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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자동보상-224화 (224/248)

# 224

224화

“한 달째군.”

“예.”

찬영이 노을 지는 절벽 위에 걸터앉은 채 대답했다.

‘벌써…….’

베이콥 영주의 말대로 제이나가 키란의 유산과 함께 사라져 버린 지 딱 한 달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키란의 유산도 그 자취를 감췄다.

“괜찮은지 더는 묻지 않아도 되겠지?”

“예, 물론입니다.”

대답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찬영.

제이나는 떠났지만 시간은 무정하게 계속 흐른다.

그동안 왕실의 본격적인 행보가 시작됐다.

그중 하나가 A.U. 사절단의 도착부터 본격적인 협약을 위한 끊임없는 논의.

귀환한 로일 영주와 달리 베이콥 영주가 남아 있는 것도 그 일과 무관하지 않다.

첫 협약을 시작한 첫 영주라 보완할 점 등을 레딩 공작에게 조언하는 위치로 왕에게 임명된 거다.

왕실의 협약 실무자 중 한 사람이 된 셈.

“골치 좀 아프시지요?”

베이콥의 표정만 봐도 그랬다.

아니나 다를까, 베이콥 영주가 피식 웃더니 말했다.

“아무렴, 나는 적들과 한바탕 부딪치는 게 더 어울리지.”

“지금의 모습도 어울리십니다.”

이제껏 봐 온 베이콥 영주는 지와 덕 그리고 용맹까지 겸비했다.

그의 출신이 왕족이었다면 충분한 왕의 입지까지 올랐을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정작 그는 소탈해서 작위 같은 건 꿈도 꾸지 않은 듯하지만…….

“더구나 공작 작위까지 하사받지 않으셨습니까? 골치 아픈 일도 더 많이 하셔야죠.”

“놀리나?”

“예.”

“이 사람이? 껄껄!”

그렇게 찬영과 격의 없이 농담을 주고받던 베이콥 영주는 최근 있었던 일에 대해 물었다.

“칼룬 지방에선 왕국군의 승전보들이 보고로 올라오고 있고 그로인 지방을 포함한 여덟 개 지방에서는 자네와 자네 부대에 관한 얘기로 떠들썩하다더군.”

“과찬이십니다.”

“과찬은 무슨, 어떤 칭찬을 해도 부족하지. 자네 부대가 왕국을 횡단하다시피하며 무너진 통신망을 복구했고 저항군 보급과 재기를 근 한 달 만에 완성시켰는데 말이야.”

베이콥은 얘기하면서도 이 모든 게 도저히 한 달만의 일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자다가도 가끔 소름이 돋을 만큼 위대한 일이다.

뉴 빌드가 망쳐 놓은 왕국의 재건을 단 몇 명의 영웅들이가 다시 재건하는 중이었으니까.

“혼자 한 일이 아니니까요.”

찬영은 이번 일에 함께해 준 부대의 일원들을 떠올렸다.

판도라, 그라스경, 십안의 기사단에 합류하게 된 홀랜드경, 처음 궁술을 가르쳐 줬던 로버트경, 그리고 벡과 도레인까지.

왕의 하명을 받아 직접 선별한 이 인원들은 홉스의 명맥을 잇는 부대라 하여 ‘라이크 홉스’라 명명됐다.

이 중 본래 함께했던 글로리 등의 인원들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들이 앞으로의 싸움 전에 조금이나마 쉬길 원했고, 각자의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고 싶었던 거다.

자신이야 왕에게 직접 책임자로 임명됐을 뿐 아니라 제이나의 빈자리를 느낄 여유 없이 쉬지 않고 몰두할 일들이 필요했으니 함께했고.

“그래, 혼자 한 일이 아니지. 하나 그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단 것도 부정할 순 없잖은가? 그래서 하는 얘기인데…….”

“어떤?”

“자네도 고향에 다녀오는 게 어떤가?”

“아뇨, 굳이 갈 필요 없습니다. 당장은요.”

“실은 폐하의 명이시네. 내게 자네를 조금 쉬게 하라 이르시더군.”

“황공하오나 저는 지금이 더 편안합니다. 그녀가 돌아올 때까진 쉬고 싶지 않아서요.”

베이콥 영주는 무리하게 몰아붙이지 않았다.

무슨 마음인지 아는 거다.

“정 그렇다면 폐하께 내가 전해 드리지. 무엄하다고 하시겠지만 깨지는 건 내 몫 아니겠나?”

베이콥 영주의 서글서글한 미소에 한바탕 웃은 찬영이 반대로 질문을 던졌다.

“한데 제가 부탁드린 건 어떻게 됐습니까?”

“아, 그것 말인가?”

“예.”

“교황의 야욕으로 인해 이미 여신의 신관들은 크게 흔들렸네. 표결에 붙여야겠지만 다음 교황으로 공주마마께서 유력하시지. 어떻게 됐겠나?”

“잘 넘어갔군요.”

