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
230화
“왜 놀라?”
마주 앉아 있는 그녀를 보며 찬영은 눈을 끔뻑였다.
“로레인 씨는…….”
찬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의자를 끌고 와 털썩 앉았다.
“탈파 일은 충분히 봤어. 크게 손 볼 일은 없더라고, 원로들께서 워낙 탈파 재건에 열을 올리고 계신 덕분에.”
“그랬군요. 저는 이제껏 로일 성으로 가신 줄 알았습니다.”
“아냐, 로일 성만큼이나 수도에서도 음지는 많아. 탈파가 들어갈 자리가 많지. 아무튼…….”
‘짝’ 소리를 내며 손뼉을 친 그녀가 화제를 돌렸다.
“레딩 공작님께서 내게 따로 청을 하셨어. 그쪽과 함께 가 달라고…….”
“저도 조금 놀랐습니다. 로레인 씨가 토르잔 왕국에 대해 일부 해박한 건 알고 있었지만.”
“전문가 수준의 지식인 줄은 몰랐다고?”
“예.”
“솔직해서 좋네, 어느 정도는 틀린 얘기도 아니야. 준전문가라고 보면 돼. 어릴 때 아버지 뒤를 따라 우거진 숲의 밀림을 가 보기도 했지.”
“그러셨군요.”
“응, 하지만 준전문가임에도 불구하고 라이크 홉스 중엔 나같이 걸출한 인물이 없나 보더라고.”
“로레인 씨 같은 분이 흔하진 않으니까요.”
맞장구쳐 주는 찬영에게 로레인이 인상을 썼다.
“말에 뼈가 있다?”
“설마요.”
“기분 탓이겠지?”
씩 웃은 로레인이 찬영에게 물었다.
“그래서 계획은 뭐야?”
“계획이요?”
“응.”
“미친 소리 같겠지만…….”
“하루이틀 아니라서 괜찮아.”
“그럼 잘 됐네요. 편히 얘기할 수 있겠어요.”
그리 말한 찬영이 미소 지으며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러자마자 들려온 로레인의 목소리.
“미친……!”
로레인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찬영에게 더 해 보라며 손짓했다.
“아, 미안. 계속 해. 조금 놀랐을 뿐이야.”
하지만 얘기가 진행될수록 로레인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 * *
“……그래서 영감님께 부탁드리는 겁니다. 준전문가로는 부족할 것 같거든요. 전문가인 영감님이 필요해요.”
로레인은 찬영을 데리고 수도의 주점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빌로우를 만났다.
만남이 주선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빌로우는 늘 로레인과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그렇군요, 허허.”
조용히 수염을 쓰다듬으며 부리부리한 눈을 굴리는 빌로우.
그의 눈빛에는 고민의 흔적이 있어 보였다.
“함께 가는 것은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안 그러냐?”
큰 손을 움직여 제리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쓰다듬는 빌로우.
“아, 진짜 또 왜 그러십니까!”
옆에 앉아 있던 제리가 흰자위를 보이며 그를 째려봤다.
“어쭈?”
금방 한 마디에 제압되긴 했지만.
“제가 염려되는 부분은 길드장께서 함께 가시는 것입니다.”
“음…….”
팔짱을 낀 로레인은 빌로우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금방 눈치챘다.
“그러실 줄 알았어요. 이거 봐, 길드장이 된 이후로 신생아라도 된 것 같다니까. 이쯤 되면 과잉보호야.”
로레인이 찬영에게 투덜거리며 속내를 빌로우가 단호히 말했다.
“길드장님을 보호하는 것이 제 소명이니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껄껄.”
“하지만 길드장의 권한을 사용해서라도 갈 거예요. 영감님.”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일 수도 있을 것 같군요. 여러모로.”
“의외로 긍정적인 반응이시네요?”
“그럴 만한 분을 모셔오지 않으셨습니까?”
빌로우의 시선은 찬영에게 꽂혀 있었다.
관찰하며 흥미를 느끼는 건지 묘한 미소를 보인 그는 본격적으로 찬영에게 질문을 던졌다.
“백작님에 관한 대부분의 이야기는 길드장님께 들어 알고 있으니 생략하고, 다른 걸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뭐든 괜찮습니다. 좀 더 편히 말씀하셔도 되고요.”
“아닙니다. 이것이 편합니다.”
단호하게 선을 긋는 빌로우에게 찬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질문을 기다렸다.
“탈파는 은혜를 잊지 않습니다. 하나 언제까지고 무료로 봉사할 수 있는 일만은 아닙니다. 대륙을 위한 일이라 하더라도…….”
“예.”
“탈파에도 투자가 필요합니다. 이번 일이 끝난 이후 길드장님께서 하시게 될 일을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이를 테면, 레딩 공작님을 설득하는 일입니까?”
레딩 공작은 왕국의 비공식적인 실무를 도맡는다.
