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
202화
* * *
“여기 머무셨군요.”
찬영이 주위를 둘러봤다.
갈색 장판부터 벽까지 둘러진 방은 필요한 가구들 외에 사치스러운 게 없었다.
“마셔 봐.”
탁!
그새 찻잎을 우려낸 차를 내온 그녀가 찬영에게 찻잔을 밀었다.
“잘 마시겠습니다.”
구수한 향이 나는 차를 들이마신 찬영은 오는 동안 그녀와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역시나…….
‘공주가 갓피스라는 걸 알고 놀랐던 모양이야.’
로레인이 알려 온 첫 번째 소식이었다.
“생각할수록 놀랍네. 왕국의 공주가 우리와 같은 갓피스라니 말이야.”
“인종, 국가, 위치 등의 구분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마음에 들어.”
그녀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인 뒤 탁자를 톡톡,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슬슬 얘기를 꺼낼 모양.
“그쪽이 내게 준 정보들과 탈파에 건재한 정보들을 살펴봤어. 공주 외에도 위치적으로 특별한 사람들이 몇몇 있더라.”
“그게 누구죠?”
“예를 들면 우리 탈파 소속의 원로 중 한 분, 자키예르라는 분이었지.”
“잘됐군요.”
탈파의 소속된 원로라면 언젠가 각성이 진행된 후에도 많은 도움이 될 거다.
“하지만 문제가 있어.”
“어떤……?”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거지.”
찬영은 깜짝 놀랐다.
시스템은 달리 어떤 언급도 없었다.
“확실합니까?”
재차 묻자 로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신을 힘들게 찾아서 우리가 직접 묻어 드렸어.”
“어쩌다……!”
“후크 쪽의 동태를 살피고 계셨거든.”
찬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후크의 이름을 여기서도 들을 줄이야…….’
“후크 도손이 먼저 움직였군요.”
“맞아. 놈들 꽤나 내부적으로 기민하게 반응한 모양이야. 어쨌든 이 얘기는 이쯤하고…….”
로레인이 순간 탁자 두드리는 걸 멈추며 말했다.
“문제는 그쪽의 명단이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지.”
“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이런 건 생각지 못했다.
하긴, 누군가의 생사는 시스템의 권한이 아니다.
시스템은 갓피스로 각성할 수 있는 존재들에 대해 언급해 줬을 뿐.
‘각성하는 건 각자의 몫이지.’
로레인의 정보에 새삼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그럼 그때부터 죽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 찾아보셨겠군요.”
“맞아, 전제를 바꿨지. 그래서 아직 진행 중이긴 한데……. 유명인사 하나를 소개시켜 줄게. 이자야.”
로레인이 찬영이 그렸던 초상화들 중 두 장을 내놓았다.
찬영의 시선이 탁자로 향했다.
한 사람은 외눈박이였다.
왼쪽 눈을 안대로 가린 그는 유독, 이마와 왼쪽 눈 아래까지 불거진 핏줄이 있었다.
직접 그린 터라 그렸던 순서도 기억난다.
‘스무 번째였지.’
그 생각을 하며 물었다.
“그도 죽은 사람인가요?”
“아직은 아니야.”
그녀가 외눈박이를 가리켰다.
“카베이, 부족민이 적은 아이시 부족의 괴물이라고 불려. ‘미친 사상’에 휩싸인 사람이거든.”
“……카베이?”
“이름부터 벌써 썩 좋지 않은 분위기가 풍기지? 그럴 거야, 아마.”
로레인이 이렇게까지 얘기하니 찬영은 카베이란 존재가 궁금해졌다.
“어떤 자이기에?”
“아이시 부족의 족장이야. 아이시 부족은 이종족에게 특히 잔인한 자들이지.”
“노예로 둡니까?”
“대부분 그렇지. 그래서 왕국민들은 혹한 제국과 사이가 좋지 않아. 서로 생각이 다르거든.”
찬영은 왜 그런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왕국은 균등, 자유 등이 토대로 된 나라다.
하지만 혹한 제국은 야만과 본능에 따르는 철저한 약육강식의 사회인 모양이다.
“섬뜩하네요.”
“그래, 그러다 못해 인간 욕은 다 먹이는 것들이지. 노예로 삼는 것뿐 아니라 고문하고 괴롭히는 데 천부적이거든. 오죽하면 최고의 고문 기술자는 아이시 부족에서 찾으란 말이 있을까.”
“잔인함이 도를 넘어선 모양이군요.”
“맞아, 하지만 여신을 믿지 않는 그들에겐 그게 정당한 일이지. 인간이야말로 신이 되어가는 존재라고 믿는 부족들이 많거든. 아이시 부족은 그중 그 사상이 더 짙은 부족이고.”
“들으면 들을수록 왕국과는 전혀 다른 관습을 갖고 있는 나라네요. 몬스터들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많이 났겠어요.”
