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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자동보상-198화 (198/248)

# 198

198화

* * *

상륙 첫 날.

두 영주들과 공주의 기적적인 만남이 이뤄졌다.

수도 성벽이 무너졌단 얘기를 들은 공주가 후발대와 함께 예상된 일정보다 이틀을 앞당겨 온 것이다.

“공주마마.”

관청에서 재회한 두 영주가 그녀 앞에 고개 숙였다.

“일어나세요. 두 분께서는 꺼져 가는 왕국의 불씨를 일으키신 분들입니다. 오히려 제가 인사를 드려야 할 일이지요.”

샤브레 공주가 두 영주를 반 강제로 일으키며 참관하고 있는 그라스를 영주들에게 소개했다.

“이쪽은 레오족의 족장이십니다. 관청을 내주었고 왕국군의 빈자리를 충실히 메워 주셨지요.”

얘기를 들은 그라스가 뭔가 말을 하려 입을 벙긋거렸으나 공주는 둘만 알 수 있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간의 갈등을 암묵적으로 묻어 두겠다는 의지였다.

공주의 호의였다.

그라스는 찰나 간 생각에 잠겼다.

찬영이 자리를 비운 동안 공주는 레오족의 생존권과 원조를 약조했고 그라스는 그녀와 운명을 함께 하겠다고 동의한 마당이다.

‘하긴, 그녀의 호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겠지.’

그라스는 침묵으로 동의하며 영주들에게 말했다.

“그라스요.”

“반갑소, 베이콥 영지를 맡고 있는 필립 베이콥이요. 레오족은 세월에 잊혔다고 했는데……. 그 말이 다 거짓이었군.”

“뜬소문은 그저 뜬소문에 불과한 것이지. 보시다시피 우리 종족은 아직 건재하다오.”

그라스가 후덕한 인상의 로일 영주와도 인사를 교환했다.

“공주마마, 오면서 전황은 들었사옵니다.”

짧은 통성명이 끝나고 베이콥 영주가 공주에게 말했다.

공주의 눈빛이 잠시 그늘졌지만, 그녀는 금방 마음을 다잡고 대답했다.

“예, 맞습니다. 그들이 가진 무기가 수도의 장벽을 무너트렸더군요.”

“비통한 일이나 다시 나아가셔야 합니다.”

“물론이지요. 저는 괜찮습니다. 어차피 초조해질 건 그들이니까요.”

공주의 오연하며 침착한 태도에 베이콥 영주는 감탄했다.

‘헤라클 왕가의 저력은 어쩌면 이런 오연함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엄밀히 말하면 가족의 위험을 앞에 두고도 태연하게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존재는 그리 많지 않다.

새삼 그는 공주의 인품과 그릇이 와닿았다.

옆을 보니, 로일 영주도 함께 감탄하는 것 같다.

‘왕가는 무너지지 않았구나.’

아직 건재한 왕가의 혈족을 마주하고 나니 왕실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드는 베이콥 영주였다.

“그들은 아직 우리의 상륙을 모른다는 게 이점이긴 합니다만 그 이점을 살리려면 병력을 나누어 은밀히 수도로 진입해야 할 것 같습니다.”

베이콥 영주가 첨언했고.

“소신의 생각도 같습니다.”

로일 영주도 동의했다.

당연한 얘기였다.

큰 병력이 움직이면 그만큼 진군도 느리고 눈에 쉽게 띈다.

수도에 진출한 적들이 주위에 포진시킨 정찰 병력으로 대비할 기회를 주는 거나 다름없다.

“아무래도 그게 낫겠군요. 블레어를 넘어서서 진군해 올 줄은 꿈에도 모를 테니까요.”

베이콥은 수많은 적과 싸워 온 명장.

그 뒤에 덕장이며 보급 전선을 유지하는 데 능한 로일 영주가 버티고 있었다.

샤브레 공주는 둘의 합류가 이보다 든든할 수 없었다.

“한마디 해도 되겠소?”

그때, 듣고 있던 그라스가 말했다.

“얼마든지요.”

선뜻, 제안을 받아들인 샤브레 공주에게 그라스가 고맙다며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

“나와 우리 종족은 날쌔고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소. 만약 그대들이 받아들인다면 적의 동태를 살피는 데 도움을 주리다.”

샤브레 공주가 시선을 돌려 두 영주의 표정을 살폈다.

기분 나빠할 수도 있는 제안이다.

삐딱하게 받아들인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들이 보유한 정찰병보다 레오족의 능력이 더 낫다는 걸 인정하게 되는 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때마침 베이콥 영주의 표정도 조금 굳었다.

급속도로 냉각되는 분위기 속에 베이콥 영주가 말했다.

“정찰 임무는 발각되는 순간, 우리의 작전 전체가 드러날 만큼 심각하고 중차대한 일이요.”