탈파와 브라이트 사이의 공생이 이뤄진다면…….
둘 모두 재건은 금방 이룩될 것이다.
“좀 더 긍정적인 답변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이겠군요.”
“예, 그렇습니다. 이런 말씀 죄송스러우나 아무래도 레딩 공작님과 특별한 관계이시지 않으십니까?”
“영감님…… 그쯤 해 둬요.”
로레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찬영에게 제이나에 관한 이야기만큼 예민한 건 없다.
빌로우는 그걸 건드리고 있었다.
이를 모를 리 없는 빌로우도 금방 고개를 숙였다.
“결례를 범한 걸 사과드리겠습니다.”
“예, 그러셔야죠.”
찬영의 대답에 냉각되는 분위기.
제리는 힐끗 눈치를 봤고 로레인 또한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그 순간 찬영의 말이 이어졌다.
“우선 말씀하신 부분은 승낙하겠습니다. 단, 이 일은 빚으로 남겨 두겠습니다. 언젠가 제가 부탁드리게 될 일에 대한 빚으로요.”
“껄껄.”
빌로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영리하구만.’
그는 찬영이 예민한 부분을 일부러 떠보았다.
의외로 이런 감정적인 칼날은 밑바닥을 쉽게 드러나게 한다.
‘진가도 드러나게 하지.’
찬영은 평온을 유지할 뿐 아니라 이 모든 게 자신의 시험이라는 걸 금세 파악한 것 같다.
‘그뿐 아니라 내 말을 반박할 여지까지 남겨 뒀구려.’
찬영이 말한 일종의 빚, 그건 그간의 은혜로 무작정 탈파를 이용할 수만은 없다는 자신의 입을 잠시 틀어막은 것과 다름없었다.
‘그래, 암. 이쯤 되어야 대륙을 뒤흔든 사내지.’
생각을 정리한 빌로우가 찬영에게 말했다.
“용서를 조금이나마 구할 의미로 술 한잔 사겠습니다.”
“한잔 가지고 되시겠습니까?”
찬영의 넉살에 빌로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후회하실 텐데요!”
* * *
“으으…….”
빌로우가 배를 매만졌다.
의자에 등을 기댄 그에게 채비를 마치고 주점으로 돌아온 로레인이 말했다.
“영감님, 조금 있으면 그가 이리로 올 거예요. 일어나요.”
“버, 벌써 말입니까?”
빌로우는 반개한 눈으로 밖을 쳐다봤다.
기절한 게 새벽, 벌써 대낮이다.
“네, 그러기에 적당히 드시지 그러셨어요.”
“하아…….”
빌로우는 큰 손으로 자기 이마를 덮었다.
평생 이렇게 많이 마신 술은 처음이다.
자신 앞에서 웃는 낯으로 한 잔도 거르지 않은 자도 처음이고.
“무슨 술을 그렇게 잘 마신답니까?”
로레인 뒤에서 걸어 나온 제리가 얄밉게 덧붙였다.
“그 양반이 보통 사람입니까? 듣자하니 몸의 절반은 신이라는 얘기도 있던데요?”
“그래, 네 말도 오늘은 틀린 것 같진 않구나.”
“웬일로 제 말에 동의를 다 하십니까?”
빌로우가 시체처럼 자기 방으로 돌아가며 말했다.
“그냥 신이 아니라 주신인 것 같거든. 어이구, 삭신이야…….”
터덜터덜 걸음을 떼는 빌로우를 보며 로레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 * *
찬영이 다시 돌아왔을 때 로레인과 빌로우는 자리에 앉아 따끈한 스프로 숙취를 해소하는 중이었다.
“주점에서 요리도 해 주나 봅니다.”
곁에 앉으며 묻는 찬영에게 로레인이 대답했다.
“밤엔 주점이지만 낮에는 식사도 제공해 주니까. 그나저나 아주 멀쩡하네?”
“나쁘진 않아요.”
찬영은 스프에 머리를 박듯이 마시고 있는 빌로우를 보며 피식 웃은 뒤 말을 이었다.
“말씀하신 대로 우선 동태부터 확인해야겠네요. 그럼 지도들로 짚어 주셨던 곳으로 이동하면 될까요?”
그사이 스프를 마시듯 꿀꺽 삼켜 버린 빌로우가 고개를 들면서 대답했다.
“그러시지요. 하나 그곳의 친구가 여전히 살아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당시 방문했을 때만 하더라도 쿠스코에서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고 합니다. 정령의 불꽃이 소멸되었다면서…….”
“정령의 불꽃이라면 어젯밤 말씀하셨던 그걸 말씀하시는 거군요.”
“맞습니다.”
수염을 쓰다듬는 빌로우를 보며 찬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령의 불꽃이라…….’
어젯밤 빌로우를 통해 들은 토르잔 밀림 왕국은 꽤나 특별한 곳이 맞았다.
