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7
227화
화르륵!
불기둥이 잿빛 하늘을 뚫고 끝없이 솟아오른다.
“크흣!”
샤브레 공주가 손끝으로 눈을 부여잡은 건 바로 그때였다.
“공주마마!”
로레인이 황급히 그녀를 부축하려들자 샤브레 공주가 손사래를 쳤다.
“괜찮습니다! 이건 나의 소임…….”
서서히 고개를 드는 샤브레.
어느새 핏발 선 그녀의 왼쪽 눈에서는 오른쪽 눈과 같은 나뭇잎 형태의 무늬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때마침 그녀가 착용한 ‘란테고스’에서 빛이 흘러나오고.
그녀의 양쪽 눈에서 어마어마한 빛이 쏘아졌다.
콰콰콰!
빠른 속도로 나아간 빛은 찬영의 어깨를 스쳐 불의 기둥 한 가운데를 관통했고, 불의 기둥이 환한 빛의 기둥으로 뒤바뀌기 시작했다.
쿠쿠쿵!
그러자 찬영의 앞에 수많은 창이 연이어 떴다.
-현상 수배가 완료되었습니다.
-이그 제거 업적으로 인해 마스터 5급 박스가 획득됩니다.
-네 번째 차원 다리가 당신에게 복속되었습니다.
-다섯 번째 차원 다리로 향하는 빛의 문이 개방됩니다. 단, 빛의 문은 빛의 왕관 조각을 찾아야 열 수 있습니다. 빛의 왕관 조각이 있는 위치는 사명의 미니 맵을 통해 확인 가능합니다.
-봉인된 땅이 해방되었습니다. 토르잔 밀림 왕국의 3개 지방 쿠스코, 올멕, 추픽이 개방됩니다.
-현상 수배 완료로 인해 갓피스 앨범에 존재하는 갓피스들 중 50명의 권능이 당신의 룸으로 환산됩니다.
(단, 갓피스였던 존재들은 권능 소멸 후에도 차원 다리 이동 가능)
-10만 룸 달성 업적 달성으로 인해 사명의 고유 권능 3가지가 성장합니다.
-상승한 룸으로 인해 육체가 재구성됩니다.
-분해 Lv. 2가 ‘소멸’로 진입합니다. 소멸은 분해의 활용 권능을 포함하며 사명의 의지에 따라 존재하는 모든 것을 벨 수 있습니다.
-손재주와 합성의 권능이 ‘창조’ 로 진입합니다.
-네 번째 캘린더가 개방되었습니다.
-네 번째 캘린더의 개방 조건 달성으로 인해 지니고 있던 소울 카드들의 영혼이 극대화됩니다.
-베아트리체의 영혼 교류 100%이 이뤄집니다.
-라인쉐리어의 영혼 교류 100%가 이뤄집니다.
-모스 프레도의 영혼 교류 100% 가 이뤄집니다.
-베오 루퍼의 영혼 교류 100%가 이뤄집니다.
-4장의 소울 카드가 당신을 소환합니다.
수많은 문구들, 찬영은 그것들을 일일이 확인해 볼 수가 없었다.
머릿속을 타고 흐른 충격 때문이었다.
“커헙!”
다리가 풀려 주저앉자마자 눈에 보이는 손이 흐릿해진다.
손을 들어 올렸지만 감각이 느껴지질 않았고, 시야가 흐릿해지는 건지 손가락 끝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마치 잘려 나간 것 같이 보인다.
‘왜, 내 몸이……?’
그 의문을 던지며 겨우 고개를 돌리니 글로리와 로레인이 공주와 함께 쓰러져 가는 게 보인다.
‘어째서?’
스스로에게 재차 질문을 던져 봤지만 전혀 감이 잡히는 게 없다.
찬영은 더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천천히 눈을 내리 감았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시야가 흐릿해진 게 아니라 정말로 그의 온몸이 먼지처럼 흩어져 가고 있다는 걸.
* * *
뎅! 뎅!
익숙한 종소리.
찬영은 눈을 뜨며 벌떡 일어났다.
황급히 손발을 확인했지만 멀쩡했고, 그제야 주위를 둘러봤다.
‘여긴?’
너무나도 잘 아는 곳이다.
창가로 둘러진 주위, 날개 달린 말을 탄 기사들이 구름을 뚫고 강림하는 그림이 그려진 스테인드글라스가 보이는 신전의 예배당.
‘가만, 그렇다면?’
앉아 있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한 순간.
예배당의 문이 끼익 열리며 예배당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헤진 검은 망토의 검은 복면인이 걸어 들어왔다.
저벅저벅.
그를 봤기에 알 수 있었다.
“베오 루퍼.”
반사적으로 입을 뗀 찬영에게 베오 루퍼가 복면을 벗으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감은 있군.”
차갑게 뱉은 그의 말투와 함께 뒤를 따라 들어온 세 사람.
