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1
211화
* * *
레드 드라켄은 20m에 다다르는 육중한 몸체를 지닌 데다가 견고한 검붉은 가죽과 무한정 자라나는 재생력까지…….
그야말로 사상 최강의 생명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생명체가 지금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키에에엑!
거대한 날개들을 펄럭이며 날아오르던 레드 드라켄의 가죽 안에서 새하얀 검이 7m까지 솟아올라 단번에 사선으로 배를 가른 것이다.
쩌적!
끊임없는 재생력을 자랑하던 드라켄의 가죽도 배 속에서부터 뚫고 나오는 빛의 검에는 저항하지 못했다.
그 순간 벌어진 틈으로 빛살처럼 날아오른 은백색의 그림자.
쐐액!
순식간에 공간을 가로질러 드라켄을 앞지른 그림자는 방향을 전환해 드라켄을 아래로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쉬울 줄이야…….’
눈 위에 자리 잡은 ‘V’자 금속을 통해 내려다본 레드 드라켄은 분명 컸다.
하지만 이전처럼 위압감이 넘치지 않는다.
전과 달리 힘의 우위가 명확히 느껴진다.
찬영이 시선을 돌려 지상으로 핏물을 쏟아 내는 놈의 상처를 봤다.
이제 재생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놔두지 않을 거니까!’
찬영이 뻗은 팔 주변에서 빛의 칼날들이 솟아올라 허공 위로 띄워졌다.
쐐액!
눈 깜짝할 새 길게 자라 팔에서 빠져나온 빛의 칼날들이 찬영의 손끝이 가리킨 곳으로 날아갔다.
푸욱! 푸욱! 푸욱!
그 칼날들은 재생되기 위해 붙으려는 가죽 사이사이에 쐐기처럼 박혔다.
방금 전까지 찬영의 일행을 삼키려 했던 레드 드라켄, 드라켄의 눈동자에 빛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하늘 위에 선지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살아 있었다고?
믿기 힘든 눈치.
그때 찬영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자 그의 등 뒤로 마치 전류로 이뤄진 날개와 유사한 날개에서 은은한 빛이 흘렀다.
이 때 찬영의 눈동자는 더 이상 나뭇잎 형태의 문양이 아니었다.
그는 몰랐으나 새하얀 빛의 스파크가 일렁이는 백색 눈동자가 되어 있었다.
사명으로 각성하며 생긴 또 하나의 변화였다.
-날갯짓을 멈춰라.
그야말로 ‘지배’였다.
알데바란의 권능이 가져온 힘에 간신히 버티고 있던 날개들이 일제히 돌처럼 굳었다.
더는 체공을 유지하지 못하고 지상으로 추락하기 시작한 레드 드라켄.
놈의 눈동자에 공포가 실렸다.
쐐애애액!
찬영은 레드 드라켄을 따라 날아가며 그 머리 위에 올라탔다.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는 땅.
하나, 찬영은 중력과 속도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지 태연하게 균형을 잡은 채 레드 드라켄의 가운데 머리 위에 자리 잡았다.
레드 드라켄과 정신이 공유되어 있는 선지자는 분명 자신의 말을 듣고 있을 것이다.
“질문이 잘못됐어. 너는 내가 어떻게 살아 돌아왔는지를 궁금할 게 아니라…….”
찬영이 레드 드라켄의 이마 위에 손을 올렸다.
“이제부터 내가 너를 어떻게 할지를 물어봤어야 해.”
-웃기는군. 레드 드라켄은 나의 피조물일 뿐이다. 피조물을 죽였다고 해서 네가 우위에 서 있다고 생각하느냐? 너무 어리석어 애석하기까지 하구나. 하찮은 인간의 육신은 나를 해할 수 없다.
여유까지 느껴지는 놈의 음성에 찬영은 조용히 반문했다.
“네가 리치라서?”
이 질문은 그간 쌓여 온 전대 갓피스에 의한 확신 섞인 반문.
