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7
217화
-음모오오!
타우린이 울었다.
그리고 그 울음소리를 따라 하늘 위로 블루 버드들이 날아오르며 소리 높여 울어 댔다.
승전의 울음.
“승리다!”
누군가는 자랑스럽게 얘기했고.
“살아남았어!”
누군가는 기적 같은 결과에 여신에게 기도를 올렸으며.
“일어나, 어서…….”
누군가는 죽어 버린 동료 혹은 연인의 시신을 붙잡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수많은 사연을 품은 퓨어 전투의 종극.
그건 단 한 사람으로부터 비롯될 수 있었다.
모두가 그를 부르짖었다.
전투의 신, 여신이 보낸 구원자.
퓨어 전투에 참여했던 수많은 이들은 그를 이렇게 불렀다.
-라이크의 구원자라고……!
그 뒤 폐허나 다름없던 퓨어에 다시 활기가 돌았고 해안에 나가 있던 백성들이 수송선을 타고 다시 본래의 고향을 되찾았다.
왕은 룸을 회복한 판도라에 의해 깊은 상처를 회복하여 이젠 거동이 가능할 정도가 되었지만, 아직은 안정을 취해야 했기에 자리를 비운 키아누 대신 왕세자가 그 자리를 메워 퓨어의 안정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 * *
“누이.”
라이 왕세자는 아버지가 머물렀던 옥좌를 바라보다가, 문득 어깨에 얹은 손을 느껴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쳐다본 곳엔 샤브레의 따뜻한 눈길이 있었다.
“이리 늠름하니 자랑스럽구나. 모두가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정사를 돌보는 너를 칭송한단다.”
“고마운 일이군요. 솔직히 제가 왕실을 위해 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누이가 데려온 라이크의 구원자가 이 모든 기적을 이끌었는데요.”
“라이…….”
“아, 그를 질투하는 것은 아닙니다.”
라이는 단호히 고개를 저은 후 말을 이었다.
“그저 사실을 이야기 하는 것이지요. 그는 다른 차원의 존재임에도 우릴 위해 싸워 준 것이니까요. 오히려 왕국은 그에게 큰 빚을 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 역시도요.”
“마음이 넓구나.”
“그래도 완전히 넓진 않은 모양입니다.”
“어째서?”
“부럽다 못해 질투가 나긴 하더군요. 왕국을 지킬 때 그가 사용했던 그 능력 말입니다…….”
라이는 라이크의 구원자가 보였던 그 ‘권능’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자신에게 그런 힘이 있었더라면…….
‘왕국이 이런 수모를 겪진 않았겠지.’
솔직히 여신이 어째서 자신이 아닌 그를 택한 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 뜻을 이해하려 애쓰기 보다는 다른 쪽으로 생각을 바꿨다.
“하지만 그는 왕도, 왕세자도 아니지요. 여신이 그를 택한 게 뉴 빌드로부터 왕국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면…….”
“맞아, 여신께서는 네게 왕국의 새로운 번영을 기대하셨을 거란다.”
“누이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늘 그랬어.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실 테고.”
샤브레는 라이의 손을 살포시 붙잡았다.
이제 안심한다.
라이는 더는 철부지가 아닌, 왕으로서의 능력을 하나둘씩 갖춰 가는 중인 것 같다.
위기가 기회를 만든 것처럼, 라이는 위기 속에 자신이 어떤 왕이 되어야 할지를 어떤 왕보다 치열하게 고민했을 것이다.
‘망국의 왕세자가 될 뻔 했으니까.’
그렇게 샤브레는 더욱 안심했다.
비온 뒤에 땅이 굳듯이.
“너를 믿어. 내가, 그리고 왕과 여신께서, 너를 따르는 수많은 백성들이 말이야. 왕관의 무게를 견디고 있는 네가 자랑스럽다.”
“고마워요, 누이.”
미소 지은 라이는 좀 더 결연한 마음으로 다시금, 아버지의 옥좌를 응시했다.
라이는 이 순간 라이크의 구원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아버지가 떠올랐다.
‘……둘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 * *
“베아트리체라…….”
어느 때보다 맑은 하늘을 바라보는 키아누의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실렸다.
한 번의 멸망 후 다시 듣는 그녀의 이름.
키아누는 이방인을 통해 그녀의 이름을 듣자, 새삼 머릿속이 번잡해진 것이다.
“그대가 해 온 일과 차원 너머 지구란 행성에 관한 설명은 들을 만큼 들었으나, 그대를 여기까지 이끈 것이 베아트리체였다는 사실은 날 무척 혼란스럽게 하는군. 그걸 알고 있는가?”
