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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자동보상-201화 (201/248)

# 201

201화

“하아.”

판도라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동시에 빛 무리들이 판도라의 옆에 모여들더니 사람의 형태를 이뤘다.

찬영이었다.

“워어.”

반사적으로 중얼거린 찬영은 방금 느낀 아찔한 기분을 되새겼다.

놀이기구보다 수천 배 아찔한 고공 낙하를 반복한 느낌이랄까?

‘몸이 제어력을 잃고 끌려다니는 거 같았어.’

딱 그랬다.

덕분에 눈앞에 상상도 못할 광경이 펼쳐졌다.

‘단숨에 로일 성에 오다니.’

워프를 통해 판도라와 함께 섬에 돌아온 뒤 그녀가 갖고 있는 고대의 지도와 미니 맵에 있는 신성 왕국의 지도를 비교해 로일 성의 위치를 말해 줬다.

그러자 그녀는 급한 일이 없다면 당장 다녀오자고 했고, 고위급 마법사들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포털을 혼자 여는 기염을 보여 주었다.

‘직접 겪고도 못 믿을 지경이군.’

찬영은 자신의 몸을 이러저리 살핀 후 그제야 주위를 둘러봤다.

서 있긴 했지만 지쳐 있는 판도라가 보였다.

“괜찮습니까?”

“그럼요.”

하얗게 질린 걸 보니, 전혀 아닌 것 같다.

“이것 역시 공간 변형을 통해 일으킨 건가요?”

“네, 공간을 일시적으로 응축시켜 순간적으로 관통한 거예요. 예상했던 만큼 꽤 많은 룸이 소모됐어요.”

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지친 건 룸이 많이 소모됐기 때문일 거다.

“부축해 줄까요?”

“아뇨, 그 정돈 아니에요.”

거절한 판도라가 로일 성을 깊어진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머릿속에 들어 있는 지식 그대로의 성곽이로군요. 침입을 막고 전쟁을 위해 쌓는…….”

“낯선가요?”

“아뇨, 그저 머릿속에만 들어 있는 낯익은 지식들이 구현되어 있는 것이라, 크게 낯설게 느껴지진 않아요. 차차 적응해 가리라 봐요.”

“다행이네요. 그럼, 갈까요?”

“네.”

대답을 들으며 찬영이 앞장섰다.

* * *

“대장!”

“왜?”

산더미 같이 쌓인 기록들을 살피던 그녀가 퀭한 눈으로 기록지 너머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왔어요! 왔다고!”

“……누가 왔다고?”

“갓피스요!”

“갓피스가 하난 줄 아나? 나도 갓피스야! 갓피스 처음 보는 것처럼 굴지 마. 요샌 흔해빠진 게 갓피스인 것도 몰라?”

로레인이 인상을 썼다.

찬영이 떠난 후 그녀는 본격적으로 로그의 길을 걸었고, 그사이 탈파의 새 길드장으로 추대됐다.

그동안 탈파의 실질적인 기둥들인 원로들은 대부분 본래의 점조직 성격대로 흩어졌으나 조언을 위해 그녀 곁에 남은 원로도 있었다.

“썩을 놈아. 말버릇 고치라고 했지! 감히 길드장님께 어디서 못 배워 먹은 말버릇이야!”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네가 문제야, 네가.”

휘적휘적 걸어와 제리의 엉덩이를 발로 걷어찬 건장한 노인이 콧수염을 매만졌다.

빌로우, 탈파의 원로 중 한 명이었다.

“에이 씨, 진짜 확!”

“확, 뭐? 또 대련 한번 할 테냐?”

“……아뇨.”

풀 죽은 제리를 향해 씩 웃어 준 빌로우가 두터운 근질의 전완근을 드러내며 콧수염을 쓸어내렸다.

그의 팔뚝을 힐끗 본 로레인도 볼 때마다 의아했다.

이런 사람이 화가라니…….

누가 예상할까?

“그런데 녀석이 누굴 말하는지 대충 감이 오시나 봅니다.”

잠깐 딴 생각을 했던 로레인이 빌로우의 목소리를 듣고 대답했다.

“대충요.”

그도 그럴 게, 제리에게 묻지 않아도 알 만한 건 단 한 사람뿐.

“찬영을 말하는 거지?”

“됐습니다. 말 안 하렵니다.”

삐딱한 태도의 제리.

로레인은 설득 대신 빌로우를 쳐다봤다.

“영감님.”

“예, 길드장님.”

빌로우가 부리부리한 눈을 제리에게 치켜떴다.

“그가 드워프한테 갔다는 소식입니다.”

제리가 얼른 대답했다.

“그래? 어떻게 이렇게 빨리 돌아왔지? 아니야, 왜 돌아온 거지? 왕성 전투가 코앞일 텐데.”

로레인이 다시 묻자 제리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길드장이면 직접 발로 뛰어야지.”

