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
195화
* * *
네 번째 장벽 루아의 봉화는 장벽 중심에 우뚝 솟았다.
그 봉화에 서면, 두 번째 장벽과 수도까지 시야가 미쳤는데…….
이를 보고 온 홀랜드는 찬영과 프치키 부단장에게 비보를 전달해 줬다.
-첫 번째 장벽, 퓨어의 일부 장벽이 불타고 있소.
찬영은 검은 별을 떠올렸다.
그리고 얘기를 들을수록 그 생각이 더 확실해졌다.
번쩍이는 보라색 빛의 광선이 뻗어나간 후 장벽의 일부가 송두리째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낭보 뒤에 찾아온 갑작스러운 비보.
사기가 떨어질까 봐 병사들에게 알리진 않았으나 공주와 영주들에게 마법 통신구로 상황을 전달했다.
그 후 루아 장벽에 주둔했던 병사들과 백성들을 총 세 개의 감옥에서 풀어 줬다.
위글들이 지키고 있었으나 입장을 바꾼 레오족이 합류한 오리엔트들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풀려난 백성들이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고, 왕국군 병사들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 뒤부터 레오족과의 충돌은 없었다.
딱히 그럴 일이 없었다.
레오족은 그저 수문장 역할을 하고 있었을 뿐, 앞장서서 왕국 백성을 괴롭힌 적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활약에 병사들은 환호했고 풀려난 백성들은 고마워하며 칭송하기에 이르렀다.
환호성이 온 거리에서 쏟아지며 축제 분위기가 된 사이.
찬영은 마법구 앞에 홀로 자리했다.
제이나와 그녀 곁에 있는 마법사들, 공학자 등이 함께 설계한 마나 증폭 마법진이 완성됐기에 이를 익힐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 * *
-마법진은 총 3단계로 진행되게 되어 있어요. 1단계는 발동, 마나 탱크의 마나들이 순차적으로 몸에 흘러 들어가게 될 거예요. 마법진이 당신을 중심으로 일체화되는 과정이죠.
“그다음은요?”
-2단계는 응축이에요. 이때부터 고통이 올 거예요.
제이나가 마법구를 통해 말했다.
찬영은 고개를 끄덕인 후 그녀가 마법구를 통해 펼쳐 보인 마법진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복잡한 수식을 들여다보자 느껴지는 게 있다.
마법진의 매개체가 받아야 할 부담을 최대한 줄인 마법진이다.
마나 증폭을 받아들여 방출해야 할 자신의 안전성을 높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고마워요, 제이나.”
-아니에요. 안전성을 더 높이고 싶었지만…….
그래, 모순이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희생을 각오하고 고려한 계획이고 안전성을 확보하는 게 어려운 마법진이다.
‘하긴, 한계 이상의 마나를 몸에 받아들였다가 원하는 형태로 구현시켜 방출하는 게 쉬울 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했어요.
“알아요.”
짧은 시간 내에 이만한 규모와 디테일한 마법진을 완성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노력했을지 감도 안 잡힌다.
문제는 자신과 아슬란이다.
‘그녀는 아슬란과 내가 버틸 수 있다는 전제하에 마법진을 설계할 수밖에 없었어.’
자신이 얼마나 버티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것이다.
“그럼 3단계는?”
-아티팩트의 사용이에요. 최고조로 응축이 됐을 때 사용되어야 해요, 그래야 마나 흐름의 큰 충돌을 피할 수 있어요.
엑스를 말하는 것이다.
-그 후엔 제가 일러 준 순서대로 아티팩트를 사용하세요. 마법진은 아티팩트의 마나량까지 고려해 설계된 거니까요.
“그럴게요.”
찬영은 어려운 상황인데도 미소 지었다.
하지만 제이나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일회성 아이템 다섯 개의 사용으로 인해 추가 될 불안 요소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사용해야만 해.’
아이템들 모두 이번 작전에 필요 있는 것들을 선별했다.
우선 첫 번째 일회성 아이템.
‘아톨의 저주받은 침.’
이 침을 부위 어디든 꽂게 되면 체력이 30% 한순간 감소된다.
하지만 체력의 감소와 함께 마나 친화력이 소유자 기준으로 10% 상승한다.
마나 친화력은 다른 말로 하면 흡수율.
기존 흡수율에 10%가 더 더해지는 결과를 보일 것이다.
‘두 번째는 키란의 돌.’
키란의 돌은 마나가 주입되면 원하는 목표 아티팩트에 ‘증폭의 룬’이라는 효과를 일으킨다. 목표 아티팩트에 능력을 5% 상승시킨다.
아이스 램파드를 좀 더 효율적으로 구현시키는 데 도움이 될 소모품이다.
남은 건 세 개의 소모품인데 한 개는 소유자를 기준으로 리스크 없이 마나량 3%를 한 시간 동안 상승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남은 두 개가 가장 골치 아프다.
제이나도 그 부분에 대해 재차 언급할 정도니까.
