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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자동보상-192화 (192/248)

# 192

192화

레오족 세 명이 언덕을 내려와 적당한 간격을 두고 자리에 섰다.

찬영도 천천히 손을 내렸다.

‘이들이 레오족……?’

사자의 눈동자와 황금빛 갈기를 가진 그들 중 하나는 오로지 적의밖에 느껴지지 않았고, 다른 한 명은 호기심과 적의, 가운데 선 한 명은 쉽게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이자가 리더야.’

오랜 탄압을 받고도 여전히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제어할 수 있다면 범상치 않은 인물인 건 확실하다.

“그대는 누군가?”

찬영이 리더로 생각한 그라스가 말했다.

“양찬영이라고 합니다.”

그라스는 그의 이름이 대륙 공용어로도 쉽게 발음하기 힘든 이름이라는 걸 느끼며 말했다.

“이름을 묻는 것이 아니다. 왜 인간이 이곳에 나타난 것인지 묻는 것이다. 너희들의 장벽을 수복하러 왔나?”

찬영은 잠시 말을 멈췄다.

‘중요한 순간이야.’

이 질문을 통해 그는 자신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게 틀림없다.

하지만 사실대로 수복하러 왔다고만 말한다면?

‘싸움을 피할 수 없어. 내 말을 들을 하지 않겠지.’

찬영은 그보다 더 나은 말을 고민해 대답했다.

“수복이라고 표현하진 않겠습니다.”

“그럼?”

“여길 넘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우린 당신들의 적이 아니니까요. 제 적은 당신들의 너머에 있습니다.”

“이상한 일이군. 그대의 적이 우리를 구속으로부터 풀어 주었는데?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타 종족을 존중할 줄 아는 인간들이더군.”

“인간에게 적의가 있는 당신들을 이용하는 것뿐입니다.”

“이용이라……. 자유를 박탈당해 이용당할 바엔 자유를 선물한 그들에게 이용당하는 편이 낫겠지.”

“그러다 모든 게 사라진다면요? 다시 멸망이 찾아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찬영이 계속 말했다.

“그들의 목적은 세상의 멸망입니다. 동족의 미래까지 자유라는 명목으로 그들에게 내주실 겁니까?”

지켜보던 구드가 참다못해 외쳤다.

“닥쳐라! 인간은 늘 우릴 노예 취급해 왔다. 이제 와서 멸망을 막기 위해 도와 달라고?”

“소수의 악한 인간이었을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신들이 여전히 명맥을 잇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흥, 뻔뻔하긴!”

그가 찬영의 목덜미에 창을 코앞까지 들이밀었다.

“이래도 계속 입을 놀릴 것이냐?”

“…….”

찬영은 당장 찔릴 것 같은 창날 앞에서 담담함을 유지했다.

창에 찔릴까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머릿속이 차가워진다.

“예, 그래도.”

찬영의 대답에 한동안 그를 노려보던 구드가 이를 꾹 다물며 한 걸음 물러났다.

“그라스님 덕분에 물러나는 줄 알아라.”

구드는 끝까지 찬영을 노려보며 그라스의 곁에 다시 섰다. 다시 제자리에 선 구드는 궁금했다.

“왜 말리지 않으셨습니까?”

“난 그대의 형제일세. 누구보다 그대를 잘 알지.”

신중하게 행동할 거라 믿었단 그라스의 이야기에 구드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그럼, 이제 제 말을 믿으십니까?”

지켜보던 찬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물어보면서도 걱정이 됐다.

‘이들이 인간에게 가진 적대감은 상상 이상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있다.’

움직이지 않고 관망한다는 건 대화할 여지가 있다는 얘기니까.

한동안 침묵하던 그라스에게 중후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적이 아니라고 했나?”

“예.”

“그럼 증명부터 해라. 그 후에 대화가 시작될 것이다. 구드, 당장 락슨을 데려오게나.”

“예.”

구드가 움직였고 찬영은 꽤 오랜 시간을 제자리에 선 채 침묵과 함께 기다렸다.

얼마 뒤 그라스의 어깨 너머로 비명이 들렸다.

“으헉, 안 돼! 이거 놔!”

비쩍 마른 남자였다.

제대로 된 식사도 못한 것처럼 보인다.

남자는 억센 구드에게 질질 끌려와 바닥에 철퍽 넘어졌다.

주변을 빠르게 살핀 그가 엉망인 몰골로 찬영을 발견했다.

“어억, 살려 주시오, 제발! 이 몹쓸 야만족들을 다 죽여 버리란 말이요! 사례는 후하게 하겠소. 사례는…….”

말을 잇던 남자의 볼 위로 레오족의 창대가 날아갔다.

퍽!

다시 기절하며 철퍽 쓰러진 남자와 함께 그라스가 찬영에게 물었다.

