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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자동보상-205화 (205/248)

# 205

205화

-장벽의 봉화부터 차단해야 하네.

그라스는 나무 사이를 달리며 영주와 마지막 대화를 떠올렸다.

‘폴리스의 봉화.’

그 봉화가 켜지면 수도, 즉 첫 번째 장벽에 있는 적의 병력들이 상황을 알고 민첩하게 대응하리라.

‘장벽의 봉화부터 점령해야 한다.’

그건 중요한 첫 단추였다.

그도 그럴 게 장벽에는 장벽만 있는 게 아니다.

특히 왕성과 직결된 두 번째 장벽 폴리스는 그 경계가 다른 장벽에 비해 특히 삼엄했다.

‘망루부터 먼저 함락시켜야 해.’

망루뿐만이 아니다.

망루를 중심으로 숨겨진 진지, 트랩, 등이 발동되면 접근이 훨씬 위험해진다.

‘장벽 주변에 있는 총 열두 개의 망루를 소리 없이 정리해야 하는데…….’

열두 개의 망루를 정리해야 장벽 안으로 진입하는 병력이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슬슬 다 와 가는군.”

목표했던 첫 번째 지점이 가까워 오자 인간의 냄새가 강해진다.

코를 킁킁거린 그라스가 잔상처럼 지나치는 나무 사이로 고개를 돌렸다.

곁에서 달리는 민첩한 전사 라우켄과 레오족의 전사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 뒤로 지치지 않고 따라 붙는 엘프와 인간 들로 구성된 레인저들이 있다.

‘든든하군. 망루의 위치를 미리 알고 있는 것도 다행이고.’

만약 곳곳에 포진되어 숨겨져 있는 진지와 망루의 위치를 에머리에게 듣지 못했다면 꽤나 애를 먹었을 것이다.

“헤일로 엘프족의 수장이여.”

“말씀하시오.”

도착한 카일이 활시위를 점검하며 대답했다.

“시야를 부탁하오.”

“그러겠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카일과 도레인, 고베이를 뺀 나머지 엘프들이 빠르게 주변으로 뻗어나가 각기 다른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여러 방위를 살피려는 거였다.

나무에 붙은 넝쿨들, 우둘투둘한 나무껍질 등이 그들에겐 좋은 발판이 됐다.

“우리와는 다른 가벼움이로군요.”

라우켄이 감탄했다. 곁에 있던 벡이 라우켄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놀라기는 아직 이르오. 하하!”

“그르릉.”

라우켄이 대답 대신 가볍게 이빨을 드러내자, 벡이 깜짝 놀라 물러났다.

“싸우자고 한 건 아닌데?”

그라스가 라우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라우켄이 갑자기 씩 웃으며 대답했다.

“알고 있소.”

순식간에 놀림거리가 된 벡이 허탈한 웃음을 짓자 주변을 경계하던 레오족 전사들이 숨죽여 키득거렸다.

파밧!

그 사이 블루 버드 세 마리가 각각 고베이, 카일, 도레인에게 날아왔으며 나무에 올라갔던 엘프들도 돌아왔다.

동료들과 서로 확인한 시야 정보를 교환한 카일이 그라스에게 다가왔다.

“블루 버드로 알게 된 망루 병력의 숫자는 스물이오. 열두 개의 망루가 전부 그렇소.”

“또?”

“나무에 올라 얻게 된 시야 정보로는 각 망루의 경비병들이 마치 뭔가를 밑에 숨긴 것처럼 피해 가는 곳들이 있다고 하오.”

“트랩이군.”

그라스가 말했고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밟지 말아야 할 곳은 이를 직접 확인한 우리 부족의 엘프들이 안내해 줄 것이오.”

“알겠소, 고생하셨소이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오.”

별것 아니라며 고개를 젓는 카일에게 빙긋 웃어준 그라스가 다시 엄중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카일, 도레인, 고베이는 각각 주어진 병력을 이끌고 후방에서 엄호 사격을 부탁하오. 자리를 잡아 주시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셋이 병력을 이끌고 사라지고, 그라스가 벡과 라우켄에게 말했다.

