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8
228화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베아트리체의 대답에 찬영은 할 말을 잃었다.
그녀를 탓할 수도, 이 일을 거절했던 메테우스가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럼, 그래서……?”
찬영의 반문에 베아트리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론의 말이 사실이었구나.’
아론의 이야기들은 전부 진실이었다.
성녀의 선택은 홉스를 희생하는 결과를 낳았고, 잿빛 멸망이라 불리는 봉인을 가져왔으니까.
“솔직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찬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어떨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왕부터 베아트리체를 믿어 왔던 수많은 왕국의 백성들이 흔들릴 것이다.
“좋은 말로 봉인이지, 실제로 그들은 멸망이나 다름없는 시간을 보낸 것이니까요. 어떤 선택권도 없이…….”
“알아요.”
“그 선택이 옳았다고 믿으십니까?”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순 없어요. 그때도, 지금도……. 하지만 우린 다른 수가 없었어요. 신탁은 대륙의 소멸을 가리키고 있었고, 언제 올 지 모르는 사명을 기다릴 수도 없었으니까.”
찬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대답을 이해하고 공감한다.
대륙의 소멸을 걸고, 신탁을 거스르는 도박을 할 순 없었을 것이다.
‘봉인이 최선의 수였겠지.’
그걸 증명하는 근거는 교황이 그녀를 두려워했다는 점이다.
교황은, 아니 뉴 빌드와 올드 원은 그녀가 가져올 봉인이 두려웠을 것이다.
‘봉인이 되면 사명을 찾기 힘들어질 테니까.’
하지만 이러한 이유로 그녀가 마냥 옳았다고 주장했다면 실망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조금 더 안정성 있는 도박에 걸었을 뿐이지, 반드시 옳았다고 볼 순 없으니까.
하나 그녀는 옳고 그름을 떠나, 한 명의 인간으로서 대륙을 구하려 했다.
자신을 포함해 누구도 그런 그녀를 욕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아니었다면?
‘대륙은 다음을 기약할 수 없었을 거야. 소멸되었을 테니까.’
생각을 거듭 정리하던 찬영은 그녀를 이해하며 물었다.
“메테우스도 결국 그 뜻에 동의했나요?”
결국 봉인은 성공했으니, 아마 그랬을 거라 짐작됐다.
“아뇨.”
예상 못 했던 대답이라, 찬영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럼 어떻게 됐죠?”
“그는 함께 떠나지 않았어요. 그리고 연인을 두고 떠났죠. 메들린은 홉스와 운명을 같이 하기로 결정했으니까요.”
“메들린…….”
“그는 자신의 뜻을 알아주지 않는 그녀에게 화가 난 채 우리를 떠나 버렸죠. 그리고 그가 다시 나타났을 때 우린…….”
슬퍼진 베아트리체의 눈동자를 보며 다음 대답을 예상할 수 있었다.
“적이 됐군요.”
“그는 스스로 올드 원의 힘을 빌려 왔더군요.”
꿀꺽.
마른침을 삼킨 찬영의 귓가로 베아트리체의 음성이 이어졌다.
“메테우스는 본디 강한 존재였어요. 난 어쩌면 그가 사명일지도 모른다고 기대하기도 했죠.”
“그럼 그를 쉽게 막긴 힘들었겠네요.”
“네, 많은 갓피스가 죽었어요. 하지만 가야 했죠. 그리고 그와 반신들의 방해를 힘겹게 뚫고 봉인 의식을 끝낸 그때…….”
베아트리체의 눈꺼풀이 떨리며 그녀가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듯 말했다.
“그는 메들린의 가슴 위에 검을 꽂고 있었어요. 그게 위그드라실이 있었던 차원 다리에서의 마지막 기억이에요.”
말을 마친 베아트리체는 슬픈 기억을 떨쳐 내려는지 애써 미소를 머금으며 화제를 돌렸다.
“사명이 되찾아야 하는 곳이죠.”
“올드 원이 있다는?”
찬영 또한 그녀의 기분을 이해하기에 별말 없이 다른 이야기에 반문을 던졌다.
“그래요, 봉인이 시작됐던 곳이자 우리의 구원을 위한 신탁이 완성될 곳이에요. 우리가 이미 마주했던 섬의 형태를 띤 곳이죠.”
“섬? 아……!”
로레인의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한적한 바닷가의 모래사장, 그래 그때 그곳에 있었다. 최후의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리라고는 예상 못할 만큼 평화롭던…….
“그래서 내게 보여 줬던 거군요.”
“맞아요. 우린 은연중에 사명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어요. 이 날이 오기만을 기다려 왔으니까요.”
“소원이 이뤄진 셈이네요.”
“조금은요. 하지만 우린 계속 사명 곁에 있을 거예요. 영혼의 일부로서 말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죠?”
“사명은 단순한 갓피스가 아니라고 알고 있어요. 당신은 우리를 하나로 묶는 열쇠이기도 하죠.”