“이자는 우리 종족의 소녀들을 무참히 유린하고 나아가 처참하게 죽인 인간이다. 자유를 얻기 전까지 우리 종족은 이런 일을 한두 해 겪은 게 아니지.”

찬영은 그 말을 듣고 락슨이라 불린 남자를 쳐다봤다.

사실대로라면 몹쓸 인간이다.

하지만 그가 자신에게 그걸 이해해 달라 부른 건 아닐 테고, 원하는 게 뭘까?

“그래서요?”

질문을 던지자마자 그라스가 대답해 왔다.

“동족을 죽여 보게. 그럼 믿어 주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에 있던 레오족들이 몰려와 찬영과 락슨의 주위를 빼곡히 둘러싼 채 창들을 겨눴다.

‘……이런!’

찬영의 눈빛에 당혹스러움이 실렸다.

“왜, 대답이 없는가? 시간을 끌 생각이라면…….”

그라스가 찬영의 선택을 재촉하면서 자신의 창을 콱 움켜쥐었다.

찬영도 그의 창을 쳐다봤다.

경계로 가득해 보인다.

“아뇨,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오히려 생각이 더 확실해졌습니다.”

“좋군, 이제 어떻게 할 텐가?”

“전 그를 죽이지 않을 겁니다. 죽여야 마땅하지만 적어도 이 자리에서 그의 목숨은 제가 끝낼 게 아닙니다.”

“그럼?”

“여러분들이 하셔야 할 일이죠. 상처를 받은 건 여러분인데, 왜 제가 그 일을 대신해야 합니까? 아니 누군가를 죽이는 일로 제가 증명될 수 있다는 게 더 우습군요.”

찬영은 당당했다.

지켜보던 구드는 배알이 뒤틀렸다.

‘감히 인간 따위가 우리에게 설교를 지껄여?’

자꾸 분노를 억누르려고 해도 이상하게 분노가 스며든다. 구드는 입안이 까끌까끌했다.

어둠의 마법사.

그에게 이식받아 혀 밑에 박힌 돌이 입안에서 걸리적거린다.

이제껏 자신들을 그릇된 힘에 맡기지 말자는 그라스에겐 비밀로 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구드는 자꾸 고개를 드는 분노를 꾹 눌렀다.

‘그라스께서 하실 일이다.’

감정을 애써 제어했지만, 그 순간 서서히 의식을 차려가는 락슨이 보였다.

‘더는 안 되겠군.’

지켜보던 그는 그라스가 찬영과 얘기하는 동안 락슨을 쳐다보며 자신의 혀를 움직였다.

-락슨, 들리느냐. 나를 보아라.

구드의 혀가 닫혀 있는 입안에서 움직였다. 아니, 입이 움직이는 게 아니다.

정신이 락슨을 흔들었다.

정신 지배란 올드 원의 주문이 어느새 구드를 홀리고 있었다.

그러자 정신력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락슨은 구드의 뜻을 이기지 못했다.

-자, 창으로 나를 찔러라. 너의 분노를 내게 풀어라.

구드는 그러면서 힐끗 찬영과 그라스를 쳐다봤다.

이성은 그러지 말라 말한다.

하지만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그라스에게 실망이 느껴졌다.

‘내가 상처 입어야 그도 자신의 생각을 바꾸려 들 것이다.’

인간과 손을 잡고 멸망을 막으려는 건 다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들은 적이다!

이를 간 구드가 슬쩍 자신의 창을 락슨에게 쥐여 주었다.

-그래, 찔러라. 나를 찔러!

정신 지배당한 락슨이 구드를 흐릿한 눈으로 노려봤다.

‘됐다!’

구드는 다음 수순을 떠올렸다.

락슨이 자신을 찌르면, 인간에 대한 증오가 커진 동족은 그라스에게 주장할 것이다.

대화를 끝내라고.

그라스도 이번에는 원하는 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구드는 어느새 차원의 돌에 휘둘리고 있었다.

창이 그의 눈앞에 다가왔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어느새 그의 어깨 너머로 다가온 찬영을.

푸욱!

뚝뚝.

피가 떨어지며 찬영이 자신의 가슴 위에 박힌 창을 내려다봤다.

“……하아.”

렌즈를 통해 구드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는데…….

옳은 생각이었다.

‘더럽게 아프군.’

찬영은 이 순간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다.

희생 없는 평화는 없다.

적어도 그들에겐 말이 아닌 행동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게 강압보다 나은 선택이라 믿었다.

“……괜찮습니까?”

찬영은 조용히 구드를 올려다봤다.

구드의 눈빛이 잠시 적의를 잃고 풀어졌다.

“왜?”

구드가 물었다.

찬영은 대답하지 않고 살짝 비틀거렸다.

“후우…….”

다행히 창은 중요 부위를 비껴갔다. 거기다 근력이 성장하며 견고해진 피부 덕분인지, 창은 깊숙이 살을 파고들지 못했다.

