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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자동보상-219화 (219/248)

# 219

219화

플로딘을 면회한 직후.

레딩은 제이나를 보내고 찬영과 둘만 남았다.

장소는 왕성 밖에 있는 그의 저택.

전쟁으로 인해 저택 곳곳이 난장판이었지만 그나마 그의 집무실은 멀쩡했다.

“앉지.”

레딩은 푹신한 소파에 등을 기댔다.

찬영이 뒤를 따라 맞은편 자리에 앉자 일순 감도는 정적.

“불편한가?”

“아뇨, 괜찮습니다.”

“아니, 불편하겠지. 하지만 이런 자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네. 난 그 제이나 그 아이의 삼촌이니.”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사실 조금 놀랐네. 귀족이 아닌 가문에 제이나를 시집보낸다는 건 생각도 못했으니까. 하지만…….”

굳어 있던 표정의 레딩이 희미한 미소를 띠웠다.

“제이나만 좋다면 반대할 생각은 없네. 이제야 제 삶을 찾아가려는 아이의 앞을 가로막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을 벌일 생각은 없으니.”

“교제를 허락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찬영이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들게. 로덴 가문의 공녀를 얻은 남자가 쉽게 고개를 숙여서야 되겠나?”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시킨 레딩.

“그래서 앞으로의 계획은 뭔가? 들은 대로라면 차원 다리로 향할 예정이라던데.”

“예, 그렇습니다.”

레딩은 이미 대부분의 정보를 입수한 상태였기에 그 외에는 키아누와 얘기했던 부분만 언급해 줬다.

“그렇군. 왕국이 충분히 흔들릴 일이야. 결국 그대 손에 많은 게 달리게 됐군. 아니, 모든 것이라고 해야 하나……?”

조금 씁쓸한 듯 미소 짓는 레딩에게 찬영이 말했다.

“압니다, 그래서 최선으론 모자라다는 것도…….”

“맞네, 반드시 성공해야 할 일이군.”

“예.”

“근데 말일세, 만약 그대가 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무슨 말씀이신지…….”

“차원 다리를 열지 않고 현재 왕국이 복원된 상태로 놔두는 것 말일세. 몬스터란 골칫덩이들이 있긴 하지만, 뉴 빌드 세력의 중요한 수뇌부들이 전부 처단되질 않았나.”

“그건…….”

“잘 생각해 보게. 과거엔 두렵기만 했던 몬스터들에 대해서도 대항 대책들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는데, 굳이 이런 상황을 벗어날 필요가 있을까?”

“그럴 수도 있겠군요. 완벽한 평화는 아니지만 대처 가능한 평화가 올 수도 있을 겁니다.”

“내 말이 바로 그것일세. 현재 왕국의 내부 사정이 마냥 평안한 것만도 아니지 않은가?”

차분히 입을 떼는 레딩.

찬영은 그의 의견이 충분히 이해 가능한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대륙의 복원을 미루는 것도 평화를 위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얘기.

하나 찬영은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배후 세력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면 고려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디까지나 배후 세력이 없었다면…….”

“올드 원이란 존재들을 말하는 건가?”

“예.”

“이럴 땐 뉴 빌드가 믿는 허상이라고 믿고 싶군.”

“하지만 그들은 정말 존재합니다. 실제로 그들의 하수인들과 많은 싸움을 거쳐 왔지요.”

글라투부터 차원의 돌을 이식받은 존재들까지.

무려 이번 전투에서는 뉴 빌드의 선지자는 어떤 이식자들보다 완벽히 ‘이그’의 힘을 일으켜보였다.

사명 각성이 아니었다면 그를 상대하기 쉽지 않았으리라.

“그럼 자네 생각은…….”

“조속한 시일 내에 네 번째 차원 다리로 향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또 다시 대륙이 혼란에 휩싸이리라 확신합니다.”

“달리 방법이 없겠군.”

“예, 대륙 복원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그들이 또 다른 반응을 보일 수도 있지요.”

“그럼 비상 대책 계획에는 왕국의 내부적인 일과 앞으로 발생할 외적인 환경 변화들까지 고려해야 되겠군.”

“예, 그러자면 우선 통신이 닿지 않는 다른 영지와의 교신부터 선행되어야 한다 생각합니다. 이를 A.U.와 함께 진행해 보시지요.”

“A.U라면 제이나가 말했던 그대 차원의 조직인가보군.”

“예, 그들은 저희 차원의 전 나라가 대표로 보낸 각성자들로 기반해 이뤄진 조직이며, 당장 병력 운용이 시급한 왕국에겐 좋은 동료가 되어 줄 겁니다.”

“단, 공짜는 아니겠지.”