갈색 머리를 반듯하게 빗어 올린 중년 기사와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신관, 그리고 백색 로브를 입은 은발의 그녀였다.
라인쉐리어, 모스 프레도, 베아트리체.
찬영은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나 입을 벌렸다.
‘성공했구나.’
찬영은 문구를 제대로 확인하진 못했지만 그들과의 만남을 토대로 직감했다.
‘영혼 교류가 완성됐어.’
너무나 고대했던 일 중 하나가 완성된 거다.
찬영은 한동안 입을 떼지 못했다.
어떤 질문부터,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고민됐다.
그러고 있자 첫 마디를 먼저 뗀 건 은발의 베아트리체였다.
“오랜 시간 버텨 주어 고마워요. 우리들은 사명의 곁에서 모든 걸 지켜보았습니다.”
베아트리체 뒤에 나란히 선 세 사람이 각자의 감정을 담아 찬영을 바라보았다.
모두, 찬영이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찬영도 생각을 가다듬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우선, 어떻게 된 겁니까?”
“사명이 차원 다리를 수복한 것으로서 당신의 영향력은 전 차원에 더 넓게 포진되었어요. 그 영향력이 우리에게도 미친 거죠.”
“그랬군요, 그럼…….”
찬영이 다른 일원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젠 우리가 대화할 시간이 많아졌겠군요.”
“적어도 이 순간은요.”
미소 짓는 베아트리체를 보며 찬영의 눈동자에 힘이 실렸다.
“하면, 묻겠습니다. 올드 원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가장 오랜 세월 쌓여 있던 질문.
베아트리체가 네 명의 일원 중 대표로 입을 열었다.
“이야기했다시피 그들은 우리 시대에도, 사명의 시대에도 단 하나의 목적뿐이었어요. 그들은 전 차원의 소멸을 원하죠.”
“어째서?”
“그 이유까지는 알 수 없어요. 나의 시대에도 그들의 진의를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요. 그저 여신께서 말씀해 주셨을 뿐…….”
그 얘기를 듣고 나니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베아트리체도 단편적인 것들만 알고 있는 거군요.”
“그래요, 신탁에 기대는 것이 전부였었죠.”
“신탁이라……. 잊힌 별들의 힘을 뜻하는 건가요?”
“맞아요. 많은 걸 알았군요.”
“그만큼 많은 걸 겪었으니까요.”
미소 지은 베아트리체가 말을 이었다.
“사명의 이야기대로 잊힌 별들 중 일부가 제가 모시던 여신이셨죠. 하지만 그분은 소멸되신 게 아니에요. 사명의 곁에 함께하시고, 저를 당신께 이끄셨죠.”
“올드 원을 피해서?”
“그래요. 많은 신들은 잊힌 별이 되어 대륙에 머무르셨어요.”
“신들…….”
“올드 원에 대항할 유일한 존재들이죠. 지금의 사명에게 힘을 준 분들이에요.”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하나둘 완벽한 정보가 되며 명료해졌다.
그만큼 질문도 많아진다.
“그런데 이상하군요. 어째서 신들마저 도망치게 만들 올드 원이란 존재들은 왜 직접 나서지 않는 겁니까?”
“차원 다리의 붕괴를 두려워하기 때문이죠.”
“그게 무슨……?”
“신탁을 통해 들었던 대로라면 차원 다리는 전지적인 능력을 가진 신을 받아들이지 못해요. 그들이 강림하면 차원다리가 붕괴되고, 그들은 더 이상 전 차원을 들여다볼 수 없게 되죠.”
“다리가 끊기는 거군요.”
“그래요.”
“……다리가 끊기면 그들이 원하는 모든 차원 다리의 소멸은 불가능해질 테고.”
“당신을 영원히 찾을 수 없게 되죠.”
베아트리체의 이번 말을 무척 의외였다.
“그들이 나를 찾고 있다는 건가요?”
“오랜 시간 동안 그래 왔죠. 사명이 자신의 운명을 쫓아 일어나길.”
“……왜죠?”
전지적인 그들이 왜 자신을 찾으려 한다는 걸까? 조금도 감이 잡히는 바가 없다.
“사명은 열쇠이니까요.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이뤄 줄 열쇠 말이에요.”
찬영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럼 제 존재 자체가 제가 지켜야 할 이들에게 위협이 된다는 얘기 아닙니까? 아니, 어째서 그들은 그들의 힘만으로 전 차원을 소멸시킬 수 없죠?”
“그 이유까진 알 수 없어요. 하지만 확실한 건 그들에겐 반드시 사명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듣지 말았어야 할 진실을 들은 것만 같은 기분이다.
혼란스러워진 이 순간, 베아트리체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잊힌 별들이, 아니 신들이 깨어날 열쇠이기도 해요. 그들이 깨어나면 올드 원의 침략을 저지할 수 있어요.”