“라우켄, 선봉을 서게나. 벡은 나를 따라오고.”

벡은 고개를 까딱인 후 라우켄을 향해 심술을 부렸다.

“놀린 대가는 언젠가 톡톡히 갚아 주지.”

“언제든지.”

투덕거리는 둘에게서 시선을 돌린 그라스가 창을 고쳐쥔 후 회백색의 경갑옷을 주먹으로 툭툭 쳤다.

그러자 회백색의 경갑옷에 얇은 막이 퍼지며 그의 가슴 앞에 둘러졌다.

베이콥 가의 마공학자들이 왕성 전투를 위해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준비해 온 3서클 마법인 매직 실드가 새겨진 아티팩트 중 하나였다.

“가세.”

어서 망루를 차지해야 한다.

후방에서 5군단이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 * *

쐐애액!

하늘을 날던 블루 버드가 갑작스레 방향을 전환해 수직으로 하강했다.

푸드득.

나무 사이를 가로질러 블루 버드가 향한 곳은 산개해 흩어져 있던 5군단의 마법사들.

그 중 블루 버드가 착지한 곳은 5군단에 속한 엘프였다.

엘프, 갈랭은 블루 버드와 교감한 후 제이나에게 보고했다.

마비된 통신 대신 블루 버드를 통해 서로 교신하고 있는 거였다.

“3군단이 망루 열두 개와 다섯 개의 숨겨진 진지, 트랩까지 해제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잘됐군요.”

제이나의 눈동자에 이채가 흘렀다.

3군단과 블루 버드들의 지원이 제 몫을 톡톡히 해 준 거 같다.

주변 정리가 끝났으니 남은 건 장벽이다.

“클레인!”

“예, 단장님.”

“지금 즉시 3군단이 확보한 장소로 향한다.”

“알겠습니다. 이동한다!”

클레인의 외침과 함께 마법 병단이 움직일 채비를 했다.

제이나는 그사이 부하들을 지나쳐 레인에게 다가갔다.

“레인!”

“알았어, 언니!”

뒤에서 마나 탱크와 연결된 장치를 연결하던 레인이 툭 하고 말을 내뱉고는 슬쩍 주위를 둘러봤다.

여긴 전장. 군기가 엄하다.

이런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은 레인은 땀을 삐질 흘리며 다시 외쳤다.

“그, 금방 할게요! 단장님!”

그녀가 귀여워 슬쩍 웃음 짓는 클레인에게 다가온 제이나가 말했다.

“클레인, 계획대로 대형 마법진을 구축해.”

“목표는 장벽의 삼 번 위치입니까?”

“맞아.”

클레인이 말한 곳은 길게 늘어선 폴리스 장벽 중 봉화 첨탑이 자리 잡은 삼 번 위치였다.

“시작하자.”

그녀의 로브가 펄럭였다.

* * *

폴리스 장벽 삼 번 위치.

카바스는 오늘도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었다.

‘대체 누가 오겠어?’

어차피 온다고 한들, 이 아래 문을 여는 순간 지옥이 될 거다.

전황은 반란군에게로 기울어졌다.

멀리에선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는 퓨어 장벽이 무너졌다.

‘그뿐인가?’

상아탑에서 구축했다는 잘난 왕궁의 수호 방호벽까지 절반쯤 부서졌단 소식이 들린다.

아마 그 검고 커다란 포와 같은 무기 덕분일 거다.

이제 영지에 속한 기사들 사이에선 나라가 후크 백작에게 접수됐단 얘기가 기정사실화됐다.

‘그럴 법도 하지.’

자신이야 후방 배치 됐지만 전방 후방 가리지 않고 자리 잡은 몬스터들, 그늘진 로브를 뒤집어쓴 흉흉한 마법사들, 신체 부위에 몬스터의 일부를 이식한 괴물들, 죽었는데도 살아나는 해적들, 별의별 놈들이 다 있다.

‘특히 그 중에서도 후크 백작과 함께 다니는 그것들은 어휴…….’

카바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손 가문에 속한 자들이라던데. 한데 말이 그렇지, 후크도 그들에게는 쩔쩔매는 게 틀림없다.’