레딩은 왕을 보필하는 브라이트의 실질적 수장이며 오랜 세월 왕국 대소사의 일들을 경험한 실무자.

이런 부분은 당연히 예상 가능한 실력자였다.

“예, 그럴 겁니다. 하나 그만큼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도 크겠지요.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걸 조건으로 내거신다면……. 좋은 선례가 될 거라고 봅니다.”

“좋은 점만 본다면 그렇겠지만…….”

“취약한 부분 혹은 단점으로 작용하는 일들은 공작님께서 미연에 방지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물론 폐하께서 허락하셔야겠지만요.”

“동의하실 걸세. 폐하뿐만 아니라 왕세자께서도 새로운 세계에 대한 거부감이 없으시네. 그만큼 그대를 비롯한 그대 차원의 희생이 컸다는 걸 들으셨기 때문이겠지.”

“다행입니다.”

“그래, 시대는 공존을 택해야 할 흐름으로 향하고 있네. 어쩌면 새로운 용병 제도를 개편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그럼 이렇게 하세. 그대는 그대의 차원과 본격적인 협약이 진행된 직후에 차원 다리로 출발하도록 하게.”

현재 눈앞에 놓인 까다로우며, 예민한 일부터 정리하겠다는 의도처럼 보인다.

‘아무래도 지구와의 큰 계약들이 정해진 후라면 차원 다리의 일을 대비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고 예상하신 것이겠지.’

공존.

최소한의 안배를 마련하기 위한 레딩의 생각.

찬영은 동의했다.

물론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확신할 순 없지만…….

‘필요하다면.’

기꺼이 기다리며 레딩을 도울 용의가 있었다.

“뭐든 돕겠습니다.”

“그래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한데 말이야.”

레딩 공작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덧붙였다.

“제이나와 결혼은 언제쯤 할 건가?”

찬영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갑자기 이런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으니까.

* * *

“풋.”

다음 날.

왕실 복도를 걷던 제이나가 찬영이 전해 준 이야기에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 아니에요. 진심이셨어요.”

“알아요. 그래도 웃긴 걸 어떡해요.”

플로딘과의 과거 청산이 끝난 후 제이나는 과거와 달리 평소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어쩌면 이게 진짜 그녀의 모습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당황했다고 ‘언제든지 하겠습니다.’가 뭐예요?”

제이나가 덧붙이자, 나란히 걷던 글로리가 불쑥 한 마디 거들었다.

“드워프라면 차라리 호탕하게 ‘당장 내일 하지요!’라고 했을 거요. 역시 드워프 같이 호탕하지 못하구려.”

여전히 드워프를 선망하는 글로리에게 찬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인간이라고 너무 차별하시는데요?”

“차별이 아니라 사실이라오. 드워프는 아주 호탕하니까.”

찬영의 옆에서 걸어가던 로레인이 붉은 머리를 찰랑였다.

“토끼 양반, 누가 들으면 그쪽이 드워프인 줄 알겠어.”

투덕거리며 어느새 공주의 접견실 앞에 선 네 사람.

미리 기다리고 있던 시종들의 안내를 받은 그들은 세 개 정도의 문을 지나 공주가 기다리는 방 안으로 진입했다.

화려하지 않은 색의 조각품이나 미술품들이 자리 잡은 방은 샤브레 공주의 성격을 짐작하게 했다.

“어서 와요.”

기다리고 있던 샤브레 공주가 창가에서 걸어 나왔다.

화려한 드레스 대신 하얀 신관 복색을 택한 그녀는 환한 미소를 보이며 네 사람과 인사를 나눴다.

“교단 내부의 급히 논의해야 할 일들에 함께 하느라 이제야 갓피스들과 대화할 시간이 생겼네요. 전투 후 곧바로 이런 자리를 가졌어야 했는데, 너무 늦게 청한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

“괜찮습니다.”

제이나의 대답에 샤브레는 미소로 화답한 후, 네 사람과 한 번씩 눈을 마주했다.

“여러분들을 소집한 이유는 다들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차원 다리 때문이시오?”

글로리의 반문에 샤브레 공주가 고개를 저었다.

“그 때문만은 아니에요. 하지만 관련은 있는 문제이지요.”

“관련이 있는 문제요?”

로레인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공주가 무슨 말을 할지 추측해 보고 있는 모양.

그사이 샤브레 공주의 말이 이어졌다.

“레딩 공작님께 왕국을 돕겠다는 말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예, 그랬습니다. 필요한 일이라 생각해서.”

“맞아요, 물론 필요하죠. 하지만 그보다 급한 일이 하나 더 생겼어요. 우선 이 일부터 처리해야 할 것 같네요.”

“어떤……?”

찬영이 막 물어보려던 찰나.

샤브레 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건 신성 마법을 일으키는 주문이었다.

