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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자동보상-187화 (187/248)

# 187

187화

카드는 이번에도 세 장.

눈앞에 붉은색, 파란색, 하얀색이 나왔다.

‘어느 카드를 뽑는 게 나을까?’

이제 과거와 달리 카드를 뽑는 목적은 정확해졌다.

단순히 인연 성립에만 있는 게 아니라 홉스 일원의 마지막이 어땠는지를 알게 되는 게 목적이다.

그렇게만 되면…….

‘홉스 소속 갓피스들의 실종은 세계의 멸망과 관련이 있어. 그렇다면 그들의 뒤를 쫓는 게 멸망에 대한 진실을 알 수 있는 방법이겠지.’

찬영은 조용히 카드를 응시했다.

그런 면에서 어떤 카드를 뽑는 게 나을지를 고민해 봐야 한다.

‘지금까지의 카드 뽑기를 미루어 봤을 때 하얀색 카드는 노티스 교단의 인물이었어. 그 추측이 맞을 경우 저 흰색 카드 역시 교황과 척진 인물 중 하나일 거야.’

그런 게 아니라면 홉스 소속의 인물들이 나오는 카드에 모습을 드러낼 리 없다.

‘그럼…….’

고민하던 찬영은 하얀색 카드를 제외하고 남은 색 카드들에는 신경을 껐다.

‘당장 싸워야 할 적은 교황이야. 하나라도 더 교황에 대해 알아내는 게 중요해. 교단 인물이라면 교황에 관한 정보가 더 나올 수도 있겠지.’

그 생각이 끝난 순간.

세 장의 카드 중 두 장의 카드가 사라지고 하얀색 카드가 빛을 일으키며 뒤집혔다.

‘누가 나올까?’

시야를 뒤덮는 빛에 찬영은 자동적으로 눈을 감으며 곧이어 달라질 주위 풍경을 고대했다.

* * *

빛은 금방 사라졌고 곧이어 주위를 가득히 메운 건 핏빛처럼 붉은 사위였다.

아니, 주위가 붉은 게 아닌 것 같다. 이건 핏물이 떨어지며 시야를 뒤덮은 거다.

‘시작부터 험난하군.’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성한 교단의 뜻을 거절한 대가는 크다. 모스.”

그 말로 추측할 수 있었다.

‘모스란 자의 삶인가?’

베오 루퍼와 라인쉐리어 등을 거쳐 오면서 이젠 타인의 삶을 관망하는 게 익숙해졌다.

찬영은 지켜보기로 했다. 그가 무엇을 자신에게 전해 줄지…….

그사이 찬영이 사라진 자리를 모스라는 존재가 가득 채웠다.

“교황 아론이시여. 정녕 이것이 여신의 뜻이옵니까?”

입술을 달싹인 모스가 고개를 들었다. 떨어지는 핏물 때문에 몇 차례 눈을 깜빡인 모스는 멈춰 선 노인을 쳐다봤다. 노인이 대답했다.

“그렇다. 너는 불경한 자로다.”

어둠 속에 얼굴을 감추고 있던 교황이 한 걸음씩 횃불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새하얀 관과 예복, 그 위에 주렁주렁 매달고 걸쳐 놓은 화려한 백색의 보석들이 번쩍였다.

“내 너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줄 것이다. 모스야.”

교황이 손을 뻗었다. 하얀 천을 꺼내 피를 닦아 주는 교황을 잠자코 보던 모스가 거친 쇳소리를 냈다.

“불경한 저를 용서하십니까?”

“내가 용서한다.”

“여신께서는?”

“……내가 용서하는 것이 곧 여신께서 용서하는 것이다. 의심하지 말거라.”

교황이 웃었다. 모스가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교황이 모스의 머리를 천으로 쓰다듬었다.

“괜찮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끊임없이 의심한다. 나도 여신께서도 너를 용서하느니라. 그러니 터놓고 얘기하여라. 성물을 가져간 자의 배후가 누구냐?”

“라인쉐리어를 풀어 준 것은…….”

다시 고개를 든 모스가 말을 이었다.

“저, 모스 프레도입니다. 이것이 진실이옵니다. 프레도 가의 유일한 생존자인 저는 성물을 팔아 가문을 일으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불경한 자와 손을 잡았다?”

“예, 신성 기사단의 주교급 고위 기사를 현혹하였습니다. 그래서 놈이 유물을 훔쳤을 때 문을 열어 주는 역할을 맡은 것입니다.”

“끝까지 여신의 뜻이 깃든 내 귀에 거짓을 고하는구나.”

“사실이옵니다.”

“너는 추기경이 된 후로 줄곧 나와 함께 했지. 교황이 된 이후에도 나는 너를 신임했다. 하나 너는 그 어리석은 입으로 끊임없이 내게 거짓을 말하는구나.”

“교황이시여.”

