효과 중 하나.

꽤나 많은 룸을 쏟긴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상인의 하얗게 질린 안색이 본래의 혈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정신이 듭니까?”

“예, 그런데 도대체 어, 어떻게 된 겁니까?”

튜닉 셔츠 아래 가죽으로 된 붉은 스커트를 입고 있는 그는 헝클어진 장발 사이로 찬영을 바라보았다.

죽어 가고 있다가 살아난 게 신기한지 그는 얼떨떨한 눈빛이었다.

찬영이 간략히 설명을 마치자 그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은혜를 갚겠다고 했고, 찬영은 은혜 대신 묻는 것에 대답해 달라 부탁했다.

“여기가 어째서 이렇게 된 겁니까?”

“그건…….”

남자가 폐허가 되던 날을 떠올리며 고통스럽게 인상을 찌푸렸다.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참혹했던 그날.

“저는 부파라고 합니다. 과일 운송을 주로 도맡는 ‘이르샤’라는 상단의 주인이었죠.”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 때부터였다.

“보랏빛의 눈을 가진 자가 몬스터들을 이끌고 몰려왔고, 모두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샤프의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죽여 댔습니다. 그리고…….”

꿀꺽, 마른침을 삼킨 부파는 숨어든 채 지켜봤던 광경들을 하나둘 떠올렸다.

“죽었던 자들이 해골이 되어 일어났습니다. 그것들이 칼을 들고 산 것들을 다시 죽여 댔죠.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넘나드는 주술이 틀림없었습니다!”

“주술?”

“예! 악한 정령들이 활개 치는 게 틀림없습니다! 악한 샤먼들의 힘이라고요!”

눈을 부릅뜬 부파는 잘게 몸을 떨었다.

두려워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 덕에 찬영은 겁먹은 그를 다독인 뒤에야 잠시 그에게 떨어져 나왔다.

로레인과 빌로우가 그 뒤를 쫓아 다가왔다.

“분명히 뉴 빌드에요.”

찬영이 말했다.

로레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동의해. 보랏빛이란 얘기를 들었을 때 차원의 돌을 떠올렸으니까.”

“예, 그들이 말하는 주술도 암흑 마력을 가리키는 것 같고요.”

그러자 빌로우가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음, 그런 것 같군요. 한데 아까 들어 보니 시체가 일어났다고 했지요?”

“네, 놀랄 일도 아니죠.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십니까?”

“아, 이제껏 놈들을 상대하며 느껴온 게 있어서 그럽니다.”

“어떤……?”

“놈들의 밑바탕에 주술이 있는 것 같아서 말이지요. 아까 샤먼이란 단어를 들으셨지요?”

“네, 들었습니다.”

“샤먼이란 주술의 대가들을 뜻하지요. 한데, 샤먼들은 대개 수많은 정령들을 신봉합니다. 풀, 나무, 동물 살아 있는 것에서 힘을 이끌어 내죠. 마법과는 조금 다릅니다. 좀 더 원초적이랄까……?”

“그렇군요. 한데 그게 어째서 뉴 빌드의 밑바탕이 되었다는 건지요?”

“그들 역시 차원의 돌을 신봉하니까요. 정확히는 돌을 가져다준 신을 믿는 것이지만 어쨌든 돌이 가진 힘을 빌려 쓰고 그 힘을 활용하지 않습니까? 장담컨대 놈들의 밑바탕엔 추악한 샤먼들이 있을 겁니다.”

찬영은 빌로우의 얘기를 듣고 보니 일리가 있다 싶었다.

“만약 그렇다면 뉴 빌드는 토르잔의 샤먼들이 가진 여러 자산들을 자신들의 것으로 쉽게 사용할 수도 있겠군요.”

“예, 그들 역시 샤먼이니 같은 샤먼들의 유산을 쉽게 활용해 갈 수도 있겠지요. 새로운 군대를 양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만약 그렇다면 지체할 시간이 없어요.”

결단을 내리려는 찬영을 빌로우가 막아섰다.

“잠깐, 그럼 움직이기 전에 몇 가지 물어볼 게 더 있습니다. 두 분 모두 제게 잠시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찬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로레인이 빙긋이 미소 지었다.

“얼마든지 기다리죠.”

* * *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노을이 지기 시작했고, 부파를 떠나보낸 빌로우가 일행에게 돌아왔다.

찬영이 다가온 빌로우에게 물었다.

“그는 어디로 갑니까?”

“당분간 중간 지대에서 벗어나 왕국으로 피신해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 후에 제가 채용하기로 했지요.”

“채용?”

로레인의 반문에 빌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물론 그는 상단에 채용된다고 생각할 뿐 탈파인지는 모르겠지만…….”

“잘하셨어요. 그렇지 않아도 갈 곳 잃은 사람 같던데.”

로레인은 한동안 터덜터덜 사라져 가는 부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빌로우를 쳐다봤다.

“어쨌든, 뭘 물어보셨어요?”

“여러 가지를 물어봤습니다. 상인이라 적어도 최근의 밀림 왕국 상황을 최근까지 예민하게 주시했을 거라 생각해서 말이지요.”

“그래서요?”

로레인의 재촉에 빌로우가 말했다.