“어쩌면 몬스터 등장이 반가운 유일한 이유지.”
로레인이 쓰게 미소 지은 뒤 손가락으로 카베이를 가리켰다.
“그런데 그가 어쩌다 실종 상태까지 이르렀는지 궁금할 거야.”
“예.”
“쉽게 말하면 반란 때문이었어.”
“이상하군요. 부족민이 적다고 들었는데. 그만한 인원으로 제국을 뒤흔들 수 있습니까?”
“우리의 정황 정보로는 뉴 빌드의 개입이 있었다고 봐.”
“그랬군요.”
“응, 오딘에서는 뉴 빌드라는 조직의 등장을 백성에게 감추기 위해 카베이 혼자 한 걸로 공식화했지만 뉴 빌드 없이 반란은 불가능했지. 사실 반란이 시작도 되기 전에 황제에게 덜미를 잡힌 거지만.”
“하긴, 그렇게 되면 뉴 빌드가 돕는다고 하더라도 무너질 수밖에 없겠군요.”
“맞아. 다른 부족들은 여전히 황제를 따르니 어마어마한 병력을 갖추고 덤벼들었겠지.”
“그 후엔 어떻게 됐습니까?”
“부족민은 전부 사형되고 그는 영원히 고통 받으라며 캄바스에 갇혔다고 해.”
“캄바스? 감옥인가요?”
“응, 지옥 같은 곳이라고 알려져 있어. 온갖 괴이한 소문도 많지. 특히 탈옥은 꿈도 못 꿀 만큼 경비가 삼엄하다고 해. 그런데…….”
뒷말은 듣지 않아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혹시 그가 사라진 겁니까?”
“그래, 감쪽같이. 물론 여러 가지 추측이 돌았지만 황제는 자신의 입지를 지키고자 쉬쉬했어. 그래서 깊게 조사하지도 않았지.”
“반역자를 살려 보냈다는 게 일파만파 퍼지면 자신의 힘이 약화된 것처럼 보이니까 그랬겠군요.”
“그런 걸로 추정은 돼. 하지만 누가 그를 데려갔느냐는 미궁 속에 빠지게 됐지.”
“뉴 빌드일까요?”
“그게 가장 가능성이 높지.”
“하지만 이미 잡힌 마당에 그를 데려간 이유가 뭘까요? 전혀 이유가 없어 보이는데요.”
“난 가능성이 있다고 봐. 그는 제법 강했거든. 어떻게든 이용할 가치가 있지. 특히 혹한의 제국을 뒤흔들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면…… 더욱 더.”
“듣고 나니 그럴 법도 하네요.”
틀린 말도 아니다.
부족민까지 잃은 마당에 그는 오딘 제국을 당장 무너트리고 싶을 것이다.
복수심을 이용해 활용한다면 그만큼 충실하게 움직여 줄 패도 없을 거다.
“하지만 모든 게 정확하지는 않아. 어느 정도 소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정보들이 제법 섞여 있었거든.”
“그렇군요.”
신중하게 카베이의 초상화를 내려다보던 찬영이 로레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말씀을 들어 보면 제게 추천하기 위해 이자를 보여 주신 게 아닌 것 같은데요?”
“당연히 아니지.”
“그럼?”
“그쪽이 보여 준 리스트가 완벽하지 않다는 걸 말해 주고 싶었던 거야. 이들을 찾고 힘을 일깨워 주는 것도 좋지만, 선별 과정이 필요하다는 거지.”
“예.”
찬영도 동의했다.
‘결정은 직접 해야 한다는 건가?’
이번에도 선택의 심판대에 선 기분이다.
‘적어도 로레인 씨의 정보에 의하면 이자에게 갓피스라는 걸 말해 줘선 안 돼.’
솔직히 말해 악마에게 날개를 달아 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새삼 이 리스트를 그녀에게 넘긴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다행이네요.”
입 밖으로도 말했다.
“뭐가?”
의아하게 쳐다보는 로레인에게 말했다.
“선별해 줄 만한 분을 제가 만났지 않습니까?”
“귀찮은 일을 떠안을 사람 아니고?”
“전혀요. 어떤 일보다 중요한 일이니까요.”
“알아. 언젠가 다가올 전투를 준비하는 거라면서?”
“네, 대륙에서의 싸움만이 끝이 아니니까요.”
“하아, 끔찍하군.”
로레인이 붉은 머리를 감싸 쥐며 한숨을 푹 쉬었다.
다 포기할 것처럼 구는 행동과 달리 어느새 손은 다음 그림에 향해 있었지만.
“그래도 뭐 어쩌겠어. 하다 보면 결과야 하늘에 달려 있겠지. 여기 이 친구 얼굴이나 봐 봐.”
그녀가 한 소녀의 얼굴을 가리켰다.
