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
194화
‘그에게 데려가 달라고?’
찬영은 자연스레 그라스를 쳐다봤다.
그 순간 구드가 땅에 흘렸던 핏물들이 한 방울씩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츠츠츠!
바람의 흐름이 바뀌고, 마나가 들썩였다.
동시에 허공으로 모여든 핏물.
그 피는 그라스의 창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회전했다.
“그대가 그런 것인가?”
빠르게 창을 쥔 그라스가 외쳤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자 다른 레오족들이 움직이려 했다.
“움직이지 말게, 우선 얘기부터 들어 보지.”
신중한 그라스가 그들을 만류하면서 자신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굳이 그 질문에 대답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백 마디 말 대신, 지금 자신의 머릿속에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직접 만나는 게 나을 거다.
-……어서, 그에게.
‘서두를 거 없어. 이미 그에게 다 왔으니까.’
찬영의 걸음은 정확히 그라스의 앞에 머물렀다.
그라스의 눈빛에 의아함이 가득하다.
‘하긴, 궁금하겠지. 이 일련의 상황이…….’
그의 반응은 당연하다.
이 상황에 대해 확실하게 언급 받은 건 오로지 자신밖에 없으니까.
-레오족에게 잠들어 있던 열 세 번째 별, 주홍색 별의 등장 조건이 완성되었습니다.
열세 번째 별의 개방이 레오족에게 잠들어 있을 줄이야.
아마도 이번 별은 레오족과 관련이 있는 인연이었던 게 틀림없다.
유산을 남긴 주인공이 레오족의 선조이거나.
-사명이 열쇠로서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리고 그 조건의 완성은…….
‘……나였다.’
이건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고 그라스에게나 자신에게나 뜻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뜻밖이라는 건 말 그대로 갑작스럽다는 것이고, 이번엔 좋은 의미의 ‘뜻밖’이었다.
주홍의 별이 무엇을 가져오든, 그건 그라스와 그 동족들에게 긍정적 변화를 일으킬 거라는 것이 분명하니까.
“날 잡아요.”
그는 반드시 자신의 손을 잡아야만 한다.
점점 강렬해지는 빛 사이로 손을 뻗었다.
그라스는 주저하며 물었다.
“무슨 일을 일으키려는 거지?”
“일을 일으키려는 게 아닙니다.”
“그럼, 이 바람과 마나의 흐름은 대체……?”
“전조입니다.”
“전조?”
“레오족의 후예들이 온전히 받아야 할 유산이 다가오고 있다는 전조……!”
더 해 줄 이야기가 없었다.
이게 사실이었고, 그 힘의 뜻을 이어받는 건 그라스였다.
“그대를 뭘 믿고?”
그라스가 나직이 물었고 이 순간 반드시 필요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럼 당신의 선택을 믿으십시오. 느껴질 겁니다.”
그가 정말 주홍색 별의 유산을 이어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유산은 그에게 말할 것이다.
자신의 손을 잡으라고……!
‘이젠 당신의 몫이야.’
찬영이 그라스를 조용히 기다렸다.
할 수 있는 설득은 전부 했고 고민의 시간은 그에게 주어졌다.
남은 건 그저 기다리는 것일 뿐.
서서히 그라스의 눈동자도 환한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영원할 태양들이여!”
이내 그가 중얼거렸고 찰나 간 번쩍거리는 빛무리가 그라스에게 터져 나왔다.
이 순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 목소리를 남긴 존재가 그라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그때 그라스가 입을 열었다.
“영혼의 불이 꺼지지 않으면 태양은 다시 떠오를 것이다.”
흐름이 바뀌는 게 느껴진다.
그 생각이 맞았던지 그라스의 눈동자가 다시 본래의 색으로 돌아왔을 때 그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터벅.
고작 한 걸음일 뿐인데 아주 멀었던 거리가 좁혀진 기분이다.
“동족의 번영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그대의 손을 잡겠다.”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설마?”
대답과 함께 그라스의 억센 손을 맞잡았다.
번쩍!
주홍빛이 시야를 뒤덮었다.
* * *
빛이 머무른 동안 그라스는 영원할 태양들 중 하나, 즉 육신은 죽었으나 영혼은 동족의 곁에 남은 한 선조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주홍색의 별을 이어 받을 나의 후예여.
-십팔단일창十八斷日槍과 용일심법涌日心法의 유산을 전할 수 있어 다행이노라.
-이 유산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그대의 명예가 하늘에 닿았고 뜨거운 태양의 피가 나를 사명에게 이끌었으니……. 레오족의 번영이 다시 시작될 것이다.
그라스는 주홍색의 유산이 이끄는 대로 자신이 쥐고 있는 창을 따라 몸을 내맡겼다.