“그렇네, 자네가 걱정했던 종족 배척은 이뤄지지 않을 걸세. 교황이 제정해 뒀던 ‘교리를 모르면 이단’이라는 율법을 삭제해 버렸으니까. 이제 트레이드족도, 자네도, 모두 신관 자격을 받게 되겠지.”

“제가 공주마마께 듣기로 노티스 교단의 본래 율법은 종족 배척을 금하고 있다 들었는데……. 이제야 본래 자리로 돌아간 셈이네요.”

“옳은 일이지.”

“예. 다행입니다.”

걱정했던 일들까지 깔끔히 정리되어 버리자 찬영은 왕국 내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없음을 깨달았다.

이제부터 어떤 미래가 구축되느냐는 얼마나 지구와 대륙이 긴밀하고, 평화로운 협약이 이뤄지느냐에 따라 달려 있는 일.

‘그런 일은 내 몫이 아니니까.’

자신은 협약을 정하는 입장이 아니라 그들이 나아갈 미래를 닦아 놓는 것뿐이다.

“이제 곧 레딩 공작께서도 절 호출하시겠군요.”

“협약이 끝나는 대로 그럴 걸세. 내가 오늘 그대를 찾아온 이유도 그와 연관이 있지.”

“차원 다리로 향할 갓피스들을 모집하라는 것이겠죠?”

“맞네, 그럴 시간이 됐지. 좀 더 시간을 끌면 좋겠지만…….”

“그럴 새가 없을 것 같습니다.”

현재 대륙 각지에서 또 다른 변화의 조짐들이 속속들이 보고되고, 직접 마주하기도 했다.

한동안 조용했던 몬스터들의 숫자가 갑자기 늘어났다는 보고가 그 시작점이었고, 무리를 지어 성벽으로 몰려든 몬스터가 늘어났다.

“놈들이 집단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네. 다시 멸망의 조짐과 동일한 것들이 보이고 있어. 레딩 공작님 또한 그게 차원 다리의 일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네.”

“예, 저도 그런 것 같습니다.”

찬영은 고개를 끄덕인 후 눈을 반개했다. 분위기가 악화되어 가는 게 느껴지니, 슬슬 움직여야 할 때라고 생각한 것이다.

“……갓피스들을 소집해 올 텐가?”

“예, 그래야죠. 단, 왕국의 일을 처리하느라 아직 못 다한 일이 있습니다. 그 일부터 시작해야겠군요.”

찬영은 거의 다 저물어 가는 노을을 바라보다 서서히 휘몰아치기 시작한 바람을 느꼈다.

오고 있다.

“다녀오겠습니다. 조속한 시일 내에 레딩 공작께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려 주십시오.”

말을 하며 찬영이 절벽 끝으로 걸어갔다.

“그럼, 그날이?”

“예, 다음 차원 다리로 떠날 날이 될 것입니다.”

베이콥 영주를 보며 절벽을 등진 찬영이 대답과 함께 뒤로 몸을 내던진 그 순간.

쐐애액!

영주가 눈을 뜨기도 힘든 어마어마한 풍압이 절벽으로 불어 닥쳤고, 검은빛 용이 찬영을 이마에 태운 채 서서히 절벽 위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등장 한 번 거창하군.”

예상하고 있던 베이콥 영주의 중얼거림이 끝나기 무섭게, 찬영을 태운 요드가 빠른 속도로 절벽을 벗어나 활강했다.

* * *

저벅저벅.

찬영은 폭포 안쪽으로 들어오자마자 룸을 일으켜 불을 밝혔다.

환해진 폭포수 내부.

여긴 대륙 지도에도 없는 곳이며 오로지 요드가 아닌 이상 찾을 수 없는 장소.

바다에 난 ‘섬’ 아래 숨겨진 또 다른 ‘동굴’이었다.

이 동굴에 들어오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첫 번째가 요드의 보유였다.

요드가 아니었다면 찾지도 못했을 지역이니까.

이런 것만 봐도 요드가 열세 번째 별의 힘을 찾을 수 있게 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요드의 근원 자체가 알데바란이기에.

‘결국 요드가 내게 이곳을 안내한 것도 별의 힘이 열세 번째 별과 관련이 있다는 걸 말해 주는 거지.’

찬영은 심해 아래에 있는 동굴 안쪽으로 걸어가며 브뤼셀의 렌즈를 가동시켰다.

‘브뤼셀의 렌즈.’

현재 렌즈의 탐색 능력은 삼분의 이까지 채워졌다.

섬을 찾으며 삼분의 일이 늘어났고 아마 이 동굴 끝에 도달하면 마지막 탐색 횟수가 사용될 것이다.

그 일례로 지금 눈앞엔 브뤼셀의 일기의 남은 내용이 빠르게 펼쳐지고 있다.

-브뤼셀의 일기 2/3이 완성됐습니다. 획득한 일기는 언제든 열람 가능합니다.

-그분의 이름은 ‘무명.’ 이름도 없이 떠도는 분이셨다.

-그분의 성함도 연원도 얻지 못하였으나 나는 그분의 뿌리를 이어받게 됐다.

-그것은 ‘눈’의 비밀이었다.

