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3
223화
찬영은 주위를 둘러봤다.
용암이 흐르고 있는 방향이 보인다.
‘동쪽과 서쪽, 남쪽에서 전부 몰려오고 있어.’
용암은 자신들을 쥐구멍으로 몰아가듯 시시각각 이 일대로 확장해 나가고 있다.
단 몇 분 뒤면 올라서 있는 이곳마저 용암 안에 휩싸이게 될 건 자명했다.
‘그 전에 움직여야 해.’
하지만 이 순간 벡이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트랩의 기본은 교란, 절대 우연은 없어.’
하필 용암이 세 방향에서만 흘러내릴까?
‘우릴 저 신전으로 도망치게끔 하려는 계획일지도 몰라.’
그럼 벡의 말대로 당장 경거망동해선 안 된다.
벡이 이 트랩을 헤쳐 나갈 다른 방법을 강구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해!’
판단이 선 찬영이 건물 아래로 내려와 제이나에게 말했다.
“용암의 속도를 줄여야겠어요.”
“조심해요.”
제이나는 어떻게 할 것이냐 묻지 않았다.
뭘 할지 아는 거다.
“아무렴요.”
제이나를 지나쳐 걸으며 찬영이 벡을 쳐다봤다.
벡이 해내지 못하면 무리해서라도 여길 벗어나는 수밖에 없다.
‘최악의 상황이 오지 않길 바라는 수밖에.’
그 전까지는 벡을 위해 7서클 방어 마법 리플렉션 필드를 룸을 통해 사용해 볼 참이다.
지잉!
얼마나 효과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중첩.’
이어서 찬영은 중심으로 솟아오르기 시작한 푸른 반구.
하나 찬영은 계속해서 트랩을 시험하고 있는 벡을 위해 허공의 일부는 방어벽으로 가리지 않았다.
츠츠츠!
그사이 삼면에서 다가오는 용암이 방어벽에 부딪쳤다.
쿠쿵!
용암이 가진 화력과 밀려드는 압력이 한데 뒤섞여 어마어마한 위력을 일으켰다.
빠르게 소모되는 방어벽.
그것도 모자라 용암은 점점 그 양이 늘어나 방어벽을 타고 빠르게 수위가 오르고 있었다.
찬영이 힐끗 벡을 쳐다봤다. 벡의 눈빛은 아직 혼란스럽다.
준비되지 않은 게 틀림없다.
‘아직은 괜찮아.’
이를 악다문 찬영은 룸을 주입했다.
룸이 남아 있는 한 그를 위해 버텨줄 순 있다.
하지만 문제는 룸이 무한정이 아니라는 것.
그 순간 제이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레이트 실드(Great Shield).”
찬영의 곁에 서서 준비된 마법을 펼치는 그녀.
그러자 그녀의 손끝에서 나온 마나가 찬영의 방어 필드 안쪽에서 겹겹이 방패처럼 둘러져 간다.
굳어 있던 찬영의 입가에 잠깐이나마 여유가 생겼다.
“함께 버텨 봐요. 혼자 할 생각 말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찬영이 방어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이젠 정말 시간이 없다.
용암의 수위가 높아질 대로 높아져, 조금 있으면 벡의 트랩 실험을 위해 열어 둔 구멍을 통해 밀려들 것이다.
‘어서……!’
이 순간 믿을 건 오로지 벡의 판단뿐.
그러나 벡을 재촉하지 않았다.
지금 누구보다 가장 조급한 건 벡, 자신일 테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최악으로 치달을 때까지만이다.
* * *
“최악이군.”
원치 않았던 상황은 빠르게 찾아왔다. 아니,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더는 안 돼.’
엄청난 속도로 높아지는 수위의 용암을 보다말고 제이나를 돌아봤다.
“가야 해요, 이젠!”
다른 방법이 없다.
용암이 허공에 난 구멍으로 진입하기 전 미리 허공으로 날아올라야 한다.
“아…….”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그때였다.
“됐습니다!”
기다렸던 벡의 대답이 들려왔다.
이어서 황급히 달려온 벡이 외쳤다.
“벼락! 벼락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기도 전에 등골이 쭈뼛 섰다.
본능적으로 벡의 가슴을 떠밀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서자.
츳!
필드 구멍 위에서 떨어진 용암 몇 방울이 연기를 피어 올리며, 발밑에 떨어져 있었다.
더 말할 새가 없었다.
“제이나, 내 위로 실드를 부탁해요!”
그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녀와 벡을 끌어안고 위로 날아올랐다.
쐐액!
툭, 툭.
떨어지는 용암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솟아오른 찬영.
용암이 부딪치려 하면 제이나가 일으켜 놓은 실드가 용암을 비껴 냈다.
순식간에 용암을 발아래로 둔 찬영이 벡에게 외쳤다.