마르고 창백해 사나운 눈매가 더 사나워 보이는 소녀다.
“이 아이는 누군가요?”
“아이라니? 토르잔 밀림 왕국의 여왕을 보고.”
“예? 여왕이요?”
순간 할 말을 잃은 찬영은 다음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이 아이가 여왕이라고?
“그래, 놀랐겠지. 나도 놀랐으니까.”
로레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찬영은 담담한 표정의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이해가 되질 않아서 그럽니다. 어떻게 한 왕국의 여왕이 소녀가 될 수 있죠?”
“그들의 문화에선 그게 가능해.”
토르잔 밀림 왕국에 관한 이야기는 찬영도 종종 들어 왔다.
밀림에서 사는 그들은 오딘 제국보다 더한 폐쇄성을 갖고 있으며,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 타 나라와의 접촉을 꺼려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녀가 여왕으로 군림하고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도 없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쉽게 납득하긴 어렵네요.”
“그들이 신봉하는 건 자연이야. 엄밀히 말하면 자연에 머물러 있는 정령들의 존재를 믿지.”
찬영은 문득 타우린을 떠올렸다.
그에게 정령은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
그 일례로 정령왕의 인장까지 얻게 되었으니까…….
정령왕의 표식이 앞으로 어떻게 쓰일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유용하게 쓰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그 생각을 하는 사이.
로레인이 계속 말했다.
“그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정령왕이 선택한 수호자를 뽑아. 그 수호자가 여왕이 되고, 이를 ‘달라이’라고 부르지. 달라이를 지키는 부족을 ‘아즈렉’이라고 부르고.”
“달라이와 아즈렉……. 공생 관계인가 보군요.”
“그래, 그렇게 봐도 상관없겠지. 왕국 수호자가 모습을 비추는 희귀한 상황이 있었을 때마다 아즈렉은 늘 함께 있었으니까.”
“그럼 그녀를 만나려면 아즈렉을 설득시키거나 혹은 그들을 넘어서야겠습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반드시 해내야 할 거야. 여왕을 갓피스로 각성시킨다면 얻을 수 있는 이점이 아주 많으니까.”
“당장 그곳에 있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갓피스를 만날 수도 있겠죠.”
“맞아, 그리고 독충, 독초 등 위험 요소가 많아 쉽게 접근하기 힘든 토르잔과의 교류가 좀 더 활성화되겠지. 그게 뭘 의미하는지 생각해 봐.”
“탈파의 영향력이 커지겠군요.”
“그건 둘째고, 좀 더 크게 생각해 봐.”
찬영은 그녀가 뭘 말하고 싶어 하는지 금세 눈치챘다.
“오딘 제국을 압박하고, 그들을 우리가 원하는 방향에 맞게 호의적으로 굴게 할 수도 있겠군요. 대륙의 주도권을 쥔 셈이니까요.”
“그래, 그거야! 타국에게 폐쇄적인 밀림 왕국과의 교류는 그만큼 기적 같은 일이거든!”
말을 마친 그녀가 소녀 초상화를 한 번 더 톡톡 두드렸다.
“그녀와 손을 잡아. 그게 다음 청사진을 그리는 데 도움이 될 거야. 갓피스들을 모으겠다는 일에도 그럴 테고.”
“네, 반드시.”
대답과 함께 찬영은 웃었다.
한데 그 순간, 등골을 타고 몸이 잘게 떨렸다.
“윽.”
통증이 있진 않지만 모든 감각이 예민해지고 솜털이 전부 곤두선 것 같다. 그냥 앉아 있는 것조차 식은땀이 날 정도.
갑작스러운 변화가 당혹스러웠다.
“왜 그래?”
로레인이 다가왔다.
막 무슨 이유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며 말하려 할 때.
문이 벌컥 열리고 제리가 들어왔다.
“대장!”
“왜!”
“드워프…… 아니지, 카멜로 씨가 있는 곳에서 어마어마한 빛의 기둥이 솟아오르고 있어요! 하늘까지 뻥 뚫렸다니까요!”
“그게 무슨…….”
로레인은 황당함에 말도 안 나왔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치부하기에는 제리의 표정이 무척 진지했다.
그리고 직감상 찬영이 갑자기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과 이 상황이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말해 봐. 지금 제리가 말하는 저 상황이 그쪽과 관계가 있어?”
“……모르겠습니다.”
찬영이 양팔로 몸을 감쌌다.
갑자기 오한이 찾아온 것이다.
“하아, 하아!”
이러는 이유가 이해되지 않는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 와중에 의식이 점점 흐릿해진다.
“찬영! 정신 차려!”
로레인이 황급히 옆으로 쓰러지는 찬영을 끌어안았다.
‘젠장……. 이게 다 무슨 일이지?’
그녀가 눈을 부릅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