정령을 신봉해 태초의 불꽃을 간직한 미지의 나라.
그들은 단 한시도 꺼지지 않은 정령왕의 불꽃을 지키며 그 불꽃에서 받은 신탁을 토대로 여왕을 뽑아 왔다고 한다.
그리고 잿빛 멸망이 다가오면서 단 한 번도 꺼진 적 없던 그들의 불꽃이 함께 꺼져 버렸다고 했다.
“그 정보는 확실하니 지금쯤 그들은 다시 내전에 돌입하고 있을 겁니다.”
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 술자리에서 귀담아 들었던 내용이다.
‘반란을 일으킨 건 더피 부족.’
더피는 쿠스코 지방의 부족이고, 아즈렉은 추픽 지방의 부족, 빌라도는 올멕 지방이라고 했다.
‘더피는 정령의 불꽃이 꺼진 게 오로지 여왕의 탓이라고 말하고 있다고…….’
하긴, 정령을 신봉하고 평생 그 율법에 맞게 살아온 그들에게 있어서 불꽃이 꺼졌다는 건 곧 정령의 뜻을 저버린 결론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연히 정령과 가까운 여왕의 잘못이 되겠지. 흐음…….’
해야 할 일은 단순하다.
그들의 화합을 돕고, 올드 원에 함께 저항하게끔 도움을 받아야 한다.
되도록 왕관 조각을 편하게 얻을 수 있게끔.
그 때 로레인이 말했다.
“여전히 변함없어? 계획대로 진행하겠다는 거?”
“네, 아직은요.”
“영감님은요?”
로레인이 빌로우를 쳐다봤다.
빌로우는 대답 대신 입 꼬리를 말아올렸다.
“그것 참…… 즐거운 여행길이 될 것 같군요. 누가 그 폐쇄된 나라를 그렇게 휘저을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아…….”
로레인은 한숨 쉬었다.
이 남자나, 저 남자나 간덩이가 잔뜩 부은 모양이다.
‘여왕한테 찾아가자니…….’
누가 들으면 동네 옆집이라도 놀러가는 줄 알겠다.
‘상식선에서 이해되는 행동을 해야 수습을 하지.’
사실 이 제안을 처음 듣고, 빌로우에게 전달했을 땐 빌로우가 적정선의 계획으로 바꿔 줄 줄 알았다.
찬영도 전문가인 빌로우의 말을 흘려듣진 못할 테니까.
‘그런데 이건 뭐, 양찬영보다 더하잖아.’
빌로우는 해 볼 만한 계획이라고 입김을 불어넣는 것도 모자라 방금 전과 똑같이 얘기했다.
‘즐거운 여행길이 될 것 같다고.’
로레인은 그 말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그래서 걱정이 되긴 하지만…….’
둘의 계획을 말리고 싶지 않다.
찬영의 말을 들어 보면 말도 안 되는 계획이긴 한데 그럴싸하다.
그럴싸한 것도 아니고 얼추 조각이 맞는다.
그러니 그게 가능하다면 그들의 경계를 허물 뿐 아니라 단번에 평화 협정으로 끌고 가는 원동력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여왕 앞까지 도달할 수 있느냐 아니겠어? 평화적으로 갈 거야, 아님…….”
찬영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들에게 해만 안 입히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그럴 일은 없을 거라 봅니다.”
“계획대로라면 말이지.”
덧붙인 로레인에게 찬영이 미소 지었다.
“가시죠.”
찬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걸음을 옮겼다.
“다녀오세요.”
제리가 찬영의 어깨를 잡는 로레인과 빌로우를 일별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얀 빛이 번쩍, 셋의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떠났다고?”
레딩 공작은 집무실에 앉아 브라이트의 보고를 받았다.
“예, 그렇사옵니다.”
“알았다. 물러가거라.”
브라이트 소속 기사를 물러가게 한 레딩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잘 해내야 할 터인데.’
사실 지금의 왕국은 타국의 영향력을 미칠 만큼 예전 같지 못하다.
당장은 지구란 행성의 여러 원조를 받아가며 다시 본래의 힘을 되찾는 재건 계획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이럴 때 다른 나라의 혼란이 왕국에까지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다면…….’
썩 좋은 상황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가장 최선의 선택은 여길 떠난 엘러 백작이 일행들과 함께 토르잔을 음지에서 양지로 꺼내는 것뿐이다.
그들과의 갱신된 평화 합의와 교통이 원활해진다면…….
‘다음으로 복원될 오딘 제국과도 훨씬 더 원활한 협상이 가능해지겠지.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최선의 선택들이 모였을 때 일어난 최고의 상황이다.
자신은 그 다음을 봐야 한다.
악조건이나 변수들이 나타나 피치 못할 전쟁이 시작될지도 모를 상황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생각에 잠긴 레딩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