그러자 놈이 침묵했다.
일종의 대답이나 다름없었다.
-네놈은…… 대체 누구냐?
목소리는 담담하나 심적으로 흔들린 걸 알고 있다.
‘내가 어떻게 이 많은 걸 알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의아하겠지.’
그 의아함은 두려움이 될 거다.
“아직은 궁금해할 것 없다. 어차피 방금 전에 말했던 것처럼……”
마침내 드라켄과 땅이 부딪치기 직전.
찬영의 손 안에서 빛이 흐르고 드라켄의 가죽 바깥으로 수천 개의 빛의 칼날이 솟아오른다.
“널 찾아가마.”
쾅!
레드 드라켄이 지상과 부딪치는 순간, 찬영의 모습은 레드 드라켄의 머리 위에서 사라져 있었다.
* * *
지잉!
추락한 충격으로 인해 분지까지 만들어 낸 레드 드라켄의 시신 옆에서 르리에 문이 열렸다.
동시에 찬영은 사명을 해제했다.
사명과 연결된 룸의 힘을 거두어들이자 사명이 빛의 입자가 되어 가슴 속으로 사라졌다.
필요하다면 언제든 다시 초기 전신 슈트 상태로 되돌아올 것이다.
“맙소사.”
그사이 르리에 문을 통해 돌아온 글로리가 옆에 놓인 레드 드라켄의 시체를 보며 경악했다.
따라나온 로레인이 등지고 있는 레드 드라켄을 보지 못하고 말했다.
“뭔데 그래요? 지금 문이 열린 것보다 놀랄 일이 뭐가 있다고…….”
“뒤, 뒤를 보시오.”
막 고개를 돌린 로레인이 ‘헉’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뭐, 뭐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이나가 타우린과 함께 르리에를 통해 빠져나왔다.
제이나는 드라켄에게는 시선을 주지도 않은 채 눈물을 글썽였고, 타우린은 찬영을 보자마자 뛰어왔다.
“어이쿠!”
늘 느끼는 거지만, 처음과 달리 녀석은 정말 무거워졌다.
-정령왕아, 이제 괜찮아?
“그래, 괜찮아.”
녀석을 다독인 찬영이 다가온 제이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찬영이 글썽이는 그녀를 보며 볼을 겸연쩍게 긁었다.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배, 안 고파요?”
어느새 지켜보고 있던 로레인이 소름 돋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어후, 저 머저리. 여자 마음을 저렇게 모를 수가 있나? 내가 저런 머저리한테 마음을 줄까 고민했다니……. 아, 이거 혼잣말이니까 신경들 쓰지 말아요.”
그리고 냉큼 고개를 돌려 버린 로레인이었다.
덕분에 찬영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 버렸다.
‘혼잣말 치고는 워낙 크게 들리던데…….’
“그렇게 별로였어요?”
제이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고.
“네, 최악이었어요.”
그녀가 대답과 함께 품에 안겨 왔다.
그제야 스스로 안도했고 돌아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래, 진작 저랬어야지. 머저리 같긴…….”
또 다시 들려온 로레인의 목소리도 한몫했다.
* * *
그 후 찬영은 타우린을 르리에로 돌려보내고 일행들에게 레드 드라켄과 있었던 일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그러면서 나뭇잎 형태의 문양이 소멸됐단 사실에 놀라기도 했다.
“……어쨌든 그래서 놈이 이렇게 죽은 거구나?”
로레인이 물었다.
“네, 맞습니다.”
제이나가 말을 보탰다.
“충분히 위험했네요.”
“그 덕에 값진 걸 얻었죠.”
찬영은 자신의 심장을 톡톡 두드린 후 레드 드라켄을 돌아봤다.
녀석을 죽인 후 보상이 크게 쌓였고 그 보상들의 처분이 또다시 큰 성장을 불러왔다.