“다음은?”
벡이 대답 대신 들고 있던 활을 쏘았다.
탕!
콰쾅!
화살이 하늘 위에 닿자마자, 벼락이 치는 게 저 멀리 보였다.
“벼락은 그냥 치는 게 아니었습니다. 벼락이 떨어지는 위치는 한 번 칠 때마다 우측으로 15도씩 이동합니다.”
제이나가 뭔가 떠오른 듯 말했다.
“하지만 벼락이 떨어지는 최초 시작점은 계속 동일하죠.”
“네, 맞습니다. 공간의 비틀림이 있어서 그런 겁니다. 그리고 벼락이 시작되는 하늘과 지상 사이를 관통하는 건…….”
벡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은 찬영이 빠른 속도로 허공을 가로지르며 말했다.
“신전밖에 없죠.”
“예, 그러니까……. 가루도 안 남게 무너트리십시오. 저 빌어먹을 건물.”
이를 가는 벡에게, 찬영이 짐짓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게 제가 할 일이죠.”
그의 오른손에서 빛의 칼날이 다시금 솟아올랐다.
목표는 눈앞의 신전.
찬영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 * *
“하아, 하아.”
진땀을 흘린 벡이 한숨과 함께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찬영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고생했어요.”
벡은 대답도 못하고 바닥에 대자로 누워 버렸다.
그사이 찬영은 주변에 가득한 하얀 구름들을 내려다봤다.
어릴 때 꿈꿨던 천국이 딱 이런 형태였다.
솜사탕 같은 구름, 은은히 빛나는 다양한 조각상들.
양옆에 줄지어 난 조각상들을 따라 난 길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그리스 신전을 떠올릴 만한 백색 기둥의 건물이 높이 솟아 있었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온화한 분위기네.’
찬영은 용암이 흘러넘쳤던 방금 전을 떠올렸다.
아마 트랩의 중심에 있던 높은 고층 신전을 파괴하지 않았다면 꽤나 고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벡의 의도는 정확히 들어맞았다.
벡이 화살을 날린 허공에 원통형의 새하얀 홀이 생겨났다.
그 다음은 보고 있는 그대로, 하얀 구름이 펼쳐져 있는 새로운 공간이 등장한 것이다.
-키란의 반지가 진동합니다.
때마침 창 하나가 나타났다.
‘드디어.’
이 진동이 뭘 뜻하는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인벤토리에서 반지를 꺼내 손에 집어 들었다.
그러자 반지가 찬영의 손바닥을 벗어나 둥실 떠올랐다.
이어서 구름 아래에서 솟아오르기 시작한 거대한 손들.
그 손들은 순식간에 찬영 일행 곳곳에서 튀어나오며 주위를 빼곡히 둘러쌌다.
날카로운 여성의 음성이 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훔친 유산으로 잘도 이곳까지 도달했구나.
찬영이 하늘 위를 올려다보며 외쳤다.
“난 어떤 것도 훔치지 않았습니다.”
놀랍게도 방금 들렸던 목소리가 찬영과 대화를 시작했다.
-나의 반지는 내 평생, 가장 소중했던 그녀의 무덤 아래 숨겨둔 반지였느니라. 그런데도 훔치지 않았다고 할 작정이냐?
“나는 정말 훔치지 않았습니다.”
-듣기 싫다!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에게 찬영은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 얘기하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이게 대답이 될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갓피스이자 사명이며 내 곁에 있는 이들은 나를 도와준 사람들입니다. 지금 대륙은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키란 공,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한동안 들려오지 않는 음성을 초조히 기다리던 그 즈음.
-사명이라고?
“예.”
대답과 함께 찬영의 앞에 빠르게 구름 벽들이 세워졌다.
그 벽들은 그와 일행을 순식간에 차단시키며, 한가운데 로브 입은 사람 형태의 구름을 일으켰다.
서서히 걸어오는 인간 형태의 구름.
그게 누군지 정황상, 모를 리 없었다.
“키란 공.”
나직한 찬영의 목소리에 키란 공이 대답했다.
-손을 내밀어라.
찬영은 시키는 대로 했고 다가온 키란 공이 찬영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자 피어오르기 시작한 환한 빛.
그제야 키란 공이 한 발 물러나며 한결 온화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존경했던 그녀의 예언이 이제야 이뤄졌구나……. 사명, 그녀를 위해 죽음 대신 너를 기다려 왔다.
“그가 누굽니까?”
-너도 잘 알 것이다. 그녀의 흔적이 네게 느껴지니까.
찬영은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데미아.”
-나는 이곳을 수많은 탐욕으로부터 지켜 왔다. 이 날을 위해, 이 순간을 위해.
“무엇을요?”
-네가 찾아온 나의 유산이지.
