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
218화
* * *
왕과 독대 이후 찬영이 왕의 침실을 빠져나왔을 때, 그가 걷는 궁의 복도 밖으로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저벅저벅.
한참 해가 지는 전경을 보며 걷고 있다 보니 맞은편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폐하와의 접견이 이제 끝나셨나 봅니다.”
“어쩌다 보니.”
미소 지은 찬영이 지수에게 다가갔다.
“기다린 겁니까?”
재차 입을 열자, 지수가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왕세자 저하를 만나 뵙고 앞으로의 일을 논의 드렸어요. 그 후에 각성자님을 뵈러 왔죠.”
“그렇군요. V.O.와 관련된 일이겠죠?”
“네, 왕성 전투에 참여하진 못했지만 그 전까지 대륙을 위해 싸워 준 저희 측의 공로를 인정해 주신다고 하시더군요. 자세한 건 폐하와 논의한 후에 결정하시겠지만…….”
“본격적인 왕국과의 교류가 시작될 수도 있겠네요.”
“네, 서로의 공존을 위해선 필요한 일이니까요.”
나란히 걷는 지수는 예전보다 한층 깡말라 있었으나, 눈동자는 과거의 어수룩한 눈빛과는 달리 훨씬 날카롭고 깊어 보였다.
처음 봤을 때에 비해 이젠 무척 성숙해진 것 같다.
“수도의 통신망이 다시 복구되면 베이콥 영지와 교신을 시작할 테고, 그럼…….”
“네, 다른 펌들도 움직이게 될 거예요. 그 전에 V.O.가 여러 가지 부분에서 선점할 수 있게 돕는 것이 제 역할이 될 테죠.”
그래, 따지고 보면 V.O.도 단순히 복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영리 목적도 있는 기업인 것이다.
여러 가지 계약 건을 따내는 게 필요하겠지.
“듣기만 해도 골치 아프네요.”
그런 찬영에게 지수가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게 대리님을 대신해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잠깐 멈칫한 찬영.
새삼 규복의 얼굴이 떠오른다.
“분명히 자랑스러워하실 겁니다. 지수 씨는 어느 누구보다 잘 하고 있으니까…….”
“네, 그러셨으면 좋겠어요. 정말.”
애써 글썽이는 눈빛을 빠르게 감춘 지수가 다시 환히 웃으며 찬영에게 물었다.
“각성자님은 이제 다른 계획이 있으신가요?”
그 질문을 듣는 순간 찬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밖을 내다보았다.
이곳도 한동안은 평화로울 터…….
하지만 찬영이 원하는 건 잠깐의 평화가 아니다.
영원한 평화지.
“계속 나아가야죠.”
* * *
어둠이 내려앉은 시각, 찬영은 나란히 걸어 내려가는 제이나를 힐끗 쳐다보다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타원형의 계단은 끝없이 아래로 펼쳐져 있었다.
“기분은 어때요?”
찬영이 물었다.
“복잡해요. 하지만 허탈하거나 그렇지 않아요.”
“왜요?”
“삶을 사는 이유가 달라졌으니까요.”
제이나의 시선을 받은 찬영은 쑥스럽게 웃었다.
마주 미소 지어준 제이나는 꽤나 길게 내려가는 지하를 내려다보았다.
여긴 왕성 외곽에 위치한 지하 감옥 ‘그로기’
반역과 같은 왕실의 중죄를 저지른 귀족들을 가둬 놓는 곳이었으나 이번 전투로 인해 감옥은 발 디딜 틈 없이 꽉 차 있었다.
찬영은 그 중 가장 악질적인 죄를 지은 자들을 가둬놓는다는 지하 6층 감옥까지 내려갔다.
끄악! 아악!
이곳저곳에서 괴성이 들려온다.
대부분 왕을 욕하고 왕국을 더럽히겠다는 욕, 여신은 잊혔다는 얘기들.
하나 그것조차 지하 6층에 이르자 오히려 조용해졌다.
6층은 적막으로만 가득했고, 유독 감시를 위해 자리 잡은 수비 병력이 많았다.
이해한다, 워낙 많은 비밀을 품고 있는 존재니까.
“왔군.”
미리 기다리고 있던 레딩 공작이 다가왔다.
레딩 로덴.
브라이트의 산증인이자 오랜 세월 키아누를 보필해 온 제이나의 삼촌.
“바쁘신 구원자를 이제야 만나는군. 폐하와는 좋은 시간 보냈다고 들었네.”
차가운 인상의 그는 표정과 달리 무척 친절했다.
하나 찬영은 그의 눈동자가 자신을 빠르게 살피고 있다는 걸 금세 눈치챘다.
지켜보고 있는 거다.
‘내가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
그래서일까?
조심스러웠지만 있는 그대로 보이고, 솔직히 행동하기로 했다.