“닥쳐라! 너는 라인쉐리어와 일면식조차 없었다. 네가 열었다고 하는 북문에서는 놈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지.”

“잘못 보셨습니다. 놈은 용의주도하고 이 미욱한 종은 라인쉐리어와 은밀히 만남을 가져왔습니다.”

“그래, 그럴 테지. 그런데 왜 북문이 아닌 동문에서 놈의 흔적이 발견된 것이지? 그것도 놈이 사라진지 나흘 만에 말이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놈은 용의주도합니다. 일이 틀어진 걸 깨닫고 약속한 문이 아닌 다른 문으로 도망쳤을 것입니다.”

교황이 모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어리석은 것아. 어째서 진실을 얘기하지 않느냐?”

“왜 눈 앞에 진실을 놓고도 믿지 않으시옵니까?”

“진실이 아니니까.”

“저는 잡혔고 더는 거짓을 고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니, 나는 알 수 있다. 네 안에 전보다 더 강력한 신성력이 느껴진다. 성녀가 너와 접촉한 것이 틀림없다. 너를 미혹하고 충성을 요구했으며 나의 변화를 보고하라고 했겠지.”

교황은 관을 벗었다.

관이 사라진 교황의 이마에는 보랏빛의 돌이 박혀 있었고, 그 주위로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그래서 네가 보고 들은 것을 얘기했느냐? 나를 모시는 자여?”

“…….”

모스의 침묵에 교황은 다시 관을 썼다.

“당장 너를 죽일 수도 있다. 하나 그러지 않겠다. 네가 네 입으로 사라진 유물의 배후에 성녀가 있었다는 걸 밝히기 전까지는 살아도 산 것 같지 않게 해 주마.”

“자결을 걱정하진 않으시는군요.”

“너는 끊임없이 의심하는 자지. 하나 의심이 사라지고 여신의 뜻에 감복하면 누구보다 교리를 위해 충성할 자다. 너는 이미 네가 내 변화를 감지한 것이 여신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으냐?”

“그것은…….”

“변명할 것 없다. 너는 충실한 여신의 종, 그러므로 교리의 뜻에 위배되는 자결은 썩 걱정하지 않는단다.”

교황은 모스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럼, 또 오마.”

미소를 지은 교황이 다시 사라졌다.

그리고 그나마 켜져 있던 횃불마저 사라졌다.

그 순간 모스 프레도가 웃었다.

“성공했구나.”

그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진 그때.

관망하던 찬영에게 한 줄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모스 프레도. 오랜 시간 교리를 따르고 교단에 몸담아 왔으며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교황을 따라왔다. 내 사십 평생 그러했다.

찬영은 조용히 모스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추측한 대로 하얀 카드는 교단의 사람이었다. 모스 프레도는 베아트리체와 손을 잡았던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교황과 한때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던 존재일 줄은 몰랐다.

‘교황의 우군이었으나 적이 되었다?’

이렇게 되면 지금 들려오는 그의 이야기를 통해 교황에 대해 더 깊숙이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중요한 진실 하나를 알게 됐다.

‘교황의 몸에 차원의 돌이 박혀 있다는 것 또한 알게 됐으니까…….’

시작부터 어마어마한 진실이 드러난 지금, 찬영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도 놓쳐선 안 돼.’

이제부터 그가 들려주는 말은 빠짐없이 기억해야 했다.

어차피 그의 기억이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쳐 가며 동화되어 가고 있긴 했지만…….

-교황님의 변화는 내가 모르는 새 시작되고 있었다. 무엇이 그분을 변화시켰는지는 모르나 어느 시점부터 그분이 달라졌는지는 알 수 있다. 언젠가부터 악몽에 시달리셨던 그분은 늘 내게 말씀하셨다. 지켜야 하는 게 있는 것이 더 큰 두려움을 만든다고…….

잠시 후 목소리가 멈췄다.

그 틈에 문득, 한때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켜야 할 게 더 큰 두려움을 만든다……? 그래, 나도 그랬지.’

사실 지금도 그런 생각은 가끔 들기도 한다.

하지만 두려움은 두려움을 낳는다. 두려움에 맞서려면 두려움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인정하면 극복해야 할 방법이 보이기 시작한다.

‘지금처럼.’

그 생각에 이를 때쯤,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변화의 정점은 교황께서 순례를 가신 날부터다. 그분은 신탁을 받았다며 홀로 떠나셨고 돌아오셨다. 어디를 다녀오셨는지는 모르나 그때부터 모든 게 달라졌다.

찬영은 그가 말하는 변화의 정점이 어쩌면 차원의 돌을 통해서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틀림없을 거야.’

홀로 순례를 다녀왔다는 게 의심스럽다.

아마 순례 중에 차원의 돌이 이식됐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반드시 그렇게 했어야 하는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걸까? 지켜야 하는 게 무엇이기에? 나라의 평화? 자신의 안위?’

감이 잡히지 않는다.

