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
191화
* * *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프치키 부단장이 중얼거렸다.
“난 예상도 못했소.”
옆에 선 홀랜드가 고개를 저었다.
보면 볼수록 경탄을 넘어 경이롭게 느껴질 지경이다.
‘저 무지막지한 녀석을 압도하고 있다니…….’
엄호 사격을 위해 활을 겨눈 자신들이 무안할 지경이다.
“브레스를 막을 줄은 몰랐습니다. 거기다 늪 주변을 가득 채운 독은 숨쉬기도 힘들 텐데, 어떻게 저렇게 조금의 지침도 없이 움직이는지……!”
프치키 부단장은 연신 감탄했다.
이미 부대는 피하라는 찬영의 고함에 늪지대를 가득 메운 독연을 피해 물러나 있는 상태였다.
“그러게 말이오.”
대답과 함께 홀랜드는 마른침을 삼켰다.
꿀꺽.
아직도 방금 전의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브레스.
몬스터 중에서도 강한 존재들이 가진 강한 공격이다.
숨결처럼 토해 내는 공격은 웬만한 초인이 아니고서야 받아 낼 수 없다.
이제까진 피하는 게 최선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는 아니었다.
‘브레스를 갈라 버릴 줄이야……!’
정면으로 뿜어지는 킹조의 브레스를 정면에서 검으로 갈라내며 그대로 킹조에게 돌진한 찬영은 놈의 왼쪽 머리를 베어 버렸다.
완벽한 힘의 우세였다.
방금 전의 일을 떠올린 그때.
프치키 부단장이 소리쳤다.
“놈이 쓰러집니다!”
홀랜드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포효하던 괴물이 옆으로 기우뚱 흔들리며 서서히 넘어가는 게 보였다.
“맙소사.”
이 친구, 모두를 얼마나 더 놀라게 할 작정인지 모르겠다.
* * *
-크르르.
찬영은 늪지대 위로 쓰러진 킹조를 내려다봤다.
포이즌 브레스에, 질긴 가죽, 나아가 순간적으로 날아오는 거대한 꼬리와 독이 섞인 범위 연기까지…….
‘중화가 가진 자생 해독력이 제대로 도왔어.’
녀석의 독이 몸을 파고들 때마다 중화의 자생력이 독을 해독하고, 몸을 휘도는 마나가 마치 불을 끄는 장맛비처럼 남은 독을 밀어냈다.
날아왔던 브레스는 현재 가진 방어 수단들로 막을 만해서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다만 가장 곤란했던 건 녀석의 질긴 가죽이었다.
‘공격력보다 방어력이 더 높은 녀석이었어.’
오라를 몇 번이나 중첩한 뒤에야 가죽을 벨 수 있었다.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해. 내가 소드 마스터 이상의 단계로 나아간다면 좀 더 강력한 오라가 되지 않을까?’
찬영은 성장에 대한 갈증을 느끼며 반달 형태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유니언을 사용했다면 녀석을 더 쉽게 손에 넣었겠지만, 아쉽게도 신성력의 가치 측정이 놈보다 낮았다.
-쿠륵. 쿠륵.
그사이 반쯤 잘려나가 있는 놈의 목 부근에 멈춰 섰다.
이미 이것으로 놈의 죽음은 확정됐다.
그러나 더 시간 끌지 않고 킹조의 상처에 아슬란을 찔러 넣었다.
푸욱!
‘죽어가는 것보단 이게 더 나을 거다.’
놈의 숨이 곧바로 멎었다.
-킹조의 가죽을 획득하였습니다.
-킹조의 심장을 획득하였습니다.
-킹조의 발톱을 획득하였습니다.
…….
킹조를 죽이고 나온 보상은 꽤나 많았다. 하지만 그중 찬영이 가장 마음에 들어한 건 영약 도안서였다.
-킹조의 울음, 레어급 영약 도안서를 획득하였습니다. 영약 도안서 조건에 맞는 재료 획득 시 완성이 가능합니다.
‘영약 도안서!’
어떤 보상보다 오랫동안 기다려 온 보상이다.
언젠가 나올 거라 예상 했지만 그게 오늘일 줄이야!
‘좀 더 일찍 나왔다면 좋았겠지만…….’
그랬다면 영약 흡수까지 마친 후에 이번 상륙 작전에 좀 더 높은 마나량을 보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저 개인적인 바람이었을 뿐, 보상 자체의 만족도는 어느 때보다 높았다.
‘음, 칼리만의 이빨, 도르문의 눈, 킹조의 심장과 발톱에 가죽까지……. 그럼 필요한 게 두 가지인 건가?’
도안서는 절반 이상 완성된 거나 다름없었다.
남은 아이템을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다른 구역에서 흡사한 몬스터가 나온다면 머지않아 얻게 될 것이 분명했다.
