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
197화
* * *
솟아오른 얼음 장벽들은 와류渦流와 수송선 사이를 완벽히 차단했다.
베이콥 영주는 완벽히 성공한 작전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실제로 보니 더 놀랍군…….’
맞물리듯 겹쳐진 얼음 장벽은 나아가는 배 양옆으로 벽처럼 세워져서 해로를 지켜 줬다. 좌우로 노도가 쳤지만 조금의 균열도 없이 버티고 섰다.
한동안 장벽을 올려다보던 베이콥 영주는 기적 같은 장엄함을 선사한 찬영을 떠올렸다.
‘보지 못한 사이에 그대는 점점 인간의 힘이 닿을 수 없는 영역에 다가가고 있군.’
그는 이제 신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
자연을 거스르며 판세를 뒤집을 수 있는 존재가 몇이나 있을까?
단언컨대 그는 이미 왕국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고, 그의 선택에 따라 대륙이 요동칠 것이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된 건지도.’
베이콥 영주는 기적을 일으킨 찬영을 환호하는 배들을 둘러봤다.
병사들은 하나같이 찬영을 연호했고 여신의 가호를 부르짖었다.
하지만 뱃전 위에 기쁨의 함성이 가득 찬 경이로운 이 순간.
베이콥 영주는 그들과 함께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제이나와 찬영이 염려됐다.
‘……괜찮을까?’
아직 아무것도 단언할 수 없는 상황, 베이콥 영주는 마음이 무척 무거웠다.
‘하나 그들을 믿어야겠지.’
서로의 신뢰 속에 시작된 작전이었다.
그들이 목숨 걸고 기회를 주었으니, 자신은 그 바통을 이어 받아 상륙을 무사히 마치는 데 집중해야 한다.
“루호 제독, 속도를 높이게.”
베이콥 영주가 고함쳤다.
섬 사이를 빠져나온 배들의 숫자가 하나둘 늘어나고 있었다.
* * *
해안가에 선 프치키 부단장은 다가오는 배들을 보고 있었다.
“성공이구나!”
그는 몸이 잘게 떨렸다.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커다란 수송선들과 갤리선을 보고 있자니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쿵, 쿵, 쿵!
하나둘 닻 내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배들이 상륙을 마치기 시작했다.
총 마흔두 척, 적어도 삼천여 명이 훌쩍 넘을 병력 파견이었다.
병사들의 흥분은 당연했다.
“원군, 원군이다!”
“정말 도착했어.”
오리엔트 병사들은 감격한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게 이제껏 통신이 마비된 동안 원군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일이었다.
하나 연락이 되지 않는 다른 영지들과 달리 두 영지는 다시 연락이 닿았고, 이렇게 원군을 구름처럼 이끌고 나타났다.
‘기뻐하지 않을 수가 없지.’
평소 감정 변화 없던 프치키마저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자, 아군을 맞이하자!”
프치키와 오리엔트가 말을 달려 배로 달렸다.
한데, 그때였다.
“잠깐.”
희망찬 표정으로 달리던 그가 말을 멈췄다.
선박 너머, 저 멀리 보이는 왼쪽 섬.
그 섬의 이상 징후를 느낀 것이다.
구구궁!
섬의 이상 징후는 진동을 타고 꽤나 멀리 있는 해안가까지 도달했다.
불길한 전조였다.
‘저 섬엔 그가 있는데?’
그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왼쪽 섬의 일부가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맙소사.”
프치키 부단장은 할 말을 잃었다.
섬이 절반으로 갈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 * *
쩌저적!
균열이 일어나고 땅속에서 물이 솟아올랐다.
푸스스……!
제대로 발 디디기도 힘든 상황.
하지만 제이나는 균형 잡는 것도 힘들었다.
‘……이런.’
마법진은 성공적으로 가동했고 수송은 완벽히 끝났다.
하지만 생각 못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섬이 마나가 가져온 여파를 못 견딘 거야.’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다.
특히 기이한 소용돌이가 섬 아래에서 오랫동안 휘돌며 섬의 균열을 증폭시켰다고 가정했을 때.
‘마나가 가져온 여파는 그저 기폭제가 되었을 뿐, 섬은 원래부터 가라앉고 있었던 거야!’
츠츠츠! 쩌저적!
그사이에도 땅은 계속 균열을 일으켰다.
‘벗어나야 해!’
제이나는 곁에 있는 찬영의 손을 꽉 잡았다.
‘제발……!’
평소라면 플라이를 시전했을 테지만…….
‘흐윽.’
제이나는 신음성을 흘리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울컥!
피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역시나 몸이 더는 마나를 견디지 못한다.
이미 강력한 마나를 견뎌 내느라 몸이 버틸 수 있는 한계 이상까지 사용해 버린 것이다.
착용하고 있던 우올로도 과도한 마나 방출을 견디지 못해 박살이 나 버린 지 오래…….
‘구출 통신도 보낼 수가 없겠어.’