좀 더 들어 봐야 해…….

찬영은 모스의 이야기에 다시 집중했다.

-그간 평화롭던 폐하와의 관계부터 틀어졌다. 폐하의 권한을 넘어서기 시작하셨고 교황 이상의 권한을 휘두르기 시작하셨다. 그분을 모시는 내가 이해할 수 없었으니 다른 신관들 모두가 그러했을 것이다.

‘이제 모든 이야기들이 교집합을 이루면서 엮여 가기 시작했어.’

공주가 했던 이야기와 라인쉐리어 그리고 모스의 이야기가 엮여가는 게 보인다.

-난 이해할 수 없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분의 곁에 다가갈 수 없게 됐다. 교황께서는 나 대신 직접 임명한 신관을 늘 데리고 다니셨다. 그는 순례자의 길을 통해 데려온 자였지.

모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는 교황님의 뜻을 따라 교단을 혼란스럽게 했다. 난 교황님과 그의 저의가 궁금했고 내 능력을 사용해 그들을 면밀히 지켜봤다.

‘능력?’

-그건 내게 주어진 축복이었다. 난 살아 있는 모든 것과 교감할 수 있었고, 신성력이 강해질수록 묘하게도 그 교감은 더 증폭됐다.

-그럴수록 좀 더 크고 강한 생명체까지 영향을 뻗칠 수 있었다.

-영향을 통해 나는 그들의 눈을 통해 보고 듣고 그들을 내 의지에 따라 움직이게 했지.

-심지어 그들과 대화도 가능했다.

-무엇보다 이런 신성 마법은 오로지 나만 가능했던 것이었다.

-나는 이를 ‘유니언’ 이라고 불렀다.

-후일 알았다.

-내가 갓피스라는 존재이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유니언.’

그의 말대로라면 앞으로 자신의 그를 통해 얻게 된 또 다른 영혼 버프는 타 생명체의 의지까지 손에 넣을 수 있는 능력일 게 확실했다.

‘그건 그렇고…….’

이제 곧 들려올 모스의 남은 얘기는 교황에 관한 것일 거다.

계속 들어 보자. 모스만큼 교황을 가까이서 보좌한 인물도 몇 없을 테니까…….

-나의 능력, 유니언을 통해 교황의 계획을 들었다.

-교황은 성녀를 제거하고 나아가 교단을 지배해 폐하와 왕세자를 암살하려 했다.

-왕국의 패권을 손아귀에 넣을 계획이었지.

-그러면서 함께 알게 됐다.

-더 이상 그가 신탁도 들을 수 없고, 신성력도 보유하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그때부터였다.

-교황이 아는 것과 달리, 먼저 접근한 건 공주도, 성녀도 아니었다.

-……나였다.

‘교황이 단단히 오해한 거야.’

방금 전 장면으로 보아 교황은 성녀가 모스에게 먼저 접근해 라인쉐리어와 손잡았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런데 교황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찬영은 순간 의문이 들었다.

교황이 성녀가 모든 일을 배후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확신한 이유가 뭘까?

아무 이유도 없이 적대감을 보이며 그렇게 얘기하진 않았을 것이다.

‘베아트리체를 교황이 두려워했던 건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막, 그런 생각에 빠져들 무렵 시야가 흔들렸다.

모스가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게 아니었다.

모스의 고개는 그대로였고 마치 유체 이탈처럼 그의 몸이 서서히 멀어져 가는 걸 느꼈다.

붕, 하고 몸이 떠오르는 걸 알 수 있었다.

떨어져 있는 그의 등이 보였으니까.

‘뭐지?’

강한 이끌림에 의해 끌려가던 찬영은 둥실 날아가 모스의 맞은편에 섰다.

묶여 있는 모스 프레도가 보였다.

그때 모스 프레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틀림없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내가 보여?”

찬영이 물었다.

-보인다. 사명이여, 그대가 나를 찾았구나.

그 대답과 함께 모스의 몸 귀퉁이가 떨어져 나갔다.

츠츠.

그 후 모래처럼 흩어진 그의 일부가 자신에게 날아들어 흡수됐다.

그와 대화를 나눌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건 확실했다.

그는 다른 영혼들처럼 자신의 영혼 아래 동화되어가는 중인 거다.

짧은 시간, 번쩍 든 생각은 하나였다.

“교황의 약점이 뭐지?”

이미 절반이 사라져나간 모스가 입술을 달싹인다.

-그의 약점이라…….

“어서!”

목까지 사라져간 그의 입술이 서서히 달싹인다.

찬영은 그 입을 노려봤다.

‘부탁해.’

그 때 얼굴이 절반이나 사라진 모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지키려 했던 것, 그걸 찾아야 해. 그건…….

저 마지막 얘기만 들으면 될 일이었다.

그것만 들을 수 있다면…….

하지만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다음 순간 눈앞이 어두워진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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