-남은 두 개의 아티팩트는 사용 하지 않는 게 어때요? 효과는 믿을 수 없이 놀랍지만, 위험성이 더 늘 거예요.
그녀의 말이 맞다.
두 개의 아티팩트는 사용자의 리스크를 불러온다.
그중 하나인 ‘마법사들의 썩은 심장으로 제작한 원한의 심장’은 섭취할 경우 1시간 동안 체력에 강한 지속 대미지를 입는 대신, 일시적으로 소유자 기준 30%의 마나량 한계치를 늘려 준다.
오로지 마나량에 집중한 결정이다.
‘단, 한 시간 안에 끝내야 해.’
초당 영향을 받는 지속 대미지 수준 워낙 높아 그렇다. 현재 체력으로 비추어봤을 때.
‘그러지 않으면 죽는다.’
설상가상으로 남아 있는 한 개의 일회성 아이템도 만만치 않은 리스크를 갖고 있다.
‘무덤에서 제작한 함멜의 포션.’
붙여진 이름대로 리스크는 복용자의 중독을 일으킨다.
중독이 시작되면 이동속도, 민첩성, 근력이 전부 50% 감소되는 대신 체력이 70% 상승한다.
‘하지만 그럴 가치가 있어.’
어차피 전투가 아닌 이상 위의 세 가지 스텟은 크게 사용될 일이 없다.
대신 상승된 70%의 체력은 원한의 심장의 지속 대미지를 버티는 데 유용하게 작용할 것이다.
‘마나량을 확장하고 버티는 데 사력을 다해야 해.’
위험할 각오 따위 충분히 하고 남겨 둔 거란 얘기다.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건 그렇지만 최대한의 마나량을 끌어내려면 모두 사용해야 해요. 그래야 성공할 확률을 높일 수 있어요.”
가장 큰 변수는 바다의 소용돌이니까.
-……알겠어요.
제이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꾹 참는 것처럼 보였다.
“미안해요. 고집만 부려서.”
-아니에요. 나였어도 그랬을 테니까요.
왕의 목숨, 나아가 신성 왕국의 규합을 위한 첫 단추가 될 수 있는 일이다.
모두에게 중요했다.
하지만 단순히, 왕국의 평화만 지키자고 몸을 던지는 게 아니다.
“우리에게도 중요한 날이 될 거예요.”
그녀와의 평화로운 날을 고대한다.
* * *
철썩철썩.
잔잔했던 바다 위로 갑자기 먹구름이 지기 시작한 건 불과 두 시간 전부터였다.
‘날씨가 좋아질 거 같지 않아.’
어젯밤에 미리 도착한 후 이미 마법진을 위해 주변에 마나 탱크를 설치해 뒀고, 마법진 발동 준비를 마쳤다.
섬 안에도 몬스터가 존재하지 않은 것도 확인했다.
문제는 날씨다.
찬영은 해안가 한가운데를 가로막은 두 개의 섬 중 왼쪽 섬 절벽에 선 채 급변하는 날씨를 염려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영역이 아니다.
‘운이 따라 주길 바라는 수밖에.’
솔직히 할 수 있는 사력은 모두 다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으니 이제부터는 신의 영역이다.
‘온다.’
그 생각에 이르렀을 때쯤 저 멀리 먹구름 아래 놓인 바다 위로 기다리던 영주들의 함선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우우웅!
마치 바다 위로 떠오르는 해처럼 순차적으로 한 척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배들은 그들의 등장을 알리듯, 뿔피리와 북을 울렸다.
준비해 달라는 신호다.
“후우.”
찬영은 호흡을 다스리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저 소리를 듣기 위해 오랜 시간 노력해 왔다. 막바지에 이른 지금, 이 산만 넘으면…….
‘멸망을 막는 데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뉴빌드가 오랜 세월 준비해 온 왕국 수복을 막는 첫 단추가 꿰어지는 것이다.
저벅저벅.
찬영은 그녀가 일러 준 마법진 설계에 따라 마나를 활용해 바닥에 새긴 마법진 한가운데에 자리 잡았다.
뚝. 뚝.
그 순간 하늘에서 빗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
급히 하늘을 올려다보자마자.
투둑, 투둑!
쏴아아아아!
하늘이 뚫린 양 굵어진 빗방울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런…….’
찬영의 시선이 자연히 절벽 바깥에 보이는 바다로 향했다.
비가 내리자 바람이 불고 바람이 불자 고요했던 바다가 울렁인다.
그리고 그 울렁이는 바다의 빨라진 유속이 섬 사이로 휘몰아쳤다.
솨아아아!
하지만 몰려든 파도는 섬 사이로 진입하자마자 휘말리며 잔잔해져 간다.
바다가 고요해서가 아니다.
섬 밑에 끌어당기는 소용돌이의 인력이 밀어치는 노도를 바다 수심 안쪽으로 양옆에서 끌어당기고 있는 것이다.
‘얼음 장벽이 견뎌야 할 대미지가 커지겠어.’
