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
214화
안에 있던 키아누는 자신의 몸에 연결되어 있는 호스들을 몸에서 해체시킨 뒤 ‘샤의 영혼’의 머리를 개방했다.
취익!
흰 연기가 샤의 영혼 이마에서 일제히 흘러나오더니 그 안에서 백색의 풀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한 키아누가 왕국에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검을 허리춤에 차고 다른 한 손엔 매끈한 백색 투구를 벗으며 걸어 나왔다.
“아론.”
키아누는 아주 오래 전부터 교황을 보며 자랐다.
그는 이렇지 않았다.
권력을 멀리하고, 교황이 되기 전 교황의 권한 축소를 늘 설파했다.
교황은 신성력으로 대륙을 이롭게 하는 존재이지, 권력을 탐하는 존재가 아니라며…….
그런데 지금 다가오는 그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변했는가?
‘난 그게 늘 궁금했다.’
이 마당에 과거의 오랜 이야기 청산이 뭐 그리 대수이겠느냐마는 그래도 한 번쯤은 들어 보고 싶었다.
쿵.
무릎 꿇은 샤의 영혼을 타고 훌쩍 뛰어내린 키아누.
저벅저벅.
고개를 쳐든 그의 주변으로 D의 군단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키아누의 눈에도 보였다.
후크 백작, 수배를 내렸던 플로딘, 아론과 한때 신관이었던 그의 하수인들까지 모두 다…….
“파티가 따로 없구나.”
“그대를 위한 파티지.”
아론이 해골 말에서 내려오며 대답했다.
다섯 걸음도 채 남지 않은 지점에서 멈춘 아론이 검은 투구를 벗는 사이, 키아누가 물었다.
“늘 궁금했다, 그대가 왜 반란을 주도한 것인지. 어찌하여 여신을 버리고 뉴 빌드의 편에 선 것인지…….”
“내가 불경한 자로 보이나?”
“아닌가?”
아론이 움직이려던 D의 군단을 멈춰 서게 한 후 대답했다.
“마지막 가는 길이니 친절히 대해 주지. 그래, 맞다. 나는 네가 보기엔 불경한 자가 맞다. 하나 나는 모든 걸 바쳤다.”
“그 결과가 지금의 이 모습인가?”
“어리석은 왕아, 모른다는 듯이 헛소리 하지 말라. 나는 여신에게 기도했고, 원했으며, 평생을 갈망해 왔다. 하나 기도를 하면 할수록 신성력이 사라져 갔지.”
아론이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그가 지키려던 것, 그가 누구보다 갈망했던 것.
그건 ‘신성력’이었다.
여신의 끊임없는 사랑을 집착적으로 갈구한 거다.
“하나 여신은 내게 등을 돌렸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내 대를 이어갈 신성력의 씨앗들을 찾아 그들을 흡수했다.”
“설마.”
“그래, 교단에서 금지한, 신성 마법을 변형했지.”
아론이 말하는 건 ‘디바인 인헤일Divine Inhale’.
신성력을 한군데로 모아 신성 마법의 범위를 더욱 넓히는 마법, 하나 이는 악용될 소지가 있어 교단에서 금한 신성 마법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키아누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이제야 모든 조각들이 맞춰진다.
“집착이 절망을 낳았고, 절망이 영혼을 망가트렸구나. 가엾도다, 나는 네가 가엾다. 아론.”
“글쎄, 절망 끝에 신인류로 재편성될 내가 가여울까, 아니면 이대로 소멸될 그대가 가여울까?”
회색과 백발이 반쯤 뒤섞인 교황의 긴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리자, 자연스레 그의 이마가 드러났다.
“내가 차원의 돌을 이식 받은 이유는 단 하나, 새로운 그릇이 되기 위해서였다. 저기 저 차원 너머에서 우릴 내려다보고 있는 그들 사이에 여신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여신은 우릴 버렸어!”
키아누는 그의 말이 대부분 이해되지 않았지만 단 하나, 여신이 대륙을 버렸다는 말은 납득할 수 없었다.
“신성력은 무엇으로 증명할 텐가.”
“그저 잊힌 여신의 발악일 뿐이다. 너희들이 바라는 여신은 이미 소멸되어 갈기갈기 찢어졌다. 너희들이 모시는 건 여신이 아니라 극히 일부의 힘일 뿐인 것이다.”
“뭐라?”
“너희는 그저 세상에 흩어진 힘을 가지고 아직도 여신이 살아 있다고 믿는 것이지. 점차 잊혀 가는 그 막연한 희망을 붙들고 말이야……. 나는 그것을 들었고, 보았다. 저 멀리 ‘이그’ 님으로부터!”
“이그가 누구냐.”
“그대가 감히 넘볼 수조차 없는 차원 너머의 신이시지. 나 또한 그분의 그릇 중 일부가 되어 신인류로 편성되리라.”
말을 마친 아론이 D의 군단을 향해 말했다.
