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
207화
* * *
첫 번째 장벽, 퓨어의 상공.
머리가 세 개 달린 거대한 몬스터가 하늘을 활보했다.
검붉은 비늘이 머리부터 꼬리까지 덮여 있는 몬스터는 생김새가 꼭 악어를 닮았고.
펄럭!
여섯 개의 날개가 체공을 유지시키며.
-크르르.
매캐한 연기가 숨을 쉴 때마다 콧김과 송곳니 사이로 피어오른다.
각 머리에 달린 두 개의 샛노란 눈동자.
총 여섯 개의 눈동자를 굴린 삼두룡은 높이 상승했다 빠르게 하강하며 들끓는 입김을 토했다.
츠츠츠츠!
삼두룡의 브레스가 이글거리는 넓은 불길을 마치 노도처럼 왕궁 아래로 길게 쏟아 내며 하늘을 가로질렀다.
그러자 그럴 때마다 투명하고 얇은 촘촘한 수호 방호벽이 하얀 빛을 번쩍거리며 쏟아지는 불길을 방사시켰다.
-크아아앙!
파괴되지 않는 것에 삼두룡이 포효하며 다시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 뒤로 왕궁을 둘러싼 수백의 공성 전차들이 암흑 마력이 깃든 거대한 암석들을 쏘아 올렸다.
마치 지상에 추락하는 유성우들 같았다.
쐐애액!
저 중 하나라도 떨어진다면 높은 내부 성벽으로 둘러싸인 왕궁 첨탑과 건물들은 모두 무너질 게 뻔했다. 그러나 방호벽은 굳건했다.
쾅, 쾅!
하지만 조금씩 균열은 늘어나고 있었고 방호벽이 감당하는 충격들의 여파가 지진처럼 지상 아래, 이어져 내렸다.
* * *
퓨어의 왕궁에는 한때 수많은 신하들과 함께 기도를 올렸던 여신의 신전이 있다.
이름하여 백색 신전.
벽부터 기둥까지 전부 백색인 이 제단은 초대 왕이 직접 설계했다는 곳이다.
오랜 세월, 헤라클 가의 왕들은 선조의 뜻을 이해하고 존경하는 의미에서 이 제단을 보수하고 유지시켜 왔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백색 신전의 한가운데에는 여신의 존재를 상상하며 제작한 벽에 걸린 6m에 높이에 이르는 여신 조각상이 있다.
푸스스!
조각상이 자리 잡은 천장 위로 돌가루들이 잘게 흩어져 떨어졌다.
지진이 시작됐다.
그 소란에 기도하고 있던 왕은 자신의 황금빛 눈동자를 떴다.
헤라클 가의 43대 왕.
키아누 샤 헤라클.
샤는 희망을 뜻하며 신성 왕국의 오로지 왕만이 이름과 성 가운데 샤의 칭호를 붙일 수 있었다.
그리고 왕은 샤의 칭호를 받은 존재답게 여전히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다.
“저는 여신께서 이 나라를 버리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계속되는 흔들림 속에서도 왕의 목소리는 굳건했고 조금의 의심도 없었다.
“하오나 이 왕성 아래 모두가 여신께서 사라지신 것이라 두려움에 떨고 있나이다.”
신관은 물론 왕에게조차 신탁이 끊어진 지금 여신이 대륙을 버렸다는 이야기는 기정사실화되고 있었다.
물론 한 번의 멸망 이후 다시 찾게 된 삶.
그 삶은 여신께서 내주신 것이라는 주장이 잠깐 희망을 북돋긴 했으나…….
‘잠깐이었지.’
후크 백작의 침입이 이뤄지고 수많은 몬스터들의 왕궁의 수호 방호벽까지 균열을 일으킨 마당에 희망을 다시 되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들을 지켜 주시옵소서. 만약 희생이 필요하다면 이 한 목숨, 기꺼이 거두소서.”
늘 같은 기도였으나 왕은 이 기도를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저벅저벅.
기도가 끝나갈 무렵 철제 부츠 소리가 들리자, 왕은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다부진 체격을 가진 왕이 넓은 등을 돌려 풀어헤친 황금빛 곱슬머리 사이로 날카롭게 눈동자를 빛냈다.
눈동자는 부드러웠으나 강인했다.
“레딩.”
중후한 목소리로 왕이 그를 불렀다.
레딩.
로덴 가의 공작이자 이제껏 브라이트를 이끌어온 남자.
그는 냉철한 인상과는 달리 매사에 열정적으로 소임을 다해 왔다.
“폐하.”
무릎 꿇는 그를 향해 왕이 손을 저었다.
“긴 인사는 접어 두지.”
예법을 버리란 파격적인 얘기.
하나 레딩은 이제 그 얘기가 익숙했다.
오래전부터 왕은 그리 하라 일렀다.
예법을 할 시간에 더 중요한 일들을 하는 게 낫다면서.
그렇게 상황에 따라 실리를 더 중시할 줄 아는 그런 왕이었다. 그리고 그런 왕을 무척 신뢰했고 따랐다.