찬영은 일순 구름으로 화한 그녀가 미소 짓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도 잠깐, 키란 공으로 빚어졌던 구름이 와르르 무너지며 다시 밑으로 푹 꺼졌다.
“어디로 가십니까!”
찬영의 질문과 함께 그녀가 막아뒀던 구름벽이 와르르 무너지며 제이나와 벡이 찬영을 향해 달려왔다.
“괜찮아요?”
“괜찮으십니까?”
두 사람의 걱정에 괜찮다고 대답한 찬영의 귓가에 또 다시 키란 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유산을 이어 받을 사명이여, 그대는 그대의 삶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게 무슨…….”
눈살을 찌푸린 찬영에게 제이나가 무슨 일이냐며 말을 걸어왔다.
의아했다, 방금 그 목소리를 들었다면 굳이 물어볼 필요도…….
“혹시 이 목소리, 안 들려요?”
“네, 무슨 목소리요?”
의아해하는 제이나와 함께 찬영이 벡을 쳐다봤다.
“벡은요?”
“저 역시.”
고개를 젓는 두 사람을 보며 찬영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나만 들리는 거였어.’
키란의 반지를 가진 주인인 자신에게만 말이다.
상황을 이해한 찬영이 일행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물었다.
“왜 제 삶을 버려야 합니까?”
-9서클은 신의 영역, 창조의 비밀을 엿볼 수 있는 권능의 영역이니라. 세계의 진리를 이해하는 길은 험난하다. 아무것도 잃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시도하지 말라.
“그럼, 어떻게 됩니까?”
-나의 모든 것은 소멸한다.
찬영은 조용히 마른침을 삼켰다.
‘내 삶을 잃는다……?’
그건 단순히 죽음을 뜻하는 건 아닐 거다.
아마 자신이 두고 온 모든 것들에 대한 이야기.
제이나……. 그리고 내 삶.
“하지만 전 이곳을 지켜야 합니다.”
짊어진 일이 너무 많다. 모든 걸 두고 갈 수만은 없다.
-그럼 택일해야겠지. 기회를 소멸시키던지, 혹은 네 삶을 포기하든지.
찬영은 우두커니 선 채 제이나를 바라봤다.
예전이었다면 어쩌면 혼자 결정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제이나가 있다.
“제이나…….”
그녀에게 자신에게 놓인 상황에 대해 말했다.
괜찮겠냐고.
“제가 갈게요. 그러니, 그분께 물어봐 줘요. 가능할지.”
그리고 들려온 대답.
“안 돼요, 그건…….”
고개를 젓는 찬영에게 제이나가 손을 잡고 말해 왔다.
“차원 다리로 건너갈 수 있는 건 당신뿐이잖아요. 찬영이 이곳에 머무르면 우린,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요.”
“하지만 당신이 이곳에 평생 갇혀 버릴지도 몰라요.”
“그럴 것 같아요?”
그 반문에 찬영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그럴 때마다 쥐고 있는 제이나의 손길이 느껴졌다.
‘……믿어야 해.’
찬영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외쳤다.
“내 권한을 같은 갓피스인 제이나에게 양도하겠습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너는 네 삶보다 소중한 것을 포기하려고 하는구나. 그정의 각오라면 가능하지.
찬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저하고 다시 제이나를 쳐다봤다.
“제이나, 아직 늦지 않았어요. 그냥 이대로 소멸시켜 버리는 방법도 있는 걸요.”
제이나가 대답 대신 찬영의 품으로 다가왔다. 그에게 푹 안긴 그녀가 찬영에게 속삭였다.
“이제야 비로소 당신의 등을 제대로 지킬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해요. 설사, 그게 위험하더라도……. 난 금방 돌아갈 거예요.”
그녀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찬영의 턱을 부드럽게 잡아 자신의 눈을 보게 했다.
“날 봐요. 그리고 잊지 마요. 당신만 날 기억하고 있으면 난 다시 돌아올 테니까.”
“정말 못 보내겠어. 제이나.”
“알아, 나도 알아.”
제이나의 눈가가 글썽였다.
찬영은 그 눈을 보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걸 억지로 참았다.
울렁이는 속을 다잡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손길, 숨결, 어쩌면 다신 못 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그때 제이나가 속삭였다.
“이깟 일에 두려워하지 마요. 내가 돌아올 거라는 걸 믿기만 하면 돼요.”
“알지만…….”
기어코 눈물이 흐르는 찬영에게 제이나가 웃어 보였다.
“우린 할 수 있어요.”
애써 울음을 참는 그녀를 찬영은 꽉 끌어안았다.
찰나의 순간.
조금이라도 그녀를 느끼고 싶었다.
“꼭 돌아와야 해.”
울음 가득한 찬영의 목소리에 제이나는 미소 지었고, 동시에 키란 공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유산을 이어받을 자가 정해졌구나.
이윽고 제이나의 몸이 가루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