“그러니 너는 정해진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 한낱 모래성처럼 잊히게 될 왕, 키아누여.”
“잊힐지라도 단 한 순간이라도 내가 아닌 내 백성을 위해 살겠다. 그 희생이 헛될지라도 그거면 족하리라.”
키아누는 검을 뽑았다.
“글쎄, 아직은 장담 마라. 네가 영혼까지 소멸되는 고통을 네가 견딜 수 있을까?”
동시에 아론이 키아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아론의 이마에 박혀 있던 차원의 돌 또한 뱀의 동공처럼 변형했고, 어마어마한 중력이 키아누의 온몸을 짓눌렀다.
키아누가 신성력을 쓸 틈도 없는 압도적인 힘의 우열.
펄럭!
이어서 아론의 등을 뚫고 회색빛의 반투명한 날개가 펼쳐졌고, 그의 흉측해진 얼굴이 새하얗게 껍질을 벗어가며 변형됐다.
그 다음엔 붉디붉어진 입술 사이로 새빨갛고 가는 혓바닥이 씰룩이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암흑 마력이 그의 양손을 타고 점점 크기를 키워나간다.
“저항하지 마라. 네가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아니니라.”
크르륵!
그 권능을 보이듯, 잔뜩 굶주린 수십 마리의 망령의 개들이 그의 양손에서 튀어나오며 키아누에게로 달려 나갔다.
그것도 모자라 아론의 손이 닿는 먼 곳에서 시체 더미들이 하나둘 일어나 서로 뭉쳐지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점차 크기를 불려 나가 샤의 영혼 못지않은 높이까지 솟아올랐으며, 거대한 뱀의 형태를 이뤄 나갔다.
“차원의 돌 이식의 수많은 실패 속에서 나는 완벽한 그릇이 되었다! 자, 보아라! 이그의 권능이 나를 통한다! 이제 누가 나를 막을까? 왕이여, 부르짖어 보아라! 여신은 어디 있는가!”
이 순간 아론이 가진 건 끊임없는 재생과 변형의 힘……!
차원 너머를 엿본 자만이 빌릴 수 있는 강력한 권능이다.
‘이제 곧 소멸의 문이 열리면 나는 그분의 그분과 하나가 된다.’
이그의 권능을 강렬히 느낀 아론은 키아누 앞에 서서 한 쪽 무릎을 꿇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물었잖느냐, 네가 찾은 여신은 어디 있느냐!”
키아누는 온몸을 중력처럼 내리 누른 암흑 마력의 힘을 견디며 억지로 고개를 들었다.
하나 그의 눈동자엔 패배감이 없었다.
굴복감은 더더욱 없었고, 오로지 미래를 바라보는 희망으로 가득했다.
“그분이 느껴지지 않느냐?”
“뭐?”
“이 순간에도 늘 함께 계시거늘, 그것조차 모르는 네가 가엾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저 멀리 왕성 안에서 삼천이 넘는 병력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일제히 성벽을 지나 달려오는 그들의 위용에 땅이 울렸다.
부우웅!
뿔피리 소리가 들렸다.
우아아!
D의 군단이 빠르게 다가오는 적들을 확인했다.
“……증원인 것 같습니다. 클클.”
후크 백작이 말했다.
“이렇게 빨리?”
“아무렴 어떻겠습니까, 다녀오지요.”
후크 백작이 D의 군단을 이끌고 다시 말에 올라탔다.
그사이 키아누가 웃었다.
“말했지 않으냐, 어디에든 계신다고.”
“너를 위해 달려온 자들을 믿고 그러는 것이냐? 아직도 저런 허상에 기대다니, 너는 아직도 어리석구나.”
아론이 손을 들어 올려 암흑 마력을 둘렀다.
‘네 어리석음도 끝이다, 왕이여.’
마침내 키아누를 향해 떨어져 내리는 그의 손.
하나 키아누는 눈을 부릅떴다.
‘아론, 나는 끝까지 지켜볼 것이다.’
쐐액!
그 순간 키아누와 아론 사이에 새하얀 검이 떨어졌다.
빛살 같은 검을 느낀 아론이 흠칫하며 손을 거뒀지만, 이미 늦었다.
서걱!
검은 정확히 아론의 오른손을 갈랐고.
“크윽! 대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난 아론의 앞으로 은백색의 그림자가 활강했다.
쿵!
어마어마한 속도와 달리 가벼운 착지를 선보인 그림자는 스파크가 튀는 날개를 일으키며 키아누 앞에 섰다.
츠츠츠!
가볍게 이는 먼지바람과 함께 감도는 정적, 흙먼지에 몸을 가린 그림자의 손에서 광휘를 일으키는 칼날들이 뻗어졌다.
쐐액!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키에에엑!
수십 마리에 이르는 망령의 개들이 일제히 소멸되어 바람과 함께 흩어져 간 것이다.
이를 두 눈 가득히 지켜본 아론마저도 입을 떼기 힘들었다.