그것들과 함께 다니는 새카만 존재들은 싸우는 걸 멀리서 봤는데도 꿈에 나올 것처럼 섬뜩하다.

‘아무렴……. 나와는 상관도 없는 일이지.’

어차피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난 몸인데다 자신이 평생 모은 재산은 후크 영지에 있다.

왕성만 접수한다면 마땅한 보상도 떨어진다고 했고, 이제 나라는 온전히 후크의 것이다.

‘딴 영지야 빌어먹고 살든 말든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닌데 어떡해?’

그들은 그냥 운이 안 좋은 거고 자신은 어쩌다 운 좋게 칼룬 영지에 속한 기사인 거다…….

그래, 그뿐이다.

어차피 반항해 봐야 소용도 없다는 걸 이미 영지 안에서 많이 봤다.

‘반기를 드는 자들마다 족족 머리통이 날아가는 걸 보고도 어떻게 나설까?’

그냥 까라면 까는 거다.

‘덕도 많이 봤으니까.’

이리 저리 장벽을 휩쓸고 다니면서 솔직히 이젠 즐기기도 한다.

고고한 척하던 부호나 귀족 자제들도 후크 백작의 비호를 받는 우리들 앞에선 벌벌 떠니까.

특히 두려움에 떠는 것들의 알몸을 보는 재미란!

“크큭!”

그가 즐겼던 한때를 떠올리며 슬그머니 미소 짓던 그때.

아무 것도 없던 공허한 어둠 속에서 화살 한 대가 바로 눈앞에 날아들었다.

말이 안 된다.

분명히 장벽 위에서 샅샅이 주변을 노려보고 있었고, 조금의 틈도 없이 주위를 방어했다.

‘그런데 언제?’

그 생각이 든 순간.

쐐액! 푸욱!

카바스는 하늘이 빙글 돌았다.

아니, 하늘이 도는 게 아니었다.

자신이 쓰러지는 것이다.

털썩!

카바스는 시작에 불과했다.

“억.”

“크흑.”

봉화 주변에 몰려 있던 병사, 기사들이 픽픽 쓰러져 나갔다.

도움을 청할 새도 없이 이뤄진 기습이었다.

아니, 안다고 해도 대처할 수 없는 기습이었다.

“사, 살려 줘.”

황급히 고개 숙인 생존 병사가 눈을 뒤룩뒤룩 굴렸다.

방금 전까지 시시덕거리던 동료가 죽어 간다.

“제, 젠장.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옆 사람이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데도 화살이 날아온 전방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여전히 고요한 밤하늘과 어둠뿐이다.

병사는 엎드린 채 장벽 틈으로 밖을 내다봤다.

탁 트인 전경에는 단 한 명의 존재도 보이지 않는다.

‘뭐가 보여야 공격을 할 거 아니야!’

병사가 막 그 생각에 이른 순간, 그의 등 뒤로 창날이 날아왔다.

댕겅!

단숨에 목을 가른 창이 제 주인에게 돌아갔다.

“레오족이여. 날뛸 때가 왔다.”

그라스가 그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하나둘 장벽 위로 올라서는 레오족을 쳐다봤다.

* * *

블루 버드가 날아와 장벽의 상황을 알리자, 제이나는 해제한 대형 마법진 안에서 크게 한숨 돌렸다.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대형 마법진 안에 자리 잡고 있던 마법사들이었다.

“어후…….”

“에고…….”

클레인도 지친 안색으로 제이나에게 다가왔다.

“환영 마법이 제대로 먹혔군요.”

“그래, 고생했어.”

제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클레인이 가장 지쳐 있을 거다.

서클이 높을수록 견뎌야 할 마나량을 높게 설정했으니까.

그도 그럴 게, 방금 대형 마법진을 통해 펼친 건 6서클의 일루젼 필드Illusion Field.

이 마법은 사용되는 즉시 적들에게 거짓된 시야를 제공한다.

현혹시킨다기보다는 적들이 지켜보던 전방의 정경을 그대로 본떠서 계속 유지시켜 주는 것뿐이다.

필드가 펼쳐진 순간부터는 대군이 움직이든, 필드 뒤에서 옷을 벗고 돌아다니든 적들은 알 수가 없다.