찬영은 그녀의 손끝이 오른쪽 눈으로 향하는 걸 보고 순간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뭘 할지 예상된 탓.

“설마.”

“홀리 루즈.”

기다렸다는 듯 샤브레 공주가 신성력 마법을 사용했다.

은은한 빛과 함께 드러난 그녀의 동공.

“맞아요. 그대는 예상했지요?”

샤브레 공주의 시선에 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건 예상 못 했지만.’

찬영은 조용히 그녀의 동공을 들여다보았다.

‘색이 달라졌어.’

당시 그녀의 눈동자는 흰 유리알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다시 눈이 돌아오셨군요.”

이런 대답은 당연했다.

그도 그럴 게 그녀의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의 색이 전부 같아졌기 때문이다.

다만 조금 다른 게 있다면 그녀의 오른쪽 눈에만 나뭇잎 형태가 각인됐다는 것.

“보통은 두 눈이 전부 그렇게 되지 않소?”

글로리도 꽤나 놀랐는지 나직이 중얼거렸다.

“예, 보통은 그렇죠.”

제이나가 동의해 주며 찬영을 쳐다봤다.

뭔가 설명해 주길 기다리는 눈빛.

하지만 찬영 역시 아는 게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야.’

잠시 할 말을 잃고 있는 찬영 대신 로레인이 공주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공주마마, 황공하오나 갓피스가 되신 것인지요?”

“글쎄요. 갓피스가 되었다고 확신할 순 없을 것 같아요. 대신 신비로운 변화가 하나 생기긴 했지요. 우선 그 변화를 이야기해 주기 전의 일들을 들려드려야겠군요.”

모두의 침묵 속에 공주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녀는 찬영만 알고 다른 일행이 모르는 베아트리체와 샤브레 공주 사이의 설명도 덧붙여 주었다.

“……그렇게 전쟁 막바지, 한계 이상의 신성력을 사용했을 때였어요. 여신께서 저를 부르셨고 저는 그 목소리에 응답했지요. 그때 보이지 않던 오른쪽 눈이 서서히 밝아지는 게 느껴졌죠.”

“앞이 보이기 시작하신 거군요.”

찬영의 대답에 공주가 고개를 끄덕인 후 자신의 오른쪽 눈을 쓰다듬었다.

“맞아요. 오랜 세월 잊고 살았던 제 오른쪽 눈의 시력을 되찾게 됐죠. 하지만 동시에 그 이유에 대해서도 깨달았답니다.”

“이유라면…….”

나직이 중얼거리는 찬영에게 샤브레 공주가 말했다.

“바로 여러분들이에요.”

샤브레가 한 명, 한 명, 모두와 눈을 마주하며 다시 찬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오랜 세월 때를 기다려온 제 오른쪽 눈이 작금의 시대 흐름과 함께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여신께서도 제게 이렇게 속삭이셨죠. ‘시간이 됐다.’라고.”

그 말과 함께 샤브레 공주의 한 쪽 눈을 감았다 뜨니, 그녀의 눈을 통해 뻗어나간 빛에 의해 아무 것도 없던 허공에 대륙 일부의 지도가 나타났다.

“이런 일이!”

글로리가 가장 격한 반응을 보였고, 로레인의 눈빛이 훨씬 진지해졌으며 제이나는 차분히 상황을 주시했다.

하지만 그 여느 때와 같이 차분한 표정을 보였을 것 같았던 찬영의 눈빛은 웬일인지 세차게 흔들리는 중이었다.

-다섯 번째 차원 다리의 흔적을 발견하였습니다. 네 번째 차원 다리의 수복 후 개방됩니다. 단 다섯 번째 다리의 ‘문’ 은 ‘샤브레’에 의해서만 개방됩니다.

갑자기 뜬 창 덕분이었다.

하나 이것도 모자라 두 번째 나타난 창은…….

-사명과 란테고스가 조우하였고 란테고스의 임무가 사명에게 이전되었습니다. 봉인되어 있던 란테고스의 첫 번째 봉인이 해제됩니다.

샤브레 공주의 갓피스로서의 각성을 의미하는 창.

알 수 없는 단어들이 보였으나 대략, 이제까지의 툴챠, 크투가 등 갓피스 장비들을 떠올려봤을 때.

란테고스 역시 샤브레에게 생길 갓피스로서의 각성 장비를 의미하는 게 틀림없어 보인다.

그리고 그 생각이 맞았다는 건 샤브레 공주 주변의 공기 흐름이 달라진 것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음?”

샤브레 공주마저 놀란 듯 주춤거렸다.

찬영이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외쳤다.

“각성입니다. 놀라지 마시고 받아들이세요!”

그 순간 샤브레 공주의 한 쪽 눈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빛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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