“알겠소.”

거절의 뜻이라 안 그라스가 괜한 갈등을 피하기 위해 더 나서지 않으려 한 순간.

“우리가 보유한 레인저 대대와 함께 하시오. 오랜 훈련과 실전을 겪어 온 부대이니 전술적인 면에서 많은 부분 보완이 되리라 보오. 어떻소?”

거절이 아니라 좀 더 보강을 보탠 역제안이었다.

그라스는 내심 감탄했다.

‘인간은 정말 알 수 없는 존재들이군.’

편협하고 이기적이며 증오와 악으로 가득했다고 생각할 뻔한 적도 있었다.

봐 온 인간들이 그래 왔으니까.

하나 요즘 들어 만난 인간들은 하나 같이 호의적이고 개방적이며 이성적이었다.

‘내 선택이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라스는 좀 더 자신의 선택에 확신을 가지며 대답했다.

“동의하오.”

“좋소, 그럼 그리 진행하지.”

미소 지은 베이콥 영주와 함께 로일 영주가 공주를 따뜻하게 위로했다.

“……이제 수도까지 얼마 안 남았습니다. 공주님. 마음을 강건히 가지십시오.”

“두 분께 이리 힘든 길을 지나 함께 계시는데, 그러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저는 괜찮습니다.”

미소 지은 공주가 두 영주에게 말했다.

“사력을 다해 출정 준비에 임해 주세요.”

“예, 어둠이 내려앉으면 두 번째 장벽으로 출정하겠습니다.”

베이콥 영주가 결연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 * *

네 번째 장벽 루아 안으로 진입한 상륙 병력이 다음 출정을 위해 움직이고 있을 때.

찬영은 동료들과 다시 조우했다.

글로리, 제이나, V.O.의 지수까지, 그들은 그간 찬영이 겪은 얘기를 들으면서 감탄했다.

“……편한 잠을 잔 게 미안해지는군. 무척 험난한 일을 겪었구려.”

“아닙니다. 자처한 일이었으니까요.”

“하긴, 틀린 말도 아니긴 하오. 껄껄.”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글로리를 보며 찬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분위기가 왜 이렇게 바뀐 거지?’

예전의 글로리가 진중하기만 한 성격이었다면, 지금 마주한 글로리는 마치…….

‘카멜로를 보는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들 무렵.

찬영의 표정을 눈치챈 지수가 말했다.

“최근 들어 카멜로 씨와 많이 어울리셨어요.”

“……어쩐지.”

친해지면 닮는다더니, 그 말이 맞나 보다.

“응? 내가 그렇게 그와 닮아졌소?”

“본인만 모르시는 것 같은데요.”

“그렇던가? 껄껄, 뭐 그 친구와 닮아진 게 싫지만은 않구려!”

드워프 흉내를 내는 토끼를 보는 기분이다.

“이러다 무기도 제작하겠습니다.”

“그것도 배워 볼 생각이긴 하오. 직접 알려 준다고 하더군.”

“그래요? 기대되네요.”

둘도 없는 친구가 된 모양, 하지만 그가 친구에게 닮아진 건 그것만이 아닌 거 같다.

“글쎄, 드워프가 얼마나 대단한 종족인 줄 아오? 이 시드 대륙에서 그들이 만든 무기의 숫자가……….”

멈추지 않고 드워프 자랑을 쏟아 내는 글로리를 보며, 찬영은 할 말을 잃었다.

생김새만 트레이드족이지, 영혼까지 드워프가 되어 버린 거 같다.

옆에서 지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이런 얘기, 많이 들었어요?”

“오는 동안 질리도록요. 그래도 요즘은 살만합니다.”

“왜요?”

“저는 출정 전부터 두 분께 번갈아가며 같은 얘기만 천 번 넘게 들은 것 같거든요.”

“맙소사.”

찬영은 진심으로 그녀가 대단해 보였다.

* * *

탁, 그렇게 한참 대화를 나눴던 두 사람이 함께 나간 후 제이나가 방문을 닫으며 찬영을 돌아봤다.

“……기분은 어때요?”

의자에 앉아 있던 찬영이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일상으로 돌아온 것 같아요. 다들 그렇게 대해 줘서 고맙고요.”

한동안 방황하던 자신의 모습을 잊은 것 마냥, 그들은 편안하게 대해 줬다.

특히 지수가 그랬다.

서운한 게 있을 법도 했지만 그런 것 없다며, 앞으로는 후방이 아닌 찬영의 곁에서 함께 싸우게 해 달라며 청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니 지수에게 무심했던 지난날이 무척 미안해졌다.

“아마 대리님이 살아 있었다면 제게 한 소리 했을 거예요.”

“뭐라고요?”

“지수 씨 방치한 만큼 소맥 한 잔 사라고요.”