하지만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장인어른이라도 만나 뵙는 것 같네.’
괜히 진땀을 흘린 찬영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예, 지나온 이야기를 드렸을 뿐인데 즐거워해 주셨습니다.”
“그런가?”
잠깐의 정적, 그 사이에도 레딩 공작은 찬영을 탐구하듯 들여다보았다.
시선이 따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자 제이나가 공작과 찬영 사이를 가로막았다.
“삼촌, 지금은 다른 일이 있는 걸요.”
“벌써 편드는 거냐?”
“네?”
제이나조차 순간 할 말을 잃었고, 찬영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떻게?’
누가 봐도 이건 자신들의 사이를 알고 얘기한 것이었다.
레딩이 할 말을 잃은 둘을 향해 피식하고 웃음을 지은 뒤 말했다.
“브라이트가 둘의 연애사도 못 캘 만큼 허술해 보이더냐?”
“삼촌…… 그건.”
레딩은 말을 못 잇는 그녀의 어깨 너머로 찬영을 쳐다봤다.
“자네는 일이 끝나고 나랑 얘기 좀 함세. 슬슬 할 때도 됐지?”
“예, 알겠습니다.”
순간 얼떨떨한 눈빛으로 대답을 하고 나자.
레딩이 주름진 눈가를 보이며 씩 웃었다.
“대답은 시원해서 좋군. 어정쩡했으면 감점이었어.”
또 한 번 뼈가 있는 말을 뱉은 레딩이 그제야 가장 끝에 있는 감옥으로 둘을 안내했다.
“일부러 플로딘을 마주하길 꺼려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유가 있었니?”
레딩의 옆에서 걷던 제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만나기 전 저를 돌아보고 싶었어요. 제가 그를 보고도 삶이 흔들리지 않을지 한 번 더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으니까요.”
“대답은?”
“이젠 괜찮아요. 그가 삶의 목표였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구궁!
“아쉽지만 뒷얘기는 나중에 들어야 할 것 같구나.”
레딩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지키고 있던 간수들이 감옥 문을 열었다.
그 안엔 신성력으로 이뤄진 구속구를 찬 채 온몸이 얇은 철판들로 미라처럼 억눌러져 있는 플로딘이 보였다.
유일하게 드러나 있는 그의 얼굴 부위엔 손가락만 한 침들 수십 개가 피부 곳곳을 찌르고 있었다.
“크큭, 이게 누구신가? 내가 두려워 이따위 거추장스러운 구속구로 나를 꾹 눌러 놓은 레딩 공작 아니신가?”
얼굴을 보자마자 온갖 조롱으로 도발해 오는 플로딘.
하지만 본인의 처지를 알고 있으니, 어떤 목적이 있기 보단 자포자기한 마음에서 비롯된 도발일 것이다.
찬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플로딘을 바라보았다.
뭔가 한마디를 내뱉고 싶었으나 지금 자신이 제이나와 함께 온 건 그녀가 혼자 있지 않다는 걸 직접 보여주기 위함이지, 나서기 위한 게 아니다.
지금부터는 그녀의 몫.
레딩도 이를 알기 때문인지 무덤덤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한심하긴, 그 구속구는 마력을 억제할 뿐 아니라 더는 마나를 흐르지 못하게 하여 강제적 ‘엑스’ 효과를 일으키는 구속구다. 추가로 네 몸속에 흐르는 암흑 마력을 미세하게 흡수하지. 오랜 세월 너희를 상대하며 제작하게 된 물건이다.”
“뭐?”
“그러니 그 돌과 생명을 함께하는 너는 시간이 흐를수록 말라 죽게 될 것이다. 그러니 미리 너에게 했던 질문들을 잘 되새겨 보고 대답하도록.”
“거짓말하지 마라. 올드 원의 주문이 걸린 이 힘은 내가 죽지 않는 한 누구도 앗아갈 수 없어.”
“경험해 보면 알게 될 거다.”
말을 마친 레딩 공작이 한발 물러나 제이나를 빤히 바라봤다.
조용히 심호흡을 한 제이나가 플로딘의 앞으로 한 발짝 더 다가갔다.
“오랜만이야.”
“그렇구나…….”
복잡한 눈빛의 플로딘이 잠시 후 싸늘하게 웃었다.
“제이나, 이게 얼마만이더냐? 잘 자랐구나. 아주 잘 자랐어.”
“그래, 당신 덕분이지.”
“당연하지. 내가 네 부친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세상 물정 모르는 네가 이토록 강하게 자랄 수 있었을까?”
“뻔뻔한 건 여전하구나.”
“표정을 보아하니 나를 죽이고 싶은가 보구나? 그래, 그럴 테지. 마지막으로 본 게 네 아버지를 죽일 때이니까 말이야.”
제이나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레딩이 그녀를 살피더니 넌지시 조언했다.
“뱀의 혀를 가진 놈이다. 흔들리지 말거라.”