“하나로?”
“돌아가면 알게 될 거예요. 우리도, 당신의 대륙에 존재하던 갓피스도 모두가 당신에게 모여들 테니까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모호하게 말해 주는 건 여전하네요.”
“이번엔 내 말을 그대로 믿어도 좋아요.”
빙긋 웃은 베아트리체와 함께 홉스의 일원들이 하나둘 찬영과 과거 얘기를 나눴다.
그러면서 그들의 기억을 통해 보았던 이야기들의 나머지 토막도 전해 듣게 됐다.
대부분 예상했던 얘기들이 주를 이뤘지만 그 외의 몰랐던 사실들 또한 듣게 된 거다.
교황이 순례자 길에서 데려왔다는 ‘그’ 의 행방과 루퍼를 노렸던 노인에 관한 이야기 등이었다.
그렇게 많은 얘기들이 일단락 됐을 때쯤.
베아트리체가 물어 왔다.
“공주는 잘 있나요? 그녀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맡긴 게 아직도 미안하네요.”
“그렇게 생각 안 하셔도 됩니다. 그녀는 누구보다 용기 있었고 저를 이곳까지 인도해 줬으니까요.”
베아트리체를 위한 위로라기보다는 샤브레를 직접 대면한 후 느낀 점 같은 거였다.
실제로도 그녀는 자신의 변화를 크게 끌어낸 사람 중 한 사람이 되었으니까.
“그런가요.”
베아트리체의 미소에 작은 안도감이 든 건 기분 탓일까?
막, 그 생각이 들던 그때.
조금씩 그녀의 손끝이 모래처럼 흩어져 가는 게 보인다.
예전이었다면 달려가 그녀를 붙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묻고 싶었던 모든 질문을 하고 난 후다.
뭘 해야 할지마저 뚜렷해진 지금 이 순간.
찬영은 그들이 그저 평안하길 바랐다.
“우린 더 이상 전면에 드러나지 못할 거예요. 아까 말했듯 사명이 우리를 하나로 묶는다는 건, 당신의 영향력이 강해졌다는 뜻이고 그 말은 당신이 동등한 존재가 아닌 우릴 아우를 만한 그릇이 되었다는 뜻이죠.”
“다신 만날 수 없겠군요.”
“네, 우리는 육신이 사라진 영혼. 이제까진 당신의 힘을 빌려 의지를 남겨 왔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게 됐죠. 사명은 더 이상 우리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성장했으니까요.”
베아트리체가 기뻐하며 환하게 웃었다.
“우리의 남은 힘은 사명의 일부가 될 거예요. 그럼…….”
절반의 몸이 사라진 베아트리체가 지그시 눈을 감는다.
그녀 뒤에 서 있던 라인쉐리어, 베오 루퍼, 모스 프레도 모두 그렇게 사라지고 있었다.
한발 물러나며 그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편히 잠드소서.’
-사명, 순간을 소중히 여기세요.
마지막 당부가 담긴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찬영은 자신의 몸 역시 눈부신 빛으로 물드는 걸 느꼈다.
다시 돌아갈 때가 온 모양이다.
서서히 눈을 감는 찬영의 귓가에 창 뜨는 소리들이 연달아 들렸다.
* * *
웅성웅성.
정신이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들리는 건 누군가의 말소리.
귓전에 어떤 말들이 들리긴 하는데 정확하게 들리지 않았다.
‘눈을 좀 떠야겠어.’
눈꺼풀을 들며 조금씩 들어오는 빛 사이로 흐릿하던 그림자들이 명확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얼굴들이 보이고 귓가에 들려오던 목소리들이 제대로 들려온다.
“정신이 들어?”
“아, 로레인 씨.”
그녀의 얼굴을 보니 돌아왔다는 게 실감이 났고 방금 전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마음이 무겁다기보다는 어딘가 허전한 기분이다.
그사이 로레인이 말했다.
“맞아, 나야. 여긴 토끼 양반…….”
“압니다. 더 말 안 해 주셔도.”
“그래, 알았어. 그나저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지금은 괜찮아?”
“네, 괜찮아요.”
대답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몽롱했던 의식이 제대로 돌아오자, 붕 떠 있던 감각들이 제대로 느껴졌다.
‘가볍다?’
체감 상 느껴지는 감각들이 무척 밀도 높았다.
평소의 느끼는 감각 이상의 것들.
“뭔가 달라졌는데?”
반사적으로 중얼거린 찬영.
“변화가 있어?”
그 목소리를 듣고 유독 큰 소리를 내는 로레인.
찬영은 그녀를 의아하게 쳐다보면서 물었다.
“왜 그래요? 무슨 일이라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던 그때.
눈이 마주친 글로리의 동공이 뭔가 이상했다.
‘없어. 가만……?’
이어서 로레인을 다시 쳐다봤다.
이번에도 역시…….
‘없다.’