그의 깊은 눈을 보고 있으면 전황이 뒤집힐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생겼고, 흔들림이 사라졌다.
“또 레드 드라켄인가?”
왕의 질문에 레딩은 잠시가 들었던 상념을 접고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오늘로써 5차 공습입니다.”
“균열도는?”
“하인리히 탑주의 계산에 따르면 대략 67%의 균열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인리히 브라운.
상아탑의 주요 인사들이 대거 죽고 난 후 상아탑의 관행대로 새로운 탑주가 된 이다.
하나 문제는 그의 나이.
올해 나이 백삼십에 이른 그는 본래라면 상아탑을 떠나야 하는 원로다.
당연히 체력부터 마나를 견디는 전반적인 신체까지 떨어져 있었다.
경험과 지식은 풍부하나 몸이 따라 주지 않는 상태.
하나 그 말고 다른 대안이 없는 게 사실이었기에 하인리히는 왕의 청에 기꺼이 탑주의 자리를 맡아 주었다.
하지만 그의 체력을 보면 그가 이 잔혹한 전투를 얼마나 더 견뎌 줄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 왕이 마법을 비롯한 공격들을 차단해 주는 방호벽을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이 일컫는 검은 별의 세 번째 가동을 막을 수 있는 정도인가?”
왕의 물음에 레딩이 대답했다.
“아직까지는 그렇습니다만, 30% 이하로 떨어지면 수호 방호벽이 소멸된다고 합니다.”
“……그렇군.”
왕, 키아누는 담담하게 말했다.
초조하고 불안함 같은 건 전혀 표정에 보이지 않았다.
“다른 귀족들은?”
“후크와 막역했던 비솝 공작의 반란 이후부터는 따로 회합을 갖지 않습니다.”
왕국의 공작은 열 명, 이들 중 세 명이 전사했고 네 명이 반란을 일으키려다 실패했으며, 레딩을 포함한 세 명은 왕의 곁을 지켰다.
그리고 나머지는 왕궁에서 뽑은 행정관이나 전투 요직을 맡은 남작들이다.
한때 오백여 명에 이르던 이 인재들도 반란에 휩쓸려 이젠 백여 명도 채 남지 않았다.
“그 외의 통신은?”
“여전합니다. 탑주에 의하면 요인은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찾아야 한다고 합니다.”
“결국 방호벽 밖으로 나서야 한다는 얘기로군.”
“……송구합니다.”
최악의 소식만 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 레딩은 참담함에 절로 고개를 숙였다.
“고개 숙이지 말게. 우리가 포기하고 고개를 숙이는 건 백성을 위해서여야만 하네. 그러니 전황이 좋지 않더라도 고개 숙이지 말게.”
“예.”
“로페테 공작에겐 따로 얘기가 없던가?”
“있었습니다.”
레딩은 왕이 이 소식만을 기다렸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사실상 가지고 온 소식 중 유일한 낭보였다.
“병력으로 자원해 편입된 백성들을 제외하고 남은 백성들을 태울 선박 건조가 내일쯤이면 완료될 것이라 합니다.”
“그런가?”
“예.”
“용단을 내려야 할 때로군.”
이미 살아남은 귀족들의 생각은 물어볼 만큼 물어보았다. 하나 어느 누구 한 명 마땅한 의견이 없었다.
사방이 가로 막혀 있으니 그럴 수밖에.
“동이 트면 백성들을 건조된 선박에 태우고 남아 있는 지상군과 해군들을 전부 소집시켜 배에 태우게.”
“예, 로페테 공작에게 왕명을 전하겠습니다.”
퓨어 정예 함대를 이끄는 총제독의 지위는 로페테 공작에게 있었다.
그의 총괄 아래 수송 계획이 오랫동안 준비되어 온 것이다.
“또한 브라이트, 십안의 기사단, 콰이 기사단까지 모두 승선시키게.”
“안됩니다, 폐하……!”
무표정이던 레딩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셋 모두, 왕성을 지키는 마지막 주력 기사들이다.
그들을 비운다는 건 방호벽이 깨졌을 때 왕궁을 버리겠다는 것과 마찬가지.
하나 이런 결정과 달리 왕은 포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오랜 세월 그와 함께해 온 레딩이 모를 리 없었다.
“폐하께서 계신 곳이 곧 왕궁입니다. 재건을 위해서라도 폐하께선 함께 승선하셔야 합니다.”
“내가 이런 결정을 내릴 줄 몰랐던가?”
“아닙니다.”
“그럼, 내게 어떤 대답이 나올지 또한 예상했겠군.”
“하오나…….”
“레딩.”
“예.”
“알다시피 그대의 형은 나와 막역했네. 하나 나는 왕의 소임은 최선을 다했으나 친구로써의 소임은 다 하지 못했지. 그러니 이번엔 그 두 가지를 전부 해내 볼 생각이네.”
“……그럼 신은 폐하와 함께하겠나이다.”