딱히 대답 없는 제이나에게 플로딘이 다시 말했다.
“듣지 마라, 다 개소리니까. 레딩은 제 형님의 복수를 하는 것보다 날 이용해 뉴 빌드에 대해 알아내는 걸 더 원한다. 하지만 너는 네 삼촌과 다르지.”
“그래서?”
제이나의 반문에 플로딘이 유독 붉은 입술을 말아 올리며 웃었다.
“이미 알지 않느냐? 네가 뭘 해야 할지.”
“굳이?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는 너를?”
“쯧쯧, 여전히 나약하구나.”
“닥쳐.”
“아니야. 너는 네 삼촌보다 여전히 나약하고, 그저 복수라는 명목 아래 날 신봉해 온 것과 다름이 없다. 날 잊어 본 적이 없을 테니 말이야.”
제이나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플로딘이 신이 나 말을 보탰다.
“그래, 네 부친이 죽을 때 얼굴이 지금 네 모습과 똑같았다.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우며 날 믿었던 세월만큼 치를 떨었지. 그와 판박이나 다름없던 네 얼굴을 보니, 그때의 즐거움이 다시 떠오르는구나.”
뿌드득.
이를 가는 제이나에게 플로딘이 외쳤다.
“그래, 그거다! 네 감정 그대로 행동하는 거다! 네 아버지가 해야 할 일을 네가 하는 거지! 어서!”
잔뜩 독이 오른 플로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간다는 걸 느낀 레딩이 순간, 제이나의 앞을 가로막으려 했다.
한데 그때.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찬영이 레딩을 가로 막았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어서 비키게!”
아까와 달리 냉정해진 레딩의 눈빛.
하나 찬영은 제자리에 우뚝 선 채 말했다.
“그녀는 오랜 세월 이 순간만을 고대해 왔고 뭘 해야 할지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러니…….”
찬영이 그녀가 있는 곳을 다시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녀에게 시간을 주세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이나의 손에서 어마어마한 전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어서 비키게!!”
레딩이 찬영을 향해 외친 순간.
번쩍!
감옥 안이 빛으로 물들었다.
* * *
츠츠!
빛이 사라진 후 레딩은 끝까지 비켜서지 않은 찬영과 아무 일 없는 플로딘을 보며 허탈한 미소를 흘렸다.
“자네 정말…….”
할 말을 잃은 레딩과 함께 찬영이 그제야 레딩에게 비켜섰다.
“죄송합니다. 벌을 주신다면 그에 합당한 벌을 받겠습니다.”
“그래, 후회하게 될 걸세.”
싸늘하게 대답한 레딩이 마나 흐름을 읽고 몰려온 기사 및 병사들을 돌려보낸 후 플로딘과 마주 서 있는 제이나를 쳐다봤다.
제이나는 방금 전과 달리 평온한 표정이었고, 방출했던 마나는 어떤 형태로도 구현되지 않았다.
그러자 플로딘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겁쟁이 같은 년! 그것 하나 제대로 맞추지 못하겠더냐?”
끊임없는 조롱에 마나를 거둔 제이나가 말했다.
“널 죽이는 게 내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를 수만 번 고민해 왔어. 평생 그리고 네 앞에 서는 순간까지. 하지만 이제 모든 게 확실해졌다.”
“포장하지 마라. 넌 그래 봐야 평생 날 죽이지 못한 겁쟁이 공녀일 뿐이란다.”
이죽대는 그에게 제이나가 미소 지었다.
“그래, 그럴 지도 모르겠지. 그런데 널 죽인다고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공녀로 내가 돌아갈 수 있을까? 행복했던 아버지와의 그 시절로?”
“못 돌아가지, 당연히. 네년이 날 죽이지 못했으니까!”
“그래, 어떻게 하든 못 돌아갈 거야. 하지만 적어도 새 시작은 할 수 있겠지.”
“뭐?”
“난 널 죽여서, 그동안의 내 시간이 널 죽이기 위해서 존재했다는 걸 증명 하고 싶지 않아. 그러기엔 내 시간이 너무 아까워.”
“돌아도 단단히 돌았구나.”
“대신 이 순간을 기억할 거야. 이제껏 살아온 삶이 당신에게 복수하기 위한 게 아닌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였다는 기억으로.”
제이나가 돌아섰다.
그러자 플로딘이 독설을 던지며 발악했다.
“날, 죽여라! 어서 죽이란 말이야!”
플로딘은 이 순간 제이나의 손을 빌려 죽는 걸 최상의 시나리오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계획과 달리 상황은 틀어졌다.
제이나가 그의 눈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아니, 너와 달리 난 새로 시작할 거야.”
제이나가 찬영의 손을 보란 듯이 잡았다.
“나 잘했어요?”
찬영이 그녀를 향해 웃었다.
“끝내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