더 들여다봤지만 그들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갓피스라는 것을 증명하는 나뭇잎 문양이 없었다.
이해가 안 돼서 샤브레 공주를 쳐다봤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에게는 갓피스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그러자 로레인이 대답했다.
“몰라, 우리도. 공주마마가 쓰러진 것도 모자라서 그쪽이 쓰러지자마자 온몸의 힘이 빠지면서 정신을 잃었어. 정신을 차리고 나니까…….”
글로리가 굳은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이어받았다.
“우리가 가진 힘과 장비가 사라져 있었소. 그다음 우린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됐지.”
글로리는 그 순간을 떠올리며 찬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당신의 온몸이 입자로 분열됐다가 다시 생성됐소. 그래서 우린 어쩌면 우리의 힘이 사라진 게 그대와 상관이 있지 않을까 했소.”
“이유는 그것밖에 없으니까.”
로레인이 덧붙이자 샤브레가 의아한 눈빛을 보였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를 않는군요. 어째서 나는 그대로인 것인지…….”
말끝을 흐린 샤브레가 찬영을 바라봤다.
글로리도, 로레인도 모두 그랬다.
대답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찬영밖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찬영 역시, 그렇다고 생각했다.
“네, 물론입니다. 대신 시간을 잠시만 내주세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한 세 사람은 뒤로 물러나 자리를 피해 줬고 찬영은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이어서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당연히 무수히 나타나 있는 창들.
찬영 역시 설명이 필요했다.
‘마스터 박스 5급이나 네 번째 차원 다리 복속 같이 아는 내용들은 접어 두고…….’
그러자 곧이어 눈에 띈 건.
-베아트리체, 라인쉐리어, 모스 프레도, 베오 루퍼는 사명의 영혼에 귀속되어 룸으로 환산됩니다. 기존의 영혼 교류 기술 또한 교류치 100%가 되어 사명의 육체에 다양하게 적용 됩니다.
-현 시간 부로 획득될 소울 카드는 다른 방식으로 적용됩니다.
-현상 수배 완료로 인해 갓피스 앨범에 존재하는 갓피스들 중 50명의 권능이 당신의 룸으로 환산됩니다. (단, 갓피스였던 존재들은 권능 소멸 후에도 차원 다리 이동 가능)
-…….
‘아!’
여러 개의 창을 읽자마자 찬영은 자신에게 무슨 일어났는지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소울 카드의 변화가 왔다는 건 확실하고, 그 외엔…….
‘베아트리체의 말 그대로였어.’
갓피스 앨범에 존재하던 예비 갓피스들이 보유하고 있던 잊힌 빛의 힘이 자신에게 끌려왔고, 그에 포함된 두 명인 로레인과 글로리 역시 자신에게 힘을 내준 것이다.
‘그래서 신체의 변화가 이뤄졌구나…….’
-상승한 룸으로 인해 육체가 재구성됩니다.
로레인이 말해 줬던 입자가 되었다가 다시 재구성되었다는 그 이야기가 이제야 이해가 된다.
감각들이 예전보다 훨씬 날카롭게 바뀐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후우…….”
‘이 일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제대로 전달될까?’
찬영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들이 듣기엔 충격적인 이야기들도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해야 해.’
그들은 함께 짐을 짊어진 이들.
마음의 짐 역시 함께 공유해야 할 이들이다.
찬영은 생각을 마치고 다시 일어섰다.
아직 남아 있는 이야기와 창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일행들부터 안심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 * *
“……그래, 그쪽이 당연히 그 이유일 거라고 예상했지.”
팔짱을 낀 로레인이 모든 사정을 들은 후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평소 성격대로 갓피스로서의 힘이 사라진 것에 대해서도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오히려 홀가분해했다.
그리고 그 외의 이야기들은 이곳에 있는 이들만 알기로 했다.
때론 진실만이 능사는 아니니까.
“우리 둘만 쏙 빠진 기분인데……. 하기 싫은 일 남 준 기분이야.”
이어진 로레인의 말에 글로리가 동의했다.
“그러게 말이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이젠 더 도와줄 길이 없구려.”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글로리를 보며 찬영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두 분은 최선을 다해 주셨습니다. 오히려 두 분의 몫까지 제가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네요.”
“당연히 하고도 남지. 하지만 걱정 마시오. 그댄 잘 해낼 테니. 무엇보다 아직 공주마마도 곁에 있지 않소.”
로레인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인 후 찬영에게 다가왔다.
“부탁이 있어.”
“어떤……?”
진지한 찬영의 눈빛을 바라보며 로레인이 한숨 쉬며 말했다.
“이제 돌아가자, 배고파 죽겠어.”
일행은 그녀의 예상 못한 대답에 픽, 웃음을 터트렸다.
찬영 또한 별일 아닌 것처럼 얘기해 주는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미소 지었다.
“좋아요, 돌아가죠.”
그녀 말대로 이젠 가야 했다.
잊힌 신들을 깨울 시간이 성큼 다가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