“넌 오늘 혼 좀 나야겠다, 영감님.”

“껄껄, 말씀만 하십시오!”

어느새 제리의 목덜미를 잡아 질질 끌고 나가는 빌로우를 보며 로레인은 피식 웃었다.

‘하아, 그나저나 보통 이렇게 갑작스러운 방문은 보통 사건 사고를 불러오던데.’

생각에 잠겨 있던 로레인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섰다.

‘제리 말대로 길드장이면 직접 발로 뛰어야겠지.’

* * *

로일 시 외곽에 자리 잡은 카멜로의 작업실.

그곳은 대장간과 마법 공학이 동시에 가능하게끔 연결된 회색 지붕의 건물이었다.

부지부터 건축까지 로일 영주의 투자이자 배려였다.

멸족 직전에 몰린 크루 일족을 위한 성의.

그 덕에 사력을 다해 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카멜로.

하나 그는 밀려 있는 작업마저 뒤로 제쳐 두고, 갑자기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며 잔뜩 놀라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분이?”

“예.”

찬영이 고개를 끄덕인 후 판도라를 쳐다봤다.

필요한 설명은 다 했다.

판단은 카멜로의 몫이었다.

사실 말보다 한발 앞선 검을 낫으로 바꾼 형태 변형 정도로 설명은 충분했다.

그도 단순히 마나로 이뤄 낸 게 아닌 걸 느낀 것이다.

‘그가 경계할까 싶어 고민하긴 했지만…….’

드워프와 판도라는 조상 중의 인연이 깊은 존재들.

카멜로는 그녀의 능력을 보고 크게 경계하거나 적의를 둘 것 같지 않았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군. 허허. 신화의 흔적이 내 앞에 도래할 줄이야…….”

한동안 판도라를 유심히 바라보던 카멜로가 드워프의 뻣뻣한 목을 숙였다.

“크루 일족의 족장 카멜로라고 하옵니다. 판도라 님.”

“제게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데미아 님과 다른 존재, 존경을 받을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 일족에게 데미아 님은 케노 님과 같은 선상에 위치해 계신 분이옵니다. 두 분의 유산에서 태어나신 분을 어떻게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일국의 왕에게도 이런 존경심을 보이진 않을 만큼 드워프의 자존심은 굉장히 강했다.

그런데 이런 존경심을 보인다는 건 판도라의 존재가 그만큼 경이로웠다는 걸 반증하는 거였다.

“다시 앉으세요. 카멜로 님의 마음은 충분히 느꼈습니다.”

“예, 그럼.”

다시 자리에 앉은 카멜로가 찬영을 쳐다봤다.

“그대는 또 한 번 날 놀라게 하는군. 데미아 님의 유산까지 찾아낼 줄이야.”

“선택의 운이 좀 따라 준 것 같군요.”

“운? 운이 아닐세. 이건 운명이지.”

어느 때보다 활력이 넘치는 눈빛을 보인 카멜로가 오히려 판도라에게 제안했다.

“판도라 님.”

“예.”

“제게 데미아 님의 마공학을 전수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늘 동경해 왔습니다.”

“제가 아는 지식은 완벽하지 않아요.”

“불완전한 걸로 따지자면 일개 드워프가 더 그렇지 않겠습니까? 껄껄.”

찬영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모르긴 몰라도 글로리가 이 모습을 보면 꽤나 기겁하겠군. 드워프 신봉자가 된 그에게 이런 광경은 꽤나 낯설 테니까…….’

내심 웃은 찬영은 어쨌든 이런 호의와 존경이 자신의 제안에 긍정적 영향을 주리라, 확신했다.

“그럼 공동 작업을 해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음? 판도라 님과 말이오?”

예상치 못한 제안이라고 생각했던지 카멜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이미 제가 부탁드린 작업을 맡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하긴, 그거야 그렇지. 가만…… 그러고 보니 전쟁 중 중요한 전력이 이곳까지 온 건……!”

“생각하신 게 맞습니다. 하고 계신 작업이 빠른 진행이 가능할 수 있을 것 같아 온 것이죠.”

“나야 영광이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저 또한 영광이에요. 케노 님의 후손을 이리 뵙고 함께 지식을 논할 줄은 몰랐으니까요.”

판도라의 유연한 대처와 반응에 찬영은 예상했으면서도 놀랐다. 확실히 그녀 말대로 그녀는 세상 밖에 나오기 전부터 이미 준비되어 있는 존재였던 모양이었다.

‘정말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네.’

찬영이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카멜로가 말을 걸어왔다.

“자, 이제 검은 별의 파괴는 정해진 걸로 봐도 좋을 것 같소.”

“최고의 작업물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사력을 다해 케노 님의 명성을 뛰어넘을 것이오.”

카멜로의 눈이 열망으로 번뜩였다.