‘수집은 이쯤 해야겠어.’
도안서를 잠시 살폈던 찬영은 주위를 둘러봤다.
뿌연 독 안개가 주위를 가득 메운 터라 시야 확보가 쉽진 않았다.
그래도 킹조가 늪지대와 땅 사이에 가로지르듯 누운 덕분에 늪지대 위를 지날 불룩한 발판이 생겼다.
‘시간이 흐르고 독 안개가 바닥으로 가라앉고 나면 병사들이 건널 수 있을 거야.’
물론 오리엔트 병사들이 이곳을 건너기 전에 레오족이 몰려올 거라는 큰 문제가 있긴 하지만…….
‘내가 해결해야겠군.’
그들도 독연 너머에서 다가올 적을 주시하고 있을 거다.
우르르, 위협적으로 몰려가는 것보다는 가능한 한 대화로 해결할 수 있을지 확인부터 해야겠다.
‘그게 안 되면 생포해야겠지.’
그런 면에서 본다면 차라리 그들의 주의를 끈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들이 전 병력을 몰아 이곳에 도착했다면 더 큰 소모전이나 희생 없이 한 번에 그들을 몰아붙일 수 있을 테니까.
찬영이 독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 * *
그라스는 저 멀리 독 안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분명 인간이었다.’
늪지대에 저런 무시무시한 몬스터가 있는지도 몰랐지만 심지어 그 몬스터를 쓰러트리는 인간을 목격했다.
자신이라면 감히 나설 수도 없는 전투였다.
현재 서 있는 곳은 드넓은 늪지대 반대편 물가.
이곳에서는 독 안개로 짙어진 늪지대 안쪽을 들여다볼 수 없다.
‘좋지 않군.’
정면을 주시하던 그라스가 주변 숲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거진 숲 사이로 활시위를 당긴 동족들이 보인다.
‘어쩌면 이곳이 최후의 저지선이 될 수도 있겠구나.’
물가 밖의 언덕을 넘어서면 장벽 안으로 진입이 가능하다.
이곳이 뚫린다는 건 더는 레오족이 이 일대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얘기가 된다.
‘……그럴 순 없지!’
숱한 고난을 겪으며 얻게 된 자유다.
이대로 동족의 미래를 끝장낼 수 없다.
‘막아야만 한다.’
그라스는 입술을 꾹 닫으며 소리쳤다.
“두려워하지 마라! 형제들이여, 힘을 합치면 견고해진다!”
흔들림 없는 그라스의 고함은 백여 명 남짓한 레오족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라스 님을 따르라! 크아앙!”
구드가 오른팔에 쥔 장창을 치켜들고 포효했다.
그러자 동족들이 사자 울음소리와 흡사한 소리를 내며 울부짖었다.
그 순간 ‘츠츠’ 하고 바닥 긁히는 소리가 들렸다.
“오고 있습니다.”
구드가 외쳤다.
하지만 그라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아니다.
“조금 더 참을성을 갖게나.”
백여 명이 넘는 레오족이 활을 든 채 그라스의 지시를 기다렸다.
정적이 드리워진 그 순간.
츠츳!
열 마리가 넘는 뱀들이 빠르게 안개 사이로 튀어나왔다.
“헛!”
이때 화들짝 놀란 젊은 레오족 하나가 순간의 조급함을 못 참고 활시위를 놨다.
쐐액!
눈 깜짝할 새 날아간 화살이 안개 속을 가른 그때.
그라스가 눈을 부릅떴다.
‘날아간 화살을 누군가 잡았다!’
그의 눈이 순식간에 화살이 날아갔던 궤적을 계산해 외쳤다.
“북동쪽으로 오른발을 디디고 쏴라!”
그라스가 제일 먼저 활을 당겨 쐈다.
그걸 시작으로 일백이 넘는 화살 비가 안개 속으로 쏟아졌다.
쐐애애액!
그러자 안개 속에서 강렬한 푸른빛이 번쩍였다. 그건 마치 하늘 위에 벼락이 번쩍거릴 때의 모습과도 같았다.
건너편에서 푸른빛이 여러 번 번쩍거리더니 다시 고요함이 찾아들었다.
‘실패다.’
그라스는 확신했다.
성공했다면 살아 있는 것의 신음이 들렸어야 정상이다.
“레오족이여, 창을 들라! 우린 성난 무리이다! 굴복을 증오하고 노예의 삶을 더는 원치 않는다! 노예로 살 것인가, 두려워하고 죽을 것인가! 나는…….”
창을 고쳐 쥔 그라스의 갈기가 바람결에 흩날리고 그의 창끝이 저 너머 안개 속을 향했다.
“태양의 아들로 남을 것이다! 크앙!”
그라스가 포효하며 창을 고쳐 쥐었다.
저벅저벅.
그 순간 안개 속에서 그림자가 걸어 나왔다.
