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3
213화
* * *
왕실의 백색 신전에 통해 있는 왕의 정원, 그 안에서 삼천의 병력이 재정비했다.
하나 출정 준비를 마친 그들은 멈칫했다.
전부 저 멀리 왕성 성벽 바깥에 보이는 샤의 영혼에 시선이 향해 있었던 거다.
“대, 대체 저런 게 어떻게…….”
나직이 중얼거리는 베이콥 영주에게 샤브레 공주가 말했다.
“100년을 살아도 수많은 비밀이 쌓인답니다. 하오나 왕국은 수많은 대를 이어 왔어요. 그중 가장 은밀하고 오래된 비밀이지요.”
그녀는 저 안에 타고 있을 왕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고군분투하고 계실 때 우린 우리의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예, 그리 해야지요.”
고개를 끄덕인 베이콥 영주가 속속들이 모여 있는 군단을 둘러보았다.
하나하나가 수많은 전투를 겪어 온 정예병들이다.
자랑스럽고 고마웠다.
그사이 병력을 도열시킨 수뇌부들이 다가왔다.
나머지는 그대로였고, 오로지 제이나의 자리만 클레인이 대신하고 있었다.
“1군단, 병력 이상 없소.”
로일 영주가 먼저 보고했다.
“2군단도 이상 없이 도열했습니다. 당장 출정 가능합니다!”
크루거를 비롯한 나머지 3, 4, 5 군단의 군단장들이 모두 베이콥 영주에게 보고를 마쳤다.
이후 선봉에 선 베이콥 영주가 검의 손잡이를 꽉 쥐며 그들을 둘러본 뒤 샤브레 공주와 마주 봤다.
“공주마마, 분부만 내려 주시옵소서. 어떤 불길에도 뛰어들겠나이다.”
검을 뽑아든 베이콥 영주가 검을 아래로 내리찍으며 한 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그를 따라 복창하며 각 군단장들과 기사들, 마법사들이 한 열씩 무릎 꿇으며 파도처럼 줄줄이 고개를 숙였다.
샤브레 공주는 이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니, 피가 끓었다.
‘여신이시여.’
그녀는 자신의 앞에 고개 숙인 왕국의 전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긴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마법 병단 덕분에 목소리가 확성되는 샤우트Shout 마법을 통해 그녀는 삼천 병력에게 조그만 목소리로도 또렷한 음성을 전달할 수 있었다.
모두가 주목한 이때, 그녀가 왕국의 깃발을 직접 들어 올렸다.
펄럭이는 깃발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환희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이젠 여신이 등을 돌린다 하더라도 아무 후회가 없을 것이다.
우린 서로의 곁에서 사력을 다하였으니…….
“내가 그대들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대들이 나를 기억해 주세요. 우리가 물러서지 않았다는 것을 서로 잊지 마세요.”
그녀의 진심이 담긴 이 순간 그녀가 깃발을 세워 박은 뒤 무릎을 꿇었다.
“그대들에게 여신의 가호를…….”
가진 바 모든 신성력을 일으키기 시작한 그녀.
“우리에게 내일이 오기를!”
마지막 그녀의 목소리가 정원을 휩쓴 순간이었다.
‘생추어리.’
그녀가 모든 사력을 다해 내건 신성력이 삼천 병력의 눈동자 위로 빛 무리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 때 삼천의 대군 모두는 확실히 느꼈다.
‘여신은 살아 있다!’
고개 숙인 베이콥 영주가 가장 먼저 뜨거운 눈길로 온몸을 두르는 빛 무리를 마주했다.
힘이 용솟음친다.
“전군, 폐하를 도와 성벽으로 진군하라!”
베이콥 영주가 고개를 돌려 검을 치켜들었다.
* * *
왕성의 퓨어 항구.
출항 직전의 상황, 저 멀리 성벽 위에 불쑥 솟아 있는 백색 골렘을 바라보던 레딩은 갑작스런 보고를 받았다.
“맙소사, 그게 정말인가? 삼천의 병력이 정원에서 출정식을 시작했다고? 거기에 공주마마께서도 살아 계시고?”
가장 후발대로 배로 돌아온 할린 남작의 보고에 레딩은 도무지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믿기지 않았다.
“예, 공작님!”
“어서 이 사실을 로페테 공작과 뷰로도 공작께 모두 알리게!”
“알겠습니다.”
그가 다른 공작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빠르게 움직이자, 레딩은 왕의 정원이 있는 곳을 돌아봤다.
뷰로도 공작은 반란 수장이자, 또 다른 소드 마스터였던 하트 공작의 심장에 검을 꽂은 후 왕국 유일한 소드 마스터가 됐다.
그는 그보다 연장자이자 오랜 세월 검을 닦아온 베레스 단장마저 그에게 한 수 배움을 청할 만큼 강인한 존재.
‘그런 그가 삼천 병력의 증원까지 받는다면 앞으로의 전황은 솔직히 가늠할 수 없다……!’
객관적인 수치로 봐도 그랬다.
부족한 게 하나 둘씩 채워지고 있으니까!
