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
206화
“몬스터?”
샤브레 공주가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타악!
그다음 순간, 그녀가 타고 있는 말을 땅에서 올라온 손이 붙잡았다.
분명 인간의 손이었으나, 칼날같이 날카로운 손톱이 비정상적으로 길었다.
-그그극.
이윽고 머리를 내민 놈들은 인간의 형태를 지녔으되 더는 인간이 아니었다.
얼굴엔 다섯 개의 눈이 달려 뒤룩거렸고, 끊임없이 입안에서 흘러내리고 있는 타액은 녹색 빛을 띠었으며 몸의 모든 관절이 기형적으로 꺾여 있었다.
거기다 완력은 인간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
히이잉!
말의 다리 힘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완력 수준이었던 거다.
턱, 턱!
손들은 하나둘 더 늘어나 말의 네 다리 모두를 콱, 쥐었고 말의 안장이 크게 흔들렸다.
“이런!”
위기를 느낀 샤브레 공주가 말에서 뛰어내려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그녀는 도망치지 않고 양손을 뻗었다.
6등급 신성 마법을 일으킬 시간은 부족했으나 대신 2등급 신성 마법 정도야 그녀에게 가뿐했다.
‘홀리 미사일Holy Missile.’
검날의 끝을 툭 잘라 놓은 형태의 빛의 물체가 나타났다.
한두 개가 아니다.
무려 열두 개.
그녀는 누군가가 지켜 줘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왕국을 다스릴 헤라클 왕족의 구성원.
스스로 지키고, 나아가 왕국을 수호해야 한다.
그것이 그녀의 신념이자 존재 의의니까.
그녀는 그걸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었다.
쐐액!
날아간 빛의 칼날들이 그녀에게 달려오는 몬스터에게 박혀들었다.
“키에엑!”
“크아악!”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 파고드는 홀리 미사일.
달려오던 놈들의 움직임이 느려진다.
그녀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홀리 볼holly ball.’
3등급 신성 마법을 터트렸다.
쐐액!
그녀의 몸을 가릴 정도 크기의 구체가 그녀의 양손 주변으로 떠오르더니, 모여 있는 몬스터들을 향해 날아갔다.
그 순간.
쾅!
달려오던 몬스터들은 물론이고, 뒤에 있던 몬스터까지 빛의 폭발에 휩쓸렸다.
하나 그녀는 모든 몬스터들의 쇄도를 멈추지는 못했다.
‘이런.’
폭발 뒤 새로 기어 올라온 몬스터들이 그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물러섬 없이 다시 신성력을 일으켰다.
* * *
그사이 베이콥 영주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는 검을 뽑아 말에 몰려드는 인간 형태의 몬스터를 빠르게 내리치고 찍어 눌렀다. 사람 형태의 몬스터들은 오라가 깃든 검에 베이거나 머리가 짓이겨져 쓰러졌다.
퍽퍽!
그것도 모자라, 말에 매달아 둔 은빛의 핼버드를 꺼내 들었다.
쐐액!
순식간에 핼버드를 휘둘러 세 네 마리의 몬스터의 목을 단번에 베이콥 영주는 몬스터들에게 포위되어 있는 공주를 향해 달렸다.
히이잉!
영주가 탄 말이 몸통째로 두 마리의 몬스터와 부딪쳤다.
저만치 날아간 몬스터로 인해 공간이 생기자 영주가 그곳으로 뛰어내리며 핼버드를 휘둘렀다.
콰직!
핼버드에 맺힌 오라가 몬스터 하나의 목을 베고 나아가 그다음 몬스터까지 한 번에 통째로 베어 버렸다.
“후우…….”
그제야 뭉쳐 있던 몬스터 사이에 길목이 생겼다.
베이콥 영주는 그 길을 파고들어 공주의 곁으로 다가갔다.
“공주마마! 괜찮으십니까?”
샤브레 공주를 등 뒤로 보호하며 핼버드를 고쳐 쥔 영주.