이규복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은 이제 죄책감이 아닌 미래로 더 나아갈 원동력 중 하나가 됐다.

그도 그랬을 테니까.

“그런데 소맥? 그게 뭐죠? 무기인가요?”

정말 몰라 궁금해하는 제이나의 표정에 찬영은 대답 대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어쩌면 이런 하루를 바라고자 그렇게 싸워 온 게 아니었을까?

찬영은 다시 치열하게 싸워야 할 몇 시간 후를 생각하며 떨어져 있는 제이나의 손을 끌어 당겼다.

* * *

어둠이 내려앉은 해안가.

찬영은 달빛 아래 제이나와 빠른 속도로 가라앉고 있는 섬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 시간 뒤에 떠나겠네요?”

“네, 출정해야죠.”

“그를 쫓을 건가요?”

찬영은 그녀의 평생 숙원이자 삶의 목표로 가졌던 그를 떠올렸다.

‘플로딘.’

스무 번째 제자 고모라를 통해 얻은 정보라면 놈은 분명 칼립토 학파를 이끄는 수장이자 대륙에 손꼽히는 대마법사 후크의 곁에 있을 거다.

‘이번에야말로 그를 잡을 절호의 기회.’

그렇기에 제이나가 더 걱정됐다.

무척 심란할 거다.

“제 선택이 걱정되나요?”

“솔직히요?”

“네.”

“아무래도…… 무리한 선택을 하고도 남을 일이니까요.”

찬영은 말을 하면서도 못내 신경이 쓰였다.

가족을 잃었을 때 그녀가 느꼈을 분노가 어느 정도일지 쉽게 감도 안 잡히니까.

그때 제이나가 손을 잡아 왔다.

“예전이라면 그랬겠죠.”

“지금은?”

찬영이 눈을 들어 묻자.

“그런 선택을 하려 할 때 당신 생각이 떠오를 거예요. 그리고 그때마다 생각하겠죠. 아버지도 어쩌면……. 내가 복수보다 한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길 바랄지도 모르겠다고.”

“그렇다고 그를 놓치란 얘기는 아니에요. 반드시 잡아요. 잡아서 그가 한 일의 대가라는 걸 직접 알려 줘요. 용서 같은 건 그들에게 사치니까……. 진심입니다.”

“네, 단서들을 쫓다보면 그를 잡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매사에 마음의 여유를 두고 신중히 결정할게요.”

“반드시, 그래 줘요.”

제이나는 찬영에게 그러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후 비가 그친 바다를 바라봤다.

이제 가라앉는 섬으로 그가 떠날 거다.

“정말 그 문이 저 아래에 있다고 하던가요?”

“네, 이 먼 길까지 함께해 온 존재가 그렇게 얘기하고 있어요.”

시스템 메시지는 확실히 믿을 수 있다.

‘틀린 정보를 가르쳐 준 적 없으니까.’

하지만 전진하거나 물러나는 건 늘 자신의 몫이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왕국이 재건된다고 해도 아직 이 사태를 벌인 배후는 그 모습도 보여 준 적이 없어요. 그저 그 배후를 따른 존재들만 마주했을 뿐이죠.”

글라투와 싸워 본 제이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때 보았던 그 존재감은 쉽게 잊히지 않는 기억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다른 차원 다리에 있겠죠?”

“네, 그들이 뭘 원하는지는 몰라도 멸망을 바란다는 것쯤은 정확하죠. 뉴 빌드가 그들을 신봉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찬영은 장담했다.

“수도의 전쟁이 우리의 승리가 된다면 이젠 그들도 긴장하게 될 거예요. 우리가 그들의 코앞까지 접근하게 될 테니까. 그리고 그때가 됐을 때 저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요.”

고대의 갓피스이자 사상 최고의 마법공학자였던 데미아가 사용한, 우스 동력기를 기반으로 제작된 무기라면, 그 준비 중 하나로 충분할 것이다.

‘반드시 얻어야 해.’

각오를 다지는 찬영에게 제이나가 안겼다.

“조심하라고는 말 안 할게요. 위험할 거 뻔히 알고, 이런 남자인 거 알고 시작한 거니까…….”

“나름대로 좋은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듣다 보니까 착각이었던 건 확실히 알겠네요.”

“그렇죠?”

미소 지은 제이나가 성큼 다가왔다.

그녀가 가진 은은한 향을 느끼며 찬영은 고개를 숙였다.

출정하기 전의 키스.

이만하면 돌아와야 할 이유로 충분했다.

그러길 잠시 후 찬영은 제이나와 깊은 감정의 여운을 느끼며 천천히 그녀에게 떨어졌다.

“이제 갈게요.”

미소 짓는 제이나를 뒤에 두고 바다를 향해 걸었다.

데미아의 무기가 잠든, 심해로 떠나야 할 시간이다.

다음 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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