“어떻게 깨운다는 거죠?”
“다섯 번째 차원 다리는 글라투, 이그와 같은 반신半神들이 가득해요. 보통 한 차원 다리의 지배를 도맡는 그들이지만, 다섯 번째 차원다리만큼은 고고한 자존심을 꺾고 집결해 있죠.”
“이유가 뭡니까?”
“세계수, 위그드라실을 지키기 위해서예요. 위그드라실에 빛의 왕관을 주입해야 해요. 그럼 흩어져 있던 신들이 그간 사명이 쌓아 온 힘을 통해 다시 본연의 모습을 되찾을 거예요.”
“빛의 왕관? 그게 뭡니까?”
“한때는 왕국의 성물 중 하나로 분류되었죠.”
찬영은 그 순간 라인쉐리어를 쳐다봤다.
라인쉐리어가 머쓱하게 웃었고, 베오 루퍼가 콕 집어 덧붙였다.
“도둑 기사지. 저쪽은 도둑 신관이고.”
모스 프레도가 대답 대신 빙긋 미소 지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 찬영은 괜히 웃음이 나왔다.
그사이 베아트리체가 온화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돌아가게 되면 그것들이 당신을 부를 거예요. 그 부름에 응답하세요.”
그 말에 찬영은 문득, 아론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아론이 얘기하길 성물은 소멸되었다고 했는데……. 여전히 존재하나 보군요.”
운을 뗀 찬영은 슬슬, 아론과의 대화에서 얻었던 일들에 대해 물을 차례라는 걸 깨달았다.
기왕지사 성물의 얘기가 나온 이상…….
의혹을 정리해야 했다.
“홉스는 왜 실패했죠? 아니, 그 실패 이면에 어째서 전대 갓피스들의 소멸이 있어야 했습니까?”
그 질문을 던지자마자 뒤에 세 사람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냉각된 분위기 속에 찬영은 베아트리체에게 집중했다.
앞으로의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하니 반드시 들어야 할 얘기다.
“……기억나나요?”
베아트리체가 운을 뗐다.
“어떤?”
“사명이 본 메테우스와 나의 대화를요.”
“네, 기억납니다.”
못할 리 없다,
유독 강렬했던 기억 중 하나였으니까.
“메테우스란 이름은 왕실 분들도 아는 게 없더군요. 대체 그자는 누굽니까?”
“그가 누구인지 얘기하기 전에 질문부터요.”
“네.”
“우린 성물과 갓피스들의 힘을 모았어요. 하지만 떠나기 직전 신탁을 받았죠. ‘사명이 없는 한 소멸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라고.”
꿀꺽, 찬영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다음 상황이 어떨지 대강 그려지는 게 있었다.
“강행하셨군요.”
“수많은 백성들이 몬스터에 의해 길을 잃고 왕국이 사분오열되며 갓피스들마저 자신들의 존재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어요. 미래는 망망대해 속에 있었죠.”
그녀도 갓피스와 성녀이기 이전에 한 명의 사람.
멸망을 막아야 하는 존재로 버텨 내기엔 힘들었을 것이다.
“두려우셨군요.”
“그래요, 두려웠어요. 하지만 내색할 수 없었죠. 난 여신의 신탁을 받은 존재이며, 홉스의 수장입니다. 우리의 대륙을 지켜야 했어요. 그리고 끊임없이 기도했죠…….”
베아트리체가 찬영을 향해 눈을 한층 치켜뜨며 덧붙였다.
“언제 올 지 모를 사명을 기다리기엔 우리에게 시간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실제로도 그랬죠. 왕국은 죽어 가고 있었으니까.”
찬영은 충분히 과거의 일들을 들었기에 그녀가 바라보았을 상황들이 눈에 선했다.
그러자 베아트리체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때의 일을 회상했다.
“그러다 마지막 신탁이 왔어요. 미래를 위해 유일하게 택할 수 있는 일이었죠. 그 일에 더러는 이해했지만 메테우스는…….”
“거절했군요.”
“네, 그에게는 사랑하는 정혼자가 있었고 그녀 역시 갓피스였으니까요.”
찬영은 그 신탁의 실체에 대해 어렴풋이 예상되는 바가 있었다.
아론이 얘기해 줬던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교황이 제게 그러더군요. 베아트리체, 성녀께서 홉스를 전부 소멸시켰다고. 사실 그 말을 듣고 의아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좀 이해가 되는군요. 신탁의 내용이 설마…….”
“네, 소멸이었어요. 우리가 가진 모든 힘을 쏟아서 성물과 함께 봉인되어 버리는 거였죠. 대가는…….”
“홉스의 죽음.”
충격을 받은 찬영의 중얼거리는 대답에 베아트리체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찬영은 베아트리체의 눈빛을 보고 직감했다.
아직 숨겨진 이야기 더 남아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