키아누의 나직한 질문에 찬영은 그가 자신에게 독대를 하자고 한 이유가 무엇인지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왕은 베아트리체와 긴밀한 관계였고, 누구보다 그녀에 대해 잘 아는 사람 중의 하나였어. 그럼 멸망 직전 둘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간 것일까?’
아직은 어떤 것도 단언할 수 없다.
찬영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어떤 의중을 가지고 계신지 쉽게 짚이는 바는 없습니다.”
“그런가? 그대도 전부를 아는 건 아닌 모양이로군.”
“예, 그저 단편적인 흔적들을 통해 과거의 이야기를 일부 알고 있을 뿐입니다.”
찬영은 솔직히 알고 있는 바를 정리해서 이야기했다.
베아트리체, 라인쉐리어, 모스 프레도로 이어지는 왕실과 교황과의 관계.
그리고 그 속에서 알게 된 홉스라는 단체까지…….
모든 얘기가 끝났을 때 키아누의 표정은 방금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과연, 왕은 왕인가?’
그는 마음의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는 감정 표현을 하지 않았으며 의중을 쉬이 드러내지 않았다.
그 생각이 들던 차, 키아누가 짚고 있던 목발을 옆에 두고 자리에 앉았다.
“앉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아니야. 앉게, 긴 얘기가 될 것 같으니.”
어쩔 수 없이 찬영이 자리에 착석하자.
키아누가 깊어진 눈동자를 빛내며 말했다.
“베아트리체가 차원 너머로 떠나기 전 나를 알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그럼 그 과거의 이야기들은 달리 들려줄 필요가 없겠군.”
“예, 대부분 알고 있고 나머지는 공주마마께 들었습니다.”
“그럼 성녀가 차원 너머로 떠날 당시, 내가 알고 있던 이야기를 들려줄 차례겠군.”
키아누는 그때를 회상하며 찬영에게 과거의 비밀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우선 유물에 대해 자세히 말해 주지. 유물이 가진 숨겨진 힘은 공주에게도 일러 준 적이 없으니…….”
“유물에 다른 비밀이 있었습니까?”
“맞네. 유물의 이름은 셀로……. 겉보기엔 커다란 정육면체 상차처럼 보이나, 신성력을 불어넣을 경우 무언가를 열 수 있는 열쇠가 된다더군.”
“성녀가 그랬던 겁니까?”
“그래, 당시의 그녀가 내게 그리 일러주며 말하길, 이 상자를 대륙과 긴밀히 연결된 차원에서 해제해야 한다고 했네. 그게 밀려드는 몬스터 떼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도라고 했지.”
“그땐 다른 선택이 없으셨군요.”
“그랬지. 통신이 두절되는 영지가 생기기 시작했고, 영주들과 교신하기 위해선 병력을 투입해야 했는데, 수도를 방어하기에도 병력은 모자랐거든.”
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이해한다.
뉴 빌드는 많은 준비를 해 왔기에 키아누는 성녀를 믿고 기다리는 것 말고 다른 방책이 없었을 거다.
“그럼 그 후 예상치 못한 봉인이 시작됐군요.”
“기다림에 대한 보답이 멸망으로 이어진 셈이지. 나는 어쩌면 그들이 넘어간 다른 차원 너머에서 그들이 공격을 받았다고 예상하네. 일이 잘못되어 대륙의 멸망이 시작된 거라고 말이야.”
키아누의 얘기가 끝났을 때, 찬영은 눈살을 찌푸린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키아누의 말을 듣고 나니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런 말씀 드리기 황송하오나, 교황이었던 아론에게 전해들은 얘기가 하나 있습니다.”
“아론?”
“예.”
“해 보게. 나 역시 해 줄 얘기가 있으니.”
“그것이…….”
찬영은 그가 했던 얘기들을 정리해서 털어놨다.
대륙에 퍼진다면 큰 반향을 불러올 이야기였다.
아론의 말대로라면 멸망을 가져온 건 뉴 빌드가 아니라…….
‘베아트리체였으니까.’
키아누조차 그 말을 듣는 순간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예상은 했지만.’
한동안 말을 잃은 그를 조용히 기다리던 찬영에게 키아누가 침통한 탄식을 흘렸다.
“믿기 힘든 이야기로군. 그럼 베아트리체가 내게 거짓을 고한 뒤 대륙의 멸망을 가져왔단 말인가? 그녀가 뉴 빌드에 속해 있기라도 했다는 것인가?”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기엔 뉴 빌드와 홉스 사이의 긴 악연을 설명할 방법이 없으니까요.”
“하면?”
“아직은 어떤 것도 확신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가지고 있는 게 워낙 단편적인 정보뿐이라…….”