아니, 믿을 수 없었다.
“네, 네놈이 어떻게?”
이그의 힘을 능가하지 않는 이상 그건 불가능하다.
이건 권능이다.
하지만 그의 놀라움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사명으로 각성한 찬영은 시체로 이뤄진 뱀을 올려다보았다.
“더럽게 크군.”
나직한 한 마디, 그것과 함께 찬영의 두 손에 빛의 검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츠츠츠!
찬영은 슈트 안에서 씩 미소를 머금었다.
10m가 넘게 솟아오른 검이 뱀의 머리 위로 떨어진 것과 동시였다.
* * *
투투투투툭.
시체 더미로 만들어진 거대 뱀의 소멸.
그건 전장을 들끓어 오르게 하기에 충분했다.
판도라를 뒤에 태워 달리던 지수의 눈에도 보일 정도의 어마어마한 높이의 검.
“맙소사…….”
잠깐 말을 멈춘 지수가 판도라와 함께 그 빛의 검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놀라지 마세요. 사명입니다.”
“그럼 야, 양찬영 각성자님이?”
“네, 맞습니다. 그가 왔어요.”
지수는 육중한 뱀이 반으로 갈라져 적진 한 가운데로 떨어지는 걸 바라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정말 그는…… 대체 어떤 존재가 된 걸까?’
* * *
“네가 드라켄을 죽여 선지자님을 노엽게 만든 존재인 것 같구나. 맞지 않느냐?”
아론은 질문을 던지면서도 이 상황을 믿기 힘들었다.
자신의 힘은 암흑 마력이면서 동시에 ‘이그’ 의 권능 일부.
한데 직접 그걸 막는 인간을 보니 당혹스럽다.
“갓피스인가?”
아니, 놈의 눈동자엔 나뭇잎 형태 따윈 보이지 않는다.
이해가 안 된다.
그 무수한 질문에 찬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사이 그의 등 뒤로 찬영의 일행이 속속들이 나타났다.
“폐하!”
그 중 그의 얼굴을 잘 아는 제이나가 로레인과 함께 키아누의 곁으로 다가갔다.
의식이 혼미하던 키아누가 자신을 끌어안은 제이나를 보며 실눈을 떴다.
“그대는……!”
“로덴가의 제이나입니다.”
“아아, 로덴 경의 딸이 왔구나. 물어볼 것이 많은데……. 물어볼 것이…….”
이미 많은 상처를 입은 왕에겐 치유가 필요했다.
제이나가 그의 피를 로브 소매로 닦으며 말했다.
“예, 그렇사옵니다. 폐하 조금만 참으시옵소서. 당장 안전한 곳으로 모셔다드리겠사옵니다. 의식을 잃으시면 안 됩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이나가 고개를 돌려 찬영을 쳐다봤다.
찬영이 먼저 말했다.
“판도라에게 가요. 그녀라면 치유해 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제이나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로레인을 쳐다봤다.
“움직이죠.”
“그래요, 그래야 할 것 같네. 글로리 씨.”
로레인이 대답과 함께 글로리를 쳐다봤다.
“언제든 말만 하시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동하기 시작한 세 사람.
아론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어딜 가느냐!”
그때 그의 앞을 가로 막는 은백색의 슈트.
“어딜 봐, 날 봐야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찬영의 양손에서 빛의 검 두 자루가 잡혔다.
한데, 이번엔 아론이 더 빨랐다.
푸욱!
순식간에 찬영의 배를 찌른 아론의 오른손.
어느새 재생한 것이다.
“크큭, 그래, 좋다. 네가 무엇이건 상관없다.”
아론이 싸늘하게 웃었다.
“어차피 네가 벨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끝도 없이 재생할 테니…….”
그의 손을 찬영이 별 표정 변화 없이 내려다보았다.
전혀 고통 없는 눈빛.
아론도 그제야 이상함을 느꼈다.
그때 아론의 등 뒤에서 찬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재생할 수 없는 순간까지 베어 버려야지.”
“헉.”
헛바람을 들이삼킨 아론의 앞으로 빛의 검이 날아왔다.
쐐액!
처음엔 심장, 그다음은 가슴, 어깨, 다리…… 어디랄 것 없이 빛의 검은 순식간에 그의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크헉…….”
그럼에도 아론은 계속 재생했다.
그의 말 그대로였다.
하나 재생은 영원한 게 아니었다.
그의 영혼이 버틸 수 있는 재생력도 한계는 있었다.
“쿨럭!”
피를 울컥 토해 낸 아론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런 모욕감, 무기력감은 처음이었다.
이그의 권능을 경험하고 받아들인 후에 단 한 번도 이런 두려움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대, 대체 너는 누구냔 말이다!”
발악하는 아론에게 찬영이 한 걸음 다시 다가와 검을 들어 올렸다.
“입 다물어.”
찬영의 아론의 머리 위로 검을 내리찍었다.
“아직 안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