“네,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그녀가 그의 등 뒤에 자리 잡으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갑작스러운 몬스터의 기습에 당황한 병사들이 많아 보였다.
도와줘야 한다.
“영주님.”
“예, 공주마마.”
“곁을 부탁드립니다.”
“물론입니다.”
영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주가 광범위 신성 마법을 준비하기 위해 기도에 들어갔다.
무릎 꿇은 그녀에게서 은은한 광휘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자마자 쇄도해 온 몬스터들.
핼버드로 빠르게 베어 내며 공주를 호위했다.
“내가 있는 한 누구도 다가오지 못할 것이다!”
맹수처럼 울부짖는 베이콥 영주.
그는 그녀의 신성 마법이 준비되는 동안 빠르게 전황을 살폈다.
‘놈들은 균열이 난 땅 밑에서 올라오고 있다. 장벽으로 오르는 협소한 통로를 교대로 막아서고 대규모 공격을 펼치는 게 이롭다.’
판단이 선 베이콥 영주가 고함쳤다.
“두세 명씩 조를 이뤄 장벽 위로 올라가라! 장벽에서 항전하라!”
갑작스러운 적의 기습에 당황했던 병사들과 기사들이 베이콥 영주의 고함에 정신을 번쩍 차렸다.
목 놓아 소리쳐 베이콥 영주의 명령을 그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 범위까지 전파했다.
“장벽으로 오르라 하신다!”
“서로 도와 장벽으로 올라가!”
장벽은 어떤 성벽보다 견고하고 대규모 병력의 주둔이 가능할 정도로 드넓다. 오르기만 하면 이보다 완벽히 적에 대항할 장소가 없다.
“방패병, 우리에게 와!”
창병이나 검병은 방패병을 불렀고, 민첩한 레인저들은 다른 병종보다 앞서서 장벽에 올라선 뒤 몬스터들에게 활을 겨눴다.
그중에서도 몬스터들에게 대항하는 군단 중 4군단의 활약이 돋보였다.
“일어나!”
쓰러진 창병을 일으킨 에머리 경이 주변을 둘러싼 몬스터를 벤 후 길을 열었다.
그녀의 곁을 홀랜드와 프치키가 맡았다.
“따르겠습니다!”
프치키의 든든한 외침이 에머리 경의 오른편에서 들렸다.
“제가 왼쪽을 맡지요!”
홀랜드가 오라가 맺힌 검으로 그녀의 왼편에서 다가오던 몬스터의 목 위에 검을 박았다.
그런데 후방이 문제였다.
“으악!”
뒤따르던 대열의 끝이 몰려든 몬스터에 의해 끊겼다.
비명을 들은 에머리가 소리쳤다.
“홀랜드 경, 계속 앞으로 가세요!”
“하지만!”
“어서!”
홀랜드가 이를 갈며 에머리가 뚫던 길을 대신 뚫자, 에머리는 뒤로 뛰었다. 그녀의 시야에 팔이 뜯겨 나가는 오리엔트 병사들이 보였다. 팔뿐이 아니었다. 몬스터는 손에 잡히는 병사들의 살점을 닥치는 대로 뜯고 있었다.
“크아악!”
“조금만 버텨!”
에머리 경이 오라를 일으킨 검을 휘두르며 몬스터에 잡힌 몬스터들을 빠르게 걷어 냈다.
눈 깜짝할 새 쓰러지는 몬스터들.
하나 그녀의 오라는 무한이 아니다. 마나는 그만큼 빠르게 소비되고 있었고, 체력도 지쳐 갔다.
‘하아, 하아.’
숨을 고르며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부상자들을 가운데 몰아넣고, 앞을 막아!”
그녀의 고함에 그나마 멀쩡한 병사들이 주변으로 다가와 등을 맞댔다. 하지만 더는 아군이 보이지 않고, 몬스터가 벽처럼 주변을 가득 메웠다.
고립된 에머리 경.
-크르르…….