-네 번째 차원 다리까지 개방도 89.4%
녀석이 품고 있던 차원의 돌 흡수로 인해 90% 수치에 가까워졌고.
‘룸 수치가 두 배나 뛰었지.’
인벤토리에 남겨져 있던 다른 아이템까지 합쳐 대부분 룸으로 흡수시켜 도합 32,520의 룸이 상승했고 기존의 것과 합쳐져 64,820의 룸이 된 거다.
‘충만해.’
이번 룸 흡수로 인해 그간 지니고 있던 장비들이 전부 사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룸 체인지가 있으니까 괜찮았다.
그 뒤 마지막 싸움을 대비하기 위해 역행의 시계 등의 쓸 만한 아이템을 제외하고, 나머지 아이템을 전부 털어 냈다.
‘사용해 보진 않았지만 2분 전의 상태로 회복된다는 게 룸까지 허용될 수도 있으니까…….’
그런 여러 가지 이유들로 아이템을 정리하며 한편으론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특히 아슬란을 정리할 때 그랬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전쟁을 끝내기 위해 시작했던 것들.
더 나은 물건이 나타났는데 굳이 떠안을 필요도 없었다.
어쨌든 그렇게 분류해 남은 건 다이아 1급 박스 두 개와 모종의 아이템 하나.
그중 박스 두 개는 그간 박스 합성을 위해 모아 뒀던 박스들과 함께 조합시켰다.
사명을 획득하긴 했지만 언제 어디서 필요한 아이템이 나올지 모르는 법.
변수를 대비하기 위해 굳이 전투 아이템이 아니어도 다양한 소모성 아이템을 필요한 건 당연했다.
‘더구나 그 가치 수준은 박스가 성장할수록 훨씬 효율적일 테니까.’
그래서 다이아 이상의 박스가 나오길 고대하며 택한 박스 조합이다.
그리고 이미 다이아 1급 박스들이 워낙, 즐비한 조합이라서 그런지…….
-마스터 9급 박스를 획득하였습니다.
-마스터 9급 박스 최초 진입 업적 달성으로 인해…….
‘드디어 진입했지.’
어느 정도 예상한 결과물이라도 새로운 상위 박스의 획득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었다. 또한 박스 진입 업적 달성 또한 놀라운 수준.
-마스터 9급 박스 개봉으로 인해……획득하였습니다.
그렇게 고대하던 박스 개봉의 아이템 확인까지 경이로운 결과로 마친 뒤, 마지막으로 사용할 아이템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무슨 생각 하시오?”
곁에 있던 글로리의 질문에 잠깐 동안의 생각을 마친 찬영이 일행에게 말했다.
“이제 한 가지 일만 마무리하고 출발하도록 하죠.”
이동수단은 걱정할 필요 없다.
‘사명의 워프가 있으니까.’
사명의 ‘워프’는 차원 다리와 차원 다리 사이를 잇는, 데미아의 워프와 같은 효과를 낼 뿐만 아니라, 대륙에서는 포탈과 동일한 효과도 낼 수 있다.
‘룸만 있으면 차원이든 공간이든, 단숨에 이동할 수 있는 거지.’
특히 룸을 크게 소모하면 할수록 많은 인원을 대동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눈 감았다 뜨면 왕성이 될 거다.
“다들 전투 준비들 해 둬요.”
조언을 남긴 찬영은 마지막 고민 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창을 띄웠다.
-레드 드라켄의 하트
-가치 : 21,200
-설명 : 레드 드라켄의 의지가 실린 심장입니다. 에픽 등급의 영약이며 레드 드라켄보다 낮은 정신력을 소유한 이의 섭취는 정신 파괴를 불러옵니다.
-단, 소유자가 레드 드라켄의 정신력을 뛰어넘는 존재라면 레드 드라켄의 의지는 당신의 육신에 또 다른 날개를 달아 줄 것입니다.
‘뭘 우선해야 하지?’