“그렇게 되실 겁니다.”

미소 짓는 찬영에게 마주 웃은 카멜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판도라에게 말했다.

“우선 얼마나 걸릴지 예상 초안부터 말씀을 나눠 보시지요.”

“그럴까요?”

판도라도 뒤따라 일어나자 찬영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때 판도라가 앞장서는 카멜로를 따라가기 전 말했다.

“이틀 정도면 소진된 룸이 회복되니, 직접 가는 것보단 그게 더 빠를 거예요.”

“예, 그럼 기다리도록 하죠.”

“그 전에 드릴 게 있어요.”

의아해하는 찬영에게 판도라가 이마로 손을 뻗어 왔다.

서서히 하얀 광채가 나기 시작한 판도라의 손.

눈이 부셔서 잠시 눈을 감는 사이 판도라가 다시 말했다.

“이제 눈을 뜨셔도 돼요.”

눈을 뜨자마자 그녀가 설명해 왔다.

“공유의 인장을 드렸어요.”

“공유의 인장……? 그게 뭐죠?”

“원하실 때 언제든 저와 대화를 나눌 수 있으신 거죠. 제 룸의 힘이 남아 있다면 언제든 서로가 있는 위치로 이동도 가능하답니다. 물론 서로의 허락이 있어야 해요…….”

“유용하겠네요. 여러모로.”

찬영은 어느새 하얀 빛이 잠시 머물다 지나간 손등 위를 내려다봤다.

손등에는 박스 형태의 문신이 입체적으로 새겨져 있었다.

‘이게 공유의 인장!’

확실히 판도라의 능력이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하긴, 가치 측정도 그녀에겐 ‘?’라고 나오는 판인데.

찬영은 손등을 그녀에게 들어서 보여 줬다.

“선물, 고마워요.”

대답 대신 싱긋 미소를 보인 판도라가 다녀오겠다며 그제야 자리를 떴다.

찬영도 한동안 사라지는 판도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천천히 걸음을 돌렸다.

로일 영지에 온 김에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 * *

“이런 걸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해야 하나?”

카멜로의 작업실을 나가 숲의 오솔길을 걷던 찬영은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붉은 머리 여성을 바라봤다.

“기간은 얼마 안됐는데, 꽤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로레인이 씹고 있던 풀잎을 투, 뱉으며 다가왔다.

“네, 느낌은 꼭 그런 것 같네요.”

찬영이 마주 다가가며 대답했다.

로레인은 그대로였다.

큰 수치 변화 없는 가치 측정은 그렇다 치고…….

특유의 여유 넘치고 장난기 있어 보이는 은은한 미소도 그대로였다.

“좋아 보이네요.”

“그쪽도 방황을 끝낸 것처럼 보이네.”

씩 웃은 로레인이 왔던 방향으로 돌아섰다. 찬영도 로레인과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된 거야? 여기에 있을 상황이 아닌 걸로 아는데.”

“작업을 보강하려고 왔어요.”

“작업 보강?”

“네.”

찬영은 판도라의 관한 얘기를 필요한 것만 간략히 했다.

“그럼 그녀가 카멜로 씨를 도울 수 있다는 거네. 맞지?”

“예.”

“어마어마한 정보인데? 카멜로 씨가 공동 작업을 동의할 정도라면 대륙의 누구든 서로 데려가려고 할 테니 말이야.”

“그럼, 그 정보 파실 겁니까?”

“그럴 리가 있나?”

“왜요?”

“그쪽의 관한 정보는 내 선에서 정리하기로 진즉에 마음먹었거든. 대륙 전체가 혼란스러운 상황에 팔 만한 구매자도 없다는 것도 한몫하지만 말이야.”

“하긴, 뉴 빌드에게 팔 순 없죠.”

“내 말이.”

그녀가 한참 키득거린 후 말했다.

“그럼, 용건은 알았고 돌아가는 건 언제쯤?”

“내일까진 두고 볼 생각입니다. 작업이 예상보다 빨리 진행돼서 장비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그보다 좋을 순 없겠지, 검은 별이란 것에 대항하려면. 그치?”

“네.”

“그래, 그럼 어쨌든 내일까지는 시간이 있다는 거네.”

찬영은 대답 대신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부탁드린 일이 어떻게 되고 있나 여쭤보러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래? 그럼 여기서 만난 게 잘된 거네. 그사이 거처를 옮겼거든.”

“아, 그래요?”

“응, 거처도 옮기고, 새 식구도 생기고, 난 길드장으로 인정받게 됐지.”

“꽤 많은 일이 있으셨나 보네요.”

“그래, 그쪽도 그렇겠지만. 그건 차차 듣기로 하고……. 그새 듣고 나면 꽤나 놀랄 소식들이 좀 있어.”

“그래요?”

찬영은 무척 궁금했다.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예상외의 소식이 꽤나 많은 모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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