어떻게든 무너지는 섬 바깥으로 빠져나간 후 구출을 기다려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섬과 함께 가라앉게 될 테니까.
“정신 차려요, 찬영!”
제이나가 찬영의 어깨를 흔들었다.
하지만 아무 미동도 없다.
‘그를 두고 갈 순 없어.’
결국 그를 깨우길 포기한 그녀는 그의 한 손을 자신의 어깨를 두르게 한 뒤, 제대로 일어나기 힘든 몸으로 찬영을 끌고 가기 시작했다.
“크흑!”
넘어지고, 또 넘어졌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동안 찬영이 눈가를 파르르 떨며 조금씩 의식을 되찾았다.
‘흐음…….’
곧이어 희미한 틈 사이로 창 하나가 나타났고, 그 앞에 그녀가 걸어가는 게 보인다.
‘제이나.’
그리고…….
-히든 퀘스트 발생.
어떤 퀘스트인지 몰라도 힘겹게 걷고 있는 그녀를 무시할 만큼 중요한 퀘스트는 없다.
가뿐히 퀘스트를 무시한 후 그녀를 바라봤다.
털썩!
그사이 그녀가 한 번 더 넘어졌다. 주저앉은 그녀를 바라보던 찬영은 눈을 굴려 주위를 둘러봤다.
바닥 곳곳에서 솟아오르는 지하수와 균열된 땅, 무슨 상황인지 알아차리는 건 금방이었다.
‘섬이 무너지고 있구나.’
찬영은 입술을 콱 깨물었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이제껏 이런 손을 지키겠다는 명목으로 놓으려고 했던 지난날이 문득 떠오른다.
‘더는 아니야.’
그러지 않을 것이다.
설사 그녀가 손을 놓으려 한다고 한들, 이제 다시 손을 잡는 건 자신일 것이다.
“크윽……!”
바닥에 손을 짚고 안간힘을 다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이나의 시선이 느껴진다.
“찬영.”
그녀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네, 많이 기다렸어요?”
아까 들었던 얘기를 이렇게 빨리 돌려줄 줄은 몰랐는데.
“아뇨.”
고개를 젓는 그녀의 흩어져 있는 머리칼을 옆으로 넘겨 주었다.
많은 말은 필요 없었다.
지금 마주친 시선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얘길 나눈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이제 나갑시다.”
마나도 제대로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 몸 상태가 엉망인 이 순간 택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르리에.’
휘이잉!
르리에로 통하는 문을 소환한 그때.
“모두 괜찮소? 계속 찾아다녔소!”
생각지도 못한 이가 나타났다.
“홀랜드 경?”
이제껏 섬을 빠져나가지 않았단 것이 고마웠으나, 문제는 그가 르리에로 통하는 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 거였다.
“제이나.”
찬영은 굳은 표정의 제이나를 쳐다봤다.
“무슨 생각할지 다 알아요. 안 된다고 미리 말할게요.”
제이나가 말했다.
그래, 그녀 말대로 그녀부터 르리에로 넘어가 있으라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안 될 것 같다.
‘이젠 나도 그러길 원하지 않아.’
그녀와 함께 이 상황을 타개하길 원한다.
그리고 이 순간 그녀를 르리에에 보내지 않고도 빠져나갈 수 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찬영이 발로 균열된 돌을 툭, 툭 차며 말했다.
“당장 빠져나가죠.”
찬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감도 못 잡은 홀랜드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영주님, 저길 보십시오.”
고립된 찬영과 제이나를 구출하기 위해 몸소 마법 병단 한 개 소대와 함께 갤리선 한 척을 움직인 베이콥 영주는 클레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크고 작은 돌들이 물에 반쯤 잠긴 섬 위로 하늘을 날아오르는 게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검은 소가 세 사람을 매달고 미친 듯이 돌 위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크하하하!”
굳어 있던 영주의 표정이 그제야 환히 풀렸다.
‘그래, 살아 돌아올 줄 알았다!’
영주는 선원들을 향해 외쳤다.
“배를 더 가까이 붙여라! 그들이 살아 있다!”
곁에 선 클레인의 입가에도 은은한 미소가 맺혔다.
* * *
“으아아아아!”
반면 홀랜드는 타우린에 대해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럴 생각이었으면 진작 말을 해 줬어야지!”
홀랜드는 찬영, 제이나와 함께 타우린의 탄탄한 등 위에 매달려 있었다.
타우린이 돌을 띠처럼 둘러서 일행을 몸에 고정시킨 것이다.
쾅!
섬의 돌들을 타고 달리던 타우린은 마지막 징검다리를 밟고 튀어 올랐다.
그러자 홀랜드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아악!”
살면서 허공에서 뛰어내려 본 적이 없었던 홀랜드는 타우린을 통해 자신이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하나 타우린은 홀랜드의 속도 모르고 조금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오히려 바다를 향해 거침없이 추락하다 일정 지점이 되면 돌들을 끌어당겨 착지 지대를 만들며 다시 점프하는 걸 반복했다.
파밧!