금방 아물 상처다.

‘다행이라면, 다행인가?’

예상보다 큰 대가는 아니었다. 찬영은 눈을 돌려 멍하니 서 있는 구드를 쳐다봤다.

구드는 혼란스러운 눈빛이었다.

“그들에게 돌을 이식받았습니까?”

찬영이 레오족이 다가오기 전에 구드에게 넌지시 물었다.

동시에 구드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아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그 돌을 이식받았다는 것과 그 이식이 당신을 위한 게 아니라 그들을 위한 선택이라는 겁니다.”

“난 종족을 위해 힘이 필요했어.”

“잘 생각해 봐요. 당신을 도운 그들이 정말 당신을 위해 그 힘을 준 건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우린 너희들에게 복수할 수 없단 말이다!”

“어리석긴, 당신의 복수심이 뒤에 남을 동족들의 안전보다 중요합니까?”

그 질문을 던졌을 때 구드의 눈동자는 더욱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머릿속에 고문했던 인간들의 모습들이 빠르게 스쳐 간다.

‘날 또 다시 이용하려 한다.’

‘놈은 저 거짓된 혀로 나를 흔들어 놓는 것이다.’

그 생각들이 넘치기 시작하자 구드의 눈빛에 비춰진 찬영의 모습은 더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를 위협하는 괴물 같았다.

“닥쳐!”

분노로 물든 구드의 눈빛은 이미 이성을 잃었다.

보랏빛으로 물든 눈동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파밧!

구드는 순식간에 발끝으로 창을 차 올려 손으로 낚아챈 후 반쯤 실성해 있던 락슨의 심장을 내리 찍었다.

“커헉!”

꿰뚫린 창을 락슨이 떨리는 눈가로 내려다보더니, 옆으로 기우뚱 쓰러져 버렸다.

쐐액!

구드가 멈추지 않고 락슨에게서 창을 뽑았다.

다음으로 그의 시선이 향한 건 당연히 찬영이었다.

“……그 혀를 잘라 주마.”

찬영은 그를 조용히 지켜봤다.

‘이성을 잃었어.’

방금 전까지 자신을 도왔냐고 질문했던 잠깐의 고민 섞인 눈빛이 씻은 듯 사라져 있다.

‘이해가 안 돼.’

그는 분명히 자신의 다음 행동을 고민하고 있었고 그 선택은 신중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 이런 분노는 방금 그 모습과 큰 차이가 있다.

‘이건 그의 모습이 아니다.’

찬영은 확신했다.

장담컨대 그에게 이식되어 있는 돌이 그의 잠재되어 있는 분노들을 끌어내는 게 틀림없다.

‘약한 정신력을 더욱 망가트리고, 끝내 본능에 취해 버리게 만드는 거지.’

특히나 구드 같이 인간에게 학대되어 왔을 존재에게 차원의 돌은 강한 유혹이었을 것이다.

챙!

그사이 구드와 찬영의 사이로 그라스가 뛰어들며 구드의 창을 밀쳐내 버렸다.

“구드! 그대를 구해 준 자일세.”

그의 외침에도 구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흐트러진 균형을 다시 바로 잡으며 대답했다.

“그라스…… 아직도 인간에게 걸 희망이 남았는가? 그대는 지도자의 자격이 없다. 태양의 아들이여, 내 앞을 막지 말라.”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그라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건 구드가 아니다.’

당혹스러워하는 그라스의 귓가로 찬영이 말했다.

“그는 더 이상 당신이 아는 존재가 아닌 것 같습니다.”

“내가 아는 존재가 아니라고? 그게 무슨 말이지?”

그라스가 질문을 던지자마자 찬영이 그라스를 옆으로 밀쳐 낸 후 그 창을 대신 받았다.

챙!

어느새 오른팔에 착용한 스툼이 지잉, 모습을 드러냈다.

스툼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온몸에 장비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며 레오족 앞에 펼쳐졌다.

그다음 순간 찬영이 외쳤다.

“당신들을 풀어 줬다는 그들이 그를 이렇게 만든 겁니다.”

“죽여 버린다.”

구드가 창으로 찬영을 밀쳤다.

찬영은 공격하지 않고 스툼과 헬레로 창을 받아치면서 말했다.

“그를 멈추게 하는데…….”

찰나 간 찬영이 그라스의 시선과 부딪쳤다.

“날 이용해요.”

고민하던 그라스가 라우켄을 쳐다봤다.

“라우켄.”

“그라스의 뜻대로 하십시오. 그게 무엇이던, 저는 당신을 따를 것입니다.”

고개를 조용히 끄덕인 그라스가 자신을 주시하는 동족을 둘러본 후 외쳤다.

“그를 생포해야만 하네!”

“대답…….”

찬영의 손엔 어느새 아슬란이 쥐어져 있었다.

“기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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