* * *
찬영은 빛 속에서 창을 휘두르고 있는 그라스의 곁에서 떨어져 빛 속에서 걸어 나왔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요?”
구드 곁에 남아 있던 라우켄이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찬영이 대답 전에 거친 숨을 쌕쌕 거리고 있는 구드를 내려다봤다.
‘……전화위복인 건가?’
모두에게 통용되는 이야기인 것 같다.
한 순간 뉴 빌드가 깔아 놓은 덫에 서로를 향해 창을 겨눴던 그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구드는 목숨을 건졌고 그라스는 주홍색 별의 유산을 얻었다.
그라스로 인해 그 유산은 레오족의 전수되겠지.
“유산을 전수 받고 계십니다. 이 과정이 끝나면 레오족은 잃어버렸던 유산을 다시 손에 쥐게 될 테죠.”
이해 못한 라우켄이 더 질문하기 위해 입을 떼려 했으나 그 순간 그라스가 빛의 물결 안에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라스 님.”
“난 괜찮네, 라우켄.”
대답과 달리 창백해진 그라스가 쥐고 있는 창에 기대며 무릎이 풀렸다.
하지만 찬영은 그의 입가에 은은하게 맺힌 미소를 발견했다.
유산을 온전히 얻은 모양이다.
‘이로써 다섯 번째 유산인가?’
열 세 개의 유산 중 다섯 개라.
언제 달성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던 목표에 차츰 다가가고 있는 게 느껴진다.
“괜찮으십니까?”
그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상쾌하네. 선조들의 유산을 이어받은 날, 몸도 마음도 불편할 리 없지.”
그는 처음과 달리 좀 더 호의적이었고, 경계도 풀어져 있었다.
오히려 이제 그의 눈빛에 담긴 건 호기심인 것 같다.
그 생각이 맞았는지, 그라스가 질문해 왔다.
“그분이 말씀하시더군. 사명에게 이끌었다. 내 생각이 맞다면 사명은 그대를 뜻할 테지. 아닌가?”
“맞습니다.”
“그럼 사명이 대체 무엇을 뜻하는 거지?”
“자세히 하면 아주 긴 얘기가 될 것 같습니다만……. 단순히 말씀드리면.”
더는 차원의 돌을 탐색할 필요가 없기에 찬영은 렌즈를 해제했다.
“갓피스……!”
갓피스의 표식에 관한 건 오랜 세월, 다른 종족에게도 알려진 모양인지 그라스조차도 금방 눈동자의 표식을 알아보았다.
“사명은 저를 뜻합니다.”
“그랬군.”
“놀라셨습니까?”
“물론일세. 우리에게 전해져오는 이야기가 그대로 실현되는 게 아닐까 싶군.”
“이야기요……?”
“우리 레오족에게 갓피스란, 편견 없이 화합을 가져올 희망의 존재로 전해지고 있지. 어쩌면 오늘이 그 시작점이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
“그럼 진작 보여 드릴 걸 그랬습니다.”
찬영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그러자 그라스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옛 이야기는 옛 이야기일 뿐, 내게 보여 줬다고 하더라도 크게 달라지진 않았을 것일세.”
그가 달라진 창을 쳐다봤다.
찬영도 그 시선을 쫓아 창을 살폈다.
“외관이 달라졌군요.”
그의 창은 단순히 철로 만들어졌던 것이었는데 더는 단순한 장창이 아니었다.
라이트 랜스에 가까웠던 창은 이제 창대가 주홍빛을 띤 금속 재질로 둘러져 있었고, 더는 찌르기에만 능하지 않아 보였다.
창대 전반부에 도끼날이 붙어서 폴암과 랜스의 장점을 섞어 놓은 창이 됐다.
유산의 기술을 사용하는 데 능한 무기이리라.
“궁금한가 보군. 무슨 변화가 있었는지 한번 볼 텐가?”
“그래도 되겠습니까?”
계속 찾아 헤맸던 또 다른 별의 힘이 궁금한 건 당연했다.
“이 변화의 시작은 그대였으니, 충분히 볼 자격이 있지.”
“그럼…….”
찬영은 곧이어 그의 창을 받아 들었다.
- 바딘의 궁니르
세트 형 : 바딘의 용일심법 보유 시 더스크 어택 발동
-가치 : 6,900
-효과 A : 10회 적중 시 소유자 공격의 2배 효과.
-효과 B : 1초당 마나 540 소모 시 궁니르의 공격 속도 50% 상승(중첩 불가)
-효과 C : 마나 1,200 소모 시 빛의 발톱 발동(단, 레오족이 장착했을 경우)
‘주로 공격 속도에 기반한 무기구나.’
워낙 공수 전환이 빠른 그들의 창법에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레오족이 아니라면 탁월한 효과를 낼 수 없는 무기다.