‘우리에게 부족했던 건 병력이었음이야. 한데 지금은 레드 드라켄도 사라졌으며 검은 별의 가동까지 폐하께서 막아 냈다. 더구나 베이콥과 로일 영주의 원군이라니……!’
마른침을 삼킨 레딩에게 다른 두 공작이 다가왔다.
“레딩, 사실인가?”
그가 있는 배로 온 뷰로도 공작이 물었다.
레딩이 고개를 끄덕인 후 대답했다.
“예, 보고대로라면 그런 것 같습니다.”
로페테 공작과 막역한 뷰로도 공작은 단순히 공작이란 타이틀 외에도 레딩에겐 오랜 세월 함께해 온 선배 같은 존재였다.
뒤이어 레딩의 곁으로 온 로페테 공작 또한 뷰로도 공작과 똑같은 질문을 해 왔다.
“레딩, 이 믿기지 않은 이야기가 정말 사실인가?”
“그렇다고 하네.”
뷰로도 공작이 대신 대답해 주자 로페테 공작이 헛웃음을 흘렸다.
“여신께서 도왔음이야. 자, 그럼 이제 어찌할까?”
그 질문에 뷰로도 공작이 레딩을 쳐다봤다.
“그것은 브라이트의 수장인 왕세자 저하와 논의하여 결정해야겠지. 우리의 거취를 그리 결정하라 이르지 않으셨나?”
뷰로도 공작은 자신을 제외한 명령 체계에도 전혀 기분 나빠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레딩은 왕을 가장 가까이서 보필하며 왕 대신 수많은 희생을 다해 온 전략가였다.
그는 오히려 그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조금도 주저하지 말게. 그대는 내분 속에서도 폐하께서 제자리를 지킬 수 있게 도왔네. 그대의 생각을 믿고 따르게. 그를 행하는 건 우리들이 맡지.”
그러자 레딩이 웃었다.
“공작께서는 이미 제 마음을 읽으셨군요.”
“노회한 여우가 다 그렇지.”
올백으로 흰 머리를 넘긴 뷰로도 공작은 주름진 눈가를 보이며 씩, 웃어보였다.
“하나 왕세자 저하께서 허락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걱정스럽게 입을 떼는 레딩과 함께 왕보다 훨씬 날카롭고 강인한 눈매를 가진 왕세자가 나타났다.
전투에 나서길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한 왕세자, 라이였다.
뷰로도를 검술 스승으로 둔 라이가 적의 피가 묻은 망토를 펄럭이며 말했다.
“레딩 공작은 내 뜻을 물어보실 것 없습니다. 나 역시 공작의 뜻을 따를 테니까요.”
레딩은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왕세자부터 여기 있는 두 공작은 똑 닮은 사람들이다.
“껄껄, 암요! 그래야 제가 검을 가르친 보람이 있지요!”
호탕하게 웃는 뷰로도와 함께 레딩이 말했다.
“폐하를 돕겠습니다. 단, 백성들을 태운 배는 일부 기사단과 함께 항구를 벗어나게 하지요.”
“진작 그래야지.”
호탕하게 레딩의 어깨를 두드린 뷰로도 공작과 함께 항구 위에서 로페테 공작이 소리쳤다.
“뭣들 하는 겐가, 안 내리고.”
이미 로페테 공작은 말에 올라타 자신의 랜스를 부하로부터 전달 받고 있었다.
“……시작하시지요.”
로페테 공작을 쳐다본 레딩이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콰이 기사단, 십안의 기사단, 수도 마법 여단까지 일천에 달하는 병력이 다시 배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 * *
구구궁.
샤의 영혼이 적을 위협하듯 발을 한 번 굴렀다.
쩌저적!
그러자 땅이 밀려든 파도처럼 밀려났다.
12m의 거신의 위용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쿵!
검과 방패를 부딪치며 몸을 낮춘 샤의 영혼이 방패 윗부분 사이로 검을 집어넣은 채, 다가올 적을 고요히 기다렸다.
쿵, 쿵!
서서히 안개 사이로 보이는 것은 수천의 병력.
하지만 환호성 같은 일반적인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한 외침 같은 건 들려오지 않았다.
쿵, 쿵!
그들은 오로지 전진만 하며 울부짖었다.
-키에엑!
-크르륵!
그건 더는 인간의 모습들이 아니었다.
신체 일부가 몬스터와 연결되어 인간도, 몬스터도 아니게 된 존재들…….
인간의 언어조차 잃어버린 그들이 가진 건 오로지 살육과 광기뿐.
츠츠츠!
샤의 영혼은 검을 들어 안개 속에 점차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는 적들을 신처럼 내려다보았다.
-보이는가, 하인리히.
“예, 전하.”
-우리가 인간이길 포기한 자들에게 맞설 최후의 보루일세.
“영광이옵나이다.”
-나 역시.
-키에엑! 죽여라!
수천의 병력이 샤의 영혼을 향해 몰려들었다.
두두두두!
“저들은 소신에게 맡겨주시옵소서.”
이번에 그가 양손에 쥔 건 청록색 불길과 푸른얼음이었다.
화르륵.
그중 하인리히가 왼손에 있는 불길을 지상 아래로 내던졌다.