“예상대로였습니다. 그는 중요한 소식 하나를 말해 주더군요. 최근 더피 부족을 견제하기 위해 아즈렉에서 직접 무샤프의 토착민들을 찾아왔다고 하더군요.”

“아즈렉이라면…….”

로레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찬영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을 보고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와 같은 생각이겠지.’

그도 그럴 게 아즈렉은 여왕의 군대다. 그들이 찾아왔다는 건 자존심을 굽혔다는 것이며…….

“여왕을 필두로 한 부족들이 더피에게 위협을 느낄 만큼 약화된 모양이네요. 그럴 만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찬영은 빌로우가 부파를 통해 뭔가 알아낸 바가 있는 것 같아 물었다.

“있더군요. 그 사이 토르잔 또한 대대적인 몬스터 출몰에 큰일을 겪은 것 같습니다. 많은 부족민을 잃었고 자칫 정령왕의 불꽃이 남겨진 잿더미가 있는 신전마저 무너질 뻔했다더군요.”

“좋지 않은 상황이네요.”

“예, 한데 이 와중에 이곳을 휩쓸고 지나간 세력이 그 내전에 끼어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공멸.”

찬영이 나직이 말했다.

‘토르잔 왕국이 그들 뜻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게 되겠지.’

그럴 일은 없어야 하고, 막아내야만 한다.

상황의 시급함을 느낀 빌로우가 찬영에게 물었다.

“이제 어쩌시겠습니까?”

이 일행의 책임자는 찬영, 로레인도 자연히 찬영을 쳐다봤다.

“움직여야겠죠.”

찬영의 대답은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

사실 늘 최악의 상황은 염두에 두어 왔다.

‘그중 하나일 뿐이야. 아니, 오히려…….’

곰곰이 생각하던 찬영이 일행에게 말했다.

“우리에게 기회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폐쇄적인 만큼 예의 없는 침입자를 극도로 증오할 테니까요.”

“적의 적은 아군이다?”

빙그레 미소 짓는 로레인을 향해 찬영이 마주 웃었다.

“예, 그겁니다.”

“좋은 생각 같군요.”

동시에 빌로우가 자신이 챙겨온 기다란 천을 풀어헤쳤다.

그러자 드러나는 검은빛의 활.

“오랜만에 쓰겠군요.”

탄력 있고 매끈한 검은색 장궁은 날카롭게 빛나는 활시위를 자랑하며 나타났다.

로레인도 자신의 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이러다 머리 다 새겠네.”

이미 수명을 담보로 힘을 사용하는 로레인의 머리 일부는 새하얀 백발이 되어 있었다.

찬영은 그게 안쓰러웠다.

그 눈길을 느낀 건지.

“그렇게 쳐다보지 마, 내가 선택한 일이니까. 출발이나 하자고.”

그녀다운 대답이다 싶어 쓴웃음을 지은 후, 룸을 일으켰다.

장소는 지도상 아즈렉 부족의 한가운데, 여왕의 신전이 있다는 스피릿 마운틴이다.

* * *

“브루파! 여왕님을 모셔라!”

“예, 부족장!”

머리 위에 회색 늑대 머리를 가면처럼 뒤집어 쓴 브루파는 용맹스러운 아즈렉의 전사였다.

아즈렉 부족장인 서스는 뛰어가는 브루파를 보며 창을 꽉 쥐었다.

처음엔 불꽃이 사라지고, 다음은 내분이 일어났다.

대를 이어온 여왕을 중심으로 매번 형제의 결의를 맺어왔던 더피 부족이 등을 돌렸다.

이유?

불꽃이 사라진 게 여왕의 탓이라며 더는 여왕으로 떠받들 수 없다는 게 명분이긴 했다.

그래, 이해한다. 혼란스럽겠지.

하지만 정령왕의 불꽃은 다시 살아 돌아올 것이다…….

여왕께선 분명 그리 예언하셨다.

‘그걸 못 기다릴 만큼 형제의 세월이 헛된 것이었던가!’

뿌드득!

이를 간 서스는 부족장인 걸 확인하는 백색의 늑대 가면을 뒤집어썼다.

조금 있으면, 산의 중턱에 자리 잡고 있던 전사들이 여왕의 신전이 있는 정령왕의 신전까지 퇴각해 올 것이다.

‘라르…….’

서스는 신전 안에서 여왕과 함께 있을 아즈렉 부족 최고의 샤먼을 떠올렸다.

적어도 정령왕의 신전은 그녀와 그녀를 따르는 부족의 샤먼들이 지켜 줄 것이다.

그러기 위해 방어 주술 결계를 오랜 시간 동안 걸쳐 사방에 펼쳤다.

‘저 결계만 완성된다면…….’

전사들이 없이도 신전은 수호되리라.

‘하나 결계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버텨내야 하느니라.’

서스는 굳은 입술로 걸음을 내딛었다.

산을 타고 넘어오는 더피는 검은 소의 부족, 어떤 부족보다 강인하고 용맹하며 힘이 억세다.

특히 그들이 자랑하는 몸에 주입하는 주술은 그들의 완력을 더 강인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결계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버텨 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아즈렉 부족의 소임이다.’

창과 방패를 들고 뛰기 시작한 서스의 뒤로 아즈렉 부족의 전사들이 빠르게 따라붙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