유속이 빨라질수록 얼음 장벽이 견뎌야 하는 대미지가 늘어나는 건 당연하다.
배들이 더 가까워졌다.
“슬슬 준비해야 할 것 같소. 날씨가 좋지 않은 게 흠이지만.”
조용히 있던 홀랜드가 다가왔다.
여기까지 함께 온 그는 엑스로 인해 마나 폭발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인지하고도 함께 왔다.
“최대한 마나에만 집중하시오. 배와의 교신은 내가 맡겠소.”
그가 함께 온 이유였다.
마나 제어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찬영은 급한 상황을 교신하며 얼음 장벽을 세울 여유가 없다.
그의 곁에서 배들의 상황에 따라 급박한 소식을 전하는 건 홀랜드의 몫이 된 것이다.
“긴장되는군.”
홀랜드가 말과는 달리 씨익 웃음을 머금은 후 찬영에게 말했다.
나름대로 긴장을 해소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기분은 어떻소?”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묻는 그에게 찬영은 아무 말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부담감과 걱정 등의 감정들은 잠시 뒤에 두었다.
지금은 오로지 해야 할 것에 집중하는 시간이다.
성공을 원하고 미래를 고대한다.
“좋습니다.”
홀랜드가 찬영에게 건네받은 우올로를 켜고 통신을 가동했다.
시작이다.
* * *
지잉!
소환된 아슬란이 찬영의 다리 앞에 꽂혔다.
푹!
마법진의 정중앙.
아슬란을 쥔 찬영의 눈동자가 푸르스름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들어온다.’
아슬란을 타고, 팔을 타고 어마어마한 양의 마나가 진입해 오는 게 느껴진다.
‘진입이다.’
두 개의 조셉링 착용 후 이젠 3만이 넘는 거대한 마나량 위에 20만mp 가 보태진다.
‘후읍!’
밀려드는 마나들이 날뛴다.
속이 울렁이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지만 심법들을 통해 컨디션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아직까진 괜찮다.
1단계니까.
쿠쿠쿠쿠.
찬영이 서 있는 주변으로 대기가 웅웅 소리를 내며 울린다.
‘아직 5만mp도 진입하지 않았어.’
흐릿한 시야 한가운데에 위치한 창을 확인했다.
상세 데이터의 마나량 수치의 숫자들이 미친 듯이 휘돌며 가파르게 상승해간다.
현재 9만mp.
‘아직 멀었다.’
슬슬 수치가 상승할수록 그에 따른 반작용이 나타났다.
시야가 흐려지는 건 당연했고, 누가 뼈를 뭉개고 살을 찢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이제부터가 응축의 단계다.
‘크윽!’
찬영의 눈앞이 점점 흐릿해져 갔다. 그는 억지로 눈을 떴다.
자칫 여기서 정신을 놓으면…….
‘난 죽어.’
두려움이 덜컥 이성을 메웠으나, 이 순간 뭘 해야 할지 수없이 머릿속으로 반복 훈련해 왔다.
‘심법에 의지해야 해.’
두려움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가진 바 전부를 걸었으니.
‘내가 가진 것에 확신을 가져야 한다.’
14만mp.
이제 몸이 고통스럽다 못해 불덩이처럼 뜨겁다. 원하지 않아도 몸이 파르르 떨린다. 아슬란을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겨워서 당장 놓고 싶을 지경이다.
‘……예상했잖아.’
이미 몸은 한계치다.
사실 이 정도 마나에 몸이 터져 나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다.
하지만 버틸 수 있는 건 마법진과 아슬란이 일체화된 덕분.
총 세 개의 매개가 어마어마한 마나량을 가두는 감옥이 된다.
‘조금만…… 더!’
20만mp를 넘은 상세 데이터가 보였지만 그것도 잠깐, 이젠 눈꺼풀 떨리다 못해 내려앉은 덕분에 시야 확보가 불가능하다.
‘방출하고 싶어.’
이 고통을 끝내고 싶다는 본능이 고개를 든다.
‘아……니, 안 돼……!’
하지만 본능을 꾹 누르고 이성은 단 하나만 생각했다.
‘기, 기다려……야 해!’
마나 수치가 정점이 되기만을!
* * *
순차적으로 마나 탱크에서 찬영에게로 마나가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나 탱크들이 활성화된 것이 홀랜드의 눈에 띄었다.
“됐어.”
마나가 완벽히 주입된 게 확실하다.
한데…… 왜 움직임이 없지?
홀랜드의 눈빛에 이채가 흘렀다. 불길했다.
‘하지만 다가갈 수 없어.’
이런 마나 흐름 속에 괜히 다가갔다간 마나 흐름을 혼란시켜 엑스가 일어날 확률이 높다.
소리, 소리라도 질러야 한다.
“일어나시오! 아티팩트! 아티팩트를 사용해야 해!”
제발…….
홀랜드는 여신에게 기도했다.
지금이야말로 하늘의 운이 간절하게 필요한 때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