그러자 단숨에 몰려드는 적들 아래까지 용암처럼 들끓으며 지하 아래로 빠르게 뻗어져나갔다.
쐐애애액!
그리고 수천의 병력이 샤의 발치까지 몰려온 그 순간.
높이가 무려 15m까지 치솟는 어마어마한 양의 불기둥이 지하에서 하나 둘씩 엄청난 속도로 솟아올랐다.
콰콰콰콰!
달려오는 수천의 병력의 선봉이 단숨에 무너졌고, 중열까지 그 불길이 뻗어졌다.
“후우, 후우.”
하인리히는 분출하는 용암 같이 뻗어나가는 마법을 보며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마지막이구나.’
생명의 불꽃이 담긴 마법이다.
이제 마나의 축복 아래 소멸되리라.
“폐하. 신, 하인리히. 왕의 나팔 속에 잠들겠나이다.”
나직이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에 왕은 소리 없이 울었다.
‘아이스 크리스털 스톰Ice Crystal of Storm’
8서클 대마법사의 생명이 깃든 얼음 수정 폭풍이 불길에 휩싸인 병력 위로 우박처럼 쏟아졌다.
-키에엑!
-크아아!
적들의 비명과 함께 얼음와 불이 뒤섞인 전장으로 왕의 검이 낙하했다.
‘홀리 웨이브Holy Wave.’
그 여파로 어마어마한 양의 신성력이 물결처럼 뻗어나가 적들을 집어삼켜버리는 광경은 그야말로 신의 심판과 같았다.
그야말로 압도적.
수천 중 절반의 병력이 휩쓸려 사라졌다.
조용히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론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꽤나 화끈하군.”
전황의 흐름이 바뀌고 있다.
저기 성벽 앞에 서 있는 단 한 기의 골렘과 그 어깨 위에 내려앉은 8서클의 마법사로 인해…….
‘장난감이 있을 줄이야.’
한참 높이 올려다봐야 하는 ‘샤의 영혼’.
이런 골렘이 왕성 아래 있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왕세자 시절부터 봐온 대로 아주 영악하구려. 그때 쳐 냈어야 하는데…….”
하나 우습다.
저들은 감히 누굴 상대하고 있는지 아는 걸까?
아론은 피식 웃은 뒤 곁에 선 플로딘과 후크에게 말했다.
“구경은 끝났다. 움직여라.”
검은별과 수천의 병력에 저들이 어떻게 대항하는지 충분히 보았다.
그가 그리 중얼거렸을 때쯤, 후크 백작이 아론을 앞지르면서 말했다.
“이그의 뜻을 받듭니다.”
“그래, 머지않았다. 소멸의 문을 통해 그분께서 강림하실 것이다.”
아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해골 말을 탄 D의 군단이 죽어가는 병력을 가로질렀다.
“그 전에 오랜만의 회포를 푸세, 왕이여.”
그들의 뒤로 아론이 말에 탄 채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자 뱀처럼 돌변한 그의 눈동자.
과거, 신성력을 담았던 그의 몸은 이제 암흑마력이 깃든 그릇이 되었다.
‘뱀의 눈동자.’
이미 저 장난감의 약점은 파악이 끝났다.
신성력은 암흑 마력으로 봉쇄하기 힘드나…….
“마나는 다른 문제지.”
그는 이어서 암흑 마법을 사용했다.
‘망령의 더미.’
죽어버린 시체들이 하나둘씩 뭉치며 거대한 벽처럼 일어나기 시작한다.
구구구궁!
위치는 ‘샤’의 영혼.
-감히.
‘샤’의 영혼이 물러나며 솟아오르는 시체의 벽을 향해 빛의 검을 휘둘렀다.
콰지직!
시체 더미는 부서졌다.
* * *
그동안 아론은 말을 몰아 비명을 지르는 부하들의 시체 더미 한 가운데를 조금의 피해도 없이 터벅, 터벅 지나쳤다.
그를 발견한 키아누가 외쳤다.
“아론! 그대의 역심을 내 오늘에서야 끊겠다.”
거대한 검이 아론을 향해 떨어졌다.
아론은 떨어져 내리는 검을 보고도 그저 미소만 지었다.
“무덤에서 올라왔으니, 무덤으로 다시 넣어 주마.”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샤의 영혼이 멈칫하며 검이 아론의 머리 위에서 우뚝 정지했다.
-어떻게?
당혹스러워하는 키아누의 목소리.
아론은 그 목소리에 희열을 느끼며 외쳤다.
“네 잘난 머리 아래에 누가 있는지 보아라!”
망령의 더미는 그저 유인책이었을 뿐.
어느새 후크 백작을 따르는 D의 군단이 샤의 영혼 관절 곳곳에 매달려 있었다.
그들에 의해 디스펠의 주문이 깃든 주먹만 한 차원의 돌이 D의 군단에 의해 마나가 이동하는 관절 곳곳에 박힌 것이다.
“크큭!”
여유 있게 웃은 아론이 검을 손끝을 툭 쳐내자 그 강인하고 육중하던 샤의 영혼이 그의 앞에 검을 내리찍으며 두 무릎을 꿇었다.
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