그녀의 사방이 몬스터였다. 그 순간 장벽에서 하나의 화살이 날아왔다.
쐐액!
난데없이 날아온 화살이 에머리 경의 등 뒤에 선 몬스터의 머리를 정확히 관통했다. 화살이 날아온 곳을 쳐다본 에머리의 시야에 닿은 건, 다음 화살을 시위에 매다 거는 카일이었다.
쐐액!
그다음 화살은 몬스터와 닿자마자 작은 폭발을 일으켰다.
후두두두!
동시에 화살들이 떨어져 내렸다.
화살들은 마치 눈이라도 달린 양, 적아를 정확히 구분해 날아왔다.
5군단의 지원이었다.
펑!
닿자마자 몬스터의 시체 부위가 얼어붙는 화살부터 활활 타오르는 화살, 거기에 더해 화살에 담긴 마나가 강해 머리가 꿰뚫린 즉시 떨어지는 빛살 같은 화살도 있었다.
“고마워요.”
나직이 속삭인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맺힌 그때, 다음 지원이 찾아왔다.
쿵, 쿵, 쿵!
매직 실드가 걸린 풀 플레이트를 착용한 기사들이었다. 병사들이 그 위에 몸 전체를 가리는 직사각형의 철갑의 에인션트 실드를 들었다.
“열어!”
방원 대열로 선 방패병들이 일제히 방패 틈의 아귀를 비틀어 틈을 만들었다.
“찔러!”
방패병들이 만든 방벽 사이로 길쭉한 창과 검이 튀어나왔다.
그중 눈에 띄는 두 명이 있었다.
지수와 글로리.
지수가 일으키는 검법과 그 사이로 쏟아지는 신성탄은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일제히 휩쓸고도 남았다.
두두두두.
두 사람이 정면을 맡으면, 병사들이 나머지 방위를 책임져 줬다.
몬스터들의 발톱은 다양한 공격 패턴과 방패와 갑옷에 새겨진 매직 실드의 견고한 방어력을 뚫지 못했다.
쿵, 쿵!
그러면서 빠른 속도로 전진하는 방패진.
그들은 쓰러진 병사와 기사 들을 수습했다.
이를 본 에머리 경도 힘을 냈다.
“자, 힘을 내!”
그녀는 팔을 잃은 병사를 한쪽 손으로 부축하며 빠른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눈 깜짝할 새 방패병과 조우했다.
“고정!”
그러자 전진을 멈춘 방패병들.
안에서 재차 명령이 떨어졌고, 원형 대열로 서 있던 방패병들이 마치 문처럼 틈을 벌리고 섰다.
“괜찮으시오?”
이어서 방패 벽이 열리며 고함 소리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아, 크루거 경!”
에머리의 눈이 빛났다.
확실히 오랫동안 같은 병사, 기사들과 땀 흘려 훈련해 왔다는 게 피부로 체감됐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별말씀을. 어서 서두르십시다. 머지않아 장벽으로 올라서는 진입로들을 막아설 것이오.”
에머리 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몬스터의 숫자는 확실히 처음보다 줄어들어 있었다.
하지만 희생이 많았다.
‘당장 싸워야 할 상대는 우리보다 병력이 많아.’
좋지 않은 상황.
하지만 전투는 끝나지 않았고 최대한 희생을 적게 정리해야 한다.
베이콥 영주의 생각이 옳다.
그 생각에 이른 사이, 크루거 경의 고함이 다시 들렸다.
“다시 전진!”
그녀는 별수 없이 상념을 얼른 접은 후 부상자들을 이끌고 전열에 맞춰 나아갔다.
“신의 가호다!”
그런 그들에게 저 멀리서 빛의 광휘가 터져 나왔다.
6등급 신성 마법.
생추어리의 발현…….
마지막 지원, 샤브레 공주였다.
그렇게 시작된 그녀의 신성 마법.
그건 전황의 사기를 최고조로 북돋우기에 충분했다.