투툭, 한 손에 쥐고 있던 화살을 반으로 부러트리며 완전히 걸어 나온 찬영.
‘저들인가?’
찬영은 아슬란을 고쳐 쥐며 언덕 능선을 따라 위협적으로 서 있는 레오족을 올려다봤다.
눈빛만 마주했는데 강한 적의가 느껴진다.
‘첫 대면치고 최악이군.’
그런 생각을 하며.
지잉.
아슬란을 포함해 가진 장비는 렌즈를 제외하고 모두 해제시켰다.
‘저건?’
렌즈를 놔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후 손을 들었다.
‘난 싸울 의사가 없어.’
찬영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동시에 라우켄도 그 신호를 눈치채고 그라스에게 말했다.
“그라스 님, 저자가 무기를 거두어들였습니다.”
방금 전까지 주위를 호령했던 그라스의 눈빛에 이채가 흘렀다.
이런 상황은 예상 못 한 것이다.
“그래, 나도 보고 있다네. 구드, 어떻게 생각하나?”
구드는 여전히 강경했다.
“인간은 우리의 적입니다. 굳건한 결의를 선의로 약하게 만들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대는?”
그라스가 라우켄을 쳐다봤다.
젊은 라우켄은 구드를 한 번 살핀 후 심사숙고해 말했다.
“저는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라스 님, 우린 그의 실력을 보았지 않습니까? 마음만 먹는다면…….”
“약한 소리 하지 마라! 라우켄!”
“하지만 구드 님.”
지켜보던 그라스가 구드를 진정시켰다.
“그대의 결연과 용맹함은 충분히 잘 아네, 구드. 하지만 내 생각은 라우켄과 같네.”
구드가 분한 표정을 지었다.
못마땅한 눈치를 알긴 하나 그라스도 별도리가 없었다.
‘구드, 난 동족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네.’
자유를 얻은 후, 점점 그런 생각이 짙어진다.
“구드와 라우켄만 나를 따르라.”
“예!”
“……좋지 못한 선택이십니다.”
“그거야 두고 보면 알지 않겠는가?”
그라스가 창을 거두며 대답했다.
* * *
구드는 라우켄과 그라스의 뒤를 따라가며 눈빛이 가라앉았다.
‘호의를 베풀고 계신다.’
태양의 아들 그라스의 생각이 바뀌었다는 게 이번 결정으로 더 확실히 느껴진다.
‘대체, 왜?’
구드는 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수많은 세월을 우리들의 조상들은 험한 세월을 견뎌야 했다.’
인간들은 포악하고 개체수가 많은 것을 앞세워 다른 종족을 노예로 삼아 버린다.
언제든 이익에 따라 맹약을 깨고 배신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들에게서 명예 따위는 찾아볼 수조차 없다.
‘내가 본 인간은 온통 그런 자들뿐이었다.’
그라스도 그걸 보고 들으며 자란 세대다.
‘그런데 어떻게 호의를 생각할 수 있단 말입니까?’
구드는 단단한 이를 콱 닫았다.
‘그의 생각을 바꿔야만 한다.’
그라스는 현재 동족들을 이끄는 지도자다.
그렇기에 동족의 안위를 더 안정성 있게 유지하기 위해 인간에게 호의를 베풀고, 더 나은 미래를 고민하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겁니다, 그라스.’
변할 거라면 진작 변했을 자들이었다. 자신은 인간들이 변할 거라는 희망을 아주 오래 전에 포기했다.
‘그러니 그들도 멸망으로써 대가를 치러야만 해!’
구드는 이 생각을 어둠의 마법사와 조우했을 때 더욱 결연히 다질 수 있었다.
자신에게 자유를 선물해 준 어둠의 마법사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미련이 남지 않으려면 모든 걸 희생해야 하지. 힘이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내주겠네.
‘뭐든 달라고 했다. 인간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그들에게 복수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구드가 원하는 것을 아무 조건 없이 내주었다.
그 후 인간은 자신의 뜻에 따라야만 했다.
힘이 센 자들도, 감히 자신의 뜻을 저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이 힘을 동족의 지도자에게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럴 수밖에 없을 상황을 조성하는 수밖에…….’
그라스의 눈동자가 잠깐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다시 본래의 색으로 돌아갔다.
그의 시야에 우두커니 서 있는 찬영이 보였다.
‘네놈이 뭘 하던 우리 동족을 다신 멋대로 이용하게 만들진 않을 것이다!’
그라스는 찬영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뚫어지게 노려봤다.
설사 구드가, 아니 그라스 자신이 원치 않는 일이라 할지라도 이건 동족을 위해 해내야 하는 일이다.
다시 인간에게 속아 그들에게 호의를 베푼다면 복수 따윈 생각할 수 없다. 또다시 레오족은 불행한 미래에 휩싸여 버릴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