‘눈 뜬 장님이 되는 격이지.’

엄청난 효과다. 하지만 그렇기에 마나량도 만만치 않았다.

대략 7서클 마법에 육박하는 수준.

그래서 이 마법진 발동을 위해 2서클 마법사를 제외한 전 마법사가 투입됐고 거기에다가…….

“아닙니다. 그저 단장님 지시에 따라 마나 흐름을 도운 것뿐이지 않습니까, 레인 경의 마나량 증폭 장치도 한 몫 단단히 했고요.”

맞다.

레인에게 작업을 부탁한 마나량 증폭 장치가 큰 몫을 해냈다.

그 덕분에 장벽에 훨씬 넓은 범위로 일루젼 필드를 사용할 수 있었고, 대규모 병력이 적들의 견제 없이 장벽에 접근하고 진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의 공이 아니라 모두가 한 일이다.

“그런 말 하지 마, 다 같이 한 일이니까.”

“알겠습니다.”

웃음 짓는 클레인의 어깨를 두들줬다.

“어쨌든 조금 쉬도록 해. 또 진군해야 하니까.”

이어서 피곤해 보이는 클레인이 물러나고, 제이나도 그제야 근처에 보이는 돌 위에 앉았다.

마나를 소비해서인지 몸이 제법 무거웠다.

새삼 찬영이 떠오른다.

‘이런 환영 계열 마법의 마나량 만으로도 몸이 무거워지는데…….’

그는 거의 단신으로 20만이 넘는 mp를 감당해야 했다.

그것도 마나 탱크로만 추정되는 수치.

새삼 그의 존재가 크게 다가왔다.

하지만 우린 그에게만 기대선 안 된다.

‘이건 그만의 싸움이 아니니까.’

찬영이 오길 기다리는 마음은 접어 두고, 생각했던 대로 사력을 다해야 한다.

제이나가 마음을 다잡으며 5군단에게 말했다.

“다른 군단들이 장벽을 수복하는 동안 우린 이곳에서 잠시 쉬고 1군단과 함께 진입한다.”

지쳐 있는 5군단의 마법사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 * *

폴리스 장벽의 삼 번 위치 수복을 기점으로 내부 진입한 후 2천이 넘는 대군이 순식간에 장벽을 장악했다.

그 후 베이콥 영주는 후발대로 공주와 함께 폴리스의 장벽의 삼 번 위치를 지났다.

다각, 다각.

말에 올라탄 채 아치형의 커다란 구조물 대문을 올려다본 베이콥 영주.

그의 시선에 대문에 쓰여 있는 이름들이 보인다.

폴리스는 개국공신 중 한 명의 이름.

그리고 그 장벽 한 어귀에 쓰여져 있는 이 이름들은 개국공신 외에 나라를 세우며 희생한 이들을 기리는 자들의 이름을 남긴 거다.

이를 읽으며 베이콥 영주는 감회가 새로웠다.

다신 오지 못할 줄 알았다.

영지가 몬스터들에 의해 어지럽혀지고, 뉴 빌드에 의해 왕국이 뒤흔들릴 줄 알았다.

‘하지만 결국 이곳까지 왔구나.’

많은 고난을 거치며 폴리스의 문을 지나니…….

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주책이군.’

괜한 헛기침을 하며 슬쩍 눈가를 손등으로 훔친 베이콥 영주에게 때마침 공주가 말을 몰아 다가왔다.

“필립 백작님.”

“예, 공주마마.”

“왕성으로 진군하기 전에 다녀와야 할 곳이 있습니다.”

베이콥 영주의 눈동자에 이채가 흘렀다.

뜻밖의 제안이기에 베이콥 영주가 어디로 가는지를 막 물어보려 하던 그때.

쿠쿠쿠쿵!

땅이 울렸다.

“느끼셨습니까?”

“네.”

공주의 대답과 함께 그들이 서 있는 자리로 균열이 일었다.

‘뭐지?’

베이콥 영주가 눈을 부릅뜬 그 사이, 균열 사이에서 뭔가가 기어 나오는 게 보였다.

문제는 그것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거였다.

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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