이동속도와 근력도 모자라 매직 실드 위로 신성력 실드가 생기는 광범위 보조 신성 마법.
몬스터들이 토벌되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이겼다!”
“와아!”
목 놓아 소리치는 병력들.
하나 이들을 이끄는 베이콥 영주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는 빠르게 전황을 살피게 한 뒤, 장벽 위에 서서 각 군단장들부터 불러 모았다.
“사상자가 도합 백이십 명에 이르네. 뼈아픈 일이야. 무엇보다 적들의 덫이 이번이 아니라는 것이지, 제이나!”
“예, 우선 상황을 말씀드리기 전에 5군단의 뒤늦은 합류에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아니에요. 이미 대형 마법진 때문에 많은 힘을 소비하지 않았습니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에머리 경이 고개를 젓자 다른 군단장들도 동의했다.
기습이었으나 이건 5군단장의 문제가 아니다.
마법 병단은 이미 대형 환영 마법을 사용하느라 힘이 소진된 상태.
기습을 살피지 못한 건…….
“내 탓이오.”
그라스가 자책했다. 어쨌든 정찰의 주요 임무를 맡는 건 그라스와 그를 따르는 3군단.
하나 로일 영주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네. 삼 번 위치의 문이 저 몬스터를 깨우는 매개 역할을 할 줄을 누가 알았겠나? 누구의 탓도 아니네.”
그의 이야기에 베이콥 영주가 동의했다.
당연했다.
설마 문을 여는 것이 몬스터의 잠을 깨우는 매개일 줄 누가 알았을까? 그러나 전투 후 몬스터의 전멸과 함께 문 안쪽에 차원의 돌이 박힌 20m 크기의 제단이 솟아올랐다. 모두 그때 알았다. 문의 개방이 곧, 문 주위를 던전화시켰다는 것을 말이다.
“로일 영주님의 말씀이 맞소. 그라스, 그대의 탓이 아니라오.”
그를 위로한 베이콥 영주가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마도 폴리스에서 왕성으로 향하는 길목 곳곳에는 이제부터 이런 종류의 트랩이 있을 게 확실하네. 그들이 가장 잘하는 것이 차원의 돌을 활용한 저런 종류의 장치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단 장치를 조사하던 공학자들의 책임자 레인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여, 영주님!”
모두의 시선이 레인에게 향하자.
레인이 소매로 진땀을 훔치며 말했다.
“확인 결과 이 장치는 강제로 매복되어 있는 몬스터들을 자극해 활동시키는 장치로 판별되었습니다.”
“한데?”
“그런데……. 그것 말고도 이 장치에는 봉화와 같은 기능이 있었습니다.”
“봉화?”
“네, 같은 동일 종류의 장비가 이 장비가 발동되는 즉시 알아챌 수 있는 기능이 내장되어 있을 겁니다.”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모두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도 그럴게 폴리스 장벽은 그저 관문일 뿐, 진짜 적들은 왕궁이 자리 잡은 첫 번째 장벽, 퓨어에 몰려 있다.
“……기습은 무산됐군.”
베이콥 영주마저 굳은 표정을 쉽게 숨기지 못했다.
한동안 흐르는 정적.
누구도 쉽게 운을 떼지 못하는 그때, 공주가 말했다.
“기습은 무산됐지만 우린 폴리스의 벽을 넘어섰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그들의 턱 밑까지 추격하게 될 겁니다. 차라리 잘 됐어요.”
“하오나 전면전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현실적인 베이콥 영주의 조언.
“압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아직 마지막 패가 남아 있습니다.”
“다른 대책이 있으신 것입니까?”
듣고 있던 로일 영주의 질문에 샤브레 공주가 대답했다.
“네.”
오랜 세월 비밀로 전해져 내려온 왕의 문, 공주는 그 문의 존재를 왕국의 운명과 바꾸기로 진작 마음먹었다.
그리고 오늘…….
“때가 온 것 같군요.”
그녀가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