“그렇겠지. 하나 시간이 흐른다고 그에 관련된 이야기를 알 수 있을 거란 보장이 없질 않는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찬영은 왕에게 별들의 속삭임과 차원 다리 임무를 수행했을 때 주어질 4차 캘린더 개방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줬다.
“그럼 그대가 말하는 방법들이 이뤄졌을 때 그대 안에 잠들어 있는 베아트리체를 조우할 수 있다는 얘기인가?”
“예, 확신합니다.”
베아트리체가 그렇게 약속했다.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시간이 찾아올 거라고.’
그게 언제가 될 진 모르지만 어쩌면, 네 번째 차원 다리로 향해야 할 이번에 이뤄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 그런 상황이 일어날 경우, 베아트리체가 가진 비밀을 반드시 캐내야 하네. 그래서 만약이라도 아론의 말이 사실로 증명된다면…….”
마른침을 삼킨 키아누가 조금 긴장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아론이 우리의 혼란을 위해 거짓말을 했다는 전제가 무너지네. 그럼 많은 것들이 달라질 거야.”
순간 찬영은 왕이 들려줄 얘기가 있다는 말을 떠올렸다.
“아론이 폐하께 달리 얘기를 한 게 또 있습니까?”
“여신이 이미 소멸되었고, 자신은 신인류가 된다고 하더군. 그리고 ‘이그’ 라는 존재를 언급했네. 아마도 이그라는 존재는 그대가 내게 일러준 올드 원에 포함된 것으로 봐도 무방하겠지.”
“확실하진 않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 어쨌든 아론의 이야기는 왕국 내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도 남을 일들일세. 그러니 신중해야 하네. 그때까지 지금 들은 이야기는…….”
키아누가 말끝을 흐리며 찬영을 바라보았다.
찬영이 그 시선이 의미하는 바를 모를 리 없었다.
그렇기에 여신의 소멸에 대해선 아는 바가 있었으나 침묵을 지켰다.
지금 그 얘기를 왕에게 해 봐야 그의 혼란을 더 가중시킬 뿐이다.
“예, 묻어 두도록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래, 우리 스스로 그 얘기를 언급하는 순간 왕국이 크게 흔들릴 것이야. 우리 또한 그 얘기에 혼란스러워하는 걸 증명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니 말일세.”
“이해합니다.”
키아누의 말이 옳다.
여신의 소멸부터 시작해 현재 다른 영지가 어떤 상태인지 모르는 마당, 왕의 말대로 성녀가 ‘멸망’과 관련이 있다는 얘기가 나돌기 시작한다면?
‘왕국에 대한 신뢰마저 흔들릴 거야.’
어느 때보다 결집이 중요한 이 상황에 그건 좋은 결정이 아니다.
“그런데 교황은 어째서 그 사실을 계속 혼자만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왕국을 흔들어 놓을 만한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이제까진 그럴 필요성을 못 느꼈겠지. 그대를 비롯해 증원군이 나타나기 전만 하더라도 왕국은 바람 앞에 촛불과 다름이 없었네. 또한 이 얘길 증명할 만한 단서를 그들도 갖고 있지 않은 건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지요.”
“그러니 우리가 헛소문이라 치부한다면 그만인 일이네. 하나, 그렇다 하더라도 진실은 밝혀져야겠지. 또 한 번 빚을 져야겠군.”
“아닙니다.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저 역시 고향과 그곳에 남아 있는 제 삶을 지키기 위해 하는 일이니…….”
“그렇지 않네. 우리 왕국은 그대에게 큰 빚을 졌어. 아니, 나아가 대륙이 그렇지.”
빙긋 미소 지은 키아누.
“폐하…….”
“그대가 죽을 위기를 넘기면 건너왔다는 걸 베이콥 영주에게 모두 들었네. 경이롭기까지 하더군.”
키아누가 의자에 등을 기대면서 굳은 표정을 풀었다.
“시간이 조금 있다면 그 얘기를 좀 더 자세히 들었으면 좋겠는데……. 내게 그래줄 수 있겠나.”
“지루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설마, 그럴 리가!”
환히 웃는 키아누에게 찬영은 이 먼 타향까지 오게 된 이야기를 시작했다.
간만에 느낀 평화였다.
하지만 말을 하면서도 머릿속 의문은 해갈되지 않는다.
‘대체, 베아트리체, 그녀의 의도는 뭐였을까?’
이젠 정말 가까이 다가갔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만약 이 진실을 알게 된다면 대륙의 봉인이 시작됐던 근본적 이유와 베아트리체가 아는 모든 진실이 줄지어 나올 것 같다.
그럼 그때쯤 명확히 알게 되겠지.
올드 원이란 존재들과 그들의 목적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