‘그의 움직임을 제대로 보완해 줄 거야.’
찬영이 그라스에게 창을 건넨 후 말했다.
“이제 우리의 대화도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인 것 같군요.”
“그렇겠지.”
“결정은 내리셨습니까?”
여러 가지 일이 있었으나 그럼에도 그라스가 길을 막아서겠다고 한다면 더는 자신도 도리가 없었다.
“우선 그대의 등장으로 구드의 순결한 명예도, 유산도 모두 다시 회복할 수 있었네. 고맙군.”
이어서 그라스가 신중히 말했다.
“충돌은 없을 걸세.”
실로 어마어마한 결정이었기에 찬영은 진심으로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제야 조금 긴장을 놓을 수 있을 것 같다.
“고맙습니다.”
그의 결정이 너무 고마웠다.
‘어려운 일이니까.’
그간의 증오를 내려놓고 새 출발을 하겠다는 약속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없다.
어쩌면 레오족에게 반발이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때, 곁에 있던 라우켄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바람 발톱 라우켄, 그 결정에 함께 하겠습니다.”
“고맙네, 라우켄.”
고개를 까딱인 그라스가 다시 찬영을 쳐다봤다.
“하지만 조건이 있네.”
“무엇이든 수용하겠습니다.”
“이 일이 끝나면, 나를 그대의 왕에게 데려가 주게. 우리 동족의 안위를 보장할 서약을 하고 싶네.”
찬영은 그제야 그라스가 꿈꾸는 미래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왕과 협상하려는 것이었구나.’
레오족은 개체 수가 적고 특별한 보살핌이 필요한 종족이다.
왕의 도움을 받는다면…….
그들의 재건은 다시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난 왕이 아니야.’
쉽게 대답하기 힘들었다.
고민을 눈치챈 건지 그라스가 말을 걸어 왔다.
“그대는 단언할 수 없는 미래를 걱정하는군.”
“어떻게?”
“창을 쥔 지금, 그대의 마음이 느껴지네. 놀랍게도…….”
지수가 경험했던 일방적인 동화同化 현상이 그라스에게도 이뤄지고 있는 모양이다.
찬영은 이에 대해 그에게 설명한 후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왕이 아니기에 드릴 수 있는 약속만 합니다.”
“듣고 싶군.”
“만약 왕께서 당신들의 뜻을 거절해 충돌 상황이 일어난다면…….”
잠시 말끝을 흐렸던 찬영이 그라스를 바라봤다. 기다리고 있는 그는 단순히 생존을 바라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건 평화와 또 다른 개체로서의 자유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것들이 이들에겐 약속이 이뤄져야만 하는 것들이야.’
그건 옳지 않다.
그러니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들의 뜻에 동조할 것이다.
“……어떤 상황이든, 어떤 조건이든 구애 받지 않고 저는 당신들의 편에 서겠습니다.”
이게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약속이고, 가진 바 역량으로써 보여 줄 수 있는 사력을 다한 신뢰다.
“그대의 말이 옳군.”
그라스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인간들은 모두 똑같지 않아.”
찬영은 그 한마디에 기분이 묘해졌다.
증오로 가득하던 그들의 마음을 바꿨기 때문일까?
그래, 그것도 그렇지만 사실은 인정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
‘제대로 된 사람으로.’
찬영이 마주 웃었다.
안도가 섞인 미소이기도 했다.
이제 이 소식이 샤브레에게 향했을 때 자신들은 비로소 목표했던 해안가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 * *
“……좋은 소식이군요.”
샤브레가 미소 지었다.
에머리 경이 찬영과 통신을 나눈 후 샤브레에게 선발대의 상황을 알린 덕분이다.
“예, 루아 장벽을 넘어 계속 전진 중이라고 합니다.”
낭보를 전하고 있는 에머리 경의 표정은 무척 딱딱했다.
샤브레도 위화감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레오족도 합류한 건가요?”
“예, 그런 것 같습니다. 홀랜드 경에 의하면 약속한 시일 내에 해안가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합니다.”
“부상자는 없다던가요?”
“오리엔트 병력에는 전혀 피해가 없지만……. 갓피스가 조금 부상을 입은 것 같습니다.”
“크게 다친 건가요?”
“자세히 언급하지 않은 걸 보면 금방 나을 부상인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요.”
샤브레는 엷게 미소를 머금었다.
내색하지 않았으나 가슴이 두근거렸다.
암담한 미래 속에서 양찬영, 그의 합류로 인해 최악의 현실이 변화하고 있었다.
모든 소식이 낭보였다.
에머리 경이 마지막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는.
“그런데 공주마마.”
“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에머리 경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샤브레도 조용히 입술을 닫았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