직접 섭취하느냐, 아님 룸을 흡수하느냐.
‘하지만 부족한 쪽에 힘을 더 실어야겠지.’
이렇게 생각한 데엔 ‘육신’이란 단어가 한몫했다.
‘만약 내 생각이 맞는다면…….’
이건 육신의 스텟을 성장시키는 최고의 영약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육신의 성장은 룸에 큰 영향을 주겠지.’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물론 위험 요소가 있긴 하지만…….’
레드 드라켄의 정신력이 얼마나 높던 간에 지금 자신이 가진 열망보다 크진 않을 것이다.
-레드 드라켄의 심장을 흡수하시겠습니까?
찬영이 조용히 그 창을 응시했다.
이 섭취만 끝나고 나면…….
왕국은 다시 왕을 되찾게 될 거다.
‘그렇게 만들 거니까.’
찬영은 대화를 나눴던 선지자를 떠올리며 다시 결연해졌다. 왕국을 둔 결전이 코앞에 와 있었다.
* * *
퓨어 장벽 부근, 상공.
박쥐 형태의 비행 몬스터가 날아다녔다.
아래엔 수백의 공성 병기가 마지막 남은 수호 방호벽을 향해 끊임없이 공격을 가하고 있었고, 그 주위에 각종 지상 몬스터들과 해적 그리고 변절한 병사, 용병 등이 모인 후크 백작의 수천의 병력이 도열해 있었다.
하나 병사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병력의 형태가 무척 기괴했다.
그들 중 대다수가 인간이길 포기한 듯이 신체의 일부가 몬스터의 형태로 변한 것이다.
그렇게 다양한 적들의 도열을 따라 위치한 최후방.
퓨어 장벽과 가까운 자리에는 에너지를 응축 중인 검은 별이 위치했고, 그 검은 별 사방에는 검붉은 색의 깃발이 꽂힌 막사들이 있었다.
그 막사 중 정중앙에는 바퀴가 달린 5m 높이의 이동 첨탑이 있었는데, 그 첨탑은 무슨 금속으로 만들었는지 새카만 밤을 연상케 했다.
그러나 놀라운 건 이뿐만이 아니었다.
첨탑의 제일 높은 꼭대기에 어마어마한 양의 차원의 돌이 보였다.
사람의 손아귀와 동일한 형태의 구조물 위로 한때 로레인의 마을에서 폭발을 일으켰었던 양 이상의 차원의 돌이 제자리에서 휘돌고 있었던 거다.
* * *
첨탑 안.
보랏빛 구체가 떠 있는 제단 아래.
탑과 동일한 금속으로 온몸을 두른 존재가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엔 검은 로브를 입은 두 명의 마법사가 무릎 꿇고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로일 영주에게서 도망친 말론이었다.
다른 한 명은 성별조차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얼굴의 대부분이 썩어 버린 존재였다.
“레드 드라켄이 소멸했다.”
그 말에 꿀꺽, 말론은 더욱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
로일에서 대피할 때까지만 해도 조만간 사태가 진정되리라 생각했다.
군다 바오트가 목숨을 걸면서 검은 별을 사수했고, 결국 계획대로 왕성까지 모든 병력이 집결했으니까.
한데, 뭔가 묘하게 뒤틀렸다.
‘레드 드라켄은 선지자들께서 올드 원님의 힘을 빌려 오랜 세월 일궈 낸 사상 최강의 그릇.’
선지자들의 품 안에서 최근 완성된 그 그릇은 점점 더 성장해 나갈 계획이 있었다. 퓨어를 비롯한 수많은 곳을 완벽히 파괴시키지 않은 것도, 이 일대 전부를 레드 드라켄의 성장 서식지로 만들기 위함이었는데…….
그때 선지자가 그를 불렀다.
“말론.”
“하명만 하시옵소서.”
숨죽인 말론에게 선지자가 말했다.
“소멸의 문을 실행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