그렇게 몇 번 뛰어오르고 나니 그들은 어느새 영주가 있는 갤리선 근처까지 도달했다.
-음모오오!
그 후 갑판 위에 훌쩍 튀어 오른 타우린은 성난 울음을 토해 내며, 찬영 일행을 묶고 있던 돌의 띠를 풀어 줬다.
제일 먼저 타우린에게서 떨어진 홀랜드가 헉, 헉 거친 숨을 쉬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다, 다신 탈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다리가 풀린 그를 보며 찬영과 제이나는 빙긋 미소 지었다.
그 순간 그들에게 다가온 베이콥 영주가 두 팔을 뻗어 둘을 와락 끌어안았다.
“살아 주어 고맙네. 정말 고마워.”
베이콥 영주는 정말 기뻐했다.
왕국의 기틀이 될 둘을 잃을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그 마음을 아는지 찬영이 자신의 등을 토닥여 왔다.
참으로 감격스러운 순간이라고 느낀 그때.
찬영이 속삭였다.
“영주님, 숨 막힙니다.”
“에잇, 감수성 없는 친구 같으니라고!”
베이콥 영주가 한 걸음 물러나며 투덜거렸다.
푸근한 옆집 아저씨 같은 눈빛에 찬영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제야 다시 제자리를 찾은 기분이다.
그때 베이콥 영주가 아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그 손은 언제 놓을 겐가?”
영주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엔 제이나의 손을 꽉 잡은 찬영의 손이 있었다.
얼굴이 붉어진 제이나가 슬쩍 손을 놓으려 하자 찬영이 그 손을 꽉 붙잡으며 말했다.
“안 놓을 생각입니다.”
“무엄하기 짝이 없구먼, 대놓고 애정 공세라니.”
영주가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다.
귀환하는 그들에게 해안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부대 정렬!”
“10대대 소집하라!”
배가 상륙한 후 갑판에서 내린 찬영의 시야엔 일사분란하게 이동하고 있는 부대들이 보였다.
베이콥 영주가 선두에 서며 따라 걷는 그에게 말했다.
“삼천 여명의 병력일세. 기사단, 마법 병단, 공학자 할 것 없이 모두 이 전투에 참여했지. A.U.는 다시 지구로 돌아갔지만 대신 로일 영주님의 기사단이 이번 원정에 합류했네.”
“그랬군요.”
찬영은 대답하면서도 확실히 영주들이 이번 수도 전투에 사활을 걸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 매 전투가 사활이긴 했다.
‘단 한 번의 패배도 용납할 수 없어.’
패배하는 순간 왕국이 흔들린다.
‘하지만 이번 전투만 승리로 이끈다면…….’
왕국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을 거고 왕을 중심으로 예전의 위용을 갖추게 될 것이다.
로일, 베이콥 두 영주와 같은 충신들이 왕을 도와 함께 할 테니.
“이제 그대는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고 봐도 무방하네.”
걸어가던 영주가 문득 멈춰 서서 말했다.
찬영은 영주의 말이 뭘 의미하는지 알았다.
“쉬라는 말씀이시군요.”
“자네의 모든 걸 걸어 왕국군을 이곳까지 이끌었네. 이제 공주님을 필두로 우린 왕성으로 향하겠지.”
“이미 제 대답은 아실 것 같습니다.”
“알지, 잘 알고말고. 알기에 하는 이야기일세. 왕국의 한 백성으로서 그대에게 너무 면목이 없거든.”
“영주님께서는 이미 제게 많은 걸 베푸셨습니다.”
“그런가? 난 잘 모르겠는데.”
찬영은 대답 대신 함께 걷고 있는 제이나를 쳐다봤다.
그녀가 선물이란 얘기.
영주가 할 말을 잃었다.
“하, 정말 이러기인가?”
찬영이 태연한 미소를 머금은 후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곧바로 출정하실 테지요?”
“그럴 생각이네.”
“그럼 저는 후발대로 따라붙겠습니다.”
“이유가 있나?”
찬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눈 앞에 나타난 창을 살폈다.
섬이 무너지기 시작한 순간부터 계속 눈 앞에 아른 거렸던 창이나, 이제야 제대로 보게 된 창이다.
-히든 퀘스트 발생
-히든 퀘스트 : 심해의 유산을 찾아라
-섬은 봉인의 한 축을 담당하는 열쇠였습니다. 하나 섬의 파괴로 인해 숨겨져 있던 심해의 유산 입구가 모습을 일시적으로 드러나려 합니다. 단, 섬이 완전히 붕괴될 시 봉인된 유산으로 통하는 입구는 섬과 함께 소멸됩니다.
-퀘스트 완료 조건 : 심해 유산 입구 통과 시
-히든 퀘스트 완료 시 획득할 보상 목록 : 데미아의 유산
최후의 전투의 승기를 잡으려면 아무래도 이곳에 남아야 할 것 같다.
데미아의 유산, 저건 분명…….
‘우스’라는 괴물마저 삼켜 버린 무기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