“그건 왕명으로 거절하지.”
“잔인하십니다.”
“알고 있네. 그러나 내게 화가 난 만큼 왕세자 아니, 다음 왕을 도와주게. 나보다 더 나은 왕으로 성장할 수 있게.”
“폐하 어찌 제게 형님의 복수를 포기하라 하십니까?”
“진짜 복수는 그대가 왕세자를 다시 왕에 걸맞은 인물로 키워 내는 것이라는 걸 모르지 않을 터.”
레딩은 부정할 수 없었고, 군주인 키아누의 단호함을 이겨 낼 수 없었다. 그저 엎드려 고개를 숙일 수밖에.
“왕의 심판이 열릴 때 나아가실 나팔 소리는 왕국의 재건을 알리는 시작이 될 것입니다.”
왕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레딩은 아주 오래 전부터 예상했다.
이제 그는 왕으로서 마지막 명예를 지키기 위해 왕들의 무덤으로 향할 것이다.
* * *
“……저곳이군요.”
“그래요, 저곳입니다.”
샤브레 공주가 베이콥 영주에게 대답했다.
폴리스 장벽을 넘은 지 반나절 동안 군단이 통째로 왕의 문으로 향했다.
어차피 기습 작전이 물 건너간 이상, 굳이 병력을 쪼개서 소수로 나눠질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렇게 향하기로 한 왕의 문…….
공주는 그 문의 기원 등에 대해 설명해 준 후 이렇게 말했다.
-폴리스 아래 유일하게 어떤 종족의 손도 닿지 않은 곳이에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모두가 의아해했다.
폴리스와 퓨어는 상업이 발달하고 해상, 육로 등의 다양한 루트가 존재하는 고도로 발전된 땅이었다.
당연히 발자취가 닿지 않은 장소가 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을 수밖에…….
하지만 폴리스의 유명한 휴화산, 베코스에 이르렀을 때 모두가 알 수 있었다.
“헤라클 왕가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비밀을 품고 있었던 것이군요. 지금껏 휴화산이라 알고 있었던 산이 실은 화산이 아니었다니……!”
로일 영주도 입을 벌리며 놀라워했다.
공주를 제외한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었다.
아니, 오랜 세월 그건 누군가 말해 줘야 할 진실 같은 게 아니라 당연시되어 왔다.
하지만 별일 없이 지나가는 세월 속에 휴화산에 대한 공포심은 점차 무뎌져 갔고, 폴리스에 사는 사람들은 ‘그런 게 있구나…….’ 하는 정도로 넘어갔다.
“그럼 화산이라고 불렸던 저곳은 말 그대로 거대한 도서관인 셈이로군요.”
“맞습니다. 그리고 저곳을 통해 왕궁 내부로 진입할 수 있지요.”
샤브레 공주가 말에서 내리며 말했다. 그러자 베이콥 영주가 물었다.
“한데 어째서 폐하께서는……?”
“확신할 수 없으니,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곳까지 적들이 포진되어 있을지 모르니까요.”
“하긴, 그렇겠군요.”
베이콥 영주는 고개를 끄덕인 후 로일 영주를 쳐다봤다.
“그럼 전 병력을 이동시키는 게 좋겠습니다. 왕궁에 있는 병력과 합류한다면 오히려 적의 허점을 더 꿰뚫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십시다.”
로일 영주의 동의를 얻은 베이콥 영주가 다시 공주를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여 전 병력을 통과시킨 뒤 통로를 막아도 괜찮겠습니까?”
장담컨대 적들은 일부 병력을 보내 자신들을 쫓아오고 있을 것이다.
베이콥 영주는 이를 차단하고 싶어 했다.
하나 이곳은 헤라클 왕가의 역사가 담긴 공간, 자신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하세요.”
콰이렌스인 그녀가 용단을 내리자 베이콥 영주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아닙니다. 부득이한 일이기도 하고 기록들만 챙긴다면 공간이야 다시 정하면 될 일이지요.”
별일 아닌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한 샤브레가 산에 함께 오른 병력을 돌아봤다.
“이제 저들이 왕궁 안에 자리 잡고 나면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겠지요?”
“그럴 것입니다. 아니, 그래야 합니다. 그 전까지 폐하께서 무탈하셨으면 좋겠군요.”
베이콥 영주의 말에 샤브레가 단언했다.
“그럴 것입니다. 쉽게 무너질 분이 아니시지요.”
“예, 알고 있습니다.”
베이콥 영주가 막 웃으며 대답하던 그때였다.
-크아아앙!
저 멀리 하늘에서 소름 끼치는 포효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하늘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졌다. 이제껏 마주한 것들 중 가장 거대한 것이었다.
“몬스터……!”
하늘을 올려다본 베이콥 영주가 눈을 부릅떴다.
“전군, 적에 대비하라!”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하늘로 상승하던 삼두룡이 빠르게 하강하며 거대한 불길을 베이콥 영주의 머리 위로 쏟아 냈다.
화르륵!
불행히 그것에 대비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