-보려 들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이면의 힘을 들여다보는 ‘눈’을 얻는 방법이었지.

-그분은 그 ‘눈’을 심연의 눈이라고 하셨다.

-세상 모든 것을 관통하는 눈이라고 하셨지.

-그분은 내게 마나의 흐름을 읽는 건 그저 그 눈을 얻어 가는 과정의 일부라고 하셨고,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 힘의 실체를 알아갈수록 이해가 되지 않았고 끊임없이 의문들이 생겨났다.

-왜 나였는지…….

-하지만 이유를 물어도 그분에게는 어떤 말씀도 들을 수 없었다.

-그분은 그저 나를 인연이 닿은 자라 말씀하셨고, 이 모든 은혜를 그저 인연이 닿았기 때문으로 표현하셨다.

-그러다 문득 때때로 닿지 않는 먼 미래의 것을 내게 얘기해 주셨다.

-내가 세상을 뒤흔들 예언가가 되리라고.

-처음엔 그 말을 믿기 힘들었으나 훗날 내 임종이 다가오기 시작할 때쯤 나는 그분의 위대함을 깨달았다.

-그분이 내게 남긴 말씀대로 나는 예언가가 됐다.

-내가 보는 눈을 통해 나는 하나의 미래를 보았지.

-그건……….

그 내용을 본 후 찬영은 다시 걸었다.

어차피 뒷얘기는 브뤼셀의 마지막 흔적을 얻게 되는 순간 자연히 알게 되리라.

찬영은 점차 더 어둡고 깊은 곳으로 향했다.

* * *

-오늘이었다. 사명이여. 그대가 나의 유산을 찾으러 오던 오늘을 보았지. 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어. 오로지 나만 미래를 준비했지.

-효과 B : 브뤼셀의 흔적을 탐색합니다. (3/3)

-브뤼셀의 일기가 완성됐습니다. 획득한 일기는 언제든 열람 가능합니다. 3/3의 일기는 현신한 브뤼셀로부터 직접 듣게 됩니다.

별빛이 은하수처럼 동굴 천장에 한가득 있는 듯했다.

목소리는 그 천장을 울려가며 한가운데 서 있는 찬영을 맞이했다.

찬영은 그곳에 서서 목소리의 주인공, 브뤼셀을 향해 물었다.

“그럼, 하나 묻겠습니다.”

-무엇이든 나의 영혼이 이곳에 남아 있는 동안, 사력을 다해 답해 주지.

“당신은 또 무엇을 보았습니까?”

-무엇을 기대하는지는 모르나 나는 많은 걸 보지 못하였네. 내가 본 것은 그저 수많은 운명들 중 몇 가지.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실과 같은 미래였지. 그대로 실현될지도 확신할 수 없다네.

“하지만 이곳에 저를 맞이할 준비를 하셨다는 건…….”

-확신이 아니라 기대였네. 증명해 보고 싶었지. 나의 눈이 얼마나 더 깊은 곳을 바라볼 수 있는지……. 그대가 찾아온 것으로 나의 숙원은 이뤄진 것이지.

“그럼, 저는 이제 미래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인지요?”

-그대는 앞으로 보이지 않는 것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될 테지만 미래는 어쩌면, 원치 않는 순간에 보게 될 지도 모르겠군. 그리고 한 가지 더…….

목소리의 무게가 실렸다.

-심연의 눈은 진리를 쫓는 눈일세. 더없이 완벽함을 쫓지. 하나, 진리를 쫓다 허상에 눈이 멀진 말게. 미래를 두려워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네. 자네는 진리를 쫓아야 하지, 진리가 가진 힘에 두려워하고 갇혀 버려선 안 돼. 알겠는가?

말이 끝난 순간 찬영은 뭔가 말하려다 말고 흔들리는 동굴을 느꼈다.

천장에서 돌가루가 하나둘 부서지기 시작하고 동굴 전체가 무너지기 직전의 조짐이 보였다.

그리고 이어진 목소리가 서서히 약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나의 소임을 마쳤으니 사명은 사명의 길을 가야 할 것일세. 눈은 오랜 세월을 거쳐 또 다른 주인을 찾았으니 이제 새로운 진리를 찾아 헤매라.

목소리는 그것으로 끝이 났고, 동굴의 지진은 더 심해졌다.

‘그를 유지하던 힘이 소멸된 건가?’

그런 게 확실했다.

지금 눈앞에 뜬 창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이 시간 부로 브뤼셀의 렌즈가 소멸됩니다.

-브뤼셀의 유산이 사명에게 각인됩니다.

-열세 번째 별, 자색별을 이어받았습니다.

-브뤼셀의 유산, 심연의 눈이 당신에게 각인됩니다. 5분 후 브뤼셀의 섬은 붕괴합니다.

‘심연의 눈!’

서서히 눈두덩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진다.

조금 있으면 그 힘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겠지.

찬영은 좀 더 대화하지 못해 아쉬웠던 감정을 추스르며 다시 요드를 향해 돌아섰다.

이제 열 세 번째 별 중 일곱 개가 남았다.

요드는 날 어디로 안내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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